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고 한 조각 내인생의책 푸른봄 문학 (돌멩이 문고) 8
마리아투 카마라.수전 맥클리랜드 지음, 위문숙 옮김 / 내인생의책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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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가 차서 말이 안나올 정도다. 이 책을 읽는 내내 그런 느낌이었다. 도대체 이 사람의 인생은, 길지도 않은 인생은 왜 이렇게 말도 안될 정도로 꼬이고 꼬이는 것이었을까, 하는 생각이 책을 읽는 내내 머리 한 구석을 맴돌았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마리아투가 겪은 한 가지 일만으로도 미쳐버리거나 삶을 마감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을지도 모른다. 그 고통, 절망, 상실감. 마리아투는 이 모든 걸 어떻게 견뎌낸 것일까.

시에라리온. 아프리카 서부에 위치한 작은 나라. 오랜 기간 식민지배를 받았고, 그후 11년간의 내전을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다. 기대수명 40세. 평균 수명 80세를 바라보는 나라에서 살며 현재 서른 중반의 나이에 들어선 나로서는 기대수명 40세란 말이 실감나지 않는다. 가난한 아프리카에서도 가장 가난하달 정도로 국력도 경제력도 갖추지 못한 나라의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마리아투의 어린 시절은 비교적 행복했다. 비록 부모님이 아닌 고모의 가족과 함께 살았을지라도, 그 지역의 풍습상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던 것이었기에 마리아투는 그런 것에 대해 아무런 위화감이 없었다.

하지만 열네살이 되던 해 고모부의 친구인 살라우란 남자가 마리아투를 두번째 아내로 맞으려 했고, 그 남자에게 강간당한 후 임신하게 된다. 그러나 마리아투의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내전으로 인해 정부군과 대치하던 반군들이 마리아투가 살고 있는 마을로 들어와 사람들을 무차별 학살하기 시작했다. 마리아투와 사촌 오빠들은 살아 남았지만 두 손을 잘렸다. 프리타운의 수용소에서 살면서 마리아투는 구걸을 하는 것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갔다. 원치 않는 임신, 두 손이 없는 장애. 아이가 태어났지만 마리아투는 아이에게 정을 붙일 수 없었고, 결국 아이는 열달만에 영양실조로 죽고 만다.

제대로 된 교육도 받지 못한 마리아투는 자신이 임신한 것도 몰랐다. 또한 어떻게 아이를 가지게 되는 것인지도 몰랐다. 나중에 자신의 사연을 듣고 살라우가 자신을 임신시켰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손을 자른 반군 소년은 '대통령에게 투표하지 못하도록'이란 이유를 댔지만, 마리아투는 대통령이란 말도 투표란 말도 그때 처음 들었다. 마리아투에게 있어 세상은 부조리하고 불공정했을 것이다. 하지만 마리아투가 그런 시련과 절망을 겪으면서도 살아남을 수 있도록 해준 것은 가족들이었다. 수용소 사람들 중에는 장애를 입었다고 자신의 가족을 버리는 사람도 있었지만, 마리아투의 가족들은 서로를 의지하며 서로를 소중하게 여겼다. 가족의 연대감이 그녀를 지탱시켰다.

그리고 수용소에서의 연극은 마라아투의 울분과 절망감을 표출시키는 역할을 했다. 자신이 어떤 일을 겪었는지 이야기함으로써 마음은 조금씩 치유되어갔다. 또한 마리아투의 이야기를 듣고 관심을 가져준 영국인 데이비드와 캐나다인 빌의 도움으로 마리아투는 아프리카를 벗어나 유럽과 북아메리카로 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영국에서의 생활은 힘들었다. 기후도 맞지 않았고, 의수는 마리아투에게 있어 큰 족쇄였다. 그후 캐나다로 건너가 또다른 시에라리온 사람들의 집에서 생활하면서 마리아투의 생활은 크게 변하게된다. 학교에 다니면서 꿈을 키워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반군 소년병을 만난 마리아투는 용서와 화해란 것을 배우게 된다.

