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이 지고 나면 잎이 보이듯이 - 이해인 산문집
이해인 지음, 황규백 그림 / 샘터사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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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인 수녀님의 글은 예전에 미니홈피를 운영할 때 랜덤으로 들어간 다른 사람들의 홈피에 인용된 시로 처음 만났다. 정확히 몇 번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많은 사람들 홈피나 블로그에서 이해인 수녀님의 시를 만날 수가 있었는데, 정작 책으로 읽게 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그래서 살짝 두근거리는 마음을 갖고 예쁜 표지를 넘겼다. 

총 여섯개의 장으로 구분된 이해인 수녀님의 글은 수필, 시, 편지, 기도와 묵상 등 다양한 모습으로 수록되어 있다. 시는 많이 접했지만 산문은 처음이라 수녀님의 다른 모습을 뵙는 듯한 기분이었다. 시와 달리 수필이나 일기에 드러나는 수녀님의 모습은 뭐랄까 소녀적인 감성이 가득했다. 자신의 투병생활에 관한 일, 어머니에 대한 추억, 친구와의 추억 등에 고스란히 담겨있는 애정과 감사함, 그리움은 평범한 단어로 씌어져 있지만 반짝반짝 빛이 난다.

어렵고 난해한 단어로 자신의 감성을 표현하는 문인도 많지만 난 역시 이렇게 마음속의 경계를 확 풀게 만드는 쉬운 단어로 씌어진 글이 좋다. 특히 어머니에 대한 추억과 그리움을 담은 글을 보면서 엄마에게 더 잘해야겠단 생각도 들고, 친구를 떠올리며 쓴 편지 일기를 보면서 난 고작해야 친구와 문자나 주고받을 뿐인데 싶은 생각도 들었다. 그러고 보니 일기도 한참이나 쓰지 않았구나 싶기도 하다. 대학시절까지는 매년 일기장을 사서 조금씩이나마 일기를 썼지만 그후론 일기는 커녕 다이어리에 일정조차 기입하지 않고 살고 있는데...

수녀님의 일기에 담겨 있는 소박하지만 정겨운 일상들은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흐름에 대한 기록처럼 여겨져 괜시리 샘도 났다. 나도 매일매일 비슷비슷한 나날을 보내고 있지만 일기로 적어 보면 매순간이 달리 여겨질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차피 오늘이 가면 어제가 된다. 지금이 가고 나면 과거가 된다. 시간은 앞으로만 흐르기 때문이다. 자그마한 일상이라도 틀림없이 감사할 일이 있을테고, 화나는 일도 있었을테고, 기뻐했던 일도 있었을테고, 즐겁고 행복한 일도 있었을텐데, 난 그런 순간을 그냥 지나쳐버리고 있는 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든다. 

수녀님의 글을 보면서 가장 놀라웠던 것은 수녀님의 수녀로서의 삶과 인간으로서의 삶이 절묘하게 섞여 있다는 것이다. 일상에 관한 이야기나 어머니, 친구, 지인들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수녀님의 인간적인 매력이 그대로 묻어나지만, 누군가를 위한 기도나 묵상에 관한 글을 보면 수녀님으로서의 삶이 그대로 묻어난다. 난 수녀님들을 볼 때마다 신에 귀의한 분들로 우리같은 평범한 사람과는 전혀 다른 사고방식과 생활을 한다고 생각했는데, 이해인 수녀님의 글을 보면서 그건 나의 선입관이란 걸 깨달았다.

또한 수녀님의 인맥에도 무척 놀랐다. 같은 종교에 귀의하신 분들과는 당연히 친분이 있겠지만, 종교를 넘어선 만남, 문인들이나 예술가들과의 교류를 비롯해 우리같은 일반인들, 더 나아가서는 죄를 짓고 감옥에 있는 사람들과의 교류에 이르기까지 수녀님의 행적을 밟아가다 보면 참 부지런하신 분이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이렇게 많은 일을 하면서도 많은 책들을 펴낼 수 있는 것은 일상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메모와 일기, 편지 등이 기반이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고 조심스레 짐작해 본다. 그러하기에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선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게 아닐까.

