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의 언어 - 더없이 꼼꼼하고 너무나 사적인 무라카미 하루키어 500
나카무라 구니오 지음, 도젠 히로코 엮음, 이영미 옮김 / 21세기북스 / 201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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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보다 하루키를 더 잘 안다고 이야기하는 나카무라 구니오가 쓴 책.
하루키의 인터뷰와 책 에세이 등에 나온 단어, 지명, 작가들, 하루키가 번역한 책들, 재즈와 클래식 등에 대해 사전식으로 정리한 책이다.
책을 펼치면 앞부분에 마인드맵 하듯이 하루키에 대한 커다란 나무가 하나 그려져 있고, 관련 단어들이 적혀 있다.
하루키를 마인드맵한다면?
재즈, 그리고 리듬 타는 듯 한 문장과 위대한 개츠비
카프카, 맥주와 야쿠르트 스왈로즈
그리고 레이먼드 커버, 냇킹콜과 스탠 게츠.
일본적이지 않은 분위기.
짤딸막한 아저씨가 트렌치 코트의 깃을 세우며 상실과 고독, 잃어버림을 이야기하지만 그게 또 어울리는 분위기.

하루키의 주인공들은 내겐 꼭 무녀같은 느낌이 든다.
다림질과 소소한 집안일에 온갖 성의와 치성을 드리며, 정화의식을 거친 후
소박한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제례음악으로 재즈를 듣는다.
그들의 신전은 훗가이도의 돌핀호텔? 아니면 달이 두 개인 그 곳?
가끔 가명으로 곰돌이 푸를 쓰기도 한다.
모시는 신 중에 드러난 존재로는 “고양이”와 “도넛”이 있다. (여기서 도넛신은 던킨에 거주중이시다.) 도넛과 관련된 성스런 책도 있다.
상에 올리는 제주는 맥주, 가끔 양을 제물로 바치기도 한다.
가끔 스펙타클하기도 한 굿판을 벌리고는 시치미를 뚝 떼고 다시 다림질을 시작하고 고양이에게 밥을 준다.
제례를 지내는 시기? 무언가가 사라지거나 잃어버리는 시점이다. 제례가 끝난 후 사라진 것은 돌아오기도 하고 그대로이기도 하다.
가끔 신빨이 오르지 않을 때는 우물에 들어가기도 하는데, 여기서 주의점은 반드시 마른 우물이어야 한다는 것.
시시껄렁한 농담이지만, 어쩌면 하루키의 소설은 우리에게 잃어버린 무언가에 대한 그리움과 그 상실감을 찾기 위한 여정같은 것이 아닐까.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소중한 것을 잃은 상실감과 외로움, 그러나 결국 우리는 치유되어 돌아온다. 하루키가 가지는 그런 낙관적인 결말이 우릴 안심하고 그의 이야기에 빠져 들게 한다.

내가 좋아하는 구절
“결국 당신의 소설은 좋든 나쁘든 도넛적이네요.”
하루키가 좋은 사람들에겐 추천, 너무 너무 좋은 사람들에겐 비추천(왜냐하면 이 책에 나오는 내용들을 다 알고 계실테니까.~ 마지막엔 책 속에 나오는 장소를 찾아갈 수 있는 약도도 있다. 관련책들 모음도 좋았다. 그레이스 페일리, 제프 다이어, 다그 솔스타, 존 어빙, 마크 스트랜드 등등
그 중 읽고 싶은 책 존 어빙의 곰 풀어주기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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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6-04 19:5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구니오님도 역시 작가인가요? 스콧님은 아마 안보셔도 될듯^^* ㅋㅋ역시 레이먼드 카버도 나오는군요!

mini74 2021-06-04 19:57   좋아요 4 | URL
네~ 소설은 아니고 하루키나 고양이 등 관련 책 쓰셨더라고요 하루키 관련 책을 쓰신 찐하루키파신거 같아요 ~맞아요. 스콧님은 패쓰 ! ㅎㅎ

scott 2021-06-04 20:41   좋아요 5 | URL
미미님 이미 봤으요 ㅎㅎㅎ
책이 넘 두꺼워서 이북으로
이책 말고 다른 책에
하루키옹의 단편 (국내에 미출간된) 분석한 글은 잼나게 읽었죠 ๑◕‿◕๑

