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트로폴리탄 미술관의 현대미술 섹션은 단 5퍼센트의 여성 미술가의 작품을 걸어놓고 있는 반면, 이 미술관이 소장한 누드 그림 중 85퍼센트가 여성이다” 에 분노한 여성작가들이 모여 결성한 (게릴라 걸스)는 고릴라 가면을 쓰고 익명으로 활동하며 성차별에 저항하는 작품들을 선보였다.
이유리작가의 <세상을 바꾼 예술 작품들>에서 게릴라 걸스란 단체를 처음 알게 되었다.
옛 여성화가들의 인체 드로잉은 뭔가 어색하다. 이유가 무엇일까 바로 여성들에게는 누드 수업 등에 참여하는 기회를 박탈했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서도 빛나는 여성 화가들을 소개한다.
1980년대 여성들이 주축이 되어 만들어진 ˝게릴라 걸즈˝
그녀들은 여류 예술가에서 여류란 수식어가 사라지길 바란다. 여성 남성이 아닌 그저 예술가로서 서로 마주보고 평가되길 바라는 게릴라 걸즈들의 활동을 응원해 본다.
시사만평의 시작인 호가스와 오노레 도미에, 게오르그 그로츠
그리고 고야와 마네, 피카소로 이어지는 반전의 메세지가 담긴 그림들.
혁명 속에서 역사의 한 순간으로 살아 간 화가들. 들루크루아와 다비드, 그리고 디에고 리베라, 그 현장을 가득 채웠던 인터내셔널 가와 민요와 라 쿠카라차.
그림과 음악으로 시대를 같이 하며 혁명처럼 살다간 이들이, 그림 속에 음악 속에 담겨 있다.
자본주의에 맞섰던 찰리 채플린과 흑인차별을 노래한 빌리 홀리데이,아메리칸 드림의 악몽과 흑인들의 역사를 그려간 제이콥 로렌스.
에반게리온에서 예술테러리스트라 불리는 뱅크시까지 다양한 장르의 다양한 예술을 이야기하는 이 책. 사람을 사람처럼 살게 하고자 치열하게 노력했던 작품들에 대한 해설이나 작가의 느낌 등이 좋았다.
성차별, 인종차별, 전쟁반대, 혁명과 신분철폐, 자본주의와 제국주의 , 예술에 대한 과한 아우라에 대한 반기, 오타쿠, 자유 등 다양한 세상을 표현한 예술들을 소개한다.
그 다음에 읽은 책은
<화가의 출세작>
출세를 하는데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노력, 실력, 천재성? 환경? 물론 출세를 하기 전까지 꾸준히 노력하는 것도 중요하고 천재성도 중요하겠지만, 또 하나 중요한 요소로 시대를 타고나는 것과 운도 한몫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너무 시대를 앞서가, 철저히 외면당한 고흐는 그래도 성실하고 그를 믿어준 제수씨(테오의 아내)요안나 빙허와 조카 반 고흐 주니어 덕에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물론 그림의 힘을 믿는다. 요안나 빙허나 조카가 없었다하더라도 사람들은 반 고흐를 알아봐주고 사랑해 주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테오와의 그 방대한 편지들과 고흐의 작품들을 생활고에도 팔지 않고 소중히 여긴 그 마음들이 없었다면 조금 더 늦게 알려지거나 지금처럼 전설이 되었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갈 곳이 없이 친구대신 크리스마스에 인쇄소 일을 하다가 기회를 잡은 알폰소 무하, 그리고 1920년대와 30년대 여성의 힘과 근대에 대한 새로운 흐름 속 아이콘이 된 렘피카가 있다. 그 당시 가르송(소년)에서 딴 가르므손이란 짧은 머리의 소년같은 소녀상이 널리 퍼졌다. 여전히 치렁치렁한 머리에 패티코트차림의 순종적 여성상을 반기던 주류사회는 그녀를 미워했겠지만. 세상은 변하는 법, 많은 이들이 램피카의 가르므손 스타일의 그림들과 당당하고 힘 있는 여성의 모습에서 새로운 세상과 흐름을 봤고 지지했다.
고된 작업, 점묘파의 화가 쇠라 또한 그 당시 인상파와 달리 구도와 색의 잔상, 철저한 계산등으로 신인상파를 만들었다. 피카소의 그림을 보고 감명을 받고, 신체의 해체와 인체왜곡 등으로 새로운 스타가 된 베이컨, 그는 십자가 책형에서 원래 그런 그림들이 가지던 기존의 종교적 의미를 버리고 인간의 고통과 극한의 공포와 죽음을 그렸다. 끔찍했던 1차와 2차대전, 그리고 동성애자를 향한 폭력 속에서 베이컨은 우리는 고깃덩어리이며 잠재적 시체일뿐이라는 생각을 그림 속에 담았다.
