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른의 어휘 일력 365 (스프링) - 글에 품격을 높이고 말에 우아함을 더해주는
서선행.이은정 지음 / 윌마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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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니멀리즘을 정신적으로 추구한다. 현실적으로는 멀다는 의미다. 늘 책장을, 책을 정리해야 한다고 아주 중요한 책들만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현실적으로는 요원하다는 의미다. 당연히 꼭 필요한가, 그만큼 중요한가, 공간을 내어주고 계속 함께 갈 만한가 재어보려 근래 들어 더욱 노력한다. 한편, 그와 별개로 갖고 싶다는 소장 욕구를 자극하는 경우도 있다. 쓸모, 활용도, 적절한 수준, 난도를 떠나서 일단 곁에 두면 행복해질 것 같은 그 무엇. <어른의 어휘 일력 365>가 여기에 속하였다.

 

어른의 어휘 일력 365(윌마, 2024, 384면 분량)는 출판인이기도 한 서선행과 이은정 두 저자가 공저한 일일 어휘집이다. 어휘력과 말공부의 중요성을 전하는 책이 계속 주목받는 이유는 여러 가지다. 그중에서 표현을 하지만 온전히 닿지 못할 때 불통은 오해의 소지를 남긴다. 상투구 문장이나 지루하게 반복하는 무의식적 어휘 연결로는 생각을 명확히 드러내기 어렵다. 뭉뚱그려진 낱말 뿐 아니라 유행어나 신조어 사용은 오히려 답답함을 가중시킨다. 어휘력이 좋아진다면 삶의 질도 개선될 것이다. 선택이 아니라 필수에 해당하는 항목이다.

 

어른의 어휘 일력 365는 포켓 사이즈보다는 크지만 한 손에 들어오는 정도다. 스프링 제본으로 책상 위에 세워두고 한 장씩 넘기며 오늘의 어휘를 만날 수 있다. 지식인들의 말과 오랜 기간 사랑받아온 작품들에서 검증된 어휘를 제공하는데, 사전적 정의와 예문, 같이 알면 좋은 말을 함께 실어 활용 범위를 넓혔다. 관심 있는 어휘를 따라서 새로운 말도, 익숙한 말도 천천히 그러나 적확하게 축적할 수 있을듯하다. ‘직조하다’, ‘침잠과 같이 좋아하는 단어도 보인다. ‘혜안통찰을 곁들여 알려 준다.

 

일력은 매 주 마지막 날에 단어 대신 명문장을 담았다. 고전이나 문학 작품에서 발췌한 문장들도 있고 속담도 있다. 펼친 면에 삶은 문제해결의 연속이다.”라는 칼 포퍼의 말이 영문과 나란히 실려있다. 문제는 계속해서 발생하지만 해결하기 위하여 함께 뛰고 결국 해내겠구나 하는 생각이 스친다. 긍정적으로도 비관적으로도 해석할 수 있는 문장이 오늘의 마음 날씨를 재는 자가 된다. 별만 좇아도 안 되겠지만 평생 소원이 누룽지여서도 안 된다. 알록달록한 색이 보는 즐거움을 더한다. 너무 간략하다는 아쉬움이 남을 수도 있겠지만 꾸준하게 익히며 자기만의 어휘 저수지를 주도적으로 확장해 가는 것 또한 의미 있을 것이다. 어휘 빈곤의 늪에서 빠져나갈 실마리. 오늘부터 1일이다. 날짜를 찾아 책상 위에 단정히 세운다.



 (서평단-출판사 도서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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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레즈 라캥
에밀 졸라 지음, 박이문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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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감정의 동물이라고 하는데 감정의 양면성을 인지하고 최대한 조절하려는 시도는 일종의 과업이기도 하다. 감정을 읽고 지지하는 자기 돌봄은 필요하나 휘둘리는 일은 지양한다. 충동은 대부분 후회를 부르고 자기점검을 강화한다. 또 그랬니, 왜 그랬니, 그러지 말자, 할 수 있어로 이어지는 순환은 자전하듯 멈추지 않으나, 그럼에도 과잉 감정은 조금씩 순화되고 점점 더 나아지리라는 기대를 남긴다. 환경과 교육의 중재가 모두에게 허락된 조건은 아니지만, 충족될 경우 원초적 감정은 다른 길을 낼 것이다. 감정의 순기능에 의지하여 나와 타인을 돕거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아름답고 필요한 매듭을 늘려가는 일은 중요하다. 여기 감정을 극단으로 내달리도록 풀어버린 이들이 있다. 어떤 고삐는 최대한 손에 쥐고 당길 때와 놓을 때를 조절해야 하지만 그들은 고삐 자체를 제거했고 끝없이 달리다가 추락하는 순간 공멸한다. 『테레즈 라캥』의 테레즈와 루앙이 그렇다.


에밀 졸라의 『테레즈 라캥(박이문 옮김, 문학동네, 2009, 1867, 360면 분량)』은 경계를 넘은 사고와 행동에 자신을 맡기는 새로운 인물, 새로운 전형을 소개한다. 과격하고 한편 무례해 보일만큼 생생한 작품은 당시 문단에서 환영보다는 공격의 대상이 되어 졸라는 직접 작품을 변호한다. 바보들아, 라고 쓰지는 않았으나 톤은 자못 격렬하다. 그는 자신이 나서서 “나의 판단자들에게” 작품을 소개한다며 “모든 것이 오해될지도 모를 미래를 피하기 위하여.”라고 말한다. 졸라는 사람의 성격이 아니라 기질을 연구하기 원하고, 자유의지를 박탈당하고 “신경과 피에 극단적으로 지배받는 인물들”(p.10)을 선택했음을 밝힌다. 소설은 실험 무대가 되고 등장 인물들은 부여받은 역할, 캐릭터 안에 세팅된 인자의 보이지 않는 융합에 의해 작동한다. 인물간 관계에서도 기전은 동일하게 움직인다.