소박하지만 아름다운 글과 잘 어울리는 그림들도 참 좋았다. 또한 중간중간 들어가 있는 이해인 수녀님의 소녀같은 미소도 참 좋았다. 이렇게 미소가 해맑은 분이라서 글도 이렇게 해맑구나 싶은 생각도 든다. 평범한 단어가 만들어내는 일상의 반짝임. 수녀님의 글은 꼭 그런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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ファインダ-の熱情 初回限定版 (ビ-ボ-イコミックス) [コミック]
야마네 아야노 지음 / リブレ出版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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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인더 시리즈 6권! 언제 나올까 싶었는데 드디어 나왔다. 물론 번역본 5권이 나온 건 얼마되지 않지만, 원서로 따지면 거의 2년만에 나왔으니 오랜만이지. 눈을 뗄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작화에 스토리도 내 타입이고, 아~~ 볼 때 마다 떨리는 이 기분. (아사미와  페이롱, 완전 좋아. 두 사람 다 넘쳐흐르는 색기는 어쩔!)

특종 사진을 찍으려다 우연히 뒷세계의 아름다운 실력자 아사미 류이치로와 만나게 되어 그의 연인 아닌 연인이 되어 살아 가고 있는 프리랜서 사진기자 타카바 아키히토. 이번엔 어떤 사건이 터지게 될까. 홍콩편이 워낙 스케일이 컸던지라 이번엔 숨고르기 정도가 아닐지.

제일 먼저 등장하는 이야기는 <続・かりそめの楽園 ブラッディマリーの海に溺れて>은 홍콩에서의 감금 생활 및 일본 · 홍콩 · 러시아의 실력자들이 한판 붙었던 그 사건에서 해방된 아키히토가 아사미와 동반 귀국하기 전에 들렀던 휴양지에서 있었던 일에 관한 내용이다. 총격으로 상처를 입은 아사미의 휴양 겸 감금을 당한채 목숨의 위협까지 받아야 했던 아키히토의 트라우마 극복을 목적으로 한 여행에 관한 이야기인데, 알고 보니 아키히토의 회상이었군. 

어쨌거나 무사히 일본으로 돌아온 아키히토는 다시 자신의 일로 돌아가려고 아사미로부터 또 도망을 치지만, 역시 아사미는 아키히토를 자신의 손바닥 위에 올려 놓은 존재였으니... 집으로 돌아가면 뭐해. 짐이란 짐은 아사미가 싹 자신의 집으로 옮겨놨는데..뭐. 그러나 저러나 아키히토가 갈 곳이 없어져야 자신에게 돌아올거라 생각하는 아사미도 참 재미있다. 어떻게 보면 아사미답고, 또 어떻게 보면 아사미답지 않달까.  

<エスケイプ アンド ラブ>는 자신과 사는 세상이 너무나도 다른 아사미를 피해 도망다니는 아키히토와 아키히토를 손바닥 위에 올려 놓고 관찰(?)하는 아사미의 이야기와 더불어 아키히토가 사진기자로서 특종을 잡기위해 고군분투하는 내용을 그리고 있다. 이번에는 아이돌의 스토커와 관련한 트러블에 휘말리는 아키히토. 어떻게 보면 아키히토는 트러블을 몰고 다니는 존재다. 아사미도 인정했듯이.

아사미가 그토록 충고해도 귓등으로 흘려듣더니, 결국 위험에 쳐해서 또다시 아사미의 도움을 받고 마는 아키히토였다. 그렇게 보자면 아사미는 아키히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반드시 나타나 그를 구해주는 뒷세계의 기사님!? 