어린 시절 학대에 다한 트라우마가 담긴 헨리다거의 비비안 자매들 시리즈,
우키요에를 포스터에 담은 로트레크, 동양적 철학을 담아낸 <TV부처>의 백남준, 뛰어난 패션감각과 친화력으로 앙투아네트의 화가가 된 루이즈 비제 르 브륑, 코발트 블루의 통영항을 그림 전혁림, 자연이 신의 계시라며 풍경화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한 카스파르 프리드리히, 자신의 감정과 내면을 그려낸 뭉크, 경계선 상의 화가 이쾌대 등 다양한 화가들의 출세작들을 소개한다. 소개뿐만 아니라, 어째서 그 작품으로 세상의 이목을 받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도, 시대상황과 주변인에 대한 글들도 담겨 있다.
갑자기 두각을 나타내는 이들을 우리는 혜성처럼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지만 실제 혜성처럼 나타나긴 어려운 법.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혜성을 만나기 전 긴 어둠속에서 스스로를 믿으며 수많은 그림들을 그리고 또 그렸다. 잊히고 혹평에 상처받아도 꺾을 수 없는 그들의 그림에 대한 열정은 어느 순간 시대를 잘 타고 났다 보단, 그저 꾸준히 미친 듯 열중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신을 알아보는 시대가 도래 한 것이 아닐까.
베이컨의 그림을 한참 들여다보았다. 무섭고 두려운 그림, 혹은 정육점 그림 같기도 하다. 어린 시절의 학대와 성정체성으로 인한 폭력과 냉대, 외로움과 두려움이 담겨 있는 그의 그림들은 시대를 초월하는 공감이 담겨 있다.
그렇다 화가들의 출세작은 그 시대를 담은 커다란 그릇이다. 그래서 그 시대 사람들은, 그 그림 앞에서 충격과 감동을 혹은 새로운 에너지를 퍼 담아 갔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런 그림들은 시대를 초월해,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각기 다른 감정들을 퍼 올려 우리에게 담아준다. 그래서일까. 어떨 땐 발끝을 적시는 불편함으로 혹은 몸을 녹이는 따스한 한 잔으로, 어떨 땐 정신 바짝 차리게 만드는 냉기로 그렇게 다가온다. (두 권의 책은 예전에 작성했던 글에서 가져왔다.)
세 번째로 읽은 책은 <캔버스를 찢고 나온 여자들>이다.
잊힌 여성 화가들의 삶과 누구의 아내나 누구의 처제로만 남은 이름을 되찾아주는 것, 무심코 본 그림들에 담긴 편협함과 폭력으로 상처받을 수 있는 이들을 재조명하는 글이다.
그리고 네 번째로 만난 책은 <기울어진 미술관>
표지그림은 <데니쉬걸>영화의 주인공이기도 했던 게르다 베게너가 자신의 남편을 그린 작품이다. 그는 아내의 모델이 되어 주기 위해 여성옷차림을 했다가 성적 정체성을 깨닫고 에이나르에서 릴리로 이름을 바꾸고, 세계최초로 성전환 수술을 했으나,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수술 후 "나는 완전히 나 자신이다"라고 말했다.
정상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남들의 시선이나 고정관념이 아니라,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가는 것이 아닐까.
애티엔 오브리의 <유모에게 고하는 작별>
어릴 적 읽었던 책들에는 착한 유모들이 나온다. 물론 예외도 있겠지만. 그들은 아이를 사랑하고 예뻐하며 아낀다. 어느 정도 자라서 부모의 품으로 돌아가거나, 유모가 더 이상 필요없어질때면 언제나 눈물바람이다.
가장 어렸던 시절, 자신에게 생명줄인 젖을 주고 안고 어르고 업고 안아주는 유모는 선량했고, 아이들은 그런 유모를 사랑했다.
조선시대에도 양반가나 왕실에는 유모가 필요했다. 그들은 훗날 왕이 되는 혹은 권력가가 되는 아이들을 양육함으로서, 남편이나 아이의 출세를 보장받기도 했다.
실제로 유모에 대한 애틋함은 기록으로도 남아 있다.
좀 더 커서야 의문이 생겼다.
그냥 소젖을 짜면 우유가 나오는 줄 알았던 어린 시절, 송아지를 떼어내고 어미소의 젖을 짜내는 다큐를 보면서 알고 싶지 않은 진실을 보게 된 것처럼, 사람 또한 그러하다는 것을.
너무 가난해서 아이들과 무능한 남편을 부양하고자, 젖먹이를 떼어놓고 유모를 가는 것이다. 유모의 아이는 기껏해야 쌀가루를 끓인 미음으로 겨우겨우 삶을 연명하고, 양반가 혹은 권세가의 아이는 남의 젖을 먹고 포동포동 살이 찐다. 몰래 누이가 아이를 업고 찾아오지만, 양반가나 권력자 집안엔선 귀한 아이의 젖을 천한 아이와 나누려 하지 않는다. 유모는 말그대로 젖소일뿐이다. 좋은 젖을 나오길 바라며, 맛있고 귀한 것을 먹이는 고급형 유기농 젖소.
