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하는 사람들 - 우리의 인간다움을 완성하는읽기와 뇌과학의 세계, 2024 세종도서
매슈 루버리 지음, 장혜인 옮김 / 더퀘스트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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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슈 루버리의 읽지 못하는 사람들(장혜인 옮김, 더퀘스트, 2024, 408면 분량)평범하지 않은 독자들읽기를 수집하고 분류, 소개한다. 저자는 읽기를 낯설게 하는 것과 자연스럽지 않은 일로 만드는 것이 저술 목표 중 하나라고 밝힌다. 읽기는 더 이상 보편적인 행위도 단일한 활동도 아니다. 런던의 대학 영문학과에서 현대문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저자 매슈 루버리는 현대문학, 미디어, 읽기의 관행과 역사를 연구하며 오늘날 읽기를 연구하는 가장 독창적인 학자라는 평을 듣는다. 그는 후기에서 우리가 읽기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을 바꾸기 위해 이 책을 집필했다고 전하는데, 읽는다는 것이, 어떻게든 읽어내는 행위와 의지가 얼마나 숭고한지 독자는 감동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책은 총 여섯 개 장으로 친근하고 단순한 읽기라는 행위를 새로운 미지의 영역으로 확대한다. 저자는 난독증, 과독증, 실독증, 공감각, 환각, 치매 등 여섯 가지 읽기장벽은 읽기 과정이 원활하게 작동할 때는 감춰져 있는 읽기의 여러 가지 측면을 조망한다.”(p.335)고 소개하는데 읽기를 배우는 단계인 아동기에서 시작하여 읽기, 그리고 삶과 이별하는 단계인 노년기에서 맺는다. 1<문해력 신화 속 지워진 아이들>에서 저자는 난독증의 역사에서 가려져 있던 그들 자신의 목소리를 찾아낸다. 유명인의 사례와 고전 문학 속 캐릭터 묘사, 연구서와 보고, 증언과 수기 등 생생한 인용의 집적은 얼마나 많은 어려움과 고통이 실재하는지 전달하고, “이런 아이들이 읽기를 배울 때 겪는 어려움의 원인과 진짜 본질을 깨닫는 일이 가장 중요하다.“(p,72)는 말에 귀 기울이게 한다. 난독증 서사의 주된 감정이 필연적으로 수치심이며 이 감정이 끌어내는 일상의 고난은 과업을 수행하는 신화속 인물만큼이나 힘겹다. 그럼에도 읽을 수 있는 것은 기적이다“(p.112), ”나는 책을 잘 읽지는 못해도 어쨌든 읽는다. 괜찮은 일 아닌가?“(p.114)라는 수기 속 긍정의 목소리로 맺는다.

 

2<한 살에 책을 펼친 아이>에서 저자는 자폐적 읽기가 책과 만나는 모든 사람이 보이는 표면 읽기의 또 다른 형태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 장에서 읽기라는 용어에서 배제되거나 읽기가 아닌 것으로 낙인찍혔던”(p.122) 책과의 다양한 소통 방식을 만난다. 최초의 과독증 환자, ‘읽기 기계로 불렸던 기억 천재의 사례부터 세 살 때 그리스어를 배우기 시작했던 존 스튜어트 밀의 어린 시절도 만난다. 책은 읽는 대상이 아닌 의례를 수행하는 대상이 되기도 한다. 저자는 표면 읽기를 열등한 읽기 방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실수라고 반복한다. 활자가 주는 풍부한 자극에 마음을 빼앗기는 건 책 읽는 사람이 책에 느끼는 애정과 다름 아니기 때문이다.

 

3<하루아침에 읽을 수 없게 된다면>의 부제는 실독증과 읽는 존재로서의 인간이다. 후천적 문맹이라고도 하는 실독증은 글자 공화국에서 살아가는 인간에게 잃어버린 특권이다. 병리 의학적 관점에서 뇌의 특정 영역 손상과 실어증 발생, 브로카 영역이라는 명명 등 역사적 사례를 거슬러 올라가고 읽기를 방해하는 여러 질병을 살펴본다. 읽기 장벽은 특히 작가에게 더 잔인하다. 자칭 읽기 중독, 활자 중독이었던 하워드 엥겔은 뇌줄증 후유증으로 실독증을 겪게 되고 수기를 통해 읽기는 곧 정체성이라는 걸 웅변한다.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하고, 자신이 문맹이라고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사는 그는 의사의 진단에 동의하지 않고 중단 없이 자기만의 독서 여정을 강행한다. 가장 인상적인 사례 중 하나다.

 

4<모든 글자가 꽃처럼 피어난다면>은 어떤 감각이 다른 감각을 자연스럽게 불러일으키는 공감각을 다룬다. 처음 등장한 의학 기록부터 명칭의 변화, 예술과 문학 작품에서 포착하는 공감각적 실험들, 실제 공감각자였던 나보코프의 예를 언급한다. 글이 환하게 빛나 보이거나 집중한 글자에 스포트라이트가 비치고 글자에 다양한 색이 덮여있다면 어떨까, 글자에서 맛을 느끼는 미적 공감각자의 읽기는 어떨까, 심지어 글자에 인격적 특성을 부여하기도 한다. 이 장은 판타지 소설을 읽는 듯 놀랍고 아득하다. 5<영원히 꿈속을 헤매는 사람들>은 환각이 주제다. 질환 때문에 발생하는 텍스트 환각에서 현실과 읽기 세계의 경계를 흐리는 환각까지 넘나든다. 이 장은 사후세계의 문해를 상상하는 것으로 맺는데 저자는 생존자의 증언으로부터 천국에는 읽기를 가로막는 장벽이란 없어 보인다고 쓴다.