뭐, 이 스토커가 알고 보니 아사미의 일과 관련된 인물이어서 아사미가 아키히토를 도와줬다고도 볼 수 있지만, 그게 다는 아니지. 홍콩에서는 자신의 목숨과 거대한 이권을 포기하면서까지 아키히토를 구해준 아사미가 아니더냐. 그런 반면 아키히토는 특종이냐, 아사미냐를 두고 고민을 하는데, 그건 이미 정해진 거 아니니, 아키히토. 근데 재미있는 건 아키히토는 죽어라 고민을 하는데, 정작 아사미 본인은 그 일에 대해 별로 신경쓰지 않는다는 거~~~

도망을 쳐도 결국 아사미에게로 돌아오게 되는 아키히토. 평범한 일반인으로 살아 왔던 아키히토에게 있어 고급회원제 클럽의 오너 및 무기거래상으로 살아가는 아사미의 생활이란 것이 거북할 뿐이지만, 이미 아사미에게 마음을 허락해 버렸으니, 결국 요요처럼 돌아오고 마는 거지. 아사미는 그런 아키히토가 귀여워 견딜 수 없나 보다. 아사미의 입에서 귀엽다는 말이 나오는 걸 보면 웬지 답지 않아, 이런 생각도 들지만 그것도 아키히토를 만남으로서 바뀐 아사미의 모습이 아닐까 싶은 생각도...

뒤에 수록된 단편은『파인더의 표적』에 실렸던 단편 <사랑하는 식물>로 시작되는 '사랑하는~' 시리즈 이다. 이번에는 수학여행편인데 사진기자 겸 보호자로 아키히토가 함께 동행한다. 난 아키히토가 이 이야기에 왜 나왔냐 싶었더니 그런 이유가 있었다. 교토에서의 수학여행, 아직 10대인 히야마와 미즈노가 보여주는 귀여운 사랑 이야기~~ 더불어 아키히토때문에 교토에 등장한 아사미도 볼 수 있었다. (럭키!)


 
 

초회한정판 부록인 소책자에는 짧은 만화가 실려있다. 페이롱과 아사미가 동시에 등장. (올레!) 오랜만에 눈이 무척 즐거워졌달까. 비록 페이롱의 중국옷을 입은 모습을 못봐서 그게 매우 몹시 아쉽지만, 그래도 페이롱을 다시 볼 수 있어서 진짜 만족. 내용으로 봐서는 동인지 내용이다. (냐하하) 그 이상은 비밀. 초회한정판이라 일반 단행본에 비해 가격은 좀 비쌌지만 소책자로 더블 만족이다. 

사진출처 : 초회한정판 부록 소책자 앞뒷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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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걸음 물러나 주세요
모토 하루코 지음 / 삼양출판사(만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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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토 하루코라는 작가에 대해선 아예 모르지만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는 것과 표지 그림이 무척 인상적이란 것 두 가지다. BL계에 생식하고 있는 작가가 워낙 많아서 난 좋아하는 몇몇 작가 위주로 작품을 선택하긴 하지만 원하는 때에 늘 그 작가들의 작품을 볼 수가 없기 때문에 때때로 이렇게 작가를 무작정 선택해 보는 일이 종종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렇게 선택된 이 작품은 내게 어떤 느낌을 남겨주었을까.

타인과 접촉하는 것이 너무나도 고역인 역무원 다나카는 어느 날 우연한 일을 계기로 회사원인 도지마의 관심을 끌게 된다. 서로 간에 딱히 뭐라고 꼬집어 말할 수 있는 일은 없었으니, 도지마 쪽에서 일방적으로 그를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학창시절 선배가 남긴 마음의 상처때문에 사람들과의 접촉을 극도로 꺼리게 된 다나카는 도지마와 같은 자리에 있는 것만으로도 어색하다. 그런 다나카의 반응에는 아랑곳없이 도지마는 조금씩 다나카의 곁으로 다가선다.

