랑랑별 때때롱 (양장) 개똥이네 책방 1
권정생 지음, 정승희 그림 / 보리 / 200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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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별은 나의 별, 저 별은 너의 별 별빛에 물들은 밤같이 까만 눈동자 ~~~ ♪
어린 시절 별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은 밤하늘을 보며 저 노래를 부르지 않은 사람이 있었을까. 나 역시 이런 시절 시골 할머니댁에 놀러 가서 밤이 되면 하늘을 바라보며 수많은 별들을 가족, 친구들에게 분양을 했었다. 저 별은 내 별, 저 별은 엄마 별, 저 별은 아빠 별, 저 별은 동생 별로 시작해 내가 아는 사람들에게 하나씩 나눠주고도 남을 만큼 많은 별들은 완벽하게 어두운 깜깜한 밤일지라도 마음 한구석을 안심시켜주는 힘이 있었다. 그렇게 분양을 끝내고 나서는 저 별엔 누가 살고 있을까를 생각했다. 지금은 어른이 되어서 내가 살고 있는 지구가 속한 태양계에는 인간과 같은 생명체가 존재하는 행성이 없다는 걸 알고 있지만 어린 시절엔 그 모든 별에 누군가가 살고 있었다. 언젠가 그곳에 사는 존재들과 만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했었다.

우리와 같은 지구별에 사는 새달이와 마달이 형제는 어느 날 랑랑별에 살고 있다는 때때롱의 말소리를 듣게 된다. 처음에는 귀신이 아닐까 싶어 무서워 했지만 때때롱과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새달이와 마달이는 랑랑별의 존재와 때때롱, 메메롱 형제의 존재를 믿게 된다. 지구별과 무척이나 비슷하다는 랑랑별에서 온 소식은 새달이, 마달이 형제를 깜짝 놀래기도 하고, 웃음 짓게도 하고, 때로는 속상하게도 한다. 서로 너무 먼 곳에 있어 직접 만나지는 못하지만 때때롱이 보내오는 편지와 일기장을 통해 새달이와 마달이는 때때롱과 우정을 쌓아간다.

그러던 어느 날, 밭일을 하러가신 아빠에게 새참을 가져다 드리기 위해 길을 나선 새달이와 마달이는 왕잠자리가 구슬프게 울고 있는 걸 발견한다. 농작물을 잘 키우고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사용하는 농약때문에 죽어가는 왕잠자리의 한맺힌 울음은 새달이와 마달이를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해충만 구제하는 것이 아니라 익충마저도 모조리 죽이는 농약, 거름 대신 사용하는 비료, 종자마저 수입해야하는 실정을 우리는 잊고 산다. 그저 수확양만 많으면 된다는 생각에서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주변의 생물에게 해를 끼치고 사는 것이다. 다행히 새달이네 아빠는 농약을 사용하지 않지만, 실제로 농촌에 가보면 한창 농작물이 자랄 시기엔 약냄새가 진동하는 것을 난 많이 보아 왔다. 결국 이건 모두 사람에게도 해가 미칠텐데...

그날 밤, 새달이와 마달이는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소리에 잠이 깬다. 살그머니 밖을 내다보던 두 아이는 집에서 키우는 흰둥이가 때때롱과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란다. 게다가 흰둥이가 새달이에 대한 불평까지 늘어 놓은 걸 보고 화가 치민다. 랑랑별로 가서 살고 싶다는 흰둥이는 그날부터 소원을 빌기 시작한다. 그렇게 꼬박 열흘이 지나 드디어 약속의 날이 다가왔다. 흰둥이에겐 날개가 생겼고, 집에 사는 소 누렁이도 랑랑별로 가고 싶어하지만 망설이는 눈치다. 새달이와 마달이가 마음에 걸려 쉽게 떠나지 못했던 것이다. 그 모습을 본 새달이와 마달이는 누렁이를 껴안고 엉엉 울음을 터뜨리고, 결국 모두 함께 랑랑별로 모험을 떠나게 된다.

옛날옛날 한옛날엔 선녀님이 내려와 목욕을 하고 천상으로 올라가던 시절도 있었고, 지구별 사람들은 날개 달린 말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 천도복숭아를 따오기도 했다. 그렇다면 날개 달린 흰둥이와 함께 간 랑랑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모두 함께 도착한 랑랑별은 오래전 지구별의 모습을 많이 닮아 있었다. 어떻게 보면 불편하기 짝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었지만, 자연은 그 모습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었고, 동물들은 자연스러운 모습 그대로 살아가는 곳, 아이들은 개울에서 물장구치고 흙위에서 뛰어노는 곳이었다. 먹거리는 소박하지만 맛있고, 사람들에겐 인정이 넘치는 곳이었다.

