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라는 완벽한 농담 - 이경규 에세이
이경규 지음 / 쌤앤파커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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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적부터 티비를 통해 봐오던 사람이라 그런지 나에게는 연예인이라는 느낌보다는 아는 동네 아저씨같은 친근함이 가득한 이경규님. 아빠뻘이기도 하거니와 동향이다보니 더욱 그리 여겨지는지도 모르겠다. 요즘이야 예능이라고 말을하지만 90년대부터 티비 쇼프로그램에서 진행을 도맡아오던 코미디언. 더 자세히 이야기 하자면 일요일 밤 개그프로그램보다 주말 저녁 밥먹으면서 보는 티비에서 항상 진행을 맡아하던 말 잘하는 아저씨. 그렇게 어린아이가 보던 사각 브라운관의 아저씨는 태블릿 안으로 자리를 옮겨가며 지금도 꾸준히 방송을 이어오며 청취자&시청자들과 꾸준히 소통하는 노력형으로 흐름을 따라가고 있다. 그런 사람이 내는 에세이. 그간 당신의 삶 이야기를 책으로 내더라도 몇권이나 냈을법한 긴 방송인으로서의 시간. 45년차에도 여전히 현역으로 있는 정년을 외면하고 사는 사람. 그래서 궁금했다. 아빠의 나이대의 어른은 어떻게 삶을 이어가고, 변해가는 세상에서 어떻게 자신의 몫을 끌어 올 수 있는지. 그리고 어떤 이유가 있기에 그렇게 진득한 사명감을 오래 유지 할 수 있는지를 찾아보려한다.


'잘해서 오래 하는 게 아니라 오래 하는 사람이 잘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배울점이 있는 사람이라면 선후배를 막론하고 수평적인 자세, 업에 대한 사명감, 새로운 도전에 주저하지 않는 용기가 그를 여기로 데려왔다고 했다. 노력하는 자가 즐기는 자를 이길 수 없다고 믿으며, 그 존재자 자신이라는 당당한 이유를 보여주는 인생 서사의 한 권. 한 주도 쉬지 않고 열심히 살고 열심히 애썼던 시간을 나도 톺아보기도 한다.

📖긴장과 고독 사이에서_ 웃음 하나가 상처가 되고, 농담 하나가 차별이 될 수 있다. 세상이 빠르게 변화하는 만큼 기민하게 발맞춰야 한다.

방송인의 자세라 봐야겠지? 지정해 두지 않은 타인을 향한 액션이기에 더욱 예민하고 기민할 수 밖에 없는 성정. 저자는 스스로를 이렇게 지칭하지만 그것이 나쁘게만 보이지 않길 바라고 있다. 자칭, PD를 귀찮게 하는 사람. 그리 불리워도 별수 없다는 듯 곧바로 제작자와 의견을 나누는 것에 주저하지 않느다.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받기도 하지만 때론 정확한 의도를 필터 없이 전달하고자 첨삭하는 것을 바라는 자의 눈매는 진지하고 힘이 넘친다. 마음에 걸리는 것, 순간의 흐름에 젖어들어 과했던 액션들, 바로잡아야만 하는 표현방식, 마음에 걸리는 구석들을 끊임없이 교류한다. 어떻게 보면 너무 예민했고, 너무 긴장을 한다고 하지만 또 어떻게 생각해보면 그만큼 불특정 다수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서러운 사람, 아쉬운 마음이 적었으면 하는 마음이 컸기에 가능한 후일담이라 할 수 있겠다. 제작자가 잘 알아서 하겠지 라는 마음도 물론 중요하다. 그들도 그 분야에 대해서는 많이 배운 전문가들이니까. 하지만 진짜 전하고픈 의도는 진행를 통해 들었을 때 더 확실하게 다가오기에 계속 묻고 또 묻는게 아닐까.



📖긴장과 고독 사이에서_ 그래서 나는 오늘도 조용히 혼자가 되는 연습을 한다. 나이가 들수록 혼자 있는 시간은 더 늘어날 것이다. 나는 그 시간을 끝내주게 잘 보내고 싶다. 40여 년의 무대가 가르쳐준 생존의 방식이다.

어떤 이에게는 대기시간에 긴장을 풀기 위해 사담을 나누기도 할 테고, 이 분야의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기회이니 친목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더욱 큰 에너지를 쏟기도 할 것이다. 그리고 모자란 에너지를 끌어모으기 위해 자신만의 테두리를 치고 침묵을 하거나 고요한 휴식 속에서 안정을 찾기도 하겠지. 성향의 차이 인 것은 맞다. 이건 어느 장소에 있든 다양한 사람들이 하는 대기 방법과 준비의 과정이니 확실한 답은 없다. 자신만의 페이스를 잘 옮겨놓기 위한 하나의 방식이니 어떤 이의 강요나 보여지는 것들에 의식해서 휘둘려지지 않길 바란다. 이건 방송인이든 비 방송인의 사회생활에서든 다 똑같은 제 숨 고르기 방법 중 하나이니 말이다.




📖바꿀 수 없는 책임들_ 어떤 사람들은 예능으로 세상을 바꿨다고 말한다. 하지만 사실은 그 반대다. 프로그램이 나를 바꿨다. 조금 더 나은 시민으로, 조금 더 나은 사람으로. 나는 내가 만든 캠페인을 첫 번째로 실천해야만 했다. 그게 내 운명이다.

