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시드 드림 창비청소년문학 130
강은지 지음 / 창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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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불명의 바이러스로 어른들이 잠들어 버린 세상에서 방황하고 성장하며 어떻게든 이겨내는 청소년의 성장 소설. 어른들의 시계는 멈췄고, 아이들만 남겨진 곳. 겪어보지 못한 상황으로 혼란은 계속되고 조금만 버티면 예전으로 돌아 갈 수 있을거라는 기대를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아이들은 지쳐가고 절망에 빠지게 된다. 흘러가는 시간속에 살아내는 법을 터득하고 숫자로서 분류되는 성인의 나이가 된다. 어른 없던 세상에서 어른이 되어버린 아이들의 세상. 바뀐건 그저 시간이 흘러 나이만 먹은것이며 어제와 오늘은 별반 다르지 않은듯 한데 모두가 어른으로 바뀌었다. 그 경계를 넘어서면 다를 줄 알았는데 그걸 즐길 겨를 없이 세상은 여전히 혼란이고 어찌되든 버텨야하는 세상에 놓여져있다.

이야기는 강희가 남겨놓은 일기로 부터 시작된다. 자신을 애살있게 챙기지 않는 엄마. 기대와 주목은 쌍둥이 강석에게 넘겨진 시선. 어느순간 돌아오지 않는 아빠. 아빠가 보고싶고 그리운 강희. 사춘기 소녀. 아이가 보고있는 세상은 여느 여고생과 다르지 않다. 그렇게 '어른이 되면, 아빠를 만나면'으로 지금보다 다른 세상을 기대하지만 갑작스러운 바이러스 창궐로 어른들이 모두 잠든다. 지쳐있던 어른들이 그렇게 도망치듯 꿈으로 잠적한 것. 어른들도 어른이 되고팠던게 아니었던 거지. 책임질게 많고 마음을 숨기며 살다보니 속 안이 곪은 듯 하다. 그렇게 우울 속으로 파고들어 꿈 속에서라도 마음 편하게 있고픈 자기만의 굴로 들어간다. 그 자리, 그 상태로 잠든 어른들의 표정은 지금껏 보아왔던 모습과 달리 평온해 보이니 어떻게든 깨워야 할지 꿈 속에서라도 평안하길 바라야 할지 마음이 복잡해진다.

📖 미쳐 버린 건 세상이 먼저일까, 사람이 먼저일까? 뭐가 됐든, 미친 세상에선 우리도 미쳐야 했다.

세상의 본보기가 되어주던 어른들이 잠들었으니 규율이 무의미해졌다. 가장 기본적인 의식주 권리마저도 보장받을 수 없다. 잠든 부모의 생명을 유지시켜야했고, 자신도 살아나야 했다. 엄마와 아빠, 할머니, 언니의 울타리 속에 있던 여린 화초같은 아이들이 어른을 챙겼고, 약탈하는 존재와 대립하기도 했으며, 위험을 무릅쓰고 차를 몰고, 자기보다 더 약자인 어린 아이를 챙겼다. 아파하면 잠을 줄여서라도 친구를 치료했고, 나보다 더 급박한 상황이면 마음을 가다듬은 후 양보하기도 했다. 이기주의보단 같이 살려고, 같이 살아내어 이전으로 돌아가려 애썼다. 마치 아이들의 보호자가 자신들에 해주었던 배려와 양보를 빼다 박은 듯 그렇게 따라 행동하고 있었다.



📖남겨진 사람들을 위해, 자신처럼 끔찍한 기억을 안고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

어른들이 스스로를 가둬둔 꿈의 세상을 본 윤서. 루시드 드림을 겪으며 그 속에서 자신만이 누렸던 찰나의 행복 속에 갖혀있는 걸 보며 생각이 많아진다. 꿈속에서라도 행복하는게 나을까, 꿈에서 깨어나 숨가쁘지만 그래도 살아봤던 진짜 삶의 문턱으로 넘어오도록 계속 부르는게 맞을까.

윤서가 잠을 깨우는 과정을 통해 아이가 되어도 봤고, 어른으로도 살고 있는 나는 많은 생각을 하게 했다.그리 많은 시간의 삶을 넘어 온 존재는 아니지만 사람에겐 촘촘한 감정의 겹으로 싸여 있음을 느낀다. 잔망스런 미운 다섯살 시절부터 시작해서, 흑염룡에 씌였다고 우스갯소리로 말하던 중2시절의 질풍노도를 거쳐, 신분증제시하며 당당하게 술 마실 수 있지만 아직 모르는게 많았던 스무살. 책임질게 늘어나더니 이젠 내가 부모님의 보호자가 되어버린 30대의 지금까지. 그러고보면 매번 요동치는 마음의 변화와 감정의 울렁임은 많이 벅차고 감당하지 못할 거라 지레 겁먹었음을 느낀다. 이제와 되돌아보면 제법 잘 버텨왔고 모나지 않게 흘러감을 느낀다. 힘들어도 뭐 내일은 괜찮겠지라며 무던하게 넘어가는 사람으로 바뀌다보니 단꿈이 주는 황홀함보단 현실에서 좀 더 사사로운 행복을 찾았음에 감사하게되는 단단한 마음이다. 그렇다고 꿈에 빠져있는 어른들을 질타하는 것은 아니다. 각자만의 서사가 있었고, 생의 굴곡은 다르니 나는 다행히 잠을 쫒을 재간이 있었다고 말해주고싶은 것이다.



📖우리가 조금 더 어렸다면 꾸고 싶은 꿈을 마구마구 이야기했을지도 모른다. 하늘을 난다거나 마법을 부린다거나, 내가 어떤 나라의 왕이나 영원히 죽지 않는 사람이 되는 상상. 하지만 어떤 상상은 현실로 이루어지기가 어렵다는 것을 이제는 너무도 잘 알았다.

어른들이 가르쳐 주지 않아도 상황과 현실이 알려주는 삶의 방식. 꿈보단 절망을 더 깊게 겪었으니 이들은 꿈에 잠식되지 않겠노라는 마음이 크다. 어려움은 나에게만 오는 것도 아니었고,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버틸 여력을 마련하면 도움 준 만큼 도움 받게되는 삶의 순리를 받아들인 모습이기도 하다.


이야기의 끝이 보일 때 과연 이 책은 '모든걸 극복했습니다!' 라는 급작스러운 화사한 엔딩으로 마무리 하지 않아 좋았다. 이야기를 급히 끝마치고, 이 책을 읽을 청소년들에게 '그래도 희망은 있습니다! 기뻐하시죠!' 라는 강요가 없어 한편으로는 다행스럽다는 것이다. 세상은 유치원에서 보던 전래동화의 해피엔딩만 있는게 아니니 좀 더 현실적인 마무리를 해 준 듯 했다.

