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 - 과학주의, 그 위험한 사상을 알고 대처하라
J. P. 모어랜드 지음, 황을호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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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신은 죽지 않았다 라는 세미나를 가게 되었다. 이 세미나를 통해서 이 부분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귀한 책을 읽을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다. 그런데 책 제목에서도 느낄 수 있듯이 과학, 과학주의, 기독교 라는 책을 읽는 것은 예상하던 것 이상으로 더 어려웠다. 물론 개인적으로 과학적인 지식이나 관련된 용어들에 대한 체계가 잘 잡혀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과학에 대한 지식이 있거나 이와 같은 분야에 약간의 전문을 가진 분들이라면 이 책을 읽기가 훨씬 수월하실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그렇지 않으신 분들과 많은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오늘 우리와 우리 미래의 동역자들이 살고 있는 시대는 복음을 믿는 것을 시대착오라는 큰 전제 속에서 자라나고 있다. 이런 시대를 살고 있는 세대들을 향해서 J. P 모어랜드는 자신의 저서인 과학, 과학주의, 그리고 기독교를 통해서 앞으로 그리스도인이 나아갈 방향에 대해서 잘 보여주고 있다.

 

앞서 잠깐 나눈 것과 같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는 과학만이 실재에 대한 진정한 지식을 제공한다고 믿고 있다. 또한 이것을 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저자는 이를 과학주의라고 말해 주고 있다. 과학주의를 따르는 자들은 하나같이 실재에 대한 지식이 과학에서만 나오며 자연과학에서 유래한 실증적 지식만이 공적인 기관에 의해서 보증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것이라고 목소리를 내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해서 오래 전에 기독교 철학자 프란시스 쉐퍼는 자신의 저서들을 통해서 과학은 존중을 받고 철학, 윤리, 신학 등은 주관적인 설명으로 취급받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외쳤다. 지금 우리가 그의 주장을 마주하고 있다.

 

지금 과학주의가 문화와 교회에 미치는 영향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넓고 깊다. 첫째 요즘 젊은 세대의 사람들에게 기독교 진리는 생각할 가치도 없는 것으로 여기게 만들었다. 이어서 둘째 종교를 맹목적인 신앙이 되게 했다. 왜냐하면 종교는 진리라기보다는 인간의 개인적인 욕구에 대한 즉각적인 반응 또는 만족으로 여기게 했기 때문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부분들에 대해서 파산에 이르게 했다. 마지막 셋째는 기독교에 대해서 적대감을 키웠다. 그리곤 우리를 예수님의 지상명령인 제자양육을 비효과적으로 여기게 만들어 버렸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사실은 무엇이냐 교회는 마치 타조가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것과 같이 과학주의가 저절로 사라지기를 여전히 기다리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교회가 이런 사실들에 대해서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니까 자연스럽게 나타나는 현상은 젊은이들은 진리로부터 떠나는 결과를 가져왔다.

 

J. P 모어랜드는 이런 시대와 세대를 향해서 자신의 저서를 통해서 양의 탈을 이리와 같이 과학이라는 가면을 쓴 과학주의가 얼마나 잘못된 것인지에 대해서 보여주고 있다. 물론 서론에 이야기했던 것과 같이 책의 시작부분부터 쉽게 읽혀지지 않지만 인내심을 가지고 책을 읽다보면 많은 진리들을 발견할 수 있다. 저자는 자신의 저서에 성경에 대한 내용으로 과학주의자들의 오류를 증명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믿는 과학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그들과 그들이 믿는 진리 그 자체가 얼마나 잘못됐으며 오류 그 자체인지를 증명해 주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과 그분의 진리가 얼마나 위대한 지, 인간의 이성으로 감당할 수 없는 것들에 대해서 그 분께서 얼마나 아름답게 조율하시는 지 등을 함께 보여주고 있다.

또한 저자는 과학주의는 철학의 한 학설이라고 주장했다. 사실 저는 이 부분에 대해서 많이 놀랐다. 즉 과학주의는 과학이 아니라 지식이 무엇이며 이것을 어떻게 얻는지에 대해서 연구하는 철학의 한 분야라는 사실을 이야기 해 주고 있다. 결국 그는 과학주의를 주장하는 자들의 목소리와 같이 과학만이 진리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귀한 책을 통해서 여전히 과학주의는 실재를 유일하게 발견할 수 있는 길이라고 우리와 다음 세대들을 죄의 늪으로 끌고 가고 있다. 또한 교회와 교회가 전해야 될 복음을 무너뜨려 하고 있다. 이 시점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할 사실이 하나있다. 바로 과학이 그 자체가 잘못된다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히려 문제는 과학주의이다. 물론 진리를 알아가는 학문의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런데 이들은 진리의 모든 부분을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부분만으로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는 생각이나 주장은 과학주의는 성경의 진리뿐만 아니라 그들이 주장하는 과학까지도 모두 망치고 있다. 이와 같이 진리가 아닌 것을 마치 진리라고 외치는 주장이나 그것을 믿고 따르는 도미노의 머릿돌을 미는 것과 같다.