한편으로는 두려우면서도 도지마를 보는 건 좋다. 필사적으로 자신을 방어하면서도 허술함이 많다. 다나카는 그런 캐릭터이다. 그런 반면 도지마는 능숙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나름대로 다나카와의 만남을 리드해 가게 된다. 근데 도지마를 보면서 조금 마음에 안들었던 것은 다나카가 사람들과의 접촉을 무서워한다는 걸 알면서도 조금은 서두르는 기색을 보이는 것이다. 그랬다가 다나카가 더 멀리 도망가버리면 어쩌려고, 이런 생각이 들었달까.

한 걸음 다가서면 두 걸음 물러서던 다나카가 조금씩 그 거리를 좁혀오는 도지마에게 곁을 허락하기 시작하게 되지만 다나카의 마음에 심각한 상흔을 남겼던 기억의 주인공이 우연찮게 등장하면서 다나카는 또다시 겁을 집어 먹게 되는데...

뭐랄까, <한 걸음 물러나 주세요>는 읽으면서 묘한 기분이 들었다. 두 사람 다 말이 너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랄까. 만화란 것이 말이 없으면 표정이나 행동으로 그 사람의 심리를 표현해 내기에 충분한 메리트가 있는 장르지만 이 작가의 경우 아직 작화 부분이 어색한 점이 많아 눈빛이나 표정, 몸짓만으로 충분한 감정이 전달되지 않았다. 그런 데다가 행간의 거리가 너무 멀어서 뭔가 좀 허전한 느낌이 들었달까. 그런 면에서 보자면 빈틈이 많이 보이는 작품이긴 하지만, 그게 또 매력이기도 하달까. 그래서 참 미묘하다.

10년지기 친구 사이에서 싹튼 사랑의 순간을 묘사한 <THINK DRIP> 역시 마찬가지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나 주세요>와 비슷한 느낌이다. 자신의 감정을 입으로 뱉어내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생길까 두려워 하는 요시노는 자신의 감정을 드러내지 못해 오해를 사는 다나카와 묘하게 닮아 있다. 그런 반면 미야모토와 도지마는 약간 성급하달까, 그런 면이 닮아 있고. 하여튼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사람들 곁에 있으면 애가 타는 건 이쪽이다. (미야모토랑 도지마의 경우처럼)

아직 좀 서투른 스토리와 작화란 생각이 들지만, 따스한 느낌은 충분하다. 앞으로 이 작가가 어떤 작품을 그려낼지는 잘 모르겠지만, 기대해 보고 싶은 작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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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04 23: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저도 제목이랑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클릭했더니 스즈야님의 리뷰가!
이번엔 살 작품이 많아서 일단 요건 보류해두겠습니다~
그런데, 그것참, 스즈야님이 말한 그 미묘함, 궁금하긴 합니다 ㅋㅋ

스즈야 2011-05-04 23:49   좋아요 0 | URL
저도 사실 표지랑 제목에 많이 끌리는 편이라 제목이 헐~~ 이런 건 절대 안사요. 부끄러워서.. ㅋㅋㅋ 근데 이건 제목이 시적이라 참 맘에 들었죠.
음.. 그 미묘함... 읽어보시면 납득하실듯. 설명하기 참 미묘한.. (푸핫.. 웬지 말장난같은) 부분이 있거든요.. ^^

2011-05-08 1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부끄럽다는 말 왤케 공감이 갈까요 ㅋㅋㅋㅋ 정말 너무 자극적인 제목들은 어딘가 콕콕 찔러요 ㅋㅋㅋ

스즈야 2011-05-08 22:02   좋아요 0 | URL
푸핫. 제가 가진 책 중에 가장 그런게 <장교의 젖은 순결>이란 책입니다. 이건 제가 산 건 아니고, BL리뷰 대회 선물이었는데요, 책보자마자 뜨아아아악. 소리가 먼저 나왔다능.
 
