돼지우리에 불을 지르고 - 제4회 넥서스 경장편 작가상 우수상 수상작
전강산 지음 / &(앤드)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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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의 띠지 문구 때문에 홀린듯 선택했다. "꼭 성장해야 돼요?" 그러니까요. 이상과 현실에 방황하는 '우리'에게 해주고픈 이야기. 육체적인 성장이 아니라 정신적이며 이성적인, 그러니까 지금보다 더 나은 인간으로 레벨업하길 바라는 성장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이나이에도 이런 소리를 듣고 있는 내가 한심하게 여겨지면서 도대체 얼마나 더 성장해야 이런 소릴 안 들을 수 있을까를 생각해보며 약간의 반발심을 갖고 시작했다.


이야기는 어느 젊은 창작자의 초상을 그린 장편이다. 주인공은 유수의 영화제 수상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세상에 그럴듯한 시작을 알린다. 하지만 이 한번의 성공은 꿈을 이를 수 있는기회로도, 그렇다고 돈을 벌 수 있는 기회로는 연결되지 않는다. 현실과 이상, 삶과 예술처럼 대립적이고 화해 불가능해 보이는 상황에서 끝까지 자기 자신이고자 애쓰는 영화감독의 정직한 고뇌를 손에 잡힐 듯 투명하게 그리고 있다는 평을 받는다. 이미 평단에서 검증을 받았다고 여길 수 밖에 없는 조건이니 굳이 뭘 더 성장해야 하나 싶지만, 먼저 비슷한 경로를 통해 수상을 했으나 그 길로 가지 않고, 꿈이 아닌 현실에 머문 선배를 보며 '나는 그러지 말아야지'라는 생각과 함께 '나도 이래야 하나'라는 라는 갈등. 그리고, 현실에 머문 사람이 이상을 맛보기라도 한듯 성장하는 기회로 삼으라는 말에 반발심이 속에서 우글거린다. 결국 나란놈도 당신이 말한듯 나름의 성장을 했고, 그래서 또 이렇게 살아가구나를 생각하게 만든다.



📖 선택의 여지가 없잖아. 창작의 힘은 영감이 아니라 가난이란 걸 체화한 내가 아니던가.

창작의 힘은 영감이라는 것 보다 당장 내야하는 공과금과 금새 다가올 카드값, 숨 몇번 몰아쉬면 다시 계약해야하는 월세인상 계약 정도가 되겠다. 이건 창작자만이 느끼는 재촉어린 원고 청탁에 해당하는 것은 아니다. 어른이라 칭하는 모든 성인들이 생산적인 일을 하고 돈을 벌어오게 만드는 채찍과도 같다. 그래서 내적 고민과는 상반되도록 몸은 출근을 하고있고, 자동적으로 사회활동을 하게 만든다. 역시 꿈을 찾기보단 당장의 가난에서 발을 빼는게 더 중요한 생이다.




📖 하지만 일단은 내가 부족한 게 맞을 테니까...... 내 쓸모를 증명하려면 그의 말처럼 일단은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해야 했다.

성장을 할 수 있는 기회, 급한 불을 끌 수 있는 자금의 해소, 그리고 같은 길을 걸어온 선배의 추천, 꿈이 실현된 듯 바로 시작된 현장의 맞춤형 작업은 아니지만 그래도 돈 값을 해야하는 자리. 결국 누군가의 입김이 닿아 내가 그 자리에 꽂힌거라면 마땅한 구실을 해야하는 상황이다. 쓸모있는 놈을 데려왔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 유대, 라는 걸 해 볼까? 짧은 순간에 수많은 망설임이 스쳤다. 하지만 이내 포기했다. 누군가의 비밀을 알고 났을 때 느껴지는 건, 가까워진 듯하면서도 완전히 멀어져 버린 거 같은 양가적인 불쾌함뿐이니까, 그런 건 가까움이 아니라 오히려 옥죄는 것과 다름없으니까. 그냥 이 정도의 거리인 사이로 남는 게 편할 테니까.

비슷한 처지처럼 보이는 사람에게 느껴지는 동질감. 그래서 친한척이라도 해보며 유대를 쌓아 이 생활을 함에 있어 작은 유희를 느껴보고 싶지만 시작이 어렵지 이게 깊어지면 안하느니만 못한 제 속 까발리기의 과정으로 이어질까 주저하다 망설이는게 일반적인 사회생활 속 사람을 대하는 방식이다. 공감을 얻어 낼 거 같고, 팍팍한 작업 시간이 좀 더 윤택해질거라는 생각도 들지만 그만큼 사담이 길어지면 나의 사사로운 이야기도 꺼내야 할 거 같으니 그냥 입을 꾹 닫게 된다. 그게 사회생활에 잡음 없이 무난히 유지하는 길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서비스직도 그러했고, 여자가 많은 직종도 그러했으며, 남자가 대부분인 직종에서도 그건 예외없는 동일 조건이었다. 보는 눈 타인에 대해 평가하는 입은 어딜가나 똑같았다.



📖 내 주관을 없애고 적당히 대표 비위 맞춰 주면서 살았어. 의외로 금방 익숙해지더라. 다시 영화로 안 돌아가도 난 적당히 먹고살겠구나 하는 생각이 막 드는 거야. 꿈에 대한 애정이 겨우 이 정도였으면 진작 그만두는 게 맞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꿈보다 현실을 찾게되고, 사수의 눈치를 보게되며, 내가 데리고 온 후배를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도 신경쓰게되는 것. 꿈은 잘때만 꾸는게 제일 이상적인 꿈이라 여기게된다. 때로는 파고들고 악착같이 물고 늘어지면 될 수도 있겠다만 열에 하나, 백에 하나 정도의 특출난 인물이며 비범한 무언가를 지닌 존재어야만 가능하니 지극히 평범한 나는 그 축에 못 들 것이라는 생각으로 똑같은 생각을 했던 과거의 내가 보였다.남들이 보면 빨리 포기했다고 생각 할 수도 있고, 오죽 급했으면 다른 길로 빨리 돌아섰을까로 그들의 안줏거리가 되기도 했지만 나는 선배의 말을 흘려들을 수 없었다. 너무나 닮았으니까. 과거의 내가 너무 잘 보였으니까.



