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에서 말하다 -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안토니오 시모네 지음, 김난주 옮김 / 한길사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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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엄마와 함께 영화를 보러 극장에 다녀왔다. 한국 영화였는데, 사랑과 연애에 관한 이야기였다. 적당히 가볍고, 적당히 웃기며, 적당히 재미있는 영화였다. 엄마와 극장을 나오면서 둘이 나눈 대화는 "재미있네." , "응, 그러게." 가 전부였다. 거짓말 하나 안보탠 실화다. 그러고 보니 엄마와 함께 극장을 가본 게 얼마만이던가. 작년에 한번, 그전에는... 거의 십년전?

그러고 보니 아버지랑 극장에 가서 봤던 첫 영화가 생각난다. 벤허였다. 긴 러닝타임에 당시 초등학생이었던 나와 동생은 그 이야기의 배경을 이해조차 하지 못할 나이였다. 그 영화를 보고 기억나는 장면은 마차 경주 장면이었다. 한바퀴를 돌 때마다 물고기 조각을 한마리씩 올리던가, 내리던가. 그때의 기억은 그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지만, 그후에 벤허를 볼 때마다 아버지 생각을 하곤 한다. (오해없으시길, 아버지는 지금도 곁에 계신다. 그저 아버지와 영화를 보러 처음 극장에 갔던 날이 유난히 생각에 오래 남아서이다.)

『로마에서 말하다』는 로마인 이야기로 유명한 작가 시오노 나나미와 그의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가 나눈 영화에 관한 이야기이다. 아들인 안토니오 시모네는 영화 감독을 꿈꾸는 사람으로 이 책이 씌어질 당시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지식이나 영화판에 대한 지식이 깊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영화에 대한 비판이나 정곡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무척이나 진실되게 다가왔다. 그래서 더 재미있었던 것인지도 모르고. 


책 표지를 보면 총 네편의 영화의 한 장면이 나와 있다. 왼쪽 위는 로미오와 줄리엣, 오른쪽 위는 스파이더맨, 왼쪽 아래는 사브리나, 오른쪽 아래는 시네마 천국이다. 모두 내가 재미있게 봤고 좋아하는 영화라 참 반갑다. 특히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줄리엣 역할을 맡은 올리비아 핫세는 내게 있어 영원한 줄리엣이다. 줄리엣하면 올리비아 핫세, 올리비아 핫세라고 하면 줄리엣. 나에게 다른 줄리엣은 필요없달까. 그리고 흑백영화라고 하면 오드리 햅번이다. 난 고전을 꽤 좋아해서 오드리 햅번이 등장하는 영화는 거의 다 봤고, 그중에서 로마의 휴일은 여러 번 봤다. (로마의 휴일을 좋아하는 팬들은 정말 많을 것이다) 이런, 표지 이야기만 하다가 날 새겠다. 

본문은 총 31개의 꼭지로 이루어져 있다. 340페이지의 분량인 것을 감안한다면, 각각의 꼭지에서 다루는 내용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하지만, 각 꼭지들은 여러가지 의미에서 다른 꼭지들과 연관되어 있는 내용이 많았다. 그래서 난 책을 읽으면서 총 네개의 카테고리로 나누어 이 책을 정리해 봤다. 

이탈리아 영화 · 미국 영화 · 일본 영화 · 독일영화

시오노 나나미의 아들 안토니오 시모네는 이탈리아인이다. 이탈리아인으로서 외국인에게 소개해주고 싶은 영화가 10편 소개되어 있는데, 그 형식은 네오리얼리즘, 희비극, 희극, 코스튬 대작등으로 나뉘어 지지만 그 속내용은 이탈리아라는 나라와 이탈리아인들에 대한 진실한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특히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만들어진 영화가 많은데, 객관적이면서도 진실한 내용으로 만들어진 영화를 소개하고 있다. 

미국 영화에 관해서는 78회 아카데미상 수상식에서 상을 받은 <크래쉬>, <앙코르>, <카포티>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하는 꼭지와 미국적인 영화를 소개하는 꼭지로 나뉘어 진다. 미국적인 영화로는 스파르타인들을 다룬 <300>이 거론되는데, 역사는 무시해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남성들의 전투란 것을 멋지게 잘 표현했다는 글이 참 재미있다. 그외의 미국적인 영화로는 <스팅>타입의 영화다. 이런 영화는 "질 좋은 악이 머리를 써서 질 나쁜 악을 섬멸한다"는 줄거리를 가진다. 악당이 악당을 쳐부시지만 그중에서도 좋은 악당이 있고 나쁜 악당이 존재한다. 이런 영화는 단순히 총을 마구잡이로 난사하는 영화가 아니라 탄탄한 스토리를 바탕으로 한다. 촘촘한 복선이 깔린 영화랄까. 나도 이런 영화, 아주 좋아한다. 

일본 영화는 큐트한 <훌라 걸스>, 퍼니한 <선거>, 그리고 리스펙트할 수 있는 <굿바이> 세편이 소개된다. 모두 일본 영화의 저력을 보여주는 작품이며, 특히 선거의 경우에는 일본 선거 시스템과 이탈리아의 선거 시스템을 비교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독일 영화의 경우 <타인의 삶>이란 영화가 소개되어 있다. 공산국가 시절 다른 사람의 삶을 감시하던 한 남자의 이야기에 관한 내용인데, 무척 흥미로웠다. 언젠가 꼭 한 번 보고싶은 영화다. 

그외의 영화 이야기중에는 다 식은 후에 제공되는 요리같은 복수를 다룬 복수 영화, 과거는 현재에도 반복될 것이다라는 느낌을 주는 영화들과 안토니오 시모네가 정의하는 B급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안토니오 시모네의 B급 영화에 대한 정의가 무척 흥미롭다. 첫째로 예술작품을 지향하지 않아 유명영화제에서는 절대로 상을 받지 못하는 영화들, 둘째로 평론가들에게는 무시당해도 관객 동원에는 성공하는 영화들이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B급 영화란 것과는 상당히 다른 의미의 B급 영화 이야기는 무척 흥미로웠다. 그중 <람보>에 대한 이야기가 가장 흥미로웠는데, 나같은 경우 그저 액션영화라고만 생각했었는데, 그 안에는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귀환병의 아픈 이야기가 숨어있었다고나 할까. 이런 부분들을 보면서 내가 영화를 볼 때 얼마나 편협한 시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인가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다. 

