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역하는 말들 - 황석희 에세이
황석희 지음 / 북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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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숙하게 사용하고 뱉어내는 말들 속에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말의 온도. 일상에서 오가는 무수한 말들에서 온전히 단어의 사전적 의미만 있는 것인지, 단어를 앞세운 그림자의 진짜 글꼴은 어떠한 언어로 번역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있었다. 모국어이지만 어렵고 매번 공부하듯 들여다보게되는 말들. 당신과 내가 사용하는 언어는 동일한데 일상 속 오역, 오해는 참 많은 갈래로 나뉘어져 감정이 퍼져있다. 당장 올해 수능을 칠 것도 아니면서 늘 머리를 싸메고 들여다보는 당신들과 나누었던 언어영역에 대한 무수한 해석들. 그래서 번역가의 시선을 빌려 조금 더 예민하게 보고자 이 책을 챙겨봤다. 입 꾹 다물고 살아가는 것 같아도 은연중 흘려내어진 말들. 그걸 곧이 곧대로 말한적은 얼마나 될까를 가늠해보며 이 말들을 번역하고 또 가다듬어 진짜의 의미로 받아들여지기까지를 글밥 벌어먹고 사는 번역가의 능력에 기생하여 조금이나마 수월한 말뜻 풀이를 해보려한다. 나도 여자지만 여자의 언어는 복잡했고, 척하면 척이길 바라는 상사의 언어는 상급의 수준이며, 한 줌에 쥐어도 될 만한 간결한 말들을 던져놓고 다 이해하길 바라는 부모의 언어까지. 뭐 이뿐 일까. 지구 반대편의 어떤 나라 작은 부족의 언어보다 더 다양하게 갈려지고 쓰여지는 내 사람들의 언어들. 당신들을 이해하기 전에, 내가 먼저 제대로 알아먹고 싶어서 오역하는 말들에 대한 것들을 살펴보고싶어졌다. 정답지를 보기 전에 오답노트 먼저 훑어보며 틀렸던 것 복기하는 것 마냥 오역하는 말들이라도 완벽하게 알고나면 당신과 나의 대화가 조금이나마 쉬워지지 않을까 싶어 일부러라도 챙겨본다. 당신의 말을 좀 더 완벽히 알아먹어 당신의 든든한 누군가가 되고픈 마음으로 곱씹고 되뇌일 준비를 해본다.


이른바 유명하고, 이름난 번역가가 되기 전까지의 불안과 고민을 담고있다. 불안은 어떠한 단어들로 표현한들 상대에게 내가 느끼는 떨림을 온전히 전해 둘 수 없다. 어느 직업이든 다 그러하겠지만 나름의 고충과 나를 갈아넣은 시간에 대한 보상은 생각보다 단박에 이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기다려야하고 버텨야했고, 오늘보다 괜찮을 내일이 와주길 바라는 것 뿐이었다. 요행을 바라지만 그 마저도 부정탈까 맘껏 티내며 기대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각자가 느끼는 불안과 앞일을 알 수 없음에 오는 초조함은 저자가 '세상을 번역하겠습니다. 나는 번역인입니다.'로 당당하게 포부를 밝힌 문장 뒤에 집채만한 그림자의 걱정과 반복된 작업들이 있었던 것임을 알기에 이겨낸게 아니라 버텨냈구나 라며 조용히 끄덕이게된다.



📖많이 보고 싶을지도 모르니까_ "우리 한번 꼬옥 껴안자."

"응?"

"많이 보고 싶을지도 모르니까."

저자와 딸의 이야기, 저자와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는 일상의 언어이지만 무른 내 마음을 툭툭 건들이게 한다. 불어터진 물만두도 아닌데, 툭툭 건드는 딸의 한마디에 찌르르 눈물이 새어나오게 하고,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 어머니의 말에 또 하염없이 뭉그러지고 만다.

특히나 딸이 해주는 말들은 또래의 언어보다 좀 더 깊고 따뜻했다. 이것도 집안 내력일까? 아님 유전자와 태교로 인한 무언가의 우월한 유전 능력일까. 아이가 하는 말에 독자 이모는 또 찌르르 급소를 찔린듯 눈을 질끈 감게 만든다.

다녀오라는 말보다, 잘 하고 오라는 말 대신에, 아빠라는 존재에게 많이 보고 싶을테니 그동안 자신의 온기를 가득 안고가라는 듯이 힘껏 안아주는 이 아이는 뭘 알고 이러는걸까? 글밥 먹는 아빠는 문맥에서 벗어난 말이라 더욱 깊게 살피며 문장과 아이의 표정을 읽으려 애쓴다. 아이가 말해준 문장에 아빠는 오만가지의 가설도 세웠다가 쓸데없이 훗날 오지도 않을 미래를 예견해본다. 망상같은 오역인걸 알지만 그렇게 해서라도 아이의 진짜 속내를 알고싶은 아빠의 마음이겠지.



📖성공은 운이야_ 그들이 말하는 '성공은 운'이란 말을 오역해선 안된다. 아마 본인들도 그 말의 허점을 자각하지 못하고 있을 가능성이 높으니까. 성공은 '오로지 운'도 아니고 '오로지 노력'도 아니다. 개화할 정도로 충분히 쌓아 온 노력이 좋은 때를 만나 결실로 구체화하는 게 성공이 아닐까. 그러니 남들이 운이 먼저라고 하든, 노력이 먼저라고 하든, 또 다른 뭔가가 먼저라고 하든 일단 멈춰서 고민하기보다 뚜벅뚜벅 제 길을 갔으면 좋겠다.

아마도 가장 오역하기 쉬운 말이라 본다. 운도 운 나름이고, 노력도 노력 나름이다. 운과 타이밍, 노력과 기회. 그 적절한 연결고리가 잘 꿰어져야 성공하는 사람으로 불리우지 않을까? 받아들이는 청중으로서의 오역이 걱정되겠지만 운을 운으로 듣지 않고 운도 노력으로 받아들인 상태로 들을테니 청중들이 하게될 오역에 큰 걱정은 덜어두어도 좋겠다. 이러한 연사들은 다들 운이라 했고, 알아먹는 사람들은 부단한 노력이라 들으니까. 이럴 때엔 다들 하나같이 똑같은 필터를 써서 걸러듣는지. 사회화된 인간의 자체 번역기가 잘 돌아가는 상황이라 여겨주자.