📖 굴욕감이 급여에 포함되어 있는 거구나. 굴욕감 없이 급여 생활을 하려고 기대했던 내가 미친 거였구나. 우리 원장님이 알려 줬어. 나...... 그렇게 성장하는 거래. 다...... 그런 거래. 너도 한 달 동안 그랬지...... 그치?

밥벌이 하는 놈이 한달 간 노고에 대한 댓가에는 많은 것들이 겹쳐있다. 능력치는 기본일거고, 때로는 욕받이 비용, 굴욕감에 대한 보상, 고객의 화풀이 수단, 그로인한 자괴감을 덮을 만한 덮개가 아마 급여로 켜켜이 쌓여있을 것이다. 선배가 빨리 꿈을 포기했고, 진수가 더 고민하지 않고 털고 강사로 옮겨갔을 때엔 다 그만한 댓가를 기대했기 때문이라 이해보단 공감을 하게된다. 그딴 굴욕과 싫은소리보다 당장 내 손에 쥐어지는 돈이 더 애틋한 삶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퇴근 후 목구멍에 털어넣는 알콜이 쓰더라도 순간순간 잊어버릴 요량으로 취하는걸 자처하게된다.


시작은 그럴듯하고 될성부른 싹으로 스타트를 끊었다. 유수의 영화제 수상자이며 최초의 여성 수상자. 몹시 거창하고 화려하다. 하지만 이 한번의 성공이 꿈을 실현할 탄탄대로는 될 수 없고, 부와 명성을 이어줄 연결고리가 되진 못한다. 괜히 번지르르한 떡잎에서 황급히 시들어 버릴 것 같고, 주변의 기대감과 주목에 비해 결실이 더뎌 차가운 시선과 외면받으며 점점 그늘로 기어들어가는 꼴이 되는거 같아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게된다. 이 즈음이 아마 대학 졸업 시즌에 무수한 면접과 인턴, 사회봉사, 공모전 수상과 낙방을 번복하는 시기에 대한 롤러코스터 같은 삶을 담아낸 듯 보였다. 2007년과 2008년의 내가 계속 겹쳐지는 걸로 보아 이상화 현실에서 헛도는 청춘을 아주 잘 표현해냈음을 알려주고싶었다.

많은 경험은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다져준다지만 때로는 현실을 더 확실히 알게 만드는 효과빠르고 몹시 쓴 가루약처럼 느껴진다. 알약은 꿀떡 삼키면 그만이지만 가루약은 입에 털어 넣을 적 부터 기침이 나고, 물을 왈칵 삼켜도 입 안에 남는 쓴맛은 한참동안 머물러있음을 느낀다. 그게 성장에 도움이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지금상황에선 몹시 쓰다. 그게 딱 지금의 주인공 상황이라 보였다. 꿈은 더 커졌고, 현실은 더 따갑다. 같은 꿈을 꾸던 연인도 현실에 못이겨 곁을 떠났고, 우러러보게되던 선배도 더이상 꿈을 꾸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같은 작업을 하며 한달동안 숙식을 같이 하던 동료들은 제 갈길을 갔으며, 다들 그렇게 살아내고 성장하며 더 괜찮은 구역으로 스스로를 옮겨심기 한다는데 매번 이렇게 갈아타기하면 진짜 완연한 성장의 끝이 있긴 할까 헷갈리기도 한다. 성장만 하다가 성장에서 끝이 날 거 같아서. 수확의 기쁨과 결실의 짜릿함은 모르겠고, 몸집만 키우다 자존감은 더 쭈그러드는 아주 대비되는 효과.

94번 돼지, 나연, 그리고, '나'. 돼지와 우리 중 더 큰 세상에서 신나게 유영하며 성장할 놈은 누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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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 구경하는 사회 - 우리는 왜 불행과 재난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가
김인정 지음 / 웨일북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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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야에 빠삭한 기자가 말해주는 이야기들. 그래서 더욱 가감없이 말해 줄 것 같았고, 눈으로 직접 본 사건과 실태를 책상머리 논쟁으로 끝내지 않을 듯 해서 관심이 갔다. 고통의 재현에 대한 언론인의 자기 성찰만 하는 것이 아닌 동시대 언론 환경에 대한 저항적 성찰이라고 말한 신형철 문학평론가의 이야기도 솔깃했다. 이러한 자극적인 소재가 단순히 '좋아요'로만 표현되는게 맞는건지. 무한정 리포스팅 되어가며 퍼지고 알려지는게 맞는건지. 필터 없이 너도나도 화재거리가 된다며 쉽사리 게시를 하며 단순 눈요기거리로 밀어부치는게 맞는지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해 주는 글 이었다.

이러한 게시물을 너댓개 보다보면 알고리즘은 더욱 자극적이고 날이선 영상과 사건사고들을 꿰어 나를 고통에 무딘 인간으로 만들어버린다. 어느 4월의 봄도 그랬고, 어느 10월의 끝자락도 그러했다. 어느 매체를 돌려봐도 똑같은 영상을 반복 재생시켰고, 필터 없이 쏟아내는 영상과 사진들은 블러처리없는 자극적인 프레임에 가두고 있음을 느꼈다.

그러다 정신차리고 나면 시간이 훌쩍 지나 있었고, 눈앞에 자극 적인 상만 남겨져 일상생활에 피로감을 몰고왔다. 어느순간부터 뉴스를 보지도 않게되고, 자극적인 헤드라인은 휘리릭 넘겨보게되며 굳이 찾으려 하지 않

는 나를 마주 하게되더라. 이미 벌어진 일 이었고, 내가 이 걸 파고들며 수십번 본다 한들 달라지는 건 없으며, 그 상황에 있던 사람들도 알권리와 도움의 손길의 양자택일 상황까지 내가 가늠하며 피로도가 쌓이는 걸 체감했기 때문이다.