이야기가 흘러가면서 아이들은 죽음을 맞이하기도 했고, 많이 다쳐서 생명의 위협을 받기도 했다. 그 틈에서 자신보다 약자를 어떻게든 지키내려는 모습이 짠하고 기특하며 안쓰럽기까지 하다. 어른들은 긴 겨울 잠을 끝내고 서서히 몸을 일으키기도 했으며, 중간에 길을 잃는 이도 있었다. 그리고 더 많은 사람이 잠들 수도 있음을 예견하며 다가올 어떤 일에도 당황하지 않으려 마음을 잡아두고 있었다. 모르고 맞딱들이는 당황스러운 현실보단 두렵지만 다가올 것을 알고 마음을 단단히 먹는 이제 진짜 어른의 모습으로 이야기는 끝이 났고, 잘 버티고 있는 듯 해 마음을 한시름 놓아본다.

팍팍하지만 손만 뻗으면 내 사람의 감촉을 느낄 수 있는 현실, 몽글거리며 행복하지만 손에 잡히지 않는 꿈의 경계. 어른들은 그렇게 도피하는게 맞냐고 버럭 성질을 내고 싶으나 나의 어른들도 어른이 되에 두려웠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보면 처음부터 어른인 적도 없었을 것이고, 지금의 나보다 더 막막하고 무서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면 이 짠하고 가엾은 어른들의 찰나에 무던하게 등을 쓸어내려주고 싶어진다.

지금을 살아가는 어른도, 앞으로 살아가며 어른이 될 아이들도 이 친구들처럼 서로가 무너질 것 같을 때 단단히 손깍지 껴주며 힘을 보태어주길 바라게된다.


📖 출판사를 통해 가제본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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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의독백 - 발견, 영감 그리고
임승원 지음 / 필름(Feelm)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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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한 책을 발견했다. 책등이며 책장의 끄트머리가 표지의 색처럼 주황으로 염색되어있는게 고전 원서 같기도 하면서 비밀에 쌓여있는 듯한 이야기를 꺼내보게 될 것 같은 뉘앙스를 풍긴다. 마지막 단어가...모놀로그가 아니네? 원올로그? 이런 단어도 있었나 싶어하며 모놀로그를 검색해서 내가 아는 정의가 맞는지 한번 더 확인 후 앞의 스펠링을 w로 바꿔서 다시 검색해봤다. 이 책의 저자의 유튜브가 상위에 검색된다. 나무위키가 친절하게 알려주네. 독백이라는 단어와 저자 임승원의 won을 합쳐서 wonologue라는 말로 유튜브를 개설하여 운영중인 크리에이터. 언어 유희에 능한 사람이다 싶으면서 이정도의 위트와 생각이라면 그가 전하는 독백도 마냥 가볍지는 않을거라 생각을 하면서 이 책을 옆구리에 끼고 남아있는 오늘의 시간을 함께 하려한다.


📖 모두를 만족시키는 건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선택해준 당신에게

그렇지 모. 모두를 만족 시킬 순 없지. 모두가 나를 좋아 할 순 없으며, 반대로 모두가 나를 싫어 할 수도 없으니 나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만 더 집중하는 방향을 기대하며 이 책을 선택한 나같은 독자에게 전하고픈 말들이길 기대하게 만든다.




📖이 책은 앞에서부터 차근차근 읽지 않아도 되는 책입니다.

인트로를 지나서 가이드 문구들을 넘어보면 발견 / 영감 / 원의독백 / 코멘터리로 이어지는 4개의 분류.

처음 발견은 스스로의 진짜 모습을 찾아가는 과정으로 보였다. 나를 둘러싸고있는, 나를 표현하기 좋은 단어들에 대한 자신만의 정의이자 단단하게 지키고자 하는 자신만의 사상등이 적혀있는데 이는 그 시절 그 나이 대에 생각했던 신념이며 좀 더 진득하게 이어가고픈 진심이 담겨있었다.

영감을 주는 것들. 좀 더 긴 호흡으로 말하는 것들에는 자신이 해왔고, 이후에도 계속 해가길 바라는 미래의 자신에게 전하는 듯한 충고.

원의 독백. 유튜버로서의 삶으로 살다보니 바라보게되는 모습들. 두 눈으로 보는 것이 익숙했던 사람이 카메라 렌즈로 한번더 꺾은 세상을 보는 사람에게서 듣는 또 다른 삶의 굴절.

코멘터리. 원의 독백을 먼저 읽고 추천 남겨주는 사람들의 인터뷰. 모두가 하나같이 원올로그의 덕후가 되어 원의 독백으로 인해 자기만의 독백의 순간이 오길 기대하는 사람들의 바람들. 그러니 이 모든 챕터를 다 읽고 나면 당신들도 코멘터리를 남겨줄 수 있을 만큼의 원을 덕질하길 바라는 마음처럼 여겨졌다.

글쎄, 아직 나는 완독 하기 전이니까 마지막 코멘터리에 대한 생각은 여백으로 남겨두고 읽어보겠어.




📖 그저 이 이야기는 '가능성'입니다. 누구나 가능성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러니까, 평범한 저도 했으니 당신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시작점 정도라고 할까요.

기대하지 말라하지만 결국은 당신도 기대 하게 될 텐데, 그래도 그 마음을 접을거야? 그럴꺼야? 라는 식의 살짝 얄미운 확신에 대한 확인 문장. 원은 말한다. 위대한 철학적 가치관도, 전문적인 작가로서의 길을 이어온 문인도 아님을. 그렇지만 그럼에도 글을 쓸 수 있었고, 이렇게 내 눈앞에도 있듯 결과물로 손에 쥘 수 있음을 시사했다.