📖못돼 처먹음은 직역해 버려_ 정말이지 눈물 나게 다정한 맛이다. 다정함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은 영화보다 현실에 잘 어울린다.

다정이 세상을 구한다는 말과 내막의 힘을 믿는다. 단어와 문장이 가진 표현력보다 그 글들이 사람의 입을 통해 뱉어졌을 때 뉘앙스와 말투에 가속도가 붙어 사람을 찌르기도하고, 사람을 살리기도한다. 못돼 처먹음은 말하는 저는 모르고 듣는 사람은 다 안다. 그리고 다정함은 오래된 학습의 힘과 습관화된 일상의 언어가 되어 말하는 이나 듣는 이나 모두 사람을 말랑하게 만든다. 그래서 글들이 누군가의 입을 통해 뱉어내어질 때 극명한 온도차를 느끼곤한다. 나도 살고, 당신도 살고싶은 마음이 크다면 우리 다정한 언어로 살자. 그렇게 말랑하고 달게 살아보자.


저자는 이 업을 해 오는 동안 겪었던 감정 뿐만 아니라 살아가면서 다들 한 번쯤 겪게되는 상황에서 놓여진 나와 당신의 같은 이야기 서로 다른 이해에 관한 것들도 포함 해 두었다. '우리끼리는 좀 더 애정을 쏟아 서로의 원문을 살펴야 하지 않을까.'라는 저자의 말에서 소중한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완벽히 알아먹고 곱씹어 누리는 사이가 되고자 애쓰고 있음을 느꼈다.

오역은 오해를 일으키기 딱 좋은 '안 좋은 예시'가 될 수 있다. 일대 다수의를 청중으로 두는 번역가의 세상 뿐만 아니라, 일대 일의 대화에서도 우리는 수도 없는 번역과 오역, 진심과 오해의 사이를 오가며 반듯하고 온전한 마음의 전달을 위해 무던히도 애씀을 느낀다. 모국어라도, 그렇게 긴 정규교육과정에서 빼먹지 않고 학습을 해온 언어임에도 늘 뒷통수를 맞는 겪이고, 반성에 반성을 거듭한다.

마지막에 언급한 것 처럼 우리 좀 더 다정한 말의 맛을 모두가 누렸으면 한다. 그렇게 달고 말랑한 말들로 서로를 찌르지 않길 바라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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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개가 왔다
정이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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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에세이라 해야할까? 굳이 구분짓지 않는 그냥 에세이라 봐야할까. 개와 함께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 생후 3개월 차 강아지를 입양 후 일어난 일들의 이야기다. 동물을 만지지 못하는 엄마 밑에서 자란 저자. 어릴적 봐온 대문 앞 개 조심 팻말은 어떤 세계로부터의 경고처럼 느껴졌던 과거의 기억. 학창시절 친구가 키우던 하얀 몰티즈를 안아보라 건네주어었지만 본능적으로 물러섰던 그날의 감각. 뭉클거리고 꿈틀거리며 살아있는 생명의 촉감이 무서웠던게 아닐까 생각해보는 그 시절의 마음들. 그런데도 저자는 강아지를 키우게 되었다. 스스로도 도무지 실감나지 않는다고 전했다. 지리산 언저리의 보호소에서 저자의 서울집으로 온 강아지. 인간과 닿아 본 적이 없는 어린 생명이 개를 만지지도 못하는 인간의 집에 함께 살기로 한 것. 저자의 두려움보다 작은 녀석이 버텨낼 세상보다는 비교가 되지 않을거라 짐작하며 어린 개의 필사적 용기에 마음을 나눠주는 과정을 적어두었다. '한 개의 일생'에 큰 비중을 차지하게된 사람. 그 개 한 마리와 사람사는 이야기가 이 책의 주된 내용이라 말하고싶다. 어느날 비 자발적으로 어린 개와 살게 된 초보 반려인의 순간들.

나는 저자의 어린 시절과 닮아있고, 지금도 변함이 없다. 남들은 강아지라 해도 내 눈에는 그저 개로만 보이고, '우리 애는 안 물어요' 라는 말을 들으면 내 귀를 통해 필터링 된 말은 '주인은 물지 않는데 당신은 모르겠네요.'라며 고깝게만 들린다. 남들은 사람 좋아 달려오는거라지만, 내 눈에는 나를 물어 뜯으려 달려오는 걸로만 보이는 효과. 그 대상이 크든 작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저 내 눈엔 '개'일 뿐인 사람이다.

그래서 나로서는 저자가 말하는 '개와 함께하는 삶'에 완독 후 심경의 변화는 없다. 내 삶에서 개가 함께 할 거라는 생각을 해 본적이 없으니 말이다. 오죽하면 가장 친한 친구조차 자신의 작은 개를 무서워하는걸 알기에 집에서 만날때엔 반려견을 본가에 보내고 만나기도했다. 죽일듯이 물려고 달려오거나 위협을 받은 적은 없으나 생명에 대한 두려움인지 해석하지 못하는 동물의 언어를 못 받아들이는건지는 여전히 모르겠지만 개와 함께하는 삶이 여전히 낯설기만하다. 책임 질 것이 많아지며, 내 세상의 일부를 공유함으로서 얻어지는 기쁨이 더 큰 삶의 방식. 서로를 돌보고있다는 믿음을 통해 각자의 몫으로 주어진 삶에 반려인과 반려견의 애틋함을 얹어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더 깊어진걸 느끼게 만든다.


