안개 - 영화로 읽는 ‘무진기행’, ‘헤어질 결심’의 모티브 ‘안개’ 김승옥 작가 오리지널 시나리오
김승옥 지음 / 스타북스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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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개

김승옥 각본 | 영화로 보는 무진기행 | 스타북스

오랜만이다. 이렇게 시나리오를 읽으면서 다시금 그때의 심상에 젖는 것은 말이다. 새삼 시나리오가 이런 거였지 하는 생각이 들고, 소싯적에 끄적여 봤던 적 부끄러운 시절이 다시 떠올려졌다. [안개]는 김승옥 작가의 [무진기행]에서 바탕을 두고 쓴 시나리오이다. 이 작품이 작가의 첫 시나리오였다고 하니 그 소회는 아마 남달랐을 것이다. 김승옥 작가는 알고 보니 재주가 참 많은 분 같다. 얼마 전 그분이 직접 그림을 그리고 글을 써서 출판한 에세이 집을 읽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림들이 제법 수준급이었다는 기억이 있으니 말이다.

[안개] 역시 소설 무진기행과 크게 다르지 않다. 시나리오라는 것을 감안해서 읽는다면 충분히 그 속에서도 감정의 선과 복잡 미묘한 서로 간의 거리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이번을 기회로 유튜브에서 무진기행에 관련된 영상을 찾아봤더니 역시 그곳에 있었다. tv 문학관에서 방영한 필름을 오늘날에도 볼 수 있는 행운이랄까? 시나리오와 비교해서 보는 재미도 컸다. 박근형, 김미숙, 여운형 등의 그 시절을 호령했던 배우들은 창창한 모습으로 연기하고 있었다. 참, 세월 무상이다.

기차에서 출발하는 시나리오... 기준은 무진으로 떠난다. 곧 장인어른과 아내의 도움으로 제약회사 전무로 승진할 위치에 있다. 그곳에서 오랜만에 동창들을 만나고 거기서 역시 음악교사로 일하는 하인숙을 만나게 된다. 하인숙은 자정이 지나서 우는 무진의 개구리 소리를 이야기하면서 자신을 서울로 데려다 달라고 말한다. 무진에 있으면 금방 미칠 것 같다고 말이다. 기준은 그런 하인숙이 마음이 걸린다. 그리고 그는 방죽 비탈에서 자살한 술집 여인을 보게 된다. 어머니 산소에서 이슬비를 맞으면서 잡초를 뽑으면서 새삼 효자 행세를 한다고 자조도 해보고 말이다.

기준은 어떻게 해서 하인숙과의 연을 맺는다. 하인숙은 무진을 데려고 나갈 사람으로 기준을 선택하지만 기준은 하인숙의 손을 잡고 같이 기차에 타지는 못한다. 그에게는 이미 아내가 있고, 탄탄한 직장이 보장된 내일이 있으니까... 하인 숙의 바램은 서울에 가고 싶다는 단 그 하나뿐이지만 그는 홀로 무진을 떠난다. 무진을 떠나면서 보이는 당신을 무진을 떠나고 있습니다라는 입간판.... 기준은 하염없이 스스로가 부끄러워진다.

시나리오는 우리를 무진이라는 한곳으로 모여들게 하지만 결국 그곳은 여전히 안개와도 같은 곳이다. 현실에 아무런 영향도 안 미치는 세계... 기준은 무진의 안개가 적병을 연상시키고, 그것이 자신의 암울한 청춘시대를 떠올리게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하인숙에게서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했다고도 한다. 하지만 결국 그것뿐이다. 그곳에서 떠나게 할 수 있는 이는 오직 자기 자신뿐이다. 결국 떠날 수 없는 자는 안개와 같이 살던지, 아니면 술집 여성과 같은 선택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작가 김승옥이 살았던 1960년대의 대한민국의 모습은 아마 이런 것이리라... 어디로 피할 수도, 갈 수도 없는 형국 같은 느낌... 사방에 적이 둘러싸여 있지만 스스로 구할 것은 아무것도 없는 막막함... 그런 현실에서 스스로만 배불리 산다는 것은 아마 무척 부끄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보고도 못 본척한다는 것... 외면의 현실 속에서 1960년대는 그렇게 저물었지만 그 부끄러움이 바로 지금의 일은 아닌지 스스로 되물어봐야 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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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생리학 인간 생리학
루이 후아르트 지음,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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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책자 생리학

