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의 의자 - 중세부터 매뉴팩처까지 장인의 시대 사물들의 미술사 2
이지은 지음 / 모요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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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가 싫었던 이유는 많았지만, 그 중에 하나는 책걸상의 불편함이었다. 물론 화장실도 무서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키가 다 커버려서, 유난히 책걸상이 불편했다. 의자도 작고 책상도 작고, 나처럼 키가 일찌감치 커버린 아이들은 유독 구부정한 어깨와 허리선을 가지게 되었다. 훗날 동창회에서 한 아이가 나를 내려 보며 난 너 농구선수 될 줄 알았는데.” 그렇다. 그 때 이후로 키가 자라지 않았다.

 

나를 거쳐 간 의자라. (권력 존엄과는 아무 상관없는 )

, 초등학교의 그 불편한 의자, 그리고 조금 더 커선 엄마가 사주신 책상과 세트인 의자, 조금 더 커선 회사에서 쓰던 아저씨 같던 의자 정도? 망사처리가 되어 있고 회전이 가능한 팔걸이가 달린 사무용의자는 20대의 내겐 왠지 아저씨 의자처럼 느껴졌다. 솔직히 의자를 예쁘다고 생각했던 적은 없었다.

그러다 유럽이나 영국의 시대물들을 보면서 의자의 아름다움이 눈에 들어왔다. 공단에 금실로 수까지 놓은 저런 의자에 앉는다고? 우와 물론 우리에게도 방석이 있다. 온갖 화조류들이 수 놓인 화려한 방석들, 그렇지만 저 레이스며 하늘하늘한 금빛 술들이며 이미 나는 상상 속에서 버팀살 드높은 공주였다. 하하하. 그래서 살포시 얼마쯤 할까 검색해보다가 조용히 마우스를 내려놨다. 내가 눈여겨 본 것은 로코코 양식의 뒤셰스 브리제 가격은 그만 알아보자.

그러다가 이 책이 눈에 띄었다.

원래 좋아하는 작가님, 오브제 문화사 관련 책들로 유명하신데, 이번에 사물들의 미술사를 내셨다.

<기억의 의자>

먼저, 스탈의 반전

제일 먼저 소개하는 것은 스탈이다 스탈은 교회에서 주로 쓰는 의자로 주교와 교회 참사위원들인 높으신 양반들이 앉는 의자였다. 그런데 그 안장을 접으면 미제리코드(타인의 불행과 아픔을 귱휼히 여기는 마음)’라 불리는 장식이 드러난다. 엄숙함과 경건함이 조각된 스탈과 달리 젖혀진 의자 뒷면엔 풍자들이 가득하다. 수도사를 도둑으로 표현하기도 하며, 인간들을 동물에 빗대어 돈에 매수된 성직자를 여우로 나타낸다.

이 스탈의 엄숙함이 옥좌로 변형되었다는데, 뭔가 반전매력이 가득한 의자다.

    

두 번째는 루이14세의 옥좌, 실제로 옥좌로 지정된 것은 없고 주로 나무에 은을 입혀 만들었다고 한다. 루이14세는 유독 은을 좋아했는데, 실제로 아우크스부르크 동맹과 싸울 때, 모두 녹여 주화로 만들어 전쟁자금으로 썼다고 한다. 물론 전쟁엔 패배했다.

    

 

 

세 번째는 타부레

프랑스 등 유럽의 왕실은 앉는 것도 서열이 정해져 있어서, 순서와 의자까지 엄격했다고 한다. 계급에 따라 서 있거나 타부레에 앉거나 방석에 앉을 수 있었다. 루이 14세의 자신의 권력을 이용해 주로 여인들에게 타부레를 하사했다고 한다. 루이 14세가 직위를 남발하는데다가 자신들보다 낮은 직위의 서자나 시골출신 영주들이 신분상승을 통해 타부레에 앉는 것에 분노해, 기존의 귀족들이 반타브레 동맹을 맺기도 했다고 한다. 등받이 없는 너도밤나무로 만든 평범한 의자일뿐인 타부레가 집착과 선망의 대상이 된 것이다.

