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멸의 신성가족 - 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 희망제작소 프로젝트 우리시대 희망찾기 7
김두식 지음 / 창비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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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사법풍경 #1
내가 아는 형은 사법고시를 패스해 변호사가 되었다. 사법고시에 합격하면 모두 판사나 검사가 되는  줄 알았는데, 연수원 성적에 따라 많은 사람들이 변호사가 된다고 한다. 형은 법무법인에 들어갔다.
그 형이 변호사가 된 이후 거의 연락을 못하고 있다. 얼마나 바쁜지 밤 11시까지 일할 때도 많고 집에 들어가지 못하고 사무실에서 잠을 잘 때도 있다고 한다. 또 주말에도 거의 출근해 일을 한다고 한다.
물론, 월급을 많이 받기는 하겠지만, 전문직이라는 사람들이 저토록 고생을 하며 살아가야 하는 이유가 뭘까? 조금 적게 받아도 보다 인간적인 삶을 살고 싶지 않은 걸까?


사법풍경 #2
회사에 다니다보니 본의 아니게 소송에 말려들어, 회사대 회사로 1년 넘게 소송을 진행중이다. 그런데 우리와 계약한 건 변호사인데, 사건에 관해 전화 통화를 하는 건 거의 변호사가 아닌 사무장이라는 사람이었다.
처음엔 그 사람이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몰랐지만 그 사람을 통해 변호사와 의사 소통이 이루어지는 걸 보고 사건 제반 업무를 담당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파악하게 되었다.
왜 이와 같은 체계가 되었을까?
이들 질문에 대한 답변을 이 책을 읽으며 찾을 수 있었다. 일반 사람들은 변호사마저 접근하기가 어려워 사무장을 상대하는 경우가 많은데, 하물며 검사와 판사는 얼마나 더 어렵겠는가. 나 역시 소송일로 변론준비기일에 참석한 일이 있었는데 그때 재판장이었던 지방법원 지원장의 포스는 엄청났다. 변호사들조차 재판장 앞에서는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 책은 대한민국 사법계의 현실을 다양한 목소리를 통해 담은 책이다. 무언가 불합리하다는 것을 많은 사람들이 느끼고는 있으나, 무슨 문제가 있어 그런 결과가 발생하는지 모르는 사안에 대하여, 그 숨겨진 이면을 들여다보기 위해 스물 세 명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들을 통해 저자는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현주소를 점검하게 된다.

판검사가 돈을 받는다? 판검사도 청탁을 한다? 와 같은 충격적인 문제 제기를 통해 전반적인 사법 시스템의 모순을 담고 있는 이 책에서 가장 빛나는 부분은 팔로역정 부분이다. 파릇파릇한 법조 지망생들을 "원만함"이라는 굴레로 변색시키는 여덟가지 시련과 유혹을 천로역정에 빗대어 저자는 팔로역정이라 부른다.

1번부터 8번까지 책의 팔로역정 부분 중 일부를 발췌해 적었다.

1. 새로운 언어로의 입문, 사법시험

법학은 일종의 '새 언어'를 익히는 과정이었고, 그 언어는 앞으로 평생 그들을 먹여살릴 것입니다.

이런저런 이유로 신성가족(법조계)의 일원이 되는 데 실패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사실상 판검사, 변호사와 거의 비슷한 일을 하면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해 깊이 상처받는 이들입니다. … 일부는 법조 주변에 남아 신성가족의 아우라(aura)를 먹고삽니다.

사법시험을 인간성에 대한 "조직적인 파괴의 과정" 이라고 봅니다.


2. 결혼시장의 유혹

남자 법관들이 결혼 '잘한다'는 것은 재력 있는 집안 여성을 만나 결혼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판검사, 변호사들은 의사들보다 "여자 집안의 재력 같은 것을 더 많이 계산"합니다.

비록 마담뚜를 통해 배우자를 소개받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은근한 기대를 갖게 되는데 그것이 깨지면 실망합니다. 본인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가족을 비롯한 주변 사람들은 그렇게 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그냥 평범한 집안 출신의 배우자를 맞은 사람들은, '나는 그런 식으로 돈에 팔린 것이 아니'라는 이상한 자부심을 갖게 됩니다.


