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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요나스 요나손 지음, 임호경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7월
평점 :
1. 확률이 영(0)이면 발생 가능성이 없을까?
로또 1등 당청자가 몇 차례 나오지 않으면서 이월된 당첨금이 눈덩이처럼 불어나서 세간의 주목을 끌었던 때가 있었다. 그 바람에 로또의 실상을 소상하게 알게 되었다. 로또 당첨 확률은 814만 5060 분의 1. 누구는 그랬다. 미국에서 벼락 맞는 확률 210만 분의 1. 그래서 로또 당첨 확률이, 벼락을 한 번 맞아 죽지 않고 바로 두 번째 벼락을 맞아 죽는, 즉 벼락을 두 번 맞아 죽는 확률과 비슷하다고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또 1 등은 매회 나온다. 이 말인즉슨, 로또 당첨은 자연 발생하는 우연스런 경우로 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리라.
통계학적으로 말하자면, 1960 년대 소웨토에서 태어난 까막눈이 여자가 자라나서 어느 날 감자 트럭에서 스웨덴 국왕과 만나게 될 확률은 45,766,213,810 분의 1이다. 이는 위에서 말한 까막눈이 여자의 계산에 의한 것이다. (9 쪽)
소설은 허구인 것을 알지만, 책 앞머리에서 제시하는 숫자를 믿는다면, 소설 속 일화가 현실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가능성은 로또 당첨 확률보다 몇 백 배는 낮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현실에서 도저히 있을 수 없는 그러나 굉장히 희박한 확률로 가능할 수도 있는 이야기인 셈이다. 이 점은 오히려 완전한 허구이고, 이 소설을 더 소설답게 만드는 요소라고 본다.
2.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남아프리카공화국 수도 요하네스버그에서 남서쪽으로 16 km가량 떨어진 작은 도시 소웨토. 주인공 까막눈이 여자의 고향이기도 하다. 양철로 지은 오두막에 살면서 학교 근처에도 가본 적이 없고 말을 제대로 알아 듣지도 못하는 흑인들은 까막눈이라고 불렸다. 까막눈이 여자는 다섯 살 때부터 돈을 벌기 위해서 공동변소 분뇨를 수거하는 일을 하는 중간에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서 통을 세다보니 산수의 재미를 알게 되고 자라나면서 복잡한 계산도 혼자힘으로 터득한다. 그래서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
95 곱하기 92 계산하는 까막눈이 여자의 셈법은 이러하다.
95는 100 빼기 5이고, 92는 100 빼기 8이에요. 100에서 5와 8을 빼면 87이에요. 그리고 5 곱하기 8은 40이에요. 따라서 87에다 40을 붙이면 8740이 나와요. (20 쪽)
3. 존재하지 않는 실존
존재하지 않는 남자에게 가장 어울리는 짝은 말할 것도 없이 그처럼 존재하지 않는 여자일 것이다. 놈베코는 웁란스 베스뷔의 난민 수용소에 들어간 지 며칠 만에 도망쳐 나와 지금은 지구 표면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린 사람이다. 일 년 전부터 스웨덴의 주민등록대장에서 그녀의 이름 앞 여백에는 <실종됨>이라고 적혀 있었다. (262 쪽)
까막눈이 여자는 일생을, 실존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산다. 고향에서는 자신의 이름이 불리지 않는 대신 까막눈이로 불렸고, 이국 땅에서는 도망 중인 난민 신세였다. 인권 문제와 맥이 닿겠지만, 더 이상 확대하지 않으련다. 스웨덴은 정치적 난민에 대한 거부감이 없나보다.
소설을 읽는 내내 뇌리를 떠나지 않는 생각이, 실존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개인이 있다면 현실에서 어떤 삶을 살게되는지. 존재감은 개인의 내부에서 생기는 것이라 여기지만, 외부의 타자에 의해서도 형성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4. 소감
소설을 한 줄로 요약하면, 셈을 할 줄 아는 까막눈이 여자의 생존기. 기발한 셈법 이상으로 주인공은 처세에 능하다. 발생 확률이 극히 낮지만, 우연한 사건과 사고들이 이어지고, 매 순간 주인공은 적극적인 사고로 재치있게 대처하면서 그리고 자기 계발을 게을리하지 않으면서 끝까지 생존한다. 거의 돌발 상황에서 벗어나려 안간힘을 쓰다보니 남아프리카에서 스웨덴까지 가게 된다. 현실에서 도저히 있을 법 하지 않는 이야기는 심각한 상황을 곧이곧대로 보이지 않게 만드는 이중적인 구도를 보인다. 믿지 않으면 그냥 허구일 뿐이지만, 그렇지 않다면 현실을 연계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어쩌다보면, 현실에서 보다 나은 선택을 했다고 여기지만 결과는 그 반대인 경우가 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삶이란 게, 소설에서도 그랬지만, 이렇지 않을까 싶다.
까막눈이 여자가 태생으로 말미암아 현실에 안주하였다면, 그저 까막눈이로, 셈은 고사하고 문맹으로 무기력하게 살아야 했을 것이다. 비록 까막눈이는 아니라 하더라도 자신이 처한 현실의 부조리에 눈을 감고 변화가 귀찮아서 안주하는 우리네 모습은 또다른 까막눈이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