남성성과 젠더 자음과모음 하이브리드 총서 3
권김현영 외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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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 무슨 수업이었는지는 기억이 안나지만 - 우리말로 성(性)이란 것을 지칭하는 단어인 섹스(Sex)와 젠더(Gender)의 차이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다. 그 당시 내가 어떤 대답을 했는지 역시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 너무 오래전이라서 - 섹스란 것은 일단 신체구조로 봤을 때 나뉘는 성별을 의미하며, 헤테로섹슈얼(heterosexua, 이성애자), 호모섹슈얼(homosexual, 동성애자), 바이섹슈얼(bisexual, 양성애자)등에서 볼 수 있듯 사랑하는 대상이 이성이든 동성이든 상관없이 자신의 신체구조나 성별에 의문이나 위화감을 갖지 않는 것으로 보아 신체적인 부분에 국한되는 성이다라고 대답했고, 젠더는 트랜스젠더(transgender)라는 용어에 사용되듯이 자신의 성별에 대해 거부감을 갖고 있는 면을 볼 때 이는 정신적인 면이 중시되는 성이라 대답했다. (그 당시에는 트랜스젠더가 트랜스섹슈얼로도 쓴다는 걸 몰랐다) 사실 그 생각은 지금도 별로 변함이 없지만, 사실 이런 정의는 아주 소극적인 정의이며 협소한 정의라고도 할 수 있다.

일단 남성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생물학적인 성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볼까. 남성과 여성의 생물학적 구별은 어떻게 가능할까. 생물학적 접근에서 가장 중요시되는 것은 역시 외부성기의 형태일 것이다. 어떤 구조의 외부성기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성별이 결정되며 그것이 모호할 경우에는 - 인터섹스의 경우 - 의사의 기준에 따라 성별이 결정된다고 한다. 이럴 경우 생물학적인 성이란 것도 근거가 모호해진다. 우리는 생물학적인 성이라고 하지만 결국 이는 인위적으로 구분된 성이 아닌가 하는 담론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라는 이야기를 읽으며 이런 식의 접근도 가능하구나 싶은 생각이 들어 무척 흥미로웠다. 그렇게 보자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남성, 여성이란 꼬리표가 붙게 되고 그 꼬리표에 따라 우리는 사회가 요구하는 젠더 규범에 따라 성장하게 된다. 그렇다면 젠더 규범이란 것 역시도 인위적인 성별 구별을 위한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왜 우리는 남성과 여성이라는 두 가지의 성으로 인간을 나누는 것일까. 태고의 인류는 모계사회로 시작했지만 정착을 하게 되면서 부계사회로 전환되어 갔다. 그때부터 남성과 여성의 헤게모니 싸움이 시작되었고, 그것이 힘이 더 센 남성쪽으로 기울어져가면서 남성위주의 사회가 되어 왔다는 것이 대체적이고 일반론적인 역사인식이다. 남성은 지배자, 여성은 피지배자라는 인식이 확고해진 후 그후엔 남성들 사이의 차이와 차별이 생겨났다. 여성은 남성들간의 헤게모니 싸움에 밀려 버려 역사속에서는 거의 묻혀버린 존재로 격하된다. 그렇다 보니 남성성과 여성성을 구분할 때의 이미지는 우열이란 것으로 나뉜다. 대칭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열인 것이다. 결국 남성성이란 각 사회가 요구하는 규범의 정점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남성성이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을 의미할까. 남자들이 가지고 있는 신체적 · 정신적 형질? 물론 그 의미가 맞긴 하지만 이것이 꼭 남자만이 가지고 있는 특성일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그도 그럴 것이 나도 한 때는 남자애로 오인받을 정도의 모습을 하고 다녔는데, 그렇게 보자면 당시에는 나의 성별이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가진 어떤 남성성이 발현된 결과인 것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애당초 남성성이란 어떤 것을 의미하는 것일까. 난 고작 삼십여년을 살았지만 그 기간동안에도 - 남자와 여자의 차이랄까, 남성성과 여성성의 차이등을 자각할 수 있게 된 후로 - 사회가 원하는 남성상과 남성성이 아주 빠른 변화를 보였다는 걸 보면 남성성이란 불변하는 것이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나라의 경우에 국한해서 볼 때도 이럴진대, 범위를 더 넓혀 보면 남성성이란 것은 세대에 따라 지역에 따라 나라와 국적, 인종에 따라 다양하게 발현될 수 있는 성질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나라의 경우 남자들은 이래야 하고 저래야 하고 그래야 한다는 것이 사회의 정의처럼 내려져 있는데, 그에 딱 부합하는 남자들이 얼마나 될까를 생각해 보면 그다지 많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해봤다. 결국 남성성이란 것은 남자들은 이래야 한다는 대략적인 범위를 정해놓고 그 범주에 들어가면 남성적이고, 그 범주에서 많이 벗어나면 여성적이란 말이 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각기 다른 시대를 상정해 놓고 보자면 시대에 따라 남성성이 확연하게 달라지는 것도 볼 수 있다. 조선시대는 양반계층이 남성성의 일반적 모습이었을 것이다. 문을 숭상하고 무를 배격하는 이미지의 남성이 조선시대 남성성이었다면 일제시대의 경우에는 폐병쟁이이 허여멀건 얼굴의 남성들이 그 시대 남성들을 대표하는 남성성이었을지도 모른다. 해방 후 한국전쟁을 거치면서는 허약한 남성보다는 나를 지키고 부강하게 하는 무력을 숭상하는 남성성이 한동안 그 시대를 대표했을 것이고, 군부독재가 끝나고 민주화 바람이 불어오면서부터 또다른 이미지의 남성성이 시대를 대표해 왔을 것이다. 요즘은 무슨무슨남이라 붙은 신조어가 하루가 멀다하고 생겨나는데 이는 예전과 달리 지금은 다양한 남성상과 남성성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증거가 될지도 모르겠다. 