(스툴과 닮은 타부레, 스툴은 과거 유목민들이 접이식으로 사용을 했다. 그런 스툴이 중국으로 넘어가 당나라시기엔 등받이가 부착되면서 관리들에게 인기있는 위엄있는 의자가 되었다. )

 

네 번째는 폴란드 왕 스타니스와프의 바르샤바궁을 꾸미기 위한 가구제작 모습을 보여준다. 데시나퇴르(디자인화 스타일화를 그리는 사람)의 그림들에서 마음에 드는 디자인을 찾으면, 장인에게 맡기게 되고, 그러면 장인이 모형을 만들어 보여준 뒤, 다른 장인들과 협업해서 의자를 완성한다고 한다. 의자틀 만드는 사람, 장식하는 사람, 쿠션 등 천 관련 장인등 철저한 분업으로 이루어졌다고 한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토마스 치펀데일의 의자들.

아마 영국의 시대물들을 봤다면 익숙할 의자들과 소품들이다. 아름답고 귀족스러운 그 가구들은 가격도 만만치 않다고 한다. 치펀데일은 처음으로 의자 관련 디자인북을 만들어 주문을 받았다. 또 가구들을 등급에 따라 차등판매를 했고, 의자를 스타일별로 나눠 판매하기도 했다. 프랑스 로코코식에 영국과 어울리는 차별화를 통해 만들어 낸 게인즈버러 의자, 중국과 영국식을 섞은 래티스 의자 등 그의 가구들은 특히 젠트리 계급에 큰 인기를 얻었다.

 

 

누군가를 편하게 쉬어 가게 하는 의자, 그런 의자들이 과거에는 사용자들을 특별히 돋보이게 하기 위해, 혹은 권위의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신분에 따라 의자는 꿈도 못 꾸는 이들도 많았다. 프랑스 궁정에선 왕과 왕비만이 안락의자에 앉을 수 있었지만, 권위의 상징인 그 의자는 등받이는 직각에 가까웠고, 굉장히 불편하고 무거워 보였다. 그러다 조금씩 실용적이고 실제 앉는 목적에 부합되는 의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지금 내가 앉아 있는 의자는 예쁘다기보단 실용성에 중점을 둔 모습이다. 그렇지만 책상 앞 의자에 앉는 순간 내 개인의 공간이 생각나는 기분. 편지를 쓰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공간의 탄생? 그래서 젠트리들은 호화로운 유럽의 가구들이나 의자보다, 치펀데일이 영국화시킨 조금 더 개인적이고 편안한 가구들을 선호했는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조각과 의자의 다리에 새겨진 곡선들과 등받이의 우아함은, 의자 또한 예술품임을 알게 해 준다. 작가를 알 수 없어 아쉽지만. (아 간혹 공방이나 장인의 사인, 혹은 특유의 마감처리 등으로 작가를 알 수 있는 가구들도 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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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18 19:39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첫번째 사진은 의자라는 설명을 읽고 보는데도, 독서실 책상 같았어요.
저기 칸막이가 4인용인가 5인용일까 하면서요.
예전엔 의자라는 것에 여러가지 의미가 있었던 시대도 있었지만, 요즘엔 예쁘고 편한 인테리어에 잘 어울리는 실용적인 의자를 찾는 것이 생활의 즐거움 같아요.
잘읽었습니다. mini74님, 좋은 저녁시간 되세요.^^

mini74 2021-05-18 19:41   좋아요 5 | URL
그러고보니 스탈이 독서실 책상 닮았네요 ㅎㅎ 서니데이님도 즐거운 저녁시간 보내세요 ~

미미 2021-05-18 19:5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벌써 다 읽으셨군요!!저도 🏀 할 뻔했는데 키가 그정돈 아니라고ㅋㅋ 서재에 아주 예쁜 윙체어 하나 놓고 싶어요~♡
정말 그림에서처럼 어떤 의자는 예술품에 가까운것 같아요!