3. 끝없는 서열경쟁과 관료제의 늪 속에서

판검사도 처음 임관할 때는 희망과 성적에 따라서 임지를 정합니다. 판사들은 서울에서 가까운 곳부터 서울중앙지법, 동남북서부 지법, 수원지법, 인천지법 등의 순서로 배치되고, …

판사들 중에서도 "서울대 법대 출신으로 군법무관을 마친 남자들"이 최고로 좋은 대우를 받는다고 합니다. … 최근 들어 사법 연수원 교수들이 "가장 우수한 애들은 대원외고 나오고 고대 법대 나오고 재학중에 합격해서 들어온 애들"이라고 …


4. 판사는 없고 학동만 있는 양성시스템

도제식 양성제도 아래에서 배석판사가 자기 목소리를 내기가 쉽지 않다보니, 아무래도 상급심의 판결을 그대로 따라가는 기계적 판결만 하게 되기 쉽습니다. 그게 가장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5. '원만함'의 한계와 권위주의

고등법원 부장판사들의 경우 "자기 신념이 강한 사람들"이 많다고 이야기합니다. … 부장판사들의 경우에는 대운하를 비롯한 법 이외의 사안에 대하여도 "그거는 이거죠"라고 단언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 원만한 분들이 왜 고등법원 부장판사까지 승진하고 나면, 남들보다 더 권위적인 판사가 되는 걸까요. 저는 이런 현상을 윗분들을 향해 '만들어진 원만함'의 한계라고 부르고 싶습니다. … 독불장군, 유아독존이던 사람들이 어느 순간 "원만함"도 중요한 평가의 기준임을 깨닫게 됩니다. … 이때부터 천재, 신동들은 "원만함", 특별히 '윗분들을 향한 원만함'의 옷에 자신을 맞춰가기 시작합니다.

6. 살인적인 업무량

1980년 약 26만 건이던 1심 본안사건이 2006년에는 약 160만 건으로 6배가량 증가했고, 사건의 내용도 훨씬 복잡해졌습니다. 그런데도 같은 기간 판사 수는 3.2배가량 증가했을 뿐입니다. … 부장은 전체적인 재판 진행을 위해서 지금 돌아가는 100건이 넘는 사건을 모두 파악하고 있어야 합니다. … 속행 기록을 제대로 안 보면 쟁점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증인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는 경우도 많다고 고백합니다.

이렇게 과도한 업무량이 모든 문제의 뿌리


7. 변호사 개업, 작렬하는 포스, 초라한 내면

결국은 모두가 변호사가 된다

브로커와의 결탁, 과다 수임료, 불성실, 노골적 청탁 등 법조계에서 문제되는 사건의 장본인은 의외로 전관 변호사들인 경우가 많습니다.


8. 감시자도 삼켜버리는 블랙홀

우리 법조계의 감시자들은 두 종류로 나뉘는 것 같습니다. 하나는 '너무 가까이 다가가서 동화되어버린 기자'들이고, 다른 하나는 '너무 멀리 있어서 내부 이야기를 간접적으로만 들을 수 있는 시민단체 간사'들입니다.

저자의 팔로역정에서 제기된 대한민국 사법 시스템의 문제점을 어떤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할까? 돈과 속임수에 얽힌 치팅컬쳐 문화도 하나의 문제가 될 수 있겠지만, 이는 문제의 현상이지 원인으로 보기는 어려우며, 저자는 이 책의 제목과 같이 바로 '가족 문화'에서 오는 문제로 판단하고 있다. 사법시험을 통과한 울타리 내의 사람들과만 소통하는 그네들의 소수 독점 의식을 비판한다.

또한 이에서 파생되는 문제가 판사, 검사, 변호사 각 영역에서 청탁과 '받을 수 없는 돈'이 생겨나고, '원만함'이라는 평판을 위해 윗분의 말을 들을 수 밖에 없는 구조를 고착화시키며, 사법계 주변에 있는 사무장과 브로커들은 상대적인 소외감과 박탈감을 느끼게 된다.

이와 같은 답답한 현실 속에서 해결책이란 막막해 보인다. 저자는 그래서 '억지로 찾아본 희망' 이라는 마지막 꼭지 제목을 붙였지만 문제의 시작점을 찾는데에서부터 해결책을 찾는 수밖에 없다.