 

6<읽기는 어떻게 삶이 되는가>는 다시 읽기와 정체성을 묻는다. 치매와 노화로 인한 기억상실은 더 이상 특별한 경우가 아니라 평균 수명이 늘어나고 있는 오늘의 모든 이에게 해당한다. 여기서 치매도 무너뜨리지 못한 책의 위안중 읽기와 치매를 다루는 두 부류의 접근법이 인상 깊다. 성인 문학의 정교한 언어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논리에 근거한 2의 유년기접근법과 유아화를 거부하고 성인 문학과 고전 읽기를 포기하지 않는 방식이다. 물론 치매 친화적인 각색은 허용한다. 이 부분은 논제로 만들어 의견을 나누어 보았다. 저자는 서사를 통해 기쁨을 얻는 일은 멈추지 않을 것이라며 이들이 책으로 무엇을 하든 그것은 여전히 읽기다.”(p.331)라는 문장으로 긴 여정을 마친다.

 

책은 장 별 서두에 인용문을 갖추고 있는데 서문의 제사는 나는 읽어야 한다. 내 삶의 대부분은 독서다.”라는 올리버 색스의 말이다. 역사를 거슬러 오르며 색스를 비롯하여 읽기는 무엇인가 규명하려는 지성들의 자취를 확인하고, 그 안에서 구축되거나 배제된 읽기를 드러냄으로써 저자는 표준적인 읽기 방식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더 이상 읽기는 이것이다, 라는 또렷한 정의는 필요치 않다. 숭고하기까지 한 자기만의 읽기는 직전의 내가 해내던 일을 더 이상 할 수 없음을 깨닫는 순간에도 멈추지 않는다. 읽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을 지켜내고자 애쓰는 일은 천국의 모습도 이에 걸맞게 상상해낸다.

 

읽기를 다루는 책이라는 점에서 일단 매력적이었다. 나는 언제까지 읽을 수 있을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어야 하는데, 아직 읽지 못한 책을 어떡하나 하는 조급증도 일상 감정이다. 누구도 예외일 수 없는 순간은 다가온다. ‘읽는 시간에서 어떻게 더는 읽지 않는 시간으로 내려서게 될까, 읽지 않는 또는 읽지 못하는 나는 그래도 괜찮을까, 무사할까, 읽은 날들을 어떻게 뒤돌아볼까 스치던 생각을 읽지 못하는 사람들을 통해 조금씩 정리해본다. 상당한 분량의 사례와 수기를 수집하고 연구 분석하여 집대성한 저자 덕분에 꼭 필요한 관점을 배울 수 있었다.

 

이 책의 또 다른 장점은 다양한 문학작품 인용이다. 특별히 절판 도서인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를 빨리 찾아보고 싶어진다. 조지 손더스의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를 읽던 중에 이 책을 시작하였다. 여섯 명의 뛰어난 작가 지망생을 대상으로 하는 교실에서 인간 정신의 깊은 부분이 읽고 쓰기에 의해 날카롭게 다듬어지는 현장을 감탄하다가 춤추는 활자를 붙잡기 위해 경주하는 전투장에 들어온 듯하여 극과 극의 읽기가 더욱 생생하게 다가왔다. 한편으로는 바벨의 도서관에 입성하는 것만으로도, 새롭고도 놀라웠던 기억만으로도 접근 불가 표지는 무용해진다. 오늘도 읽는 이들, 또 읽으려 애쓰는 이들을 지지하며 예외일 수 없는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엥겔이 가볍게 설명하긴 했지만 읽기는 그저 어떤 행위가 아니다. 읽기는 정체성이다. 엥겔에게 뇌졸중은 무작위로 일어난 생물학적 사고가 아니라 책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비뚤어진 표적으로 삼은 인간적인사건이다.(그는 의사가 뇌손상을 설명하면서 사용하는 상해라는 단어에 모욕이라는 의미도 있다는 사실을 금세 때달았다.) 엥겔은 신경학적으로 글을 읽을 수 없지만 자신을 독자라고 정의한다. 그만큼 읽기라는 말이 가진 힘은 대단하다. 그는 심지어 자신이 문맹이라고 공개적으로 밝힌 뒤에도 계속 책을 산다. 작가로서 또 다른 자아를 상상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그도 문해력 상실인이라는 정체성은 도저히 상상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독자였다. 뇌가 터져버렸지만 다른 것이 될 수는 없었다. 읽기는 내 안에 단단히 박혀 있었다. 심장을 멈출 수 없듯 읽기도 멈출 수 없었다. 읽기는 내게 뼈, 골수, 림프, 피였다.(p.187)

 