참, 잊지 마시길.
각 꼭지의 뒷부분에는 그 꼭지에서 거론된 영화에 대한 소개가 나와 있다. 그 페이지들을 보면서 보고 싶은 영화를 골라도 즐거울 듯.

영화 감독들

이 책의 수많은 꼭지들 중 영화 감독과 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총 9개이다. 엘레강스한 영화를 만들어냈다고 평해지는 루키노 비스콘티, 시칠리아 출신의 주세페 토르나토레, 날카로운 아이러니와 인간성에 대한 조롱을 담은 영화를 만든 로버트 앨트먼, 카메라와 렌즈를 속속들이 알고 있던 명감독 스탠리 큐브릭, 깊은 통찰을 바탕으로 한 다양한 인간의 모습을 영화로 담아낸 구로사와 아키라를 비롯해 시드니 루엣과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의 비교 분석, 마틴 스콜세지, 시드니 폴락, 클린트 이스트우드 등의 영화에 대한 철학과 그들이 만든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앞서도 말했듯이 이 책은 영화에 관한 전반적인 이야기이기 때문에 이들 감독의 모든 작품을 다루고 있지는 않다. 이 책에서 다루는 작품들은 각 꼭지의 주제에 맞는 영화와 두 모자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이야기를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내겐 낯선 영화도 많았고, 나는 좋아하는 영화인데 언급되지 않아 약간은 서운한 부분도 있었다. 

여기에 거론되는 감독중 주세페 토르타토레 감독은 시칠리아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다수 만들었다. 자신이 시칠리아 출신이기 때문에 누구보다도 더 잘 이해하고 있지 않았을까. 특히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을 맡은 <말레나>라는 작품이 무척이나 흥미로웠다.   

영화 배우들

영화 배우들에 관한 이야기는 총 7개 꼭지에 등장한다. 첫 테이프는 감독에 대한 철저한 신뢰를 보여준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로 시작한다. 그에 대한 이야기는 스트론조와 필리오 디 푸타나 이야기로 이어진다. 이는 뒤에 나올 아이스 레이디 이야기와 비슷한 전개를 보여주는데 일단 스트론조와 필리오 디 푸타나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이 부분을 읽으면서 느낀 스토론조는 나쁜 남자, 육식남 이미지라고 할까. 숀 코너리가 그런 남자라니, 난 숀 코너리 참 좋아하는데 말이지. 내가 모르는 숀 코너리를 만난 느낌이었달까.

무드남, 초식남으로 여겨지는 필리오 디 푸타나는 앞서 언급된 마르첼로 마스트로 얀니, 조지 클루니 그리고 대니 드비토. 앞에 나온 둘은 이해가 되는데, 대니 드비토라구??? 나도 놀랐다. 하지만 설명을 들으니 이해가 되었달까. 역시 사람은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안된다.

그렇다면 아이스 레이디로 칭해지는 여성 배우들은 어떤 배우들일까. 시오노 나나미에 따르면 입은 웃고 있지만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여성들이다. 그 배우들로는 마돈나, 안젤리나 졸리, 조디 포스터. 이들은 사랑보다 일을 더 중시하는 내면이 차가운 여성들이라 묘사된다. 뭐, 사람 나름의 생각이긴 하겠지만, 난 이 말에 반쯤 동의한다. 근데 더 재미있는 것은 안토니오 시모네의 이들 여성에 대한 생각이다. 피곤한 여성 타입이라고 하던가. 하긴 여자들 입장에서 보면 쿨하고 멋지겠지만, 남자들 입장에서는 감당이 안되니 피곤하게 여겨질 수도. 

이외에도 래퍼 출신 배우들, 요절한 배우들, 조연 배우들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래퍼 출신 배우들은 이 책에서 언급된 배우들 외에도 꽤 많다. 근데 이 책에서 언급된 배우가 아닌 아이스 큐브가 연기하는 것을 보면 문득 대사치는 것이 랩하고 있는 듯하달까, 그런 느낌을 많이 받았는데 지금은 어떨지...

요절한 배우들에 이름을 올린 배우들은 히스 레저, 리버 피닉스, 브래드 랜프로. 그들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와 더불어 이들을 압박해 죽음으로 몰고간 영화계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도 이어진다. 브래드 랜프로는 누군가 했더니, <죽음보다 무서운 비밀>에 나왔던 배우였다. 지금은 얼굴도 가물가물하지만, 영화는 꽤나 인상적이었다.

영화는 주연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난 조연 배우들도 무척이나 좋아하는데, 여기에서 언급된 배우들 중 채즈 팔민테리는 나도 무척 좋아하는 배우이다. 무척 강한 인상을 주는 배우라 조연으로 잘 어울릴 것 같지 않으면서도 기막히게 조연을 연기하는 배우.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조연 배우들이 주역 배우들 보다 연기를 더 능숙하게 한다고. 요즘 영화판은 90%이상이 그렇지 않을까?