잠깐 왔다가 다시 헤어질 찰나의 인연으로 끝나지 않을걸 알기에 이 순간이 어렵고 이후의 시간들이 걱정되는 것이다. 함부로 맡아 키우지도 못하는것이 이유이기도 하며, 개의 생에 모든 순간을 도맡아야 한다는 점. 내 삶의 테두리 속으로 인간이 오는 것 만큼 개가 와주는 것이 어마어마한 일이라는 것이다. 잠깐 행복과 즐거움 뒷편에 그림자 처럼 따라올 슬픔의 순간도 있을테고, 살짝은 미워질 수도 있는 날들이 있다는 것. 그게 한 '개'의 일생과 동시에 '나'의 일생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는 점. 이건 손깍지를 낀 채로 평생 함께 해야만 하는 끝없는 생의 동반자임을 알아야했다.



📖그들의 말이 틀리지 않지만 완전히 맞지도 않았다.

"크다고 무서운 거 아니거든요."

나는 저자의 이 말이 틀리지는 않지만 완전히 맞지도 않다는 소심한 반박을 해 본다. 나는 평생동안 반려견을 키워 본 적이 없다. 조부모의 시골집에 있던 개들이나 아버지의 공장을 지키던 순박하니 순하던 개들 조차 나에겐 사파리 월드 투어 할 때 버스를 따라오던 맹수 못지 않은 대상들이다. 한발, 두발 다가 올 때면 어깨가 움츠려들고 손에 땀이 난다. 나도 안다. 그 아이들보다 내가 몇배나 덩치가 크고 사물을 던져서라도 위협에 맞설 수 있는 존재임을 알지만 무섭다. 크다고 무서운거 아니고, 작다고 안 무서운게 아니다. 그냥 개라는 존재 자체가 주는 두려움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적어도 견주님들은 이런 마음에 서운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줌도 안되는 작은 개는 내가 모르는 사이에 치고 지나갈까봐 무서운거고, 큰 개는 친해지고픈 마음에 다가올테지만 나같은 인간은 두눈 질끈 감도록 만드는 공포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거 있잖아, 관상용으로 좋아하는 사람들. 유리막이 있거나 리드줄을 짧게 쥐어주어 나한테까지 달려들지 않을 정도의 거리가 유지 될 때, 개모차에 싣려있거나 견주의 가방에 포옥 들어가있어 나한테 뛰어들지 않는다는 확신이 들어야만 한껏 귀여워 해 줄수 있는 사람. 당신들의 개가 미운게 아니라 내가 두려운거니까 속상한 마음을 덜어주길 바란다며 구구절절 설명해주고 싶다.

📖돌봄 노동은 지속적 노동이다. 티가 나지 않는 일을 아무도 안 보는 곳에서 매일매일 성실하게 해야 한다. 그러다 조금만 소흘해져도 확 티가 난다. 하나하나 신경 써서 돌보지 않으면 연약한 동물은 금세 불쌍해지고 만다. ... ... 내 몸을 움직인다. 녀석을 사랑하게 되었으므로 안쓰러워서. 그냥 두고 볼 수 없어서.

부지런함을 강요하진 않지만 내 눈에 밟혀서 할 수 밖에 없는 것들. 수도 없는 빗질과 일상이 되어버리는 돌돌이. 만사가 귀찮아져도 가게되는 산책. 비 와도 나가야하는 프로 산책러로서의 숨쉬듯 이뤄지는 일상. 어느새 내 의지는 뒷전으로 미뤄진 채 작은 녀석이 고개를 한껏 쳐 들고 올려보는 바둑알같은 눈망울에 지고마는 것이다. 사랑도 사랑이지만 내가 함께 가주지 않으면 사방이 틀어막힌 이 집에서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으니까. 내가 데리고 왔으니, 내가 데리고도 나가줘야지 라는 의무감. 어쩌면 사람이 개를 키우는게 아니라, 개가 사람을 길들이는 거라 봐도 무방한 공생의 관계다. '이봐, 주인! 그렇게 방구석에서 굴 파고 들어갈 새가 어딨어? 어서 나를 데리고 나가! 그래야 당신도 살고, 나도 살지! 당신은 나(=개) 때문이라도 우울할 틈을 만들어선 안된다구. 우리 같이 살 순간이 생각보다 길지 않다는거 유념해 두라구!૮₍´˶• ᴥ •˶`₎ა'

사람이 개를 키운다 하지만, 때때로 개가 사람을 키워냄을 느낀다. 케이스 바이 케이스라 할 수도 있겠다만 적어도 내가 아는 견주들은 반전된 상황에서 살고 있었다. 나태지옥에 빠져 있다가도 돈을 벌어와야 이 녀석에게 맛있는 간식이나 주기적인 예방접종을 해 줄 수 있고, 우울의 구렁텅이에 허우적거리다가도 밖에 나가야 맘편히 배변을 할 수 있으니 한쪽손엔 리드줄을 다른 한쪽엔 배변봉투를 쥐고 슬리퍼를 질질 끌고 나간다. 인간관계에 엮여있는 것들이 손에 꼽히는 사람이었다가도 공원에서 개들이 서로의 체취를 맡을 동안 일면식 없는 견주들끼리 말문을 터 보며 몇살인지 주사는 어디까지 맞췄는지, 요즘 좋은 강아지보험은 뭐인지 물어보며 수다쟁이가 되곤 한다. 이렇게 개가 사람을 변화시킨다. 다 큰 놈이 부모말은 안 들어도 개가 해달라는거 해주려고 자진해서 사람이 바뀌는 것이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변화인가. 세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지만 그 오래된 속담을 거스르게 만드는게 사람의 품에서 부비적거리는 뜨끈하고 털이 보드라운 이 놈들이라는 것이다. 사랑은, 마음은, 진심은 꼭 같은 인간이어야만 한다는 룰을 깨어주는 것이다. 그저 서로 마음껏 사랑하기만 하면 된다는걸 보여주는 저자와 루돌이의 세상임을 알게 해줬다.