바늘구멍을 통과하기 위해서는 누구나 개미보다 작아져야 합니다. 바퀴벌레나 파리조차도 쉽게 바늘구멍을 통과하지는 못합니다. 개미라고 다 되는 것이 아니라, 불개미 종류나 겨우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있지요. … 그러나 이 시험(사법고시)을 통과하는 순간 갑자기 사람으로 변하는 경험은 부작용을 낳게 마련입니다. 한꺼번에 갑자기 커진 몸은 아무래도 부실할 수밖에 없으니까요.

낙타가 바늘 구멍을 통과하는 것 만큼이나 어려운 사법시험이, 판사·검사·변호사의 인력을 국가에서 시험으로 제약한 것이 이 모든 문제의 원인이다. 시험을 통과한 소수의 특권에 의해 그들은 신성가족을 만드는 것이다. 앞으로 변호사의 인원을 대폭 늘려야한다. 로스쿨은 그 방향에 서야 한다. 변호사의 인력을 대폭 늘리고, 경험이 풍부한 변호사 가운데 판사·검사가 되는 사람들을 많이 늘려야한다.

책 제목이 잘 와닿지 않아, 무슨 내용인지 짐작하기 어렵고, 부제(대한민국 사법 패밀리가 사는 법)마저 책의 내용을 설명하기엔 역부족이지만, 그럼에도 이 책을 선택하고 읽는다면, 탁월한 선택이 될 것이라 생각한다.

p.s. 책을 읽고 나서 궁금해 진 것 하나. 과연 이 책을 읽은 판사와 검사, 변호사는 어떤 생각을 할까? '거절할 수 없는 관계'와 '거절할 수 없는 돈', 그 해결을 위해 바늘 구멍을 조금 넓히자는 책의 논지에 동의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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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하는 힘
강상중 지음, 이경덕 옮김 / 사계절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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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가 닮았다?! 는 의견에 나는 선뜻 동의할 수 없었다. 그것은 무척 간단한 이유였다. 내가 그들에 대해 잘 몰랐기 때문이다.

나는 나쓰메 소세키가 쓴 소설 가운데 단 한편 밖에 읽지 못했다. 《도련님》이었다. 나는 도련님이라는 작품을 매우 좋아해 나쓰메 소세키의 다른 작품을 읽어봐야겠다고 생각해 오긴 했다. 그러나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사실은 도련님이 나쓰메 소세키 작품 가운데 예외적인 작품이라는 것, 다른 작품들은 도련님과 달리 밝지 않다는 것이었다.

막스 베버에 대해서는 더 무지했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 니체, 칸트, 홉스, 마르크스 등등 이런 서양철학자들의 공통점은 내가 그들의 책을 단 한권도 읽은 적이 없음에도, 마치 내가 그들에 대해 알고 있는 것 마냥 친숙하다는 것이다. 이게 다 고등학교 윤리 시간에 배운 철학자들의 핵심 사상 암기 덕분이겠지만, 막스 베버는 그 마저도 없었다. 다만, 대학교 어느 강의 시간에 베버를 중요하게 언급해, 몇 차례의 그의 윤리 사상에 대해 듣긴 했다. 그러나 교수가 말하고자 했던 내용은 까맣게 잊혀지고, 기억나는 거라곤 "내가 막스 베버에 대해 배운 적이 있었다."는 그런 막연한 느낌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막스 베버를 떠올리는 일부터 시작해야했다.


막스 베버는 부르주아 출신으로 그의 아버지는 18세기 후반에 사업을 일으켜 큰 재산을 모아 부르주아가 된 집안의 사람이며, 막스 메버는 아버지 덕분에 아무런 불편 없이 성장했고 일류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 그가 학자로서 성공을 거둔 것도 아버지 덕분이다. 그러나 그는 시대를 비평하는 사람으로서 아버지의 벼락부자 근성을 좋아하지 않았다. 

나쓰메 소세키도 막스 베버와 마찬가지로 신흥 부르주아 세력을 싫어하고 기피했으며, 소설에서 부정적인 이미지로 자주 등장시켰다. 작가는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를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가? 작가는 고민을 통해 우리가 살아가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고민하는 힘'은 '살아가는 힘'이라고 한다.