미미 2021-06-04 20:44   좋아요 4 | URL
역시 스콧님ㅋㅋㅋ👍👍

새파랑 2021-06-04 20:0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도넛 하면 <댄스 댄스 댄스> 아닌가요? 제가 <카라마죠프가의 형제들> 을 읽게 된게 하루키 때문이었어요^^ 저도 하루키 찐팬 이어서 이런 책 읽으면 너무 재미있더라구요~!!

mini74 2021-06-04 19:58   좋아요 4 | URL
저도요! 세상엔 두 부류의 사람이 있다 ~~

scott 2021-06-04 20:4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짤딸막한 아죠씨+무녀
ㅎㅎㅎ
미니님의 탁월한 해석에 감탄!!👍👍

[다림질과 소소한 집안일에 온갖 성의와 치성을 드리며, 정화의식을 거친 후
소박한 음식들로 상을 차리고 제례음악으로 재즈를 듣는다.]
이문장은 하루키옹의 모든것임 ㅎㅎㅎ

mini74 2021-06-04 20:49   좋아요 3 | URL
하루키 소설 속 남자들이 다림질을 참 잘한다고 했더니 남편이 걔들도 군대갔다 왔냐고 ㅎㅎ 남편이 의장대 나왔는데 맨날 총 돌리고 바지 줄 맞췄다고 하네요 ㅎㅎ

바람돌이 2021-06-05 02: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후로 성공한 분의 책이군요. ㅎㅎ

heathermomnt 2021-06-06 13: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루키를 적당히 좋아하는 저에게 딱일 것 같은 느낌이...☺️
 
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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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가 멋질 줄 알았다 ㅠㅠ
사라?!
베르나트같은 친구가 있다면 참 좋을 듯.
( 무레다의 이야기도 너무 매력적이다)

"언젠가는 수업 시간에 꼭 스토리오니를 들고 갈 거예요."
"너 정말 말귀를 못 알아듣는구나. 만약 정말 그러는 날에는 신나게 맞는 게 뭔지 경험하게 될 거야."
"그럼 악기는 대체 왜 갖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바이올린을 탁자에 올려놓고는 양쪽 허리에 두손을 얹고 나를 바라보았다.
"대체 왜 갖고 있는데요, 대체 왜 갖고 있는데요……." 아버지는 내 말을 흉내 냈다.
"왜 그런 거예요." 이번에는 내가 화가 났다. "항상 케이스째로 철통같은 금고 안에 보관해 두고 보지도 못할 악기를 대체왜 가지고 있는 거예요?"
"그냥 가지고 있기 위해 가지고 있는 거야. 알겠니?"
"아니요."

기차표를 손에 쥐었을 때 학업을 위해 튀빙겐으로 떠나는게 미래를 그리는 것보다 더 큰 의미가 있음을 알게 되었다.
내 유년 시절과의 작별이었다. 나의 아르카디아에서 멀어지는 것이었다. 그랬다. 나는 외롭고 불행한 아이였다. 부모는나의 재능과 관련된 것 이외에는 무신경했고, 내가 동전을 넣으면 사람처럼 움직이는 로봇을 보러 티비다보 놀이동산에가고 싶은지 물어볼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아이는 오염된 진흙 속에서 빛나는 꽃을 찾아 냄새를 맡을 줄 알았다. 그리고 마분지로 된 모자 상자를 바퀴 다섯 개짜리 큰 트럭이라고 상상하며 기뻐할 줄 알았다. 슈투트가르트행 표를사며 나는 이러한 순수의 시절이 끝나고 있음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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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06-03 19:1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앗 미니님도 이책 시작하셨네요. 저도 시작하고 싶네요. 근데 잃시찾이랑 이거랑 같이 읽으시다니 완전 대단 존경~!!

