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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 (양장 특별판)
박민규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5년 11월
평점 :
고3때 이른 대입 합격 후(수시1차 이후 놈팽이 취급당함) 교실 뒷문쪽 끝좌석에서 주구장창 책 읽던 시절이 떠오른다. 그때 읽었던 '카스테라'와 '핑퐁'은 상상력이라곤 1g도 갖고있지 않는 초 현실 주의 인간에게 재미난 세상을 알려준 저자였다. 한참을 잊고 살았다. 눈 앞에 보이는 것보다 더 큰 세상을 구현해 준 저자의 글이 나에겐 낭만의 또 다른 이름이었는데 말이다. 거진 20년만에 읽게되는 저자의 이야기들. 2008년 온라인 연재부터 17년간 스테디셀러로 자리잡은 작품이 영화 개봉을 앞두고 개정판으로 나왔다. 들어는 봤지만 흘려들었던 제목. 토요일 오전 청소를 한다고 틀어둔 KBS 영화가 좋다의 소개영상에 홀려서 예고편을 찾아봤고, 원작이 궁금해졌고, 내가 알던 그 이름이라 반가워 더욱 기쁘게 마주 할 수 있었다. 역시 나에겐 영상으로 된 것보다 활자로 된 것이 더 좋다. 예고편의 세 인물들을 머릿속에 입력 해 두고 소설 속 그들의 이름에 이미지를 밀어 넣은 후 장황하지만 결코 지루하지 않으며 구구절절 늘여놓지만 절대 허무하지 않은 소설 속 나, 그녀, 그리고 요한에게 사랑의 정의를 묻고 또 묻게 된다.
뒤늦게 인기 배우가 된 잘생긴 남자, 그런 남자를 위해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 성공과 함께 가족을 버리고가는 남자를 탓하거나 붙잡지 못하는 여자. 그게 이야기 속 나의 부모들이다. 시간이 흘러 스무살의 나는 백화점 아르바이트를 하다 그녀와 요한을 만나게된다. 아버지를 닮아 잘난 얼굴을 한 나와 누구도 쳐다보기 싫어하던 못생긴 그녀. 그리고 그들의 청순보다 먼저 살아본 조금 더 큰 어른이자 그네들의 대나무밭과 같던 요한. 그와 그녀는 사랑했지만 그걸로 완벽한 엔딩은 이루지 못한다. 요한은 아팠고, 그녀는 떠났고, 그는 그들을 그리워했고 시간이 흘러도 다시 찾겠노라 마음을 먹으며 일련의 사건들을 버텨낸다. 못다 부친 편지, 한번 더 찾아보지 못한 병원. 시간이 흘러도 이 마음에는 한 점 부끄럼이 없으니 부디 그대들이 그때를 부정 할 수 없도록 많이 늦었지만 오롯한 그 마음을 전하는 긴 시간을 담아두었다.
📖그보다는... 내가 이 자리에 있다는 사실이 기뻐. 너와 함께한다는 사실이... 지난번엔 문도 열지 않았던 이곳에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사실도 기뻐. 벽난로마저 있고, 이렇게 따뜻하다는 사실도. 이제 또 어떻게 살아갈지는 모르겠지만 스무 살이 되었다는 사실도 기뻐. 눈이 오는 것도 기쁘고, 저렇게 조명이 반짝반짝 하는 것도 기뻐. 그리고 무엇보다... 네가 눈물을 그쳐서 기뻐. 양이 얼마 되지 않는 그 밥을 다 먹어준다면 더 기쁠 것 같아.
뭔들 안 행복 할까. 모든 여건이 불행하다 할 지라도 그의 눈에는 우리 둘을 축복하고 있다는 과한 착각을 하게 되겠지. 좋아하는 마음에 눈이 먼 자는 세상이 다 사랑스럽게만 보일 뿐이니까. 상대가 밥만 잘 먹어줘도 세상 뿌듯한 것 처럼, 안 먹어도 배부르다는 어미새의 기운이기도 하니까.