강제수용소를 체험한 것으로도 유명한 정신의학자 빅터 E.프랭클은 "호모 페이션스(Homo patience, 고민하는 인간)의 가치는 호모 파베르(Homo faber, 도구를 사용하는 인간)보다 더 높다", 고 말했다.
책의 목차에는 그의 고민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나는 누구인가? 돈이 세계의 전부인가? 제대로 안다는 것이 무엇일까? 청춘은 아름다운가? 믿는 사람은 구원받을 수 있을까? 무엇을 위해 일을 하는가? 변하지 않는 사랑이 있을까? 왜 죽어서는 안 되는 것일까? 늙어서 '최강'이 되라.

위와 같이 나라는 존재에 대한 물음, 돈과 지식에 대해, 젊음과 늙음에 대해, 일에 대해, 종교에 대해, 사랑에 대해, 죽음에 대해 나 역시 많이 고민하고 있는 부분들에 대해서 그의 고민의 흔적을 찾아볼 수 있었다. 그러나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기대와는 달리 나쓰메 소세키와 막스 베버에 대한 심도 깊은 내용을 찾아보기 어려웠고, 고민의 흔적이나 이 책을 읽는 사람에게 던지는 질문, 또는 답변에서 많은 것을 얻지 못한 아쉬움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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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새로운 세계를 만들기 위해 고민합시다 - 강상중 교수 강연회
    from Adish의 지맘대로 짓걸이기 2009-05-15 08:29 
    이 글을 올리기 전에 먼저 사과말씀을 드리 겠습니다. 이 글은 이미 일주일 전에 나와야 했던 글입니다. 하지만 저의 게으름과 녹음화일을 타이핑으로 바꾸는 것에 대한 어려움으로 인해 결국 이렇게 늦게 나와버렸습니다. 제가 이렇게 늦어버린 글인데도 불구하고 굳이 이 글을 올리는 이유는 강상중 교수님의 강연 내용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연내용을 그대로 전하고자 했던 욕심에 이렇게 된 것 같습니다. 강연내용을 글로 다시 만드는 일은 정말 쉽지..
 
 
 
차이위안페이 평전 - 시대보다 먼저 ‘현대 중국’을 준비한 위대한 지식혁명가
후궈수 지음, 강성현 옮김 / 김영사 / 200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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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o? 차이위안페이

낯설은 이름이다. 이 책을 받기 전까지는 한 번도 들어본 기억이 없는 인물, 차이위안페이. 그는 어떤 사람인가?

그에 대한 요약된 설명 글에서, 그를 20세기 중국에서 가장 위대한 사상가, 걸출한 학자라 부르고 있으며, 민족혁명과 민권보장투쟁에 일생을 바치고, 중국 근대교육과 과학발전의 기초를 닦은 개척자라 설명하고 있다.

평전과 자서전류의 책을 선택하는 기준에는 크게 두 가지가 영향을 미친다. 하나는 인물의 매력이다. 인물의 인생이 어떠했으며, 얼마나 흥미롭고 매력적이었는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가 중요하다. 다른 하나는 글이 얼마나 잘 쓰여졌는가 하는 점이다.

대부분 글은 부차적인 문제로 인물의 매력을 보고 책을 선택하는 경우가 많다. 인물의 매력이 글을 압도해 버리는 경우이다. 예전에 읽었던 체게바라와 같은 평전이 그러한 경우이다. 책은 재미없지만, 체게바라라는 인물에게 관심이 있어 책을 읽었던 경우이다.

이와 반대로 글 솜씨만으로 평전류의 책에 생명을 불어넣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요즘 사회적으로 한 자리 좀 했다 싶으면 너도 나도 대필 작가를 불러 써대는 자서전을 보노라면, 글솜씨가 있는가는 차치하고 과연 누가 저 사람들 인생을 읽어보려 할까 하는 의문이 든다. 그럼에도 그의 이해관계자들이 억지로 책을 구입해 책을 뿌려, 책상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그 책을 출판하기 위해 벤 나무에게 미안한 일이다.

자고로 평전이라 함은, 인물의 매력에 글솜씨까지 더해 문학적 성취까지 달성함을 목표로 해야 한다. E.H.카의 《도스토예프스키 평전》이나 우리 시대의 필독서가 된 《전태일 평전》, 김구선생의 자서전 《백범일지》와 같은 책이 바로 그러한 책들이다.