보고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세상이니 대규모 구경이 되어버린 뿐인 현재. 거기서 구경만 할 지. 함게 슬퍼하며 내가 손을 거들 수 있는 무언가를 찾아 낼 지에 대한 상황인지와 성찰의 반복. 계속되는 사건과 현상을 나열하며 죄책감은 넘치게 받아뒀다. 이제 이걸로 우리는 방관의 자세로 방조하며 일을 더 키워 갈 것인지 아니면 그 반대의 입장에서 무어라도 해보려 머리를 쥐어 짜 내 볼지는 이 책을 다 읽어 갈 때 즈음 알아서 판단 할 수 있지 않을까.


정보 전달의 목적을 두고 있는지, 아니면 지금 상황에서 화두로 떠오른 이 사건에 대한 많은 언급을 당하며 본인의 계정의 조회수를 올리는 단순한 의도가 담겨 있는지는 계정의 주인 본인보다 퍼다나른 게시글을 보고 있는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고통의 중계인이기보다 고통 중계를 함으로서 얻어지는 개인적인 이득이 더 큰 사람들의 계정은 영상이든 문장이든 감정의 온도가 없다. 그리고 애도의 글 조차 예의상 적어보며 남들에게 손가락질 받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방패막이 활자나열로 밖에 보이지 않았다. 언론도 정보 전달이 목적이라며 이유를 내세우겠지만 이러한 근접적이며 자극적인 영상과 사진을 통해 더 많은 이목을 얻기 위함이었으니 모두가 이득을 위한 자동재생 기능으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보니 이러한 큰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기자와 언론인은 기레기라는 소리를 들을 수 밖에 없었고, 특정 몇몇의 특종 우선 주의가 시청자에겐 피로도가 큰 사건으로밖에 보이지 않게됨을 느낀다. 고통의 재현을 번복하며 이 기운을 유지하는게 맞을지, 짤막하게 전달 후 일상의 기사들로 채워 고통을 덜어내는게 맞을지는 시청자로서도 무엇이 맞다 단정 짓기 어렵다. 알 권리와 더불어 이 사건의 목소리를 키우는게 모두에게 이로울지, 자극을 키우지 않고 각자의 선에서 빨리 수습을 하는게 나을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매번 이걸 잘한다고 할지 그만해라 할지는 누구에게도 권한은 없어보인다. 다만, 인간이라면 자각을 하며 본인 스스로가 정도의 선을 지켜주길 바라는 것 외엔 힘이 없음 씁쓸해질 뿐이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_ 고통의 중개인인 동시에 현장의 목격자로서, 두 역할에 따라붙는 윤리적 딜레마의 촘촘한 그물망에서 도무지 실패하지 않기 어려워진다는 건 확실해 보인다. 촬영의 의도부터 영상을 공유하는 매체와 방법을 결정하는 것까지 윤리가 개입할 수 있는 빈틈은 너무 많고, 미끄러질 틈도 많다.

저널리즘이 갖고있는 난제겠지. 이 정보를 소비할 부류에게 정보와 지식 전달을 함으로서 더 나은 판단과 확실한 선례를 남길 것인가는 제작자의 의도일 것이고, 다르게 받아들일 청취자는 제작자가 의도한 것의 틈을 노려 컨트롤 되지 않은 부분만 공략당하는 언론 총알받이가 될 것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좋아요와 리트윗, 그 이상_ 고통을 판다. 고통을 본다. 고통은 눈길을 끌고...... 때로는 돈이 된다. 고통이 자주 구경거리가 됐다는 건 모두 아는 사실이지만, 이제 고통은 콘텐츠가 됐다. 콘텐츠가 된 고통은 디지털 세계 속에서 클릭을 갈망하며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그 산업의 틈바구니에서 다른 이들과 함께 버글대다 보면 나도 모르게 고통을 착취하거나 구경하고, 모른 척 지나친다.

더 큰 자극, 더 과감한 영상을 갈망하듯 손가락은 다름 페이지로 끌어올리게되고 시간가는 줄 모르고 같은 것만 반복하게된다. 타인의 고통은 모르겠고 내가 보던 프레임에서 다른 각도로까지 찾아보며 감정에 무딘 인간이 됨을 느낀다. 그렇게 타인의 고통을 긁어 모아서 남는건 뭘까? 내가 그 상황을 더 잘 꿰뚫어보는 능력이 생겨 사건 해결의 실마리를 제공 할 수 있을까? 그도 아니면 사건 수습 현장의 헛점을 찾아내어 제보를 해서 잘잘못을 가려낼 날이 선 판단을 할 수 있는 걸까? 안타깝지만 그러한 능력은 전문가가 더 잘 하지 우리는 그저 영상 소비와 고자극에만 특화되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처음 발 들여 놓는게 어렵지 빠져드는 건 한순간이라는 걸 실감한다. 고통에 무뎌진 채 식별이 어렵다면 그냥 안본눈으로 사는게 더 나은 삶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빠르게 바뀌는 시각적 효과보다 청각적인 앵커의 보도에서만 끝이 났을 때 더 확실한 판단을 할 수 있다는걸 느꼈다. 구경거리 생겼다고 머리 들이민기 보단 그저 귀를 열고 있는 편을 택하고 싶어진다.



📖재해는 어떻게 문화가 되었는가_ 사실이확인되지 않은 수식을 붙이다가 유가족의 분노를 사기도 했다. 어쩌면 연민을 끌어내기 위해 처참한 묘사와 더불어 '안타까운 사연'까지 동반해야만 비로소 산업재해 기사도 관심을 받을 수 있을 거라고 매체들은 지레 자포자기하고 있는 게 아닐까.

누구를 위한 포장인가를 생각하게 만든다. 사실만을 보도하되 약자의 편에서 서는 방식. 정보 전달을 하되 좀 더 극적인 요소를 통해 소비자가 빠른정보 흡수를 유도하는 방향. 그러한 방식을 위해 첨가되는 사항은 사실에 기반되어야 하지만 때로는 이렇게 기사가 아니라 소설을 씀으로써 모두가 불편한 상황을 이끌어 내기도 한다. 이건 자선행사를 하며 ARS 콜을 받으려 하는게 아니다. 정확한 정보 전달과 함께 노동환경에 대한 문제점을 고발하는 것에 포커스가 맞춰지고, 이를 쉬쉬하는 업주에 행태를 알리는데 중점을 둬야하는데 불쌍한 우리 소녀가장 좀 도와주세요 라는 식이 되어버리니 역시 언론이 언론 했다 싶어 혀를 차게 만든다. 사실만 던져 줘도 우리는 충분이 분노하고 현 실정을 바로잡길 원하고 있다. 이놈의 집구성이 이지경인걸 모르지 않는 국민이다. 이지경 되어버린 집구석 까발리는것에 통쾌한 것이지 누가 더 불쌍하게 사는지 불운 배틀이 아니니 매체에서는 스스로 소설가를 자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모르고 산 세월도 아닌데 너무 우리를 과소평가 하며 세상물정 모르는 사람 취급한 거 같아 떫은 표정을 짓게된다.


