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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성에서 살 생각인가?
이사카 고타로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7년 8월
평점 :
개인적으로 정말 좋아하는 책들 중 하나인 <골든 슬럼버>의 작가 이사카 고타로의 신작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올해 출간됐지만 '애플이 선정한 2015년 최고의 소설'이라니 일본에서 출간된 건 지금보다 몇 년 전일 것이다.
이사카 코타로는 미스터리에도 물론 일가견이 있지만 휴머니즘 가득하면서도 유머러스한 이야기를 들려줄 때 그 진가가 더 돋보인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작품도 화성으로 추정되는 곳에서 닌자처럼 검은 옷을 입고 덩그러니 앉아 멍 때리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고 화성 표류기쯤 되는 내용일 줄 알았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화성과는 전혀 관계없는 사회비판과 블랙 코미디가 가득한 이야기였다. 거기에 본인의 장기인 미스터리까지 놓치지 않은 그야말로 버릴게 하나 없는 종합 선물세트 같은 책이었다.
이야기의 시작은 한 남자가 부인에게 구조조정을 마녀사냥에 빗대 설명해주는 것으로 시작된다.
중세시대 마녀사냥은 진짜로 마녀를 찾아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원인을 알 수 없는 재해나 재난에 대한 공포와 초조감을 풀기위해 원인을 마녀에게 있다고 단정짓고 아무나 마녀라고 붙잡아 처형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어떠한 이유에서건 마녀로 지목된 사람은 아무리 아니라고 호소해도 뽑힌 순간 끝인 것이다.
이야기의 서두에 나온 남자가 살고 있는 곳에는 안전지구라는 순회제도를 통해 지역별로 돌아가면서 '평화경찰'이 배치되고 이 때 누군가의 제보로 인해 범죄자로 의심받게되는 사람은 평화경찰에게 끌려가 취조를 받게 된다. 그리고 이 조사에서 범죄가 확정된 사람은 공개처형을 통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단두대에 머리가 댕강 잘리게 된다.
이 제도는 명목상으로는 위험인물을 미리 발견해 사전에 범죄를 예방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시민들끼리 서로 의심하고 믿지 못하게 만드는 불신사회, 감시사회를 만들어낸다. 실제로 밀고당한 사람이 범죄자이냐 아니냐와는 전혀 무관하다. 만일 범죄자가 아니라면 범죄자로 만들면 되는 것이고, 진짜 범죄자라면 그것 또한 나쁘지 않은 것이다.
" 중세의 마녀사냥도 사회불안을 해소하는 목적이 있었다고 하죠."
"마녀사냥이란 거, 정말 마녀가 있는 건 아니잖아?"
"뭐, 마녀는 웬만해선 찾을 수 없으니까요. 마녀가 틀림없다고 누명을 씌우는 것 뿐이죠. 그저 군중심리랄까, 모두 열광하는 느낌이었겠죠." (p36)
이들은 이름은 평화 경찰이지만 실제로 하는 짓은 평화와 전혀 관계없는, 오히려 가학적이기 짝이 없는 고문과 취조를 거듭한다.
일단 잠재적 범죄자로 지목당한 사람은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싶을 정도로 고문을 해서 자백을 받아내는데 그 중에서도 가장 최악은 가족을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가족들의 절박한 심정을 빌미로 나이든 노모에게 3분동안 철봉에 매달리면 아들의 죄를 감해주겠다고 거짓말을해 철봉에서 버둥대는 노모를 보며 낄낄대고, 아들은 자신을 위해 필사적으로 철봉에 매달리는 노모를 보며 울부짓는다. 이 때 나타난 것이 책의 표지에도 나와있는 '정의의 편' 인 검은 복면의 사람이었다.
정의의 편은 평화경찰의 심장부나 다름없는 취조실에 홀연히 등장해 목검과 골프공같은 알 수 없는 무기들로 경찰을 공격한 후 노모와 아들을 구해내 사라져 버리고, 평화경찰은 정의의 편을 잡기 위해 '마카베 고이치로'라는 수사관을 불러들인다.
이 마카베라는 수사관이 상당히 매력적인 인물인데 경찰 소속이면서도 정작 누구의 편인지 알 수 없는, 오히려 정의의 편이라는 인물에게 동조하는 듯한 애매한 말들을 하곤 한다. 그리고 외모도 경찰이라기보다는 가수나 예술가에 가까운 단발 머리를 하고선 가끔은 얼빠진 듯한 질문을 해댄다. 하지만 뛰어난 관찰력과 추리력으로 점점 '정의의 편' 의 실체에 접근하게 된다.
그리고 마지막에 등장하는 히어로의 정체는 눈치 빠른 독자라면 알아챘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가 정의의 편으로 활동하게 된 동기는 예상을 완전히 빗나가면서 오히려 꽤나 신선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일반적으로 히어로가 정의를 실천하는 이유는 사람들을 계몽하겠다거나 혹은 악을 응징하겠다는 엄청난 대의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은데, 이 책에서는 사람들을 구하게 된 것이 상당히 개인적이고 어떻게 보면 사소한 계기로 시작된다.
책의 배경이 되는 시점이, 미래인지, 과거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이야기가 전혀 낯설지가 않다. 마치 어디서 많이 들어 본 듯하다는 기시감이 든다.
치열했던 군사독재 시절, 경찰에서는 박종철 열사 고문치사 사건에 대해 '책상을 탁하고 치니 억하고 죽었다' 다며 후세에 길이 남을 만한(?) 발표를 했다. 그리고 최근에는 국정원에서 인터넷 댓글을 조작하는 전담팀까지 운영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사카 고타로가 한국 정부를 모티브로 한것은 아니겠지만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지역적으로 근접한만큼 여러가지 공통점이 많고 정치적으로도 상당 부분 유사성을 띄고있다. 그렇기에 일본 작가가 창조해낸 이야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도 여전히 유효하고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이야기 자체는 어둡고 비관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지만 분위기가 무겁다기보다는 오히려 시종일관 경쾌하고 유머러스하다. 그래서 개인이 집단이 됐을 때 드러내는 가학적인 군중심리나 사람들을 통제하고 억압하려는 정부의 속셈을 대놓고 보여줌에도 불구하고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보다는 희망적인 생각이 든다.
"다하라 씨가 어떻게 생각하든, 아무리 불만이 많든, 지금의 이 사회를 살아가야만 해. 룰을 지키며 올바르게 말이지. 마음에 들지 않으면 이 나라를 떠나면 돼. 다만 어느 나라에 가든 이 사회의 연장선상에 있지. 일본보다 의료 기술이 발달하지 않은 나라도 있어. 약도 없고 에어컨도 없지. 말라리아 때문에 고민하는 나라도 있어. 이 나라보다 행복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면 아예 화성에 가서 살 생각이야?" (p121)
평화경찰은 여기서 살기 싫으면 화성에라도 가서 살라고 말하지만 평범한 사람들은 화성에 갈 돈도 없을 뿐더러 어느 나라에 가든 결국 이 사회의 연장선상이다.
그러니 지구인들이여, 이제 분연히 일어나 목검이라도 들고 자신만의 정의를 실현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