영화판 뒷담화

안토니오 시모네는 영화 감독을 꿈꾸며 지금은 어시스턴트로 일하고 있다. 그런 그가 들려주는 영화판의 이야기는 일반인인 내가 보기에 무척이나 흥미로운 부분이 아닐 수 없는데 이탈리아와 미국 영화 제작에 모두 참가한 경험이 있기에 두 나라 간의 영화 제작 시스템에 대한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그가 보는 미국 영화는 상업이고, 이탈리아는 예술을 지향한다. 두 나라는 영화 제작 준비기간도 엄청나게 차이가 나 미국은 2년, 이탈리아는 겨우 2달이란다. 그런 면에서 보자면 미국 영화의 장점만을 말하는 것 같지만 두 나라의 장단점을 골고루 비교하고 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시칠리아 섬에서 촬영을 할 때 마피아가 용역업체로 참가한다는 것이다. 마피아 이야기를 다뤄도 아무렇지도 않게 참가하는, 즉 돈만 되면 뭐든 하는 시칠리아 마피아의 철저한 현실주의적인 면에 대해 알 수 있었다. 이게 이탈리아 영화판의 흥미로운 점이랄까.

이외에도 의상담당에서의 독보적인 존재인 밀레나 카로네로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다. 스탠리 큐브릭이나 프랜시스 포드 코폴라와 작업을 해 왔던 그녀의 일에 대한 열정과 능력에 대한 평가와 함께 인간적인 부분을 함께 다뤘다고나 할까.

로마에서 말하고, 한국에서 듣다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은 영화계 전반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시오노 나나미와 안토니오 시모네가 관심을 가고 있는 영화 감독들과 그들이 만든 영화, 좋아하는 배우들과 그들이 출연한 영화, 그리고 영화 제작 현장의 뒷이야기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그러하기에 그들의 감정이 담뿍 묻어나는 이야기들이다. 또한 비평가처럼 이건 이렇고, 저건 저렇고, 하면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느끼는 바를 편안하게 풀어 놓아 즐겁게 읽을 수 있었다. 만약 이들이 아들과 어머니 사이가 아니라면 이렇게 편안한 어조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을까. 그래서 더 친근감있게 읽혔는지도 모르겠다.

시오노 나나미의 인간의 삶에 대한 넓은 시각과 안토니오 시모네의 영화에 대한 열정과 애정의 눈길이 합쳐져 탄생한『로마에서 말하다』는 아무 페이지나 펼치고 읽어도 재미있다. 처음부터 끝까지 연결된 내용이 아니기에 책을 잡으면 한자리에서 다 읽어야 할 부담도 없다. 하지만, 내 장담하리라. 이 책을 읽다 보면 둘의 대화에 푹 빠져서 한자리에서 다 읽게 될 거란 것을.

사진 출처 : 책 표지

덧>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조금 어색한 부분 몇 가지에 대한 언급

본문 중에 '고급한 술'이나 '고급한 프로'라는 표현이 있는데, 우리말로 보자면 꽤나 어색한 표현이다. 고급 술이나, 고급스러운 술 혹은 고급스러운 프로라는 표현이 우리말로 더 잘 어울리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표현은 일본어를 직역한 듯한 느낌이 든단 말이지.

그리고 일본식 표현이 또 있다. 소녀만화란 것이 바로 그것인데, 우리나라에서는 대체로 순정만화라고 한다. 소녀만화를 주로 읽는 층은 여성들기에 소녀만화란 표현을 쓴다. 소녀가 등장한다고 소녀만화는 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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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 - 전2권 - side A, side B + 일러스트 화집
박민규 지음 / 창비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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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을 받고 책 상태를 확인하며 이리뒤적 저리뒤적 하다가 sida A, side B라는 표현을 보고 문득 테이프와 LP판을 떠올렸다. 요즘 나오는 CD는 한쪽면 밖에 없지만, 테입이나 LP판은 A, B면으로 나뉘어져 있기 때문이다. 테이프는 지금도 나오긴 하지만 LP판은 오래전에 단종되었다. 무척 아쉬운 일이다. 예전에 음악을 들을 때는 LP판으로 들었던 적이 많기 때문이다. 조그마한 스크래치에도 바늘이 튀는 일이 생겨 보물 다루듯 다뤘던 LP판. 게다가 큼지막한 쟈켓 사이즈는 얼마나 멋졌던지. 내가 모으던 건 헤비 메탈 그룹 쪽이었던지라 쟈켓 사진을 보면서 흐뭇해한 적도 많았다. 감히 CD나 테이프 사이즈로는 결코 맛볼 수 없는 강렬한 느낌을 주었으니까. 그런 것이 참 그립다.

 
side A의 표지 인물은 푸른색 마스크에 검은색 옷, 푸른색 넥타이를 매고 있다. 왠지 차갑다는 느낌을 준다. 게다가 뒷배경까지 그런 느낌이다. 문득 상상을 해본다. 차갑고 절제된 이야기일까, 하는. 그러나 첫번째 작품을 읽으면서, 살짝 놀라게 되었다. 왠지 내가 이제껏 읽었던 작가의 작품 성향과 다른 느낌이었달까. 차분하다. 고요하다, 라는 느낌. 이 느낌이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까... 라는 생각을 했지만, 뒤로 넘어가면서 작가 특유의 이야기 느낌으로 점차 바뀌었다. 오히려 이게 더 익숙해달까. 어쨌거나 책을 읽으면서 몇가지로 나누어 이야기를 해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린 이렇게 산다

우린 이렇게 산다, 라는 소제목을 붙인 것은 현대 사회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강하게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이다. <근처>와 <누런 강 배 한 척>은 중년의 남성을 주인공으로 한다. <근처>는 암으로 시한부 인생을 선고받은 남자의 이야기이고 <누런 강 배 한 척>은 치매를 앓고 있는 부인을 둔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간 열심히 살아왔지만 결국 곁에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자신의 삶에 대한 씁쓸한 자괴감과 외로움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었다. <굿바이 제플린>은 젊은 남자를 주인공으로 하고 있다. 빽도 없고 돈도 없지만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사랑하며 산다. 하지만 세상은 녹록치 않다. 돈을 벌기도 힘들고 사랑을 지키기도 힘들다. 그래도 끝까지 사랑을 지키려하는 이 남자, 이 남자는 딸기우유처럼 달콤한 자신의 사랑을 지켜낼 수 있을까.