이걸 보니 남편이 나에게 했던 말이 떠오르더라. '언제까지 남의 이야기에 대한 코멘터리만 써 줄 꺼야? 당신도 당신 이야길 써도 될거 같은데, 이미 충분할 거 같은데 왜 망설여? 크리에이터 수업도 들어보며 독립출판 클래스도 많이 하더만 해보는게 어때? 브런치에서도 쓸 수 있고, 당신 블로그에 간행물로 하다가 시도해봐도 되지 않아? 해볼래? 강요는 아니고, 해도 좋을거 같아서....' 이 많은 문장들이 한방에 와르르 쏟아져 나에게 온 건 아니고 잘 지내다가도 한 마디 씩 툭툭 던져가며 잔잔한 내 마음에 물결을 치고 아닌척 쑥 빠져버리곤 했다. 내가 남의 의야기는 잘 듣고 감 나라 배 나라는 잘 할 수 있는데 내 이야기는 한 없이 평범하고 지루해서 안된다고 해도 씨알도 안 먹히는 답변을 해주는 사람이다. 저 사람들도 그리 대단한 삶은 아냐. 결국 이야기는 표현하기 나름이니까. 충분하니까 해봐. 기한을 잡지 말고 그냥 써봐. 라는 식의 대화로 나의 가능성에 대해 말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남편이든, 저자든 모두 하나같이 '가능성'에 대한 큰 힘을 믿는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가능성'은 늘 과반수를 넘지 못하는 그거 그런 작은 외침밖에 되지 않았는데 나 이외의 사람들은 어찌그리도 그 단어가 크다고 여길까. 가능성의 가능성이라. 믿음에 많은 배신을 당한 나라서 그런가 가능성이 줄 힘을 아직 잘 모르겠다.


📖 일찍 일어나 여느 사람들과 똑같이 출근하고, 함께 밥을 먹으러 가고, 퇴근 시간이 되면 일제히 집을 향해가는 사람들 틈에 섞여 버스에 오르는 삶. 그래야 나라는 사람이 옆에 있다는 걸 알아줄 테니까.

이건 평범한 삶이길 바라는 사람의 기대치이며 무난하게 살고 싶어하는 군중속 무리를 지향하는 인간의 심리다. 내가 그렇다. 꿈과 열정을 버리고 택한 삶이 이런 것이며, 지금까지도 이어지고있는 삶의 패턴이다. 소심한 관종끼가 다분했던, E의 기질이 한줌 정도 더 있던 10대엔 특별한 삶을 꿈꾸며 남들이 놀 때 그렇게 놀 수 있도록 판을 깔아주고픈 사람이 되고자 했다. 허나 내 인생에 입김을 불어넣는 사람들에게 휘청이다보니 20대 후반부터는 저자가 말하는 루틴을 갖고 24시간을 주5회씩 도장 찍어내듯 복사 붙여넣기 하고 있는 삶으로 살고 있다. 싫은건 아닌데, 그렇다고 기깔나게 좋은것 또 아니고, 때때로 이전에 꿈꾸던 삶이 어떤지 맛도 보지 못해서 그런가 뒷북치듯 이제서야 눈길이 가긴 한다. 이제는 E의 성향보다 하다못해 소문자 I의 성향으로 기울어진 삶으로 굳혀진 인생이되었다. 남들 쉴 때 다 쉬고 남들 일할 때 그냥저냥 일하며 얇고 길게 가는 삶이 최고구나를 생각한다. 내 사업 보다 남의 회사 노비마냥 출퇴근 똑바로하고 하라는 것만 야무지게 한 후 더 잘 하려고도 안하는 월1회 통장 찍히는 만큼의 삶. 이러한 삶의 방향성만 봐도 나는 크리에이터가 되긴 글러먹은 떡잎같네.



📖 그래서 나는 무작정 호의를 베풀 수 없다. 베풀었던 호의가 손해로 돌아오면 상실감은 몇 배로 크다. 절대로 손해 보지 않으리. 굳게 결심하고 야심차게 집 밖으로 나선 그날 아침, 이름 모를 남자의 어깨빵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그리고 이내 사과를 받았다.

.... .... 이윽고 그 승리가 나를 괴물로 만들었다는 걸 깨닫는다. 배려라고는 하나도 모르는 자들. 나는 내가 혐오하는 그들 중 하나였다.

이런 생각과 마음들. 그거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못된 성질머리 구간 아니었나? 나도 종종 그리 생각했는데 말이다. 당연하리만큼 삐딱하게 봐지는 삶의 매운 구간인데 이게 있어야지 다른 사람들의 미운 구석을 알 수 있고 나도 그 사람을 미워함과 동시에 그러한 짓을 따라 하고 있다는 걱 자각하며 나는 저딴 인간처럼 살지 말아야지를 알아채는 과정더라. 그래도 이정도면 양반이지. 똑같이 했더라도 금새 알아차리고 고개 저어가며 머릿속에 있는 나쁜놈을 떨굴 수 있으니 말이다. 그나마 나는 혐오하는 것들 중에 개선이 될 놈이라 생각하기로 하자.




📖 모든 것을 안고 갈 수도 없다. 하고 싶은 것들 중에 하나만 할 수 있다. ... ... 그렇기 때문에 나는 '연비 주행'을 해야한다.

삶은 장거리 운전이었다. 엔진소리 빵빵 틔워가며 전력질주 한들 코앞에 있는 신호에 멈춰버리면 연비도 안 좋고, 브레이크 밟는 횟수만 늘어날 뿐이다. 그러니 좀 길게 보고 좌우 사이드미러며 룸미러로 내 뒤를 경주마처럼 압박하는 것들에도 주시하며 이리저리 차선도 변경 할 줄 아는 요령피우는 놈으로 살고파진다. 매일매일 왕복 60KM를 운전하고 다니다보니 나도 요령이라는게 생긴 것 처럼, 내 삶을 주행 하는데에도 딱 이정도의 꼼수가 하나씩 늘어가길 바랄 뿐이다. 나는 여전히 내 차 뒤에 초보운전 스티커를 붙여두고 있다. 할 줄 안다고 나대다가 시야밖의 무언가에 큰 이벤트가 생길 수도 있으니 하나 정도의 제어장치를 쥐고 있는 셈이다. 연비 주행하고, 눈치 주행하며, 떄때로 꼼수 변경도 하면서 그렇게 마음의 엔진이며 절제의 브레이크 패드가 다른 이들보다 늦게 마모되길 바라는 삶의 주행. 그걸 바라는 거다.



📖 무조건 좋아하는 걸 하라니. 내 인생을 책임져 줄 건가? BUT, 우리는 좋아하는 것을 해야 한다. 그 이유는 단 한 가지, 효율이 좋기 때문이다.

일머리를 아는 것 만큼이 중요한게, 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며, 그 것에 대한 재미를 알아서 뭘 하더라도 눈에 총기가 있고 밀고 나갈 수 있는 욕망덩어리가 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했다. 그게 결국 지 좋은 것만 하는 사람들의 모습이었다. 내가 좋아서 하는거니까 어떻게든 해 내고 싶은 마음, 더 잘 하고파서 근질거리는 손. 그게 잘할라고 하는 사람들의 드글드글 거리는 손이라는 것에서 보면 진짜 좋아하는 것을 이길 자는 없음에 말의 힘을 보태본다. 뭘 하든 애정만큼 큰 부스터는 없는걸 나도 느끼며 살아왔으니 저자가 한 이말은 진짜 찐이다.

