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단 4장까지 읽고 정리한 내용이다.
다락방~ 은 두껍고 어렵고, 맨스필드 파크 넌 또 왜 이리 두꺼운거냐 ㅠㅠ
(제대로 정리한건진 모르겠지만 기록하는 마음으로 자신감없이 쭈굴한 맘으로 몇 자 남긴다 ㅠㅠ)
예술이란 남성의 영역에 감히 발을 들인 여자, 모방이라 족함에도 창의력을 발휘하려 한 여자, 글을 쓰는 여자, 읽는 여자, 전달하는 여자...들은 모두 미친 여자들이자 괴물이다.
다락방 혹은 높은 탑에 갇혀 세상과 단절되어 고독하게 죽어가야 할 악마이자, 절대공정과 절대권력을 가진 남성에 의해 퇴치되어야 할 괴수다.
1장
결코 부화되지 않는 암탉의 알.
통찰력을 상실한 과부.
“여성”이란 인물에 대한 가부장적 소유권을 취하다.
여성을 이야기할땐 남성의 눈과 입으로 족하다.
여성은 남성의 요구와 생각대로 만들어졌다. 소설이든 현실이든 그것은 상관없다.
그들이 만든 틀에서 벗어나는 순간, 그들은 에러이자 두에사이며 루시페라이자, 추방당한 릴리스다.
순결해야 한다. 복종하며 남성을 기쁘게 하는 것만이 여성의 의무다. 그러지 못한 여성은 추방, 배척, 감금이 필요한 치료대상자이자 질병덩어리다.
백설공주의 계모가 듣던 거울의 목소리는 가부장의 목소리, 남성의 목소리다.
그들은 여성들이 서로 질투하며 미워하길, 언제나 아름다움에만 집착하길 바란다.
거울도 백설공주의 유리관도 모두 남성의 목소리다.
속박과 순결을, 남성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목소리.
결국 여성들은 현실에선 복종과 순종을 배운다. 남성들이 만든 틀에 자신의 몸을 우겨넣는다. 틀밖으로 삐져나온, 여성들의 자아든 몸뚱아리든 가차없이 잘려나간다.
글에서도 마찬가지다. 남성들의 글 속에서 여성은 생각도 말할 입도 없다. 그저 그들의 잣대로 유령이나 천사 혹은 마녀가 될 뿐이다.
그러니 남성들의 목소리와 남성들의 기준을 보여주는 거울을 깨고 나와야 한다.
2장 감염된 문장은 새끼를 친다 (에밀리 디킨스)
여성들의 글쓰기에는 불안이 가득하다. 예술에서 여성은 언제나 배제대상이다.
여성 선배나 후배에 대한 갈증, 두려움과 소심함, 가부장적 권위에 대한 두려움 등이 만들어내는 “열등화”는 오히려 남자 작가와 구분해 주는 여성 작가만의 현상이다.
작가가 되는 것에 대한 불안, 여성이란 성이 예술가에겐 부적절하다는 오래되고 끈질긴 시선은 오히려 연대와 유대를 낳았고, 이것또한 여성문학의 특징이라고 말한다.
온순과 복종, 자아축소를 배우는 소녀들은 절망하고 병든다. 아름다운 대상으로서의 몸에 대한 학습은, 결코 그렇지 못한 자신의 몸에 대한 혐오감을 학습하게 한다.
숙녀는 이미 병든 존재이며, 하류여성들은 병들게 하는 존재이다.
여성의 나약함은 숭배대상이면서 혐오의 대상이기도 하다.
여기서 빨간 구두 이야기가 나온다.
가난한 여자아이에게 구두를 고를 기회가 왔다. 한 켤레, 그러니 선택은 정해져 있다.
어디든 신고 가기 무난한 까만 구두나 갈색 구두.
그러나 여자아이는 빨간 구두를 고른다. 춤 추러 갈때나 신는 빨간 구두.
아름답게 춤을 추는 그녀는 발이 잘린다. 춤을 추는 모습에 반했던 사랑은 떠나간다.
여성작가는 절대 드러내서는 안된다. 겁에 질린 듯, 혹은 열등감에 가득 찬 듯한 제스처와 말들, 익명성에 숨거나 겸손해야 한다. 그래야 미치지 않은 여성으로 출판계에 발을 디딜 수 있다.
반짝거리는 빨간구두를 신고, 아름답게 춤을 추는 모습은 옳지 않다.
눈에 띄지 않게 조심스럽게 여성의 한계를 말하며 자신이 하찮음을 끊임없이 보여줘야 한다.