이런 부정은 문해력 상실 상태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말해준다. 글을 읽지 못하는 자칭 독자보다 읽기와 정체성 사이의 관계를 더 잘 드러내는 표현이 있을까? 물론 신경학자는 엥겔의 진술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뇌가 터져버리면 사람이 분명 달라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엥겔은 읽기와 관련된 뇌 영역만 추적하는 학자들에게 반격하며 대뇌피질이라는 좌표를 넘어 이상적인 읽기로 뻗어나간다. 엥겔은 신체적 은유를 통해 읽기란 신경학적으로 축소하거나 생리학적 용어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는, 책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에게 익숙한 감각을 표현해낸다.(p.1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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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으로의 긴 여로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69
유진 오닐 지음, 민승남 옮김 / 민음사 / 200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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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낭만적인 제목이라니. 밤으로의 긴 여로, 제목이 보여주는 서정적인 이미지는 사랑과 설렘, 기대를 간직한다. 끝나지 않기를 바라는 행복한 연인의 한 때도 상상케 하듯, 길지 않은 분량을 아름다움으로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읽어나갈수록 제목은 변주되고 마침내 선명해진다. 작품은 요람에서 무덤까지인 인생을 아침부터 깊은 밤, 하루라는 시간으로 요약한다. 타이론 일가의 일상적인 하루가 가져본 적 없는 집 대신 잠시 머무는 용도의 여름 별장에서 펼쳐진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갈 집이 없는 삶, 부유하는 삶이 끝없이 피로를 누적한다. 평범한 듯 맞은 아침은 시간이 흐르며 전조와 복선을 쌓고 시각과 청각을 자극하면서 고통스럽게 전진한다. 작가는 자기 삶의 맨얼굴을 기꺼이 직면한다. 감히 엄두내기 어려운 치열한 기록으로 작가는 애도의 서를 완성한다.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민승남 옮김, 민음사, 2002, 1956, 244면 분량)는 죽음으로 향하는 길고 고단한 여행길을 압축한다. 선택한 적 없는 여행이나 그 끝에 놓인 건 밤, 불통, 절망, 죽음이다. 침몰하는 배에 앉아 당하지만은 않겠다는 결기도 보인다. 두려움에 맞서며 나아져야 한다고, 잘못을 번복하면 안 된다고 경고하고 애원한다. 그들은 폭발하듯 분노를 내지르다가도 이내 자신이 더 상처받으며 사과한다. 절대 포기할 수 없는 사랑하는 이들을 눈앞에서 잃어가는 고통을 작품은 처연하고 사실적으로 그려낸다.

 

희곡은 총 4막으로 타이론의 여름 별장 거실에서 시작한다. 가장인 제임스 타이론과 아내 메리, 맏아들 제임스와 막내아들 에드먼드가 보내는 하루는 가족이 통과해 온 과거와 짐작 가능한 미래를 동시에 비춘다. 타이론은 아내가 다시 돌아와 사랑스런 예전 모습을 되찾았다고 기뻐하며 한 마디 더 보탠다. “그러니 계속 노력해 줘요.”(p.19)라고. 일상적인 말, 사소한 언급에도 메리는 민감하게 반응한다. 에드먼드를 낳고 진통제로 몰핀을 투여받은 후 중독자가 된 메리는 집에 돌아왔으나 염려하고 의심에 사로잡힌 가족들의 시선을 받는다.

 

그녀는 남편을 원망한다. 사랑에 빠져 이른 나이에 시작한 결혼생활은 순회공연을 다니는 남편을 따라 호텔을 전전하며 이동하는 삶이었고, 병으로 한 아이를 잃고 중독이 되는 등 불행은 연거푸 다가왔다. 타이론의 돈에 대한 집착, 극단적 인색함은 아일랜드 이민자의 자식으로 혼자만 되돌아간 아버지 때문에 고생했던 어린 시절 기억의 상처에서 비롯했다. 결핵에 걸린 에드먼드를 위해서도 그는 최대한 치료비용을 아끼고 싶다.

 

형인 제임스는 무력하고 방탕하지만 에드먼드의 우상이다. 내세울 것 없이 술에 의지하지만 동생을 사랑하는 마음만은 한결같다. 그러나 스스로 한결같은 사랑의 베일을 벗기고 진심을 노출한다. 넌 나의 프랑켄슈타인이라고, 내가 너를 만들었다고 하던 제임스는 내가 너를 타락시켰다고, 일부러 그랬다고 밝힌다. 읽고 또 읽은 흔적을 간직한 책들 곁에서 시를 간직하고, 시를 쓰고, 시로 말하던 에드먼드는 그 밤, 병에 갉아 먹히고 있는 그 밤, 애증의 가족과 함께다. 질투, 원망, 분노가 한없는 사랑 아래에서 들끓고 있다.

 

그들은 모두 이유가 있다. 언제부터 잘못되었는지 왜 이런 일이 일어나고야 말았는지 아연하다. 대적하는 동시에 회피할 수밖에 없었다. 마약이, 술이, 돈이나 또 다른 대상은 현실을 견디게 하는 도피처가 된다. 패배를 인정하듯 운명을 생각한다. “운명이 저렇게 만든 거지 저 아이 탓은 아닐 거야. 사람은 운명을 거역할 수 없으니까. 운명은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하는 사이에 손을 써서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을 하게 만들지. 그래서 우리는 영원히 진정한 자신을 잃고 마는 거야."(p.72)라고.

 

아내에게 바치는 헌사가 인장과도 같은 밤으로의 긴 여로에서 작가는 진정으로 원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일들”(p.72)이 어떻게 일어나고 말았는지 기록으로 남긴다. 작가 자신과 가족을 일대일로 대응시킨 인물들은 영원히 상영되는 활동사진처럼 끝없이 고통 받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아서 밀러는 작가의 마지막 희곡이자 리얼리즘이 가장 뚜렷하게 구현된 작품이 가족과 자신의 삶에 대한 위대한 용서를 담고 있다고 평했다. “미국 현대 연극의 아버지라 불린 유진 오닐은 새로운 극작 기법과 끊임없는 실험으로 후배 극작가들의 영원한 영감과 영향력의 원천이 되었다. 밤으로의 긴 여로는 미국에서 최초로 노벨 문학상을 받은 극작가이자 사후 3년째 되던 해에 수상한 것을 포함하여 총 4회 퓰리처 상을 받은 작가 유진 오닐의 대표작이다.

