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르게 실패하기
존 크럼볼츠.라이언 바비노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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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원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해 참고 인내해 온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반드시 알아야 할 모든 것에 대한 필독서


그 문제만 해결되면,

사람들은 바쁘다거나 준비가 덜 됐다는 이유로 그일을 시작할 수

없다고 합리화한다.

몇 가지 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기다리며 시작을 미룬 것이다.


만약 삶을 변화시키고 싶다면 지금 당장 즐거움을 만끽할 

작은 행동을 시작하라.


즐거움이 있는 곳을 찾으세요.

그러면 즐거움이 고통마저 녹여내릴 테니까요.

<조지프 캠벨>


위기란, 사다리 꼭대기까지 올라갔을 때 그 사다리가 잘못된 벽에

세워져 있었음을 깨닫는 것 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즐거움이 무엇인지 알면서도 스스로 속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것에 끌려도 자신의 감정을 무시해버리거나 몸을 사리더군요.


사람들이 인생을 바꾸는 기회를 놓치는 가장 큰 

첫번째 이유는 그들이 기회를 찾지 않기 때문이다.

두번깨 이유는 그들이 기회를 보지만 그것에 따라 행동하지 않기 때문이다.


가시덤블 속에 가시가 있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손 내밀어 꽃을 발견하려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

인생도 이와 같다.

<조르주 상드>


지금 당신의 주변 사람들이 당신의 행동뿐 아니라 당신이 믿는 가능성에까지

영향을 미친다는 점이다. 

행동과 사고는 강한 전염성을 가지고 있다.


행복은 명사도 동사도 아닌 접속사다.

다시 말해 행복은 어떤 물건이나

행복이 아닌, 사람과 사람 사이 관계 속에 있다.


#빠르게실패하기 #존크럼볼츠 #라이언바비노

#목표 #문제 #실패 #해결 #행동 #즐거움 #위기 #인생 #기회 #접속사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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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아래 사상가 10인의 고전을 철학과 문학을 오가며

 ‘삶’과 ‘죽음’의 의미를 심도 있게 탐색한다.


10인의 사상가

아르투어 쇼펜하우어, 쇠렌 키르케고르, 허먼 멜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레프 톨스토이, 

프리드리히 니체, 윌리엄 제임스, 마르셀 프루스트,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알베르 카뮈


권태는 욕망하는 상태보다도 훨씬 더 끔찍하다.

권태는 손쉽게 우리를 절망에 이르게 하며 심지어 목슴을 끊도록 만들기도 한다.

욕망이라는 고통과 권태라는 고통 사이에서 우리가 바랄 수 있는 최선은 뚜렷한

수준의 고통으로부터 일시적으로 매우 짧게나마 벗어나는 것이다.

우리는 이처럼 일시적인 고통의 유예를 가리켜 행복이라 부른다.


삶이란 무엇이며 삶을 어떻게 살 것인가에 관한 키르케고르의 이해는 절망과 믿음 이라는 

쌍둥이 같은 개념에 핵심 기반을 두고 있다. 

오직 믿음만이 우리를 절망으로부터 구원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불신과 무신론은 밀접히 연관돼 있다. 둘은 사실 같은 뿌리를 공유하고 있다.

무신론자는 사랑이라는 원칙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혹은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며, 인간을 불신하는 자는 친절이라는 원칙이 인간을 지배하고 있음을 보지 못하는

혹은 보려고 하지 않는 사람이다.

어느 쪽이든 악은 신뢰의 결핍에 있다.


삶은 사실상 권력 의지의 표출이다. 

따라서 우리는 삶을 의무나 운명이나 사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실험의 장으로 여기는 가운데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


사랑이란 근본적으로 보편적인 연민을 가리키며,

연민이란 전 인류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어쩌면 유일한 존재 법칙이다.


믿음은 삶의 원동력이다.

만약 어떤 사람이 살아 있다면 그것은 그가 무언가를 믿고 있기 때문이다.

그가 자신이 살아야 할 목적이 있다고 믿지 않는다면 그는 살아가지 못할 것이다.


의미 있는 삶, 살 만한 가치가 있는 삶에 이르는 열쇠는 보편적 사랑이다.