관련 전공자가 가진 어휘 구사력이라던지 말을 끌어가는 힘을 무시 할 순 없다. 하지만, 비 전공자(나처럼 저자도 경영학 전공이네?)가 끌어 낼 수 있는 마음의 일렁임은 또 다른 끌림을 안겨준다. 사적인 발견이며 누구나 영감이 되는 나, 너 우리에 대한. 모두의 오리지널리티에 관한 기록이 담긴 이 시그널은 결국 우리가 비슷한 사람들이라는 것에서 부터 시작했다. 코멘터리 파트에서 보면 류덕환 배우는 저자의 글을 본 후 모두가 독백하길 바라며 세상은 나에게 관심이 없으니 나에게 관심을 줄 수 있는 건 오롯한 '나의 독백'뿐임을 말해줬다. 마케터이자 작가인 이승희님은 책에서 다큐를 마주했다고 적어둔 문장에서 확신했다. 그가 하고픈 말은 결국 '다큐 3일', '인생극장' 같은 진짜 사람들의 이야기와 닮아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지금 할 수 있는 생각, 지금만 느낄 수 있는 감각, 잊고 싶지 않아서 시작한 '원의 독백'처럼 당신들만의 독백 파트를 꼭 마련하길 바란다. 어찌어찌 하다보니 나는 블로그를 통해 나만의 독백을 하고있었음을 깨우치게 한 저자의 단상들을 통해 나도 나만의 독백을 긴 호흡으로 끌어가고 싶어진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완독 후 작성된 기록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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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말은 안 되지만 트리플 27
정해연 지음 / 자음과모음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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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의 단편이 싣려있는 소설이다보니 등장인물이 복잡하지 않다. 인물관계도를 그려가면서 머리싸매고 책을 째려보듯 뚫지 않아도 된다. 그래서 이동하는 기차 안에서도 훌렁훌렁 페이지가 넘어가더라. 그럼에도 전달하고자 하는 이야기는 제대로 박히는 기분.




제목에서도 언급했지만 결국 제 보고싶은대로, 제 마음대로, 제 듣고싶은대로 그렇게만 받아들이는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였다. 이는 '미스터리-공포-환상'으로 이어지는 장르의 세계관의 모음이기도 했다. 출판사에서 알려준 '현실적인 말 안 되는 세상'에 이야기 이다보니 그 세계에서 미간에 힘을 주고 보게되며 호흡할수록 침잠하는 생의 두려움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게된다. 




 


📖관심이 필요해_ 속았다. 아니, 속은 것은 아니다. 눈이 가려져 있었다. 제대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색안경을 끼고 있었다. 과거라는 이름의 색안경. 자신이 당한 것을 아이도 당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자신이 겪은 모정을 일반화했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자신의 삶에 있어 아주 진득하과 명확하게 겪어온 것이니 그게 당연하게도 믿는 증명과도 같았다. 과거의 중혁이 그러했으니 영우 또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라 여긴 건 남이 보면 착각이고 자신이 마주 할 땐 다들 그리 겪는 것으로 체감하게되는 학습의 결과물이겠지. 아마 나 같아도 그랬을거다. 나도 겪었는데, 쟤도 그러지 말란 법은 없으니까. 형사든, 프로파일러든 그러한 중립적인 입장으로 마주하는 직군이 아니라면 이러한 단면적인 반응이 오히려 당연했을수도 있다. 나는 중혁이 품었던 의문과 신고에 대해서는 차라리 잘 한 일이었다고 말해주고 싶다. 이렇게라도 문제를 끌어냈으니 엄마가 아니라 아이의 거짓말이라는 것도 알게 된 거니까. 과거 어린 중혁은 커서도 고생을 했지만, 현재 어린 영우는 엄마의 잘못도 아니고 영우가 치료 받으면 되는 결론으로 마칠 수 있어 다행스러울 뿐이다.




📖관심이 필요해_ 아이를 간호하느라 일을 나가지 못해서 머리를 조아리고 사죄하느라 주변의 시선 따윈 아랑곳하지 않던 그 여자에게 아이를 잘 돌보라고 말해야 한다. 살기 위해 허덕이는 사람에게 당신 때문에, 당신에게 관심을 받으려고 아이가 계속 병을 얻는 거라고 말해야 한다.

때때로 누군가의 진심어린 시선과 손길이 어떠한 필터를 거치면 큰 문제를 감추기 위한 하나의 트릭으로 보이기도 하며, 자신을 더 돋보이기 위한 수단으로 느껴 질 경우가 있다. 살아온 학습의 효과 일 수도 있고, 다양한 사례들을 통해 얻어진 데이터의 비중이 그리로 향한다면 선이 악이 될 수도 있고, 악이 선으로 덮여질 수 있는 장면들이다. 우린 아무런 필터 없이 오롯이 현상만을 마주하고 대응 할 순 없다. 그간 살아온 경험과 귀동냥 해서 얻어진 정보는 다른 이들보다 잘나고 우월하게 비출 수 있는 무기가 되니 손발 다 잘라둔 채 눈알만 굴려가며 바라보는게 어렵다는 것이다. 중혁만의 방식으로 표현한 관심이었고, 중혁만이 할 수 있었던 의심의 가닥이었으니 나는 그 관심과 예측을 감사하게 여길 뿐이다.



📖드림 카_ 도움받을 거라 기대했다가 당하는 거절은 더한 수치심을 동반하기 마련이다. 자괴감에 치를 떨 것이다. 그런 상상을 하니 기분이 좋아졌다.

돈이든 능력이든 설령 무리에서 뒤쳐지는 카드를 쥐고 살았다가 바뀐 판세의 흐름이라 할 지라도 이 놈의 내면은 원래부터 이렇게 악아 받친 놈이었음을 짐작하게하는 문장이다. 그냥 외면하면 그만이고, 모르쇠 하며 저 혼자만 잘 살며 신나게 살아도 될텐데 굳이 이렇게까지 한다는 걸 보면 받은걸 되갚기 보단 곱절로 얹어서 치를 떨며 떨어져나가길 바라는 심리가 얹어져있어 이놈은 이야기 끝에 뭔가 호되게 당하겠구나를 내다보게 만든다.