오랜시간동안 방송인으로 살면서 신문의 연예면에서만 보았지 사회면에서 만나지 못한 이유는 그가 가진 절대적인 룰이 있었기에 가능했음을 보여주는 부분이다. 공익 방송 진행으로 기억되는 그 시절 방송들. 조작이라는 말들도 있었지만 세상 어느 곳이든 그렇게 법을 지치고 순리에 따르며 공공의 규칙에 어긋남 없이도 잘 살 수 있다는 걸 보여준 방송들이었다. 진실은 통하게 되어있는 법이고, 그 진실의 힘은 전달하고있는 이도 같이 지켜가며 살아왔기에 이건 리얼이다 라고 할 수 있음의 모범사례가 되고픈 마음을 헤아려보게된다. 전달자의 이중적인 삶이 숨겨져있었다면 그 방송도 잘 나가는 프로그램이 될 수 없었겠지. 방송은 역시나 허구였다고 코웃음 치는 일이 없도록 만들어낸 진행자의 뚝심있는 진심 덕에 우리는 세상에 양심이 존재하고, 도덕이 유지되어도 살만하다는 걸 느끼게 해 주어 감사하게 생각한다.


📖살아남는 자가 승자다_ 진정한 승리는 속도가 아니라 지속하는 힘에서 나온다. 코앞의 이익에 목숨을 걸지 말자. 살아남는 사람, 마지막까지 남아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는 사람, 그가 진정한 승자다. 아직까지 살아남은 내가 하는 말이니 틀림없다.

뭔가 신빙성있는 말이다? 거봐! 이 아저씨도 살아남아서 계속 일하고 있잖냐? 못할거 같지? 해봐! 해보면 또 되게되어있어. 라는 듯한 이야기가 귓가에 맴돌게 된다. 급히 내달리기보단 내 페이스에 맞춰서 계속 가려는 목표. 조급함? 다급함? 조바심을 버리고 일단 내딛어보고 생각하자는 듯이 말하는 인생선배, 아빠 친구가 툭툭 던지는 리얼한 후기. 구설수도 없고, 사회생활이든 가정생활이든 입 댈 일 없기위해서 우리집에서 아빠와 딱 소주 각 1병씩만 먹고 집으로 털레털레 걸어가려 하는 아빠친구같은 사람의 사람좋은 웃음이 눈 앞에 그려진다. 소주 심부름 갔다가 의도치않게 인생 조언 찐하게 듣고오며 용돈 얻어가는 기분? 뭔지 알지?



📖유종의 미는 없다_ "많은 분들이 이야기합니다. 박수칠 때 떠나라. 박수칠 때 왜 떠납니까? 한 사람이라도 박수를 안 칠때까지, 그때까지 활동하겠습니다."

거기에 이어지는 아저씨의 진심. 회사에서 말하는 명예퇴직에 대한 그 연령의 어른이 하는 진짜 속내가 여기서 보였다. 퇴직에 무슨 명예가 있나? 그냥 '퇴직'일 뿐이지. '명예'라는 말을 붙여서 떠나는 사람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달래보려는 건가? 싶은 의심가득한 눈초리.

더 할 수 있고, 더 할 의지도 있는 사람의 사기를 떨어뜨리는 슬픈 단어다. 이미 올라갈 데로 올라가본 끈기와 의지가득한 사람이었으니 내려 올 때에도 아마 혼자서도 알아서 잘 내려 올 것이라는 약간의 방관과 약간의 무심함으로 그냥 내버려두어도 되지 않을까의 마음을 내밀어본다.


추천글의 명사가 대단하다. 다양한 분야의 방송인 후배 하며, 동료들, 그리고 멋들어지게 잘난 삶을 살고있는 찐친들의 아주 긴 글들. 추천사가 또 이렇게 긴건 처음이다 싶었다. 책 뒤가 아니라 책장 앞에도 페이지를 차지하고있으니 아마 선배의 말이긴 했지만 그의 책에 자신의 이름과 이야기가 들어간다는 것이 얼마나 뿌듯한 일이었을까를 가늠해본다. 내가 이러한 멋진 어른을 알고있고 함께 일 할 수 있었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도 보였거든.

방송인은 매일매일을 그렇게 40여년 넘게 일을 해왔다 하면 박수받고 존경을 받으며 추대해주지만, 비방송인에게는 대단함이 아니라 익숙한 일상임을 떠올려본다. 매일매일 출근과 퇴근을 반복했고, 경조사 며칠만 쉴 뿐 온갖 자연재해 속에서도 일단 출근을 해야하는게 직장인이며 어른들의 일과라는 점. 그래서 때론 얄밉기도 하지만 매일매일이 재난경보같은 삶에서 휘둘리고 쓸려나가는 것 없이 인생의 반 이상을 해 온 그 자체로서 박수받고 존경받는 것에는 일말의 부정을 할 수 없음을 느낀다. 쉬쉬하는 뒷담화보다 존경과 부러움을 더 받는 삶. 일단 이 것 만으로도 잘 난 사람인건 맞으니까, 아빠 친구가 술김에 하는 이야기 반, 친구 딸래미 바라보며 하는 걱정어린 삶의 우려 반을 보탠 진담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어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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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로의 필요 청색지시선 11
김지윤 지음 / 청색종이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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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제에 있는 '피로의 필요'라는 글이 담고 있는 이야기가 궁금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 소개를 보면 '피로'가 가진 이야기는 삶의 소모적 부산물이 아니라, 멈추어야 할 순간을 가르쳐주며 잃어버린 감각을 회복하고 삶의 방향성을 다시 묻는 자리로 확장하는 단어였다. 피로는 존재의 내면을 파고드는 성찰의 도구, 고통스럽지만 불가피한 진실을 마주하며 삶의 의미를 드러내는 계기로 봐 달라고 했다.