 

책에서 안개의 비유는 특히 인상 깊다. 어머니 메리는 안개가 얼마나 자욱한지 길이 안 보이는군. 세상 사람들이 전부 지나가도 모르겠어. 항상 이랬으면 좋겠다. 벌써 어두워지고 있어. 곧 밤이 될 거야. 다행히도.”(p.120)라고 안개와 밤을 구한다. 작가의 대변자인 에드먼드는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p.158)라고 말한다. 밤으로의 긴 여로를 탈고한 작가는 자신의 사후 25년 동안은 발표하지 말고, 그 이후에도 절대 무대에 올려서는 안 된다는 조건을 달았다고 하는데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데 필요한 시간을 그렇게 산정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책은 인물의 눈빛과 표정, 몸짓과 떨림까지 마치 눈앞에 보이듯이 생생하게 전달하기에 아름다운 은유와 적확한 문학 인용문들까지 더해 비극의 색조를 짙게 만든다. 작품을 읽고 작품 설명을 마치고 나면 비극을 두 번 읽은 듯 마음이 아프다. 마침내 작품은 고통을 고통으로 승화시켜 비로소 편안하게 놓아주고 달래는 애도가 된다. “빌어먹을 호텔 방에서 태어나 호텔 방에서 죽는군.”이라는 작가의 마지막 탄식은 삶 자체가 연극과도 같았던 거장의 대사로 들린다. 밤이 다가오기 전에 읽어야 할 작품, 밤으로의 긴 여로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에드먼드 (앞을 응시하며) 전 안개 속에 있고 싶었어요. 정원을 반만 내려가도 이 집은 보 이지 않죠. 여기에 집이 있는지조차 모르게 되는 거죠. 이 동네 다른 집들도요. 지척을 구 분할 수가 없었어요. 아무도 만나지 않았죠.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고 들렸어요. 그대 로인 건 아무것도 없었어요. 바로 제가 원하던 거였죠. 진실은 진실이 아니고 인생은 스 스로에게서 숨을 수 있는, 그런 다른 세상에 저 홀로 있는 거요. 저 항구 너머, 해변을 따라 길이 이어지는 곳에서는 땅 위에 있는 느낌조차도 없어졌어요. 안개와 바다가 마치 하나인 것 같았죠. 그래서 바다 밑을 걷고 있는 기분이었어요. 오래전에 익사한 것처럼. 전 안개의 일부가 된 유령이고 안개는 바다의 유령인 것처럼. 유령 속의 유령이 되어 있 으니 끝내주게 마음이 편안하더라고요.(아버지가 걱정스러우면서도 못마땅해하는 눈길을 보내는 걸 보고 조롱하듯 히죽거린다.) 미친놈 보듯이 그렇게 보지 마세요. 맞는 말이니 까. 세상에 인생을 있는 그대로 보고 싶어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인생은 고르곤 셋을 하나 로 합쳐놓은 것과 같아요. 얼굴을 보면 돌로 변해 버린다는 그 괴물들 말예요. 아니면 판 이거나, 판을 보면 죽게 되고-영혼이 말예요-유령처럼 살아가게 되죠.(p.157~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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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는 어떻게 읽는가 -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
조지 손더스 지음, 정영목 옮김 / 어크로스 / 2023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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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꽤 오랫동안 붙들고 있었다. 페이지가 적절한 속도나 만일 그런게 있다면 권장 속도로 넘어가는 책은 아니었다. 감동에 사로잡혀서 다음 장으로 넘길 엄두를 못 내던 날들, 급하게 읽어야 할 책에 양보했던 순간에도 걱정은 없었다. 내게는 책이 있다, 나를 위해 열리고 있는 수업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미 보물은 확보되었다는 안도감이 책 곁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온전했다. ‘현존하는 영어권 최고의 단편소설 작가라 불리는 조지 손더스는 역자가 가장 강렬한 조지 손더스 경험이라고 했던 장편 바르도의 링컨으로 맨부커상을 수상했다. 특별한 인상이 여전히 흐려지지 않는 동화 프립 마을의 몹시 집요한 개퍼들과 여운 깊은 우화 색채의 여우 8로 만났던 조지 손더스의 진면목은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정영목 옮김, 어크로스, 2023, 2021, 644면 분량)에서 제대로 드러난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는 조지 손더스가 시러큐스 대학 문예창작 석사 과정에서 25년간 진행했던 강의를 공유한다. 부제가 조지 손더스의 쓰기를 위한 읽기 수업이라 작가만을 대상으로 삼지는 않겠으나 실제 강의는 매년 선발된 6명의 젊은 작가를 위해 이루어졌다. 저자가 그들은 들어올 때 이미 훌륭하다”(p.11)고 인정했던 소수 정예를 위한 수업은 이 작품들로부터 배운 내용 일부를 종이에 적어 그 통찰을 보전하는 것”(p.609)을 또 하나의 목표가 된다. 책은 읽고 쓰는 일에 진심인 모두, 저자의 말로 바꾸자면 읽기를 삶의 중심에 놓은 사람들’(p.19)을 염두에 두고 집필되었다. 저자는 19세기 러시아 사실주의 대문호인 체호프, 투르게네프, 톨스토이, 고골 4인의 작품 7편을 선택한다. 단편 전문을 실은데 이어 심도 있게 분석하고 한 번 더 부연하는 구성에서 작품별로 배워야 핵심에 주목하고 질문에 답하며 활용하기에 따라 개인별 실습서의 역할까지 해낸다. 저자는 우리는 일곱 개의 꼼꼼하게 구축된 세계 축척 모형에 들어설 것”(p.15)이라고 밝힌다. 단편 소설이라는 생의 압축 무대는 이토록 짧은데 놀랍도록 광활하게 펼쳐진다. 친절하고 사려 깊은 안내자는 지루할 틈 없이 독자를 처음 만나는 세계로 이끌어간다.