이렇게 말하며 쓴소리를 보태고 있지만 나역시도 고통 방관자였다. 겪어 본 적이 없는 사건들이 대부분이었고, 설령 있었다 한들 직접적으로 와 닿지 않는 선에서 멈췄던 사건들 뿐이었다. 그러니 걱정은 되지만 코앞에 닥친 문제가 아니니 안타깝긴 한데 내가 뭘 어떻게 하겠어라는 생각으로 딱 거기서 멈추게 됨을 느낀다. 그래서 다들 국민들도 공범이라며 기자와 언론, 그리고 알면서도 알기만하는 국민에 대한 질타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언론에 대한 고민은 이제 업계에서만 하는 고민이 아님을 느낀다. SNS가 활개 치고, 1인 미디어에 대한 관심도가 높아졌으니 생산과 소비의 범위가 광범위해짐을 자각하게된다. 정확한 인과관계도 모르면서 자신이 진짜 봤고 겪었던듯 퍼다 나르고 말에 살을 붙이고 몸집을 키우는 방식은 당신들이 그렇게 혀를 차며 말하는 기레기와 다를바가 없는데 직업 분류에 언론인과 국민으로 나누며 자신은 아니라는듯 손사래를 치는 걸 보게된다. 미디어가 가진 힘의 크기만 다르며, 시청하는 수치만 다를 뿐 똑같은 미디어 확성기임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다. 고통을 외면하는 사회는 더더군다나 안되겠지만 고통을 구경하며 손가락질하는 사회로 몸집을 불리는데에 일조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을 갖게된다.

오늘도 다양한 SNS에 살고 있는 나와 당신들. 그래서 그 중 퍼다 나르고 외면하기 바쁜 시간. 또 사실인냥 착각하며 살고 있는 중 진실은 무엇인지, 실로 문제가 되고 있음에 주목하고 신경을 써야 하는건 또 무엇인지 알 긴 알고 보는지 스스로에게 물어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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셋셋 2025
김혜수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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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출판사, 독자 셋의 만남을 셋(SET)한다는 의미를 품은 시리즈. 셋의 조합으로 셋트로 구성한 셋셋. 역시나 언어 유희에 능한 사람들 같으니라구. 말장난 마저도 요로코롬 의미를 부여해 특별하게 만드니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냐구.

세상에 이야기꾼은 너무나 많지. 내가 아는 재담가들 보다 숨은 고수들을 만나게 해주는 자리라 여기니 카페에서 책을 펴 보는 이 시간이 쏜살같이 사라지지 않을까 예상해본다.


총 여섯 편의 소설은 구원을 이야기한다고 하성란 소설가는 전했다. 다양성과 완성도에 감탄하게 될 것이며 그 고군분투의 과정이 아프게 와 닿는다고 말했다. '어쩌면 구원 같은 것'에 대한 이야기. '진심으로 믿는 사람만이 낼 수 있는 목소리'를 활자로 녹여낸 페이지들.

책을 읽기 전 구원이라는 단어를 다시 생각해본다. 어려움이나 위험에 빠진 사람을 구해준다는 명사를 쥐고 각각의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리고 완독 후 구원이 가진 또 다른 뜻을 살펴보며 구해주는 것 만이 아닌 아득하게 멀고 오래된 자신의 존재에 대한 구원을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를 통해 생각하게 만들었다. 혹은 사람이 죽은 뒤에 그 혼이 가서 산다고 하는 세상의 구원을 생각하며 마지막 단편 '경유지'가 적힌 페이지를 뒤적거려 보기도 했다. 그래서 구원이 필요했고, 그렇기에 '셋셋 2025'를 통해 구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여름방학_ 우리는 눈칫껏 알아서 자라고 있었다. 어른이 되어 그때를 돌아보니 헛헛한 마음이 든다. 아이들이 눈치껏 자라면 분명 무언가를 놓친 상태로 자라버린다는 걸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그 때 놓친 것들은 지금에 와서 다시 찾으려 해도 잡히지 않는다.

어린 시절 돌봄의 결핍은 시간이 지나도 아물지 않는 상처로 남아있다. 누구에겐 다정한 양육자로 인해 쉽게 배우고 찬찬히 같이 했을 순간들이 이 아이들에게는 또래에게 급급히 배우고 어딘가 모르게 어설프게 흉내만 내는 것들로 빈자리를 들키게 된다. 아버지의 사망과 돈으로 얽힌 친척들의 감시에서 벗어나기 위한 야반도주의 이사. 살 붙이고 의지할 어머니는 하루하루 먹고 사는 것에 빠듯해 자신을 돌봐줄 겨를이 없다. 보살핌을 기대 할 수 없는 여건은 생리대를 쓰는 방법부터 정수리의 쉰내를 말끔히 제거 할 수 있는 머리감는 방법까지 어느하나 쉬운 것이 없다. 그러니 눈칫껏 살아야하는 삶이다. 어린 시절에도 그러했고, 앞으로도 영영 주변을 의식하고 어깨넘어로 배우며 몰라도 아는척 살아야하는 둥둥 떠있는 허깨비로 자란다. 감아도 감아도 전지현 향이 나지 않고 정수리 쉰내가 나는 찐덕한 결핍의 딱지로 들러붙어있다.



📖동물원을 탈출한 고양이_ 나는 엄마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나를 봐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엄마는 이내 뒤돌아 저 멀리 걸어간다. 어떤 기억은 감옥 같다. 이곳에 갇힌 나는, 치아 곳곳에 낀 땅콩 가루들과 까진 입천장의 비릿한 피맛을 음미하며 멀뚱멀뚱 선 아이가 되어버린다.