보편적 사랑이란 공감이자 연민이자 용서다.


예술은 진리를 드러낸다.

예술은 가장 현실적인 것, 가장 꾸밈없는 양식, 진정한 최종 판단이다.


말해질 수 있는 것은 명료하게 말해질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말할 수 없는 것에 관해 우리는 침묵해야 한다.


세계가 궁극적으로 무의미하다는 느낌은 카뮈 철학의 출발점이자 뿌리다.

우리 인간이 의미를 갈구하도록, 무엇이든 이해하기를 갈구하도록 구성된 존재임에도

세계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는다.


#왜살아야하는가 #미하엘하우스켈러

#권태 #욕망 #행복 #고통 #삶 #믿음 #절망 #불신 #무신론 #악 #신뢰

#친절 #사랑 #권력 #의지 #연민 #공감 #예술 #침묵 #무의미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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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모니쿠스
데이비드 매슨 외 지음, 김성균 옮김, 마스터칼리 삽화 / 우물이있는집 / 202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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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 밀턴의 사탄, 루터의 ‘악마’, 마귀

그리고 솔로몬의 72악마


루터, 밀턴, 괴테, 이 세 이름이 나란히 놓이면 무척 신기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들 세 위인의 이름들이 연계되면 우리의

관심을 사로잡는 흥미로운 효과를 발휘할 수 있다.

왜냐면 세 위인은 저마다 악의 원리를 나름대로 표현했고,

그렇게 표현된 악의 세 가지 원리는 각각 다른 방식으로

세 위인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루터의 가장 현저한 특징은 저주받은 중대한 존재를 확신해

마지않은 굉장히 성실한 신심이다. 루터의 확신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첫째, 악을 산출하는 악한 존재는

실제로 현존한다. 둘째, 그런 존재는 인류의 공적이다.

셋째, 그런 존재의 특별한 목적은 루터의 생시에 루터의

운동을 저지하고, 이왕이면, "루터의 영혼에서 신의 은총을

박탈하는" 것이다.


세 위인은 두 가지 특징을 공유한다. 첫째, 그들은 악을

산출하는 기능을 수행하는 저주받은 존재의 현존을 보도한

기독교 경전의 구절들을 근거로 삼았다. 둘째, 그들은 기독교

경전에 기록된 그런 존재를 묘사한 구절들을 다소라도

차용했다.


밀턴의 시심은 사탄을 서사시의 주인공으로 만들었고,

괴테의 시심은 메피스토펠레스를 극시의 등장인물로 

만들었다.


밀턴은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가장 고결한 상상력을

발휘한다. 그는 서사시의 도처에서 사탄을 사물처럼 보이도록

표현하는 자신의 독창적 개념을 상기시키는 듯이 보인다.

밀턴은 자신의 서사시 전체에서 천사들은 단순한 사물들로나

현상들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개념뿐 아니라 그들을 육체적

행위자들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개념마저 똑같이 일관되게

고수한다.


밀턴이 상상한 사탄의 역사에서 중요한 것은 그 역사의

시초이다. 사탄이 대천사였을 때에 그 역사는 시작된다.

밀턴이 상상하기로, 우리의 세계가 창조되기 전부터

우리 인간들과 완전히 다른 숭고한 존재들의 무리가 이미

존재했다. 그들은 영혼들이었다.


이제부터 다짐하건대.

우리는 앞으로 결단코 선행하지 않겠으며,

우리를 내치신

그분의 숭고한 의지를 거역하는 존재로서

우리는 오직 영원한 악행만 즐기겠노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6,000년간 나름대로 고투하고

흥망성쇠를 겪으며 변천하다가 새로운 직업을 얻은 사탄이다.

이 사탄은 6,000년 전의 사탄보다 더 왜소하고 더 변변찮고

더 비열하지만 백만 배나 더 교활하고 더 영악하다.


메피스토펠레스, 그가 대천사로서 지녔던 모든 것은,

마치 뜨겁고 황량한 사막을 여행한 듯이, 오래전에 증발해

버렸다. 그는 이제 메마르고 쪼그라들어 뒤틀린 냉소하는

악마이다.


