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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20년 9월
평점 :
<잘 살기. 그런데 그건 대체 뭐였을까 하고 이순일은 생각했다. 나는 내 아이들이 잘 살기를 바랐다.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모두가 행복하기를 바랐어, 잘 모르면서 내가 그 끔을 꾸었다. 잘 모르면서>
끔찍한 일들을 겪으며 자랐다. 전쟁과 죽음, 고통과 힘든 삶들, 배고픔과 이별, 노동과 외로움 속에서 살아간 순일은 그저 아이들이 끔찍한 일을 겪지 않고 무사히 어른이 되기를, 행복하기를 바랐다. 자신은 잘 모르면서란 이 구절이 마음 아팠다. 행복이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저 아이들은 행복하길 바랐다. 우리 부모 세대가 그랬다. 가난하고 힘들고, 그래서 흰 쌀밥 먹이며 하고 싶은 공부하게 하는 것, 그것이 행복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소처럼 일했다. 하늘 한 번 볼 줄 모르고, 아이들 손을 잡고 놀이동산 가는 줄도 모르고, 일만 하고 모으고 모아서 아이를 씻기고 학교에 보내고 밥을 먹였다. 지금도 부모는 사랑을 행복을 그런 식으로 표현한다. 고봉으로 쌓인 밥과 결국 남아서 냉장고로 들어가게 될 음식들, 누가 먹는다고 이렇게 많이해요 하는 자식들의 타박 속에도, 부모는 먹이는 것으로 행복하길 기원한다. 배곯아 본 자들은 새끼들이 배 곯지 않고 커 가는 것이 다다.
여기 나오는 이순일 또한 그러하다. 지금도 큰 딸 한영진의 살림까지 두 집 살림을 하고, 집에서 독립해 나간 둘째 딸 한세진이 반찬을 가지러 자주 오지 않는다고 걱정한다. 시장을 보고 먹인다. 오래 전 가정형편이 어려워져 대학을 포기하고 가장이 된 큰 딸 한영진을 위해 이순일은 밥상을 차렸다. 새 밥과 새 국. 큰 딸은 그게 족쇄같았다. 사랑인 줄 알지만, 자신을 잡아끄는 족쇄.
이순일이나 한영진이, 하고 싶은 것만 하며 살 수 없다며 한세진에게 하는 말은, 자신에게 수천번도 넘게 한 말일 것이다.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 수 없다. 한영진은 족쇄인 그 밥상을 아직도 두 다리의 관절이 다 닳아버린 이순일에게 의지한다. 이순일은 한만수가 뉴질랜드에서 행복하다면 굳이 돌아오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한다.
이순일의 이야기와, 그녀의 아이들 이야기다.
예전에 아이들을 부를 때 성까지 붙여서 부른 적이 있다. 그러자 한 아이가 울상이 되어서는, 무섭고 화난 것 같으니 성을 빼고 불러달라고 했다. 보통 엄마들이 화가 나면 야! 김땡땡하고 부르기 때문일까. 그런데 이 소설은 관계보단 이름으로 불린다. 그것도 성까지 딱 붙여서 또박 또박 불러댄다. 그러자 관계보단 개인으로 한 사람 한사람 집중이 되는 느낌? 작가의 의도가 아닐까 한다. 누구의 엄마도 누구의 딸도, 몇 번째의 자식도 아닌, 그저 한영진, 한세진, 이순일.....사실 우린 모두 개별적 존재이다.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책들, 어쩌면 장르가 같다고 우연히 같이 서가에 꽂혀 있을지도 모르고, 혹은 제목만 보고 같은 류인줄 알고 잘못 꽂힌 책들일 수도 있다. 한 묶음으로 묶였으나 우린 다른 책들이고, 어쩌면 아예 다른 장르인지도 모른다. 관계들에 얽혀 서로의 역사에 귀 기울이지 않고, 개별성을 침범하며 상처와 애닮음이 공존하는 가족이란 관계, 마지막 하미영의 말처럼 뻔하지 않은 결말이라 더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한세진은 뻔하지 않은 결말을 염두에 두고 있을지도. 기대하는 것들을 배제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