아픈 노모를 돌본다는 일은 쉽지 않다. 자신의 세상을 살아야함은 동시에 시간을 역행하는 엄마의 시간을 같이 살아주어야하니 전진과 후진을 반복하는 살아내기는 버텨내기와 다를바가 없다. 엄마의 시간은 계속 뒤로가고있고, 아이가 되어버리며, 그렇게 오빠가 있었던 시간까지 단박에 뒷걸음질 치며 나를 눈물나게 만든다. 시간이 많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맛동산을 손에 쥐어야 이유가 그 때 가장 행복했었다는 걸로 표현하고 싶다면 엄마에게 간절히 바라

고 싶어진다. 물 먹은 솜처럼 몸이 묵직해져도 나갈 수 밖에 없던 산책처럼 서로에게 그렇게 당연한 이유의 사랑이었다고.

.... 여담이지만 구병모 저자의 있을 법한 모든 것이라는 책의 단편인 니니코라치우푼타가 떠오른건 기분 탓이겠지...? 독자들 중에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한 사람이 있으려나?



📖아이리시커피_ 내가 아니어서 다행이라고. 돌이켜보면 엄마는 늘 이런 식이었다. 희수가 애써 감추고 싶은 마음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어디서나 있었을 법한 이야기. SNS에서 돌아다닐 듯한 안타까운 죽음. 채 피어나지 못한 청춘의 작별. 언제부터인가 이런 죽음이 흔해지기도 해서 무뎌진게 아닌가 싶어 인물들과 일면식 없는 나란놈이 챙겨보는 애도의 시간. 그냥 여기 나오는 희수, 소미, 소미 모친이 다 짠하다. 가엾다는 말보다 짠해서 어찌하나 싶은 생각으로 중얼거리게 되는 인물이다.

희수가 운영하는 카페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 소미. 괴한이 찾아와 칼부림을 하여 소미는 살해 당한다. 바로 곁에서 목격한 희수는 죽어가는 소미를 보고도 대처에 미흡했던 터라 방관했던 자신을 자책하고 살리지 못한 무능함에 고통스러워한다. 칼을 들지 않았지만 곁에서 할 수 있는게 없었던 방관자라는 마음에 힘들어하는게 그늘진 얼굴에 다 써있다. 그럼에도 엄마는 희수에게 마음을 숨기지 않고 입밖으로 꺼내어 위와 같은 말을 뱉어낸다. 당신 딸이 겪을 마음의 고통보다 당신 눈 앞에 있는 딸의 존재의 안도와 동시에 타인의 죽음에는 마음을 쓸 생각없는 이의 말에 희수는 한번더 자책의 구덩이를 파고들어간다. 너는 살아더 다행이지 않냐며 교회에 떡을 돌리려는 말에 정 떨어지는게 이런거구나 싶은 마음으로 엄마를 흘겨보게된다. 그에 반해 마음 둘 곳을 못 찾는 희수를 위로하는 소미의 어머니.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유족이 건네는 위로에는 울음을 그치기 보단 더 꺼이꺼이 울게 만드는 슬픔의 응어리가 왈칵 쏟아지게 된다. 살아 남았기에 어쩌면 더 긴 슬픔의 날들을 버텨야 할 소미 모친과 희수. 소미가 남긴 물건 하나에 또 울컥하는 마음도 있겠지만 그 덕에 소미를 한번 더 떠올릴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는 두 사람. 그렇게 애도와 추억할 구실로 각자의 마음에 든 상처를 꾹꾹 눌러 남은 사람이 살아내도록 하는 과정을 담아두었다.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반응들이기에 더욱 예민하게 봤고, 가장 기억에 남았으며, 가장 애틋해지는 구원의 방식이었다.


어떤 이야기는 지극히 평범하고 어디서든 들어 볼 법한 이야기처럼 담아두어 훌훌 읽혔다. 그리고 또 어떤 이야기는 내 주변 인물중 한 사람이 차마 말하지 못하고 살아냈을 법한 시절을 담담하고 짤막하게 말해주어 감질나기도 했다. 술김에 하는 말이지만 술의 힘을 빌려 담담하게 그 때 힘들었고 아팠다고 툭 내뱉는 투정같아 마음이 쓰이기도 한다. 겉으론 아무렇지 않은 듯 살지만 때때로 드리워지는 그늘에서 말 못할 이야기가 있구나만 짐작하다가 과자봉투 하나에 눈빛이 서리는 걸 보니 뭐가 있긴 하구나 싶어 내가 되려 밤잠 설치게 만드는 순간들까지. 특별하지 않더라도 공장에서 찍어내듯 모든게 똑같을 수 없는 우리의 삶을 아무렇지 않게 던져주어 울컥하게 만드는 능력이 있다. 오랫동안 고심했을 속도감과 몇번이고 걸렸을 구구절절한 이야기들. 과하게 광광 울어제끼기 보단 속으로 쟤를 어떻게 위로해줘야 하나 머리 뜯게 만드는 아픔이라 색다르게 느껴졌다.

작가가 글을 내었고, 출판사가 이야기를 퍼뜨렸고, 독자인 내가 그 덕에 단박에 읽고 아주 길게 고민하게 만들어주는 셋트구성. 이정도면 이번 셋셋의 조합도 잘 짜여진 삼박자라 말해주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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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폴라 일지
김금희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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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획한 독서 리스트가 있었으나 순서가 뒤바뀌게 되었다. 작년에 출간된 김금희 저자의 대온실 수리 보고서를 챙겨보려고 염두해 두고 있었으나, 이번달에 출간된 '나의 폴라 일지'는 무심코 보게된 쇼츠영상의 인터뷰와 겹치는 부분이 많아서 이걸 먼저 봐도 좋겠다는 생각을 갖게 만들었다. 최근에 방송된 토크쇼의 일부였는데 남극세종과학 기지의 37차 월동연구대 대원들의 이야기였다. 그 파트를 전체 다 보지 못했으나 1년만에 돌아온 대원들의 이야기와 나의 폴라 일지 책 표지는 어딘가 많이 닮아있는 형상을 하고 있었다. 대원들의 복장이나 책 표지의 사람의 옷차림과 배경. 알고리즘이 나에게 어서 김금희의 최근 에세이부터 읽어달라고 종용하는 기분이라는 점. 그리고 입춘이 오기 전 다시금 추워진 동장군의 기세까지. 모든 여건이 한 겨울의 중심에 서게 만들었으니 나 또한 활자들의 세상이 알려주는 겨울의 꼭대기로 같이 올라가기로 했다.