이렇게 말은 하고있지만, 나는 여전히 견주와 개의 세상을 다 알지 못한다. 다양한 미디어로 접해온 머리로 아는 지식일 뿐이다. 사람일은 모른다고 하지 않던가. 30년 넘게 내 삶에 개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거라 여기는 중이지만 자식도 없는데, 노년에 가장 가까운 친구로 여기는 남편 이외의 다른 것들에 정을 주게 된다면 당연히 강아지가 될 수도 있을테니 가능성은 조금 열어보고 싶다. 단, 조건은 내 두 손에 안겨있을 강아지라는 존재가 부디 나보다 생의 길이가 짧아 이 놈을 혼자 두고 떠나지 않을 수 있다는 전제를 두고 유념해볼까 싶다. 사랑하는 사람이든 사랑하는 강아지든 내가 다 책임지지 못한다면 남겨진 존재들이 너무 서글플테니 그 짐까지 얹어주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 어린 개든 다 큰 개든 나는 여전히 무섭고 뒷걸음질 치는 겁쟁이 일지라도, 이들의 애틋함을 존중하며 이들의 세상을 응원한다. 내가 하지 못하고 내가 책임지지 못하는 관계를 아주 찐득하게 유지하는 멋진 사람들이니 말이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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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프트 - 고통을 옮기는 자, 개정판
조예은 지음 / 북다 / 202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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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웹툰 <시프트>의 원작소설이기도한데, 2017년이라면 그 즈음 장르소설도 읽지 않았고, 웹툰은 들여다보지도 않는터라 생판 처음 마주하는 작품이라 봐도 무방하겠다. 조예은 저자의 최근 작품을 거진 다 봐온 팬으로서 초창기의 글은 어떠할지 기대도 되고, 표현이 다듬진 상태이니 기대를 더해보며 읽어가게 만들었다. '고통을 옮기는 자'라는 부제. 그 능력이 어떻게 활용되어질지 가늠해보며 시작한다.

인적이 드믄 해변의 폐건물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이 시작이다. 피 웅덩이 한 가운데 반쯤 잠겨있던 변사체, 한 살마이 죽었다기에는 너무 많은 혈액. 갑자기 발병한 것으로 보이는 말기 피부암의 흔적. 단서라고는 날이 고르지 않은 식칼 한 자루. 어떠한것도 맞아떨어지지 않는 조사의 과정. 형사는 이 사건에 누군가의 병을 옮기는 능력이 연관되어있음을 알게된다. 그리고 그 과정또한 익히 알고 있다. 형사는 이 능력을 어찌 알고 있었던 것인지, 그리고 죽은 자는 어떠한 사건으로 최후를 맞이했는지 시간을 거스르고, 과거를 뒤적이는 장면들 속에서 형사 이창이 그토록 찾았던 이유까지 닿아보며 고통을 옮기는 자를 통해 우리가 모르던 더러운 세상의 꼴을 긁어내어보게된다.


이 이야기가 시작 될 수 있도록 해준건 찬이었다. 책의 부제와도 같은 '고통을 옮기는 자'가 그였고, 그로 인해 사람의 욕심이 어느쪽으로 기우는지 다양한 각도로 보여주며 당신은 어느쪽이냐는 질문을 하는 듯 했다. 누군가의 고통을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옮겨주는 역할이니 온전히 그 아픔을 담아내어야하는 상황. 그걸로 부를 취득하는 한승목 형제. 역시나 타인의 능력과 그에 수반되는 것들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자들. 권선징악의 흐름을 기대한다면 한승목 형제의 끝은 우리가 원하는 수순으로 이어지겠지만 왠지 모르게 찬이가 그보다 더 빨리 이 생활을 끝낼 듯 하다. 사람의 욕심이란게 끝이 없거든. 한승목 형제 또한 별반 다를 바 없는 욕망 가득한 인간이니 그를 가만히 냅두진 않을 듯 하다.

무수한 가정들 속에서도 어떠한 이유인지 찬은 란을 지키려했고, 란은 찬이 자신때문에 한승목 형제의 거위로 사는거라 생각했다. 란이 생각하기엔 찬에게 자신은 짐이 될 수 밖에 없고, 계속 챙겨줘야하는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치부했고, 찬은 반대로 자신에게 가장 애틋한 존재라서 앞뒤 잴 것 없이 품으려했다. 이러한 관계들은 서로가 더욱 애틋 할 수록 애절한 끝으로 이어지는게 아쉽기만하다.

📖그토록 기적을 찾아 헤맸는데 돌아온 건 차갑고 괴이한 진실뿐이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걸어야만 겨우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대가 없는 기적, 정말 그런 게 존재할리 있냐고 온 세상이 자신에게 다그치는 것만 같았다.

대가 없는 기적은 없고, 희생 없는 간절함도 없다. 그건 나를 갈아 넣더라도 상대만 괜찮다면 나 역시 대수롭지 않은 것이라고 여기는 마음에 대한 답변이기도 했다. 계산적으로 봐도 맞지 않고, 수지 타산이 맞지 않아 손해보는 장사라 혀를 끌끌 차더라도 일단 되면 하게되는 인생 장사였다.



📖"왜 사람들은 안 되는 것을 되게 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걸 거는 걸까요? 어떻게 스스로를 버리고 타인을 희생시키면서까지 무언가를 바랄 수 있죠? 어렸을 땐 그저 인간이란 이기적인 존재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어떤 이들을 보며나, 가령 형이나 형사님같은...... 그런 사람들은 전혀 다른 의미로 이해가 가지 않아요."

이 이야기의 시작이, 저자가 쉽게 답을 써 내려가지 못했던 무수한 고심의 이유가 란의 문장으로 대변되는게 아닐지 생각하게된다.