하지만 새달이와 마달이는 그런 랑랑별의 모습에 실망을 감출 수 없었다. 지구별로 소식을 보낼 정도로 과학기술이 발전한 곳이라 생각했건만, 그저 시골 풍경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랑랑별은 500년의 기간을 거쳐 다시 옛날 모습으로 돌아간 것이라 하는데... 이 비밀은 때때롱의 할머니가 등장하면서 풀리게 된다. 할머니와 함께 새달이 형제, 때때롱 가족이 500년 전의 랑랑별로 모험을 떠났기 때문이다.

500년전의 랑랑별은 과학기술이 눈부시게 발전한 곳이었다. 안드로이드가 사람대신 일을 하고, 인간은 유전자의 조합으로 우수한 인간만 생산하는 곳이었다. 당연히 엄마도 아빠도 형제도 없는 세상이었고, 사람들은 그저 멍하니 살아갈 뿐이었다. 그곳에서 만난 보탈이란 소년은 너무나도 외로워 보였다. 같이 꺄르르 장난치고 놀 친구도 형제도 없었고, 사랑을 담뿍 나누어줄 부모도 없었기 때문이다. 생활은 편리해졌지만 인간의 정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그곳, 그곳이 바로 랑랑별의 500년전 모습이었던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별은 500년전의 랑랑별 모습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는 과학기술은 복제동물을 만들어 내는 것까지에 이르렀다. 문득 영화『가타카』에서 우성 유전자로 태어난 인간들이 떠오른다. 동물복제가 언젠가는 인간복제로까지 이어지지 않을까 하는 것은 이제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현실화 가능성이 높은 이야기가 되었다. 솔직히 말해 끔찍하다. 이건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것 중 가장 불편한 것이기 때문이다. 500년전에 살았던 보탈이의 모습과 지금 랑랑별에 살고 있는 때때롱의 모습 중 더 행복한 삶을 누리는 건 누구일까. 굳이 누구라고 하지 않아도 답은 자명하다.

『랑랑별 때때롱』은 지구별에 살고 있는 새달이와 마달이 형제와 랑랑별에 살고 있는 때때롱과 메메롱 형제의 우정과 모험, 그리고 우리가 살고 있는 이 곳이 얼마나 소중한 곳인지를 가르쳐주는 동화이다. 인간은 자신들의 편의와 편리를 위해서 수많은 다른 생명들을 위협해 왔고, 결국은 자신의 목을 조르게 될지도 모른다. 이러한 이야기를 아이들이 등장하는 판타지로 순하게 풀어낸『랑랑별 때때롱』은 굳이 과학적인 접근을 통하지 않아도 우리의 미래의 모습에 대해,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여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이런 접근 방식은 아이들에겐 모험과 판타지란 것을 통해, 어른들에겐 어린 시절 뛰놀았던 자연의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식으로 생각할 꺼리를 던져주는 것이다.

요즘은 밤하늘을 봐도 별이 좀처럼 보이지 않는다. 도시는 말할 것도 없고 시골 역시 요즘은 깜깜한 어둠이란 것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이는 일종의 빛공해라고 하는데 밤하늘이 부옇게 보이는 현상을 의미한다. 이 빛공해는 식물의 발육, 동물의 성장을 저해할 뿐만 아니라 인간에게도 신체적 정신적 병증을 유발하고 있다. 우리는 스스로를 얼마나 파괴시켜야 더이상 앞으로만 나가는 것을 멈추게 될까.『랑랑별 때때롱』을 통해 우리가 지금 처한 현실에 대해 곰곰히 생각해 보자. 단순히 아이들을 위한 판타지로만 받아들일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는 지구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을 만들어 보는 건 어떨까.


 

진달래 먹고, 물장구 치고, 다람쥐 쫓던 어린 시절에~~~ ♪
난 이 노랫말처럼 진달래 먹고 다람쥐를 쫓던 시절은 없지만, 강가에 가서 고기도 잡고, 논둑을 뛰어다니며 개구리 잡고, 우렁이도 잡고, 메뚜기도 잡고, 잠자리도 잡았던 시절이 있다. 요즘 아이들은 그런 걸 알기나 할까. 개구리와 두꺼비 구별은 할줄이나 알까. 편리한 삶에 길들여져 우리는 너무나도 소중한 걸 잊고 사는 게 아닐까. 다시 한 번 곰곰히 생각해 볼 때다.