📖말은 안 되지만_ 혐오감으로는 말이 훨씬 앞서지요.

... ... ...

그냥 이대로 살면 안 되겠어?

분명 사람이었었다. 헌데 자고 일어나니 말이 되었다. 그리고 다른 가족은 돼지가 되었다. 그럼 전부 이상한건데? 라는 생각을 하지만 이 변화는 당연한 인간의 변태 과정이었고, 말이든 돼지든 우월함을 문제 삼는 것이 아니라 다수와 소수의 비중에서 한 쪽은 일반화로 간주되고 다른 한 쪽은 기이한 무언가로 덮어두고 숨겨야하는 부류로 변모하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으로서 보기엔 돼지든 말이든 도긴대긴인데 그들의 세상에서는 거진 하늘과 땅의 구분처럼 대하고 있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라도 성형이든 제모든 외형을 숨겨야했고, 집밖으로 나오지 못하도록 하면서까지 수면아래로 잠식하게 하려는 반응을 보며 어딘게 모르게 익숙한 냄새를 풍긴다.

겉 껍데기가 바뀐 상태이며, 보여지는 것으로 인해 혐오를 표출하는 세상. 분류하는 종이 바뀐 거니까 뭐 그렇다 쳐. 그런데 인간은? 지금 내가 살아가는 세상도 이딴 혐오로 뒤덮여있었던걸 잊고 있었다. 같은 인간인데 생김에 따라 눈에 힘주고 부정적인 반응을 내리 꽂는다. 잘생기고 예쁜걸 떠나서 외형적으로 본인의 마음에 들지 못하거나 질병이나 사고로 인해 남들과 다르다고 감추려하고 숨기려하는 걸 심심찮게 봐왔다. 돼지가되고 말이되어버린 세상이나 다 같은 인간인데 지들끼리 위아래로 줄세우는 세상이나 죄다 질리게 만드는 가학의 재능꾼들이시다.





📖말은 안 되지만_ 수많은 어쩌지가 가슴에서 순식간에 씻겨나갔다.

평범하게 살거면 소수보단 다수의 무리에서 숨듯 살아야했고, 그게 안되는 소수의 부류라면 뭐 하나라도 잘나야 욕 덜 먹으며 그나마 인정 받는 존재로 살 수 있음을 보여준다. 말이 되고 훈련을 하고 뒤쳐지는 다른 이들을 마주하며 보고 듣고 느끼는 과정을 보니 제발 이 장면들이 지독했던 꿈이길 바라게된다. 앞서 말한 것들에서 다 해당이 안되면 다들 그렇듯 미친놈으로 분류되거나 말고기처럼 취급받는거지.

그래도 다행이다. 이야기의 끄트머리에서는 가족들이 홀로 말이 된 존재를 외면하지 않았으니까. 어쨌든 가족이고 제 새끼였으니 마구간을 지어두고 하염없이 기다렸을 사람들을 떠올리면 울컥하게된다. 이 가족들은 그래도 앞에 있던 단편의 인우같은 놈은 아니구나에 깊은 숨을 몰아쉬며 '어쩌지? 어쩌나!'를 두고 발끝을 콩콩 찧으며 망설였던 순간을 무색하게 만들어주어 세 작품을 통틀어 가장 마음을 놓이게 만들었다.




세 편의 소설 / 세 종류의 글 / 작가-독자-작품을 잇는다는 의미의 트리플 시리즈의 27번째 도서.

반전은 있지만, 결말도 나왔지만, 개운하지 않을게 분명해보이지만 읽어내야겠다는 마음으로 시작해보았다. 작품마다 그 속에 빠져들면서 이 각각의 작품을 좀 더 긴 호흡으로 봤으면 어땠을지 생각해본다.

중혁의 시선을 넘어선 영우의 시점을, 그리고 영우 엄마의 숨가쁜 삶으로 녹아들었다면 이 이야기는 지금과는 다르게 진부하게 느껴졌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니라면 심리치유의 분류로 넘어가 늘어지는 가닥을 붙잡아가 뻔한 이야기로 흘러갈만한 시점에서 담백하게 멈춰주어 독자게엔 더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든 글이었다.

사람의 욕망이 지닌 잔인함. 부를 얻은 과정을 처음부터 다 내어놓지 않아 좋았다. 인우가 마이바흐를 몰기 전과 후로 비교하게 되는 시선과 대우. 이건 돈이 주는 우월성도 있었지만 이야기의 끝에 독자가 체감하기엔 그 돈마저 그리 써야하는 놈인가? 싶어하며 혀를 차며 바라보는 시선들이기도 했던 거였다. 자신은 부러움으로 해석했던 눈길이 진실에서는 치욕스러운 놈을 바라보는 분노의 시선으로 힘주어 봤던거라는 결론을 내어주었다. 이 놈 마저 결국 제가 보고 싶고 제가 원하는 대로 받아들였던 주위의 반응이었다.

마지막 소재는 제일 말이 안 되는 것임에도 제일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쉬웠던 마음이다. 글의 주인공만 말이 된 건데 사람이 말이 되나 돼지가 되나 둘다 매한가지로 이상한 일임에도 변화된 모습에 대한 혐오보다는 수적인 열세로 다수가 아닌 소수의 분류에 들어가는 것으로 받게되는 대우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를 수도 있지만 달라서 세상이 무너질 듯한 감정을 모든 감각을 통해 얻어낸다. 무리에서 튀어선 안 되지만 그렇다고 모자란 놈이 되어서도 안되는 집단. 걔중에 쟤보단 나아야되지 않겠냐며 밟고 올라서야하는 생각을 갖게 만들며 눈알 열심히 굴리고 살아야하는 고달픈 말 안되는 삶을 그려냈다. 그래서 서글픈 우리 이야기 처럼 느껴졌다.