'피로는 우리에게 새로운 시선을 갖게 하고 사색을 위한 어두운 방을 제공하며, 삶의 다른 국면을 열어주는 중요한 고비, 생의 문장 속에서 문득 등장하는 쉼표, 그리고 질문의 시작점과 같다'고 대담을 통해 전해두었다. 시인의 말 처럼 피로가 만들어 준 여백은 무엇을 원하는지, 어디로 가고자 하는지에 대한 근원적 물음을 던졌기에 나는 또 어떠한 마음을 갖고 이 문장을 받아들여야 할지 생각해보기로 했다.

📖당연한 말_ 다 그런거지, 라는 말

상냥하고 무관심한 목소리 당연한 세상에 당연한 말은 왜 이리 많은지

바람결에 저절로 밀리는 문처럼 눈앞에서 무언가가 굳게 닫히는 소리

당연한 세상에 당연하다고 여기는 것들. 헌데 처음부터 당연한 것은 없었고 누군가에 의해 그리 만들어졌고 누군가로 인해 우린 편히 당연했었다고 기억하는 것들을 떠올려본다. 뒤에 이어질 몇몇의 시는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의 목소리를 불러내며 잊힌 존재에 대한 애도의 의미를 묻고있다. 그 이야길 듣고 읽게된 시 들에도 팍팍했을 그 시절을 겹쳐보게된다. 이유없는 아픔과 이유없는 단념은 어디에도 없으니 말이다.


📖우산_ 햇빛 아래선 도무지 쓸모없어 보이는 그것을 어디선가 나도 몰래 떨구어 버리지 않으려고 고개를 숙이고 걷는다

우산을 힘껏 쥔 나는 이방인 같다

앞에서 당연했던 것들에 대해 생각을 이어갔다면 '우산'이라는 시에서는 쓸모 있는 것과 쓸모 없어진 것들을 나누는 마음을 떠올리게된다. 한 때엔 당연히 손에 쥐고 쓰이던 것들이 바뀐 환경에 의해 성가신 것들로 취급하게되는 과정. 영영 쓸모 없을 것은 아니나 당장에 발치에 거슬리는 것으로 취급하게되는 여건과 내 처지. 읽다보면 어디 이게 물건에만 한정된 마음일까를 생각하게된다. 사물을 너머 나라는 존재, 인간에 대한 쓸모와 필요도로 시선을 돌리게되면 서글퍼지고 마음이 아려진다. 맑은 날 우산을 쥔 내가 이방인처럼 여겨지듯, 모두가 제 할일을 하느라 바삐 움직이는 틈 사이에서 갈피를 못 잡은 채 어중이떠중이가 되어 붕 떠있거 같아 내 손에 달린 우산을 더욱 꽉 잡게된다. 내내 화창한 날에 한번 스칠 소나기를 위해 우산을 간직하는 마음처럼, 어느 순간에 내가 아니면 안될 그 타이밍을 기대하며 내가 나를 놓아버리지 않았으면 한다.



📖충분_ 작별을 배우지 못해서 기다리기도 했다

겨울나무 위에 남은 까치밥처럼 이미 때를 넘겼더라도 뒤늦은 쓸모라도 있다면 차라리 영영 충분해지는 일이 없기를

필요했고, 충분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이만한게 없을 때를 기다리는 어떤 날을 생각한다. 꼭대기에 걸린 까치밥, 저놈은 작별을 배우지 못해 그 순간만을 기다리며 얇은 나뭇가지 하나를 붙들고 있는 축 쳐진 것이 내 쭈그러든 마음을 닮아있는 것 같아 신경 쓰인다. 어째 사람에게도 손을 타지 않았고, 까치들에게도 선택받지 못해 이 추운 겨울 꼬챙이 같은 가지하날 붙들고 사는구나 싶지만 또 한편으로는 가장 마지막을 멋드러지게 장식할 때를 기다리는 진득한 놈은 아닐까 싶어 저놈이 진퉁일거라는 믿음을 전해보기도 한다. 충분에는 다 이유와 타이밍이 있을테니까. 그리고, 이 시를 읽은 청춘의 누군가 역시 아직 충분하지 못한 타이밍으로 출격이 보류되었을 수도 있을테니 두 눈 질끈감고 주변의 비교는 못본 채 하고 충분했을 어느날을 진득히 기다려주었으면 좋겠다.



📖놀이동산_ 그렇지, 우스울 뿐이지 장난스러울 뿐이지

바로 이렇기에 모든 게 놀이가 될 수 있는 걸 테지 전부 다 가까이기 때문에

모든게 신기하던 시절. 그러니까 어딜 가든 별천지 같던 어릴 때를 떠올려본다. 동화속으로 들어온 듯한 놀이동산은 내가 공주가 되고, 왕비가 될 수 있을 것 같은 풍경이었다. 회전목마를 타고 있노라면 차가운 플라스틱에 조악한 색칠을 한 말이라는 현실 대신 백마탄 왕자님도 이 말을 타고 오지 않을까를 상상해 보기도 했고, 내가 이 회전목마 한바퀴를 돌고 나면 반짝이고 긴 모자를 쓴 요정할머니가 요술봉을 휘둘러 호박을 마차로 바꿔 줄 줄 알았다. 모든게 동화이며, 하는 행동들이 놀이가 되는 때가 있었다. 그 때의 나도 지금의 나도 똑같은 나인데 마음과 시선을 어떻게 채우느냐에 따라 동화가 되거나 조잡한 현실이 됨을 경험했다. 온 세상이 반짝이며 화려했던 내 시선은 속세에 닳고 달아 눈이 시리거나 어딘가 모자라보이기만 한 어설픈 레이저쇼로 입꼬리를 삐죽 내려놓게 된다. 그런걸 보니 놀이동산은 여전히 그대로인데 나만 시간에 닳아간 사람같아진다. 그 때의 마음은 어디에 팔아먹지도 않았는데 왜 나는 행복했던 놀이를 이제서야 하찮고 시시한 가짜로만 보게되었을까.