탈옥하지 않으려는 마르가레테 때문에 괴로워하는 

파우스트에게 메피스토펠레스가 던지는 다음과 같은 

한마디보다 악마의 심성을 더 확실하게 예시할 수 있는 말이

과연 있을까?

"어서 오게! 어서! 자네가 그내와 함께 있겠다면 나만 가겠네."

이런 맥락에서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다음과

같이 비교될 수 있다. 사탄은 거대한 인물화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세밀한 초상화이다. 사탄은 자신의 미래생활을 구상하는 타락

천사이고, 메피스토펠레스는 근대의 악마이다.


밀턴의 사탄과 괴테의 메피스토펠레스는 문예의 성과들이다.

그런 반면에 루터의 악마는 실제로 현존한다고- 어떤 관점에서는,

확실히 엄존한다고도- 그에게 인식되었다. 이렇듯 악마의 현존을

확신하는 루터의 강력한 신심은 그의 성격을 대변하는 특징이다.


루터의 마귀는, 대체로 루터가 부단히 애써 저항해야 했던 

간섭요소 -그의 내면에서 고조되는 정신적 공포심, 끓어오르는

격렬한 역심, 미약해지는 결심들, 그런 심정들에 휩싸인 그의

실수와 우유부단함과 질투, 그리고 그의 외부에서 그를 파멸

시키려고 울부짖는 세계 전체- 를 기독교 경전의 방식으로

의인화한 것이라고 정의될 수 있다.


나는 악마가 모든 치명적 질환들과 중병들을 사람들에게

보냈다고 강조한다.


우리가 헌신적인 표정으로 경건하게 행동하면 악마조차

감미롭게 만들 수 있지.


고대세계의 역사에서 인간을 속박한 노예사슬을 끊으려던

시도는 두 번 결행되었다. 소크라테스가 최초로 결행했고

예수가 두 번째로 결행했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투옥되었고,

예수는 십자가에 매달렸다. 그들의 시대에 존재한 자유를

향한 증오심은 그토록 지독했다.


개인성의 영혼은 개인의 만족을 추구하고, 보편성의 영혼은

모든 역사를 단일하고 지고한 이념이나 목적의 계시과정으로

전망하면서 만족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sunestbooks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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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도의 철학 - 흔들리는 삶을 위한 16가지 인생의 자세
샤를 페팽 지음, 이주영 옮김 / 다산초당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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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들리는 삶을 위한 16가지 인생의 자세


살면서 겪게 되는 시련을 어떠한 태도로 받아들이냐에

따라 인생의 모습이 달라진다는 것이다. 시련이 만들어내는

효과도 다양하다. 시련은 포기하지 않는 의지를 만들기도

하고, 마음 편히 포기하게 도와주기도 한다. 하나의 길을

끝까지 갈 힘을 주거나 변화를 통해 도약하게 만들기도 한다.


실패의 경험은 우리의 삶, 우리가 느끼는 두려움, 앞으로

마주할 성공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


만일 우리가 본질 안에 갇혀 있지 않다면 그것은 실패

덕분이다. 시련을 통해서 새로운 발견을 하고 미래로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장 폴 사르트르>


성공은 기분 좋은 일이지만 실패보다 가르침을 제대로 주지

못할 때가 많다. 실패를 경험해야 만만치 않은 현실의 벽

앞에서 무엇을 할지 스스로 질문하고, 문제를 모든 각도에서

살펴보기 때문이다. 한 단계 도약할 발판을 찾는 셈이다.


놀라움과 깨달음을 주는 것, 이론으로 한정 지을 수 없는 것이

실패다. 실패 그 자체가 삶을 정의하는 것이 아닐까?


"실수는 인간적이지만 이를 반복하는 것은 악하다."

실수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이를 통해 무언가를 배우지

못하고 같은 결과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할 수 없는 일을 구별하는 지혜도

넘어져 봐야 얻을 수 있다. 그리고 이렇게 생긴 지혜는

자연스럽게 성공으로 이어진다.


지혜의 반대말은 현실 거부다. 무언가 뜻대로 되지 않을 때

이번에는 내 선택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하지 않으면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이익을 놓친다.


