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를 버리다 -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가오 옌 그림, 김난주 옮김 / 비채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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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극악의 가격 ㅠㅠ
무라카미 하루키 작가가 마음에 들어 선택했다는 삽화는, 정말 추억을 불러 일으키는 아련한 맛이 있다.
어린 시절의 하루키와 가장 어울리는 모습, 고양이들 사이에서 책 읽기가 아닐까
잃어버리고 버려지고 혹은 잊힌 시대를 살아 간 아버지와 같은 곳이지만 다른 시간을 사는 자식은 반목할 수 밖에 없다. 실망과 기대, 그리고 충족해 드리지 못함에 대한 죄책감이 아버지와 아이 사이에 묘하게 흐른다.
책을 좋아하고 하이쿠를 쓰는 아버지밑에서 당연하다는 듯 그는 책을 읽고 소설을 썼다. 혹여 아버지가 난징대학살과 관련있을까 걱정하며 외면하다가 마주한 진실은 “다행히” 였다.
삽화가 한 몫 하고, 고양이가 두 몫하는, 그러나 정작 고양이 이야기는 짧은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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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구석 미술관 2 : 한국 - 가볍게 시작해 볼수록 빠져드는 한국 현대미술 방구석 미술관 2
조원재 지음 / 블랙피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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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많은 예술가들의 삶은 휘청거리며 쓰러질 듯 아슬아슬하다. 삶의 희노애락을, 남들과는 다르게, 한 꺼풀 벗겨낸 피부처럼 따갑고 아프게 받아낸다. 그 대신 기쁨과 사랑도 더 강렬하게 느끼며 표현한다. 그런 감수성만으로도 휘청이고 어지러운데, 온갖 삶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고통받는 한국의 화가들.

역사 속에서 그들이 그리고자 했던 그림과 담겨 있는 정신들이 담겨 있다

아이의 중학교 교과서를 보다가 반가운 시를 한 편 발견했다. 시인이 제주도에서 누군가를 상상하며 쓴 시, 바로 이중섭에 대한 시다. 가난하지만 행복했던 제주도 시절의 삶을 상상하며 시인은 이중섭의 그림을 시로 담아냈다. 순수했고 사랑을 믿었던 이중섭은 그러나 외로움 속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의 그림은 탐욕스런 누군가의 손에 의해 도둑맞고 사기당하는 과정에서, 가족과도 떨어져 있던 이중섭은 삶의 의지가 꺾이지 않았을까.

이중섭의 아들들의 사기행각에 논란이 일었던 적이 있다. 아들들이 아버지의 그림을 위작 판매한 사건 , 그들을 비난하기 보단 마음이 아팠던 사건이다. 행복하길 바라며 건강하길바라며 복숭아와 낙원을 그리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을 아버지 이중섭은 그 아들들을 비난하지 않을 것이다. 50년대의 그 시절, 그 시대의 사람들의 잔인함을 견디며 아이들이 보고 싶었을 그, 그래서 그가 그린 아이들의 그림이 밝으면서도 애잔하다.

마사코에게 사랑을 담아 보내던 이중섭의 엽서화( 밑에서 첫 번째 사진)와 그가 그린 조국이 담긴 소 그림, 그 소는 마치 이중섭 본인 같기도 하다.

그리고 나혜석, 가장 영화같은 삶을 살았지만, 이중섭만큼 비참했다. 자식을 보지못하는어미의 마음과 수전증 등으로 그림을 그리지 못하는 화가의 죄절은 어떤 그림을 그리게하는걸까
여성이라는 것만으로도 이미 죄인으로 태어나는 세상, 자유연애와 감정의 해방을 꿈꿨던그녀, 그녀의 그림들엔 그녀가 있다. 그녀가 쓴 글(경희) 또한 그녀다. 그녀는 거짓없이 자신을 그리고 자신을 썼다. 결국 그 시절의 역사는 그녀에겐 지독한 외로움과 낙인을, 그녀의 아이들에겐 그리움과 미움이란 양가감정을 안겼다. 인연은 돌고 돌아, 아이들이 잘 되길 바라는 마음이 결국 나혜석의 아이들을 그 시절 어려웠던 유학 ( 나혜석의 지인 등 인맥의 도움)등으로 이끌어 삶을 조금 더 풍족하게 해주었다. (두번째 그림은 나혜석작가님의 화령전 작약이란 작품이다.)