📖이 포크를 봐. 앞에 세 개의 창이 있어. 하나는 동정이고 하나는 호의, 나머지 하나는 연민이야. 지금 너의 마음은 포크의 손잡이를 쥔 손과 같은 거지. 봐, 이렇게 찔렀을 때 그래서 모호해지는 거야. 과연 어떤 창이 맨 먼저 대상을 파고 들었는지... 호의냐 물으면 그것만은 아닌거 같고, 동정이냐 물으면 그것도 아니란 거지. 뭐, 맞는 말이긴 해. 손잡이를 쥔 손으로선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상대도 마찬가지가 아닐 수 없어. 처음엔 어떤 창이 자신을 파고든 건지 모호해. 고통과 마찬가지로 감정이란 것 역시 통째로 전달되기 마련이지.
신경이 쓰인다는 감정이 먼저일까, 마음이 간다는 기운이 먼저일까. 요한은 자신이 느낄 감정 말고, 상대가 받게될 마음의 기운에 더 집중 하라는 듯 대상과 감정을 꺼내 사물화 시켜 다각도로 들여다 보길 권하고있다. 호의 와 연민, 동정과 고통. 멋대로 해석하는 방식 말고 직시하여 바라보길. 바람나 도망간 아버지와 머문채 붙잡지 않고 기다리기만 했던 어머니를 보듯, 그렇게 직시하길. 남들도 그리 볼 수 밖에 없는데 그 모든 시선을 거두고도 모호한 마음을 떨궈 두며 오롯이 좋아한다고 확신 할 수 있을지. 이건 그와 그녀 사이의 문제가 아니라 사랑을 주저하고 고백직전의 모든 청춘들에게도 동일한 물음이었다.
📖그 친구를... 좋아하고 싶은 거니, 아니면 좋아해주고 싶은 거니?
연민과 애정 그 모호한 마음. 측은과 애틋으로 어느하나 명확하지 않은 흐리멍텅한 전달. 어쩔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은 다 그렇게 생각 할 테니까. 예쁘지도 않고, 잘나지도 않았으며, 특출나지도 않은, 그야말로 무엇하나 또렷함이라곤 없는 그녀로 인식하는게 일반적인 사람들인데 너는 무엇이 보였고 무엇에 홀려 좋아하는 마음을 드러내고 싶을 만큼 커진거냐는 요한의 물음은 나 또한 묻고픈 지점이었다. 요한이 그의 집안 사정을 다 알고 있을진 모르겠으나 어머니에 대한 여운이 비춰 박애주의 같은 마음인지, 아무도 못보는 그녀의 또 다른 찰나를 사랑하는지 궁금했을 것이다. 첫눈에 반하는 그 시간과 시선, 그 순간이 궁금하기도 하다. 제 눈에 안경이라는 말도 있지 않던가. 남은 못 본 면면은 그가 봤을 수도 있는 거니까. 설령 그게 눈에 들어오는 외형이 아닐 지라도 말이다.
📖변함없고 저렴한 삶이 끝없이 이어진다 해도, 역시나 갈 길을 알 수 없다 해도... 나는 이 평범한, 작은 손 하나를 언제까지라도 놓고 싶지 않은 기분이었다.
이야기가 이어지는 시절 탓인지는 모르겠으나 애틋한 마음을 닮은 그 시절 노랫말이 떠올랐다.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어요. 이 세상 어느 곳에서도 나는 그대 숨결을 느낄 수 있어요. 내 삶이 끝나는 날까지, 나는 언제나 그대 곁에 있겠요.' 라며 단언하듯 확신에 찬 말을 하는 신해철님의 그대에게. 그러니까 상대에겐 불안해하지 말기를. 결국 나는 그대 곁에 있겠노라는 마음은 변할 일이 없다는 확신이 '사랑해'라는 직관적인 말보다 더 폭닥한 말로 내 품에 안겨드는 기분이다. 아마 그와 그녀는 모든 노래 가사가 자기들 이야기처럼 느껴지고있겠지. 사랑은 그런 거니까.
📖서로를 사랑하지 않는 까닭은, 서로가 서로의 불 꺼진 모습만을 보고 있기 때문이야. 그래서 무시하는 거야. 불을 밝혔을 때의 서로를... 또 서로를 밝히는 것이 서로서로임을 모르기 때문이지.