붕붕툐툐 2021-05-18 19:53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내려보며..ㅋㅋㅋㅋㅋㅋ
가격은 그만 알아보자.ㅋㅋㅋㅋㅋ
진짜 미니님 유머 제 스타일!
다양한 의자 사진과 함께 보여주시니 좋았어요. 빼박 한국인이 저는 방석이 젤루 좋네욤~ㅋㅋㅋㅋㅋ

scott 2021-05-18 20:41   좋아요 3 | URL
오! 툐툐님 명상의 달인 ^ㅅ^

그레이스 2021-05-18 1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오늘 소파의세계 보고 이 책 같은 종류인줄 알았다가 전혀 다른 주제여서 웃었어요.
이 리뷰로 대신!

새파랑 2021-05-18 19:5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망사처리 회전 팔걸이 의자 쓰는데 ㅋ 의자를 망라한 책이라니 특이하네요 ^^

scott 2021-05-18 20:4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의자라면 뭐니 뭐니해도 허리-등-어깨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안마의지가 최고입니돵!ㅎㅎ

mini74 2021-05-18 21:31   좋아요 2 | URL
안마의자라면 코지마! ㅎㅎ *^^*

cyrus 2021-05-19 21: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학교 화장실이 불편했어요. 초중고 등학교 모두 쭈구려 앉어서 쓰는 변기가 있는 화장실이었거든요. MZ세대가 다니는 학교 화장실의 변기는 비데가 있는 좌변식이겠죠? ^^

mini74 2021-05-20 11:23   좋아요 0 | URL
저는 ㅠㅠ 초딩때 푸세식. 학교 마치면 미친듯이 집으로 뛴 적이 많았지요 ㅎㅎ
 

내가 사랑한 화가들예술의 주름들 기억의 의자내 사랑 모드무라카미T를 소개하는 영상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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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18 10:2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영혼을 알아야 눈동자를 그릴 수 있다는 말‘에서 소름 돋았어요~^0^♡ <기억의 의자>도 재밌을것 같아요. 성당가면 교황의자? 화려해서 신기했는데ㅋㅋ

mini74 2021-05-18 10:27   좋아요 3 | URL
지금 반쯤 읽고 있는데 재미있어요 미미님. 봐주셔서 고맙습니다 *^^*

새파랑 2021-05-18 11:0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북플에서는 영상이 안뜨나보네요. 찾아 들어가서 봐야겠습니다~!!

scott 2021-05-18 15: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북플 영상이 안보여서 노트북을 펼치니 미니님 영상이 뙁!!
소개 해주신 책들 3권은 이미 구매 완료

나머지 책들 오늘 주문 들어 갑니돵 ~~(๑>؂•̀๑)✌* ৳৸ᵃᵑᵏs T৹ᵎ *
 
문구는 옳다 - 프로문구러의 아날로그 수집 라이프
정윤희 지음 / 오후의서재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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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읽고 갖고 싶은 것

프레드앤프렌즈 플렉스 마크
로트링 아트펜
밀란지우개
미도리미니클리너
벚꽃에디션 만년필과 붓펜 캘리그래피
<까렌다쉬( 스위스. 러시아어로 연필이란 뜻) 에스프레소 볼펜
오본 레인보우 뉴스페이퍼 펜슬
플래티넘 마끼에 붓펜
피셔 스페이스 펜
북퍼퓸 페이퍼 패션
트라디오 수성펜
라미 사파리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
블랙윙
피스카스 가위


아래 사진은 너무나 좋아하는 블랙윙연필( 아이들에게 어린이날 한자루씩 선물하면 무진장 좋아한다. 그 중 한 어린이는 한 자루 더 달랜다. 이유는 아빠가 뺏아갔단다. 아버님 !! 그러시면 안됩니다 ㅎㅎ)
그리고 두번째 사진은 갖고 싶은 실리콘 북마크인 플랙스 마크., 혹시 파는 곳이 있나 검색중 ㅠㅠ 갖고싶다 ㅎㅎㅎ