이병철회장의 집안은 원래 의령에서 부잣집이었고 시대를 잘 타고나, ( 정미소, 무역을 통한 삼성물산)삼미시대에 어울리는 제일모직과 제일제당을 시작으로 삼성까지 이르렀다. 아버지는 그 중 하나를 다니셨는데, 매년 말엔 달력을 가져오셨다. 거기서 처음 본 명화 중하나가 이응노화백의 그림이다. (아마 이병철회장의 개인소장품이었던 모양이다. )아주 어렸던 나는 그 한글자음 그림들이 좋았다. 삐뚤한 것이 내가 쓴 거 같기도 하지만 거친 질감과 묘한 구성과 색감에 한참 봐도 질리지 않았다. 그 거친 질감이 낡은 돌을 휘감던 세월의 비바람이었음을 나중에야 알았다. 서양의 기법으로 동양의 서예를 써내려간 화가, 관객에게 상상하게 함으로서 오히려 관객들을 창조자로 만든 화가이다. 그의 붓으로 그려진 글자와 사람들은 살아 있듯 생생하다 그림 속 그들의 삶이, 내 삶보다 더 날 것이고 더 쌩생하다.

유영국, 어릴 적엔 뭐지? 하면서 봤다. 한참 인상주의나 라파엘전파 그림에 빠젔던 시기였다. 그런데 나이가 들수록 작가의 그림에서 산이 보이고 남실거리는 바다가 보인다. 눈부시게 밝은 산을 보며, 쑤쑥 뻗어나간 산등성을 구비구비 넘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 작품에몰입하게 된다.

아이가 어렸던 시절, 거실 벽 한귀퉁이엔 장욱진 작가의 그림이 한 장 붙어있었다. 아이는커다란 나무 위 작은 집과 귀여운 새, 달구지를 보며 좋아했다. 저 그림 속 마을에 들어가보고 싶어했다. 그렇다. 작가의 그림을 보면 그 속에 들어가고 싶고 그 곳엔 순수함이 가득하다.

평생 환쟁이로, 그림만 보며 살다간 장욱진, 가장 나답게 그림을 그리다 도인이 되어, 한 마리 새로 날아간 사내. 화가는 그의 그림안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 불멸의 사내가 되어버렸다.

(세번째 그림은 장욱진작가님의 강변풍경이다.)

나쓰메 소세키의 소설에서 사랑을 고백할 때 “ 달이 아름답네요” 라고 하는 구절이 있다.

참말로 아름다운 달, 그 달을 쏙 닮은 환한 백자 항아리, 그 둘이 참 아름답게 그려진 그림, 김환기작가님의 작품들이다.< 달과 항아리> 가장 우리 민족적인 그림이라고 하지만, 난그 그림들을 볼 때마다 사랑고백이 떠오른다. 소세키의 구절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랑고백에 가장 어울리는 그림같다. 키스하며 둥둥 떠오르는 샤갈의 그림이 참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은은하고 변함없는 선하고 순한 사랑의 말엔 김환기작가님의 달과 항아리가 참 어울린다. 이 그림앞에서 사랑고백을 한다면 마음 속으로 몰아치는 곱고 따스한 바람에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까. 달과 항아리가 하나가 되는 그림 앞에서 고백은 너와 나 또한 하나되자는 의미가 아닐까. 그러나 그림들이 너무 비싸 조금 놀랄지도.

예전 우연히 작가님의 그림들을 봤다. 수 많은 점들을 마주하며, 그 점들 속에 항아리와 달이 삶이 모두 담겨있음을 그 점 하나 몰래 훔쳐 오고 싶었던 그 마음. 난생 처음 뭔가를훔쳐 내달리고 싶었다. 그 점 하나 우리 집 거실에 달아 놓으면, 휘엉청 밝은 달 하나 떠오르지 않을까. 어느 날은 별 하나로 어느 날은 항아리로 . 그 항아리에 내 마음들을 담아 두고 푹푹 삭혀 깨끗이 빨아 밤하늘에 널어두면, 달도 되고 별도 되지 않을까

80년대에 국민학교 출신인 나는 박수근의 그림 또한 달력으로 만났다. 지방에서 미술관이뭔지도 모르고 자란 내겐 달력 속 그림들이 전부였다. 어떤 종이에 그린 그림인지, 뭐 때문에 이렇게 친근하고 보기 좋을까 생각했다.