남성을 대표하는 이미지가 이렇게 바뀌어 왔다면 소수자들은 어떤 식으로 분류해야 할까. 사실 분류한다는 의미가 저들은 우리와 다르다는 것을 미리 깔아놓고 하는 생각이지만, 딱히 분류라는 단어가 들어갈 자리에 집어넣을 단어가 생각나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되려나. 그들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라고. 

남장여자, 동성애자, 트랜스남성. 이들은 우리사회의 소수자들이다. 이들은 어디에 속하는 걸까. 일단 동성애자를 보면 게이이든 레즈비언이든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성별에 대해서는 아무런 위화감을 가지지 않기 때문에 그들은 각각 남성에 속하고 여성에 속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렇다면 남장여자는 남성에 속하는 것일까 여성에 속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 사람이 추구하고자 하는 것에 따라 갈린다. 본문에 나와 있듯 <방림한전>의 남장여성은 남자로서 살았고 남자로 죽었다. 딱히 성전환을 하지 않아도 그는 이미 정신적으로 남성이었다. 이를 여성의 남성성이라 봐야 할까? 정신적으로 남성이었기 때문에 남성의 남성성이 발현되었다고 봐야 하는 게 옳지 않을까. 이렇게 보자면 트랜스 남성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그들은 여성으로 태어났지만 신체적 성과 정신적인 성이 불일치해서 고통을 받아왔고, 성전환등을 통해 자신의 정신적 성과 신체적 성을 맞추었다. 이들은 남성인가 여성인가. 앞서도 말했듯 정신적인 면을 우선으로 놓고 보자면 이들은 남성일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이들을 남성이라 부르지 않고 꼭 다른 수식어를 붙인다. 사회규범의 허용범위를 넘는다는 뜻이겠지. 