현대과학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것에서 오는 공포는 없다. 결국 사람이 제일 무섭더라는 말로 마침표를 찍어도 될 만큼 사람이 하는 편향되어있는 관점에서 훅 밀고 들어오는 것들이 두려웠다. 같은 껍데기를 덮고있는 인간임에도 다른 생각을 통해 선을 그어 '금을 밟았어? 금을 넘었다고?' 바로 거부반응 일으키게되는 감각의 반응들이다. 아는데 거부할 수 없는 두려움이 온 감각을 따갑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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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내 이름은 루시 바턴 루시 바턴 시리즈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지음, 정연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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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히 잠들지 못했던 날. 창밖의 풍경을 멍하니 보는것도 지겹게 느껴지던 밤이라 휴대폰만 만지작 거리며 몇시인지 들춰보던 시간. 인스타그램에 서미란PD님이 라이브 한다는 알림이 떠서 오랫만에 마주한 목소리였다. 푸른밤이 끝난 후로 딱히 라디오에 애정을 못 쏟던 날들. 별밤이 내 취향이 아니기도 했고, 긴 시간동안 푸른밤의 팬이었고, 서미란PD님의 이야기를 좋아했던 터라 반갑게 들었던 목소리였고 책 이야기 였던건지도 모르겠다. 사담이 컸던 라이브였지만 소소한 인원 덕에 좀 더 가까이 이야기하는 느낌도 있었고, 매번 추천해주시는 책이 좋았기에 꼭 읽어봐야지 라며 캡춰해두었던 라이브방송의 배경 화면. 문학은 좋아하지만 다른 나라의 저자의 글은 가까이하지 않았던 날들이다. 독서 편식도 심하고, 타국 저자들의 세계관이든 글의 결이든 뭔가 내 정서에 맞지 않다 생각해서인지도 모르겠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의 글은 이미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고, 시리즈처럼 여겨지는 책이지만 순서를 정하지 않고 읽어도 될 이야기라고 했었다.

출판사에서 제공한 책소개를 보면 저자의 글에는 늘 관계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전했다. 복잡 미묘한 인간관계와 다층적이고 모순적이기도한 인간의 내면을 그려내는 것에 탁월함을 보이는데 이 책은 과거를 회상하며 삶의 의미와 가치를 찾아가는 여성 소설가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일인칭 화자로서 한 인간을 에워싸고있는 인생의 의미와 함께 주변인들로부터 이뤄지는 존재성, 정체성에 대한 견해를 가장 명확한 자기 예시를 통해 알려주고있음을 볼 수 있었다.




📖 엄마가 이곳에 와서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애칭으로 나를 부르자 내 몸이 따뜻해지면서 액체로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내가 느끼는 모든 긴장감이 예정에는 고체였는데 이제는 아닌 것처럼. 대체로 나는 한밤중에 깨어 자다 깨다를 반복하거나, 유리창 밖 도시의 불빛을 바라보며 뜬눈으로 밤을 새우곤 했다. 하지만 그날 밤에는 한 번도 깨지 않고 깊은 잠을 잤다. 아침에 눈을 뜨니 엄마가 어제 앉아 있던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괜찮아."

엄마라는 존재가 애틋함을 주는 무언가가 있긴 하지만, 그녀에겐 더욱 의아한 등장이었다. 오랜시간동안 왕래가 없었기도 했으며,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상호작용이라는 느낌보단 애정을 갈구하는 과거회상이 더 많았기에 애칭으로 불러주는 한 마디와 편히 잘 자도록 진득히 바라봐주며 잠에서 깨어난 후에도 있어주는 그 존재가 주는 안정감이 남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어린시절 그토록 바라던 거였는데 뜻하지 않았던 장소에서 마주했으며, 아이의 엄마가 되어버린 나이든 자식에게 하는 애틋한 애칭이라니.

후반부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둘째를 임신하고 남편과 말다툼을 했던 날. 엄마와 아빠가 보고싶었고 문득 어린시절의 한 장면도 떠올랐다며 그 모든게 사무치도록 그리워 부모님 집에 전화를 걸었고, 교환원이 엄마에게 했던 말과 돌아오는 대답에 한없이 무너지던 순간이 있었다.

루시 바턴이 통화를 원하는데 요금을 지불하겠느냐는 물음에 엄마는 "아니요. 이제는 그애한테도 요금을 지불할 만한 돈이 있을 테니 직접 내라고 전해주세요." 라는 말을 교환원을 통해 전해듣는 순간. 나는 온전한 사랑을 전했고 그 온전한 마음이 닿아서 자신도 그렇게 귀하고 애틋하게 여겨지길 바라는 마음이었을텐데 막혀버린 벽에 대고 외사랑을 하고있는 모습처럼 느껴져 이 사람의 어린시절은 얼마나 더 시렸고 아렸을지를 생각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크리시가 지금의 남편에 대해 말하며 아이가 받았을 상처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자신이 겪어낸 아픔과 자신의 분신과도 같은 아이가 겪어내고 있을 아픔의 고리. 자신도 어린시절 기억에 붙들려 살고 있었고, 아이또한 붙잡고 어찌 하지 못하며 살아갈 기억의 꺼풀에 대해 많은 생각과 걱정을 하게 만들었다.


우리가 아이였을 때 품게 되는 아픔에 대해, 그 아픔이 우리를 평생 따라다니며 너무 커서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그런 갈망을 남겨놓는다는 사실에 대해 내가 아주 잘 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그것을 꼭 끌어아는다. 펄떡거리는 심장이 한 번씩 일으킬 때마다 끌어안는다. 이 기억의 조각은 시간이 흘러도 사라지지 않으며 미화되어 자신의 착각했던거라며 예쁘게 포장 할 수도 없다. 루시는 반복해서 자신의 기억과 진술이 사실이 아닐수도 있음을 밝히지만 불안전한 기억과 타인에게 받았던 감정은 그렇게 오랫동안 잔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꾸준히 기억하고 꾸준히 곱씹었으니 그 기억에 살점이 붙고 일정 부분은 흐릿해지겠지만 그 때의 자신이 겪어낸 감정은 지울 수 없는거니까. 그게 좀먹고 흐릿해진다 한들 없어지는건 아니니까.





📖 책이 내 외로움을 덜어주었다. 이것이 내 말의 요점이다. 그래서 생각했다. 나도 사람들이 외로움에 사무치는 일이 없도록 글을 쓰겠다고!

학교에서 받는 대우를 부모에게 편히 말 할 수없던 시절. 그리고 아이들과 거리를 둘 수 밖에 없던 상황. 춥고 아무것도 없는 집에 있을 바에 학교에 머물며 지내는게 오히려 더 편했던 과거까지. 공부를 하고싶은 마음보다는 따뜻한 교실이 주는 안정감이 좋아서 공부했던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면 외로움과 서글픔은 그녀를 빨리 어른으로 만들었으리라 보였다. 외로움을 채우는 데엔 책이 한몫했던 자신의 시절을 떠올리면 분명 자기와 같은 사람들이 있으리라는 생각과 함께 같은 감정을 느끼지 않았으면 하는 연민에서 오는 목표로 보였다.




📖 내가 무엇보다 원한 건 엄마의 목소리 그 자체였다. 엄마가 무슨 말을 하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엄마의 목소리 자체에 귀를 기울였다.