그러다 조금 더 커선 ( 나목) 이란 박완서 작가님의 책에서 박수근화백을 만났다. 이런 인연이 있구나, 삶이 참 고달팠음에도 가족과 그림을 지키며 참 순수하셨구나란 생각을 했다.

인간의 선함을 믿었고, 그 믿음이 그림에 그대로 묻어나는 선한 화가다

천경자화백님도 마찬가지다. 달력그림에서 화관을 머리에 썼으나 외로움이란 다크써클이 배경처럼 깔린 듯한 여인과 아프리카의 코끼리와 사자를 만났다. 어린 시절엔 그 여인들이 무섭게 느껴졌지만, 나이가 들면서 삶이란 환한 얼굴의 생채기없는 소녀가 아니라, 혼란한 눈빛에 어둠도 담겨 있음을 느꼈다.

위작논란으로 신문에서 봤던 작가님의 작품, 작가가 그린 적이 없다는 전문가들 또한 위작이라 말하는 작품이, 법 아래 진품이란 판결을 받은 참 묘한 세상이다.

백남준, 자유로운 영혼들을 새로운 기술과 접목해, 비디오 아트를 창시한 화가, 우리나라 화가 중 가장 널리 알려진 화가. 다다익선을 봤던 기억이 난다. 거대한 탑 속에 메시지를 담은 화면들이 움직이던 그 장관.

이우환작가님, 처음으로 로스코나 밀레비치의 작품을 봤을 때만큼 당황했다. 참 좋군요 해야 지식인 아니 최소의 교양인이 되는 것인가. 입이 바싹 말랐다. 거짓말엔 소질이 없다. 어버버, 미술관의 원시인이 된 기분이다. 그래서 이런 책이 있는 게 아닐까. 그 분의 철학과 사상 등을 통해 작품의도를 알고 나면 그래도 원시인 중에 좀 낫다는 네안데르탈인이라도 된 듯한 기분이다. 비록 멸종했다지만.

다른 책에서 본 이우환작가님의 말씀을 덧붙여 본다. 이 구절을 읽고 그나마 작품에 대해 이해가 됏던 거 같다.

“예술작품은 이 시대를 상징하는 메타포어를 보여야 한다. 거창한 꿈을 투사하는게 아니라, 그런 것이 다 깨지고 잡다한 황무지에 서 있다는 느낌을 환기시키는게 중요하다. ”


나는 그림을 좋아한다. 어떤 그림이든 상관없다. 옆집 꼬맹이가 그린 그림도, 별 생각없이 아이들이 그리는 모래사장의 낙서도 좋다. 길 가다 벽에 그려진 삐뚜름한 꽃 한 송이도 동그라미 하나도 피식 웃게 된다. 무슨 맘에 무슨 억하심정에 저 깨끗한 벽에, 누가 저런 걸 그려놓은걸까. 그림은 내 삶에서 또 하나의 위안이다. 예전엔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아 이건 누구의 누구그림. 그게 그리 중요한가 싶었다. 그러다 해설서를 조금씩 읽기 시작했고 (솔직히 그 속의 수록된 그림들을 보려고) 알기 전과 알기 후의 느낌이 조금씩 달라짐을 느꼈다. 그냥 그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림을 그린 이와 친구가 되고 친밀해 지는 느낌, 물론 나 혼자만의 짝사랑이지만. 그래서 이런 책들이 좋다. 어렵지 않고 친근하고, 수록된 그림들만으로도 행복하다.



( 나만의 그림 관련 책 보는 법, 일단 그림부터 감상하기,그 후 착 읽으며 정보를 알아가기,글쓴이의 감상도 읽어보기, 다시 그림보며 새롭게 느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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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올리브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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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거나 기력이 있는 사람들은 노년의 삶을 마무리나 추수 혹은 겨울에 비유한다. 이제 두 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죽음을 기다리며 욕심을 내려 놓는 삶. 그러나 그렇지 않다.
다시, 그렇다 다시 올리브다
올리브의 삶은 계속된다. 사랑도 삶도 따스함과 추억도 사계절도 다시 돌아온다.
조금 더 구부정해지고 지팡이가 필요해지지만 새로운 사랑이 왔듯,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관계가 회복되기도 한다. 사랑은 가바린 것 같지만 또 그렇지만도 않다.
어느 날 갑자기 손을 흔들다 혹은 잠들다 다리 건너로 갈 수 있지만, 노인용 기저귀를 숨어서 사야 하지만 다시 그렇게 장미나무는 꽃이 핀다.