춘도쿠rsundoku‘라 한다. 열심히 책을 사지만 읽지 않고 침대옆이나 책상, 탁자 위에 쌓아두는 일련의 행위 말이다. 책 쇼핑에열광하다 보니 불행하게도 읽는 속도가 사들이는 속도를 이기지못한다. 가끔은 아주 자랑스럽게 같은 책을 사들고 오는 만행을저지르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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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1-05-17 22:2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새로나온 문구는 한번쯤 사보고 싶어요.
필기감이 좋은 펜이나, 예쁜 색감의 문구도 좋고요,
악필을 조금이라도 미화해줄 수 있을 신상펜을 사지 않고 지나가긴 어려워요.
mini74님, 사진 잘 봤습니다.
좋은밤되세요.^^

mini74 2021-05-17 22:43   좋아요 5 | URL
신상펜은 참을 수 없지요 ㅎㅎ 서니데이님도 편한 밤 보내세요 ~~

미미 2021-05-17 22:2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도 모르게(그렇게 믿고 싶네요)
폭풍?검색해서 벚꽃에디션 만년필을 봐버렸네요..후..🥲🌸🌸🌸

mini74 2021-05-17 22:44   좋아요 4 | URL
저는 ㅠㅠ 사실 저 소소하게 몇 개는 질렀어요 ㅎㅎ 배송중이라 행복합니다 *^^*

붕붕툐툐 2021-05-17 23:04   좋아요 3 | URL
미미님, 보기만 하신 거죠? 그냥 보기만?ㅎㅎㅎ

미미 2021-05-17 23:12   좋아요 2 | URL
책 외에는 힘들어도 잘 참는 편이예요~^^*(엣헴)책 출혈이 커섬😭

잠자냥 2021-05-17 22: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ㅎㅎ 전 연필 모으는 취미가 있어서 까렌다쉬랑 블랙윙은 있습니다요~!

mini74 2021-05-17 22:45   좋아요 4 | URL
부럽습니다 ㅎㅎ

붕붕툐툐 2021-05-17 23: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문구는 옳지요, 암요, 암요~~
전 구경만 좋아한다고 하는데도 펜이 쌓여 있네요?ㅎㅎ
이 책도 완전 흥미로울 거 같아요!

mini74 2021-05-17 23:08   좋아요 3 | URL
안돼요 지름신을 부릅니다 *^^*

새파랑 2021-05-17 23:1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문구 좋아하시는분 정말 부러워요 ㅜㅜ 전 악필이다 보니 관심이 안생기더라는...글씨 잘쓰는 사람 정말 존경합니다~!!

mini74 2021-05-17 23:22   좋아요 3 | URL
원래 악필들이 필기구를 더 따지고 모으지 않나요. 우리 장비빨이라도 갖춰야지요 *^^* 그러니 새파랑님 하나 고르시지요 ㅎㅎ 악마의 속삭임입니다 *^^*

scott 2021-05-18 05:1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미니님 제가 갖고 있는 문구류
프레드앤프렌즈 플렉스 마크
로트링 아트펜
밀란지우개

<까렌다쉬( 스위스. 러시아어로 연필이란 뜻) 에스프레소 볼펜
오본 레인보우 뉴스페이퍼 펜슬
플래티넘 마끼에 붓펜

트라디오 수성펜
라미 사파리 만년필
몽블랑 마이스터스튁 만년필
블랙윙
피스카스 가위

올려주신 리스트 중에 요렇게 갖고 있는데
블랙윙은 장식품으로 ㅎㅎㅎ
이 연필 심이 금새 사라져서
몇일 지나면 몽땅으로 ㅎㅎㅎ
가격대비 추천 안하지만 디자인은 예쁩니다.

