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선함과 인내로 바뀔 수 있을까, 올곧음으로 세상을 살아 갈 수 있을까.
그렇다고 믿는 내게, 몇몇 친구들은 모지리라고 말하기도 한다. 모자라니까 세상을 좀 모자라게 본다는 뜻이다. 친구들 말로는 자기들은 훌쩍 큰 성인이 되었기에, 삶이란 그렇게 친절하지도 동화책 같지도 않다는 걸 깨달았는데, 너는 어찌 그리 맹한 모자라는 소리만 하냐는 애정 섞인 잔소리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믿는다. 책에서 역사가 말하니까.
지금 내 삶이나 주변이 그렇게 보이지 않는다 해도, 훗날 멀리 본다면 조금은 달라져 있지 않을까.
여전히 삐딱하게 어느 방향으로 뒤틀려 걸어가는 것 같지만, 하늘 어딘가 높은 곳에서 보면 점선 한 칸만큼은 다시 올바른 방향으로 조금씩 바뀌어 나가지 않았을까. 현실이란 점선 위를 걸으면서, 우리는 조금씩 힘을 주어 바른 방향으로 걸어가려 한다. 표가 나지 않는다고 해서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다.
로자 파크스와 같이 했던, 버스 안 타기 운동이 그러했다. 일년 가까이 그들은 걸었다. 흑인들끼리의 카풀을 방해하고, 온갖 딱지를 남발하는 백인경찰들에 대들지 않았다. 부당한 위반법규에도 그들은 분노하는 대신, 차를 놓고 걸어 다니는 것을 택했다. 결국 엘우드의 할머니도 버스 앞에 탈 수 있게 되었고, 어디든 앉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여전히 장벽은 높다. 아직도 식당에선 차별이 이루어지고, 교육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지만 사람들은 들떴다. 변하고 있고, 우리는 그 변화의 언저리 어딘가에 있다. 그렇지만 그럴 때 세상은 또 변하지 않으려는 무리들의 발악도 시작된다. 어리고 흑인인데다가, 부모조차 없는 가난한 아이 엘우드, 그 아이가 가슴에 품은 이상과 올곧음은, 칭찬대신 두려움으로, 그리고 곧은 길이 아니라 막다른 길로 내몰았다.
지금은 어떨까. 달라졌다고 말한다. 그리고 달라지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달라짐의 시선이 우리가 아닌 강자의 시선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든다. 여전히 약자는 존재하고, 그들의 세상은 조금 더 위험하다. 누군가의 보호 아래 있지 못하면 언제든 내동댕이쳐지는 곳, 우리가 사는 곳의 보호자는 자본이겠지만. 어리고 돈 없고 부모 없는 세상이 어떤 곳일까. 그 곳이 니클이 아닐까. 그럼에도 믿는다. 우린 조금씩 달라졌다. 무연고의 시신들을 찾아내고 진상을 규명하며, 다신 이런 일이 없기를, 마음 속에 작은 분노들을 새기며 그렇게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읽는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어른들이 말하는 정의라는 것, 인간다움이란 것, 존엄성이라는 것 좋은 말들이지. 그렇지만 엘우드가 그런 어른들의 말에 귀 기울이며 자신이 조금 더 낫다는 방향으로 그렇지만 위험한 쪽으로 몸을 틀 때, 내 마음은 다른 말을 하고 있다. 그러지마, 위험해. 굳이 네가 그럴 필요는 없어.
엘우드를 보며, 니클을 지켜보며, 나는 어머니의 마음으로 본 것이다. 내 아이가 위험에 빠지지 않기를, 모나지 않기를, 그러면 세상이 바뀌지 않는다고? 그걸 왜 내 아이가 해야 하냐고, 차라리 내가 돌을 들고 거리를 나갈게. 이런 마음. 마틴 루터 킹에게도 원망의 마음이 들었다. 순수하고 정의로운 어린 영혼들에 이 무슨 바람잡이야? 엘우드에게 비리투성이의 말도 안되는 힘든 일이 닥칠 거라는 걸 예감하기에, 나도 모르게 마틴 루터 킹 입 다물어, 넌 엘우드를 책임지지 못할 거잖아, 이 착한 아이를. ( 할머니의 마음도 그러했겠지. ) 그렇지만 알고 있다. 마틴 루터 킹도 엘우드도 터너도 아무 죄가 없다는 것을. 엘우드를 지킨 것이 어떤 마음과 누구의 이야기였는지 알 듯이.
하디와 스펜서를 묵인하고, 니클을 눈 감으며 배를 불리고, 세상을 지옥처럼 만든 인간들도, 이렇게 변명하겠지. 내 아이를 위해서였다고, 혹은 그게 맞는 걸 줄 알았다고, 그렇게 배웠다고.
하지만 어느 하늘 아래, 아이를 죽이고 고문하고 물건을 빼돌리는 게, 자식을 위하는 일이며 세상의 이치에 맞는 일일까. 나처럼 숨죽이며 내 아이에게만 아픔이 가지 않는다면 꾹 참던 이들이 공동정범이 되어 만든 지옥이 아닐까. 결국 그 지옥이 점점 넓어져 내 아이를 삼킬때까지 모르겠지, 아니 사실 알면서도 두근거리면서도 내 아이만은 괜찮을거라 믿겠지. 유대인이 잡혀갈 때 이웃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작가가 어느 정도 실화를 바탕으로 써내려간 니클의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부산의 형제복지원을 떠올렸다. 권력형 비리와, 가장 약한 아이들에 대한 가장 악한 일들이 자행된 악마가 울고 갈 그 곳. 니클의 그 인간들처럼 형제복지원의 그 것들도 너무나 떵떵거리며 잘 사는 모습에 울화가 치밀었다. 살인,강간, 폭행과 고문, 횡령이 아이들을 파고든다. 아직은 세상에 믿을 구석이 눈곱만큼은 있을 거라, 그 선의에 일말의 기대를 걸었던 엘우드는 사냥당하고, 터너는 사냥당하는 마음으로 하루 하루를 산다. 언제나 쫓기고 불안하다. 그림자조차 두려운 삶에서 제대로 살아낸다는 건 기적이다. 엘우드의 선함을 순수함을 기억하며, 앞으로는 터너가 터너로 살기를 바라본다. 진짜 감화원 니클은 사라진걸까.
빌리 홀리데이가 노래했던 이상하고 슬픈 열매는 지금도 또 다른 색을 띠며 여기저기 매달려 있는 건 아닐까.
그럼에도 나는 믿는다. 세상은 좀 더 나은 방향으로 바뀌고 있다고. 터너가 드디어 터너로 살기로 결심했듯 말이다.
( 작가님은 69년생. 황금닭띠시다 ㅎㅎ)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