에밀 졸라는 프랑스 자연주의 문학의 대표 작가로 출판사와 기자 생활을 거쳐 소설을 쓰기 시작하였다. 자연주의는 플로베르의 사실주의 문학이론을 발전시킨 사조이며 둘 다 객관성과 과학성을 강조한다. 『테레즈 라캥(1867)』은 졸라가 제시한 구체적인 첫 번째 예가 된다. 이후 1871년부터 1893년까지 약 이십여 년간 두 집안의 후손을 중심으로 제2 제정기의 프랑스 사회를 묘사한 20권짜리 소설이자 졸라 문학의 핵심인 <루공마카르> 총서를 출간한다. 졸라는 문학의 기본적 기능이 오락이나 개인 감정의 정서적 표현에 있지 않고 인간에 관한 객관적 진리 발견에 있다는 신념(p.357)을 작품을 통해 드러내고 여전히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미술 평론을 쓰며 인상파 화가들을 후원하고 관계를 맺었으며, 특히 오랜 벗이었던 세잔과의 우정과 결별도 회자되고 있다.


소설은 작품의 주요 배경인 퐁네프 파사주를 렌즈로 촬영하듯 묘사하며 시작한다. 베르농의 오래된 잡화상이었던 라캥 부인은 병약해서 더 애지중지해온 아들 카미유와 부모를 잃은 조카 테레즈와 살고 있다. 라캥 부인의 의지대로 함께 자라온 사촌간인 카미유와 테레즈는 결혼한 후 카미유의 요청대로 거처를 파리로 옮긴다. 퐁네프 파사주에 상점을 소개받은 라캥 부인은 이곳을 새로운 정착지로 삼는데 테레즈는 상점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을 “마치 땅 밑에 있는 기름투성이 시궁창 속으로 내려가는 것 같았다.”39고 표현한다. 애초에 무섭고 더럽고 적막했던 공간은 놀라운 사건을 축적하며 인간에 의해 얼마나 더 무섭고 잔인한 광기의 무대가 될 수 있는지 속도감 있게 그려보인다.


라캥 부인의 집에서 매주 목요일 저녁 열리는 모임은 비극적인 상황 중에도 중단되는 일이라곤 없다. 부인의 오랜 친구인 미쇼와 경찰서 주임 경관인 그녀의 아들 올리비에 부부, 오를레앙 철도국의 서기 그리베가 멤버인데 각자의 이기심은 모임을 해체시키지 않는 주요 동기다. 도미노 게임을 하는 그들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는 진실의 연쇄 반응에는 눈감고 있다. 자신들의 쾌락과 무관하기 때문이다. 어느날 이 모임에 새로 들어온 인물이 로랑이다. 카미유는 어린 시절 친구였던 로랑을 이십 년 만에 만나서 초대하였고 카미유와 거의 극단에 있는 인물의 등장은 가면을 쓰고 현재를 견디고 있는 테레즈에게 운명으로 다가온다. 테레즈와 로랑은 서로의 욕망과 기질을 알아보고 이중생활을 이어가나 만남이 차단당하자 다른 돌파구를 찾는다. 카미유를 제거함으로 그 자리를 차지하겠다는 생각이 들자 그들은 지체하지 않는다.


소설은 카미유 살해 이후 테레즈와 로랑의 변화에 초점을 맞춘다. “그들은 너무도 원하는 바람에 살인까지 하게 만든 이 자유로운 사랑의 생활을 아주 쉽사리 시작할 수도 있었으리라.”(p.152)하고 예축하였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테레즈는 ‘피와 신경’(p.155)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으나 소설을 읽으며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다. 그러나 다른 세계에 편입될 가능성은 그저 활자와 행간으로 멀리 있다. 로랑도 열정이 식어가나 들인 수고를 생각하여 ‘피와 공포’로 맺어진 둘의 관계를 상기한다. 둘은 서로에게 속해 있고 이를 완성하기 위하여 결혼을 공모한다. 진정한 징계는 부부가 된 날부터 시작된다.


작가는 테레즈와 로랑의 공포를 손에 잡힐 듯이 그린다. 연거푸 일어나는 몽상이 잠과 꿈을 침범하고 이러한 몽상은 로랑의 목에 남은 상처로, 그가 그린 초상화들로 다시 옥죈다. 작가는 “상이한 두 기질 사이에서 발생할 수 있는 기이한 연합을 설명”(p.11)하려는 시도로 집필했다고 밝혔듯이 작품 안에서 직접 목소리를 낸다. “두 사람은 피와 육욕으로 이루어진 관계였다.(중략) 이때부터 그들은 기쁨과 고통에 소용되는 단 하나의 육체와 단 하나의 영혼만을 가지게 되었다. 이러한 공통성, 즉 상호 침투는 심리적이고 생리적인 현상으로서 심한 신경증적 충격이 서로 맹렬하게 충돌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것이다.”(p.176) 작가는 두 인물이 서로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는데 까지 밀어붙이는데 이미 다른 결말은 가능하지 않을듯하다.