차이위안페이는 그러한 면에서 인물에 대한 매력은 중간 정도에, 글 솜씨는 평균보다 아래에 둘 만한 책이라 생각한다. 아마 이는 나의 개인적인 관심도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어렸을 때 60권짜리 위인전집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때 유일하게 읽다 만 것으로 기억되는 사람이 바로, 차이위안페이와 동시대를 살다 간 쑨원이었다. 책이 재미없었던건지, 쑨원의 인생에 관심이 가지 않았던 건지, 그 두가지 모두가 작용했을 가능성이 다분할 것이다. 그후로도 내가 중국의 근대사에 대해 알게 될 계기는 거의 없었다. 청말 역사에 대해 알지 못해, 쑨원 이후 덩샤오핑과 마오쩌둥으로 이어지는 역사에 대해서 무지했고, 차이위안페이는 들어본 적도 없는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그러한 면에서 도움이 되었다.

차이위안페이에게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한 번 읽어볼 만할 것이고, 관심이 없다면 읽어도 흥미를 느끼기는 어려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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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머무는 도시 그 매혹의 이야기 - 문화도시, 이희수 교수의 세계 도시 견문록
이희수 지음 / 바다출판사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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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인류학자 이희수 교수의 세계 도시 견문록
- 이 책은 저자가 다녀온 16곳의 도시를 소개하고 있다. 그 분야는 건축에서 예술, 문학, 음식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관심거리를 찾아내 소개하고 있다.

열 여섯 도시는 다음과 같다.
포르투갈 포르투, 예스파냐 마요르카 섬, 프랑스 아비뇽, 이탈리아 밀라노, 이탈리아 피렌체, 그리스 크레타 섬, 체코 프라하, 터키 안탈리아, 이집트 룩소르, 알제리 알제, 캄보디아 앙코르 와트, 파키스탄 라호르, 러시아 이르쿠츠크, 키르기스스탄 비슈케크, 캐나다 밴쿠버, 미국 시애틀

그의 책은 가볍게 저를 읽어주세요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책을 펼쳤다.

1. 인물, 미술, 건축, 음악 등 다양한 인문학적 관심거리를 끄집어내지만, 간략하게 언급할 뿐이다.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도시라면 그 정도만으로도 없던 관심이 생길 수 있겠지만, 깊이있는 여행기를 원하는 독자에게는 너무나 가볍다. 피렌체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최후의 만찬을 보고, 두오모를 보며 《냉정과 열정》을 떠올린다. 시애틀에서는 《시애틀의 잠 못 이루는 밤》과 시애틀 추장을 생각한다. 그저 그때 그때 생각나는 관심거리를 소개하는데 그치고 있다는 게 아쉽다.

2. 그의 여행은 꽤나 고루하다. 어디를 가든 박물관을 먼저 찾는 그. 여행지 현지의 경험에 앞서 먼저 박제된 정보를 찾은 후에 도시를 '인식'하기 시작하는 그의 여행은 현지에 깊이 빠지는 여행이 아니라, 호텔패키지 투어만큼이나 허무한 느낌이다. 문화인류학자인 그에게 그런 기대를 거는 것이 무리였을까?

3. 화려한 책 속에 많은 사진들이 들어가 있음에도, 내용과 전혀 관련없는 사진이 있다든가, 글에서는 열심히 설명하고 있는데 사진이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조악한 화질의 사진도 몇 장 섞여 아쉬움이 남았다.

4. 그럼에도 각각의 도시가 내게 자기들의 매력을 속삭이기 시작했다. 다음 여행때에는 자기를 방문하라거나 혹은 어디를 가는 길이라면, 자기한테도 들렸다 가라거나 한다.

5. 도시탐방은 결국은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다. 도시의 건축가와 음악가, 화가, 조각가, 작가를 만나기 위해 누군가의 발자취를 좇기 위해 여행을 간다. 사람의 짙은 체취가 느껴지는 그런 여행기가 그립다.

내가 다녀온 곳이 한 곳도 없는 줄 알았는데 딱 한 곳이 있다. 캐나다 밴쿠버. 그래서 더욱 관심있게 읽어보았다.


