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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내 몸을 지나간 후 ㅣ 정희진의 글쓰기 4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22년 7월
평점 :
그래비티.
어둡고 광활한 그리고 외로운 우주의 어느 한쪽.
부유하는 듯 혼자인 주인공.
이 영화를 보면서 정말 저 주인공이 우주에 있는걸까란 의심을 품었다.
어쩌면 자신의 마음 속 어둠 한가운데 어디에선가 숨어 있는건 아닐까.
정말 우주에 가긴 했을까
딸을 잃고 자신의 슬픔속으로 블랙홀처럼 말려들어가, 내면의 어둠에 갇힌 건 아닐까.
도움의 목소리? 아이와의 별처럼 빛나던 순간들?
그 순간 어둠을 뚫고 주인공은 다시, 세상 속으로 툭 하고 떨어진다.
나약하고 떨리는 몸뚱아리. 정말 주인공은 우주에서 떨어진 것이 맞을까.
어둡고 외로운 공간에서 주인공은 그제서야 자신을 들여다본다.
이제야 자신을 돌아보며 떠나보낸 아이에 대해 제대로 그리고 철저히 애도하고 슬퍼한다. 그런 과정 속에서 주인공은 우울의 블랙홀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세상의 하늘로 날아가 땅으로 떨어진다.
그래비티를 보고 느꼈던 감정을 이 책에서 훨씬 정갈하고 다듬어진 글과 사유로 만나게 되었다.
그래비피의 우주가 내 아이에겐 경이였다면, 내겐 그 깊은 어둠이 주인공이 가진 우울의 끝처럼 느껴졌다. 넘치고 흘러 자신의 주변을 부유하는 우울의 우주, 그리고 그 속에서 침몰하지 않고 다시금 세상으로 나와 만나게 되는 하늘.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지표에 끌려 다니며 먹고사느라 세속을 헤매게 된다. 우울증 환자는 이와 반대로, 몸에 중력이 작용하지 않아 떠 있는 상태다. 무중력 상태의 삶을 오래 견딜 수 있는 인간은 많지 앟다 우울증은 살기 싫은 병이기 때문에 몸과 땅이 붙지 않고 서로 싸운다. 누가 이기겠는가. 세상에서 가장 외로운 병 가장 이해받기 힘든 병, 자살은 이 증상으로 인한 질병사일 뿐이다.” 118쪽
정희진 작가님의 그래비티관련 글을 읽고 한참을 생각에 잠긴 이유다.
인간의 삶은 고행이며 견뎌내는 것이다. 너무나 행복했던 기억들이 있는가, 혹시 그렇게 생각하고 믿고 있는 건 아닐까. <대지>의 왕룽과 오란은 첫 아이를 안고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다가 금세 혹여 액운이 낄까, 급하게 아이 얼굴을 가리며 불행을 연기한다.
가장 행복할 때도 스며드는 불안함, 그게 인간의 삶이 아닐까.
다행인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은 철저하게 불행하지도 철저하게 행복하지도 않다는 것, 누군가 이 두 상태에 있다면 어딘가에 갇혀 있겠지.
현실의 중력이 너무 강하면 세상살이가 고달프다 란 말이 가슴에 와닿는 이유다.
적당히 현실에 살짝 발을 들어올리고 너무 무겁지 않은 걸음으로 내딛는 삶. 그걸로 족한 이유다. 현실을 걸어가며 살아간다는 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가끔은 현실의 힘듦에 땅 속으로 내 발걸음이 빨려들어가 버릴 것 같지만, 곧 다른 발을 내딛으며 잠시 한숨을 돌린다.
(두 발 동동 떠서 산다는 건, 어느 바람에도 휙 날아가버릴 듯 위태로운 삶이 아닐까 했더니, 남편이 한 마디 한다. 아니란다. 백투더픽쳐의 호버보드가 출시된 거란다. 참 고맙다. 우리 집 냥반...)