이 시집을 다 읽고나면 잊혀지고 지워진 삶의 조각들을 다시 발견하고 새로운 질문과 사유로 나아갈 수 있게 하는 여백을 곳곳에서 만날 수 있다고 전했다. 그땐 소중했고 그땐 애틋했는데 지금은 모든것에 흥미가 떨어진 밍숭밍숭한 사람의 내가 보였다. 일단 나는 과거의 나와 지금의 내가 다르다는걸 알게되었다. 그러니 이 책을 통해 다음 시작으로 넘어가 어떻게 생각하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를 열어둘지를 다시금 정돈하는 마음을 고쳐먹어 보고싶어진다.

📖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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견딜겁니다
진서연 지음 / 답(도서출판)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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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날개에서 자신을 소개하는 문장이 흥미롭다.

내성적이고 수줍음이 많은 사람. 친구들과의 소통마저도 어려워 말을 많이 안 해도 되는 무용과를 준비했던 이력. 역시나 한 사람의 내면을 다 알기에는 오랜시간이 걸리고, 많은 대화가 필요함을 느낀다.

내가 그녀와 마주앉아 이야길 할 순 없겠지만, 그녀가 SNS에 써둔 글들을 모아둔 책을 통해 자신의 속마음은 어떠했고, 또 어떤 마음으로 살아가고있는지 알아보는 계기가 이 책 '견딜겁니다'로 이어질 듯 하다.


책 '견딜겁니다'는 따뜻한 위로와 거창한 희망 이야기는 없다고 서두에 알려주고있다. 하루하루를 버티며 살아온 한 사람의 생각이, 고집이, 그리고 끈기와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담겨있다고 한다. 글에는 저자가 직접적으로 전달하고자하는 의미와 온기가 받아들이는 이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러니 누군가에게는 차갑고 거칠고 다듬어지지 않는 말들이라 느낄 수 있을테지만 다시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아무리 힘들더라도 버티고 견딜 수 있게 만드는 문장이 담겨있다.

이 책의 글들은 페이지 어디를 펼쳐도 부담없이 읽을 수 있는 구성이니 내가 이렇게까지 버텨야하나 싶을 즈음, 내가 이렇게 참고 있는게 맞는가로 명치가 먹먹할 때에 어디든 손 가는데를 펼쳐가며 견뎌낼 힘을 얻길 바라게된다.



📖 나는 잘 해내지 못하는 게 훨씬 많습니다. 그렇다고 내 가치가 덜 하다고 생각하며 살지도않습니다.

타인과 비교 할 수 밖에 없는 생이다. 동시대를 살고 접점이 많은 이를 마주 할 수록 그래도 저 사람보다 나아야 내가 좀 더 쓸모 있는 사람처럼 여기게되니 계속 곁눈질하며 닮아가거나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고나 애를쓰게된다. 그럴수록 나에게는 장점보다 단점이 더 많이 보이고, 모자란 면들만 도드라지게된다. 그러니 나는 잘 해내지 못하는게 훨씬 많고 뒤쳐지는 사람처럼 느껴지고 때론 쭈그러드는 자존감으로 의욕마저 상실하게된다. 가치에 대한 중요도는 무시하고 겉으로 보이는 면만 비교하니 그럴 수 밖에 없더라. 알면서도 계속 떨어지는 자존감. 내 가치에 대한 점수를 스스로 깎아내리는 옹졸한 마음이 가득한데 저자처럼 생각하며 마음먹기까지는 얼마나 큰 결심히 필요할까.



📖 모든 건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고 현실이 된다. 소름끼치도록 정확한 좌표대로 움직인다.

어떻게 이게 가능한지는 모르겠으나 원하면 이루어진다. 이상하고 이해할 수 없는 방법으로 시작되고 결론지어진다. 실은 지나고 나야 비로소 겪고 깨닫게된다.

저자가 남겨둔 문장을 보니 노래 '말하는대로'의 가삿말이 맴돌았다. 어릴적엔 정말 말하는 대로 될수 있다고 믿지 않았고, 믿을 수 없었다.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다는건 거짓말처럼 여겨지니 무시하게되던 삶인데 진짜 꿈꾸는 대로 이루어지긴 할까에 대한 생각. 현실을 직시하는것이 기대 후 실망하는 과정보다 덜 피곤 할 거라 여기는 삶이었는데 뒤늦게서야 이 꿈꾸는 마음과 바라는 마음에 대한 결과가 궁금해진다.



📖 보살펴주는 것 가만히 들어주는 것 손해를 봐도 상관없는 것 충분히 기대도 되는 것 힘든 걸 내가 하는 편이 더 나은 것 미쳐 날뛰어도 잠잠히 옆에 있어 주는 것 이 세상이 다 져버려도 돌아서지 않는 것.

