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란츠 그릴파르처가 쓴 묘비명은 갑작스럽게 그를 잃은 상실감을 재현했다. "음악은 여기에 소중한 보배를, 그보다 더 아름다운 희망을 묻었노라"(『기록』, 580). 하지만 훗날 로베르트 슈만도 지적했다시피, 이 묘비명은 당시에는 가늠할 수조차 없던 슈베르트의 크나큰 업적에 비하면 너무도 소박한 것이었다. -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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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갈래로 나뉜 슈베르트의 교제로 인해 위기나 흔들림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슈베르트가 중요한 멤버들의 부재라든가 떨어지는 지적 수준에 대해 불평하던 1824~1825년 겨울이 아마 최악이었던 것 같다), 이들 그룹은 계속 유지되었으며 그가 사회적 기반을 다지는 데에 중추적 역할을 했다.
이 모든 그룹의 중심에는 슈베르트가 있었고, 때로는 그가 관계를 지속시키는 유일한 자극제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그의 뛰어난 음악적 재능 덕분이었다. - P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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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
이경미 지음 / 조선앤북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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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작곡가들의 숨은 얼굴.

책소개를 들여다보다가 ‘책속에서’ 밑줄 친 부분 중 사실을 곡해할 수 있는 내용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고자 한다.

바흐는 일을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자식 한 명도 먹여 살기 힘든 세상에 스무 명을 감당해야 했으니까요. (P. 22)

최초의 바흐 전기를 지은 요한 니콜라우스 포르켈이 <바흐의 생애와 예술 그리고 작품>에서 바흐의 생애를 정리한 끝에 덧붙인 내용은 이렇다.

내가 한 가지만 덧붙이자면, 그는 두 번 결혼했고, 첫 번째 결혼으로 7명, 두 번째 결혼으로 13명, 즉 11명의 아들과 9명의 딸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아들들 모두가 음악에 뛰어난 소질을 갖고 있었지만, 그 소질은 윗 형제 몇 사람에게서만 완전한 발달을 보였다. (11명의 아들들 가운데 5명은 어려서 죽었고, 막내 아들 요한 크리스티안을 포함하여 4명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딸은 모두 9명이었는데 5명은 일찍 죽었다.)

구체적인 사실로 재구성하면 이렇다. 바흐는 1707년 10월에 첫째 부인과 결혼했지만 1720년 7월에 사별했다. (쾨텐 영주를 모시는 여행에서 돌아와서 아내의 죽음을 전해듣는 남편의 심정이 어떠하였을까.) 둘째 부인은 안나 마크달레나로 1721년 12월에 결혼했다. 바흐가 재혼하던 당시 살아남은 자식은 넷이었다. 둘째 부인한테서 태어난 자식이 13명이지만 7명이 어려서 죽었다.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에서 바흐 아버지가 갓난아기 바흐를 품에 안고서 어린 나이에 죽은 바흐의 형을 땅에 묻어야 했던 상황이 당시 생활상이었음을 설명하면서 당시 소아 사망률이 50%에 이르던 시절이었다고 언급한다. 한 세대가 지나기는 했지만 바흐의 자식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바흐의 두 부인이 낳은 자식을 모두 합치면 스무 명이 맞지만, 안타깝게도 생존한 자식은 열 명이었다. 그리고, 그 중 4명은 유명한 음악가가 되었다. 바흐가 가문의 전성기를 열었고 아들들이 아버지를 이어서 활짝 꽃피웠다.

바흐는 평생 독일 땅을 벗어난 적이 없다. 바흐만이 아니라 바흐 가문의 사람들이 모두 그렇게 살았다고 전한다. 바흐는 66세에 눈을 감을 때까지 교회에 봉직하여 소명을 다하였다. 이러한 삶의 태도를 생계유지만으로 설명하는 것이 과연 타당할까. 자식 한 명도 먹여 살리기 힘든 세상이, 그때는 생사가 걸린 생존의 문제였다. 당시의 시대상을 지금의 잣대로 쉽게 재단할 수 없다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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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교회로 들어간다. 시간에 쫓기지 않고 차분하게 돌아보고 싶다. 여행을 하다가 마음에 쏙 드는 곳이나 특별한 의미가 있는 곳을 발견하면 꼭 다시 와야지, 다짐들 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다시 가게 되지 않는다.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인생행로에서 우연히 귀한 것을 만나면 그 순간에 충분히 누릴 일이다. 나중은 없다. 사람과의 만남에서도 마찬가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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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하튼, 즐거워야.

매년 설을 고향에서 쇠었지만 올해는 고향에 가지 않는다. 코로나 위기 상황에서 가족들과 다른 어디에도 가지 않기로 뜻을 모았다.
그래서인지, 올해 설 분위기가 딱히 없는 것 같다. 몸이 편해지니까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다. 아니면 나이가 든 탓일까. 주말이 낀 설 연휴를 집에서 보내게 될 것 같다.
어제 저녁에, 첫째가 쇼핑을 같이 하자고 말했다. 자신의 지갑을 열겠다고 하는 것이 아닌가. 평소에 첫째가 좋아하는 맥주를 냉장고에 채워 놓았기에 보답하겠다는 것이다. 이럴 때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고민하지 않는다.
고맙다!
첫째와 함께 마트에 갔다 왔다. 아내도 기분 좋다면서 우리를 따라 나섰다. 고향에서 설을 쇠지 못하지만 명절 음식은 먹어야 한다며 식재료를 사겠다고 해서 같이 길을 나섰다. 오가는 길에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웠다. 첫째의 알바 상황과 분위기, 설 연휴 이후 나의 상황, 아내의 걱정거리 등을 주거니 받거니 하면서 걸었다.
가는 도중에 아내가 물었다. 점심 뭐 먹지?
내가 응답했다. 피자 아니면 햄버거.
콜!
좋아!
막상 마트에서 피자를 주문하지 못했다. 돌아오는 길에 햄버거 가게를 들렀다. 각자 먹고 싶은 메뉴를 할인하는 쿠폰을 전부 사용하여 결제하였다. 귀갓길에 점심 먹거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아내가 정말 기뻐한다. 아내가 기쁘면 나도 기쁘다. 물론 아들도 그럴 것이다. 아내가 1순위다.
아내가 연신 기쁘다고 말한다. 오후 내내 음식 준비로 바쁠 테지만 즐거워서 괜찮다고 한다. 아내의 기분이 매우 좋다. 올해 설에 이런 반전이 있을 줄 몰랐다. 여하튼, 즐거워야지 명절 분위기 같다.
정부의 방역 지침을 따르기는 하지만, 하루빨리 코로나 위기에서 벗어나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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