 

안톤 체호프의 <마차에서(1897)> 는 한 번에 한 장씩 읽으며 질문하고 답한다. 인물의 등장, 등장하는 방식, 구체성을 늘리며 성격이 드러나는 방식, 이야기가 예상을 빗겨갈 때 효율에 대한 기대의 감소를 살펴보며 저자는 말한다. “그렇다, 단편이란 가혹한 형식이다. 우스개, 노래, 교수대 편지만큼이나 가혹하다.”(p.47)라고. 작품을 읽고 설명을 듣고 속으로 질문하면서 백 년도 더 전, 책 속의 마리야는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인물이자 경험으로 독자에게 새겨진다. 이 아름다운 장면은 페이지로부터 떨어져 나와 영속한다. 저자는 말한다. “단편은 단지 잇따라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이 아니다. 단편은 기세 좋게 몇 페이지 계속되다 멈추는 활기찬 서사가 아니다. 우리가 끝까지 다 읽을 수밖에 없게 하지만, 그래, 그렇지만 그 와중에 어찌 된 일인지 상승하거나 확장하여···이만하면 됐다는 수준에 이르는 서사다.”(p.86)

 

이반 투르게네프의 <가수들(1852)>을 읽으며, 여백에 빽빽하고 구체적인 묘사, 라고 메모하였다. 저자의 교실에서도 이 모든 곁가지, 끝없는 외형 묘사는 왜죠, 라고 의구심을 드러냈다고 한다. 이번 장에서는 내가 알아챌 수밖에 없는 것들 Things I Couldn't Help Noticing. TICHN'이라는 딱지가 붙은 수레 개념이 등장한다. 독자는 이야기를 읽을 때 이 수레를 끌고 다니며 단서를 차례로 싣는다. 저자는 좋은 이야기란 과잉의 패턴을 만든 뒤 그 과잉에 주목하고 그것을 장점으로 전환하는 이야기”(p.137)라며 투르게네프의 소설을 그 실례로 제시한다.

 

또 한 가지, 저자는 우리가 어떤 작가가 될지 거의 선택권이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 이 작품을 가르친다고 말한다. “결국 우리가 되겠다고 꿈꾸던 작가와는 닮은 구석이 거의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결국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진짜로 우리인 것으로부터 태어난다. 글에서 또 어쩌면 삶에서도 우리가 누르려고 하거나 부인하거나 교정하려고 해왔던 경향, 우리가 어쩌면 약간은 부끄러움을 느낄 수도 있는 부분들로부터.”(p.171)라는 발견에 이르게 된다. 이 책은 글쓰기라는 주제가 아닌 어떤 사람이 될 것인가, 어떤 괜찮은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결국 그에 미치지 못하였는가하는 인식에 닿도록 이끈다. 185면에는 글쓰기에 대한 완벽한 정의가 나온다. 쉼 없이 감탄사를 내뱉게 하는.

 

안톤 체호프의 <사랑스러운 사람(1899)>은 패턴이 있는 이야기를 설명하는 교본이다. 예상을 만드는 유서 깊은 한 가지 방법(p.215)이다. 단편의 중요한 요소인 비약의 대담성을 짚고, 이 작품을 굴종하는 여자의 유형에 관한 논평으로 평가 절하해서는 안 되는 이유를 밝힌다. 올렌카는 유명한 캐릭터로 때론 희화화되기도 하였는데 그녀를 대하는 감정은 책을 읽어나가며 변화한다. 저자의 결론은 다시 한 번 감동적이다. 톨스토이의 <주인과 하인(1895)>에서 저자는 어떤 이야기는 의무감에서 읽는데 말하자면 일련의 단어를 해독하며 예의바르게 견디는 모양새라고 한다. “그러나 <주인과 하인>을 읽으면서 우리는 이야기를 살기 시작한다.”(p.350)고 표현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이 그런 종류의 이야기, 글이 멈추고 삶이 시작하는 종류의 이야기다. 그러나 주여, 보기보다는 어려운 일이다.”(p.351)라고. 톨스토이의 <단지 알료샤(1905)>는 마지막에 실렸다. 글로 단정 짓지 않고 생략한 결말을 어떻게 읽을지 숙고하는 장이다. 절대 답을 주지 않고 계속 궁금해해라하고 말하는 점이 <단지 알료샤>의 진짜 성취라고 해석한다.

 

니콜라이 고골의 <(1836)>는 우아하지 않은 글이 아니라 위대한 작가가 우아하지 않은 작가가 쓰는 글을 쓰고 있는 것”(p.440)이라고 저자는 평한다. 스카즈 서술 기법을 활용한 기발하고 독특한 이야기는 한 번 듣기만 해도 잊기 불가능한 사건이자 부조리의 정점을 보여준다. 안톤 체호프의 <구스베리(1898)>비 오는 연못에서 헤엄치기라는 제목으로 책 속 장면을 현실로 이어받는다. 체호프와 톨스토이 사이의 우정으로까지 연결되고 독자는 두 거장의 시간을 아득하게 그려본다.