소설은 자기 욕망에 충실한 인물들을 통해 감정의 다양한 결을 보여준다. 이기심은 진실을 보지 못하도록 눈을 가린다. 목요 모임의 구성원들이 자신의 작은 이득에만 몰두했듯이, 라캥 부인은 카미유의 안전을 위해 테레즈의 희생을 요구했고, 테레즈와 로랑은 라캥 부인을 공포의 방패로 삼았다. 독립된 에피소드로 읽을수도 있는 시체공시장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작가는 타인의 고통이 전시되고 있는 놀라운 공간을 보여준다. 빈부와 무관하게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은 언제나 열려있다. 노동자들부터 익살꾼들, 연금생활자들, 여자들, 여자들 중에서 어떠어떠한 부류를 작가는 “갖가지 사람들”로 열거하고 반응을 기록한다. 예리한 관찰자의 눈으로 인간의 어두운 진면목을 조명함으로 고발하고 있다. 간결한 문체로 내밀한 심리를 집중적으로 조명하는 소설은 제동장치 없이 더욱 가속한다.


“나는 졸라를 향한 존경과 가없는 찬사에 사무쳐 있다. 군인과 성직자 같은 겁쟁이 위선자 아첨꾼들은 한 해에도 백만 명씩 태어난다. 그러나 잔 다르크나 졸라 같은 인물이 태어나는 데는 5세기가 걸린다.”고 마크 트웨인은 평했다. 비판의 중심에 놓였던 『테레즈 라캥(1867)』이 출간되고 4년 후부터 졸라의 기념비적 대작 <루공마카르> 총서가 나오기 시작한다. 자연주의 문학의 발명이자 완성이 백 년도 전에 이루어진다. 졸라는 문학사에 선명한 인장을 남긴다. 욕망으로 타오른 채 멈추지 못했던 인물들의 비참한 아우성은 영화로 그림으로 다양한 예술로 재현되고 있다. 과장되고 자극적인 서사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펼쳐질 때 독자는 인간 극장의 한 가운데에 서게 된다. 졸라 문학의 진입서로 적절한 『테레즈 라캥』을 추천한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 <박쥐>를 비교해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책 속에서>

-시체공시장은 가난한 사람이거나 부자거나 누구든, 행인들이 무상으로 구경할 수 있는 곳이었다. 문은 열려 있어 원하는 사람이면 누구나 들어왔다. 죽은 사람을 진열해놓은 이 광경을 놓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먼길을 우회하는 괴상한 성벽의 사람들도 있었다. 포석이 비어 있을 때면 그들은 실망하고 중얼거리면서 급히 밖으로 나왔다. 포석이 꽉 차서 인간의 살덩이를 제대로 진열하고 있으면, 구경꾼들은 급히 달려와 값싼 감동을 느꼈다. 마치 극장에서 하듯이 농담하고 갈채를 보내고 휘파람을 불고는 오늘 시체공시장은 괜찮았다고 말하면서 만족하며 물러갔다.(p.138)

 

그녀는 소설을 읽었다. 그리고 그 젊은이를 로랑과 비교해보니, 로랑이 대단히 살찌고 둔하게 생각되었다. 독서는 그녀에게 여태까지 몰랐던 낭만적인 지평을 열어주었다. 그녀는 피와 신경으로만 사랑을 느껴왔었다. 그런데 이제 머리로 사랑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그 학생은 사라졌다. 하숙집을 옮긴 모양이었다. 테레즈는 금세 그를 잊어버리고 말았다. 그녀는 회원제 대출 도서관에 가입하고 소설의 모든 주인공들에게 열중했다. 이 갑작스러운 독서열은 그녀의 기질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녀는 예민한 감수성을 갖게 되어 공연히 웃고 울곤 하였다. 그녀의 마음속에 생기려 했던 균형이 깨진 것이다. 그년는 일종의 막연한 몽상에 빠졌다.(p.155~1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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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 하나는 거짓말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24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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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중등 독서 교실에서 학생들과 만나는 첫 시간, 진진진가 게임으로 자기소개를 하곤 했다. 네 개의 문장에서 하나의 거짓을 찾아내기 위하여 아이들은 귀를 기울이고 나름대로 가늠해 본다. 불쑥 호기심을 드러내는 경우도, 지루함을 내색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세 개의 옳은 문장과 하나의 틀린 문장은 거울처럼 가장 먼저 자신을 비춘다. 나를 반추하는 짧은 시간 후 가볍고 재미있게, 어색함을 녹이며 넘어가는 활동이었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에서 다섯 개의 문장은 부유하다 사라지지 않는다. 각각의 문장이 지금까지의 시간을 요약하고 나의 상징물을 만들어낸다. 명확하고 단순하게 정렬한 문장에 소설은 노크한다. 명백한 진실 안에 어떤 거짓이 침묵할 수 있는지, 거짓 안에 어떤 갈망이 웅크리게 되는지, 애초에 규칙을 위반하고 약속을 흩트리는 일은 없는지 살핀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문학동네, 2024, 240면 분량)은 김애란의 두 번째 장편 소설로 첫 장편 <두근두근 내 인생> 이후 13년 만에 출간되었다. 23년 전 데뷔하는 순간부터 주목받으며 젊은 거장이라 불려온 작가는 네 권의 소설집과 한 권의 장편 소설과 산문집에 더해 또 하나의 선물을 독자에게 전한다. “빛과 거짓말 그리고 그림에 관한 이야기라고 언급했던 소설은 생각보다 가뿐한 분량으로, 그러나 기대 이상 묵직한 화두로 독자 손에 들린다. 후기에서 작가는 <바깥은 여름>에서와 마찬가지로 인물들의 남은 삶을 응원하는데 그 응원은 인물을 넘어 독자에게 뻗어온다. 삶은 가차 없을지언정 우리 모두 마지막에 좋은 이야기를 남기고, 의미 있는 이야기 속에 머물다 떠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주인공인 지우, 소리, 채운이 차례로 등장한다. 지우의 첫 장면은 선호 아저씨를 기다리는 파출소다. 소리는 전입생 채운이 자기 소개하던 교실에서, 채운은 현재 머무는 사촌 동생의 방에서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무난하고 무탈한 삶을 살아낼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은 잠시고 나쁜 일은 계속 일어난다는 지우는 그림 그리기라는 할 일을 자신에게 준다. 엄마 지연이 해주던 이야기를 재생하면서. 지우는 도마뱀 용식이가 자라는 과정을 그려서 카페에 올린다. 제법 반응이 좋자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시작한다.