그게 사랑이라는 거야.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고, 보다 안정적인 환경을 지키고 있는 사람이 해주는 사랑에 대한 정의. 해 본 사람이니 할 수 있는 생생한 사랑에 대한 후기. 배우자와 함께 주고받는 사랑도 그에 해당하겠지만 온전한 사람으로서 다양한 존재에게 받고 주는 티키타카의 마음 나눔에 대한 이야기. 저자가 남겨둔 글을 읽어보니 퍼주고, 다 해주고, 모자랄까봐 더 얹어주는게 습관처럼 하게되는 사랑의 표현이던데 그럼에도 뿌듯하고 보람되어 이 모든 것이 사랑이라 확신 하는 걸 보니 이 사람도 알게 모르게 타인에게서 그만큼의 사랑을 듬뿍 받는 존재라는 걸 보여주는 문장이었다.



📖 청춘이란 나만 내가 가장 아프다고 착각하는 시기

맞아! 내 청춘이 제일 시렸고, 내 청춘이 제일 애닳았었어. 어느 집단을 가더라도 청춘이라 불리우던 10대 후반과 20대를 논하고 있다면 그때는 전부 행복 배틀이 아니라 고난 배틀이 된 것 마냥 각자가 제일 힘들었고 서글펐으며 눈물의 암흑기라 했던거 같다. 알고지낸지 10년도 더 지난 대학 동기들과 이야기 할 때나, 나이차이가 나는 회사 동료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나온 이야기였는데도 본인이 제일 힘들었다고 목소리를 높이게된다. 그리고, 본인이 제일 눈물나게 측은했다는 말도 덧붙이게된다. 청춘이 푸르른 봄 같아야하는데 꽃샘추위부터 시작되는건지 다들 몸서리치게 추웠나보다. 그런걸 보면 이미 꽃샘추위는 진즉 지난거 같으니 완연히 푸르른 봄만 오롯이 느끼면 되겠다.


📖생긴 대로 사는 거고 절대 달라지지 않는다. 바꿀거면 나 자신을 개조하는 게 더 빠르며 이득이다.

나 역시도 타인에 대한 기대치를 낮게 설정하는 편이다. 기대하면 실망도 크고, 계속 바라게되며, 내 마음을 알아주길 기대하게되니 시작부터 기대치를 낮춰 바라는 마음을 꾹꾹 눌러 작게 만들어둔다. 그래야 내 마음이 덜 불편하다. 사람은 고쳐 쓰는게 아니라 하듯 저 사람도 저대로 사라온 세월이 있을텐데 나로인해 짧은 시간 내에 바뀌길 바라면 그건 욕심이고 강요가 된다. 그러니 바라는 마음을 내 앞에 있는 사람에게 하기보단 거울 앞에 있는 나에게 그 감정을 쏟아내면 좋겠다. 그러하면 적어도 나에게 얻어지는 아주 작은 무언가는 남아있을테니 말이다.


저자는 버티고, 참아내고, 온 힘을 다해 오늘을 견디고 있는 내일의 '영웅'에게 바치는 헌사라고 했다. 오늘보단 내일이 좀 더 나을것이라는 기대와 함께, 그래도 한숨 푸욱 자고 일어나면 조금은 누그러질 마음과 깊은 숨 몰아 쉰 다음 다잡아보는 일상에는 한번 해봤으니까 오늘은 좀 덜 버벅거리겠지 라는 마음도 담겨있는 듯 하다. 내일의 영웅이라 칭할만큼 대단한 내가 될지는 장담은 못 하겠지만 오늘의 시련에 눈물 한바가지 흘린 이력이 있으니 내일의 나는 맷집이 좀 더 두툼한 사람이 되어있을거라 기대하게된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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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장면들
오수영 지음 / 고어라운드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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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가 맺음말의 제목으로 적어두었던 '사랑의 참회'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사랑의 장면들은 참으로 다양했고, 어느하나 똑같은 모양새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래서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애틋하고 귀하다. 나의 시절들을 더듬어가며 내가 살아낸 시간과 비슷한 온도를 하는 글을 볼때마다 혼자 추억팔이 하게 만드는 단락때문에 몽글거리는 마음과 함께 '맞아, 그땐 그랬지!'라는 듯 나의 청춘을 다시 데려다 놓은 느낌을 받았다.

지금 사랑을 하고 있으나 이게 사랑이 맞는지 의심이 되는 이들보다는 나처럼 제법 여러 시절을 겪은 후에 사랑의 안정기에 접어든 사람. 사랑이라는 감정의 파도에 심취해 있기보단 잔잔함 속에 평온함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더 많이 공감하지 않을까 싶다. 이미 많은 순간을 접해본 후에 느끼는 안도감과 회상의 기운이 더 많이 스며있어 그런지 내 또래가 읽었을 때 같이 끄덕일 수 있을 장면들이 가득했다.



📖해변의 사람들_ 모든 것은 서서히 순환하며, 뒤돌아서면 지워지는 발자국처럼 순간적이다. 사랑과 삶에 대해 지금보다 더 무지했던 시절에는 단순한 자연현상에 지나지 않았던 많은 일들이, 이제는 모두 말할 수 없는 인생의 내밀한 사연처럼 느껴진다.

노을지는 바다를 보면 어떤 생각을 하곤 했던가?