얼굴 좋아보인다? 너 연애하니? 라는 말은 괜히 나오는게 아니겠지. 화색이 도는 이유도 그 이유와 일맥상통 할 것이다. 들어주고 바라봐주는 이가 있다는 것에 대한 믿음. 그래서 그 믿음을 져버리지 않기 위해 존재의 유일함을 드러내기 위해 무던히 애쓰는 과정. 비단 외모를 가꾸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아끼고 나를 아껴주는 상대를 더 애틋해하는 과정에서 나오는 강한 무언가. 그러니 사랑을 할 수록 서로가 빛날 것이고, 빛이 나는 존재의 옆에서 그늘이 될 수 없으니 더 열심히 반짝이는 부지런함을 보이는 거겠지. 그러니 그대여 부디 어둠에 잠식되지 않길 바란다. 빛도 전염되듯 어둠도 전염성이 짙은 것이니 일단 넌, 널 좀 사랑해줘. 그래야 그 빛을 따라 널 사랑하는 나도 사랑 할 수 있으니.
📖물론 모든 원인은 제게 있습니다. 어쩔 수 없이... 저는 머뭇거리는... 머뭇거릴 수... 밖에 없는 그런 인간이니까요. 그런 저를 부디 용서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당신에게서 도망친 것이 아니라, 매일 아침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나라는 여자에게서 도망을 친 것입니다. 어느 누구도 아닌 스스로에게 결국 무릎을 꿇은 것입니다.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흘렀고, 전하지 못하는 말들은 늘어나고, 그와 그녀 사이의 물리적 거리는 멀어지고있고, 열망하던 마음의 불꽃도 꺼트려질까 조마조마한 것. 소진한 마음이 아니라 소실한 자신감이라 적어두고싶다.
📖뒤돌아 헝클어진 삶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것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아프지 않다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다는 생각입니다. 즉 나와 당신이 무사하다는... 우리가 무사하다는 기억을 저는 꼭 가지고 싶었던 것입니다. 어쩌면 그게 제가 이 곳을 찾은 이유의 전부란 생각입니다. 당신이 무사해서... 당신이 무사하니까 이제 저도 무사할 수 있습니다. 얼마나 다행한 일인지 모르겠어요.
이 대목에서는 이도우님의 사서함 110호의 우편물이 생각났다. '네 사랑이 무사하기를, 내 사랑도 무사하니까, 세상의 모든 사랑이 무사하기를'로 이어지는 느낌이었다. 애어른 같은 시절을 지나 이제는 누가봐도 어른이라 할 수 있는 시기의 그들. 마음에도 굳은 살이 박혀서 그 시절의 꽉 닫힌 사랑의 결말이 아니었음을 탓하기 보단 그 때엔 그럴 수 밖에 없었던거지. 라는 이해와 단념의 마음이 비춰졌다.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사랑을 받을 수 있고, 아름답지 않은 여자가 주연이 될 수 있는 이야기. 헌신하는 못생긴 여자는 자신의 부당함에도 숨을 죽이고 있어야 했다. 세대가 바뀌고, 시절이 변한다 할 지라도 누구도 쳐다보기 싫어하던 못생긴 그녀 또한 사랑을 받는 일련의 날들을 바라지만 또 다른 인류인듯 소수자로 분류되며 그러한 시선들이 없는 곳으로 떠난다. 잘나고 예쁜 사람만 있는 세상도 아닌데 모두들 하나같이 그들의 삶이 우리의 전부인냥 표현하고있다. 저자는 외모 경쟁에서 불리한 여성들, 늘 외모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는 여성들을 위한 일종의 연사라고 했다. 부의 소유 여부, 또한 미모의 존재 여부에 따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 또한 달라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덧불 일 수 있는 것이 '사랑의 힘'이라 했는데, 이야기 속 나의 아버지와 어머니를 볼 때 어머니는 그 사랑의 힘을 갖지 못한 채 맺어진 연이었고, 이야기의 나와 그녀는 또 어떠한 관계의 이동이라 봐야 할까.
인생은 타이밍이라 했듯 매번 주저하고 붙이지 못한 마음을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라도 표현했던 후반의 내용. 세월이 흐르고 그때의 감정이 잔재처럼 흔적만 겨우 확인 할 수 있다 할 지언정 그래도 날 사랑하냐는 물음에, 그럼에도 당신을 사랑하겠다는 단언의 한 마디.
매번 비교하고 눈치보며 주저하는 일련의 과정을 모두 덮어버릴 만한 상대의 꽉찬 대답. 그거 하나면 살겠다. 그걸로 살아가겠다 싶은 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