사진 출처 : 책 본문 中 (114~1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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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밤중의 고양이 손님 네버랜드 꾸러기 문고 29
다카도노 호오코 지음, 김난주 옮김, 나가노 히데코 그림 / 시공주니어 / 2009년 2월
구판절판


책 제목과 표지 그림을 보니 딱 떠오르는 게 하나 있다. 오호라, 이 고양이는 도둑 고양이로구나. 한밤중에 나타난 손님이란 표현도 그렇고, 등에 보따리를 짊어진 모습이 도둑을 연상시킬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보따리의 무늬를 보면 좀 고전적인 도둑이랄까. 일본 그림에 등장하는 도둑들은 대개 이런 보따리를 짊어지고, 얼굴은 수건으로 가렸던데 이 고양이는 대담하게도 얼굴을 드러내고 나타났다. 놀리는 듯한 표정의 이 고양이는 우리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까.

미쓰오와 논코는 내일 소풍을 갈 생각에 잠이 잘 오지 않는다. 머리맡에 과자가 잔뜩 들어간 배낭을 두고 누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던 오누이 중 오빠인 미쓰오가 갑자기 휘이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그런 오빠를 보고 논코는 밤에 휘파람을 불면 도둑이 든다고 그만하라지만 장난기 넘치는 오빠 미쓰오는 보란 듯이 휘파람을 더많이 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갑자기 거실 쪽에서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이 한밤중에?

오누이는 뒷꿈치를 들고 살금살금 거실로 나가 베란다 창에 쳐져있는 커튼을 살며시 열었다. 그랬더니 그곳에는 번쩍하고 빛이 나는 황금색 눈동자가 보이는 것이었다. 오누이는 깜짝 놀랐지만 가만히 살펴보니 고양이의 눈이었던 것이다.

놀란 가슴을 진정시키고 고양이를 안으로 들인 오누이는 하룻밤만 재워달라는 고양이의 부탁에 그저 멍하니 고양이를 쳐다보기만 했다. 등에 진 보따리를 내려놓은 고양이는 보따리에 든 맛있는 경단을 꺼내 먹으면서 자신의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마사라는 이름의 이 고양이는 경단가게에서 복고양이로 일했지만, 어느 날부터 주인아저씨의 미움을 받아 갇혀지냈다는 것이다. 오누이는 안쓰러운 마음에 고양이가 하는 이야기에 맞장구를 쳐주며 고양이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었다.

하지만 논코가 정곡을 찌르는 질문을 하자 깜짝 놀란 마사는 괜시리 헛기침도 하고, 귀 뒤도 긁어 대고, 수염을 잡아 당기다가 몸을 핥기도 하는 등 안절부절못하는 것이었다. 그런 마사의 모습에 미쓰오는 마사의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를 건넨다.

마사의 안타까운 사연을 들은 오누이는 자신들 사이에 마사를 재우기로 한다. 그동안 많이 힘들었을테니 하룻밤만이라도 편히 자라는 생각이었겠지.

하지만 다음날 아침 눈을 뜬 오누이는 자신들에게 일어났던 일이 꿈인지 생시인지 헷갈려 한다. 그도 그럴것이 분명이 자기들 사이에서 자고 있던 마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진데다가, 베란다 창문도 꼭 닫혀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들 입가에 묻은 경단의 흔적과 텅 비어버린 소풍가방을 보고 마사가 바로 '도둑'이었단 걸 알게 된다. 보통 아이들이라면 자기 소풍 가방의 과자가 모조리 도둑맞았다는 사실에 길길이 날뛰겠지만 미쓰오와 논코는 그저 재미있어한다.

그럼 마사는 왜 위험을 무릅쓰고 사람이 사는 집으로 들어와 도둑질을 한 것일까. 마사는 자신에게 친절히 대해준 미쓰오와 논코에게 편지를 쓴다.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인지에 대해서 말이다. 요즘은 마사같은 길고양이가 살기 힘든 세상이다. 게다가 여섯마리의 아기 고양이를 키우기 위해서는 그런 위험을 무릅쓸 수 밖에 없었던 것이었던 것이다.