사랑하던 이와 손잡고 지는 해를 봤던 계절의 촉감? 두손 꼭 잡고 놓지 않으려 했던 애틋함? 익숙함과 진득함으로 가득 채워 또 우린 비슷한 시절을 겪고 있고 내년 이맘때에도 같이 오자고 약속하는 안도감? 같은 장면에 두 남녀를 놓아보더라도 자신이 겪고있는 상황에 따라 그들에게 투영하는 마음의 온도와 감정의 깊이는 다르다. 사랑에 서툰 시절이라면 붉은 노을이 꼭 내가 당신을 바라보는 부끄러운 마음과 불타는 애정의 온기를 닮았다면, 사랑이 진득해지는 시절엔 이 온기를 꺼트리지 않겠노라 다짐하는 확고함이 될 수도 있겠다. 해변 하나를 바라보는데도 수만가지의 생각이 가득하고 수만가지의 이야기를 품어내는게 신기하고 우스운게 당신과 나의 관계이지 않을까. 바다가 품고 노을이 쥐고 있던 진짜 이야기와는 다르게 각자 제 멋대로 이야기해보는 사랑이겠다만 이 파도처럼 이 노을처럼 때론 이 순간을 닮아 계속 함께 하고싶은 마음의 끝은 다 똑같으리라 짐작해본다.



📖사랑의 보호자_ 어항에서 살아가는 물고기에게는 어항이 세상의 크기인 것처럼, 정해진 마음의 크기 속에서 살아가는 사랑에게도 마음은 온 세상의 전부이다. 그리고 그 세상의 넓이와 깊이에 관여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사랑의 당사자인 우리들 뿐이다.

...

...

우리가 사랑에 자발적으로 뛰어든 것처럼 보호도 자발적으로 이뤄져야만 그것이 노동과 강요가 아닌 순전한 의미의 사랑에 가까워질 수 있다고 믿는다.

완독 후 가장 기억에 남았던 사랑, 어항, 물고기, 그리고 그 마음.

어항이 내가 안을 수 있는 사랑의 품이었고, 물고기는 내가 어여삐 키우고 지킬 사랑이라 명명하여 사랑의 보호자라는 이야길 풀어내었다.

내가 잘 기르고 보살펴야하는 존재. 그래야 내 품에서 평온함을 느끼고 오래 함께 있어 줄 이유가 생기는 생명. 티가 나지 않다 하더라도 매일매일 눈길과 손길을 전해보며 허투루 하지 않아야하는 관심과 애정의 기운. 이 유일한 존재의 생명을 꺼트린다면 어항 속 물고기를 보는 낙으로 사는 나 조차도 생이 다할 것이라는 생각을하며 서로의 삶에 보호자로 여기게된다. 일상의 틈에 바지런함을 더해 건강해진 나의 사람과 나의 사랑.

생각해보면 누가 하나하나 꼬투리 잡아내며 감시 한 적은 없다. 내가 좋아서 했던 시작이었고, 내가 기뻐서 하는 행동들이었다. 결국 나 좋자고 시작했던 마음의 부지런함이었으니 비로소 내 어항이라는 품에 안착시킨 후에도 기쁜 마음으로 오래오래 보듬어 주었으면 한다. 노력의 강요, 마음의 갈취 없이 자기의 일은 스스로 하자던 어린시절 학습지 CM송과 같은 그런 익숙한 마음의 부지런함을 간곡히 부탁드려본다.



📖사랑의 두려움_ 어른의 사랑이 두려운 가장 큰 이유는 과연 이 사랑을 책임질 수 있을까 하는 불확실과, 그럴만한 단단단 생활력과 마음을 갖게 될 수 있을까 하는 불안정. 그리고 과거처럼 혼자 살아남기 위해 도망칠지도 모른다는 부끄러운 망설임과, 태연하고 확고한 척 자신을 위장하는 자기기만과 위선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모든 것에는 책임이 뒤따른다 하지만, 어른의 사랑은 더더욱 그러한 무게와 이유가 길게 엮여있다. 어른은 책임 질게 많다. 나 하나 건사하는건 기본 옵션이고, 나를 키워냈던 부모를 향한 사랑, 나로인해 태어나고 꽃피울 생명에 대한 사랑, 나 만을 바라보며 생의 순간을 함께할 사랑에 대한 책임은 눈에 보이는 부피의 가늠이나, 수치로서의 무게 환산이 안되는 묵직함이다. 그래서 내 또래가 하는 현재진행형 사랑은 늘 엔딩에 대한 확답을 받고서야 시작하려한다. 어린시절이야 좋아서 함께 있고 싶고 좋으니까 미래를 약속하지만, 중년의 사랑에서는 이따금 찾아올 한계점과 부분적인 장애물에 대한 명시를 먼저 한 후에 그럼에도 가능한지, 그럼에도 함께 할지를 묻는다. 나도 확신이 없는만큼 당신까지 이 불확실한 생에 손을 끌어당길 수 없다는 마음이다. 이걸 누군가는 두려움이라 하겠지만 또 비슷한 순간을 겪어낸 사람에게는 조심스럽고 미안한 마음이라 느끼는 것이다.



📖옆모습을 바라보다_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 중 하나가 바로 평범한 일상을 지켜나가는 일이라는 것을. 그 일상을 이루고 있는 장면들 중 당연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남들 다 하는 것처럼, 남들 하는 만큼, 남들속에 있어도 티 안 날 정도로, 그러한 평범함은 비범함 만큼이나 눈물나게 어려운 일상이다. 어찌나 그리 많은 굴곡이 있고 많은 위기가 있는지. 얼마나 행복하려고 지금 이렇게 힘든가를 생각하며 헛웃음 치기도 하는데 생각해보면 이 굴곡을 겪지 않길 바라게되는 사랑이지만, 이걸 겪고도 내 곁에 있어줄 사람이라면 온 마음을 다해 사랑해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지 않을까도 생각하게된다. 손에 물 한방울 안 묻히겠다는 약속 보다는 살면서 소소하게 웃을거리를 만들어줄 사람을 찾게되는 이유도 그에 해당하지 않을까.