이렇게 살았을지도 몰라

이렇게 살았을지도 몰라, 라는 소제목을 붙인 것은 과거 우리의 삶에 대한 이야기이다. 판타지 성향을 띄든, SF성향을 띄든 상관없다. 그저 옛날 이야기라 생각된 것을 이렇게 구분했다. 사실 구분하기 좀 애매한 작품이 하나 있었는데 그건 바로 <양을 만드신 그분께서 당신도 만드셨을까?>란 작품이었다. 길을 걷다 갑자기 낯선 장소로 이동한 고와 도란 사람의 이야기인데, 그들은 작은 공간안에서 일정 시간만 되면 습격해오는 무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들이 잠들어 있을 때 누군가 와서 그곳에 모자란 것을 채워놓고 간다. 갇힌 공간안에서 생각마저 갇혀버린 두 사람은 꿈을 통해 자신의 전생을 돌아 보게 한다. 우리는 과거의 삶에서 얼마나 벗어나 있을까. 그리고 현재 자신을 둘러싼 것의 구속에서 얼마나 벗어날 수 있을까.

<크로만, 운>은 세상이 어떻게 만들어졌는가에 대한 이야기이다. 예전부터 이런 생각을 문득문득 하곤 했었다. 세상은 수없이 많은 멸망과 창조로 이루어진게 아닐까, 하는. 그도 그럴 것이 세계의 불가사의한 유물을 볼 때, 저건 외계인이 만든 게 아니고 현대인들 전에 살았던 사람들의 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혹은 정말 평행우주란 것이 있어서 그 우주들이 일시적으로 겹칠때 생겨난 문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간간히 하곤 한다. 증거는 없지만. 그리고 또다른 생각 하나. 거대한 세상속에는 자신만의 세상이 존재한다. 거대한 우주가 존재하고 그 속에 각 개인들의 작은 우주가 무수히 존재하는 것처럼.

<축구도 잘해요>는 마릴린 먼로가 자신의 전생이라고 생각하는 '나'의 이야기이다. 가장 작가답다, 라는 생각이 들었던 작품이랄까.

이렇게 될지도 몰라

앞의 설정에 따라 본다면 이건 미래의 이야기이다. 그렇다고 해서 완벽한 SF물은 아니다. <깊>은 지구의 가장 깊은 곳에 도달하려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그들은 자신의 몸안의 액체와 조직을 다른 물질로 바꿈으로써 그 압력에 견디도록 만든다. 그렇다면 그것은 새롭게 창조된 또 하나의 자신일까, 아니면... 몸은 바뀌었어도 의식이 그대로라면 자기자신이 아닐까 하는 안이한 생각을 해본다. 하지만 이들은 그게 과연 자기자신일까, 하는 고민에 빠진다. 그건 정말 누구일까. 나는 하나의 자아로만 이루어져 있는 존재일까, 수많은 자아로 이루어져 있는 존재일까.  <굿 모닝 존 웨인>은 냉동인간이 되었다가 몇천년 후에 깨어난 사람들과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이거 참, 웃지 못할 이야기로군. 우리의 미래에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는... 아무도 모른다.


side B의 남자는 은색 마스크에 붉은 색 옷을 입고 있다. A면의 남자보다는 캐주얼한 차림이랄까. 왠지 차갑고도 뜨거운 걸 연상하게 되는 사진이다.

우린 이렇게 산다

첫번째 작품인 <낮잠>은 side A의 시작과 느낌이 비슷하다. 조금 다른 점이라면 중년이 아니라 노년의 남성이 주인공이다. 이 남자는 현재 양로원에서 생활한다. 아내는 몇년 전 죽었고, 자식들은 나이든 아버지를 모시려 하지 않는다. 이 남자는 이곳에서 첫사랑을 만난다. 그녀는 그러나 이미 치매에 걸려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한다. 그래도 이 남자는 행복하기만 하다. 노년의 얼마남지 않은 생, 일장춘몽이 아니라 달디단 낮잠처럼 곱게 곱게 이어지길....  

<루디>는 마치 영화 한 편을 보는 느낌이었다. 한남자가 알래스카 여행 중에 어떤 남자의 공격을 받게 된다. 무차별 공격이라 생각했지만, 그것이 아니라 자신이 원래 목표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우리의 시야는 너무도 좁다. 자신도 모르게 누군가에게 고통을 주는 삶을 살고 있는 건 아닌지...

사룡(四龍)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인 龍+龍+龍+龍은 무림의 고수였던 네명의 사람들이 현대에까지 살아 남아 현대를 살아가는 이야기이다. 그 오랜 시간을 살아왔건만 인간 세상은 변함이 없구나.

<비치 보이스>는 군입대를 앞둔 네명의 청춘들 이야기이다. 그들의 엉뚱한 바다 여행이야기, 그 결말은?   

<별>은 제목은 참 예쁜데, 내용은 참 아프다. 간이고 쓸개고 다 빼서 (삑) 적금 깨고, 카드 긁고, 회사돈까지 횡령해서 모시던 여자친구에게 큰 배신을 당하고 감옥에 갔다가 지금은 대리 운전을 하는 남자, 그 남자가 그때 그 여자를 다시 만났다. 배신하면 잘 살기나 하지, 그래야 복수라도 해줄텐데, 아쉽게도 그녀는 이혼할 위기에 애까지 뺏길 위기란다. 그래서 정신이 안드로메다에 갈 정도로 술을 퍼마셨겠지. 그런 그녀를 보는 그 남자의 심리 변화가 아주 잘 표현되어 있는 작품.

<아치>는 자살을 하기 위해 다리 아치에 오르는 사람을 구하는 순경의 이야기이다. 그들을 설득하면서 자신의 삶을 문득문득 돌아보는 순경은 조금씩 자괴감에 빠져 자신도 뛰어들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왜 이렇게 척박한 환경에서 살 수 밖에 없는 것일까. 가진 것 없고, 가질 수 없는 건 더 많고.