순수한 오누이와 능청스러운 고양이의 이야기를 읽다 보면 요즘 길고양이들의 삶에 대해 생각하게 된다. 마사는 어미 고양이로 여섯마리 아이 고양이의 엄마이다. 예전같으면 사냥을 할테지만 요즘에는 고양이가 사냥할 작은 동물이 거의 없어진 상태다. 그렇다 보니 위험을 무릅쓰고 먹이를 구해야만 한다. 마사가 선택한 방법은 도둑질이란 것이었다. 물론 도둑질 자체는 나쁘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새끼를 먹이고 싶은 마사의 마음이 짠하기만 하다. 예전에는 도둑고양이라 불리던 길고양이의 삶은 날이 갈수록 척박해지기만 한다. 쓰레기 봉투를 헤집어 놓는다거나 밭을 파헤친다는 이유로 약을 놓는 경우도 많다. 예전에는 고양이가 먹을 것을 훔쳐가도, '에이 저 도둑고양이가!' 하고 피식 웃었지만 이제는 그런 여유로운 마음도 사람들에게서 다 사라진 것 같다. 어떻게 보면 도둑고양이에서 길고양이란 명칭으로 부르는 명칭은 순화되었지만 오히려 그들을 대하는 사람들의 태도는 더욱 모질어진 것 같다. 비록 자신들의 소풍가방은 모조리 털렸지만, 그런 마사의 행동에 웃음을 터뜨려 버리는 오누이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또다른 생명들에 대한 나눔과 정이란 것을 생각해 보는 건 어떨까.

사진 출처 : 책 표지, 책 본문 中(6~7p, 18~19p, 30p, 36p, 40~41p, 46~47p), 책 뒷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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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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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바다 그림을 그릴 때를 생각해보면, 다들 쨍쨍 내리쪼이는 태양, 푸른색이 넘실대는 바닷물을 배경으로 그리고 큰 물고기, 작은 물고기, 수초, 바위, 불가사리, 문어를 바닷속에 그려놓고, 수평선에는 늘 고래를 그려넣었을 것이다. 고래의 경우 2/3쯤은 물에 잠겨 머리위로 분수를 뿜어내는 모습이 정형화된 고래 그림이었다. 요즘 아이들은 바다 그림을 어떻게 그리는지 모르겠지만,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당시에는 대개 이런 식으로 바다 그림을 그렸다. 물고기나 문어, 불가사리같은 경우는 직접 눈으로 본 적이 있어 그렇게 그렸다고 생각해도, 고래가 그렇게 물을 뿜는 장면을 한번도 보지도 않았는데 늘 그렇게 그렸다. 물론 상상의 모습은 아니다. 동물 도감이나 티비에서 방영되는 자연 다큐멘터리를 보면 늘 고래가 머리위로 분수처럼 물을 뿜어 올리는 모습을 보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고래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이렇듯 티비에서 본 모습이나 동물 도감에서 본 모습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좀더 추가하자면 동물원에서 쇼를 하는 돌고래나 영화에 등장해 사람과의 교감을 보여주는 범고래의 모습이 전부이다.
 
내가 고래에 대해 아는 것이라곤 육지와 바다 모두 합쳐 가장 큰 포유류란 것, 꼬리가 수직으로 뻗어나온 상어와는 달리 고래의 꼬리는 수평으로 뻗어 있다는 것, 포경산업으로 인해 수많은 고래가 학살당했지만, 지금은 보존차원에서 많은 보호를 받고 있다는 것, 전설처럼 들리는 고래의 노래나 고래의 무덤 같은 것 정도다. 즉, 우리가 아는 고래란 바다 그림을 그릴 때 1/3 정도만 나오는 고래의 몸과 그때 고래가 분기공에서 뿜어내는 분수같은 물줄기 정도 밖에 없다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우리는 고래에 대해 마치 많은 것을 아는 듯이 생각한다.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의 하나였다. 

엘린 켈지의『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가 모르고 있는 고래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으로 고래 연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고래 보호 정책은 어떻게 펼쳐지고 있는지, 이제까지 잘 알려지지 않았던 고래의 생태와 습성은 어떠한지에 대해 쉽고 재미있게 풀어쓴 책이라 할 수 있다. 두 아이의 엄마이자 환경운동가, 생물학자인 저자가 바라보는 고래의 삶과 각각의 연구분야에서 연구하는 학자들이 바라보는 고래의 삶과 해양생태계 전반에 대한 문제에 대한 고찰은 우리가 얼마나 고래에 대해 무지했는지, 해양생태계에 대해 얼마나 무지했는지를 알려준다. 