📖권태롭고 안정적인_ '똑같은 시기를 건너면서 누군가는 지금을 안정기라 부르고, 또 누군가는 지금을 권태기라 부른다. 같은 시기를 전혀 다르게 받아들이는 건 분명 시기의 문제라기보다 생각과 마음의 차이 때문이 아닐까.'

...

...

결국 지금 이 순간을 안정기로 삼을지 혹은 권태기로 삼을지에 관한 모든 결심 또한 연인들의 몫인 셈이다. 자신들의 마음을 아는 건 오직 사랑하는 연인들뿐이므로.

권태기라고 부를 만큼 오래 만나고, 안정기라 여길 만큼 그 사람으로 인해 얻어지는 평온이 있다면 그만큼의 시간이 보장하는 제법 괜찮은 관계라는 증명으로 믿고싶어진다. 싸우기보단 싸울거리를 만들지 않는 것. 상대가 싫어할 일을 이미 알고 있기에 굳이 그러한 다툼거리를 만들지 않는 배려. '내가 그 사람을 제일 잘 아니까!' 할 수 있는 존중의 마음. 그게 긴 호흡으로 그 사람 곁에 있을 수 있는 어항 속 물고기의 삶이라 말하고싶다.


우스개소리로 청춘을 다 받칠 만큼 연애를 했고, 연애 하듯 결혼 생활을 하고 있다보니 각각의 단상들 속에서 나의 서툰 연애시절도 생각나고, 이 사람과 함께했던 순간들이 일시정지된 화면처럼 보이기도했다. 함께 웃는 포인트가 같은 것, 둘이 있을 때 가장 편한 마음, 척하면 척이라고 눈빛만 봐도 목소리만 들어도 알아차리는 감정의 동요. 그러니 사랑의 장면들은 내가 살아온 모든 순간의 찰나라는 것을 느낀다. 그 순간마다 숨은그림찾기처럼 여기저기 잘 숨어서 알아봐달라고 하는지. 숨겨도 숨길 수 없는 사랑이란 놈을 통해 이 사람 없었음 얼마나 재미없는 삶이었을까를 생각하며 다음 회차의 장면에도 꼭 찾아와 주길 바라게된다.

사랑이 완성된 상태로 지속하고 있음을 다시 한 번 느끼게 해주는 문장. 그리고 그 사랑이 잘 지내고 있으며 잠시 방황을 한다 싶어도 곧장 돌아와 내 곁에서 진득히 붙어있어주길 바라게되는 예쁜 찰나를 기대하며 다음 단편은 내가 적어도 될 만큼 괜찮은 사랑을 계속 하고싶어지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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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우리에 불을 지르고 - 제4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전강산 지음 / &(앤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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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띠지 문구 때문에 홀린듯 선택했다. "꼭 성장해야 돼요?" 그러니까요. 이상과 현실에 방황하는 '우리'에게 해주고픈 이야기. 육체적인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이성적인,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레벨업하길 바라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나이에도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여겨지면서 도대체 얼마나 더 성장해야 이런 소릴 안 들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며 약간의 반발심을 갖고 시작했다.


이야기는 어느 젊은 창작자의 초상을 그린 장편이다. 주인공은 유수의 영화제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상에 그럴듯한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이 한번의 성공은 꿈을 이를 수 있는기회로도, 그렇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현실과 이상, 삶과 예술처럼 대립적이고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자신이고자 애쓰는 영화감독의 정직한 고뇌를 손에 잡힐 듯 투명하게 그리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미 평단에서 검증을 받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니 굳이 뭘 더 성장해야 하나 싶지만, 먼저 비슷한 경로를 통해 수상을 했으나 그 길로 가지 않고, 꿈이 아닌 현실에 머문 선배를 보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도 이래야 하나'라는 라는 갈등. 그리고, 현실에 머문 사람이 이상을 맛보기라도 한듯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말에 반발심이 속에서 우글거린다. 결국 나란놈도 당신이 말한듯 나름의 성장을 했고, 그래서 또 이렇게 살아가구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창작의 힘은 영감이 아니라 가난이란 걸 체화한 내가 아니던가.

창작의 힘은 영감이라는 것 보다 당장 내야하는 공과금과 금새 다가올 카드값, 숨 몇번 몰아쉬면 다시 계약해야하는 월세인상 계약 정도가 되겠다. 이건 창작자만이 느끼는 재촉어린 원고 청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 칭하는 모든 성인들이 생산적인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게 만드는 채찍과도 같다. 그래서 내적 고민과는 상반되도록 몸은 출근을 하고있고, 자동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만든다. 역시 꿈을 찾기보단 당장의 가난에서 발을 빼는게 더 중요한 생이다.