모든 것을 거는 건 인간들. 그 속내를 들여다보면 조금씩 다른 결을 띄고 있음을 느낀다. 욕망의 끝을 보여준 한승목 형제는 물론이고, 자신만을 생각하는 박용석이 타인의 희생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선과 악이 대립되듯 목숨을 걸되 자신의 이득을 바라기보단 타인(사랑하는 이)를 구하고자 하는 마음이 큰 반대의 부류. 동생을 구하고자, 조카를 살려보고자 물불 가리지 않는 이 둘의 눈빛을 보고 있노라면(문장이지만 또렷하게 빛나는 눈빛이 그려지니 이 비유법을 거슬려하지 않길 바란다) 그 간절함을 어떻게든 들어주고싶고, 일말의 힘 이라도 보태어 주고싶어진다. 영생을 위한 것, 부의 축적을 위한 검은 미래와 계속 대비되는 둘의 선택 과정들. 박용석이 그렇게 사위(四圍)를 둘러보며 꾸리는 사건에는 본인이 중심점이었고, 찬과 이창은 가장자리까지 아슬아슬하게 버티며 어떻게든 자기 사람들을 품어주려는 순간들을 확인하게된다. 처음엔 죄책감이라는 심지로 인해 그런가 싶기도 하다가, 또 어떠한 면에서는 누구보다 내 사람을 챙기고자 하는 목적이 담담하게 에워싼다.

찬에서 란으로 옮겨가는 능력, 누나에서 조카로 이어지는 창의 간절한 희망. 잇닿아 있는 마음은 사람을 살려낸다. 시시하다 싶어하며, 진부하다며 입을 모으더라도 결국은 권선징악을 바라게되는 독자로서의 바람은 글을 쓰는 이나 글을 읽는 이나 별반 다르지 않음에 한시름 놓게 되기도 한다.

최근 저자의 책에 비해 마지막 페이지까지 끌고가는 힘이 살짝 부족하다 싶기도 하지만, 그거야 내가 출간 시점에서 읽지 않았고, 최근작을 많이 읽어서 일 수도 있겠으니 이거는 독자의 취향 영역이라 두면 좋겠다. 액션스릴러 소설로 분류가 되지만, 으레 상상하기도 하고 혹은 내가 모르는 어떤 지역에서 조용히 이뤄지고 있을수도 있겠다 싶은 가정으로 소설이 꾸려져있다. 저자가 밟아온 출간의 순간을 역행한게 아쉽지만(가장 먼저 읽었다면 또 다른 일렁임이 있었겠지) 그래도 훌훌 읽히고, 결국 사람이 제일 무섭지만, 또 가장 애틋한 존재임을 다시금 느끼게 만든다.

'대신 울어주고 싶고, 내가 대신 아파해주고 싶어요. 다신 그대의 마음에 상처가 나지 않았으면 해요. 누군가를 넘치게 좋아한다는 건, 참 신기하게도 그렇더라고요.'라는 내가 좋아하는 노래의 가사가 떠오르게하는 찬과 란, 창과 채린. 꼭 연인 사이가 아니라도 넘치게 애틋한 인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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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고독은 축복이 될 수 있을까 - 1인분의 육아와 살림 노동 사이 여전히 나인 것들
김수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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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로부터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고독과 축복의 상반된 단어를 한 줄에 나열하여 촘촘하게 짜여진 삶에서 한 줄기의 빛과 기쁨이 있지 않을까 하는 간절함이 보였다. 그래서 읽고싶게 만들었다. 나는 육아와는 별개의 삶이고, 매년 무얼 이루어야겠다는 성취에 대한 욕망도 없는 사람이지만 그럼에도 선택을 하게 만든 이유가 있었다. 계속 바뀌어가는 역할과 점차 줄어드는 존재의 집중도. 엄마로서의 비중이 늘어남과 동시에 달라진 시야. 그럼에도 '나'를 포기하지 않고 자신이 누구인지 다시 찾아가는 과정을 담아두었다. 나 / 개인 / 주체 / 자립에 대한 사유는 물론이고 결혼 / 임신 / 출산이라는 과정을 통해 변해가는 환경과 그에 맞춰 바뀌어야하는 삶의 태도에 대한 생각을 적어두었다. 저자의 시간은 촘촘하게 채워져있고 근 5년간의 세상은 누구보다 바빴고, 다각화를 이루었음을 느꼈다. 내 눈 앞에 마주하고 있는 것들이 매번 낯설었고 다양하게 바뀌었다. 그렇다고 멀리하기보단 자신만의 방식을 통해 익숙해지려했고, 맞춰보는 삶을 살게된다. 가족이라는 울타리의 안정감은 더욱 두터워졌고, 행복의 스펙트럼이 훨씬 넓어진 걸 글의 온도로도 느낄 수 있었다. 이 사랑스러운 기운에 안주하며 좀 편히 살아도 될지, 내가 겪어낼 생의 다음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행복과 걱정을 차례차례 끼워넣어 두었다. 제법 괜찮은 삶의 변화에 대한 의견을 같이 나눠보면 좋겠다. 그리고 무수한 걱정과 근심 속 고독의 문에 막 입성한 나의 절친. 출산한지 갓 한달된 나의 그녀에게도 이 책을 전달해보고싶어졌다.



📖 아이가 둘이 되면서 나 자신을 돌보고 키울 시간은 당연하게도 줄었다. 뚜렷한 직장이 없는 내게 나를 위해 쓸 수 있는 시간이 줄어들고 있다는 말은 나의 밝은 미래 또한 수축하고 있다는 의미 같았다. 생산성 없는 나의 하루하루가 내 가치를 조금씩 갉아먹고 나는 영영 소멸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생각보다 이른 결혼, 그리고 긴 텀을 두지 않는 두 번의 출산. 남편의 직장에 맞춰 사는 지역마저 옮겨간다. 본인의 커리어는 고이 접어두어 일단 아쉬움의 후미진 곳에 밀어넣어두었다. 그렇다보니 그렇게 활동적이고 바삐살던 생산적인 인간에서 타인의 노고를 무전취식하는 자로 스스로를 하대하는 모습을 보인다. 생산성 없는 하루를 살고, 소비만 할 뿐 무언가를 위해 애쓰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이건 경력단절이든 잠시 육아휴직을 하든 똑같이 느끼는 양육자의 조급함이었다. 나는 출산을 경험하지 않았지만 동료는 물론이고, 친구, 형제들의 육아휴직과 경력단절을 지켜본 입장이다. 그래서 이러한 얽힌 감정을 많이 학습해와 비슷한 경험이라도 한듯 공감을 하게되었고 저자의 쪼그라든 마음이 반듯하게 펴질 이후를 바라게되더라.