마리아투가 자신의 이야기를 담은 책을 펴낼 결심을 하면서 떠올렸던 생각중에 가장 가슴에 와닿았던 것은 자신의 이야기가 '시에라리온에서는 늘상 있는 이야기'라는 것이었다. 우리가 보기엔 그런 일은 우리같은 사람은 평생 겪지 않을 이야기인데, 그곳에서는 일상적인 이야기라니.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내전에 희생되었고 깊은 절망과 상실과 아픔을 겪었는지 그 말 한마디로 보여주는 듯 하다. 하긴 마리아투의 몇 안되는 가족도 그렇게 많이 희생되었으니,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이겠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겪는 힘겨운 일을 보면서 내심 내 일이 아니어서 다행이야, 라는 안도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마리아투의 이야기는 그런 것을 넘어선다. 그건 아마도 마리아투가 사는 곳의 풍습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는 내전같은 것은 겪어본 적이 없기에, 내 조국은 사람의 목숨을 이념과 가치관에 따라 쉽게 없앨 수 있는 곳이 아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마리아투가 겪었던 일은 내가 평생을 통해서도 겪을 일이 아니기에 그런지도 모르겠다. 그러하기에 마리아투의 이야기는 이기적인 안도감 대신 절망의 바닥에서도 가느다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던 인간의 강한 정신에 대한 경외심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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샤바케 2 - 사모하는 행수님께 샤바케 2
하타케나카 메구미 지음 / 손안의책 / 2007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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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에도의 상가 중에서도 손꼽히는 나가사키야의 도련님 이치타로는 삼천살 먹은 요괴의 손자이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건강한 날보다 앓아 누워지내는 일이 더 많다. 요괴를 보는 능력은 있지만 특별히 요괴의 손자다운 능력은 없다. 그렇지만 인정많고 머리가 좋은 도련님은 수수께끼 같은 사건을 이부자리에 누워 해결하는 이부자리 명탐정이다. 물론 직접 조사하는 것은 힘든 일인지라 주위의 요괴들의 도움을 받지만, 그래도 인간들과 다른 감각을 지닌 요괴들의 말을 듣기만 하고 사건의 진상을 파악하는 것을 보면 참 난 인물은 난 인물이다.

부모님이나 요괴들이나 이치타로를 대하는 것은 불면 날아갈까, 쥐면 꺼질까 할 정도로 과보호. 하지만 그도 그럴 것이 유일한 후계자인데다가 반혼술로 되살린 존재이다 보니 수시로 쓰러져 자리보전하는 이치타로를 과보호할 수 밖에 없는 입장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도련님은 비뚤어지지도 않고 바른 생활 청년으로 착실하게 성장하고 있다. 뭐, 따지고 보면 비뚤어질테다! 라고 선언을 해도 주변의 요괴들이 가만히 있을 위인들이 아니기에 그럴 수도 없겠지만.

시리즈 1권인 에도시대 약재상 연속살인 사건은 장편이었다면 2권인 사모하는 행수님께는 단편 연작이다. 총 6편의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수수께끼같은 사건 풀이도 있지만 니치키의 옛날 이야기같은 것도 나와 무척 흥미로웠다.

<사모하는 행수님께>란 제목을 보고 난 푸핫하고 웃어버렸다. 물론 여기에서의 행수란 일꾼들의 우두머리를 뜻하는 말이지만 내가 사는 곳 - 경상도- 에서는 행수님이란 단어가 형수님을 뜻하기 때문이다. 형님을 행님이라고 하는 것처럼 형수님을 행수님이라고 발음한다. 난 이상하게 묘한데서 웃음이 터진단 말이지. 어쨌거나 그건 그렇고. 이 단편은 니키치에게 연문을 보낸 한 낭자의 수수께끼 같은 죽음에 대한 이야기이다. 에도 시대의 건물은 목재로 지어진 것이 많다. 특히 나가야는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는 형태라 불이 나면 번지기도 쉽고 타기도 쉬웠다. 그래서 샤바케 시리즈에는 특히 화재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다. 화재와 살인사건. 그 사이의 연관성을 푸는 가운데 드러나는 슬픈 사연. 비록 사람을 죽인 이라고 하나 범인이 그런 행동을 했던 것에는 묘하게 납득이 간다.

<에이키치의 과자>는 이치타로의 소꿉친구인 에이키치의 과자를 먹고 죽은 남자의 사건과 관련된 미스터리이다. 에이키치가 만드는 과자는 맛이 없기로 소문이 자자하지만 규베에는 늘 에이키치의 만주를 사던 사람이다. 고독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던 규베에의 사연은 가슴 한구석을 짠하게 만든다. 그가 유일한 위안을 얻었던 시간은 과자를 사러 왔을 때 에이키치와 담소를 나누던 시간이다. 다른 사람들에게는 손가락질을 받던 위인이었지만, 에이키치에겐 좋은 말동무였고, 자신의 과자를 서슴없이 사주던 사람이었기에 에이키치가 보는 규베에의 죽음은 슬플 수 밖에 없다. 이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이 시대나 지금이나 돈을 둘러싼 사람들의 욕심과 관련된 부분은 전혀 변함이 없다는 걸 느끼게 된달까. 돈은 사람을 풍족하게도 만들지만 고독하게도 만든다. 