고래는 그 큰 덩치만큼이나 활동하는 영역이 넓기 때문에, 그리고 물밖에 나오는 시간은 찰나에 불과하기 때문에 생태학자나 생물학자들이 연구하기 어려운 대상 중의 하나이다. 실제로 고래가 어떤 식으로 교미를 하고 언제 어디에서 새끼를 낳는지조차 제대로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이다. 또한 어디에서 섭식활동을 하는지, 일년에 얼마나 이동을 하는지, 수명은 얼마나 되는지 등의 기본 연구도 거의 진전이 없다. 이는 고래가 숨을 쉬기 위해 수면 근처로 올라오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대개 깊은 바닷속에서 활동하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특히 향유고래같은 경우에는 심해에서 먹이 활동을 하기 때문에 실제로 사람이 따라들어가서 그들을 연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육지 동물같은 경우에는 일정한 영역이 있기에 이동경로, 섭식활동, 평균수명, 교미와 출산 등 기본적인 연구가 쉬운 편이지만 바다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기에 더욱 힘든 것이다. 어떻게 보면 고래 연구는 아직 장님이 코끼리를 만지는 수준에 불과하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 정도 수준에 불과하다고 해서 고래의 생태가 흥미롭지 않은 것은 아니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대략 80여종의 고래의 생태는 한 종의 고래조차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밝혀진 건 아니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만 해도 무척이나 흥미로운 점이 많다. 예를 들자면 똑같은 범고래 종류라도 사는 곳에 따라 현저한 차이를 보이기도 한다. 어떤 개체군은 이주성, 어떤 개체군은 상주성 등으로 나뉘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갈라파고스 군도에 사는 다양한 핀치들 같다고나 할까. 핀치가 섭식활동에 의해 서로 다른 핀치로 진화해 갔듯이 고래 역시 다른 영역에서 살아가면서 그 환경에 따라 진화하고 있으며, 각 개체군에 따라 서로 다른 문화가 존재하기도 하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낀 것 중 하나는 고래의 무리는 코끼리의 무리와 비슷한 점이 많다는 것이었다. 코끼리는 암컷 우두머리 코끼리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모계사회이다. 할머니 코끼리 - 엄마 코끼리 - 이모 코끼리 - 아기 코끼리 등으로 구성된 무리는 암컷 우두머리의 지혜와 경험이 생존의 관건이 된다. 고래의 경우에도 이런 습성을 볼 수 있었는데, 엄마 고래가 먹이활동을 하러 잠수를 하면 할머니 고래가 아기 고래를 돌봐주기도 한다. 동물들은 대개 자신의 새끼가 아닐 경우 거두지 않는다고 하지만 고래의 경우 무리간의 유대관계가 끈끈하기 때문에 이런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유대관계는 인간에 의해 파괴되고 있다. 인간이 상아를 얻기 위해 경험많고 지혜로운 어른 코끼리를 죽이는 것처럼 고래 기름을 얻기 위한 포경산업으로 인해 거대한 고래들이 학살당해왔다. 지금은 포경 산업이 제한적으로만 허용되고 있지만, 해저 송유관, 해저 석유 굴착 사업, 수중음파를 이용한 군사 훈련, 어선과 관광선 등으로 인해 다치거나 죽임을 당하는 고래가 여전히 많이 나오고 있다.

특히 참치를 잡기 위한 선박은 쇠돌고래를 몰아 참치를 잡는데, 이 참치잡이때문에 희생되는 쇠돌고래도 많다. 어선에 쫓기다가 어미와 떨어진 아기 쇠돌고래는 혼자서 살아남지 못한다. 수유중인 어미가 희생된다는 것은 종족보존을 할 수 있는 가임기의 암컷들이 죽는다는 의미가 된다. 이는 단순히 지금 어미와 아기 쇠돌고래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쇠돌고래들 역시 죽임을 당하고 있다는 말이나 다름없다. 이런 문제로 인해 돌고래 보호 참치 마크가 그려진 참치가 등장했으나, 실제로 참치몰이를 하면서 쇠돌고래가 얼마나 희생되는지를 어선에서 보고하지 않으면 그 수가 얼마나 되는지를 절대 알 수 없는 것도 문제이다. 그건 쇠돌고래 보호를 위한 정책이 발효중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쇠돌고래의 수가 증가하지 않는다는 사실에서 유추할 수 있다.