스토아학파의 지혜에 귀 기울이면 "현실이 불공평"하다며

투덜거리는 태도를 버릴 수 있다. 아우렐리우스는 장애물을

맞닥뜨리며 수없이 낙함했지만 그럼에도 부당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운명은 공정하지도, 부당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목표 지향적인 의지는 오히려 장애물이다.


인간 정신이 가진 상상의 힘을 믿는 사르트르의 실존주의에서

중심 개념은 '계획'이다. 존재 한다는 것은 영원히 고정된

진리가 아니다. 미래를 향해 계속 변하는 것이다. 그래서 장벽에

부딪혀도 계획을 바꿔가면서 이정표를 세울 수 있다.


자신을 냉정하게 돌아보려면 좌절을 제대로 맞봐야 한다.

그래야 겸손을 배우고 자신을 날카로운 관점에서 평가해 재능을

마음껏 펼칠 수 있다.


겸손은 가장 확실한 지혜의 증거다.

<찰스 캘럽 콜턴>


세상의 진리에 비해 자신이 가진 지식은 지극히 적기에,

겸허히 배우겠다는 자세로 가장 낮은 곳에 두는 태도다.


독일의 철학자 한나 아렌트는 진정한 정치란 '새로운 시대를

여는 것'이라고 했다. 새 시대를 열지 못하는 정치는 단순한

행정 업무에 불과하다.


루소는 인간의 특징으로 '완벽해질 가능성'을 꼽는다.

인간은 본능의 지배에서 자유롭기에 실수를 고쳐가면서

끝없이 나아질 수 있다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결단은 과학이 아니라 예술의 영역"

이라고 주장했다. 결단은 분석적인 이성보다 직관에 

속한다는 의미다. 그렇다고 비합리적이는 의미는 아니다.


"행동을 시작하는 것이 실천의 비밀이다."

자신의 직관을 따르며 결단을 내리는 힘도, 대범하게

도전할 힘도 결국 행동력에서 나온다.


결정적 순간에 대범하게 행동하고 싶다면 반드시

경계해야 할 요소가 있다. 바로 지나친 완벽주의다.


성공하는 삶이란 질문하는 삶이다. 철학은 바로 질문하는

법을 알려준다.


알고 있는가? 나 자신은 항상 스스로 극복해야 하는

존재다.


기쁨은 항상 현실과 싸운다. 반면에 슬픔은 비현실과

끝없이 싸운다. 비현실과 싸우는 것이 불행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dasanbooks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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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뇌르, 산책자 - 철학자들을 매혹한 길과 풍경
브루스 보 지음, 황재준.우석영 옮김 / 산현글방(산현재)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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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자들을 매혹한 길과 풍경


'철학자의 길'이라 불리는 곳은 많다. 과거 프러시아의 

쾨니히스베르크에는 더 유명한 철학자의 길이 있었다.

임마누엘 칸트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5시 정각에 산책하기

시작해서 주부들이 그를 보고 세계를 맞추었다는 일화로

유명한 길이다.


나는 "생각하기"가 철학적 추론뿐만 아니라 감각 지각, 기억,

그리고 상상까지 포함하는 것이라고 여긴다. 

나는 이러한 정신적인 현상들을 연구하는 데 걷기를 활용해,

우리의 정신적 삶과 신체적 실존 사이의 관계 또한 이른바

"정신-신체 문제"를 살펴보려 한다.


나의 감각이 나의 지성보다 더 신뢰할 만한 현실의 안내자

이므로,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결론보다 걷기

때문에 존재한다는 결론을 더 확신할 수 있다. 이 주장에

대해 데카르트는 내가 걷는다고 '생각'하는 것만 확실할

뿐 내가 걷는다고 꿈꾸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에, 내 몸이

실제로 걷는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고 반박했다.


가상디에 따르면, 걷기가 신체의 비자발적인 감각 지각과

관련되는 한, 걷기는 데카르트처럼 방에 앉아 사색하는 것보다

자연의 진리를 찾는 데 더 믿을 만한 방법이다.