 

작가는 어떻게 읽는가에서 독자는 러시아 대문호들이 남긴 명작을 다시 읽는 기쁨을 누리게 된다. 저자의 지침을 따라 분석하고 파고들면서 새로운 관점을 얻고 반복과 생략, 과장과 은유 사이에서 생각지 못했던 통찰을 만난다. 저자는 그의 저작이 글쓰는 방법을 알려주는 종류의 책으로 잘못 인식될까 우려한다. ‘이 책은 그런 종류의 책이 아니다.’라고 언급했듯 오히려 읽는 행위를 통해 직접 이야기를 살기 시작하는체험을 하게 된다. 한 번 그들과 함께 살아봄으로 더 나은 삶, 더 나은 사람에 가까워지고자 하는 마음이 햇살처럼 퍼지고 온기를 입는다. 비록 곧 스러질지라도 말이다.

 

일곱 작품 덕분에 만나게 된 생생한 인물들에 대하여 저자는 아름다운 말을 남긴다. “그들은 다른 사람의 마음속에서 관념으로 출발하여 글이 되었고, 그런 다음 우리의 마음속에서 관념이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가 앞에 놓인 아름답고 어렵고 귀중한 날들로 다가갈 때 늘 우리와 함께 있으면서 우리의 도덕적 무기의 일부가 될 것이다.”(p.607)라고. 독자는 그들의 전작을 읽고 싶다는 의지를 불태우게 될지 모른다. 모두 작가가 될 수도 없고, 그럴 필요도 없다. 하지만 어제보다 좋은 사람이 되고, 더 나은 날들을 맞고, 선한 영향을 나누는 일은 누구에게나 소중하다.

 

이 책은 어떻게 삶을 바라보고 생각하고 판단할지, 결국 선택하고 실천할지에 대한 무대가 된다. 폐막하는 일 없는 무대다. 이 책은 발견의 시간을 선사한다. 신대륙은 아니더라도 미지의, 상상의, 꿈꾸던 땅에 대하여 쉬운 말로 이해시키고 이끄는 지침서다. 취할 것은 너무도 많아서 독자는 책을 읽을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벅찬 마음이 될 것이다. 밑줄로 동여매어진 문장들이, 그 목소리가 그리워서 곧 다시 펴야 할 것이다.

 

 

 책 속에서>


당신에게는 이야기를 시작할 아이디어가 필요하지 않다. 그냥 하나의 문장이 필요할 뿐이다. 그 문장은 어디서 오나? 어디에서든. 특별할 필요는 없다. 당신이 계속 반응하면서 시간이 흐르는 동안 특별한 문장이 될 것이다. 그 문장에 반응하고, 이어 평범함이나 너저분함 가운데 일부를 벗겨내기를 바라면서 문장을 바꾸는 것이···글쓰기다. 그게 글쓰기의 전부이며 또는 전부여야 한다.(p.185)

 

그리고 우리는 이야기가 세상이 움직이는 방식에 대한 우리의 감각과 일치할 때 좋아한다. 그것이 우리에게 전율을 일으키고, 진실에서 느끼는 이런 전율 때문에 우리는 계속 읽어나간다. 완전히 꾸며낸 이야기에서 우리가 계속 읽어나가는 주요한 이유는 사실 그것이다. 모든 게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계속 가볍게 회의하는 상태에서 읽는다. 모든 문장은 진실에 대한 작은 투표다. “진실이냐 아니냐?” 우리는 계속 묻는다. 우리의 답이 그래, 진실로 들린다이면 우리는 그 작은 주유소에서 튕겨져 나와 계속 읽는다.(p.343)

 

이 악몽은 여러 형태를 띨 수 있다. 물론 코를 잃는 것일 수도 있지만, 팔이나 건강이나 생계나 아내나 자식이나 제정신을 잃는 것일 수도 있다. 세상은 언제든 우리에게 일어날 수 있는 악몽으로 가득하지만, 코발료프가 찾아가는 사람들은 바로 우리처럼 이런 사실을 믿지 않거나 적어도 아직은 믿지 않는다.(p.457)

 

따라서, 모든 것이 정상적으로 계속된다. 어떤 사람이 코를 잃어버리고, 몸이 불편한 걸인이 성당 앞에서 조롱을 당하고, 무고한 죄수가 차르 체제의 더러운 감옥에서 썩어가고, 부자가 화려한 무도회에서 춤을 추는 동안 아이들이 굶어도. 우리는 1835325일에 허구의 페테르부르크에서 벌어지고 있었을 또 다른 언어도단인 일들을 수백 가지라도 나열할 수 있을 것이다. 또는 어느 날에나, 현실의 어느 도시에서나 계속 일어나고 있는 게 분명한 언어도단인 일들을. 그런 일을 해결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설 것이며, 그러니 그렇게 계속될 수밖에 없다고 우리 모두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있다.(p.4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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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의 어휘 일력 365 (스프링) - 글에 품격을 높이고 말에 우아함을 더해주는
서선행.이은정 지음 / 윌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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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을 정신적으로 추구한다. 현실적으로는 멀다는 의미다. 늘 책장을, 책을 정리해야 한다고 아주 중요한 책들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는 의미다. 당연히 꼭 필요한가, 그만큼 중요한가, 공간을 내어주고 계속 함께 갈 만한가 재어보려 근래 들어 더욱 노력한다. 한편, 그와 별개로 갖고 싶다는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쓸모, 활용도, 적절한 수준, 난도를 떠나서 일단 곁에 두면 행복해질 것 같은 그 무엇. <어른의 어휘 일력 365>가 여기에 속하였다.