 

우연히 이를 보게 된 채운은 신경이 쓰인다. 채운은 사건이 일어난 그날 이후 이모 집에서 지내고 있다. 부상으로 축구를 그만 둔 채운은 영어 공부 앱에 따라 문장을 만들면서 자신의 마음을 기록한다. 자기 대신 교도소에 있는 엄마와 깨어날까 두려운 아버지, 불확실한 내일을 생각할 때 마음을 의지할 대상은 반려견 뭉치 뿐이다. 독립하겠다는 마음을 먹은 지우는 도마뱀 용식을 소리에게 맡긴다. 소리도 입시 미술을 준비하며 그림을 그렸는데 지금은 그 손이 다른 걸 감지하는 특별한 손이 되었다. 특별함이 빠져나갈 때까지 소리는 만나고 떠나보내고, 다시 진실의 모양을 가진 오해를 바로잡는 순간을 맞는다.

 

소설은 고등학교 2학년인 세 아이와 그 가족을 중심으로 방학 기간 중에 일어난 일을 담고 있다. 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전개되는 소설은 지우, 채운, 소리가 번갈아 등장하고, 현재와 과거를 왕래하며 사건과 감정을 서술한다. 막이 빠르게 바뀌는 연극을 보는 듯도 하다. 소설에 등장하는 어떤 어른은 아이들에게 길잡이나 바람막이 역할보다는 길에 서서 위협할 뿐 아니라 길을 막고, 벼랑 끝에 세우는 역할을 한다. 또 다른 어른 역시 아이 곁에서 함께 고통받을 뿐 방어막이 되어주지 못한다. 결국 채운의 엄마 태선은 가족과 꼭 잘 지내지 않아도 된다’(p.180)며 지금 이대로가 서로를 구해준 거라고 현실을 선택한다.

 

아이들이 처한 현실은 감당하기 수월하지 않아서 또 다른 이야기를 필요로 한다. 소설은 이야기 안에 두 번째 이야기를 품은 겹 구조로 만화(지우)나 영어 문장(채운), 회상과 고백(소리)으로 삽입된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은 이야기란 무엇이고 어떤 쓸모를 가지는지 거듭 변주하며 주제를 견인한다. 이야기의 원형은 처음에 지연이 어린 지우에게 읽어주던 옛이야기에서 빛이 새어나왔습니다”(p.11)라는 구절의 빛과도 같은 숭고함이나 완전함을 간직한다. 소설은 이 빛을 빼앗겼다가 서서히 회복하는 여정이기도 하다.

 

엄마(지연)를 잃은 지우는 이야기를 지으며 그리움을 달랜다. 만화를 그리는 지우에게 이야기는 끝이 있어서가 중요한 이유고 소리는 늘 시작되기 때문’(p.66)이라고 다른 미덕을 꼽는다. 끝이 없는 이야기의 암담함과 시작조차 안 되는 이야기의 허무 중에서 두 아이는 마음을 잡지 못한다. 그래도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라고, 그 안에 갇힌 듯한 채운을 향해 소리는 손을 내민다. 둘 만의 비밀을 간직하고서.

 

겹구조는 다시 한 번 층을 만든다. 죽음의 진실이 밝혀지고, 만화의 마지막 화가 올라오면서 작은 빛이 드리운다. 스스로를 속이고 회피했던 내 안의 진실을 인정하는 일도 필요했다. 감춰두었던 마음을 아프게 고백할 때 그에 대한 답신처럼 빛은 하늘에서조차 신호를 보낸다. “그 빛은 마치 옛 화가들이 누군가의 눈동자에 빛을 새겨넣을 때 붓 끝에 묻힌 아주 적은 양의 흰 물감 같았다. 소량이지만 누군가의 영혼을 표현하는 데 꼭 필요한.”(p.196) 그렇게 조금씩 조명 받으며 아이들은 걸어 나가고 자라 나가게 될 것 같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읽기 위한 최소한의 예로 서둘러 <달려라, 아비><바깥은 여름>을 읽었다. 여름이 끝나면서 읽던 소설이 가을 초입 새로운 작품으로 멋진 매듭을 지은듯하다. 청소년 성장 소설 같은 인상이 강하지만 부모 세대의 해결하지 못한 상처도 진지하게 다루고 있어 공감의 폭은 확대된다. 책을 덮으며 회전무대 팝업 북을 떠올린다. 좋아하는 팝업 북에 회전무대까지 장착되어 기쁨을 배가시켜서 아끼지만, 삶은 신비로운 오르골 소리를 배경음 삼지 않는다. 무대가 돌아갈 때 빈정거리고 비웃는 말들, 속이고 타협하는 말들, 학교나 가정이라는 공간을 조금씩 무너뜨리는 일상의 공격이 어느 순간 재현될까 조마조마했다.