그러나 현대사회에서는 소수자가 아닌 다수의 남성들 역시 자신의 남성성을 시험받고 있다. 마지막 담론인 신자유주의 이후의 남성에 관한 이야기를 보면 부와 권력밖으로 밀려난 남성들은 루저가 되든지 사이버마초가 된다. 이 담론은 앞에 나온 여타의 담론과 달리 내게 큰 거부감을 주었는데, 특히 초식남과 사이버마초들의 이야기가 나오면서 쓴웃음이 지어졌다. 초식남은 먹는 입만 남은 동물적 입이고, 사이버마초들은 나름대로의 정치적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는데, 내가 보기엔 사이버마초들은 근육뇌와 배설할 입만 달린 머리에 여성을 소유물정도로 생각하는 존재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이들은 남성우월주의자이며 사이버공간에서만 기를 펴는 불쌍한 소수자에 불과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다른 (성적)소수자들은 자신의 권리를 찾기 위해 애쓰고 있다면 이들은 골방에 틀어박혀 배설만 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다. 물론 내가 여자이기 때문에 이들이 그렇게 보일지도 모른다는 한계가 있지만, 그걸 떠나서 생각해 봐도 난 이들의 생각에 동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즉, 앞서 나온 다른 담론들에는 대개 수긍을 할 수 있었지만, 이 담론에 있어서만은 '돈'으로 인생이 갈린 남성들의 이야기에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난 우리나라 남자들이 자신의 남성성을 강조하고 싶을 때 하는 말이 정력과 군대라는 두마디면 다 정의된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 남자들은 이상하게 정력이란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정력보강을 위해 해외에 나가거나 이 음식을 먹으면 정력이 좋아진다고 하는 등 이상하게 정력이란 것에 집착하는 경향을 보인다. 난 티비를 보면서 그런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남자들을 보면서 얼마나 자신의 남성성에 자신이 없으면 정력에만 자신의 남성성을 거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어 웃겼다. 도대체 이런 발상은 어디에서 시작된 것일까. 이상적인 남성성이라든지 이상적인 남성상의 변화가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거의 불변하지 않는 법칙처럼 보인다. 하지만 다른 면에서 보자면 사회가 요구하는 이상적인 남성성은 많은 변화를 거듭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한편 군입대 문제로 이슈가 되는 연예인들은 우리나라의 또다른 남성성인 '군대'의 남성성을 외면했기 때문에 성토의 대상이 된다. 징병제를 그렇게 싫어하면서도 군대에 일단 다녀오거나 군대에 갈 예정인 사람들은 이런저런 핑계로 군대에 가지 않는 사람들을 배척하고 매장하는 분위기이다. 대신 스스로 군복무를 선택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아주 관대한 입장을 보인다. 지난 3월에 해병대에 입대한 배우 현빈이 여전히 국민적 영웅처럼 대접받는 것도 이런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다. 드라마로 여심을 잡았다면 해병대 입대로 남심을 장악했달까. 어떻게 보면 남성들이 현빈에 대해 지지를 보내는 것 역시 자신들의 실추된 남성성을 그가 보상해주기 때문이라고 착각하고 있는데서 나오는 것은 아닐까.   

책을 읽으면서, 젠더 규범과 남성성에 대해 이해하게 되면서, 그리고 소수자들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우리사회의 또다른 면을 보게 되었다. 내가 여성의 젠더 규범에 따라 성장해왔기 때문에 자칫 모르고 지나칠 수 있었던 다양한 이면들을 알게 되었다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우리는 인간으로 태어나 남성과 여성으로 나뉘어진다. 그리고 각각의 젠더규범에 맞춰서 성장한다. 하지만 각각의 젠더규범이란 - 이 책에서는 특히 남성성이란 것으로 말해지지만 - 유일한 것도 영원한 것도 아니다. 어쩌면 아주 먼 미래에는 남성성과 여성성이란 말 자체가 없어지고 각 개체가 가진 인간성만으로 개인을 판단하는 세상이 오지않을까 하는 낙관적인 생각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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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이 없어 8 - B애+코믹스 172
시노자키 히토요 지음, 코우사카 토오루 그림 / 대원씨아이(만화)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보통 만화 단행본은 빠르면 6개월에 한 권, 늦어도 대개 1년에 한 권은 나온다. 근데 이건 뭐, 2년 반만에 한 권이 나왔다. 잊고 살만 하면 나오는 게 아니라 잊고 살다 보면 나오는 격이랄까. 그건 일본 쪽도 사정은 마찬가지인듯. 너무너무너무 기다려지고 기대하고 있는 책이 아니니 참을만 하다. 게다가 내용은 조금씩 바뀔 뿐 거의 똑같은 걸 무한반복하고 있기 때문에, 새 책이 나와도 참신하단 생각은 안든다. 근데 왜 보는 거지?? 글쎄, 나도 알 수 없다. 단지 끊을 수 없어서!? (푸하~~)