mini74 2021-06-03 19:44   좋아요 4 | URL
이 책 저 책 왔다갔다 읽고 있어요 ㅎㅎㅎ 잃시찾은 몽롱하게 읽고 있습니다 새파랑님 *^^*새파랑님 리뷰랑 미미님 리뷰 가 도움이 많이 된답니다 *^^*

scott 2021-06-04 00:19   좋아요 1 | URL
제 생각에 미니님이
숨은 내공이 엄청나 신 신형AI (。•̀ᴗ-)✧₊˚

미미 2021-06-03 19:2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어렵던데 북플에서 붐이 일고 있으니 계속해서 살살 읽어볼래요ㅋㅋㅋ(저는 1권에 한 두달 걸릴수도)

mini74 2021-06-03 19:46   좋아요 4 | URL
앞부분 조금 헤메다 넘어가니 무지 재미있네요. 폴스타프님 리뷰보고 사놓기는 아주 오래전 ㅠㅠ 미미님~ 앞부분에 츠바이크 책도 언급? 된답니다. *^^*

서니데이 2021-06-03 22: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 처음에는 에밀 졸라의 책인줄 알았어요.
그런게 저자가 달라서 찾아보니까,
그 책은 나는 고발한다, 이고
이 책은 나는 고백한다, 네요.^^
카탈루냐 문학 작가라는 소개를 읽었습니다.
mini74님, 좋은밤 되세요.^^

붕붕툐툐 2021-06-03 23: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와~ 북플에 불어오는 강력한 <나는 고백한다> 바람. 저도 어여 그 고백 들어야 할텐데요~ 앞서가시는 미니님, 리뷰 기대기대~🙆

scott 2021-06-04 00:2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책 3권 쪼개진건 불만인데
읽는 도중 아직 오타 안나오고(민음 세계 문학 전집에서 드물게)
커버속 소년 하체 실종 되서
똑땅하고 ฅʕ◍·̀·́◍ʔฅ

mini74 2021-06-04 09:07   좋아요 1 | URL
하체실종 ㅎㅎㅎㅎ 너무 웃겨요.

Falstaff 2021-06-04 09:0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 번째 문장
˝사라?!˝
는 이 책 사라는 말씀이세요, 아드리아의 애인을 얘기하시는 거예요?
둘 다를 한 방에 얘기하시는 거 같은데 말입죠. ㅋㅋㅋㅋㅋ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1 - 스완네 집 쪽으로 1
마르셀 프루스트 지음, 김희영 옮김 / 민음사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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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가 이옥과 박지원의 글이 정갈하지 못하다하여 분노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펼치신 정책이 문체반정, 문체를 바로 세우자 ( 노론 어쩌구 정치와 역사는 ㅠㅠㅎㅎ. )
이옥의 < 시장> 이란 글을 보면 시장에 가는 이들의 모습이 재미있게 묘사되어있지만, 그냥 사람들이 장에 갔다고 하면 되지 뭐가 이리 쓸데없이 기냐고 역정을 내셨다는데, 혹시 이 구역의 끝판왕을 만난다면?
프루스트를 읽는다고 생각하니 웃음이 삐죽 나온다. 불같이 화를 내며 귀향을 보낼까 아니면 곱씹다보면 느껴지는 매력에 빠지게 될까.
내가 진짜 현실에서 저녁밥 먹는 속도보다 더 긴 호흡으로 저녁시간을 묘사하는 이 애증의 책, 그런데 왜 주섬주섬 2권을 찾게 되는거지?
아무리 눈을 부릅뜨고 봐도 표지만 다른 1편이 두 권이다. 급우울하다가도 까짓것 커피 두 잔이면 책이 한 권이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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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6-03 19:02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 이책 과장 아주 조금 보태어 열번 도전했다가 읽기 포기했습니다. 이 책 어떤 부분에 매력 있는지 정말 알고 싶습니다. ^^

mini74 2021-06-03 19:06   좋아요 5 | URL
저도 한 열번쯤 ㅎㅎ 이제 1권 완독. 매력이라하면 어린 주인공의 그 찌질함과 엄마에 대한 애증과 그 동네 아줌마들의 관음증 등 제 맘대로 해석하며 읽고 있습니다. 읽다보니 마치 인물들의 감정이 해부되고 사방으로 엑스레이 찍혀 눈 앞에 보이는 느낌. 읽는게 아니라 돋보기 들고 윌리를 찾아라! 미션을 해결하는 마음으로 ㅎㅎ 아직 1권밖엔 읽지 못해서 ㅠㅠ 2권에선 다시 포기하고 책장을 부여잡고 울지도 모릅니다 ㅎㅎ 새파랑님 리뷰 보며 힘 내서 읽었어요 ㅎㅎ