작가 김금희의 세 번째 산문집이다. 고뇌하고 사색하는 것, 주변을 바라보는 시선을 적어낼거라 여겼던 작가의 에세이겠거니 싶지만 국내 소설가로 사상 최초로 남극 체류기를 담아 왔다. 어? 남극체류? 연구하는 연구자의 신분이 아니라 작가도 간다고? 라는 의문을 갖게하는 체류기. 저자는 작가가 되기 전부터 꿈꿔온 남극 기지 방문이라 책 소개를 하며 인터뷰에 응했다. 한겨레의 특별 취재기자의 자격을 부여받음으로써 극적으로 가능해졌다. 위촉 후 극지연구소에서 파견하는 하계 연구 대원이 받는 훈련에 준하는 생존과 안전 교육 과정을 여름 내내 수료한 뒤 2024년 2월 남극 땅을 밟았고 그간의 기록이다.

근 한 달 동안 직접 남극 세종 기지에 체류하며 그곳에서 서식하는 동식물들을 대면함은 물론 극지에서 행하는 연구와 이를 수행하는 세계 각국의 사람을 취재하고 그 깨달음을 이 책에 남겨두었다. 한겨레의 기자 자격으로 간 만큼 10개월간 연재를 했고 이후 전면 개고를 거쳐 이 책으로 나온 것.


주권도 화폐도 국경도 없는 곳이자 세계의 끝. 그리고 인간이 상상 할 수 있는 지구의 가장 먼 곳이자 아스라히 여겨지는 얼음 땅. 연구자의 시선이 아니라 소설가의 시선으로 보는 기록은 아무도 표현 해 낸 적이 없었기에 더욱 기대 할 수 밖에 없는 글. 연구하고 사색하는 사람의 문장이 아니라 '사는 것'과 일상을 만들어 가는 것에 감정의 촉을 세워 적어둔 단어의 조합. 그래서 궁금했다. 문인의 시선에 담기는 남극은 같은 백색의 풍경이라도 조금은 다르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이 컸고, 태어나서 내가 가장 잘한 일이라는 에필로그의 제목을 훑어보았을 때 꿈꾸던 걸 이뤘을 때 담뿍 얻어진 성취감의 표현은 어떨지 기대하게 만드는 초입이었다.



📖이상한 관찰자_ 눈으로는 망원경을 바라보았지만 머리로는 내 마음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왜 뭔가가 석연찮은지를. 그런 끝에 인정해야 했다. 나 역시 누군가에게 불쾌감을 주고 실수하고 잘못하는 인간이라는 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는 '뼈아픈 사실'이었다. 동시에 내가 여태까지 해온 패턴대로 남극 생활을 하면 절대로 안 된다는 경각심도 들었다.

인간이 주인행세를 하며 머무는 곳이 아닌 구역. 각자의 역할을 다 하며 공동체 생활을 해야하고 그러한 상호작용에 익숙해져야 하는 환경. 하루의 일과를 묻고, 보고를 하는 것에 습관이 되어야하는 체계가 잡혀인 공간. 저자는 적응해야했고, 맞춰가야 함을 터득한다. 예전과 똑같은 방식을 고수해서는 안되는 곳이었다. 타인이 건네는 조심스럽고 걱정스러운 안부에 예민함 대신 그럴수도 있었고, 그걸 그제서야 알아차린 자신을 탓하긴 하지만 금새 적응해갔다. 진즉부터 자신의 터전인냥 살아온 물개나 해태, 펭귄들의 공간에 불쑥 발을 들이민것도 저자 본인이었고, 오랜 기간동안 이 남극기지에서 그들만의 룰을 만들어 공생하던 관계에 취재기자라는 역할로 비집고 들어온 것도 저자 본인이었다. 그러니 이상한 관찰자로 끝까지 겉돌아서는 안되는 조건이었다. 이상한 관찰자로 시작하였더라도 의가 상한 관찰자로 끝나서는 안됨을 알아가는 과정이었다.



📖고래의 첫 숨_ 나는 남극에서 그냥 '나'로 머물러 있는 것이 좋았다. 동료 작가들에게는 미안하지만 근처에 작가가 없어서 좋았고(?) 예민하게 일상을 대하지 않고 무던해지는 마음이 좋았다. 세밀하게 세공하던 일상을 아주 긁은 붓으로 쓱쓱 살아내는 기분이었다. 원고 작업보다는 내 발과 내 손과 내 눈으로 행하는 경험들이 우선이었다.

가고 싶어도 갈 수 없는 공간이며, 가족의 반대가 있었지만 자신의 능력으로 내딛을 수 있는 또 다른 세상이라 여긴 곳에서의 일상. 그러니까 저자는 새로운 글감을 위한 것과 문인으로서 보게되는 남극의 세상을 전달하는 목적인 동시에 숨통을 트이게 할 숨구멍 같은 세계가 남극으로 보였다. 피부로 와닿는 재촉이라던가 신경을 써가며 돌봐야 할 무언가에서 멀어진 곳. 오롯이 자신을 돌보는데에 집중하며, 그날그날 주어진 대원으로서의 임무만 완성하면 되는 그런 세상. 그래서인지 저자가 남극 기지에서 적은 글들에는 쥐어짜내며 고민한 흔적보다는 바로바로 와닿는 감정의 착실한 대답이 더 많다는 느낌을 준다. 대원들간의 관계라던가 날씨와 자연이 주는 현상에 대한 즉각적인 표현. 그래서 그런지 정말 근무 일지이면서, 아이들이 쓴 일기같은 느낌을 준다. 오늘은 무엇을 했고, 무엇을 먹었으며, 밖에서 누굴 만났고, 이러한 마음이 들었다. 그래서 좋았다라던가 그래서 나는 오늘 반성을 하며 내일은 안 그래야지 라는 다짐을 해 보았다. 는 식의 일과 반성문 같은 뉘앙스.