 

간결하게 농축하는 작가의 문장은 소설 속 시간과 공간으로 단번에 끌어들인다. 그들의 마음이 전이되어 함께 아슬아슬하고 같이 괴롭다. 그래도 결말 이후에 계속될 이야기는 독자 마음에 말줄임표로 찍히는데 점들은 어두움 보다는 빛으로 기운다. 살아있는 만큼 남아있는 과제를 직면해갈 때 맞잡은 손에 힘이 들어갈 것만 같다. 규칙에 따라, 규칙에 반하여 발설된 문장들이 이야기가 되었고, 마치 게임처럼 다른 문장, 다른 마음에 닿기 위해 바통을 들고 달렸다. “게다가 어떤 이야기는 한 번에 몰아들으면 안 될 것 같았다.”(p.228)는 말처럼 숨 고르게 하는 작품, 때로 벅차서 한 번에 몰아읽기 어려운 이 소설을 추천한다.

 



책 속에서>


-그냥······이야기가 좋아서?

순간 소리의 두 눈이 반짝였다.

-그래? 넌 이야기가 왜 좋은데?

지우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끝이······있어서?

소리가 신기한 듯 목소리를 높였다.

-난 반댄데.

-뭐가?

-난 시작이 있어 좋거든. 이야기는 늘 시작되잖아.

지우가 잠시 먼 데를 봤다.

-이야기에 끝이 없으면 너무 암담하지 않아? 그게 끔찍한 이야기면 더.

소리도 시선을 잠시 허공에 뒀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시작조차 안 되면 허무하지 않아?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잖아.

-그런가?

-.(p.66~67)

 

이야기가 가장 무서워질 때는 언제인가?’

소리가 슬픈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이야기가 끝나지 않을 때.’

그런데 채운은 지금 무서운 이야기 속에 갇혀 있는 모양이라고, 거기서 잘 빠져나오도록 도와줘야겠다고 생각했다. 소리는 곧 채운과 만날 예정이었고, 그건 하나의 비밀이 다른 비밀을 돕는다는 뜻이었다.(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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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 문학동네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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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덮으며 추스르다라는 낱말을 찾아본다. 몸을 가누어 움직이거나, 물건을 추어올려 잘 다루거나, 산만한 정신이나 마음 따위를 바로잡아 안정시키는 걸 말한다. 한 가지 더, 일을 수습하여 처리하는 것도 뜻한다. 바깥은 여름의 인물들은 추스르는 일이 만만하지 않은 상태에 직면한다. 몸이나 물건 따위, 마음이나 일도 왜 추슬러야 하나, 꼭 그래야 하나 아득하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어떻게 가능할지 방법을 알지 못한다. 밖은 여름이어도 그들이 서있는 공간은 계절의 영향에서 벗어나고 자연법칙을 어긴 채 얼음 어는 성이 된다. 녹지 않는 얼음성이다.

 

김애란의 단편소설집 바깥은 여름(문학동네, 2017, 272면 분량)은 온기나 발광채, 유일한 해를 잃어버린 서늘함을 체감케 한다. 바깥은 자신의 외부이기에 그곳에 속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등장한다. 외면하거나 상상하거나 잊기를 결심할 수 있으나 훼손 이전으로 회복하지 못한 채 타자로 남고 만다. 겪어낸 시간은 저만치 뚝 떨어진 과거에 있으면서 동시에 영원 같은 현재가 된다. “오래전 소설을 마쳤는데도 가끔은 이들이 여전히 갈 곳 모르는 얼굴로 어딘가를 돌아보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작가의 말처럼 그들이 그렇게 있는듯하다.

 

<입동>에서 아이를 잃은 부부는 세상이 우리만 빼고 자전하는 듯’(p.21)이 보인다. 애써 마련한 우리집에서 안도와 감사의 시간은 찰나고 고통의 시간은 무한에 이른다. 내부에서 고통은 모든 것인 사랑의 상실로, 외부에서는 판단하고 돌을 던지는 차가운 손에 의해 이중으로 옥죄어 온다. <노찬성과 에반>에서 열 살 찬성은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동생같이 아끼던 유기견 에반이 아프면서 모든 게 그대로인데 다른 세상에 온 기분을, 떠나보낼 결심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말인 용서를 혼자 감당한다. <건너편>의 도화는 연인 이수와 얼추 개수명과 비슷한 십 년을 함께했지만 역시 떠나보낼 결심을 내린다. 그녀에게는 신뢰하는 말이 있어서, 왜곡 없는 문장을 구성할 수 있어서 다행이랄 수 있을까.

 

<침묵이 미래>는 역대 최연소 수상으로 화제를 모은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이고 말()이며 침묵의 무게는 정체성 난해한 정체인 로 의인화하여 마지막 화자를 설명한다. 사라져가는 언어를 보존하는 소수언어박물관이 마지막 화자들의 거처다. ‘쩌렁쩌렁한 모어 한복판에’(p.127) 버려진 그들은 눈물날 것 같이 친근한 모국어를 그리워하지만 마지막 화자이기에 소통은 불가능하다. 그저 소통할 대상이 없기에 있어도 소용없는 말들의 소용돌이에 갇힌 형국이다. 나의 순례는 끝이 없고 막막하다. 첫 번째 이름 오해에서 필요에 의해 이해로 변화하나 점점 거대해져 죽음을 맞는 허무 또는 장관은 생명의 순환과 견주게 된다.