새파랑 2021-06-03 19:0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태형을 당했을수도 ㅎㅎ저도 1권이 두권 있어요^^ 치킨 한마리 안먹었다고 생각하셔도 됩니다~!!

mini74 2021-06-03 19:12   좋아요 4 | URL
태형은 너무 약합니다 ㅎㅎ

미미 2021-06-03 19:29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3권을 읽어본 결과 반드시 사약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옵니다!!ㅋㅋㅋ

mini74 2021-06-03 19:49   좋아요 5 | URL
태장도유사! 사형에도 여러방법이 있사옵니다 . 사약은 너무 쉽게 보내는줄 아뢰오 ~ ㅎㅎ

scott 2021-06-04 00: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마르셀에게 기억을 소환하는 ‘냄새‘가 콱! 막혔다면 ‘관음증‘이 시들했을지도 ㅎㅎ

태형- 사형
넘 잔인함 ʕ→ᴥ←ʔ
 

미지가 콩브레에서 보낸 나날과 멀리 떨어져 보다 최근 날들과 연결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아니면 오랫동안 기억 밖으로내던져진 추억들로부터 아무것도 살아남지 않아, 모든 것이다 붕괴되어 버렸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형태는 ㅡ 그리고엄격하고도 경건한 주름 아래 그토록 풍만하고 관능적인 제과점의 작은 조가비 모양은 — 이제 파괴되고 잠이 들어 의식에 합류할 수 있는 팽창력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아주 오랜 과거로부터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을 때에도, 존재의 죽음과 사물의 파괴 후에도, 연약하지만 보다 생생하고, 비물질적이지만 보다 집요하고 보다 충실한 냄새와 맛은, 오랫동안 영혼처럼 살아남아 다른 모든 것의 폐허 위에서 회상하고 기다리고희망하며, 거의 만질 수 없는 미세한 물방울 위에서 추억의 거대한 건축물을 꿋꿋이 떠받치고 있다.
그것이 레오니 아주머니가 주던 보리수차에 적신 마들렌조각의 맛이라는 것을 깨닫자마자(그 추억이 왜 나를 그렇게 행복하게 했는지 당시에는 알지 못했고, 그 이유를 알아내는 일도 훨씬 후로 미루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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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토마토파이
베로니크 드 뷔르, 이세진 / 청미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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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이 책은 일기형식이다. 프랑스의 시골에 사는 할머니 잔이 아흔살을 맞아 쓰기 시작한 시작을 위한 일기가 아니라, 마무리를 위한 일기.

우울과 쓸쓸함보다는 노년의 삶에 대한 잔잔함이 담겨 있다.

정원의 꽃과 채소들, 그리고 이웃들, 친구들.

남편도 먼저 가 버렸다. 친구들과 이웃들도 하나 둘 요양원으로 혹은 있다면 더 좋을 하늘이라는 곳으로 간다.

하느님을 만나면 좋겠지만, 못 만나더라도 그것으로도 좋다. 길고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으니.



잔은 우리네 할머니와도 닮았다. 전쟁을 겪었고, 새로운 것엔 통 익숙해지지 않는다. 귀찮고 힘들지만 손자들과 자식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고 쟁인다.

미래보단 과거가 더 많이 섞여 있는 삶 속에서, 깨어 있음보단 잠듦이 더 편한 삶 속에서도 숲 길을 걷고, 소박하고 검소하게, 남들에게 기대기보단 타인들에게 도움을 주는 이로 남고 싶어한다.



소소한 청소며 화단 가꾸기, 가까운 병원에 가거나 조금 먼 곳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몇 번을 와 본 길을 운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다 결국은 시골의 작은 집에 고립되어 살아 갈 것이 두렵지만, 그래도 아침에 부는 바람과 햇살이, 따스한 차 한 잔과 흙냄새가 싫지 않다.

평탄하게 살아왔음에 감사하며, 가진 것에 만족하는 잔 할머니의 노년모습은, 당연히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할머니가 소원하는 것은 나이차이가 많이 나는 남매가 싸우지 않기를, 서로 보듬으며 살아가길 그 욕심 하나.