이렇게 살았을지도 몰라

슬(膝)은 선사시대를 살았던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또다른 빙하시대의 도래, 그러나 남자는 공동체와 함께 길을 나설 수 없다. 그의 아내는 열이 펄펄 끓고 새로 낳은 아이는 엄마의 젖이 없어 쫄쫄 굶는다. 어떻게든 먹이를 구해야지 가족을 살릴 수 있는 그는 사냥을 나서게 된다. 그곳에서 만난 죽어가는 매머드. 하지만 매머드 역시 자신의 삶에 애착을 가진 상태라 사냥은 불가능했고, 오히려 남자가 큰 상처를 입게 된다. 굶어 죽어가는 가족을 보면서 자기 살이라도 뜯어 먹이고 싶은 남자의 마음. 그것이 슬(膝)이다. 지금의 우리 아버지들도 이렇지 않을까.

이렇게 될지도 몰라

<아스피린>은 갑자기 한국의 상공에 나타난 괴비행체에 대한 담담한 이야기이다. 처음엔 모두들 두려워하지만, 결국 일상에는 변함이 없다. 그것의 정체가 뭣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러고 보면 아무리 큰 충격을 주는 일이 발생해도 결국 그것을 기정 사실로 받아들이는 천부적인 적응력을 타고 났는지도.

<딜도가 우리 가정을 지켜줬어요>는 중년의 자동차 영업맨의 이야기이다. 좋은 시절은 이미 끝나고 지금은 실적도 제대로 못올리고 있다. 게다가 계약직. 이렇다 보니 집안 형편은 불보듯 뻔하다. 아들은 겨우 지방대에 합격했지만 등록금이 비싸 전세금을 빼서 등록금을 마련한다. 돈 나올 구멍은 없고, 돈 빠지는 구멍은 점점 커지고. 결국 화성에 차를 팔러 가는 남자. 그곳에서라도 고수입을 올리시길. 근데 화성에 차를 팔러 갈 정도가 되면 미래의 이야기인 듯 한데, 미래에도 우리의 삶은 이런 거야? 암울하군.

그러고 보면...

작가의 책은 모던하면서도 아날로그적이다. SF나 판타지의 겉모습을 취하고 있어도 이야기는 지극히 현실적이며, 그 대상은 사람을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의 마음을 그리고 있는 이야기라고 할까. 자신의 존재가 어떤 것인지 열심히 갈구해도 그 답이 보이지 않는다. 결국 그런 것 때문에 무너지기도 한다. 어떤 작품은 엽기적인 유머를 동반하고 있지만 그 속은 결핍감으로 가득하다. 지금 상황이 어떻든 어떻게든 살아가야만 하는 가여운 존재들. 그건 옛날이나 지금이나 미래나 변치않을 것 같다. 과거보다 편리한 생활을 하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 궁핍함은 여전하며, 그것은 미래에도 변치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 결핍은 돈이나 그런 것의 문제가 아니다. 결국 메말라가는 감정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정신적 결핍이 훨씬 크다. 물론 둘 다에 해당되는 게 지금의 삶이지만. 그래서 웃을 수 없다. 그렇다고 울 수도 없다. 우리는 가면을 뒤집어 쓰고 현재의 역할을 잘 연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그래야 견딜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LP판을 보면 속지가 한장 꼭 들어 있었다. 지금 나오는 CD는 책처럼 꾸며져 있지만, LP판의 경우 워낙 얇아서 속지 한 장으로 앨범을 설명했었다. 쟈켓만큼 큰 속지였던 기억이 난다. 이 더블 아트북은 LP판의 속지라기 보다는 CD의 미니북같은 느낌이 들지만, 어차피 더블은 LP판으로 탄생하지 못했으니, 조금 다른 모습을 보여줘도 괜찮겠지.

이 아트북은 작가가 자신의 작품을 헌사하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각 작품들에 대한 짧은 코멘트가 수록되어 있었다. 코멘트를 읽으면서 느낀 점은... 내가 책을 읽고 느낀 것과 작가의 의도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이었다. 어질. 이거 어쩌면 좋지? 이제껏 내가 쓴 이 글을 처음부터 수정해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지만, 다른 것이 꼭 틀린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어쩌면 작가가 살아온 시간과 내가 살아온 시간의 길이가 달라서 일수도 있고, 작가가 경험하고 느끼고 생각한 세상을 보는 눈의 폭과 너비와 깊이가 나와 다르기 때문 일수도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실려 있는 18편의 작품 모두 각기 다른 사람을 위한 것이었다. 그중에서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바치는 작품에 대한 이야기가 역시 가장 가슴을 파고 들어왔다. 왜냐하면 그외의 사람들은 내가 일방적으로 아는 사람이거나 아예 모르는 사람이지만,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 단어만으로도 가슴을 울리는 무언가가 있기 때문이다.

사랑은 내리사랑이라고 했던가. 자식들은 부모님의 사랑의 발끝에도 못미친다고. 그래서 그런지 여기에 등장하는 자식들의 모습을 보면서 나도 저런 자식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을 끝내 하고야 말게 되었다. 그러함에도, 여전히 나는... 못난 자식일 뿐이다. 그리고 평생을 그렇게 살아가겠지. 후회를 거듭하면서도. 가끔은 반성을 하면서.

사진 출처 : 더블 set, 더블 1권 표지, 더블 2권 표지, 더블 아트북, 더블 아트북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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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에 내가 죽은 집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이영미 옮김 / 창해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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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기억이란 것의 가장 큰 속성은 모호함이란 것일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일을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중에서 특별히 행복했고, 즐거웠고, 기분 좋았던 기억은 여러가지의 각색을 거쳐 추억이란 이름을 붙여 간직하게 되고, 그중에서 특별히 무서웠고, 두려웠고, 기분 나빴던 기억들은 단단한 상자 속에 넣어 마음 속 깊이 봉인하고 살기도 한다. 사실 내가 기억한다는 것을 떠올려 보면 그 기억들이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하는 것에 의문이 생긴다. 특히 유년 시절의 기억은 거의 남아 있지 않고, 그후의 기억들도 내 머리가 알아서 정리를 한 덕분에 사소한 것들은 거의 기억에 남아 있지 않다. 살아온 모든 시간을 기억한다는 것은 뇌용량의 초과일 뿐만 아니라 쓸데없는 기억때문에 고통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망각이란 기제는 때때로 훌륭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한다.