 

어른의 어휘 일력 365(윌마, 2024, 384면 분량)는 출판인이기도 한 서선행과 이은정 두 저자가 공저한 일일 어휘집이다. 어휘력과 말공부의 중요성을 전하는 책이 계속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표현을 하지만 온전히 닿지 못할 때 불통은 오해의 소지를 남긴다. 상투구 문장이나 지루하게 반복하는 무의식적 어휘 연결로는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기 어렵다. 뭉뚱그려진 낱말 뿐 아니라 유행어나 신조어 사용은 오히려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어휘력이 좋아진다면 삶의 질도 개선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어른의 어휘 일력 365는 포켓 사이즈보다는 크지만 한 손에 들어오는 정도다. 스프링 제본으로 책상 위에 세워두고 한 장씩 넘기며 오늘의 어휘를 만날 수 있다. 지식인들의 말과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작품들에서 검증된 어휘를 제공하는데, 사전적 정의와 예문, 같이 알면 좋은 말을 함께 실어 활용 범위를 넓혔다. 관심 있는 어휘를 따라서 새로운 말도, 익숙한 말도 천천히 그러나 적확하게 축적할 수 있을듯하다. ‘직조하다’, ‘침잠과 같이 좋아하는 단어도 보인다. ‘혜안통찰을 곁들여 알려 준다.

 

일력은 매 주 마지막 날에 단어 대신 명문장을 담았다. 고전이나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들도 있고 속담도 있다. 펼친 면에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는 칼 포퍼의 말이 영문과 나란히 실려있다.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지만 해결하기 위하여 함께 뛰고 결국 해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긍정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 오늘의 마음 날씨를 재는 자가 된다. 별만 쫓아도 안 되겠지만 평생 소원이 누룽지여서도 안 된다. 알록달록한 색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너무 간략하다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꾸준하게 익히며 자기만의 어휘 저수지를 주도적으로 확장해 가는 것 또한 의미 있을 것이다. 어휘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갈 실마리. 오늘부터 1일이다. 날짜를 찾아 책상 위에 단정히 세운다.



 (서평단-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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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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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감정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최대한 조절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과업이기도 하다. 감정을 읽고 지지하는 자기 돌봄은 필요하나 휘둘리는 일은 지양한다. 충동은 대부분 후회를 부르고 자기점검을 강화한다. 또 그랬니, 왜 그랬니, 그러지 말자, 할 수 있어로 이어지는 순환은 자전하듯 멈추지 않으나, 그럼에도 과잉 감정은 조금씩 순화되고 점점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환경과 교육의 중재가 모두에게 허락된 조건은 아니지만, 충족될 경우 원초적 감정은 다른 길을 낼 것이다. 감정의 순기능에 의지하여 나와 타인을 돕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아름답고 필요한 매듭을 늘려가는 일은 중요하다. 여기 감정을 극단으로 내달리도록 풀어버린 이들이 있다. 어떤 고삐는 최대한 손에 쥐고 당길 때와 놓을 때를 조절해야 하지만 그들은 고삐 자체를 제거했고 끝없이 달리다가 추락하는 순간 공멸한다.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와 루앙이 그렇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박이문 옮김, 문학동네, 2009, 1867, 360면 분량)』은 경계를 넘은 사고와 행동에 자신을 맡기는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전형을 소개한다. 과격하고 한편 무례해 보일만큼 생생한 작품은 당시 문단에서 환영보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졸라는 직접 작품을 변호한다. 바보들아, 라고 쓰지는 않았으나 톤은 자못 격렬하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나의 판단자들에게” 작품을 소개한다며 “모든 것이 오해될지도 모를 미래를 피하기 위하여.”라고 말한다. 졸라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 원하고,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p.10)을 선택했음을 밝힌다. 소설은 실험 무대가 되고 등장 인물들은 부여받은 역할, 캐릭터 안에 세팅된 인자의 보이지 않는 융합에 의해 작동한다. 인물간 관계에서도 기전은 동일하게 움직인다.


에밀 졸라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출판사와 기자 생활을 거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자연주의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 문학이론을 발전시킨 사조이며 둘 다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한다. 『테레즈 라캥(1867)』은 졸라가 제시한 구체적인 첫 번째 예가 된다. 이후 1871년부터 1893년까지 약 이십여 년간 두 집안의 후손을 중심으로 제2 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20권짜리 소설이자 졸라 문학의 핵심인 <루공마카르> 총서를 출간한다. 졸라는 문학의 기본적 기능이 오락이나 개인 감정의 정서적 표현에 있지 않고 인간에 관한 객관적 진리 발견에 있다는 신념(p.357)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술 평론을 쓰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고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오랜 벗이었던 세잔과의 우정과 결별도 회자되고 있다.