<하늘빛 유리>는 통가게인 아즈마야에서 일하던 마츠노스케 - 이치타로의 이복형 - 과 관련된 이야기이다. 아즈마야에서 일어나는 괴사건과 그 뒤에 숨겨진 인간들의 추악한 욕망. 정말 이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인간보다 더 무서운 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또한 마츠노스케의 이야기를 보면 에도 시대가 얼마나 신분구별이 철저한 사회였는지를 잘 알게 된다. 이복형제이지만 한 명은 도련님, 한 명은 고용일꾼 신세. 지금으로서는 이해가 잘 되지 않는 부분이라 마츠노스케의 이야기가 나오면 마음이 좀 불편해진다.

새로 맞춘 이불에서 밤마다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온다는 <넉장짜리 이불>. 진심으로 공감이 가는 이야기였다. 우리가 사는 집이나 만지는 물건에는 많든 적든 간에 인간의 기가 흘러들어간다고 생각한다. 엄격한 이불집 주인때문에 눈물 마를 날이 없는 고용일꾼들. 그들의 눈물과 한숨이 이불을 만드는 방안에 쌓이고 쌓여 그들이 만드는 이불에도 흘러 들어간다, 라는 것은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라 생각한다. 더불어 다른 사람들과 교감하지 못하는 이불집 주인의 맘보를 고쳐주는 부분도 유쾌했다.

이 작품집에는 니치키의 이야기가 두 편이 들어가 있는데, <니치키의 연인>이 바로 그 두번째 이야기이다. 앞에 나온 <사모하는 행수님께>는 니키치를 짝사랑하는 여인의 연문과 그 여인의 죽음과 관련한 미스터리라면 <니키치의 연인>은 순수한 사랑이야기이다. 천년이 넘도록 한 요괴 여인을 사모하는 니키치의 이야기와 인간을 사랑하게 되어 그가 죽고 새로 태어나는 몇 백년의 시간을 홀로 기다리는 요괴 여인. 인간들은 고작 백년 남짓 사는 삶에서 수없이 많은 사랑을 하고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다. 인간과 요괴의 시간 관념이 아무리 다르다 해도 천년이란 시간은 요괴에게 있어서 아주 긴 시간임에 틀림없다. 니키치의 이야기와 인간을 사랑한 요괴 오요시의 사랑이야기. 아름다우면서도 절절한 이야기였다. 마지막 반전은 오요시의 정체. 

마지막 작품인 <무지개를 보다>는 꿈인듯 현실인듯 환상인듯, 솔직히 헷갈리는 작품. 하지만 이 이야기는 이치타로가 얼마나 요괴들을 신뢰하고 의지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요괴들만의 도련님 길들이기(?)도 흥미로웠다. 사람들이나 요괴들의 과보호를 싫어하면서도 그것에 얼마나 기대고 있는지를 깨닫는 도련님. 도련님의 성장은 앞으로도 주~~욱 이어질 듯 하다.

2권『사모하는 행수님께』는 살인 사건과 같은 미스터리와 더불어 요괴들의 사랑 이야기같은 이야기도 실려있다. 그래서 더 흥미롭고 재미있었다. 또한 겉모습과 속이 너무나도 다른 인간들의 이야기, 특히 그들이 가진 추악한 욕망을 이야기하는 부분은 역시 절로 눈살이 찌푸려진다. 지금이나 그때나 별반 다른 게 없지 싶어서 말이다.