저자가 취재의 목적으로 남극을 가지 않았더라면, 위험한 곳이라며 부모가 말리는 상황에서 순순히 수긍을 했더라면 이토록 담담하게 마음 터 놓을 순간이 몇번이나 되었을지를 생각하게했다. 항상 이야기를 지어내야하는 부담감이 늘 있을테니 말이다. 후반부에 저자가 했던 말이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데 남극에 오고 싶어 한 정확한 이유를 그제야 알 것 같았다.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고 싶어서였다.'라는 문장으로 그간 말하지 못했고 표현하기 주저했던 것들을 뱉어낼 대나무 밭이 필요했던건 아닐지. 그리고 다른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 볼 수 있는 기회와 다른 공간에서도 살아 갈 수 있다는 확신을 얻기 위함은 아니었을지를 가늠해본다. 모든 조건이 다 갖춰진 곳에서도 외로울 수 있고, 행복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을 경험했고, 모든게 갖춰지지 않은 곳에서도 뿌듯함을 느끼며 기쁨도 얻을 수 있다는 아주 상반된 삶을 살아 본 것 만으로도 다른 마음으로 살아도 된다는 확신을 준 느낌이 들었다.

에필로그를 통해 또 한번 저자는 다 갖춰진 곳에서도 힘들 수 있음을 바로 직시하는 순간을 마주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버틸 재간을 마련해왔기에 그 남극의 여름을 떠올리며 견뎌내 주었다. 그 '잘한 일' 덕에 우리는 또 저자의 이야기를 얻어 들을 수 있겠지.

무언가가 가로막혀 있을 즈음. 나는 잘 걷고 있다 싶었는데 계속 제자리걸음만 하고 주위만 뱅뱅 돈다 느껴질 즈음. 저자가 했던 것 만큼의 극단적인 곳에서 다른 마음을 찾을 순 없겠지만 각자가 잘했다며 스스로 궁디 톡톡 쳐 줄 만한 '잘한 일'의 숨구멍을 찾길 바란다. 그리고 나도 그러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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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자를 말하는 사람
안규철 지음 / 현대문학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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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역시 안규철님을 안 것이 BTS의 RM님 덕분이었다. 2021년이었지? 부산 국제갤러리에서 개인전을 여실 즈음 전시장에 온 남준님. 전시에 맞춰 사물의 뒷모습을 출간한 상태였고, 남준청년이 책에 사인을 해달라 요청을 했었고, 그 후 인스타그램을 통해 게시된 사진으로 인해 기존 부수의 10배 정도를 더 찍고 번역출판을 했다는 일화. 예술에 대한 시야를 넓혀주는 아이돌 덕에 나도 찾아보게된 작가님.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평범한 물건들을 변형하여 관객의 질문을 유도하는 사물을 만드는 사람. 너무나 익숙해서 우리가 주목하지 않는 일상의 물건들에는 사람들의 생각과 우리를 둘러싸도 있는 세상의 모습이 있기에 보는 이들에게 새롭게 발견하게 하려는 작업을 하는 사람.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미술의 전통적인 역할을 삶과 세계를 사유하는 것으로 확장하려는 의도를 가진 활동가의 글이다.



일과 공부, 사람과 사물에 대한 57편의 깊은 사유들과 스케치. 전작 '아홉 마리 금붕어와 먼 곳의 물', '사물의 뒷모습'에 이어진 3부작 연작 에세이라 할 수 있는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은 앞의 2부작에 담아낸 고민들을 더 깊이 있게 천착함함과 동시에 퇴직 이후 마주하게 된 새로운 일상에 대한 솔직한 사유를 담담하게 적어 두었다.

총 다섯 장으로 구성되어있으며 각각의 단락에는 그 그림자를 갖고 있는 본질, 그러니까 본 형상을 이루고있으나 드러나지 않았던 이야기들을 끄집어내어 사물과 저자 자신이 만났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진짜 이야기를 짤막하니 담아내었다. 각각의 형상이 알려주는 이야기는 그리 길지 않다. 이 또한 사물 너머의 그림자 일부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모습으로 인해 우리는 또 나름의 이야기를 유추해보기도 하고, 내가 사물을 바라보는 또 다른 갈래의 이야기를 할 수 있도록 말을 틔워주는 느낌을 받게한다.




📖감자_ 빛이 없으니 화려한 색채도 필요 없고, 누구에게 보일 것이 아니니 반듯한 모양도 필요 없다. 각자의 고독과 침묵 속에서 그저 미래를 기약하며 단단히 안으로 뭉쳐진 울퉁불퉁한 덩어리가 되는 것으로 충분하다.

식물이 결실을 맺는 것에 대해 사과와 감자를 두고 상반된 표현법을 알려준다. 시작점은 햇빛과 흙에서 양분을 끌어모아 살아가는 삶인 것은 동일하나 지상으로 드러나며 약탈자의 간섭이 있음에도 그 대가로 삶을 이어가는 사과의 삶, 약탈자를 피해 지하로 내려가 햇빛도 바람도 새소리도 없는 어둡고 축축한 흙 속에서 양분을 저장하는 일에만 전념하는 감자의 삶을 덧붙여 극명하게 설명한다. 안으로 파고 든다고해서 멈춰 있는 것도 아니며, 표면적으로 눈에 띄지 않는다 하여 소흘함이 있는 것이 아닌 무던한 생장. 그걸 보고 코로나 시대에 집 안에 갖혀있던 자신을 투영한다. 칩거했던 삶이 그것의 생장과 다르지 않은 환경이니 애써가며 자라던 노력을 생각하게 만든다. 자신 또한 그리 한다면 제법 괜찮은 수확물을 얻을 수 있다는 기대를 갖게하는 마음. 그저 자라는 것에 대해 무던하게만 인식하던 사람에게 조건에 대한 투정 없이 나만 무던히 애쓰면 될 것이라는 해탈의 한마디를 건네는 감자 이야기.