여기 소개되는 영화들은 4편빼곤 나도 봤던 영화다. 아주 예전에 혹은 몇 년 전.
그 중 나라야마 부시코는 충격이었다. 20대쯤 봤던 영화다.
이를 의도적으로 부러뜨리는 장면도, 마치 짐승처럼 적나라했던 그들의 욕망도, 인간의 존엄보단 생존이 앞서던 그들의 모습이 너무나 원색적이어서 얼굴이 달아올랐다.
인간들은 이러한 존재들인가. 먹을게 있고 등이 따시니 저렇게 점잔을 빼고 앉았지만, 어쩌면 우린 모두 그런 모습일지도 모른다.
요근래 북플에 죽음에 대한 이야기들이 많이 올라온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죽음에 대한 모습.
시베리아의 축치족이란 고아시아족은 사람이 죽을 때는 꼭 타살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늙거나 병들어 죽을 때가 되면 자식이 부모를 모시고 가서 타살하며, 자식이 없을 경우는 주변인들이 대가를 받고 그 임무를 수행한다.
그들은 자연사를 믿지 않는다. 인간도 동물도 살기 위해 언제나 다른 생명체를 도살한다. 그들은 타 생명체를 죽여서 먹고 살기에, 타살은 가장 자연스런 현상이라는 것이다.
후에 공산정권이 들어서면서 이런 풍습은 금지되었지만, 그들에게 타살은 가장 자연스런 죽음의 모습이었다.
어떤 부족은 우두머리가 죽으면 시신을 먹는다. 그를 존경하는 이유, 그를 닮고 싶은 이유에서다. 남자들은 주로 머리, 뇌쪽을 먹고 여자들은 그 아래부분을 나누어 먹는다.
그들에겐 너무나 당연한 장례풍습이다. 그의 용감함과 그의 지혜가 그 부족에겐 꼭 필요한 것, 낭비되어선 안되기 때문이다..(뇌를 먹는 남자들에게서 주로 광인병이 발발한 이유이기도 하다.)
메마른 땅, 그 곳에서의 조장은 당연하다. 썩지 않는 시신을 묻고나면 경작할 땅이 사라진다. 그들은 그 메마르고 거친 땅에서 거름이 되어 자연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대신 그들이 잡아먹었던 이들에게 공양으로 바쳐진다. 나무도 귀한 그 곳, 화장은 많은 이들을 굶주리게 한다. 자연의 이치에 따라 그들이 먹었던 이들에게 다시 돌아가는 삶은 순리다. 그 곳에선.
그리고 나라야마 부시코에서의 죽음도 그들에겐 당연시 되고 자연스러운 모습이었을 것이다.
자연의 일부일뿐인 인간이란 관점에선 이들의 모습은 바람직한 삶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본성이 아니라 사회적 세뇌 때문이다. 에고가 공포를 가져온다. ” 170쪽.
그냥 보기만 했던 영화들에 대한 새로운 시선을 던져주는 책이다.
(최근에 카터란 영화를 봤다. 도대체 몇 명이나 죽어나가는 걸까 앞부분을 세어 보다가 포기했다. 죽어나가는 생명들, 그들에겐 서사도 삶도 없다. 마치 마네킹처럼 쓰러지고, 주인공의 칼질 한 번에 죽어나간다. 영화 속에서만은 아닐 것이다. 이 사회에서 우린 다양한 이유로 죽어나간다. 살아있지만 살아있는 것이 아닌 삶, 삶의 파산, 어쩔 수 없다며 실은 바뀔 의지조차 없는 시스템에 의해 차갑게 버려지는 이들.
그들의 죽음이 카터 속 일번 이번 삼번의 죽음과 무엇이 다른가. 이 사회에서 카터의 배역은 자본이라는 것?
더 이상 낼 집세가 없어서, 병원비가 없어서, 살 이유가 없어서, 더 이상 밥값을 낼 수 없어서...문을 걸어잠그고 선택하는 죽음앞에서 무엇이 더 야만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