작가 특유의 유머코드가 곳곳에서 웃음을 터지게 하는 샤바케 시리즈는 에도 시대의 풍경을 잘 묘사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요괴와 인간의 차이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다른 감각이랄까. 때론 그런 것이 섬뜩할 때도 있지만, 그것은 기본적인 성향 차이이지 근본이 악랄하기 때문은 아니다. 인간은 악랄해지기 때문에 섬뜩하다. 그것이 가장 큰 차이점이랄까. 권수를 더해갈 수록 더욱 흥미를 더해가는 샤바케 시리즈. 3권도 기대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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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 단편집 - 스켈레톤 크루 - 상 밀리언셀러 클럽 42
스티븐 킹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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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티븐 킹의 책은 별로 읽어본 기억이 없다. 오히려 원작소설을 바탕으로 한 영화을 더 많이 본 듯 하다. 캐리, 미저리, 그린 마일, 돌로레스 클레이본, 쇼생크 탈출, 스탠 바이 미 등. 영화를 생각해 봐도 스티븐 킹은 공포 소설만을 쓰는 작가는 아니다. 그래서 더 놀랍다. 공포 소설을 잘 쓰는 작가가 설마 다른 장르의 작품도 잘 쓰겠어? 라는 편견과 선입관이 와르르 무너진다. 모두 재미있게 혹은 감명깊게 봤던 영화인지라 새삼 이 작가가 정말 대단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도 든다. 

이번에 내가 고른 책은 스켈레톤 크루 (상). 이 작품집 속에는 몇년전 개봉한 영화 미스트의 원작 소설<안개>가 실려있다. 짙은 안개 속에 갇힌 사람들. 그리고 시시각각 그들의 목숨줄을 조여오는 미지의 생명체들. 아무것도 모른체 죽어가는 사람들이 보여주는 각양각색의 공포에 대한 반응은 정말로 피부에 직접 와닿는 느낌이었다. 그런 면도 좋았지만 이 영화가 진짜 마음에 든 이유는 결말부에 있었다. 결말이 그렇게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이 영화는 그렇고 그런 괴물 영화로 끝났을테지만, 경악할 만한 결말이 기다리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 결말은... 최고다.

그렇다면 원작 소설은 어떨까. 영화는 - 사실 세부적인 부분에서는 기억이 가물가물 - 원작 소설을 잘 재현해 놓았지만, 소설의 결말과는 사뭇 다른 결말을 보여준다. 아, 왠지 영화의 결말이 더 마음에 드는 걸, 하는 생각이 문득 든다. 그것은 영화를 먼저 보았기 때문은 아니다. 그쪽이 훨씬 더 현실적이란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랄까. 그렇다고 원작 소설의 결말부가 별로라는 것은 아니다. 원작 소설의 포인트는 마트안에 갇혀 버린 사람들이 느끼는 공포에 대해 직접 눈으로 보는 듯한 느낌을 주게 하는 것에 있다.

단 몇미터 앞도 보이지 않는 짙은 안개. 그리고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사람을 노리는 괴물. 하지만 그 괴물은 전체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아주 일부분만 보여줄 뿐이다. 그렇다 보니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크기는 얼마나 큰 것인지, 어디에서 인간들을 노리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괴물은 모습을 다 드러낼 때보다 살짝살짝 보이는 게 더 무섭다. 안개는 그런 역할을 충실하게 맡고 있다. 맑은 날이었다면 괴물이 그토록 무섭게 다가왔을까.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각이란 감각에 대부분을 의존하고 있는 인간의 존재에 있어 시각이 차단되었다는 것은 커다란 공포이다. 그런 상황에서 자신들의 주위로 슬금슬금 다가오는 미지의 존재는 인간의 공포를 극에 달하게 만든다.

그렇다 보니 마트안에 갇힌 80여명의 사람들이 제각각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특히 커모디 부인의 광적인 연설이 극한의 공포에 다다른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주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생존 앞에서는 자신의 신념, 가치관 등도 쉬이 무너지기 때문이다. 미지의 존재에 목숨의 위협을 당하는 사람들의 군상극. <안개>는 짙은 안개에 가려 보일듯 말듯한 미지의 괴물과 작은 공간안에 갇혀 두려움에 떠는 사람들의 심리가 잘 반영된 소설이다.

