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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물과 탄광
진 필립스 지음, 조혜연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월
평점 :
절판
늦은 밤이다. 닳은 구두와 먼지 내린 어깨, 젊은 시절보다 좀 더 굽어버린 그가 돌아온다. 지치고 힘든 시간들, 생명을 좀 먹는 시간들과 바꾼 몇 푼의 돈이 아이들의 삶이 된다. 믿을 수 있고 신뢰할 수 있으며 강직한 부모님, 그들의 쉴새없는 부지런한 노동은 아이를 보호하며 굶는 일도 서러운 일도 없게 한다. 그렇지만 돌아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에 그러면 나락으로 떨어질거란 아슬아슬한 가난속에서 절벽앞에 선 것처럼 불안하다. 늦은 저녁 그의 자동차 시동 소리에, 무사히 돌아온 그의 지친 발자국 소리에 그렇게 절벽앞에서 잠시 떨어져 지친 몸을 침대에 눕히고 달디단 잠을 잔다.
머리맡 다정한 눈빛, 매 끼니를 준비하며 수확한 채소들을 저장하고, 낡았으나 새것처럼 깨끗하게 옷들을 정리하며, 잠들지 못하는 밤을 보내는 그녀가 있어 아이들은 행복한 꿈을 꾸며 자란다.
테스의 집 뒷편의 우물, 잔잔함과 함께 혼자일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다. 깊은 밤 죽음 아이를 우물에 빠뜨린 그 여자가 누구일까, 왜 일까, 아이의 이름은 무엇일지에서 시작된 추리지만 결국 이유를 알게 되고 침묵한다.
노동과 가족, 올바름과 선함을 삶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계절에 따라 채소를 심고 목화를 따고, 장미를 키우며, 계절에 맞는 피클과 잼을 만들며 아이들이 건강하게 행복하길 목숨처럼 지키며 살아가는 가족의 따뜻한 이야기다. 1930년대의 공황과 열악한 탄광의 실태, 흑백분리에 반대하지만 강하게 저항할 수 없는 자식가진 부모의 마음이 담겨 있다.
그러고 보면 우린 어릴 때 대부분 가난했다. 잘 사는 집이 그닥 없으니 상대적 박탈감도 잘 몰랐다. 그저 50원짜리 핫도그나 떡볶이 먹으며 집으로 오는 하굣길이 좋았다. 대부분 같은 회사에 다니는 사택에 살아서 더 그런지도 모른다. 다 비슷비슷한 살림에 같은 직장에 비슷한 나이의 아이들, 사택 중간에 있던 공터엔 아이들이 바글거렸고 저녁이면 밥 먹으러 오란 소리가 이집 저집 들렸다. 부모가 늦는 집은 아무 거리낌없이 누군가가 불러 수저 하나 더 놓고 밥 먹이던 그 때, 우리집이 매일 김칫국에 밥 말아먹어도 부끄러운지 몰랐던 시절, 부지런했던 부모와 그런 울타리에서 더 부지런히 노는 게 다였던 그 때가 떠오르는 마음 따뜻한 책이다.
정답은 여러 개일수 있다는 삶의 진리 , 정말 그게 진리다.
버지와 테스의 친구들이 우리집에 놀러오지 못하는 일이 생길 수도 있다. 게다가 버지를 대학에 보내려한푼이라도 더 모아야 했다. 버지의 일이 아니더라도 우리 가족에게 그런 일들이 벌어지는 걸 상상할 수 없었다. 문득 잭의 병원비를 마련하기 위해 그토록 고생할 때 이웃들이 힘을 모아 우리를도와준 일이 떠올랐다. 내게는 그런 이웃들이 필요했다. 무슨 일이생겼을 때 우리 가족에게 안전망이 되어줄 이웃들이. 나는 분명 그사실을 알고 있었고 조나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그는 나보다 먼저깨달았으리라. 나는 저녁식사 한 번이 이토록 많은 것들을 의미하게 되는 걸 원치 않았을 뿐이다. "그러니까 자넨 우리집에서 저녁식사는 안 하겠다는 거지." 내가 말했다. 조나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커피는 괜찮고?" 그가 콜록거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네, 커피는요." "커피 더 마실 텐가?" 내가 물었다. "주신다면요."
시커멓게 그을린 후춧가루와 새하얀 매시트포테이토를 보고 있으니 문득 죽은 사슴이 생각났다. 부드러운 가죽과 뾰족한 뿔을 지닌 그 사슴이. "사슴을 쏠 때 기분이 어땠니, 잭?" 내가 물었다. "위험해 보여서 무서웠어? 아니면 예뻐서 쏘면서도 미안했어?" 잭은 입안에 음식을 가득 문 채 대답했다. "둘 다였던 것 같아, 내 생각에." 잭은 나보다 더 일찍 그 사실을 알아챈 모양이었다. 정답이 동시에 여러 개일 수 있다는 삶의 진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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