루이 후아르트 지음 | 류재화 옮김 | 페이퍼로드

아...ㅎㅎ 산책에 대한 유쾌한 담론을 읽으니 얼른 이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픈 생각이 든다. 날씨가 춥다는 명분을 내세워 방콕하기를 즐겼는데, 이거 안되겠는걸~~ 하는 급한 마음이 든다. 그 유려하고도 화려한 산책자의 세계, 산책자만이 느낄 수 있는 온갖 상상의 나라... 그리고 나를 그곳으로 인도해 줄 충분히 볼거리가 많은 곳으로 떠나고 싶다.

책은 시종일관 유쾌하다. 아마 생리학 시리즈가 거의 다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 하지만 이 산책자 편만큼의 경쾌함은 여타의 생리학에서 느낄 수 없는 것이었다. 이미 경쾌함의 한계를 뛰어넘었다고나 할까? 생각하지 못한 것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해주는 데에는 생리학 시리즈만 한 것은 없는 것 같다. 그것도 이 책들이 지금 쓰인 것이 아니라 19세기 중후반에 살았던 이들의 체험에서 나온 것들이라니, 놀랍다.

바야흐로 산책은 자본의 시대로 넘어왔다. 혁명이니 이념이니 하는 시대는 이미 물 건너 갔다. 모두들 자본, 즉 돈이 최고임을 알고 있다. 더 이상 흙을 밟고 노동하는 것보다는 공장에 취직해서 하루 종일 빛없는 세상에서 일하는 것이 더 돈이 됨을 알고 있다. 그러기에 산책은 아무나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돈이 있으면 있는 대로 또 불편한 것이 산책이다. 산책이라 함은 정해진 방향이나 목표 없이 천천히 거닌다는 것인데, 그렇게 걷다가 행여 흙탕물이라도 비싼 옷에 튀면 곤란하니까 말이다. 그렇다고 마차에서 얼굴만 삐죽 내밀고 거리를 살핀다는 것은 재미도 없고, 멋도 없는 일이다. 산책이라 함은 특정의 자질을 갖춘 이들이 누려야 할 특권 중 하나였다. 가난한 이는 산책에 유리할 것 같지만 그것도 아니다. 먹고살기 위해 하루 종일 일해야 할뿐더러, 일이 없더라도 빚쟁이에게 쫓겨 다녀야 하니 하릴없이 거니는 것은 꿈도 꿀 수 없는 것이다.

산책자의 자질 중 하나는 명랑성이다. 그리고 항상 관찰하는 정신을 지니는 것... 어떤 상점 앞을 지나더라도 산책자는 상상의 나래를 펼 줄 아는 사람이다. 진열대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물건의 생산자로까지 상념을 펼칠 줄 안다. 이쯤 되면 산책자가 아니라 뛰어난 관찰자이자, 아니면 그는 작가이리라...

산책자의 자질 중 하나는 자신을 쉬게 할 줄 아는 의식 상태를 갖는 것이다. 이 또한 독특하다. 정신적으로 건강한 사람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아니던가? 아마 삶에 찌들어있거나 생각이 복잡한 사람은 감히 스스로를 쉬게 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멍 때리기에 능한 사람은 아마도 훌륭한 산책자, 책에서 말하는 산책자라는 아름다운 이름을 소유할 자격이 있는 사람일 듯하다.