어느 정도 연령에 도달한 사람이라면 스스로 자신의 기억을 봉인하기도 한다. 대부분 그것은 너무나 끔찍해서 두 번 다시 생각하고 싶지 않을 일이다. 이는 자의적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너무 어린 시절에 겪은 끔찍한 일이라면 생존 본능이란 것이 발동하여 기억을 무의식중에 봉인해 버리는 경우도 있다. 이럴 경우에는 스스로 봉인을 한 것이지만 무의식적인 행위이기 때문에 자의적이라고만은 볼 수 없을 듯 하다. 그럴 경우 결락된 기억에 대해 고통을 받는 일도 생길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어린 시절의 잃어버린 기억이란 것을 소재로 하고 있다. '나'의 연인이었지만 지금은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사야카는 자신의 아이를 학대하고 있는 문제로 고민이다. 사야카는 그 원인이 결락되어 있는 자신의 어린 시절 기억과 관련있을 것이란 확신을 가지고 있다.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까지의 기억이 하나도 없다, 는 것은 평범한 사람들에게 있어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나 역시 드문드문하긴 하지만 어린 시절의 기억을 분명히 갖고 있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럴지언대, 사야카는 왜 초등학교 이전의 기억을 몽땅 잃어버린 것일까.  

사야카는 '나'와 함께 사야카의 아버지가 남긴 열쇠와 지도를 가지고 사야카의 기억이 묻혀 있을 만한 장소로 찾아가게 된다. 인적이라고는 없는 깊은 산중에 서 있는 집. 그곳은 아주 묘한 곳이었다. 그곳의 시간은 23년전에 멈춰 버린 듯 하다. 모든 것이 그대로 남겨진 채 사람들만 사라진 듯한 모습. 이는 마치 마야인들이 발전된 문명을 버리고 하루아침에 모두 사라진 것과 같은 느낌이랄까. 그정도로 그곳은 기묘하기만 하다. 게다가 현관문으로는 들어갈 수도 없고, 지하실을 통해서만 집으로 갈 수 있는 곳이라니. 집안 구조도, 집안의 물건도 모든 것이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그 집에서 발견한 일기장과 편지를 토대로 '나'와 사야카는 그 집에서 일어났던 일을 하나씩 추적해 나가기 시작한다. 그집에서 살았음이 분명한 미쿠리야 가족은 도대체 어떤 일을 겪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처음에 가졌던 호기심은 어느새 사라져버렸다. 읽으면 읽을수록 아픔과 슬픔이 점점 더 커져갔다. 그것은 아마도 당시 초등학생인 유스케의 눈으로 본 가족사이기 때문에 더 그러했으리라. 행복하기만 해야 할 어린 시절에 닥쳐온 끔찍한 일. 작은 아이의 입장에서는 그 무엇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으리라.

그리고 그것을 보아온 어린 시절의 사야카는 자신의 기억을 본능적으로 의식 깊은 곳에 봉인할 수 밖에 없었다. 그것은 아이가 견디기에 너무나도 크고 무거운 절망의 벽이었으니까. 물론 그 이유로 성인이 된 사야카가 자신의 아이를 학대할 수 밖에 없었다는 것에 동의할 수는 없다. 하지만 사야카가 그 당시 얼마나 두려워했고, 절망했을 것이란 건 짐작이 된다. 그렇기에 너무나도 가여울 수 밖에 없다. 사야카가 되찾은 기억이 현재의 자신을 더 큰 절망속으로 밀어 넣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후의 사야카의 행동을 보건대 절망에 무너져 내리지는 않을 듯 하다. 오히려 자신의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음으로써 더욱 강인한 여성이 되었으리라 추측할 수는 있으리라.  

책 제목인『옛날에 내가 죽은 집』이 주는 느낌은 오컬트적이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부를 보면 전혀 오컬트적인 이야기가 아니란 것을 알 수 있다.

어쩌면 나 역시 낡은 그 집에 죽어 있는 건 아닐까. 어린 시절에 죽은 내가, 그 집에서 줄곧 내가 찾아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그리고 누구에게나 '옛날에 자신이 죽은 집'이 존재하지 않을까. 그러나 그곳에 누워 있을 게 분명한 자신의 사체를 마주하고 싶지 않아서 모른 척하는 것일 뿐. (320p)

사람에게는 누구나 잊고 싶은 무언가가 존재할 것이다. 우리는 그 기억을 자신의 머릿속에 봉인하는 대신 그 일이 일어났던 곳에 봉인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곳에는 우리가 벗어던진 기억이 매미 허물처럼 수없이 쌓여 있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아픈 기억을 잊고 새로 태어나기를 바라지만 그것은 탈피일 뿐, 완전한 새것은 아니기에 언제든 기회가 있다면 기억이란 것은 우리를 뒤에서 잡아채 넘어 뜨릴지도 모른다. 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것은 아니다. 그저 우리가 모른체 하고 있을 뿐.  