 

<풍경의 쓸모>에 나오는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p.182)라는 문장에서 책의 제목을 만난다. 다른 궤도에 존재하는 시공간은 다른 풍경을 보여준다. 엇갈려 있기에 스치거나 만날 수 없겠고 풍경은 과거에 촬영된 화면으로 미래 어느 시점에야 확인된다. 정우는 프로부모의 역할에 충실했던 어머니를 보았다. ‘프로강사에 가까워지던 자신, 그러나 프로성인이 된 후에도 거짓 서명에는 프로일 수가 없다. ‘프로되기의 자명함과 어려움을 인생이 내게 왜 이러나 싶으면서도 받아들여야 할 때, 시간에 무기력하게 등 떠밀리며 눈감는다.

 

개수대 앞 창문을 열어 바깥을 본다.”(p.187)는 문장으로 <가리는 손>은 시작된다. 내가 가장 잘 알고 있는 아이, 분신과도 같은 아이이기에 내 안의 역사를 통해 바라보는 일은 어렵지 않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소식, 전해오는 이미지는 어긋나 있고 동의할 수 없지만 어떤 괴리, 어쩌면 배반은 갑작스럽게 포착되고 도무지 해석되지 않는다.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에서 남편을 잃은 아내는 그의 부재에 마냥 아프다. 특히 상대에게 닿지 못하는 일상의 말은 입가에서 주저하고, 잔소리와 농담, 둘만의 언어가 갈피잡지 못한 채 공간에 부유할 때 그렇다. 새로운 소통의 시도는 고통이라는 감각을 예민하게 할 뿐이었는데 그의 선택을 복기하게 한 편지는 처음으로 다른 생각을 시작하도록 만든다.

 

<이중 하나는 거짓말>을 펴기 전 두 번째 과제로 <바깥은 여름>을 마쳤다. 일곱 개 단편을 읽으며 무엇이 가장 좋았다고 헤아릴 수 없다. 일곱 개의 세계가 밀도 높게 펼쳐지고 그 안에 초대되었다가 나오는 일은 심해를 잠수하고 떠오르는 듯 다른 압력, 다른 세기에 적응하도록 한다. 활자를 통해 바닷물에 섞이지 않는 눈물을 구별하고 눈빛을 읽는 일이 반복된다. 출간된 지 칠 년이 지난 작품 속 인물들에게 인사 건네고 싶다. 노찬성은 열 아홉이 되었겠네, 잘 지내고 있나요 안부를 묻는다.

 

간결하면서도 아름답고, 아름다우면서도 찌르는 문장이 뒤따르고 뒤따르니 넋 놓고 읽을 뿐이다. 작가는 매끄럽게 질주하면서도 필요한 만큼의 감정을 정확하게 곁들인다. 덧대거나 치장하는 법이 없다. 과도하거나 미흡하거나 어색한 순간을 만나지 못한다. 독자는 감정의 파고를 차분하게 견디는 인물에게 이입하고 안타까워하고 태도를 배우며 결국 안녕을 기도하게 된다. 이름들을 기원의 목록처럼 지니게 만든다. 데뷔작인 <달려라, 아비>의 재기발랄한 유쾌함, 불굴의 희망바람, 위트와 다정함은 <바깥은 여름>에서 더 깊이 있고 진지하게 직시하는 법을 보여준다.

 

화자는 어느 땐 그게 타인을 가장 쉬운 방식으로 이해하는, 한 개인의 역사와 무게, 맥락과 분투를 생략하는 너무 예쁜 합리성처럼 보여서.” 라고 가뿐하게 요약하고 판정할 때”(p.200) 드는 반발심을 설명한다. 말의 홍수 시대를 사는 현재에 보내는 경고와도 같다. 역지사지라고는 없고 품이 드는 이해보다 오해를 방치하는 경우도 흔한 나날들. 소설 전체를 관통하는 말의 여러 가지 면모는 페이지를 넘겨보며 연결 짓게 하거나 한동안 숙고하게 만든다. 여름 끝에 읽은 <바깥은 여름>이 늦었지만 다행이다. 어쩔 수 없이 걸리고 만 여름 감기가 뒤꿈치를 들어 올린 만큼 마음의 키를 키워줄 작품을 추천한다. 이제 <이중 하나는 거짓말> 차례다.

 



 책 속에서>


손바닥에 고인 땀을 보니 문득 에반을 처음 만난 날이 떠올랐다. 손바닥 위 반짝이던 얼음과 부드럽고 차가운 듯 뜨뜻미지근하며 간질거리던 무엇인가가. 그렇지만 이제 다시는 만질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옥죄었다. 하지만 당장 그것의 이름을 무어라 불러야 할지 몰라 찬성은 어둠 속 갓길을 마냥 걸었다. 대형 화물 트럭 몇 대가 시끄러운 경적을 울리며 찬성 옆을 사납게 지나갔다. 머릿속에 난데없이 용서라는 말이 떠올랐지만 입밖에 내지 않았다. 찬성이 선 데가 길이 아닌 살얼음판이라도 되는 양 어디선가 쩍쩍 금 가는 소리가 들려왔다.(p,81, 노찬성과 에반)

 