다른 이유로 좀 더 빨리 많이 자식을 낳기 위해 유모를 두기도 한다. 모유수유시에는 여성의 출산능력이 저하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죽으려고 태어나는 건 아니지만, 결국 죽어간다. 엄마의 젖을 돈에 빼앗기고 굶주림과 영양부족으로 조그만 질병에도 숨이 넘어간다.
포동포동한 아이들, 유모의 손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는 아이들.
그 뒤엔 굶주림과 비극 하나가 숨어 있다.
작가는 강탈탕한 신체라고 말한다. 가난으로 강탈당한 신체.
흑인의 건강한 몸을 탐내는 조던 필 감독의 <겟아웃>이 떠오른다.
약자를 착취하고, 그들의 몸을 강탈하는 오래된 역사가 지금도 대리모 등으로 꾸준히 이어진다.
최근에 본 <놉>이란 영화에선 에드워드 마이브리지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달리는 말 사진을 처음으로 찍은 남자, 그러나 아무도 말을 탄 기수에는 신경 쓰지 않는다. 흑인 남자, 저 남자는 누구일까? <놉>에선 여주인공이 자신의 증조할아버지란 이야기를 한다.
그러면서 이 책에서 소개된 로르란 인물이 겹쳤다.
<올랭피아>의 흑인 하녀 로르, 그녀는 마네가 그저 흑백의 색 대조를 통해 극적인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서, 백인을 돋보이기 위한 검은 터치로 그려졌을 뿐이다. 그녀는 배경이었고, 색감이었고, 올랭피아의 서사를 위한 사물일뿐이었다. 그런 흑인 하녀에겐 이름이 있다. 로르, 그리고 간호사란 직업.
바스키아는 미술관엔 흑인이 없다 라 말하며 <올랭피아의 하녀>란 제목으로 로르가 주인공인 작품을 그렸다.
눈에 띄는 장애를 가진 자는 공공장소 이용을 금지하는 “어글리법”
여성의 그림자 노동과 아동노동, 인디언 잔혹사, 외젠 오스만의 재개발사업으로 밀려난 빈민들과 더 이상 바리케이트를 치며 항쟁할 수 없게 된 시민들 등 그림에 담긴 시대상과 숨겨진 그릇된 편견과 폭력에 대해 이야기한다.
물론 그 시대를 현재의 눈으로 보는 것은 무리가 있다는 생각도 든다. 그러나 지금은 그 시대와 얼마나 달라졌을까. 티나게 바뀐척들을 해대지만 우리는 안다. 흑인이 영화 주인공이 되고 유색인종이나 여성에 대한 스트레오타입이 바뀌었다고 해도 그게 전부는 아니라는 것.
가난한 여성들을 겨냥한 대리모 사업, 여전히 남아있는 백인중심의 미의 기준, 겉으로는 웃고 있지만 인터넷상에서 익명성뒤에 숨어 가감없이 쏟아내는 혐오와 차별의 글들.
어릴적엔 일기를 쓰는 것이 참 쉬웠다.
오늘의 잘못을 하나 쓰고, 반성을 하면 된다.
주로
오늘 나는 파를 골라내고 먹었다. 다음에는 꼭 파를 먹어보도록 노력하겠다 라던가,
친구랑 싸웠는데 내가 먼저 화해를 해야겠다. 생각해보면 별 것아니다. 등이다.
그 때는 무엇이 잘못인지 찾기도 쉬웠고, 미안하다는 말도 어렵지 않았고, 앞으로의 각오도 나름 진실성있었다.
독후감도 마찬가지다. 나쁜 놈 착한 놈, 본받을 놈, 미운 놈...너무나 선명해서 악당에게 끌리는 내가 잘못된 건가 고민도 했다. 그렇지만 나쁜 놈은 나쁜 거고 착한 놈은 착한거다. 벌 받을 거 받고, 상 받을 거 받으면 되고, 나는 착한 놈을 본받아 앞으로 좋은 어른이 되겠다고 마무리 한 뒤, 어느 정도 뿌듯해하며 마침표를 찍었다.
그러면 선생님도 빨간 펜으로 기껏해야 원고지 사용법을 고쳐주며 잘했어요 도장을 꾹 눌러주곤 했다.
나이가 들면서 교과서 밖의 것들을 알아가고, 그런 것들을 알아가는 과정이 버겁기도 하다.
어린 시절처럼 이렇게 바뀌겠다는 말도 자신없고, 누가 나쁜지 알지만 내가 비난할 자격이 있나 괜시리 움츠러든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 더 생각이 많아진다. 그래서 더 열심히 읽으려 노력한다. 생각이 많아지고 자꾸만 고민하다 보면, 어린 시절 그때처럼 명쾌하게 각오를 한 줄 정도는 쓸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