나이가 어리든 많든 엄마라는 존재가 주는 안정감은 확실하게 보장된 요소일지도 모른다. 각각의 사정이야 어떻든 보편화된 존재의 의미가 그러하다는 뜻이다. 지지고 볶고 싸우고 어느 하나가 삐쳐서 안본다고 가시돋힌 말을 하더라도 다른 한쪽은 애절하고 애틋함이 있다. 그게 특히나 엄마와 딸 사이라면 더 그러하다. 그래서 나는 이 말을 공감한다. 미사여구를 다 떼어놓고 보아도 단어 그거 하나. '엄마'라는 말에는 큰 눈물버튼이 있거든. 그러니 그녀 역시 대단한 사랑과 따스한 마음을 원없이 얻지 못했던 시절이 있더라도 그냥, 그러니까 진짜 그냥 엄마라는 존재로서의 곁에 있는 그 기운을 그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또 외사랑이지 모.





📖 누군가가 그 자신은 인식하지 못한 채 스스로 망신거리가 되었을 때 그 사람의 실수를 덮어주는 것. 내가 그렇게 하는 이유는, 내 생각에, 많은 순간에 그런 사람이 나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병원에 있는 그 기간동안 엄마가 곁에 있었던 잠깐을 담아두었지만 이야기는 과거 회상을 하며 어린시절 겪어낸 순간과 현실 속 나이든 자신의 지금 감정을 교차하며 담아두었다. 이건 병원에서 상담치료를 받는 느낌이 들기도 하며, 스스로에게 그럼에도 잘 자랐고 지금은 괜찮지? 라는 식으로 다독이는 기분을 받게된다. '그때의 나는 이게 최선이라 생각했고,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는데 이 이야길 듣는 당신도 그렇다고 해주겠죠?'의 공감을 기다리는 뉘앙스도 받았으며, 그 판단은 여전히 유효한데 엄마가 갖고 있던 그 기억도 같으면 좋겠다는 기대를 품으로 계속 엄마의 반응을 살피게된다.

침상 옆에 있는 엄마와 이야길하며 나눈 주제들은 대단한게 아니다. 주변 사람들을 바라보며 하

는 시시콜콜한 잡담같은 것. 몇년만에 엄마를 마주한게 아니라 지난주까지 있다가 며칠 쉬고 다시 병원에서 간병하러 와준 제일 가깝고 제일 편한 사람처럼 서로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길 한다. 이 모습만을 볼때 그녀가 이야기했던 과거사가 허상은 아닐까 싶을 정도이니 서로가 느끼는 시간의 간극은 정말 다름을 느끼게한다. 엄마만의 방식, 딸 만의 생각만 있는 것이지 서로에게 강요하고 맞춰주길 바라면 안되는 정말 다른 성향의 존재라는걸 인식하게 만든다.




📖 이번에는 내가 시카고에 있는 병원에 가서 엄마의 침대 발치에 앉게 되었다. 나는 엄마가 내게 준 것을 엄마에게 돌려주고 싶었다. 내 곁을 지킨 그 며칠 동안 잠도 자지 않고 주의깊게 돌봐준 엄마의 그 한결같음을 돌려주고 싶었다.

역시나 내맘과 네맘이 나란하지 않구나를 느끼는 문장. '나는 엄마가 왔었던 그 순간이 별거 아닌거 같아도 좋았는데, 엄만 아닌가봐?' 라는 까칠하고 싸늘한 속마음을 대놓고 드러내고 싶어지는 부분이다. 당신의 사랑을 바라지 않았지만 당신의 존재가 그리웠고, 당신이 나를 필요로 하는 순간이 있다면 기꺼이 모든걸 내어줄 준비가 되어있지만 상대는 선을 그어두고 넘어오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엄마라면 자식을 보호해야 하는 거라 했던 말처럼 자식이라면 엄마를 지켜야하는 건데 왜 이들의 상호작용은 늘 어긋날까?

모든걸 나란히 둘 수 없는 관계성이다. 엄마와 루시만의 관계가 가장 컸지만 자라오면서 느낀 환경에 대한 다름도 관계성의 일정 부분을 차지했다. 빈부의 차로 인해 느껴지는 가난과 멸시. 약자로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던 학대의 기억까지. 좀 더 세련되지 못함에서 오는 시선과 출신지에 대한 자부심의 정도. 이웃의 불행이나 주변인들에 대한 서슴없는 혐오. 이건 가십거리이며 대화를 이어가기 좋은 심심풀이 껌과도 같은 비교였다. 루시는 그게 싫었지만 결국 그녀도 별반 다를바 없이 그러한 심기를 내비치며 동요하길 바란다. 결국 삶이란 드라마틱하거나 디즈니 만화처럼 내가 원하는 대로 이뤄지길 바라며 비비디 바비디부 노래 부를 수 없는 것임을 보여준다.

미련도 있고 아쉬움도 있으나 뭐 어쩌겠어 삶은 계속 되는 걸. 이게 결국 내 이야기 이고, 이 모든게 루시 바턴의 삶인걸 그냥 받아들여야지 모. 라는 식으로 그렇게 흘려보낼 수 있다는게 신기할 뿐이다. 서럽고 화나고 마음아프고 울컥하기도 한데 그럴수도 있지 라는 식의 반응에 이게 된다고? 라는 말만 반복하게된다.

내 성깔은 그러지 못하는데 이게 되는 루시 바턴이라니. 와... 나는 안될거 같아. 나는 글러먹었어. 이게 안되는 성질머리야.(˘・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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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루코와 루이
이노우에 아레노 지음, 윤은혜 옮김 / 필름(Feelm)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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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떠나고픈 마음을 먹게 만드는 책 표지와 함께 '인생 2회차, 두 여자의 통쾌한 질주'라는 말에 더 구미가 당겼는지도 모르겠다. 책띠지에도 적힌 것 처럼 '일흔 살에도, 그 이후에도 삶은 여전히 반짝일 수 있다!'는 말에 일흔살을 지는 해로 표현하지 않아서 마음에 들었고, 여전히 청춘 일수도 있겠다는 기대를 가지게 되는 문장들 속에 내가 살아갈 미래의 순간이 책 표지의 그녀들처럼 역동적이면 좋겠다는 생각이 가득해진다. (요즘 청춘에 관련된 음악을 주구장창 들어대서 더욱 와닿았나보다) 몇번 눈만 깜빡이면 나도 40대가 되어있을거 같아 주인공들 나이에 더욱 예민하게 감정이입했는지도 모르겠다.