선한 사람들의 이야기다
사람들은 상처와 비밀을 가슴에 안고 살아간다
사랑하지만 사랑해서 오해하고 아프고 상처를 받기도 한다
솔직한 고백들 속에서 눈물로 상처를 소독하고 나면 기분좋은 따가움위로 딱지가 내려앉는다.
우리는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 대해 가장 잘 알 것 같지만 거가장 잘 모르기도 한다. 그래서 사랑하는 존재에게 가장 상처를 받나보다. 70대의 사랑을 응원하며 보다가 잭의 죽음에 마음이 아렸다.
나이가 들면 뭔가 다른 인종이 될거라 믿었나 보다. 마음엔 철갑을 두르고 오지랍으로 뇌가 가득 차 있는 다른 인종. 젊은 나완 다른.
젊은 내가 늙은 내가 됨을, 젊은 시절의 부끄러움이 밀려오지만 생각해보면 또 그닥 부끄러울 것도 없다. 살아내는 과정인걸.
상처받고 두렵고 외롭다. 잠 못 들고 그립고 아프다. 그렇지만 내 상처만 붙들고 울며 불며 아파하지 않고, 한 걸음 더 나가 누군가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상처 토닥이는 뭔가 쿨하고 진솔한 올리브란 인물이 참 감당안되는 듯하면서도 매력적이다.
엄마를 닮은 아내를 얻은 크리스에게 축복이 있기를 ㅎㅎ
신디와 올리브가 좋아한다는 2월의 햇살, 올 2월엔 조금씩 조금씩 더 늘어나는 햇살을 느껴보고 싶다.

(유아차로 번역한 것, 별 것 아닌것 같지만 그 별 것 아닌 것도 하지 않는 곳이 많아 참 고마운 맘, 말은 많은 걸 담는다.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세상은 말로도 변할 수 있다 . 또 윤슬이라던가 고운 우리말 번역도 성의있고 좋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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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에 제가 산 책들입니다. 마음에 쏙 드는 책도 있지만 아쉬운 책도 있어요 ~ 11월, 열심히 읽어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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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이 2020-11-18 1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두근거리는 책들!! 리뷰도 기대할게요 미니74님! :)

mini74 2020-11-18 10:53   좋아요 0 | URL
앗 고맙습니다 *^^*

2020-12-05 2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2-05 21:1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명랑한 은둔자
캐럴라인 냅 지음, 김명남 옮김 / 바다출판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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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집 강아지는 나랑 가장 오랜 시간을 보낸다. 주인을 닮는다더니 아님 나랑 닮은 모습에 끌려 이 곳에 오게 된 것인지, 우리 강아지는 아주 소심하다.
나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캐럴라인 냅의 에세이는 마치 내 일기장을 보는 듯 하다 물론 나의 글빨은 너무나 하수지만.
우리 강아지는 겁도 많고 소심하다. 그런 약점들을 숨기고 싶은지, 다른 강아지가 다가오거나 무서운 소리( 주로 갑자기 나타나는 사람이나 오토바이, 비닐이 바람에 날리는 소리) 가 들리면, 낯설음과 공포에 덜덜 떨면서 짖는다. 내 뒤에 숨어서 혹은 달달 떨면서, 용감한 척 짖는다. 나 또한 그렇다. 나는 짖는 대신 의미없는 말들을 해댄다. 눈을 마주치지는 못한다. 다른 곳을 응시하며 궁시렁 궁시렁 뭐라고 떠들어댄다.
그리고 집. 맞다. 나는 언제든지 얼마든지 집에 있을 수 있다. 고등학교 시절 처음 보는 아이가 같이 학교를 가자고 했다. 가까운 거리에 같은 학교면 같이 갈 수도 있지. 그러나 거절도 못 한 나는 그 날 저녁부터 밥도 먹지 못한체 어떻게 거절할 것인가 고민하다 실제로 몸살이 난 적이 있다. 거리감있는 친절은 가능하다. 용기를 내면 충분히 흉내낼 수 있지만, 그런 내 친절에 보답하려는 순간 두려움이 앞선다. 매 번 엘리베이터에서 만나 인사를 열심히 하는 건 가능하지만, 그 분이 커피를 마시자고 하면 그 때부터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을 이용한다.