영국이나 파리 같은 유럽에 가면 사람들은 해가 나면 모두 햇볕을 쬐기 위해 공원으로 나선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선크림이나 모자다 뭐다 해서 태양을 가리기에 정신이 없는데 말이다. 태양이 인간의 정신을 건강하고 활발하게도 하지만 자외선은 피부에 치명적이니... 정신 건강을 택할 것인지, 피부 건강을 택할 것인지는 아마 스스로의 현명한 선택에 달려있으리라.... 그렇지만 [산책자 생리학]을 읽는 독자는 아마도 태양을 쬐면서 거리를 걷는 것을 택하리라... 산책이라는 그 미묘하고도 아름다운 무효한 일이 이토록 멋진 일이라는 것을 눈치챘다면 말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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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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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 14일

에리크 뷔야르 장편소설 | 이재룡 옮김 | 열린 책들

영웅이란 누구인가? 책을 읽으면서 드는 의문점이다. 흔히들 영웅은 영웅 그 자체로 족한, 그야말로 초인적인 힘과 지혜를 지닌 인간이라고 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영웅은 한 세기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한다는 것... 하지만 이 책을 읽고 영웅의 의미를 달리 생각해 보게 되었다. 영웅이라는 것이 소수가 아니라 다수일 수도 있다는 것... 한 사람, 두 사람이 아니라 무지렁이 민중일 수도 있다는 것 말이다.

책 [7월 14일]은 바스티유 점령 현장을 오롯이 독자에게 데려다준다. 1789년 7월 14일... 그날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사람들은 그저 배고파서, 자기 자식들의 굶주림을 보다 못해서 거리로 나왔다. 그것은 바스티유 점령으로 이어졌고, 바스티유를 지키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들의 싸움으로 번졌다. 그 속에는 어떤 혁명적인 사건이나 이념적인 절대성도 없었다. 대다수의 민중이 문맹이었다. 그들은 자유나 평등 같은 추상적인 개념이 머릿속에 들어있지 않았다. 바스티유에 모인 민중들 대다수는 그저 배불릴 수 있는 빵과 따뜻한 안식처를 원했을 뿐이다.

이 소설은 많은 등장인물의 등장으로 인해 어느 정도는 집중도가 흐려질 수 있다. 하지만 작가가 생각한 중요한 원칙 중 하나가 바로 사람의 이름은 감동을 불러일으킨다였다. 모든 이들의 이름은 하나하나 명시하며 문자로 남겼다는 것... 아마 이 소설의 가치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할지도 모른다. 누구누구의 희생이 단순히 숫자로, 희생자 몇 명으로 호명되는 현실에 비하면 말이다.

역사적 진실과 문학적 추리의 절묘한 조합으로 바스티유의 역사적인 현장의 한 장면이 탄생했다. 그때 그 습격으로 말미암아 어쨌든 민중의 현실을 돌보지 않고 소수의 집단의 배만 불리려는 절대 왕정의 시대는 끝났으니 말이다. 바로 공화정의 시작, 그 이념의 시작이다. 그때의 슬로건이 바로 권력은 만인에게로이다. 만인이 바로 주인공이다. 그리고 그 만인은 민중이다.

대체로 힘이 있는 자는 더 가지려고 한다. 그 힘을 이용해서 자신의 세력을 키우고, 그 기반을 든든히 하려 한다. 왜냐면 그들은 힘의 효능, 그 유효성의 이미 충분히 경험해서 봐서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힘의 방향이 한쪽으로 기운다면 필히 그 그림자는 더 커진다. 바로 힘을 가진 자에게 아첨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권력의 흥청망청에 취한 위정자들은 제대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한다. 힘은 집중이 아니라 분산되어야 한다. 힘의 집중은 언제든 균형을 잃게 한다.

역사적인 주인공들이 이름 한번 제대로 호명되지 못하고 묻히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책 [7월 14일]을 통해 그때 그들이 흘렸던 피의 의미를 다시 되새겨본다. 이는 아직 끝나지 않을 역사인지도 모르겠다. 다시금 우리가 사는 이날에 희생된 모든 알지 못하는 이름들을 불러보고 싶다. 언제고 이런 책들이 나와서 그들의 희생에 이름을 불러주는 것으로라도 보답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값진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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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열린책들 세계문학 283
버지니아 울프 지음, 공경희 옮김, 정희진 분류와 해설 / 열린책들 / 202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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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지음 | 공경희 옮김 | 열린 책들

시대를 지나면서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다. 그것이 소설이든 시이든 우리는 고전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유독 여성작가들의 작품들에 붙는 꼬리표가 있다. 그것은 바로 여성작가, 여류문학가라는 타이틀이다. 왜 남성 작가는 그저 작가라고 칭하면서 여성 작가에게는 그 성별이 왜 그토록 중요했던 것일까? 여자가 이런 것까지, 여자가 이렇게 대단한가... 하는 차별적 발상이 아마 여성이라는 성별의 꼬리표에 그토록 집착한 것이리라...... .