중편 소설인 <안개>뒤에 나오는 8편의 소설은 모두 단편소설이다. 환상과 공상을 넘나드는 작품을 비롯해 인간의 편집증적인 광기를 보여주는 작품,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 타인에 대한 모멸과 멸시가 어떤 결말을 가져왔는지를 보여주는 작품도 있으며, 미지의 존재에게 목숨을 위협당하는 사람들이 나오는 작품등 다양한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중에서 <원숭이>는 악령이 들린 인형을 생각나게 하는 작품인데, 실제로 이 원숭이가 하는 것이라곤 심벌즈를 울리는 일밖에 없지만, 그것이 인간에게 어떤 편집증적인 광기와 공포를 선사하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사탄의 인형처럼 직접 움직이는 것이 아니지만 원숭이가 심벌즈를 울리는 행위는 누군가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다. 그것이 정말 인형의 짓인지 아니면 우연한 결과인지 읽다 보면 고개를 갸웃하게 된다. 혹시 할이 보는 것은 모두 환상이나 망상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기 때문이다.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어른이 된 할을 괴롭히는 것이 아닌가 싶은 생각도 들지만 마지막 부분을 보면 정말 악령이 들린 원숭이 인형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시공간을 뛰어넘는 사람들에 관한 두 가지의 이야기는 무척이나 흥미롭다. <토드 부인의 지름길>은 공간을 통해 시간을 뛰어넘는 사람들의 이야기이고, <조운트>는 공간 이동을 통해 시간의 흐름을 뛰어넘는다는 설정이기 때문이다. 전자는 유쾌한 반면, 후자는 음울하다는 것도 흥미로운 점이다.  

미지의 괴물, 환상과 망상, 편집증적인 광기, 인간끼리의 차별과 모멸과 멸시, SF적인 면이 돋보이는 시공간 사이로의 이동 등 소재도 다양할뿐더러 결말 부분도 각기 다른 느낌을 갖게 하는 총 9편의 작품들은 스티븐 킹의 단편 소설의 재미를 한껏 느끼게 만들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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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을 위로해줘
은희경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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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은 어른이 되고 싶어 한다. 어른은 소년이었던 때를 그리워한다. 소년은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하지 못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단지 자신은 나이가 어리기 때문에 할 수 없는 것이 많을 뿐이라고 생각할 뿐. 그러나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면서 나이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많은 것이 아니라 자신을 둘러싼 환경때문에 자신이 할 수 없는 것이 많다는 것을 불현듯 깨닫게 된다. 어린 시절 보았던 어른의 여유는 어른의 허세였다는 것도 알게 된다. 하지만 자신이 약해 보이는 것이 싫어서 어른이 된 소년 역시 허세를 부리고 만다. 그리고는 어린 시절의 자신을 그리워한다. 그 시절의 무모한 용기, 어설픈 열정 같은 것들을. 그래서 소년과 어른은 서로를 동경하고 그리워하면서도 늘 평행선을 달릴 수 밖에 없다.  

여기 아직 소년이지만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 있는 아이가 있다. 이름은 강연우. 고교생이다. 싱글맘인 엄마 신민아씨와 함께 살아간다. 연우의 어린시절부터 엄마의 육아방침은 철저한 방목. 자유를 주는 대신 언제든 기댈 수 있는, 선을 넘어가지 않도록 해주는 울타리 역할을 엄마가 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연우는 편모가정의 아이일지라도 비뚤어지지는 않았다. 때론 사춘기적인 일탈을 하고 싶어 '나 비뚤어질테야'라는 행동을 보이긴 해도 늘 그자리로 돌아온다.

연우는 전학과 이사를 동시에 했다. 이사 첫날 자신의 방을 올려다 보는 한 소녀를 만나게 된 연우는 그 소녀가 이채영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고, 자신과 동갑내기이며, 같은 학교에 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우에게는 또다른 친구인 독고태수가 있다. 그는 조기유학을 다녀온 아이이며, 그곳에서 무척 힘든 일을 겪은 듯 하다. 태수에게는 여동생 마리가 있는데, 태수와 같은 학년이다. 태수네 집은 겉으로 보기엔 완벽에 가까운 행복한 집이지만 어디인가 일그러져 있다. 그건 채영이네도 마찬가지. 어린 시절 영재교육을 받았지만 일반 학교에서는 학습부진아로 낙인찍힌 이력이 있다. 마리는 모범생이자 어른들이 좋아하는 타입의 아이로, 어떻게 보면 어른들이 자신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다 꿰뚫어보고 있는 영특한 아이이다. 그래서 그런 것을 부담스러워하지만 오빠 태수를 걱정하는 부모님때문에 바른 생활 어린이로 살아가고 있다.