 

결국 저자는 책을 마무리하면서 과학과 기독교의 진리의 통합을 주장한다. 그러면서 적절한 범위와 선을 제안하고 있다. 즉 성경이 모든 것을 최우선이 되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또 다시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최우선으로 여기게 된다면 결국 모든 것은 망가지게 될 것이다. 그렇지 않기 위해서 우리는 과학주의가 전혀 과학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야 한다. 이와 더불어 그 동안 우리가 믿고 있었던 그릇된 사상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며 비합리적일 뿐 아니라 큰 위험으로 돌아오는 지에 대해서 경고해야 한다. 이 사명이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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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 -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도구
폴 트립 지음, 조계광 옮김 / 생명의말씀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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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에 고난에 대한 책은 꾸준히 출판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폴 트립은 자신의 경험과 성경적 근거를 통해서 한 쪽으로 치우고 균형 있게 저술하였습니다.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으매 보이는 소망이 아니니 보는 것을 누가 바라리요 만일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면 참음으로 기다릴지니라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살피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 로마서 (824-27)

 

처음 책을 받아서 첫 페이지를 비행기 안에서 읽었습니다. 눈을 땔 수 없었습니다. 고난의 의미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게 했다. 저자의 이야기와 같이 고난은 어느 한 순 거대한 파도와 같이 찾아와 우리 가슴을 놀라게 한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이 이 표현을 공감할 것이다.(p.12)

 

이 때 우리는 주위를 둘러보기 바쁜 것 같아. 그런데 앞서 서론에 말씀드린 로마서 824-27절의 말씀대로 참 지혜, 평안, 위로의 근원이 되시는 주님의 품 안에 안겨야 한다. 왜냐하면 권세는 하나님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우리에 대한 사랑을 확증하신 이를 향한 것은 내가 준비가 덜 된 상태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주님으로 인하여 주신 평안과 위로, 내게 일어난 영적 싸움에 대해 충분히 준비되어 있음을 의미한다. 이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오해하지 말아야 한다. 사실 우리는 고난을 당할 때에 하나님께서 무엇을 구해야 할지도 모를 때, 심지어 주님 주님 살려주세요. 도와주세요. 외에는 아무 이야기도 할 수 없을 때도 있다. 이와 달리 경우에 따라 내 육신의 소유를 위하여 구할 때도 있다. 이 때 성령님께서는 우리 안에서 우리를 통해서 당신의 아름다운 뜻을 이루신다.

 

저자는 우리에게 고난은 우리의 인생의 일부분이라는 사실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몸에 상처가 났거나 이상한 증상이 몸에 나타났을 때 상처나 증상에 집중하게 된다. 그리곤 이와 같은 현상이 나타나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하게 된다. 결국 고난이라는 과정을 통해서 우리가 얼마나 의존적인 존재인지를 깨닫게 된다. 또한 우리가 그 동안 믿어왔던 인간의 자율성이 얼마나 헛된 망상이었는지를 선명하게 깨닫게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고난은 절대로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지 않다. 오히려 현실적이다. 그리고 삶 그 자체이다. 이런 생각에 대해서 성경은 동일하게 믿음의 조상들이 걸어온 삶의 여정을 통해서 말해 주고 있다.(p.30) 고난 중에 우리가 붙잡아야 할 진리는 하나님의 도우심이라는 사실을 다시 묵상해 보았다.

 

이어서 고난이라는 책을 통해서 생각한 것은 고난은 영적 전쟁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라는 사실이다. 저자는 이 사실을 우리에게 상기시켜주고 있다. 고난은 현실이다. 왜냐하면 삶에 전인격적인 부분들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 고난으로부터 벗어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57-59) 저자는 이 부분을 아주 구체적으로 저술해 놓았다. 예를 들면 분노, 두려움, 시기심, 의심, 현실부정, 절망 등 세부적으로 기록하였을 뿐만 아니라 실제 사례들과 자신의 이야기와 신학적인 생각으로 구성해 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우리로 하여금 한 가지 질문을 가지게 된다.

 

고난이 왜 영적인 싸움일까요?

 

우리 안에 발생되는 고난은 생각, 감정, 의지의 싸움으로 이어진다. 우리는 과정을 거치면서 이 전에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하였던 부분들에 대해서 궁금해지고, 생각하게 되고, 부정해 보기도 한다. 이 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다. 이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 이 과정을 통해서 우리를 향한 그 분의 목적을 발견한다. 또한 그 분께서는 우리를 도우실 능력도 함께 경험하게 된다. 결국 우리는 고난 가운데에 인도해 주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통해서 자족하는 자들이 된다. 이런 관점에서 고난은 시간이 해결해 준다든지 단순한 생각이 전환이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공통적으로 왜 나야 하필 지금이야. 등 부르짖는 외침이 있다. 성경은 고난의 이유에 대해서 침묵하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께서 당신의 자녀들에게 시련을 허락하시는 이유까지 침묵하지 않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에게 고난을 허락하시는 이유는 하나님의 손길을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고린도후서 47-10절에 기록된 대로 타락한 세상에 살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고난으로 선을 이루시는 통로로 사용하신다. 이 과정 속에 우리는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과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때 세상이 줄 수 없는 것을 주신다. 즉 인생의 가장 어둡고 힘든 순간에 놀라운 손길을 발견하는 것은 삶의 가장 아름다운 역설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저자와 같이 갑작스럽게 크고 작은 고난이라는 선물을 받을 때가 있다. 이 때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진리가 있다. 우리의 삶에 매 순간 동행하시는 하나님이시다. 그 분께서는 우리가 원하지도 또는 바라지도 않는 순길을 통해서 우리 안에 놀라운 일을 이루신다. 만약 지금 삶에 저와 같이 크고 작은 고난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간구하며 그 뜻의 뜻을 기다리는 분들이 계신다면 이 책을 추천하고 싶다. 이 귀한 책을 통해서 이 책 넘어 살아계시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을 온전히 바라보시는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럴 때 놀라운 일이 시작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의 도구 고난의 서평을 마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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