어느 부족의 시제에는 전생과 환생이 들어간다. 그런 건 누가 정하고, 어떻게 설득하는지 다른 부족은 조금도 가늠 못한다. 어느 나라 동사는 백오십 번 이상 몸을 바꾼다. 그것은 프리즘에 닿은 빛처럼 여러 갈래로 꺽이며 굴절된다. 단어가 소리에 반사돼 정신에 무지개를 비춘다. 어느 민족에게 사랑은 접속사, 그 이웃에게는 조사다. 하지만 또다른 부족의 경우 그런 건 본디 이름을 붙이는 게 아니라 하여 아무런 명찰도 달아주지 않는다. 어떤 민족에게 보고 싶다는 한 음절로 족하다. 하지만 다른 부족에게 그 말은 열 문장 이상으로 표현된다. 뿐만 아니다. 어느 추운 지방에서는 몇몇 입김 모양도 단어 노릇을 한다.(p.138, 침묵의 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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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한가운데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8
루이제 린저 지음, 박찬일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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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 읽었던 책의 제목은 <생의 한가운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 다시 만나는 <삶의 한가운데>는 어제 읽은 듯이 생생하고 외우다시피 하는 문장 또한 상당하다. 니나 부슈만의 투신하는 삶은 지독할 정도였고 그래서 더 빛이 났으며 근접하기 어려운 차원이라고 여겼다. 전혜린 번역이기도 했고, 비슷한 시기에 전혜린의 수필집을 읽어서인지 작가인 루이제 린저와 작가를 대변하는 주인공 니나 부슈만, 그리고 전혜린까지 연결되면서 범접 불가한 열정과 순수, 뛰어난 실력이 하나의 이미지로 섞여 들었다.

 

삶의 한가운데(박찬일 옮김, 민음사, 1999, 1950, 382면 분량)는 독일 작가 루이제 린저의 자전적 소설로 니나 부슈만이라는 아이콘이자 전형을 완성한다. 니나에게서 분출하는 삶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은 더 많이 알고, 적극적으로 개입하고 용기 있게 선택하고 책임지는 일련의 과정을 견인할 뿐 아니라 잦아들지 않는 동력을 제공한다. 루이제 린저는 전후 독일의 가장 뛰어난 산문작가로, 토마스 만으로부터는 시대악과의 싸움에서 뛰어난 용기를 보인 작가라고 평가받았다. 나치의 억압으로 교사 해직 통보를 받고, 나치 투쟁으로 투옥되기도 하였다는 기록에 더해, 히틀러에 저항해 목숨을 걸었던 저항 문학가로 행세하며, 독일의 잔 다르크가 되길 원했(주간조선, 박광작, 2017)으나 본모습은 친 나치주의자라는 무리요의 평가가 추가되며 놀라움을 안긴다.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는 니나가 영국으로 떠나기 전 며칠간을 함께 보낸다. “여자 형제들은 서로에 대해 모든 것을 알고 있든지 혹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든지 둘 중 하나다.”(p.7)라는 첫 문장에서 후자에 가까웠던 마르그레트가 동생을 알아가는 과정을 소설은 담고 있다. 동시에 언니 마르그레트도 니나에 비추어 자기 자신을 서서히 발견한다. 오랜 시간 니나를 사랑하던 슈타인이 죽은 후 니나의 집으로 배달된 그의 일기와 편지, 메모와 공백까지 함께 읽어나갈 때, 슈타인 역시 니나를 거울삼았고, 그뿐 아니라 사랑의 유일한 대상, 삶의 이유이자 이상으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그녀가 문턱을 넘어왔을 때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다. 내 안에서 어떤 변화가 일어났다고 해야 하리라. 나는 다른 사람이 되었다.”(p.43) 1929915일자 일기는 슈타인의 미래를 예견한다. 그리고 그들이 만난 지 18년째 되는 날, 삶이라는 여정을 맺겠다고 결정하는 순간에 그는 자신의 죄가 결단을 회피했다는 것이었음을 고백한다. 하지만 비겁해서라기보다는 유약해서였다고, 끝없이 주의하도록 경고하는 목소리와 모든 경우의 장단점을 고려하라는 명령이 결단을 막았다고 스스로 변호한다. 그의 내면에는 멈추는 법 없는 북소리, 경고음이 울리고 있었던 셈이다.

 

니나는 그와 정반대였다. 니나는 수선화와 빨간 장미를 좋아하는 건 물론, 많은 것을, 아니 모든 것을 좋아하는데 심지어 몹시 저주스러운 이 삶”(p.15)까지 좋아한다. 풍만함이나 포만함은 참을 수 없는 대신 공포와 불안에 흔들릴지언정 미지의 가능성은 애착을 느끼는 대상이다. 당면한 일을 회피하지 않고 의무를 다하는 일, 약속을 지키는 일은 그녀에게 중요하다. 일신상의 편안함은 고려 조건이 아니었기에 당면한 일을 수행한다.

 

니나는 흘려버리고 말 일상도 순간마다 붙들고 그 안의 감정과 의미를 들여다본다. 삶에 산재해 있는 여러 관념을 명명하고 각각 분리하기 원한다. 사랑은 무엇인지 행복은 무엇인지 재정의한다. 사랑과 정열의 차이, 행복에 대해 새롭게 바라보고, 결혼의 의미와 결혼 생활 안에서 일어나는 의무나 당위, 제반 사항을 탐색하며 관계 맺는 일에 대하여 질문한다. 멋진 순간이 우리 삶에 존재한다는 것을 책에서 읽었던 니나는 그런 삶을 살아냄으로 직접 확인하기 원한다. 처음에 그녀에게 삶이란 아는 것, 무섭게 많이 아는 것, 생각하는 것, 모든 것을 파고드는 것”(p.55)을 의미했다. 그녀에게 삶이란 점차 약속을 지키는 것, 주어진 역할을 감당하는 일로 확대되었고, 자기 목소리를 내고 위험을 무릅쓰는 일, 전쟁에서 비롯한 거대한 부조리에 저항하는 일, 무엇보다 제대로 된 글을 쓰고, 멈추지 않고 행동하는 일이 된다.