참치잡이에 희생되는 쇠돌고래 문제외에도 또다른 돌고래 학살이 이루어지는 곳이 있다. 그곳은 바로 우리와 가까운 나라 일본으로 일본 역시 우리나라와 마찬가지로 고래 고기를 먹는 나라이기 때문에 불법포경이 끊이지 않는 문제가 되고 있다. 예전에 티비에서 일본의 불법포경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본 적이 있다.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을 정도의 대학살이었다. 죽임을 당하는 건 대부분이 돌고래였으며, 그 돌고래의 피가 바다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정말 피바다라는 표현이 그냥 떠오를 수 밖에 없는 그런 장면을 보면서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일본의 또다른 모습을 보게 되었다. 일본은 수산물 소비가 많은 나라로 유명하다. 특히 참치나 고래 고기에 대해서는 속된 말로 환장을 한다고 하는데, 그런 것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다랑어와 고래가 희생되고 있다. 그 결과 예전에 포획된 다랑어는 500kg에 달했지만, 지금은 100kg이 겨우 넘는 것이 대부분이다. 즉, 더이상 큰 개체들이 없다는 것이다. 이는 인간이 큰 개체들을 차례차례 멸종시켜왔다는 의미가 된다. 물론 다랑어만 그런 것은 아니다. 샥스핀때문에 상어 개체수는 급감했고, 제대로된 손맛을 느낄 수 있는 낚시란 이유로 새치들이 거의 멸종단계에 와있다. 고래 역시 포경산업으로 인해 거의 멸종위기에 이르렀으며 그후 보호를 받아 조금씩 늘고 있지만, 어떤 고래 종류는 겨우 123마리밖에 남아 있지 않다. 야생상태에서는 적어도 5,000마리 이상은 되어야 미래가 보장된다고 가정한다면, 겨우 100여마리밖에 남지 않은 고래종류는 언제 멸종되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는다는 결론이 나온다.

해양생태계는 무한한 자원이 잠들어 있는 곳이 아니다. 인간이 필요 이상의 포획을 해왔기 때문에 향후 2~30년내에는 모든 어족자원이 준멸종상태에 들어간다고 한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선택을 할까. 솔직히 두렵다. 인간은 지구의 주인도 아니요, 지구를 대표하는 유일한 생명체도 아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인간들은 자신이 마치 지구의 지배자인양 지구를 학살해왔다. 진화론적 입장에서 볼 때 어떤 종들이 자연스러운 멸종 과정을 밟는 건 당연한 일이겠지만, 인간의 개입은 자연스러운 멸종이 아닌 인위적인 멸종상태를 야기했다. 고래도 인간이 인위적으로 멸종시켜가는 생명 중의 하나이다. 포경산업이 있기 전에 이 넓은 바다에 몇 종의 고래가 얼마나 존재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따라서 포경산업이 금지되고 고래가 보호를 받기 시작한 이후 고래가 조금 늘었다고 해서 멸종의 위험을 벗어났다고는 감히 말할 수 없을 것이다. 

 『거인을 바라보다』는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비밀스러운 삶과 고래와 관련한 해양생태계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를 들려준다. 또한 인간의 개입으로 인해 해양생태계가 얼마나 큰 위협을 받고 있는지 생각하지 않고 지금처럼 공존따위는 생각지도 않는 개발에만 집중하면서 생겨나는 제문제들에 관한 것들에 대해서도 이야기한다.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계속된다면 앞으로는 고래를 비롯해 수없이 많은 해양생물을 더이상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리는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미처 눈치채지도 못한 사이에 멸종된 수많은 생물들이 있음을. 그리고 그 비극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지금이라도 인간의 욕심과 오만과 자만을 버려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인간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지구에 존재하는 하나의 종이란 것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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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의 사랑 - 뉴 루비코믹스 920
시마지 글 그림 / 현대지능개발사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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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를 보고선 혹시 시대물이 아닌가 했는데, 시대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 작품의 배경이 되는 곳이 교토이고, 그곳의 유서 깊은 화과자 가게란 설정이 마음에 쏙 들었다. 유서 깊은 가게, 란 것도 내가 아주 좋아하는 설정중의 하나이기 때문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3대를 넘어가는 가게가 거의 없지만, 일본은 꽤 많은 편인데다가 그 종류도 다양해 많은 이야기가 나올 수 있는 듯 하다. 

교토에서 만드는 전통 화과자인 쿄가시를 만들어 파는 가게 츠루마루야는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는 가게이다. 선대였던 치히로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치히로와 치히로의 어머니가 가게를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점장을 맡고 있는 카츠미는 치히로의 소꿉친구로 어린 시절부터 이곳에서 함께 살고 있다.  