📖 하지만 일단은 내가 부족한 게 맞을 테니까...... 내 쓸모를 증명하려면 그의 말처럼 일단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야 했다.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자금의 해소, 그리고 같은 길을 걸어온 선배의 추천, 꿈이 실현된 듯 바로 시작된 현장의 맞춤형 작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 값을 해야하는 자리. 결국 누군가의 입김이 닿아 내가 그 자리에 꽂힌거라면 마땅한 구실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쓸모있는 놈을 데려왔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 유대, 라는 걸 해 볼까? 짧은 순간에 수많은 망설임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났을 때 느껴지는 건,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완전히 멀어져 버린 거 같은 양가적인 불쾌함뿐이니까, 그런 건 가까움이 아니라 오히려 옥죄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냥 이 정도의 거리인 사이로 남는 게 편할 테니까.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동질감. 그래서 친한척이라도 해보며 유대를 쌓아 이 생활을 함에 있어 작은 유희를 느껴보고 싶지만 시작이 어렵지 이게 깊어지면 안하느니만 못한 제 속 까발리기의 과정으로 이어질까 주저하다 망설이는게 일반적인 사회생활 속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공감을 얻어 낼 거 같고, 팍팍한 작업 시간이 좀 더 윤택해질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사담이 길어지면 나의 사사로운 이야기도 꺼내야 할 거 같으니 그냥 입을 꾹 닫게 된다. 그게 사회생활에 잡음 없이 무난히 유지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서비스직도 그러했고, 여자가 많은 직종도 그러했으며, 남자가 대부분인 직종에서도 그건 예외없는 동일 조건이었다. 보는 눈 타인에 대해 평가하는 입은 어딜가나 똑같았다.



📖 내 주관을 없애고 적당히 대표 비위 맞춰 주면서 살았어. 의외로 금방 익숙해지더라. 다시 영화로 안 돌아가도 난 적당히 먹고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거야. 꿈에 대한 애정이 겨우 이 정도였으면 진작 그만두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꿈보다 현실을 찾게되고, 사수의 눈치를 보게되며, 내가 데리고 온 후배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도 신경쓰게되는 것. 꿈은 잘때만 꾸는게 제일 이상적인 꿈이라 여기게된다. 때로는 파고들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 될 수도 있겠다만 열에 하나, 백에 하나 정도의 특출난 인물이며 비범한 무언가를 지닌 존재어야만 가능하니 지극히 평범한 나는 그 축에 못 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내가 보였다.남들이 보면 빨리 포기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고, 오죽 급했으면 다른 길로 빨리 돌아섰을까로 그들의 안줏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선배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닮았으니까. 과거의 내가 너무 잘 보였으니까.



📖 굴욕감이 급여에 포함되어 있는 거구나. 굴욕감 없이 급여 생활을 하려고 기대했던 내가 미친 거였구나. 우리 원장님이 알려 줬어. 나...... 그렇게 성장하는 거래. 다...... 그런 거래. 너도 한 달 동안 그랬지...... 그치?

밥벌이 하는 놈이 한달 간 노고에 대한 댓가에는 많은 것들이 겹쳐있다. 능력치는 기본일거고, 때로는 욕받이 비용, 굴욕감에 대한 보상, 고객의 화풀이 수단, 그로인한 자괴감을 덮을 만한 덮개가 아마 급여로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선배가 빨리 꿈을 포기했고, 진수가 더 고민하지 않고 털고 강사로 옮겨갔을 때엔 다 그만한 댓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라 이해보단 공감을 하게된다. 그딴 굴욕과 싫은소리보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더 애틋한 삶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퇴근 후 목구멍에 털어넣는 알콜이 쓰더라도 순간순간 잊어버릴 요량으로 취하는걸 자처하게된다.


시작은 그럴듯하고 될성부른 싹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유수의 영화제 수상자이며 최초의 여성 수상자. 몹시 거창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이 한번의 성공이 꿈을 실현할 탄탄대로는 될 수 없고, 부와 명성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되진 못한다. 괜히 번지르르한 떡잎에서 황급히 시들어 버릴 것 같고, 주변의 기대감과 주목에 비해 결실이 더뎌 차가운 시선과 외면받으며 점점 그늘로 기어들어가는 꼴이 되는거 같아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된다. 이 즈음이 아마 대학 졸업 시즌에 무수한 면접과 인턴, 사회봉사, 공모전 수상과 낙방을 번복하는 시기에 대한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담아낸 듯 보였다. 2007년과 2008년의 내가 계속 겹쳐지는 걸로 보아 이상화 현실에서 헛도는 청춘을 아주 잘 표현해냈음을 알려주고싶었다.

많은 경험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준다지만 때로는 현실을 더 확실히 알게 만드는 효과빠르고 몹시 쓴 가루약처럼 느껴진다. 알약은 꿀떡 삼키면 그만이지만 가루약은 입에 털어 넣을 적 부터 기침이 나고, 물을 왈칵 삼켜도 입 안에 남는 쓴맛은 한참동안 머물러있음을 느낀다. 그게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상황에선 몹시 쓰다. 그게 딱 지금의 주인공 상황이라 보였다. 꿈은 더 커졌고, 현실은 더 따갑다. 같은 꿈을 꾸던 연인도 현실에 못이겨 곁을 떠났고, 우러러보게되던 선배도 더이상 꿈을 꾸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같은 작업을 하며 한달동안 숙식을 같이 하던 동료들은 제 갈길을 갔으며, 다들 그렇게 살아내고 성장하며 더 괜찮은 구역으로 스스로를 옮겨심기 한다는데 매번 이렇게 갈아타기하면 진짜 완연한 성장의 끝이 있긴 할까 헷갈리기도 한다. 성장만 하다가 성장에서 끝이 날 거 같아서. 수확의 기쁨과 결실의 짜릿함은 모르겠고, 몸집만 키우다 자존감은 더 쭈그러드는 아주 대비되는 효과.

94번 돼지, 나연, 그리고, '나'. 돼지와 우리 중 더 큰 세상에서 신나게 유영하며 성장할 놈은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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