(-‿◦☀)

mini74 2021-05-18 10:28   좋아요 2 | URL
다 갖고 계신분 !!! 부럽습니다 ㅎㅎ

han22598 2021-05-18 0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저도 진짜 문구 매니아인데, 저는 이름 같은건 모르고..그냥 아무거나 막 사들여요 ㅋㅋ
저만 쓸데없는 짓 하고 사는 사람인줄 알았는데...아하 너무 다행이에요 . 이 마을에는 흔한 일이네요 ㅎㅎ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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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고 날렵한 소녀가 줄넘기를 한다. 경쾌하고 기분 좋다. 줄넘기를 하면서 소녀는 유쾌함과 웃음을 준다. 폴짝폴짝 뛰면서 뒤돌기 묘기를 하다가 넘어져서 웃음을 주기도 하고, 더 어려운 기술을 멋지게 해내서 감탄을 자아내게 한다. 평범하고 가볍고 경쾌하지만 소녀의 모습은 그것이 다는 아니다. 자신이 배추였으며 언젠가 추워지면 김치가 될 지도 모른다는 걱정에서, 삶의 무게에 멋지게 욕을 내뱉는 미션에 성공하기도 한다. 첫잔을 따를 때의 그 쫄쫄쫄과 똘똘똘 사이의 소리를 좋아하며, 선을 넘지 않고 기다릴 줄 알며 자유로운 술자리를 애정한다. 가볍고 경쾌하지만 그것이 다는 아니다. 옆집의 소녀는 줄넘기만 하는 건 아니니까. 성장하고 커가고 힘들어하고 좌절하면서 자신에게 맞는 가치관과 삶에 대한 안목을 키우며 자란다. 내게 김혼비작가님의 에세이는 그런 느낌이다. 경쾌한 문체에서 가끔 눈물을 훔치고 공감하고 같이 소리내서 웃는다.

그러고보면 우리나라 사람들의 술의 시작은 비슷한 거같다. 대입을 앞둔 시기라는 것. 꽤 많은 친구들이 본격적으로 술을 마신 시작이 백일주라는 걸 보면 말이다. 아, 요즘은 좀 더 빨라졌을까. 중학교 수학여행이라는 친구들도 있으니 말이다.

나 또한 엄밀히 따지면 술심부름 (우리때는 동네 수퍼에 가면 아무개집 딸하면서 당연히 술과 담배를 팔았다. )하면서 홀짝 한 모금 마신 적도 있다.

그땐 씁기만 한 이걸 돈까지 주고 왜 마시나 했는데,

술과 욕은 인생이 고달플때 그 맛을 발휘한다는 걸 알게 되었다. 인생이 더 쓰디 쓰다는 걸 알게 되면, 술은 인생의 초콜릿처럼 달콤함이 된다. 찰진 욕 한마디 내뱉고 마시는 술은 달다.


여기서 고백하는 내 술의 시작은 ,

아마 대입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친구들의 꼬드김이라고 쓰지만, 사실 그 꼬드김을 반기며 은근히 기다린 내면의 호기심도 한몫했다.

제삿날이면 남자어른들이 돌려 마시던 청주냄새, 가볍고 날아갈 듯 날개가 긴 소리없이 나는 새가 생각나는 냄새였다. 막걸리는 묵직하고 찐했다. 심부름으로 가게에서 막걸리를 사고 달려서 집에 오면, 손에서 시큼한 냄새와 톡 쏘는 탄산이 느껴졌다. 몰래 핥아 보면 혀끝이 텁텁해 졌다. 소주는 무색과 달리 냄새마저 취기를 느끼게 했다. 취기가 무엇인지 알 순 없지만 막연하게 머리가 아파오는 냄새였고 그것이 어른들이 말하는 숙취라 생각했다.

대학교 다니는 큰언니가 온갖 폼을 잡으며 가져온 와인, 아마 만원 미만의 달콤한 와인이었던 걸로 기억난다. 마개를 따는 순간부터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큰 선심 쓴다는 듯 큰언니가 밥그릇덮개에 따라준 붉은 빛의 와인은 색깔과 냄새와 달리 쓰기만 했다.