내 모습을 보기도 했다. 예전에는 아무렇지 않던 것들에 화가 난다. 각종 생활용품에 붙어 있는 손톱만한 스티커와 깨알 같은 글씨들은 결국 돋보기나 휴대폰의 확대기능을 통해서 보게 된다. 매번 사용법대로 왜 사용하지 않냐고 엄마를 답답해 했는데, 어쩌면 눈이 빠질 듯 사용법을 보고 있노라면 에라이, 대강 사용하자며 입에서 욕이 나왔을 수도 있다. 그것이 정신건강엔 또 더 나을 수도.



자연스럽게 나이가 들고 늙어가는 것, 받아들이며 남은 삶들을 살아가는 것에 대한 책이다.

온갖 것들이 가득 찬 내 주변을 보며 문득, 가져갈 수 있는 건 추억뿐인걸, 그 순간 순간 느꼈던 행복의 기억도 결국은 모두 흘려버리는 것, 그것이 나이 들어가는 것.



이집트에선 죽은 사람의 심장과 마아트의 깃털 하나를 저울에 재 본다고 한다.( 심장이 깃털보다 무거우면 암마트란 이름의 괴물이 죽은 자의 심장을 먹어버리고, 결국 죽은 자는 그저 무의 상태로 돌아간다. 평형을 이루면 부활을 하게 된다. ) 내가 재 보고 싶은 것은 심장도 깃털도 아닌, 추억의 무게다. 부끄럽고 미안하고 아쉬운 일들보다, 그래도 즐거웠고 사랑했던 기억이 더 많기를. 그래서 더 이상 새로운 일이 일어나기 힘든 노년의 어느 햇살 좋은 날, 좋았던 기억들을 떠올리길 바란다.



( 체리파이를 만들려다가 체리토마토파이를 만들어서 망치게 된 에피소드가 나온다. )

어쩌면 떠나간 사람은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그사람은 완전히 사라진 게 아니다. 저 멀리 어딘가에 그 사람이있는 것 같은데 아주 멀지만은 않은지도 모른다. 우리도 차례가 오면 그 사람에게로 갈 것이다. 그래서 죽을 날이 가까운 만큼 사별은 덜 슬픈지도 모르겠다. 우리도 진즉에 그 길에 들어섰고 그 사람은 단지 조금 앞서갔을 뿐이기에..

마지막으로, 오솔길이나 숲으로 산책 나가는 것도 중요한 일과다. 자갈 깔린 마당에서 잡초를 뽑아야지, 테라스 포석(鏞石)사이로 돋아난 이끼를 긁어내야지, 여름에는 저녁마다 의자에앉은 채로 물이 새는 초록색 호스로 화단에 물도 줘야 한다.
사실 내가 유일하게 지루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나 혼자 있을때가 아니라 지루한 사람들과 함께 있을 때다. 평소에는 정신없이 흐르는 시간이 그럴 때만 축축 늘어지는 것처럼 느껴진다.
남들과 함께하는 시간이라면 모를까, 자신과 함께하는 시간은 결코 지루하지 않다.

겨울은 혹독하다. 걸음의 속도도 늦춰야 하고, 오래 걷지도못한다. 톱니바퀴는 뻑뻑해지고 관절은 시큰거린다. 서리와 강풍 때문에 숨이 금방 찬다. 그런 것과 싸워야만 앞으로 나아갈수 있다. 겨울을 잘 버티고 다시 움이 트는 계절을 보려면 기운이 좀 있어야 한다. 하지만 겨울이라는 계절이 길기는 또 얼마나 긴지. 그래도 날이 짧으니까 시간은 더 빨리 가는 셈일지도……삶은 느려진다. 생활이 버거워지기 시작하고 머릿속에는 우울한 생각이 늘어난다. 공기를 쐬어줘야 잊을 수 있다. 조금씩, 놓.
을 것을 놓아버린다.
겨울을 끝까지 버텨내려면 의지가 있어야 한다. 아무리 권태롭더라도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은 아닐지 모른다고 생각해야만한다.