『소년을 위로해줘』는 이렇듯 남녀 고교생 네명과 그들의 부모인 어른들이 엮어가는 이야기이다. 연우가 살아가는 10대 청소년의 세계와 연우가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가 절묘하게 비교된다. 사실 어떻게 보면 연우의 환경은 특수하다고도 할 수 있다. 싱글맘인 엄마는 지금 연하남과 열애중. 연우는 지금 엄마가 사귀는 재욱에 대해서는 반감은 가지고 있지 않다. 엄마가 솔직하게 연우를 대해서일지도 모르겠다. 어른의 여유를 보이기도 하지만, 때로는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부모님들은 우리들에 대해 늘 강한 모습만 보이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연우의 엄마는 좀 다르달까. 그래서 연우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털어놓는다. 친구같은 엄마와 아들이다. 하지만 역시 엄마는 엄마이기에 연우에게 자신의 모든 속내를 털어놓지는 않는다. 연우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해도 어차피 이해하거나 배려해줄 수 없다는 것도 이미 잘 안다.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부모자식간이 얼마나 될까.

태수네 집을 봐도 채영이네 집을 봐도 부모와 자식은 단절되어 있다. 태수네 부모님은 마리에게 지나친 기대를 걸고 있고, 태수가 혹시 마리에게 폐를 끼칠까 걱정한다. 채영이네 역시 가부장적인 아버지와 마음을 닫은 엄마 사이에서 채영은 방황한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겉으로 보기엔 이상적인 집이라고 해서 속까지 이상적인 것은 아니다. 물론 연우네는 겉으로 보기엔 문제가 있어 보여도 오히려 태수네나 채영이네보다는 부모자식간의 거리가 가깝다. 그런 걸 보면 참으로 묘하다. 물론 이것이 이야기이기 때문에 가능한 설정인지도 모르고, 진짜 현실속에도 연우네 같은 집이 존재할지는 몰라도 이건 작가의 의도가 분명하다는 생각이 든다. 무너져 버린 현대 가족을 이토록 뚜렷하게 비교해서 보여주는데에는 이런 설정만큼 좋은 것도 없으니 말이다.

소년시기의 사랑, 우정, 그리고 소년이 바라보는 어른들의 세계와 어른들의 사랑 이야기. 그리고 어른들의 세계에서 숨막혀 하는 아이들의 작은 일탈. 『소년을 위로해줘』는 가벼운 필치로 지금을 살아가는 아이들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언젠가 아이였던 어른들이 아이였던 시절을 깡그리 잊고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하고, 여전히 아이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지만 이미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체념하면서 사는 모습을 보여주기도 한다.

작품에서는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연우의 엄마의 글에 등장하는 채영의 아버지는 우리 시대의 평균적인 어른의 모습이자 부모의 모습이다. 자신도 꿈이 있었고 동경하던 것이 있었고 어른이 되어 가는 과정에서 참으로 많이 변해버렸다는 것을 알지만, 자신은 결코 예전 그 시절에 품었던 이상적인 모습이 될 수 없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는 어른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어쨌거나, 대결할 힘을 갖추지 못했으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이 동의하지 않는 가치관에 따르는 척해야 하는 미성년자 신분. 우리들, 그래서 자꾸 비밀이 많아지고 자기 방으로 숨어드는 건가. 이런 식으로 어른이 되면 우리가 미워하던 사람들처럼 위선적이고 허세만 부리는 거 아냐? (310p) 

나도 서른이 넘은 어른이라 이런 마음이 이해가 된다. 하지만 아이들 입장에서는 그저 답답해 보이겠지. 왜 저러고 사나 싶겠지. 그러면서 가부장적 권위를 내세우는 게 이해도 되지 않겠지. 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자리를 찾고 싶은 어른의 마음은 그 나이엔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겠지. 그리고 나서 어른이 되면 자신이 그런 어른들이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을 서서히 잊어 가면서 또다른 정형화된 어른이 되어가겠지. 

그리고 어른이 되어 실망하겠지. 문득 돌아본 자신의 모습에. 결국 이러고 살려고 그렇게 바르작대면서 살아왔나 싶어서. 제대로 된 출구도, 비상구도 없는 세상에 갇혀 살면서 유일한 해방구로 여겨지던 힙합의 혁명 정신에 빠져 있다가도 언젠가는 그런 생각을 했던 자신이 있었다는 것이, 그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었다는 사실이 유치해질지도 모르지. 그래도 어쩌겠니. 이게 현실인걸. 