 

소설은 인물의 감정을 섬세하게 그려 보인다. 니나를 잃은 슈타인의 슬픔은 만져질 듯이 표현된다. 그리고 이 절망이 바닥을 치고 오르는 순간 또한 기록한다. “나는 나 자신을 위로하지 않았다.”(p.304)고 자신과 대면 후에 고통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작을 기대한다. 정화되는 심정과 각성 끝에 감사에 이른다. “나는 니나를 방해하고 싶지 않다. 그러나 나는 그녀가 살고 있는 쪽을 본다. 그리고 그녀에게 감사한다.”(p.305) 이 감정은 곧 곤두박질하지만 그는 운명이라 여기고 운명을 종결짓는다. 보편과 극단을 아우르며 마음의 움직임과 파생되는 인간의 감정을 다시 한번 바라볼 수 있게 하는 작품이다.

 

인상적인 부분을 다 꼽을 수 없지만 소설가인 니나가 가지고 있는 글에 대한 태도는 빼놓을 수 없다. “누구든 그가 쓴 것과 똑같아. 이걸 분리시킬 수는 없어.”(p.130)라고 단언한다. 살기로 결심한 즉시 실행에 옮기는데 바로 책상에 앉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니나에게 산다는 것은 곧 소설을 쓰는 것이다. 책 속의 책인 니나의 소설에서는 그녀에게 문학이란 무엇인지, 작가는 어때야 하는지 밝힌다. 소재가 자기 자신을 알아볼 수 없게 될 때까지 맷돌에 갈고 또 가는(p.164) 이유, 곧 값싼 효과를 허용함으로 빨리 타락하는 일을 방지한다는 원칙도 진실에 더 가깝게 다가가기 위한 조건이다.

 

소설은 일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니나와 슈타인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삶을 보여준다. 용감한 인생 탐구자인 니나와 함께 삶의 의미, 추구할 가치, 도달해야 할 목표지점을 향한 여정에 돌입하게 된다. 슈타인과 니나의 글은 시간순으로 정렬되어 있지 않고 지그재그를 그리듯 엇갈리며 배치되어 있어 수월하게 읽히지 않는다. 다행히 간결한 문체와 속도감 있는 전개는 이를 상쇄하는 요소다. 대화와 서술이 섞여있고 공간적 배경도 글에 따라 현재와 과거를 왕래한다. 화자인 언니가 대강 펼친 뒷부분을 먼저 읽기도 하기에, 결말에 다가가다 앞으로 다시 거슬러 읽는 일도 생긴다.

 

그와 같은 수고는 글로써 남겨진 자의 흔적을 쫓을 때 일정 부분 정성으로도 간주된다. 어쩌면 사랑을 이루지 못한 슈타인 박사만이 아니라 폭력의 무참한 시기에 희생양으로 사라진 이들을 애도하는 방식일수도 있겠다. 재확인한 작가의 행보가 지금까지처럼 몰랐던 게 나았겠다는 아쉬움도 생긴다. 다시 읽은 작품이 다시 잃은 작품이 되었나 생각할 때, 작품은 작품으로 남겨두고 싶다. 온통 의지와 정신으로 형성된 듯한 니나는 새롭게 질문을 시작한다. 니나 부슈만은 여전히 삶의 한가운데에서 자신에게도 타인에게도 엄정한 기준을 제시하며 곧바로 실천할 태세다.

 

 

 책 속에서>


-그러니까 니나가 밤새 쓴 것은 편지가 아니라 지켜야 할 약속이었다. 피로와 절망, 이별에도 불구하고 지켜야 할 약속.(p.149)

 

-대부분의 사람에게는 운명이 없어. 그런데 그것은 그들 탓이야. 그들은 운명을 원하지 않거든. 단 한 번의 큰 충격보다는 수백 번의 작은 충격을 받으려고 해. 그러나 커다란 충격이 우리를 전진하게 하는 거야. 작은 충격은 우리를 점차 진창 속으로 몰아넣지만, 그건 아프지 않지. 일탈이란 편한 점도 있으니까. 혹은 마치 파산 직전에 있는 상인이 그것을 숨기고 여기저기서 돈을 융통한 후 일생 동안 그 이자를 갚아가며 늘 불안하게 사는 것과도 같지. 나는 파산을 선언하고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쪽을 택하고 싶어.(p.144)

 

-그러나 이렇게 하는 것이 더 진실에 가까워. 우리는 영웅이 아니야. 가끔 그럴 뿐이야. 우리 모두는 약간은 비겁하고 계산적이고 이기적이지. 위대함과는 거리가 멀어. 내가 그리고 싶은 게 바로 이거야. 우리는 착하면서 동시에 악하고, 영웅적이면서 비겁하고, 인색하면서 관대하다는 것, 이 모든 것은 밀접하게 서로 붙어 있다는 것, 그리고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한 사람으로 하여금 어떤 행위를 하도록 한 것이 무엇이었는지를 아는 일은 불가능하다는 걸 말이야. 모든 것이 복잡하게 얽혀 있는데도 그것을 간단하게 만들려는 게 나는 싫어.(p.166)

 

나는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변신을 보고 전율한다. 나는 이 시대를 감당하지 못하는 것이다. 니나는 내가 현재를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마 그녀도 내가 시대와 현실에서 도피하고 있다고 비난할지 모른다. 내가 그런가? 정말일까? 도대체 누가 도피하고 있다는 말인가? 쫓겨난 자들과 함께 미지의 해안으로 달려가는 자들인가, 아니면 한때 소중했던 것들을, 아마도 영원히 바래지 않을 것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자들인가.(p.3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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