아직 볼 것도 있고 할 일도 있지만나 이제 떠나니 보내주세요.
나의 길은 여기가 끝이 아니거든요.
눈물로 나를 붙잡지 말고우리가 함께한 세월을 기뻐해주세요.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그대들로 인하여 내가 얼마나 행복했는지과연 짐작이나 할까요.
그대들이 보여준 사랑에 감사합니다.
그러나 이제 나는 내 길로 가야 할 때가 되었네요.
그대들이 꼭 울어야겠거든, 잠시만 울어주세요.
그러고 나서는 슬픔 대신 기쁨을 품어주세요.
우리는 잠시 헤어지는 것일 뿐이니까요. (……)나는 멀리 있지 않을 거예요. 생은 계속되니까요..
내가 필요하거든 불러주세요. 내가 올게요.
볼 수 없고 만질 수 없어도 나는 그대 곁에 있을 거예요.

마음으로 들을 수만 있다면정답고도 분명한 이 사랑을 바로 옆에서 느낄 수 있어요.
그러다가 그대도 여기 올 때가 되거든나, 환한 미소로 마중 나가
"우리 집에 잘 왔어요."라고 말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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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6-01 17:2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아흔살 부터 일기를 쓰기 시작 했다니!
소소한 청소 화단 가꾸기, 가까운 병원에 가거나 조금 먼 곳의 친구를 만나러 가는 것, 몇 번을 와 본 길을 운전하기가 점점 어려워지는 나이 ㅜ.ㅜ
아프지 않고 하루 하루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아가는 모습에
마지막 인생의 끝자락 슬픔보다 따스함이 느껴집니다.

체리 파이와 치레 토마토 파이는 맛과 향의 차이가 엄청 클텐데
레시피가 궁금합니다 ^ㅅ^

mini74 2021-06-01 18:13   좋아요 5 | URL
나이가 들면 익숙한 요리들도 낯설고 두렵지만 자꾸 실수를 하지만 뭐 어때? 젊을때도 실수했는데라며 지금의 노년을 수긍하는 모습이 좋았어요. 자세한 레시피가 안 나와서 ㅠㅠ

새파랑 2021-06-01 17: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정말 쓸쓸함 보다는 잔잔함 느껴지네요. 나이가 들어갈수록 점점 추억을 기억하면서 살아가는 거 같아요. 그래서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드는게 중요할거 같아요 ^^

mini74 2021-06-01 18:15   좋아요 5 | URL
북플에서 좋은 분들 글쓴 거 읽고 서로 으샤으샤하는 것 책 사는 것엔 서로 언제나 진심인 것. 이 모든 것들도 좋은 추억이 될 것 같아요 ㅎㅎ

미미 2021-06-01 18:1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아까 체리 먹었는데, 이 표지가 더 먹음직 스럽네용ㅋㅋㅋㅋ
잔 할머니 이야기보다 미니님 결말이 어쩐지 제게는 더 좋네요~♡
나이듦이란 흘러가는 세월의 무게를 받아들이게 되는 건가 싶어요. 다시 일기를 열심히 써야겠어요!(๑•̀o•́๑)و

mini74 2021-06-01 18:17   좋아요 5 | URL
미미님 유명인사되면 일기장 경매들어갈지 모릅니다 조심해서 쓰셔야 합니다 ㅎㅎㅎ

미미 2021-06-01 18:21   좋아요 5 | URL
앗ㅋㅋㅋㅋ미니님 사람이 날아다니고 있다는 뉴스를 들으심 저라고 생각하심 됩니다ㅋㅋㅋ

붕붕툐툐 2021-06-01 20:14   좋아요 4 | URL
체리의 계절이 다가왔네용! 저도 올해 🍒 많이 먹으려구용!!ㅎㅎ

미미 2021-06-01 20:26   좋아요 2 | URL
네♡ㅋㅋㅋ요즘 막 나오고 있는데 탱글탱글 달달합니다~🍒

붕붕툐툐 2021-06-01 20:1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잔잔하고 아름다운 이야기 좋아요~ 제가 태어나면서부터 할머니였던 할머니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기 힘들었는데, 제가 늙어가다보니 저절로 되는 거 같아요~ 그만큼 늙으면서 좀 더 넉넉해지고 현명해지는게 아닌가 싶어요~ 함께 책읽으며 멋지게 늙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