여성 작가이기 전에 한 인간으로서, 그리고 위대한 문학가로 충분히 불리고도 남을 버지니아 울프... 그녀가 이룬 세계는 놀랍다. 여성이라는 울타리 속에서도 끊임없이 자신을 찾는 글을 썼던 울프... 심지어 결혼에 있어서도 그녀가 레너드에게 약조한 두 가지 서약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도 진취적이다. 첫 번째는 부부관계를 요구하지 않을 것, 두 번째는 공무원 생활을 그만둘 것이었다. 레너드 울프는 당연히 그 두 가지 약조를 서약하고 버지니아와 결혼을 하게 된다. 후에 버지니아 울프가 우울증으로 인한 정신병으로 힘들어할 때 혹시나 자신의 선택이 레너드를 힘들게 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에 장문에 유서를 남긴 것 역시 둘만의 사랑과 동반자로의 믿음이 얼마나 끈끈했는지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버지니아의 에세이 [자기만의 방]은 그녀가 어느 날 겪은 차별에서 시작한다. 자신이 강의할 것들을 생각하면서 강의실 주변을 거니는 도중 경비원에게 저지를 당한다. 그 길은 오로지 연구원이나 학자만을 위한 길이라는 것... 그녀의 산책은 거기서 멈추었다. 그녀는 그날의 경험을 자신의 작은 물고기가 숨어버렸다고 서술하고 있다. 또 이어진 차별... 도서관을 들어가려 할 때 역시 저지당하는 울프... 도서관 역시 남성과 동반해서 들어갈 수 있다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살았던 시기의 여성은 그만큼 교육도 없었고, 10대을 벗어나기 전에 원치 않는 결혼을 해야 하는 집 안에서 치워야 할? 존재였던 것이다. 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는 그 시대의 특권층이었다. 그리고 그녀 스스로는 자신의 특권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녀는 생각한다. 자신마저도 이러한데 주변의 수많은 여성이 겪는 차별은 어떠할까?

19세기 여성작가들은 모두 공동 거실에서 글을 써야 했다. 제인 오스틴의 박물관에 전시된 그녀가 글을 썼다던 작은 책상은 그것을 잘 말해주고 있다. 책 한 권 겨우 놓아둘 거실의 티 테이블 같은 곳... 얼른 숨기기 좋게 그곳에서 글을 썼다던 그녀... 그래서 울프는 말한다. 여성들이 소설만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시끄럽고, 집중할 수 없는 환경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말이다.

누구나 개인의 자유와 행복을 갖기 위해서는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과 자기만의 방이 있어야 한다고 말하는 울프... 그래야 글을 써서 생계를 유지하는 작가가 될 수 있다고 한다. 예술은 결코 가난에서 얻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말하는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은 현재 가치로는 2만 오천 파운드, 약 4천만 원 정도가 될 것이다. 현재로 따져도 1인 가정이라고 가정할 때 꽤 넉넉한 금액이다. 돈이 해결되면 이제는 정서적 문제이다. 정서가 안정이 되려면 혼자 조용해 사색할 수 있는 스스로의 공간이 있어야 한다.

버지니아 울프는 남편과의 산책을 은행 잔고에 비유하면서 말한다. 은행 잔고를 영원히 깨지지 않을 행복에 빗대면서 말이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을 영국에서 유일하게 쓰고 싶은 것을 쓸 자유를 지닌 여성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녀가 글을 쓸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은행 잔고와 그녀를 믿어주는 레너드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치부가 드러나더라도 하고 싶은 글을 쓸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있었던 것이다.