치히로는 화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다가, 몸도 약하고, 응석도 많다. 그런 치히로를 대신해서 가게가 잘 운영되도록 도와주는 것이 바로 카츠미이다. 늘 무뚝뚝한 인상이지만 일 하나는 똑부러지게 하는 면이 있어 치히로 역시 카츠미에게 응석을 부리고 마는 것 같다. 치히로의 응석은 사실 카츠미에 대한 연심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어떻게 보면 카츠미에게 있어 치히로의 응석은 자칫 부담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겠지만 워낙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데다가, 선대의 유지도 있고 해서 그런지 늘 툴툴거리면서도 치히로의 응석을 모두 받아준다. 그런 카츠미에게 자신의 마음을 내보이지도 못한채 끙끙 앓고 있는 치히로에게 큰 거래처 손님인 모리가 접근한다. 하지만 치히로는 카츠미를 대하는 것과는 달리 유연하게 그 자리를 넘기고 만다. 그러나 모리의 치근거림이 계속되고, 거래를 빙자해서 식사자리에까지 나가야 하는 일이 생기고 마는데...

이 화과자 가게란 것이 옛날에는 어땠을지는 몰라도 확실히 요즘 세상에는 잘 맞지 않는지도 모른다. (나도 개인적으로는 화과자란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보기엔 엄청 예뻐도 맛이 너무 달아서 싫달까. 녹차같은 거랑 같이 먹으면 맛이 괜찮긴 하지만 여기, 내겐 무리~~) 주 고객들도 어느 정도 연령대가 있고, 이렇다 보니 8대를 내려온 츠루마루야 역시 이런저런 곤란한 점이 생기는 건 당연한 듯 하다. 게다가 모리가 꽤나 큰 거래처이다 보니 그의 요구에 응하지 않을 수도 없고, 카츠미를 생각하면 그 요구를 물리치는 게 맞지만 그럴 수 없는 입장인 치하루의 고민이 참으로 안타깝기만 했다. 만약 그때 카츠미가 자신의 마음을 완전히 보여줬더라면 아예 나가지 않았을지도 모르겠지만, 카츠미가 완전히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지 않은지라 어쩔수 없어 하며 나가는 게 눈에 선했다. 가게를 지켜야 한다는 것, 그리고 카츠미에 대한 연심. 어느 것 하나도 소홀히 할 수 없는 치하루의 선택은!?

자신의 선택이 아니라 후계자이기 때문에 대를 이어야 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주변인들이 보기에 오랜 전통을 가진 가게의 대를 잇는다는 건 멋져 보이는 일일수도 있겠지만, 치하루가 스스로 원해서 하는 일이 아니다보니 어쩔 수 없이 얽매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한다. 그렇다면 선대의 유지를 받아 점장으로 일하고 있는 카츠미의 경우는 어떨까. 치히로에 대해 거리감을 두고 있는 카츠미지만, 묘한 것은 카츠미가 만약 선대의 유지만을 따랐다면 이렇게 헌신적이지는 못할 것이란 거다. 이 두사람을 보면 너무나도 애틋하다. 특히 장지문을 사이에 두고 있던 두 사람의 모습을 떠올리면...

본편의 이야기도 좋지만 두 사람의 어린 시절의 에피소드를 담은 번외편도 좋았고, 고양이 야치요가 둘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는 설정도 참 좋았다. 특히 야치요가 이들의 사랑을 바라보며 애틋하게 여기는 부분이 정말 좋았다. <고양이의 사랑>은 한마디로 말하라면 너무나도 애틋해서 눈물이 한방울 톡 떨어질 것만 같은 그런 사랑 이야기였다. 

뒷편에 수록된 단편인 <에버 씬>은 <고양이의 사랑>에 등장해서 치히로에게 치근거리던 모리 아저씨의 이야기이다. 이 아저씬 그냥그런 에로 아저씨인줄로만 알았더니 빈틈투성이의 아저씨였다. 이거 완전 반전! 푸하핫, 이런 귀여운 아저씨였구나. 이 작품은 조카와 삼촌사이기는 하지만 혈연관계는 아닌 모리 아저씨와 조카 료이치의 사랑에 관한 이야기이다. 이 둘의 사랑이 이루어지는 단계를 보는 것도 즐거웠지만, 한편으로는 료이치가 어린 시절에 겪었던 아픔을 고스란히 겪어 내고 있는 모리 아저씨의 딸 히요리가 자꾸만 눈에 밟혔다. 물론 모리 아저씨와 료이치땜에 히요리가 아파하는 건 아니고, 부모의 이혼때문에 아파하지만 어찌 되었든 어른들의 잘못때문에 상처를 받게 되는 건 히요리 쪽이기 때문이다. 이런 부분도 무겁지 않게 잘 섞어서 담아내는 게 참 좋았던 작품.