같은 길을 다시 걸으며 우리는 자연에 새겨진 경험(생각, 욕망,

상상)을 떠올리고, 과거의 흔적을 되살리고, 그곳에 살았던 

옛 사람들과 우리를 다시 연결하는 방식으로 그 장소에 얽혀

있는 옛 이야기를 되살린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정신은 모든 다른 역사적 시대와 지층이

동시에 존재하는 도시-"한번 존재한 것은 어느 것도 사라지지

않는 존재물"-와 유사하다. 정신적 삶에서 한번 형성된 것은

소멸하지 않으며, 모든것은 어떻게든 보존되고 적절한 상황을

만나면 다시 한번 자기 존재를 드러낸다.


살아 있는 현재에서 반짝이는 과거의 빛은 이미 과거와 현재,

죽음과 삶 사이의 장벽을 허물고 있었고, 죽은 이들이 나라는

매개체를 통해 말할 수 있게 해주었다.


[실존주의적] 정신분석학의 원칙은, 인간은 집합체가 아니라

총체서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가장 사소하고 피상적인

행동에서도 자신을 총체적으로 표현한다. 이를 다른 말로 하면

모든 취향, 독특한 버릇, 행동은 결국 전부 '드러나게' 된다.


보들레드처럼 사르트르는 "삶이라는 완고하고 무정형적인

우연성"에 반기를 들었다. <구토>의 거의 대부분은 우연성과

자연, 즉 계획이나 설계의 결과가 아니라 우발적으로 우연히

존재하는 것에 대한 사르트르의 혐오에 대한 사색이다.


질문을 던져본다. 나는 다르게 행동할 수 있었을까? 많은

철학자들에게 다르게 행동할 수 있다는 것은 "자유의지"의

특징이다. 다르게 행동할 수 없었다면 그 사람은 그렇게

행동하거나 그렇게 행동하지 않을 자유가 없었다는 것이고,

그 행동은 필요에 의해 좌우되었을 뿐이다.


보브아르에게 하이킹은 세계를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수단

이었다. 보부아르는 시골길 걷기를 즐겨했는데, 그녀에게

그것은 영혼의 탄산수이자 치료제였다. 보브아르는 처음에는

보행 시간을 5~6시간 정도로 제한했지만, 나중에는 

9~10시간을 걷기도 했고 때로 40km 이상을 걷기도 했다.


세계적 경험적 종합에서 핵심은 요소는 경험을 하나의

전체로 통일하는 초월적 상상력이라는 힘이다. 

초월적 상상력은(한 인간의) 감수성과 지식을 하나의 통일된

주체성으로 통합니다.


산책자는 낭만주의자들처럼 숲과 산비탈에서 고독을 추구하는

대신, 차이를 식별할 수 없는 수많은 도시 군중 속에 숨은,

관찰되지 않는 관찰자로서 고독을 찾는다.


"세속에서의 지위와 인정"은 키르케고르가 원하지 않던 

것들이었다. 그의 공적 페르소나는 위장이었다. 모든 이들에게

알려졌고, 축복의 날들이면 언제가 거리에서 보였던 산책자의

면모는 그의 익명성, 진정한 자기의 자아를 숨기는 그의 방식

이었다.


홀로, 두 발로 여행할 때보다 내가 더 많이 생각해본 적은 없다.

그때보다 더 많이 존재하고, 살고, 만일 이렇게 말해도 된다면,

나 자신이었던 적은 없다.


루소 만큼이나 니체에게도 행복의 비결은 자연이 주는

자극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걷기가 그들의 사색에 준 

자율이었다. 고독한 보행자는 자족적이고, 자신이 선택한

속도로 자신이 좋아하는 곳으로 갈 수 있고, 자유롭게 시를

쓰고 상상하고 지각할 수 있다. 즉, 그는 자유롭게 '몽상'에

참여할 수 있다.


"우리의 대도시에 부족한 것은 조용하고 광활한, 성찰을 위한

장소"라고, "잠시 물러남, 명상의 장엄함을 위한 장소"라고

니체는 썼다.


니체에게 자기 극복은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적인 인간"이

만물의 "영원회귀"를 의지할 수 있는 초인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를 통해서 도서를 

'협찬' 받았습니다.


@wisdom.shelter

@chae_seong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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