백일주, 팔십일주, 삼십일주, 십팔일주 이름도 많았다. 사실 고3들에겐 어느 날인들 특별하지 않은 날이 없었다. 어떤 땐 나는 그냥 재수를 해야겠다, 어떤 날엔 같이 강에 가자, 어떤 날엔 미팅을 할 때 어떤 옷을 입어야 하나 설레발을 치기도 하던 날들.

슈퍼를 하는 친구가 빼내온 맥주 네 병과 우리들이 주섬주섬 사온 젤리와 새우깡이 다얐다
여기 저기를 어슬렁 거리다가 동네 놀이터의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역시 안주는 해산물이라며 너스레도 떨었다
술을 마셔본 척 했지만, 맥주캔을 따는 손은 부들부들 떨렸다. 보리냄새와 알코올 냄새, 그리고 우엑, 정말 묘한 맛이었다. 그렇지만 허세를 버릴 순 없었다.

“아, 역쉬 맥주는 oo이지.” 이러면서 아는 척을 했다.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타임머신을 경험했다.

눈을 떠 보니, 우리 집 내 방의 익숙한 꽃무늬 이불 밑이었다.
죽었구나 하는 마음으로 방을 나섰지만, 익숙한 일요일 아침의 풍경이었다. 엄마는 부엌에서 언니들은 거실에 널부러져 아침 프로를 보고 있었다.

아, 다행이다란 생각을 하며 이를 닦고 세수를 했다.
아침은 뜨끈한 콩나물국이었다.

속으로 콩나물국으로 해장하면 되겠다며 천금같은 손을 들어올려 수저를 들었다. 콩나물국을 한 국자 뜨는 순간 참았다는 듯이 웃음이 터져나왔다. 언니들과 오빠는 배를 잡고 웃었고, 엄마도 아빠도 웃고 계셨다.
나는 영문도 모른체 그들을 쳐다봤다.

그 전날 밤, 나는 신발 한 짝을 가슴에 품고 들어왔단다. 언니가 뭐냐니까 울면서

“길에서 불쌍한 강아지를 주웠어, 추워서 벌벌 떨고 있었어.” 목 놓아 울면서 신발 한 짝을 곱게 소파위에 올려놓더란다.

“이름은 해피로 할래, 불쌍하니까 앞으로 행복하게 살라고, 아이고 해피야.. 언니도 슬퍼. 언니는 고3이야. 너는 해피?”

식구들은 다들 황당해 하며 나를 봤고, 벌겋게 달아오른 볼과, 입에서 풍기는 새우깡을 품은 맥주 냄새에 사태를 파악했다.

그 후 한동안 나는 해피엄마로 불렸다. 월요일에 친구들을 만나 생사를 확인할 수 있었다. 다들 별일없이 멀쩡한 얼굴로 집에 돌아갔다고 했다.

“그런데 이상하지? 내 신발 한 짝이 아무리 찾아도 없어.”

나는 차마 그 친구에게, 네 신발 한 짝이 내게로 와서 해피가 되었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무튼, 술! 그래서 오늘은 알라딘에서 받은 맥주잔과 해산물안주( 고래밥) 으로 주말을 즐길까 한다. 느긋하고 편안하게 해피를 추억하며 *^^*

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댓글(14) 먼댓글(0) 좋아요(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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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5-15 20:0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할 말은 많고 많은데 지금은 오랜만에 책읽는 저녁입니다. ㅋㅋㅋ 넘 웃겼어요!!