나의 어머니 시절은 당연히 저자의 나이 즈음에 결혼을 했고, 아이들도 낳았다. 이른바 독박육아가 당연했고, 그렇게 애 낳아 잘 키우는 것이 엄마로서의 인생 퀘스트라도 되는 듯 간주되기도했다. 이름을 불리우는 것 보다 OO엄마로 불리우는게 당연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도 그녀들은 이러한 생각을 했을 것이고 많은 갈등을 혼자 버텨냈을 것이다. 지금 시대의 그녀들만 하는 잡생각이라 치부하지 않길 바란다.

이후의 에피소드에서도 나오는데 '결혼이란, 갖은 상황과 갈등을 조율하고 서로를 부양할 의무를 떠안으면서 혼자서도 잘 살 수 있는 수많은 경우의 수를 뒤로하고 도박같은 선택을 감행하는 일이기 때문이다.'로 속 시원하게 정의내리고 있다. 이 도박같은 선택, 이 얄궂은 인생의 원치않는 감정 변화 또한 감수하고 버틸 각오가 되어있으니 이 감정이 나만의 몫이 아님을 공유하는게 중요해보였다.


OO와이프, OO엄마로 살려고 내가 그렇게 12년은 기본이고 반년에 몇천이나 하는 대학 수업도 모두 이수했고, 뽀개기 어렵다는 취업 문턱도 넘어봤는데 그걸 썩히기 너무 아쉽다는거지. 이정도 열심히 산 거였으면 기회는 몇번이고 더 주어져야하고, 발에 채이는 보너스같은 순간도 있어야되지 않겠냐는 듯한 저자의 생각들. 나 역시 공감한다. 1인분의 육아가 아니라 공동 분배의 육아, 일종의 협업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여기길 바라게된다. 그러자고 결혼했고, 그러자고 같이 사니까 그럴때엔 '같이'의 의미를 서두에 두고 저자의 남편이 말한 '당신이랑 같이 키워야 재밌지'의 재미를 누리는 것에 주저하지 않았으면한다.


📖 우리는 가만 보면 아이를 키우는 것 같지만 서로를 키우고 있다. 아이들의 키가 클 동안 우리는 늙어간다. 그리고 늙은 만큼 성장한다. 늙는 것도 크는 거라고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 그동안은 미처 몰랐는데, 겪어보니 분명 늙었다는 것은 컸다는 뜻이다.

아마 저자를 보면 애가 애를 키우고 있다는 소릴들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들은 애 낳고 나면 진짜 어른이라 말하는게 아닐까 싶으면서 하나의 주체적인 생명을 양육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것인지를 어렴풋이 예견해본다. 나의 부모는 나를 애틋해하고, 당신의 손주들을 사랑에 마지아니한다. 그리고 그 조막만한 녀석이 당신의 아들딸을 힘들게 할 까봐 더욱 크게 보듬어보려 애쓴다. 우리는 누군가에겐 영영 웃자란 녀석들일거고, 내 허리춤에도 못 오는 작은 아이의 세상엔 저자와 남편이 가장 큰 버팀목이고 비빌언덕이 될 것이다. 그래서 서로를 키우고 서로를 애틋해하며 서로를 더 나은 사람이 되도록 만들어주는 그런 존재임을 느낀다. 결국 당신들이 나를 살리는거지.

'1인분의 육아', '살림노동'이라는 단어들을 보면 여전히 마음이 쓰인다. 이 단어들에는 그림자처럼 '엄마'라고 불리우는 양육자가 따라붙는다. 성별을 논하고 싶진 않지만 단독적인 양육이 대부분 이뤄지는 환경이다보니 존재는 그대로를 유지하고있으나 불리워지는 호칭이 바뀌었고, 이전의 세상은 잠식당한 상태가 되어진다. 아름다운 것들이 저마다 고독하는 것과 어떤 괴로움은 필연적으로 아름답다는 저자의 말 속에서 결국 우리는 또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앞에 두고 해 볼 만한 것이라는 걸 알려주려 한다.

여전히 두렵다. 그리고 내 생에는 이 호칭과 역할이 없을 것이라는 걸 알고 살아온 세월이라 그런지 때때로 이 사람들의 무한한 역량이 부러우면서도 한 편으로는 걱정도 된다. 이렇게 빠르게 불태우며 노력하다보면 언제 한번 과부하가 와서 모든게 멈춰 버릴거 같거든. 저자를 보면서 똑같이 빠듯하지만 그럼에도 촘촘히 열심히 살라고, 무언간 해 내어 보라고, 생산적인 활동을 좀 해 보라고 강요하고 싶진 않다. 각자의 방식과 속도와 여건이 있을테니 똑같이 뭘 어찌해보라는 말 대신 이렇게도 살아지고, 이렇게도 그 순간을 무난히 건너 올 수 있는 사람도 있더라는 것. 그걸 알려주고싶다. 나를 무조건 적으로 불태워 버리지도, 갉아 먹지도, 소멸 시키지도, 희생을 목적에 두지 않아도 된다는 걸 그럴 전제로 두며 이 책이 말하는 고독을 잘 채워 축복으로 감아 안아주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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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책]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 - 월급사실주의 2025 월급사실주의 3
김동식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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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몇 이야기는 특정한 직군이 아니더라도 암암리에(?) 이뤄지는 집구석 제 식구 갉아먹기도 있었고, 또 어떤 이야기는 내가 모르던 생소한 직군에서 얻게되는 사람에게 질려버리는 세상살이 이기도했다. 역시나 그렇더라. 이러한 월급사실주의 밥벌이 애환은 일이 힘든 것 보다 일 이외의 요소에서 얻어지는 스트레스가 나를 찌른다는 것. 하루가 무사히 끝나길 바라고, 내일 아침에 눈 떴을 때 출근하는게 악몽이지 않길 바라는 마음. 일확천금을 바라지 않지만 그 바람보다 더 어려운 내일의 무사안일을 기대하는 삶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그건 마냥 내 생각일 뿐이라는 것.