이 책은 집이라는 공간을 소재로 삼고 있다. 가장 아늑하고 안심할 수 있는 공간인 집. 바깥에서는 어떤 일을 당하고 들어와도 집이라면 안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게 바로 집이다. 그리고 내 가족이라면 내가 무슨 일을 저질렀든지, 무슨 일을 당했든지 일단 감싸주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것이 무너졌을때 우리는 큰 절망과 아픔과 슬픔을 겪을 수 밖에 없다. 그런 고통의 기억이 과거를 살았던 사람과 현재를 살아가는 사람의 발목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모습을 보는 건 괴로운 일이었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내가 옛날에 죽은 집』은 미스터리의 형식을 취하고 있지만, 현재의 일이 아니라 과거의 일을 다루고 있다. 하지만 그 과거는 결코 사라지지 않은 것이었다. 오히려 그 힘을 현재에도 발휘하고 있다고 보는 게 좋을 것이다. 그러나 과거에 발목을 잡혀 살든지, 그것을 뿌리치고 극복하며 살아가든지의 선택은 당사자의 몫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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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감고 3초 - 뉴 루비코믹스 964
아니야 유이지 지음 / 현대지능개발사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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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뼉도 마주 쳐야 소리가 난댔다. 한 손으로는 아무리 흔들어 봐야 소리가 나지 않는다. 소리를 내고 싶어 자기 빰을 때리면 그건 자학이다. 사랑도 그렇다. 혼자서 아무리 두근두근 해 봐야 그건 짝사랑일 뿐. 상대가 자신을 마주 보고 같이 두근거려야 사랑이다. 사랑은 마음과 마음이 통했을 때 이루어 지는 것이니까.

고등학교 1학년 동갑내기인 치바나 마나부와 카지 히로토는 유치원때부터의 친구이다. 치바는 언제부터인가 히로토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느끼고 있지만, 히로토의 마음은 콩밭에 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치바의 성격은 왕소심한 편이라 히로토에게 고백 한 번 해보지 못하고 끙끙 앓고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고백을 잘못 했다가 혹시 친구 사이마처 깨질까 두려워 한다는 게 맞는 표현일 것이다.

그런 치바에겐 독특한 버릇이 있다. 자신이 감당하지 못할 일이 앞에 닥치면 눈을 감고 셋을 세면서 마음을 진정시킨 후 마음과는 다른 말을 내뱉는다는 것. 그것은 치바의 집안 사정과도 관련이 있다. 치바의 아버지는 현재 여성인 미미로 살아간다. 요시미란 남자 이름을 버리고. 그래서 그런지 왠만한 충격에는 끄덕도 없는 치바이지만 히로토 앞에서는 한없이 작아지는 치바.

그런 치바에게 위기가 닥쳤다. 치바의 아빠(삑!) 엄마 미미가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기 위해 이사를 간다는 것. 고교생인 치바에겐 선택권이 아무것도 없었다. 치바는 히로토에게 그 이야기를 하기 위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지만, 미미가 무심코 그 이야기를 꺼내는 바람에 히로토는 크게 화를 내게 된다.
 
눈 감지마! 그거 정말 싫어! 언제나 자기 내면만 보고 있으니까, 내가 안 보이는 거잖아! (59p)

치바에게는 대면하기 무서운 순간을 회피하기 위한 3초. 그리고 속마음과 다른 마음으로 눈을 뜨기 위한 3초였지만, 히로토에게 있어 그건 치바가 자신의 감정을 숨기기 위한 3초였던 것이다. 치바가 눈을 감지 않았더라면, 좀더 일찍 히로토의 마음을 볼 수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그후 4년. 히로토는 대학생이 되었다. 그때, 만약 히로토가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면 자존심만 내세우지 않았다면 둘 사이는 어떻게 변했을까. 그렇다. 히로토 역시 치바를 좋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건 아주 아주 오래전부터.

이야기는 치바의 입장과 히로토의 입장으로 나뉘어 전개된다. 그저 아이처럼 보였던 히로토에게 그런 속내가 있었을 줄이야. 4년만에 받은 치바의 쪽지를 보면서 눈물을 흘리던 히로토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어쩌면 그렇게 아프게 울 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달까.

아니야 유이지라고 하면 하드보일드한 그런 작품만을 그릴 줄 알았다. 특히 <문신의 남자>를 읽으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었다. 그런데 이렇게 감성 풍부한 작품도 그려내는 작가로구나, 하는 생각이 부쩍 많이 들었달까. 물론 <문신의 남자>에 나오는 주인공들도 순정이란 면에서 빠지진 않지만. 이 작품과는 확실히 달랐다. 십대 중반의 소년이 이십대 청년이 되면서 겪는 감정을 순수하게 펼쳐 놨다고 할까. 사실 작화면에서 보자면 결코 예쁘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이야기는 가슴 속에 깊히 박힌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는 두 주인공 뿐만 아니라, 미미와 미미가 결혼해서 함께 사는 남자 후지타니의 이야기가 특히 잔향이 많이 남았다고나 할까. 아주 짧게 언급되지만 그들의 사랑 방식도 너무나 아름다웠다.   

각 작품마다 독특한 개성을 표현할 줄 아는 작가, 아니야 유이지. 다음 작품은 또 어떤 느낌의 작품일지 무척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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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라장 사건
아유카와 데쓰야 지음, 김선영 옮김 / 시공사 / 201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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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유카와 데쓰야란 이름은 무척 낯설다. 그도 그럴 것이 이번에 처음으로 우리나라에 소개된 작가이기 때문이다. 처음엔 제 1회 본격 미스터리 대상 특별상 수상작란 말에『리라장 사건』은 요즘 나온 책이고, 아유카와 데쓰야는 요즘 한창 뜨는 작가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왜냐하면 본격 미스터리 대상은 2001년에 처음 생긴 상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작가 중에도 본격 미스터리 대상 수상작가들이 꽤 많은 걸 생각한다면 당연히 요즘 작가라 오해하기 딱 좋다. 하지만 아유카와 데쓰야는 1919년생이며, 이 작품은 1958년에 씌어진 작품이다. 솔직히 말해 깜짝 놀랐다.

『리라장 사건』은 늦여름 리라장을 찾은 대학생들에게 생긴 아주 참혹하고 끔찍한 일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장(壯)이란 표현이 들어가 있으니 왠지 연상되는 게 있다. 완벽한 밀실이라기 보다는 밀실에 가깝지만 밀실보다 공간이 확대된 곳, 트릭으로 말하자면 클로즈드 서클이 먼저 떠오른다. 보통 겨울 산장을 배경으로 하는 경우 눈폭풍같은 것으로 고립되는 경우가 많은데, 이 작품의 배경은 늦여름이다. 장마기간도 지난 시점이라 태풍이나 폭풍으로 고립되는 경우는 없을 듯 한데, 리라장은 어떤 식으로 이들을 고립시킬까.