사실 난 아야세도 싫고 카노도 싫다. 쿠바 형제가 좋다. 형인 호마레는 겉으로 보기엔 좀 무섭지만 나름대로 다정한 면이 있어서 좋고 미사오는 나사 하나 빠진 듯한 모습이 좋다. 세상에 무심하달까, 그래도 일은 잘하니...

『돈이 없어』8권에서 주목해야 할 것은 역시 아야세와 카노가 아니라, 아야세와 쿠바 호마레의 이야기이다. 카노 소무쿠는 어찌된 인간이 날로 변태기질이 더해가고 있다. 돈으로 아야세를 구출해준 건 좋은데 자신에게 솔직하지 못하고 고집만 부리면서 아야세를 아주 가지고 논다는 느낌이 든달까. 자신 나름대로의 애정이고 사랑이라 할지라도 내가 보기엔 그건 사육에 불과하다. 특히 새로운 휴대전화를 사주고 삐리리를 시키는 모습이라뉘. 토나온다. 이런 건. 도S가 아니고 미친S. 아야세는 이런 카노가 무서우면서도 조금씩 자신의 마음을 허락해 가고 있는데, 이건 아마도 스톡홀름 신드롬이지 싶다.

어쨌거나 카노 소무쿠는 그렇다 치고. 호마레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자신의 마음에 들어와 버린 작은 새, 아야세를 향한 호마레의 마음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간다. 때론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마음이 흘러넘치지만 허벅지를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을 삼키며 자신의 마음을 다잡고 있다. 물론 이 마음이 사장 카노한테 들켰다간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진후 도쿄만에 수장될지도 모르지만, 그게 두려워서는 아니다. 가뜩이나 잔뜩 주눅들어 있는 아야세를 곤란하게 만들기 싫어서이다. 카노는 분명 쿠바 형제에게 있어 은인이나 다름없겠지만 그건 그거고.

더불어 쿠바 형제의 과거 이야기도 등장한다. 예전에 그런 일을 했었구나, 쿠바 형제는. 지금이야 그쪽에선 손씻고 더 나쁜 일에 발을 담그긴 했지만.... 아야세를 지키고 싶은 호마레의 마음, 그리고 자신을 잘 돌봐주는 호마레를 돕고 싶은 아야세의 마음. 비록 아야세의 마음은 사랑은 아닐지라도 호마레의 마음을 따뜻하게 만들기엔 충분했다. 아야세, 너도 꽤 괜찮은 일을 할 때가 있구나. (쓰담쓰담)

근데 이건 매번 비슷한 이야기의 반복이고 더이상 진전이 없는데 - 진전이 있긴 하지만 너무 느리다 -  언제 완결이 될 것이며, 카노와 아야세가 연결되긴 연결되려나? 내 마음같아선 쿠바 호마레와 아야세를 연결시켜주고 싶은데... 말이지. 아, 그럼 둘 다 카노에게 살해당할지도!? (윽. 또다시 이런 잔인한 생각을... 근데 카노 성격을 보면 그럴수도 있지 않나. 내가 가지지 못하면 너도 가질 수 없어.. 뭐 이런) 뭐 그럴 일은 없겠지.

그건 그렇고, 9권은 또 언제 나오려나?
잊고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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