5월은 내가 지금 다니고 있는 이 회사를 입사한 달이다. 다들 얼마 못 가서 퇴사 할 거라는 그들의 바람에 못 미쳐 미안하지만 12년 근속이며 이제 13년차로 접어들어보니 역시나 내 사업보다 돈 많은 오너님의 노비가 되는게 맘편하다는걸 다시금 느낀다. 일확천금은 못 누리더라도 제 날짜에 밀리는 법 없이 꼬박꼬박 급여 입금되는게 얼마나 무사한 일인지 직장인들은 공감하겠지? 오늘도 출근했고, 내일도 출근을 할 테니 뇌에 힘 주고 그럼에도 나는 이겨낸다는 마음으로 버텨보려한다.

📖쌀먹_ 현실이든 게임이든 어디서나 무시당하는 쓰레기같은 존재였다. 그런데 뭐? 내가 부럽다고? 김남우는 생각할수록 정재준에게 화가 났다. 시간이 지나도 가슴에 불꽃이 얹힌 것처럼 속이 끓고 갑갑했다. 다음날 그는 정재준에게 연락해서 쌍욕을 퍼부었다.

"이 씨발 새끼야! 네가 뭘 알고 내가 부러워 씨발!"

남들이 아무렇지 않게 얻어내고 어려움없이 살고있는 평범한 단계를 자신만 버거워 할 때, 우리는 자격지심을 얻고 자존감을 갈취당한다. 남들 다 하는 직장생활, 남들 다 하는 사회생활, 남들 다 하는 인간관계가 그놈의 직장 하나 때문에 모든게 손에 쥐어지지 않는다 생각한다. 적당한 회사, 적당한 벌이, 넉넉하지 않더라도 쏠쏠히 챙겨보는 행복이 딱 이거 같은데 자신은 그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해 쓰레기 같은 존재로 치부한다. 웃긴건 자신의 처지는 비관하되 높아진 눈은 낮출 줄 모른다는 것. 중소기업은 갈 생각조차 하지 않고, 아르바이트는 가성비 따위를 운운하며 그럴 바엔 한탕주의 처럼 쌀먹을 자처한다. 제 능력에 대한 가치와 자신이 두드릴 직업의 문턱은 손을 뻗어 닿지도 않을 고점을 찍고 있으며, 마주하는 현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벽이라며 노력이라는 개선점보다 현실 타박을 하는 쉬운 선택지에 도달한다.

그래서 나는 쌀먹이 짠하다. 평생 저러고 살거 같아서.

인간 대 인간으로 마주할 자신은 없고, 모니터 앞에서 일장연설 휘갈기며 쌀먹도 직업이라 운운하는 걸 보면 김남우는 평생 판교는 물론이고 사원증 걸 수 있는 회사 입사는 글러뵌다. 사무실 고인물로 살며 든자리 난자리 바라보는 구석탱이 과장 나부랭이 눈에는 딱 그렇게만 보였다.



📖올바른 크리스마스_ 다양성의 한 축을 담당하는 '정치적으로 올바른' 얼굴. 회사가 시대와 발맞추어가고 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필요한 얼굴. 화살표를 따라 올라갈수록 백인들만 남는 조직도를 감추기 위해 이용되는 얼굴.

이게 사람의 성향이기도 할 테고, 회사에 기여하는 바에 대비하는 기대치의 맞교환 일 수도 있겠는데, 암튼 이렇게 뭘 기대하고 바라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딴세상 이야기 처럼 들린다. 뭘 바라는거야? 라며 속으로 궁시렁되다보면 저 사람들에게 회사는 동반상생 기회의 땅으로 생각하는건가? 싶은 마음으로 계속 물음을 덧붙이게된다. 조직은 이율타산이 주된 목적이기에 인재 양성과 성장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지 않는다. 리스크가 큰 것에 거는 기대치는 없으며 보다 안정적이며 확신적인 선택지에 힘을 싣게된다. 회사가 필요한 인재는 아무리 인성이 지랄맞고 근태가 거지같아도 쥐고 있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잘 할라 하고, 잘 하고 있는건 기본 옵션이다. 다양성? 글로벌? 미래지향적? 인재육성? 일단 사측도 먹고 살만한 위치에 도달해야 눈에 들어오는 항목들이라는 것을 알아주면 좋겠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기대 없이 급여 입금되는 몫 만큼의 1인분만 일하는 걸 목표로 삼는 나로서는 주미의 기대하는 눈망울이 안쓰러울 뿐이다.(회사 고인물이라 이런 생각이 드는건지, 10년전의 나라면 주미처럼 살고 있진 않을지를 생각해보며 이 모든건 세월과 연차, 빤히 보이는 사내 정치가 눈에 훤히 보여 도무지 모른척 할 수 없는 시뻘건 동태눈깔이 된 나를 탓해야겠지)



📖아무 사이_ 정말이지 나는 이 일을 잘하고 싶었다. 돈을 버는 것도 물론 중요했다. 하지만 남들보다 잘할 수 있는 일이 생겼다는 건 내게 있어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회에 드디어 비집고 들어갈 자리를 마련했다는, 야트막한 기쁨을 느끼게 해주었기 때문이었다.

잘 하고 싶은 마음, 인정 받고 싶은 욕구, 잘 하는 사람이라 치켜세워주는 주변의 시선. 이건 어린 아이가 칭찬을 갈구하는 것 만큼이나 어른들이 회사에서 바라는 주변 반응이기도하다. 그래서 잘 하고픈 마음을 담뿍 담아 과하게 애정을 쏟게된다. 취업 전에는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먼지같은 인간이라 여긴 놈이 여기오니 잘한다 해주고, 고맙다 해주니 이전과는 사뭇 다른 세상에 괴리감도 들지만 이 폭닥한 시선이 싫지 않아 더 애를 쓰게 만든다. 쓸모있는 사람으로서의 기능 변경. 직업은 단순히 생계의 수단만 있는게 아님을 보여주고있다. 잘한다 잘한다 해 주면 더 잘 하려는 마음. 애나 어른이나 그 요건이 충족되는 상황만 달라진 것이지 기대치와 순응치의 포만감 가득한 마음은 결국 똑같았다.