표제작인 <고양이의 사랑>은 소꿉친구의 사랑을 담고 있는 작품이라서 그런지 성인이 된 두 사람의 이야기가 나와도 소년들의 사랑처럼 느껴졌다면, 뒤에 수록된 <에버 씬>은 어른들의 사랑이란 느낌이 강했다. <고양이의 사랑>은 풋풋하면서도 애틋했다면, <에버 씬>은 격정적이면서도 애틋했달까. 두 작품 모두 매력적이라, 이 작가에 완전히 꽂혀버렸다. 다른 작품도 얼른 봐야지~~

아, 잊어버릴뻔 했다. 치히로가 입고 나오는 기모노가 참 예쁘긴 했지만, 밤에 유카타를 입고 있는 모습도 참 좋았다. 음. 역시 남자들의 기모노는... 섹시해. 모에롭기도 하지~~(푸하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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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페 알파 8 - 신장판
아시나노 히토시 글.그림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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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시끌벅적 화려했던 축제의 시간이 지나 먼훗날 저녁뜸의 시대라 불릴 시대를 살아가는 로봇과 사람들의 이야기,『카페알파 신장판』8권.

변화란 천천히 찾아오기도 하고, 갑작스레 찾아오기도 하는 법. 로봇인 알파의 삶은 느긋하게 큰 변화없이 흘러가는 것처럼 보여도 작고 작은 변화들이 모여 그녀의 하루하루를 새기고 있다. 지난 여름 태풍으로 인해 완전히 망가져버린 카페알파는 알파의 손을 통해 천천히 보수를 끝마치고 이제 신장개점을 앞두고 있다. 신장개점날, 카페알파를 찾은 코코네와 마루코. 마루코는 이상하게도 알파에게 조금은 적대적인 모습을 보인다. 전에도 그러더니 이번에도 또! 생글생글 미소가 트레이드 마크인 알파는 이번엔 좀 참기 힘들었나 보다. 하고 싶은 말을 똑 부러지게 하고야 마는데.. 호오, 알파씨. 알파씨에게도 이런 면이 있었군요. 하긴, 자신이 늘 로봇이라는 것을 의식하고 살 필요는 없다. 오히려 그것을 의식하면 할 수록 다른 이들과 거리감이 생길 뿐이니까. 그리고 알파가 아무리 느긋해 보여도 아무런 생각없이 살고 있는 건 아니다. 그녀는 변해가는 풍경과 변해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매순간 기억 속에 새겨 넣고 있는 중이니까.

꼬치고기를 데리고 돌아다니는 아야세가 다시 이곳을 찾았다. 그새 많이 큰 마키에게 아야세는 제안을 하나 한다. 아직은 어리지만, 언젠가 마키도 이곳을 떠날 날이 오겠지. 마키가 부메랑을 던지는 연습도 그걸 위한 것일테니까. 아야세의 꼬치고기가 낳은 새끼 꼬치고기를 보면서 만든 마키의 작은 부메랑이 마음 속으로 성큼 다가온다.

타카히로는 점점 더 어른스러워지고 있다. 꼬맹인줄로만 알았는데, 이젠 운전도 능숙하게 하고 좀더 많은 일을 하기 위해 마을을 떠나기로 결심한다. 한동안은 돌아오지 않겠지만 알파는 타카히로가 돌아올 날을 손꼽아 기다리겠지. 타카히로 역시 자신을 기다려줄 누군가가 있는 이 마을로 다시 돌아올 것이다. 누군가가 자신을 기다려준다는 건, 그 사실만으로도 돌아올 가치가 있다는 것이니까.

알파가 물을 찾으면서 돌아다니다 만나는 식물도 그렇고 아야세가 여행을 하면서 만나는 것들도 그렇고, 웬지 이 식물들은 인간의 문명이 번성했던 시대의 기억을 품고 있는 듯 하다. 건물 모양의 식물, 가로등 모양의 식물, 사람 모양의 식물. 사람들은 변화한 모습에 쉬이 옛것을 잊겠지만, 길은, 자연은 잊지 않나 보다.

『카페 알파』시리즈의 특징은 느긋함이란 것에 있어 이제까지의 변화는 느긋하기만 했지만, 8권에 들어서면서 변화의 바람이 강하게 느껴진다는 생각이 든다. 타카히로는 벌써 떠나버렸고, 마키 역시 언젠가 떠날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으니까. 선생님과 주유소 할아버지의 모습은 변함이 없건만, 꼬맹이었던 마키는 어느새 소녀가 되었고, 소년이었던 타카히로는 한사람 몫을 하는 어른이 되었다. 누군가는 남고, 누군가는 떠나간다. 알파는 늘 그곳에서 떠난 사람을 배웅하고, 떠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겠지. 변함없는 모습으로, 변함없는 미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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