겉으로 보기엔 딱딱해 보이는 정형화된 틀안에서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어른들도 소년인 적이 있었다. 그리고 속으로는 소년 시절의 열정을 되새기면서 살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소년시절의 열정과는 달라져버렸다. 인간이란 나이를 먹으면서 점점 달라지고, 그 시간이 그런 열정에 뭔가를 덧칠하거나 빼버리게 되면서 완전히 똑같은 열정은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되니까. 그저 비슷할 뿐. 그래서 어른들은 자신 안의 숨겨둔 소년을 혼자서 위로하며 평생 살아가게 되겠지. 다른 사람이 알게 되면 나이값 못한다, 철없다는 소리를 듣게 되니까. 진짜 소년일 때는 어리니까 어른들로부터 그렇다고 생각해주고 때로는 배려받기도 하지만, 어른이 되면 그럴 수가 없으니까.      

연우도 이젠 어른들의 세계에 발을 들여 놓았으니 서서히 그 의미를 깨달아 가겠지. 그리고 평생 그것을 느끼면서 살아가겠지. 그리고 연우 역시 스스로를 위로하면서 살겠지. 그런 연우를 보며 나도 나의 소녀시절과 지금과 더 나중에 대한 생각을 하며 위로받으며 살겠지. 위로란 것은 결국 각자의 몫이란 걸 마음속에 담아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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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전설이다 밀리언셀러 클럽 18
리처드 매드슨 지음, 조영학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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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년 전 영화 <나는 전설이다>를 봤을 때만 해도 원작소설이 따로 있는 줄도 몰랐다. 이 책을 알게 된 계기는 얼마전 읽었던 스티븐 킹의 책을 통해서이다. 스티븐 킹이 말하는 호러 문화에 대한 이야기에서 공포 소설 파트에 등장한 리처드 매드슨, 그리고 그의 책인『나는 전설이다』와『줄어드는 남자』는 내 흥미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두 권의 책 중에 무엇을 먼저 읽을까 생각하다가 영화로 먼저 접했던『나는 전설이다』를 선택했다. 보통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영화의 경우 지나치게 원작에 충실하다거나 아니면 영화에 맞게 스토리를 변형시킨다. 『나는 전설이다』는 어땠을까. 일단, 원작 소설을 읽고난 소감을 말하자면, 난 원작 소설 쪽에 손을 번쩍 들어줄 수 밖에 없다. 그렇다고 영화가 나빴다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주인공이 백인에서 흑인으로 바뀌었기 때문이라는 그런 말도 안되는 이유는 아니다. 윌 스미스의 연기도 좋았고, 스토리도 좋았지만 난 영화보다는 원작의 결말 부분이 훨씬 더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또한 개를 등장시키는 부분도 소설쪽이 더 인상적이었다. 

핵전쟁 이후 변종 바이러스가 인간들을 공격한다. 그 병은 살아있는 인간을 살아있는 시체, 즉 흡혈귀로 만드는 바이러스였다. 로버트 네빌은 감염되었지만 무슨 연유에서인지 기적적으로 회복, 가족 중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그의 가족이었던 아내와 딸은 바이러스의 희생자가 되었다. 그러나 정부는 이에 대한 대책도 세우지 못한 채 속수무책으로 바이러스는 퍼져나갔다. 과학이 전설을 따라잡지 못했기 때문에 전설이 과학을 통째로 삼켜 버리고 만 것이다. (30p)

네빌은 매일 밤 찾아오는 흡혈귀들의 공격에 대비하고 밤에는 이 바이러스에 대해 연구한다. 고독한 생활이지만, 그는 어딘가에 자신처럼 살아남아 있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낮에는 밤에 공격당한 집을 보수하거나 음식을 조달하고, 흡혈귀들을 없애러 다닌다. 예전에는 사람이었지만 지금은 오직 식욕이라는 본능만이 남은 어둠의 존재들. 그들 속에서 혼자 남은 네빌은 고독하다. 작품 전반에서 네빌의 고독이 느껴진다. 그래서 네빌은 때로는 그들과 같은 흡혈귀가 되어 버릴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자신은 인간이라는 것을 결코 잊지 않는다. 그들이 비록 예전에는 인간이었어도 지금은 인간을 공격하는 무리일 뿐인 것이다.