📖나무_ 머무는 사람에게는 의자가 필요하고, 떠나는 사람에게는 노가 필요하다. 머물기를 원하면서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는 자, 그래서 온전히 머물지도, 온전히 떠나지도 못하는 자의 모습이 여기 있다.

목재상에 빼곡하게 쌓여있던 나무들이 머물게 될 장소와 시간과 세월을 생각해본다. 시작은 땅을 딛고 꼿꼿했던 나무였을테고, 누군가의 손길과 정성을 통해 모습이 변하고, 용도가 달라지며, 그 형상으로 살아갈 시간까지 가늠 할 수 없도록 다양해질 이후의 쓰임들. 이미 나무가 뽑히고 다양한 모양으로 재단이 되어지니 생(生)이라 할 순 없겠지만 살아가는 생이라 한정짓기 어려운 그 너머의 다양한 삶의 연속성들. 머물기를 원한다면 끊임없이 다른 곳을 꿈꾸며 변화됨을 두려워 하지 않는다면 나룻배가 되고, 수레가 되기도하며, 타오르는 불꽃이 되었다가, 천 길 땅속에서 아무도 기억하지 않는 검은 석탄으로서의 제법 많은 삶도 살아갈 능력을 얻을 수 있을 거라는 기대감을 가져본다. 다만 여기에는 전제 조건이 붙겠지. 멈춰있는 것에 가득한 평안을 바래선 안된 다는 가장 큰 조건.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_ 나의 젊은 날은 남들처럼 예와 아니오를 가르느라 다 지나가버렸다. 나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

시 한 구절을 인용함으로 인해 시작되었다고도 할 수 있는 이 책의 진짜 이야기. 파울 첼란의 '그대도 말하라'라는 시에서 '마지막 사람으로, 그대의 말을 하라. 그러나 그 말에서 예와 아니오를 가르지 말라. 그 말에 방향을 주어라, 그림자를 주어라'라는 문장. 그리고 마지막 구절이었던, '그림자를 말하는 사람이 진실을 말하는 사람'이라는 것에 뼈아프게 다가온 저자의 시절들. 그는 자신의 말에 그림자를 준다는 생각은 해볼 겨를이 없었다고 했다. 그리고 지금 와서 생각해보니 너무 늦었음에 아쉬워했으나 독자로서 바라볼 때엔 문장을 통해 자각하며 자신의 삶에 빗대어 '이렇게 살지 말아야지'를 새겨보는 것 자체가 대단하다 말해주고 싶다. 살아온 날이 더 많아서 갑작스레 삶의 방식을 바꾸라 종용하는 이도 없을텐데 반성하고 고치려 애쓰는 마음을 보면 여전히 그가 사유하는 모든 것은 다른이들보다 좀 더 긴 청춘의 시간을 살고 있다고 느꼈다.



📖왼발과 오른발_ 제자리에 멈춰 있을 때는 이런 분업이 필요 없다. 그러나 앞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그림을 그리든 글을 쓰든, 불확실한 미래로 발을 내딛는 사람은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이 일을 할 때 나의 왼발은 무엇이고 오른발은 무엇인가. 나는 어디에 발을 딛고 어디를 향해 발을 내딛는가. 이것이 실패의 위험을 감수할 만한 전진인가. 이 모험을 감당할 만큼 내가 단단히 땅을 딛고 서 있는가.

생각해보면 의식해서 숨을 쉬고, 의식해서 왼발과 오른발을 교차해가며 걷지 않는다. 익숙하고 자연스러우며, 으레 당연한 일 인 것 처럼 행하게되는 것들 중 하나다. 하지만 그걸 매번 자각하며 예의주시해야 하는 순간이 오기도 한다. 모든 행위에는 영원이 없으니 말이다. 숨쉬는 것과 걸어 나아가는 것도 이러한데 하물며 삶을 살아가고 어떠한 목적을 갖고 노력이라는 마음을 쏟아야 하는 거라면 오죽할까.

한 발은 땅을 딛고있고, 다른 한 발은 허공에 떠 있는 불안함. 그건 걸음마를 막 시작한 아이도 그러하고, 낯선 여건에 떨어진 어른도 동일한 아찔함을 얻게된다. 그렇다고 영영 한 쪽 발만 띄워 둘 수도 없다. 움직여야 다른 발이 평온을 찾고 또 다른 발은 또 다른 세상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된다. 머물기만 하면 매번 똑같고 지루하니까, 그 고루한 삶보다 자분자분 거리게되지만 조금씩 스텝을 밟아 나가는 삶에 재미를 붙여보면 좋겠다.



📖짧은 만남, 긴 이별_ 외로움에 대한 내성은 전적으로 아버지의 유산이다. 그가 보여준 삶이 그렇고, 또 나를 일찌감치 떠나보냄으로써 독립적인 인간으로 키운 그의 결정이 또한 그렇다. 내 속에는 나의 아버지가 그대로 살아 계신다.

비단 외로움 뿐이겠는가. 저자 자체도 그러하고, 그를 비추고 있는 빛 뒤에 자리잡은 그림자 마저도 아버지가 남겨둔 생의 일부이기도 하다. 함께 한 시간이 길지 않다고 닮지 않거나 사랑을 받지 못한 것도 아니다. 당신이 할 수 있는 선에서 가득히 애쓰며 풀어냈을 마음을 알고 있기에 내 속에 나의 아버지가 그래도 살아있다고 여기는 걸로 보였다. 당신이 애써왔을 마음을 아니까, 그러니까 시간이 지남에도 애틋해지는게 아닐지.


사물을 마주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글들. 일반적으로는 그것에 대한 쓰임새나 외형에 대한 직관적인 것들로만 생각하기 마련인데 저자는 자신의 상황에 투영하는 것을 시작으로 그것이 자라왔을 환경과 버텨왔을 시간도 생각하게 만들었다. '사유하다'에 대한 정확한 예시를 마련해 주었고, 두루 살핀다는 것, 부러 미사여구만을 늘어뜨려 허울만 좋은 껍데기를 씌우지 않는 방식을 알려주는 이야기. 그래서 더 다양해질 사물에 대한 사유와 그림이야기가 기다려지고, 닮아가길 바라는 마음이 커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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