가부장적인 남편을 두고 떠나는 '데루코'와 노인 아파트에서 뛰쳐나온 '루이' 일흔살 동갑내기인 그녀들이 감행한 일탈. 참기만 했었고 자신을 우선 순위에 두지 않았던 삶이었다. 결국 꾹꾹 누르던 마음이 팡 하고 터진 루이는 데루코에게 신호를 보냈고, 그녀 역시 같은 마음으로 함께 나선다. 70년 동안 그림자처럼 자신을 뒤로 숨겼던 과거를 놓아두고 진짜 나를 찾으려 떠나는 여정. 일탈? 해방? 자유? 그걸 넘어선 자신의 존재 이유를 찾으려는 모습을 통해 더 늦지 않아서 다행이다 싶으면서, 그간 참아왔을 당신들의 삶이 애틋해진다.




이들을 보면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르기도 하지만(책 뒷부분 옮긴이의 말에 보면 '델마와 루이스'를 오마주한 작품이라 언급했음), 노희경님의 디어 마이 프렌즈 속 정아와 희자가 떠오르기도 한다.(앞서 언급했던 두 작품과 함께 데루코와 루이 역시 차를 타고 신나게 달리는 여인의 모습을 보면 일탈이라는 단어보다 자유라는 의미가 더 선명하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는다)

나의 삶도 그렇게 특별나거나 화려하진 않지만 책 속의 그녀들 역시 주변에서 볼 법한 아줌마, 할머니의 삶으로 넘어가는 과정인데 어떻게 다들 한결같이 희생을 강요하듯 자신을 후순위에 두는걸까를 생각해보면 천성이라기보다 그럴 수 밖에 없던 환경을 탓하게된다.

결혼생활을 하든, 화려한 솔로로서 복권 당첨금으로 노인아파트에 들어가 멋드러진 싱글라이프를 살든 각각의 삶의 테두리 안에서는 열심히 살았고, 또 그만큼의 행복을 누렸겠지만 그 너머의 세상이 궁금했을 것이고 한번 사는 인생인데 그 한번의 기한이 얼마 남지 않은거 같으니 안 해본것, 못 해본 것들이 탐이났고 그래서 감행한 진심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의 퇴직금 계좌 비번이 그와 그의 여친 이니셜과 각각의 생일이라는 걸 통해 마냥 사랑받고 살던 세월은 아니었다는 것도 느꼈고, 살면서 제 집 앞마당의 눈을 치워야 좀 더 편한 내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부지런함도 깨우친다. 그렇다. 세상을 잘 안다고 여겼는데 매번 이렇게 뒷통수 쳐 가며 눈 똑바로 뜨고 살라고 말해주는 에피소드들로 가득하다.




📖 잘 있어요. 이 한마디면 충분하다 싶었지만, 억측의 여지를 남겼다가는 쓸데없이 일이 커져서 뒷수습이 귀찮아질지도 모른다. 잘 있어요. 저는 떠납니다.

데루코가 남편에게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였다. 정중한 굿바이 인사. 부들부들 떨면서 아내를 찾지 않도록, 그리고 정말 진심을 다해 마침표를 찍고자 하니 성급한 결정이 아님을 드러내는 부분이었다. 사건 사고에 대한 걱정과 더불어 실종 신고라도 하며 호들갑 떨며 남 탓을 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과 더불어 도시로 자신으로 인해 일어난 결과라는 걸 담담하게 받아들이라는 뉘앙스이기도 했다.

45년에 이르는 결혼 생활이 마냥 행복하고 순탄하지만은 않았다는 걸 비춰주는 데루코의 울분의 인사였다. 운전을 가르쳐 준 것도 함께 드라이브하며 행복한 순간을 보내기 위함이 아니라 술마신 도시로를 데리러 가던가 술마실 예정일 도시로를 모셔다 드리는 대리기사노릇을 위한 것. 모두의 행복이 아니라 일방적인 한 사람을 위한 편의를 위한 것. 그걸 40년 가까이 해댔으니 이제 데루코는 온전히 자신을 위한 핸들을 잡은 것으로 보여 은색 BMW를 잡은 손이 결연했으리라 느껴졌다.

요즘 심심찮게 보이는 황혼이혼과 졸혼의 과정이 이 부부에게도 필요했나보다. 마냥 행복 할 순 없겠지만 마냥 불행할 수도 없으니까. 그러기엔 우리의 삶에 2회차가 있으리라는 보장도 없으니 데루코는 더 늦기전에, 더 주저하기 전에 딱 이 날만을 기다렸는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그 외의 일들도 우리 스스로 해내고 싶었으니까. 우리의 긍지 문제예요.

각각의 삶에 쳐져있던 바운더리를 벗어난 새로운 시작. 설렘과 동시에 두려움을 더한 걱정이 가득한 낯선 걸음들. 뭐든 해 내야 했다. 그러니 주저해서도 안되는 것이었고 피할 수도 없음을 보여주는 표현법이었다. 스스로 해내야 했고, 그래야만 다음을 기대 할 수 있음을 아는 삶을 좀 살아본 사람다운 답변이었다.

소형 트럭을 몰아보는 것도, 자투리 목재를 구하러 가는 것도, 친구를 데리고 나오며 화목난로 앞에서 지폐를 던져 넣어가며 아닌건 아니라고 할 수 있는 다부진 마음까지. 아마 45년에 한 해 두 해 더한다고 달라질것 없을 생에 도파민 가득 터지게하는 에피소드들은 어떻게든 자신들이 자신답게 살아내고 있음을 내비치는 증명같아 보이기도 했다.




안 될거 같던 것들도 일단 하면 해내어 지는게 사람이더라. 우물안 개구리라는 뜻 보다 안 해봐서 못 했던 걸로 예쁘게 포장하고싶은 변화된 삶이다. 어떻게든 탈출하면 숨통이 트일것 같던 순간도 있었고, 예전의 익숙함이 그리워지는 찰나도, 살아온 만큼은 아니더라도 그 반절의 삶 또한 잘 보내야 하기에 진득하니 정주도 살아야하는 변화된 주변까지. 서로를 배려만 하지 말고 대화를 하며 꽁꽁 닫아만 두었던 과거와 진심, 그리고 바라는 마음들까지. 그래서 이 관계가 좀 더 오래 진득하니 유지되길 바라게된다. 후반부에 나오는 데루코가 말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은 잔잔해진 이후의 삶에 또 다른 일렁임으로까지 다가오니 마지막까지 그녀들의 이야기를 따라가보기로 하면 좋겠다.



📖출판사를 통해 도서만을 제공받아 작성된 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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