빨간 구두의 두 다리처럼, 여성 작가의 두 팔이 잘려나가지 않으려면 말이다.
열등화와 불안함에서 오는 연대와 유대, 그리고 여성의 박탈감 등을 표면아래 숨기면서 갖게 되는 기이함은 여성문학의 특징이 된다.
가부장적 제도와 그 제도가 만들어 낸 집이란 감옥, 임신이란 신체의 감금과 탈출의 이야기가 숨어 있다고 말한다.
3장과 4장
동굴은 여자의 장소이자, 자궁 모양의 폐쇄된 공간이다.
비밀스럽고 신성한 대지의 집이자, 빅토리아시대의 공포이며 여성의 곤경과 무덤이다.
탈출 가능성 없는 감금이자 여성의 힘이 생겨나는 장소이며 세계의 중심이다.
결국 동굴이란 힘을 얻는 장소이며, 치유하는 곳이며, 미래가 잉태되는 곳이다.
무지를 가장하고 수동성을 연기하는 여자들의 로맨스소설이 어떻게 여성의 자기도취와 망상에 기여했는지 보여주는 것이 오스틴의 소설이라고 말한다.
결국 로맨스소설 속 낭만적 여자주인공으로 감정이입한 연극적 소녀들이 맞이하게 되는 비극이 <사랑과 우정> 속 로라와 소피아 이야기의 본질이라는 것.
난봉꾼에 대한 경고, 인습에 대한 반항, 집을 벗어나고 싶은 여자들.
그래서 마차를 꿈꾸며 말을 타고 달리며 어디론가 가고 싶어한다. 물론 여자들에겐 마차도 말도 주어지지 않는다. 이동의 자유도, 무언가를 살 수 있는 자유도 없다. 또한 정작 과감하게 사랑에 빠져 물불가리지 않는 선택을 한 여자들에겐 사회의 단절과 경멸만이 남는다. 남자들은 돌아올 수 있지만, 여자들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상속에서도 배제되어 생계마저도 남자에게 적선받아야 할 상황이다.
돈도 없고 상속받을 재산도 없고 교육받을 기회도 없었다. 견문을 넓힐 기회 또한 당연히 없었다. 생존을 위해서 가면을 쓰고 연극을 하며 살아가는 여성들의 불안함과 공포는 당연한 결과다. 불안할 수 밖에 없다. 살아남기 위해 가면을 쓴 삶이 거짓말고 뭐고 있을까.
제인 오스틴의 로맨스가 담긴 소설을 읽으면서 뭔가 찝찝했던 이유?
사랑이야긴데 사랑보단 흥정에 가깝다. 계속 불거져 나오는 지참금 이야기, 지참금으로 인기순위가 정해지는 여자들. 내가 가진 지참금보다 좀 더 나은 상대를 찾기 위한 후려치기와 과대포장...그 속에서 진짜 사랑을 믿는 여자만이 탈출할 수 있다. 하지만 이것도 함정이다. 순간의 사랑에 불타올라 길을 나서면, 여자만 그 불에 타서 재투성이가 될 수도 있다. 재투성이가 된 여자는 돌아올 곳도 받아 줄 곳도 없다. 그 사랑의 목적지가 제대로 된 남자일 경우에만 가능하지만, 그 시대 제대로 된 남자 찾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낭만에 휘둘려서 훌쩍 사랑의 도피를 떠나는 건 사형선고다. 여자에게만.
<맨스필드 파크>의 패니는 오히려 소심한 편이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을 팔아넘기는 일만은 용감하게 거절한다. 적당함을 넘어서 자신의 처지에선 분에 넘치는 청혼을 거절할 줄 아는 용기를 가졌다. 그 덕에 패니가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결말을 맺는다.
수다스러운 대사, 꼼꼼하고 치밀한 묘사들에 헉 하게 만드는 편지서신들(지금으로 따지면 길고 긴 카톡대화? )사이엔 호감과 사랑, 질투와 시기만 오고 간 것이 아니다.
그녀의 소설을 읽다보면, 그 시대 여성들의 갇힌 삶, 묶인 몸 그리고 빼앗긴 자유...를 오가며 만들어낸 구속복이 하얀 웨딩드레스 아래 비치는 듯 하다.
사랑이야기지만 경고와 흥정이 난무하는 사랑이야기다. 그 속에서 휘둘리지 않고, 자아를 찾고 스스로를 지키는 여성의 이야기는 시대를 넘어서는 힘을 가지고 있다.
(3장까지 읽고나서 <맨스필드 파크>를 읽었다. 그러자 소설 속 그녀들의 이야기가 조금 달라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