미미 2021-05-15 20:2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너무 재밌게 읽었어용ㅋㅋㅋㅋ
아 저도 양주마시고 다른 세계로 잠시 간 일이 있는데 언젠가 써봐야겠네요ㅋㅋ아무튼 시리즈 저도 3~4가지 정도 읽어봤는데 문고본 사이즈라 아담한데 알찬내용들! ˝ 술과 욕은 인생이 고달플때 그 맛을 발휘한다!˝ 오늘의 명언입니당~♡
명언도 왠지 막걸리,와인향 처럼 달디 단데요?ㅋㅋㅋ

mini74 2021-05-15 20:23   좋아요 5 | URL
양주마시고 다른 세계로 간 일 기대됩니다*^^* 재밌게 읽으셨다니 제가 더 고맙습니다. 즐거운 토욜 보내세요 ~

scott 2021-05-15 20:3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 술과 욕은 인생이 고달플때 그 맛을 발휘한다] 인생의 명언 밑줄 쫘악~५✍⋆*

알콜 들어간 쵸코 먹어도 취하는 1人!

목 놓아 울면서 신발 한 짝을 곱게 소파위에~~~ ㅎㅎㅎ
귀여움 뽀짝 미니님⸜❤︎⸝‍

울 강쥐 이름도 ♥(ˆ⌣ˆԅ)해피

mini74 2021-05-15 20:33   좋아요 5 | URL
스콧님 강생이 이름이 해피? ㅎㅎ 경상도에선 강아지를 강생이라고도 하는데요. 저는 강생이가 더 귀여운 거 같아요 ㅎㅎ 스콧님 강생이 너무 귀여울듯 *^^

잠자냥 2021-05-15 20:50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닉네임 바꾸세요 해피엄마!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1-05-15 21:12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이 책 재미있더라구요 ㅋ 역시 미니님도 예전부터 범상치 않으셨군요~ 역시 독서인은 술을 많이 좋아하는것 같아요. 혹은 아예 못먹거나? ^^;

dollC 2021-05-15 21:5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늘 처음으로 소리내서 웃었어요ㅋㅋ 해피는 그 후로 어찌 되었나요? 소식 좀 알려주세요~ 해피어머님ㅋㅋㅋㅋ

mini74 2021-05-15 22:02   좋아요 5 | URL
한동안 언니들이 현관앞에 박스를 놓고 넣어놨어요. 저 놀리려고 ㅠㅠ 그 후엔 어찌되었는지 ㅠㅠ 친구에게 미안하네요 ㅎㅎ

scott 2021-05-16 00:38   좋아요 1 | URL
미니님 북플계 유머와 위트 쵝오!
୧༼◕ ᴥ ◕༽୨

그레이스 2021-05-15 22:3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

붕붕툐툐 2021-05-15 22: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무튼 술‘의 배추 에피소드에 조금도 뒤지지 않는 해피 에피소드 잘 읽었습니다. 취한 상황에서도 불쌍한 강아지에 대한 애정을 잃지 않으시는 따뜻한 마음이 압권입니다~👍

그레이스 2021-05-15 23:0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강아지 키우자고 조르는 우리 애들한테 하얗고 예쁜 운동화 하나 사줄까봐요.
˝얘 이름은 해피야˝하고 ...

바람돌이 2021-05-16 02: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정말 해피를 꼭 껴안고 데려온 미니님 너무 귀여워서 미치겠어요.
술먹고 온갖 똥폼 잡다가 운 기억밖에 없는 저에 비하면 너무 사랑스러워요. 오늘 이 글이 저를 해피로 만들어주네요. ^^
 
아무튼, 술 - 오늘의 술을 피하기 위해서 우리는 늘 어제 마신 사람이 되어야 한다 아무튼 시리즈 20
김혼비 지음 / 제철소 / 2019년 5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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뽁뽁이를 터뜨릴 때마다 정처 없는 생각들이머릿속을 지나갔다. 뽁뽁이 하나에 술과의 추억과뽁뽁이 하나에 술을 향한 사랑과 뽁뽁이 하나에 숙취의 쓸쓸함과 뽁뽁이 하나에 그럼에도 다음 술에대한 동경과 뽁뽁이 하나에 에세이와 뽁뽁이 하나에어머니, 어머니…. 어우, 그래, 술책을 쓰자. 술에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술과 얽힌 나만의 이야기를.
술과 함께 익어간 인생의 어느 부분에 관해서. 써보자. 쓰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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