개스타운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것 가운데 하나는 워터 거리와 캠비 거리의 교차로에 있는 증기 시계다. 세계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구리로 만들어진 이 증기 시계는 1977년에 시계 제작자 레이몬드 사운더스가 만든 것이라 한다. 이 시계는 밴쿠버 시내의 건물에 열을 공급하는 지하 열 공급 시스템에서 나오는 증기로 움직이는데, 유리 윈도 사이로 15분마다 증기를 뿜으며 국가를 연주하여 개스타운의 명물로 자리 잡았다.

얼마나 가이드 북같이 착실히 증기시계를 소개하고 있는지.. 나는 이 글을 읽고 개스타운의 증기시계를 찾아 헤맬 사람들이 불쌍해졌다. 사람들마다 여행지에서 보고 느끼는 게 다르고 저마다의 감흥이 다르기 마련이지만, 유명한 여행지라고 해서 가보면 별 것도 아닌 걸 두고 관광화시키는 것들이 많이 있다. 내가 보기에는 개스타운의 증기시계도 열에 아홉은 보고서 저게 뭐야 할 만한 곳인데, 저자는 정말로 좋았던 것인지, 아니면 박물관이나 가이드 북의 박제된 정보를 보고, 명물로 '인식'한 것인지 모르겠다. 인식이 아니라 체험에 의한 글을, 체험이 저절로 흘러넘쳐 써지는 글을 나는 읽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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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아비
김애란 지음 / 창비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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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 作

9개 단편소설집. 달려라, 아비_나는 편의점에 간다_스카이 콩콩_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영원한 화자_사랑의 인사_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종이 물고기_노크하지 않는 집

그녀를 어떻게 부르면 좋을까?
나는 그녀를 '삶의 세밀화가'라고 부르고 싶다. 편의점에 가는 행위, 잠 못 드는 일, 동창과의 우연한 만남, 하숙 생활 등 일상 생활에 얽힌 미묘한 감정들은 세밀하게 잡아내며 묘사하고 있어, 공감을 이끌어 내는 한 편, 일탈의 기쁨을 느끼게 한다.

또한 그녀의 작품들 속에서 몇 가지 특징을 잡아 내자면, 아래의 세 가지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 싶다. 모든 작품에서 느껴지는 것은 아니며, 몇 몇 작품들에서 느낄 수 있는 것들이다.

아버지의 부재
아버지는 어디로 갔을까? 작품 속의 아버지는 이미 사라졌거나, 혹은 사라지거나, 사라졌다가 나타나거나, 나타나도 초라한 행색이거나.. 아버지는 아버지다운 아버지의 모습이 아니다. 무능하고, 초로한 아저씨에 불과했다.

달려라 아비_어느날, 어머니는 임신을 했고, 아버지는 어머니의 부풀어오르는 배를 보고 얼굴이 점점 하얘지다가, 아버지가 되기 전날 집을 나가 그후로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그녀의 아버지는 며칠 전, 어디서 났는지 어울리지도 않는 빨간 이스트팩 하나를 맨 채 그녀 앞에 나타났다. … 다만 변한 것이 있다면, 그녀가 상상하던 아버지의 하반신이 그녀가 없는 사이 그곳에서 뿌리째 걸어나갔다는 것 뿐이었다.

사랑의 인사_순간 나는 한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달았다. 그것은 '나는 버림받았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하고 모호한 문장, 먼 곳에서 수백년 전 출발해 이제 막 내 고막 안에 도착하는 휘파람 소리, '아빠가 사라졌다'는 말이었다.

감추지 않는 성性
작가는 성을 감추려하지 않는다. 감추려하지 않고, 주목시키려 하지도 않는다. 그냥 자연스럽게 튀어나온다. 잠이 오지 않아 떠오르기도 하고, 끝없이 말하다 불쑥 나오기도 하고, 회상하다 떠오르기도 한다. 그래서 그냥 그렇구나 할 뿐이다.

달려라 아비_그러자 어머니도 아버지가 가여운 생각이 들었고, 어쩌면 그 날만은 '평생 이 남자의 하중을 견디며 살아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는지도 몰랐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_그러던 내가 패밀리마트에 가지 않게 된 건, 어느날 콘돔 한갑을 계산대 앞에 내민 내게 그녀가 주민등록증을 요구하고 나서부터다.