리라장은 관리인 부부가 숙식하며 그곳을 관리하고 있다. 여름방학을 맞이해 이곳으로 온 학생은 총 6명으로 이들은 감정적으로 굉장히 복잡한 관계를 맺고 있다. 그들의 감정은 각각 적대와 우호, 사랑과 증오 등으로 복잡하게 얽히고 설켜있다. 첫날부터 갈등이 터져나오긴 하지만 심각하지는 않다. 그러나 다음날 형사가 찾아와 리라장 근처에서 남자의 사체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사체의 옆에는 스페이드 A 카드가 놓여 있었다. 그 카드는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학생 중 하나가 가지고 있던 카드로 사체는 그 여학생의 비옷도 가지고 있던 것으로 확인된다. 

처음에는 사고사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지만, 카드가 그 옆에 놓여 있다는 사실이 이들의 궁금증을 증폭시킨다. 하지만 자신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이기에 그냥 넘기려 하지만, 그날 이후로 차례차례 참혹한 살인 사건이 연달아 일어난다. 또한 그 사체들의 곁에는 없어진 스페이드 카드가 한 장씩 발견된다. 처음에는 A, 그다음은 2, 그다음은 3... 이렇게 사체는 늘어가고 결국 희생자는 모두 7명이 된다.

희생자들이 살해 당한 방식도 다양했다. 추락사, 독살, 척살, 교살, 둔기 가격, 독화살, 익사. 도대체 범인은 어떤 동기를 가지고 있기에 이렇게 다양한 방법으로 한사람씩 죽이고 있는 것일까. 게다가 첫번째로 희생당한 남자와 관리인의 부인의 죽음은 학생들의 죽음과 어떤 관련이 있는 것일까. 사건 현장이 대부분 리라장과 리라장 주변이기에 이들은 조사가 끝날 때까지 그곳을 떠나지 못한다. 결국 리라장안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게다가 모든 사건의 용의자로 지목된 한 사람이 경찰서에 수감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사건이 발생하게 되고, 나중에 등장해 사건의 대부분의 수수께끼를 풀었다는 니조마저 살해당한다. 경찰의 수사는 모두 물거품으로 돌아간다. 진퇴양난에 몰린 경찰은 결국 호시카케 류조라는 명탐정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는데... 10일동안 벌어진 대학살극의 진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이 작품은 요코미조 세이시의 긴다이치 시리즈와 달리 탐정이 처음부터 등장하지 않는다. 리라장 사건에 등장하는 호시카케는 맨나중에 등장해서 모든 이들에게 사건 브리핑을 한다. (이부분은 비슷하긴 하지만) 이 두 탐정을 비교해 볼 때 재미있는 것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긴다이치와 호시카케는 정반대의 타입이란 것이다. 국민탐정 긴다이치 코스케는 까치집을 지은 머리에 구겨진 하카마, 수더분한 인상이라면 호시카케는 딱떨어지는 수트에 멋진 콧수염, 그리고 약간은 까칠한 성격의 신사 타입이랄까. (笑)

작가는 책 곳곳에서 우리에게 다음에 일어날 참극에 대한 귀띔을 해주거나, 중요한 정보를 전달해준다. 하지만 눈뜬 봉사처럼 난 그 부분을 읽으면서도 그것을 한가지로 조합을 할 수 없었다. 절묘한 서술트릭이랄까. 나중에 호시카케가 설명을 해주면 그때서야, 아하, 그랬군이란 생각이 퍼뜩 들었다. 알리바이 트릭의 경우 살짝 눈치채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범인 근처에도 못갔다. 사실 읽으면 읽을수록 의심스럽지 않은 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모두 동기가 있는 것 같은데 모두 알리바이가 존재하는 듯한 느낌이었달까. 절묘하게 엮이고 숨겨진 사건의 진상, 이 사건의 결말부를 읽으면서 흠칫하고 놀라지 않을 사람이 있을까 싶을 정도이다. 정말 멋진 작품이었다.

책을 처음 마주했을 때 띠지의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神)이란 표현이 눈에 확 들어왔다. 에도가와 란포, 요코미조 세이시와 더불어 일본 본격 추리소설의 신이라 일컬어지는 야유카와 데쓰야의 작품은 다른 두 작가의 작품과 달리 이번에 처음 번역되어 나왔다. 다른 두 작가의 경우 워낙 유명하고 많은 작품이 번역되어 나왔지만, 유달리 이 작가만 이제 처음으로 번역되어 나온 건지 의문이 생긴다. 다르게 생각하면 지금이라도 이렇게 번역되어 나온 것을 기뻐해야 하는 것이 먼저이겠지. 앞으로도 꾸준히 번역본을 만나볼 수 있었으면 좋겠다.

역자 후기를 보면서 <야유카와 데쓰야와 13개의 수수께끼>란 추리소설 시리즈에 대한 언급을 보며 군침을 삼켰다. 이 시리즈는 도착 시리즈로 유명한 오리하라 이치, 아리스 시리즈로 유명한 아리스가와 아리스, 우리에게 미미여사로 잘 알려진 미야베 미유키를 비롯해, 기타무라 가오루, 야마구치 마사야등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된 작품의 작가들과 야마자키 준, 이와사키 세이고, 가사하라 다쿠, 기다 준이치로, 쓰지 마사키 등의 작가와 함께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 작품들 중에는 이미 우리나라에 번역되어 나온 작품들도 있다. 이런 걸 보면 이 작가가 후배 양성과 더불어 앤솔로지 작업에도 얼마나 정성을 기울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렇다 보니 일본 독자들에게 본격의 신이란 애칭을 부여받을 수 없는 작가로구나 싶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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