📖일괄 비일괄_ 나도 마찬가지야. 노력한 시간에 대한 보상을 받은 것 같아서 행복했어. 그런데 지선아, 나는 가끔 전환이니 일괄이니 하는 그런 말 몇 마디가 내 인생을 망가뜨린 것처럼 느껴져.

일괄 비일괄이니 하는 말들. 계약직과 정규직 사이 보이지 않는 가림막, 파견직이라며 같은 사무실 속 다른 소속감. 이런거 다 누려본 사람으로서 해탈하듯 사람들을 마주하게된다. 저 짓거리하는 인간이 애도 아니고 나이 먹을대로 먹은 어른이 이딴거 가지고 편가르기하고 개무시하는걸 종종 봐온 터라 이 제도 속에서 신명나게 놀아나는 인간들 속에서 느끼는 바가 컸다. 이 집구석에서 인류애는 찾아 볼 수 없겠구나, 콩가루같은 집안에서도 지 잘난 맛에 용의 머리로 착각하는 뱀의 머리들에게 영영 고인물 속에서 왕노릇 하느라 드글거리는게 징그러울 뿐이었다. 오너의 시선이 가거나 오너의 피드백을 받게되면 간택이라도 받은 듯 으쓱거리는 사람을 볼 때 일괄과 비일괄 그 경계는 회사가 판만 깔아놓았지 저들끼리 신나서 편가르기와 높낮이를 구분짓는 백성들 같아 사람에게서 질린다는게 이런 뜻인가 싶은 생각도 들었다.

매일 똑같은 넥타이만 하는 노부장이나 육아휴직 연달아쓰고 퇴사를 한 지선이나 그들이 살아남기 위해 아등거리는 방식인거지 거기에 애먼 '나'를 개입시켜 '때문에~'를 붙여주진 않았으면 좋겠다. 일괄이든 비일괄이든 내 몫의 길이니 탓을 운운하는건 핑계거리 같으니 말이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데_ 직업적 성취감 같은 건 고용인이 만들어낸 사탕발림이다. 어차피 나는 계약직이다. 이 년 후면 바꿔치기당할 소모품. 그뿐이다.

개인의 성향과 상황, 특수성이 가장 짙에 담겨있는 단편. 여기에서 우리는 단숨에 바뀌는 고객과 직원의 입장을 마주한다. 사람도 유니폼도 그대로 이지만 지상으로 올라가 매장에 있으면 모든걸 다 내어줄 듯한 상냥하다못해 극진한 직원이되고, 지하로 내려와 여기 마사지 침대쪽으로 들어오면 세상 까칠한 고객이된다. 그게 저자가 종일 응대해야하는 사람들이다.

직업적 성취감과 소명감을 강요했고, 그게 당연히 있어야 되는 줄 아는 고용인의 기대치. 무기계약직도 아니고, 자동 연장을 기대할 만한 조건도 아니다. 싫든 좋든 계약서에 사인한 만큼만 하고나면 자동적으로 갈라설 관계. 누군가에겐 그래도 좋은 인상을 심어주어야 알다가도 모를 다음을 위해 좋은거 아니겠냐는 마음을 두며 잘 좀 해보라고 다정한 훈수(?)를 두지만 그 알다가도 모를 다음은 생각보다 다시 오질 않더라. 직업적 성취감이나 직업적 만족도는 통장에 찍히는 숫자의 갯수와 계약서에 사인 할 때 약속했던 사안에 대한 정확한 피드백만 존재할 뿐이다. 그래서 딱 1인분만큼만 하자는 마음이 생겨난 걸 지도 모르겠다. 사명감과 직업의식이 없다 할 지라도 때에따라 1인분 만큼도 못하는 사람이 더러 있으니 내가 말하는 '딱 1인분 만큼'도 아주 후한 마음이라는 걸 알려주고 싶었다.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건 전적으로 내 기준이지 남들에게 이걸 알아주길 바라는게 아니다. 그냥 내 마음이 그렇다는 것 뿐이지 모.



결국 돈이고, 그래도 돈이다. 돈 때문에 일하고, 돈을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있다. 모든 요건의 결론은 내 손에 쥐어지는 무언가로 인해 모든 보상을 받게됨을 인식한다. 그래서 '월급사실주의'인 세상이라 확신하는 것이다. 내가 애쓰고 있다는 걸 알아주길 바라는 마음에서 아무도 읽지 않지만 꼭 보내놓아야하는 이메일에 신경을 쓰게되고, 그러든 말든 일괄여부에 신경 안 쓰고 싶어도 결국 나는 어떤 집단의 소속이며 어떠한 갈래의 한 지점에 머물며 이 위치가 안전구역인지를 계속 살피게된다.

노동은 버겁다. 이게 신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일단 돈벌러 나가는 우리집 현관문 앞에서는 늘 발걸음이 천근만근이다. 그래도 어떻게 가야지. 내가 자처한 삶이니 다음달의 내가 카드값 멀쩡히 내려면 일단 문을 박차고 나가본다. 나가면 또 몸이 기억하는 대로 자연스레 가고있고, 하고있을 나라는 걸 알기 떄문이다. 역시나 세상은 드라마와 영화가 아니다. 현실은 현실이다. 드라마의 '미생'도 시리즈물의 '슬기로운 OO생활' 시리즈도

마냥 밝지도 마냥 어둡지도 않은 모든 이면을 보여줬다. 헌데 삶은 그 순간의 틈에 보이지 않는 후미진 곳이 더 많다는 걸 안다. 회사생활을 통틀어 17년째 접어든 동태눈깔 직장인으로 매일을 마주하면 그냥 산다. 그러면 어찌되었든 살아지니까. 내가 이런 데서 일할 사람이 아닌거 같아도, 다들 그리산다. 그러니 나를 너무 가엾게만 보지 않았으면 좋겠다. 내가 나를 가엾게 여기지 않았음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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