소설은 작품의 주요 배경인 퐁네프 파사주를 렌즈로 촬영하듯 묘사하며 시작한다. 베르농의 오래된 잡화상이었던 라캥 부인은 병약해서 더 애지중지해온 아들 카미유와 부모를 잃은 조카 테레즈와 살고 있다. 라캥 부인의 의지대로 함께 자라온 사촌간인 카미유와 테레즈는 결혼한 후 카미유의 요청대로 거처를 파리로 옮긴다. 퐁네프 파사주에 상점을 소개받은 라캥 부인은 이곳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데 테레즈는 상점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을 “마치 땅 밑에 있는 기름투성이 시궁창 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39고 표현한다. 애초에 무섭고 더럽고 적막했던 공간은 놀라운 사건을 축적하며 인간에 의해 얼마나 더 무섭고 잔인한 광기의 무대가 될 수 있는지 속도감 있게 그려보인다.


라캥 부인의 집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열리는 모임은 비극적인 상황 중에도 중단되는 일이라곤 없다. 부인의 오랜 친구인 미쇼와 경찰서 주임 경관인 그녀의 아들 올리비에 부부, 오를레앙 철도국의 서기 그리베가 멤버인데 각자의 이기심은 모임을 해체시키지 않는 주요 동기다. 도미노 게임을 하는 그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의 연쇄 반응에는 눈감고 있다. 자신들의 쾌락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 모임에 새로 들어온 인물이 로랑이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로랑을 이십 년 만에 만나서 초대하였고 카미유와 거의 극단에 있는 인물의 등장은 가면을 쓰고 현재를 견디고 있는 테레즈에게 운명으로 다가온다.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의 욕망과 기질을 알아보고 이중생활을 이어가나 만남이 차단당하자 다른 돌파구를 찾는다. 카미유를 제거함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는다.


소설은 카미유 살해 이후 테레즈와 로랑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너무도 원하는 바람에 살인까지 하게 만든 이 자유로운 사랑의 생활을 아주 쉽사리 시작할 수도 있었으리라.”(p.152)하고 예축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테레즈는 ‘피와 신경’(p.155)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으나 소설을 읽으며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편입될 가능성은 그저 활자와 행간으로 멀리 있다. 로랑도 열정이 식어가나 들인 수고를 생각하여 ‘피와 공포’로 맺어진 둘의 관계를 상기한다. 둘은 서로에게 속해 있고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결혼을 공모한다. 진정한 징계는 부부가 된 날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테레즈와 로랑의 공포를 손에 잡힐 듯이 그린다. 연거푸 일어나는 몽상이 잠과 꿈을 침범하고 이러한 몽상은 로랑의 목에 남은 상처로, 그가 그린 초상화들로 다시 옥죈다. 작가는 “상이한 두 기질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이한 연합을 설명”(p.11)하려는 시도로 집필했다고 밝혔듯이 작품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낸다. “두 사람은 피와 육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중략) 이때부터 그들은 기쁨과 고통에 소용되는 단 하나의 육체와 단 하나의 영혼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통성, 즉 상호 침투는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으로서 심한 신경증적 충격이 서로 맹렬하게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것이다.”(p.176) 작가는 두 인물이 서로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밀어붙이는데 이미 다른 결말은 가능하지 않을듯하다.


소설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통해 감정의 다양한 결을 보여준다. 이기심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목요 모임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작은 이득에만 몰두했듯이, 라캥 부인은 카미유의 안전을 위해 테레즈의 희생을 요구했고,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을 공포의 방패로 삼았다. 독립된 에피소드로 읽을수도 있는 시체공시장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전시되고 있는 놀라운 공간을 보여준다. 빈부와 무관하게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열려있다. 노동자들부터 익살꾼들, 연금생활자들, 여자들, 여자들 중에서 어떠어떠한 부류를 작가는 “갖가지 사람들”로 열거하고 반응을 기록한다.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진면목을 조명함으로 고발하고 있다. 간결한 문체로 내밀한 심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은 제동장치 없이 더욱 가속한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마크 트웨인은 평했다. 비판의 중심에 놓였던 『테레즈 라캥(1867)』이 출간되고 4년 후부터 졸라의 기념비적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가 나오기 시작한다. 자연주의 문학의 발명이자 완성이 백 년도 전에 이루어진다. 졸라는 문학사에 선명한 인장을 남긴다. 욕망으로 타오른 채 멈추지 못했던 인물들의 비참한 아우성은 영화로 그림으로 다양한 예술로 재현되고 있다. 과장되고 자극적인 서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펼쳐질 때 독자는 인간 극장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졸라 문학의 진입서로 적절한 『테레즈 라캥』을 추천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 속에서>

-시체공시장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거나 누구든, 행인들이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은 열려 있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왔다. 죽은 사람을 진열해놓은 이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먼길을 우회하는 괴상한 성벽의 사람들도 있었다. 포석이 비어 있을 때면 그들은 실망하고 중얼거리면서 급히 밖으로 나왔다. 포석이 꽉 차서 인간의 살덩이를 제대로 진열하고 있으면, 구경꾼들은 급히 달려와 값싼 감동을 느꼈다. 마치 극장에서 하듯이 농담하고 갈채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고는 오늘 시체공시장은 괜찮았다고 말하면서 만족하며 물러갔다.(p.138)

 

그녀는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로랑과 비교해보니, 로랑이 대단히 살찌고 둔하게 생각되었다. 독서는 그녀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낭만적인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피와 신경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학생은 사라졌다. 하숙집을 옮긴 모양이었다. 테레즈는 금세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회원제 대출 도서관에 가입하고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에게 열중했다. 이 갑작스러운 독서열은 그녀의 기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게 되어 공연히 웃고 울곤 하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생기려 했던 균형이 깨진 것이다. 그년는 일종의 막연한 몽상에 빠졌다.(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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