남편은 이런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 밝고 화사한 미소로 정감있게 눈을 마주치며 친절을 베풀고 친절을 즐기며 살라고 한다.
그러나 그건 나에게 할 수 없는 도전. 남편의 그런 성격이 어쩌면 나와 그나마 친해진 이유가 아닐까. 질기고 끈질긴 친절과 나의 거절못함이 ㅎㅎㅎ

백설공주는 외로워서 문을 열어줬다고 한다. 나? 없는 척하며 숨 죽이고 있겠지. 계모란 위험도 피하지만 왕자도 못 만나겠지.
이런 내 삶이 좋다면?
편협하고 좁은 인간관계에 나 또한 만족하며, 비록 눈을 마주치며 이야기하진 못해도 내 가족 사랑하는 이와는 그래도 간간히 눈을 맞춘다. 글로 소통하고 문자를 주고 받는게 더 편하며 집에서 가장 행복한 나.
그렇다 나 또한 작가처럼 행복하다.
내 집에서 내 공간에서 편안하다. 우울하고 음울하게 드라큘라같은 모습으로 방구석에 있는 게 아니다. 즐겁게 먹고 즐겁게 읽고 즐겁게 행복하다.
명랑한 은둔자, 맞다. 꼭 은둔자가 우울할 필요는 없다. 밝고 명랑하고 즐거운 은둔자, 방구석의 은둔자다.

( 여성들의 연대에 대한 이야기도 담겨 있다.
묘한 갈등과 양가감정.
여성들의 강력한 연대는 자유와 함을 줬지만, 남성들이 경제력을 장악하고 남성에게 의존하면서 변화가 생겨났으나, 강력한 친밀감은 본능으로 남아있다)
(작가는 불안과 우울 , 상실감속에서 주변의 모든 상황이 통제할 수 없이 마음대로 흐를때, 결국 자신을 통제하려 하고, 식욕을 통제하면서 불안감을 다스렸다고 한다. 마취제같은 알코올로 잠시 고통을 희석시키려 하지만 그 것 또한 힘든 것. 중독은 고쳐지기보단 나아지는 것. )
( 착해야한다는 여자의 짐을 버리자. 여자해병대를 만들자 )

만약 그 상대가(대부분의 사람이 그렇듯이) 타인에게호감을 사고 싶다고 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태도가 그에게는 자신을 무시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 만약 그 상대가 자신이 타인의 기대에 부합하는지 혹은 매력적으로 보이는지걱정하는 사람이라면, 수줍어하는 사람의 불편함이나 과묵함이 그에게는 자신이 지루해서 그러는 거라고 보일 수 있다. 수줍음은 오해로 통하는 문을 활짝 열어젖힌다. 수줍음을 타는 내 친구 하나는이렇게 한마디로 요약했다. "침묵은 로르샤흐 테스트야."

위로와 인정을 얻을 수 있다고 느끼는 것, 내가 가진 자원만으로도 나라는 사람, 내가 하는 선택만으로도 고독의 어두운 복도를 끝까지 걸어서 밝은 곳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믿는 것, 이런 것은 잘하지 못했다.
나는 시리얼 그릇을 들고 거실로 가서 TV 앞에 자리 잡고았다. 그리고 생각했다. 정말로 명랑하게. 이게 내 집이야.

욕구가 없다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할 일도 없으니까.
이것은 내 행동의 본질을 보여주는 일이었다. 내가 한편으로는무언가를 간절히 원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을 결코 충분히갖지 못할까 봐 겁먹었다는 사실, 음식은 그 사실을 끔찍하고 강력보여? 나는 사람들이 겁났고, 실망할 것이 겁났다. 더 깊은 차원에서, 나는 식욕뿐 아니라 감정적 욕구와 성욕까지 모든 욕구가 겁났다. 그래서 그것들을 억압하고, 짓누르고, 의지로 없애버리기로 다하게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던 것이다. 음식을 통제하는 것은 그런갈등을 표현하는 동시에 부정하는 방법이었다. 그때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사람들에게 화나 있었다. 나를 버린 것처럼 느껴졌던 남자친구에게, 내게 소극적이고 거리감 있는 태도를 취한다고 느껴졌던 부모님에게, 멀리 이사해버린 언니에게. 하지만 그 화를 표현할 수가 없었고, 그래서 대신 그것을 몸에 걸치기로 했다. 당신 때문에 내가 어떻게 됐는지 보여? 내가 얼마나 절망적이고 불행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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