그녀가 잠 못 드는 이유가 있다_그러던 어느날 그녀에게도 그녀를 쫓아다니는 남자친구가 생겼고, 여차저차해서 그녀는 자기가 무엇을 입고 있는지도 잊은 채 몸을 맡겼던 것이다.

영원한 화자_"더이상 욕망이 없는 사람이 지는 거다?" … 한참후 그는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한참 후 나도 너와 잘 수 있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종이물고기_삼양라면 한개를 옆구리에 끼고 퇴근하던 그의 아버지가 시골에서 올라온 그의 어머니를 보고 놀라 한참을 서 있다가, 말없이 돌아나가 라면 한개를 더 사가지고 돌아오던 날 이후, 그는 그렇게 생떼를 쓰듯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다.

노크하지 않는 집_물론 이곳에도 얼굴 없는 사건들이 일어난다. 가령 몇번 방 아가씨가 어제 울었다든가, 몇번 방 여자가 세탁기를 쓴 뒤에는 항상 양말 한짝이 남는다든가, 몇번 방 여자는 남자를 자주 들인다거나 하는 것들이다. … 커다란 옷들은 보풀이 일어난 채 건조대에 피로하게 걸쳐져 있었고, 늙은 팬티 앞면엔 하나같이 누르스름한 얼룩이 배어 있었다. 갑자기 '여자에게는 애인이 없다'는 생긱이 들었다.

선언적 시작
한 문단만으로 소설 한 편을 완성시킨다면? 나머지 문단에 맞먹는 힘을 가진 그녀의 첫 문단. 작가는 간략하며 인상적인 첫 문단으로 소설을 시작한다.

달려라, 아비_내가 씨앗보다 작은 자궁을 가진 태아였을 때, 나는 내 안의 그 작은 어둠이 무서워 자주 울었다. 그러니까 내가 아주 작았던 시절-조글조글한 주름과, 작고 빨리 뛰는 심장을 가지고 있었던 때 말이다. 그때 나의 몸은 말(言)을 몰라서 어제도 내일도 갖고 있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에 간다_나는 편의점에 간다. 많게는 하루에 몇번, 적게는 일주일에 한번 정도 나는 편의점에 간다. 그러므로 그사이, 내겐 반드시 무언가 필요해진다.

영원한 화자_나는 내가 어떤 인가인가에 대해 자주 생각하는 사람이다. 나는 내가 어떤 인간인가를 알기 위해 내 이름을 부르면 대답하는 사람, 그러나 그것이 내 이름인 것이 이상하여 자꾸만 당신의 이름을 불러보는 사람이다.

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바람이 많이 불던 밤이었다. 바람이 많이 불어서, 무엇이든 묻고 싶은 밤. 뭐라도 묻지 않으면 누군가 굉장히 어려운 질문을 해올 것만 같은-그날은 그런 바람이 불던 밤이었다. 

인상 깊었던 장면_누가 해변에서 함부로 불꽃놀이를 하는가_누군가 아버지의 (모래) 성기에 기다란 불꽃 놀이 막대를 꽂는다. 그러곤 그곳에 라이터로 불을 붙인다. 아버지가 놀란 눈으로 자신의 아랫도리를 바라보는 동안 친구들은 하나, 둘, 셋을 외친다. 심지를 타고 조급하게 타들어가는 불꽃이 피유우웅- 하늘 높이 날아오른다. …펑! 펑! 활짝 피는 불꽃들이 아름답다. 그리하여 아버지의 거대한 성기에서 나온 불꽃들이 민들레씨처럼 밤하늘로 퍼져나갔을 때, 아버지의 반짝이는 씨앗들이 고독한 우주로 멀리멀리 방사(放赦)되었을 때. "바로 그때 네가 태어난 거다."

이처럼 탄생비화를 아름답게 묘사할 수 있을까? 물론 그 말을 듣고 아들은 "거짓말" 이라고 했을 뿐이지만.

김애란, 앞으로 더 많은 작품을 기대해야겠다. 이 작품이 그녀의 정점이 아니길. 더 많은 무수한 일상 생활을 경험하기를, 그리고 그녀의 세필을 들어 묘사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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