거의 3년의 시간을 혼자 살아가는 인간에게 남은 것은 무엇일까. 매일밤 자신을 노리는 무리들에 둘러싸여 그들이 지르는 소리를 듣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그런 그에게 절뚝거리며 나타난 개 한마리는 한가닥 희망이었을 것이다. 잔뜩 겁먹은 채 밤에는 몸을 숨겼다가 낮에만 잠시 나타나는 개를 봤을 때 네빌은 춤이라도 추고 싶지 않았을까. 이미 다른 동물들 역시 흡혈귀의 존재로 변했기에 멀쩡하게 낮에 돌아다니는 개를 봤을 때 그는 인간이 아닌 동물이었을지라도 동지감을 느꼈을 것이라 생각한다. 얼마 간의 공을 들여 그 개를 집으로 데려왔을 때, 그리고 그 개와 함께 보낸 짧지만 의미있는 일주일은 네빌에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했고, 슬픔 역시 동반하고 있었지만 네빌의 정신을 근본적으로 훼손시키지는 못했다. 나같으면 아마도 개의 죽음이 주는 충격과 슬픔에 휩싸여 무너져 내렸을지도 모르는데, 그는 무척이나 강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이미 이 세상에는 더이상 인간이란 존재는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살아있는 시체들 사이에서도 새로운 세력이 형성된다는 것을. 바이러스는 쉽게 변종을 일으킨다는 것을. 밤에만 활동하는 좀비같은 흡혈귀의 존재가 있었다면, 변종을 일으킨 바이러스로 생겨난 흡혈귀들은 지능을 가지고 있으며, 스스로 세력권을 구축하고 신인류로 거듭나고 있었다. 결국, 현재 세상에서의 네빌은 구인류의 잔재에 불과한 것이었다.

문득 자신이야말로 비정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상이란 다수의 개념이자 다수를 위한 개념이다. 단 하나의 존재를 위한 개념이 될 수 없다. (221p)

그렇다. 예전에 인간들이 다수를 점하고 있던 세상에서는 흡혈귀같은 것이 전설의 존재였고, 비정상적인 존재였지만, 지금 인간들이 멸종하고 흡혈귀가 신인류로 등장한 시대에는 인간이 전설의 존재이자, 비정상적인 존재인 것이다. '이제 나는 전설이야' 라는 마지막 문장은 네빌이 자신의 처지를 깨닫고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받아들이는 것을 보여준다. 결국, 네빌은 전설의 존재로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야만 할 존재였던 것이다. 이 문장에서 난 진한 슬픔을 느낀다. 그리고 깊은 고독을 느낀다.

뒤에 수록된 10편의 단편들도 무척 인상적이다. 기묘한 장례식이나 영혼이 담긴 인형, 어둠의 주술이 건 저주, 머릿속으로 걸려 오는 전화 등 다양한 소재로 다양한 공포를 유발하는 작품들이 장편 소설과는 또다른 재미를 준다. 이 단편들 중에서 특히나 인상에 남았던 작품은 역시 <매드 하우스>이다. 가장 편안하고 안전해야 할 집이 어떤 식으로 인간을 공격하는지를 보여주는 작품이다. 하지만 이 작품의 포인트는 집이 인간을 공격한다는 것 뿐만은 아니다. 인간이 집안에서 하는 어떤 행동이 집의 기운에 커다란 영향을 주는지가 제일 큰 포인트로 보여진다. 매일 화를 내고 짜증을 내고 물건을 함부로 다루는 행위를 통해 집안 구석구석에 나쁜 기운이 쌓여간다. 어쩌면 영적인 에너지 반응이라고도 할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이 사용하는 물건에는 작든 크든 그 소유자의 기운이 깃들 수 밖에 없다는 것으로 보는 것이 좋을 듯 하다. 왠지 동양적인 모티브같기도 한데, 사실 이 작품이 두려웠던 것은 난 이런 것을 믿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물건에는 사람의 기운이 깃든다는 것을 믿고 있기 떄문이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니고 내 집 자체가 사악한 기운을 품고 사람에게 적대적이 된다는 것은 가장 안전한 곳이 가장 위험한 곳이 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더욱 두려워지는 것이다.

장편소설인 <나는 전설이다>는 혼자 남은 인간의 고독과 깊은 슬픔을 보여준 소설이었다면 뒤에 실린 단편들은 짧은 분량에서 큰 임팩트를 주는 소설들이다. 마지막 한 문장으로 반전의 재미를 살린 작품도 있고, 푸흡하고 짧은 웃음이 터지게 만드는 작품도 있었다. 장편이든 단편이든 모두 그 나름의 완결성을 가지고 독자에게 큰 인상을 남기는 작품을 쓴다는 것은 정말로 대단한 재능이라 생각한다. 전설적인 소설, 전설적인 작가란 호칭은 전혀 과장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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