돈도 없고, 방도 없는 가난한 예술가들... 여전히 세상에는 존재할 것이다. 그들 중 누군가는 위대한 작가가 될 재목임에도 성장하지 못하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녀가 글을 쓰는 이유는 오로지 그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이 목표였다. 존재가 목표인 사람들은 어찌 됐든 글을 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 그리고 아... 재능 있는 그들에게 돈과 방이 주어진다면 아마 세상은 더 좋은 쪽으로 바뀔지도 모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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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 어느 평범한 학생의 기막힌 이야기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지음,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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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버

프리드리히 토어베르크 | 한미희 옮김 | 문예출판사

우물가에 뱀 한 마리가 빠졌다. 우물 안쪽으로 거대한 동굴이 있었다. 그 뱀은 우물가 한구석에 있는 동굴 속에 똬리를 틀고 떨어지는 동물들을 먹이로 삼기만을 기다린다. 어떤 때는 통통한 쥐 한 마리가 떨어졌고, 어떤 때는 멍청한 멧돼지도 떨어졌다. 뱀은 곧 자만에 빠졌다. 여기가 스스로의 천국이라 여겼다. 그는 더 이상 먹이를 사냥할 필요가 없었다. 먹을 것은 이미 충분했다. 뱀은 그 우물 속 동굴의 왕이 되기로 했다. 운 좋게 살아남은 쥐나 여타의 동물들은 뱀에게 순종했다. 뱀은 이미 최대의 포식자였으므로 그를 대적할 자는 아무도 없었다. 어디선가 아무도 모를 그 은밀한 곳에 존재하는 위대한 포식자 말이다.

책을 읽고 난 거대하고 사악한 뱀이 그려졌다. 그 뱀은 바로 [게르버] 속의 쿠퍼 교수이다. 스스로 우연하게 얻게 된 권력에 심취한 나머지 그것이 온전히 자신의 것인 양 남용하고, 결국 그 피해자는 어린 학생들이었다. 살면서 이런 자들이 얼마나 많은가? 운 좋게 시험에 합격해서 판사, 검사가 되고, 또 누구는 더 큰 권력을 얻게 되어 그 모든 것이 스스로가 잘난 탓이라고 생각한다. 너도 나처럼 열심히 노력해서 이렇게 군림하라... 하는 듯 뻔뻔한 사상을 진리라는 듯 들먹인다. 하지만 이상하다. 아무도 저항하지 않는다. 저항해 봤자 인생만 피곤하다고 여기는 듯, 잘못된 세상인데 어느 누구도 잘못이라는 말을 목소리 높여서 하지 않는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몫인 콩고물이 묻은 손만을 열심히 털뿐이다.

[게르버] 속의 이야기는 결코 1920~30년대의 나치 독일 치하에서 일어난 교육 현실만을 반영하지는 않는다. 이는 불행하게도 아직도 진행형인 우리의 현실이다. 얼마 전 고등학교 소녀 두 명이 고층 빌딩 옥상에서 투신해서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 외에도 얼마 전에는 학원에서 학생이 스스로 뛰어내렸고, 이 외에도 알게 모르게 우리 사회에서는 어린 학생들이 스스로 목숨을 던지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그들이 단순히 약해서 일까? 공부할 머리가 안되는 데 옥죄는 부모, 학교, 사회 때문일까? 게르버의 선택 속에 가해자는 꼭 쿠퍼 교수 한 명이 아니다. 쿠퍼 교수의 만행을 참고 인내하고, 못 본척한 모든 이들이 바로 게르버에게는 가해자였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순응하는 자가 무슨 잘못이냐고? 누군가가 묻는 소리가 들린다. 그저 시대에 따르고 대세에 따랐을 뿐인데 왜 쿠퍼 교수 이외의 자가 게르버에게 가해자냐고 말이다. 하지만 그것, 즉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은 바로 희망의 부재, 내일의 부재이다. 그리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음으로 그들은 동조의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게르버에게 참 스승 한 명만 있었어도 그는 원하는 대로 꿈을 이룰 수 있었을 것이다. 게르버의 선택에는 희망의 부재, 내일의 부재가 있다. 가르치고 배우는 일은 바로 희망을 말하는 일이다. 아직도 세상은 살만하다고, 너는 가치 있는 존재라고 온몸으로 체험하는 일이다. 하지만 바로 그 가르침이 무기가 되어 오히려 희망을 꺾고 있다. 게르버는 결국 그 희망이 없음에 좌절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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