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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ㅣ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평점 :
10주 동안 진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함께 읽기를 마쳤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지략이 뛰어난 주인공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전쟁 이후 그리스의 영웅 오뒷세우스의 귀환 여정은 모험 자체였고, 영웅은 지구가 아니라 결국 가족을 지켜냈다. 어쩌면 가장 지켜야 할 가치 우선순위는 가정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고 <일리아스> 읽기에 돌입했다. 완독을 위한 전략은 유효했다.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면 ‘그답구나 역시’ 라며 반가운 마음도 일었다. 24권 1만 5693행에 이르는 서사시 <일리아스>는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오다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로 문자적으로는 ‘일리온의 노래’를 의미한다. 일리온, 일리오스, 트로이, 트로이아 모두 동일한 호칭으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전쟁터였다. 그리스 지역은 헬라스, 희랍으로도 명명하며 작품의 배경이다. 트로이 전쟁 마지막 10년째의 약 50일 간의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파트로크롤스의 죽음과 아킬레우스의 참전, 헥토르의 활약과 죽음,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화해 등 굵직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신들과 인간, 영웅들과 이름 없는 병사들의 서사까지 촘촘하게 배치함으로 죽음과 삶, 수치와 명예, 필멸과 불멸 등을 성찰하게 한다.
1권부터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의 딸을 돌려주지 않고 모욕하자 사제는 아폴론에게 기도로 호소하고 아카이오이족은 전쟁과 역병에 고통당한다. 열흘째 되는 날 이를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소집하고 크뤼세이스(사제의 딸)를 돌려주라고 하자 아가멤논은 그 대신 아킬레우스가 받은 명예의 선물인 브리세이스를 데려가겠다고 응수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모욕하고 이미 공평한 분배를 마친 자기 몫을 빼앗은 아가멤논에게 분노하여 어머니 테티스에게 제우스를 찾아가 줄 것을 요청한다. 바다의 정령인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고전적인 탄원의 자세로 아카이오이족이 아들에게 전보다 더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려달라는 간청을 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아가멤논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회의장과 전장에서 벗어나 자기 처소에서 머문다. 그의 참전은 20권에서야 이루어진다.
인간들의 왕, 반신, 정령, 신들의 제왕이 전면에 등장하여 포문을 여는 1권의 첫 문장은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이다. 이준석 판본은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1:1)하고 더욱 직관적으로 주제어를 배치한다. 첫 번째 분노가 성립된 데 이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둘도 없는 벗,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 앞에 극에 달하고, 이로써 반신인 영웅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트로이아의 헥토르에게 자신의 무구를 빼앗겼기 때문에 아키렐우스는 새 무구를 기다린다. 테티스가 부탁하여 헤파이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가지고 나타날 때까지 그는 목청만으로도 트로이아인들의 사기를 꺾는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온다.
전체 50일의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의 전투는 총 4일만 묘사된다. 강대진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함께 읽기>에 따르면 첫 세 권과 마지막 세 권이 되돌이 구성으로 포개지는데, 시인은 지상과 천상(올림포스)을 연결하고(아킬레우스-테티스-제우스), 사건과 인물 또한 극적으로 대체되어(크뤼세스-크뤼세이스, 프리아모스-헥토르) 균형을 이룬다. 그 사이에 전세는 승기를 잡다가 기울기를 반복한다. 인간계의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 성격을 띠기에 영웅이지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순간들, 내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순간들을 겪으며 신들의 개입에 기뻐하거나 절망하고 끝내 인간 조건을 수용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지혜와 어리석음, 절제와 오만은 경계 없이 가까워 전진과 후퇴 사이에 연달아 출현한다. 전조와 복선의 반복은 촘촘한 빌드업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서사시의 주제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게 될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아킬레우스는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놓여있다는 어머니 테티스의 말을 회상한다. 결국 불멸의 명성을 선택하고 죽음을 수용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암시를 하되 명시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불멸의 영웅 이미지를 유지한다. <오뒷세이아>의 “저승” 편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있는데 그가 사자(死者)들을 다스리느니 지상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다는 말이 처연하다. 독후 토론을 위한 논제는 자연스럽게 인물 위주로 작성하게 되었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당연히 중심이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헬레네다. 그리스군에게 트로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헬레네는 단순히 미의 상징, 아름다움의 절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여신 아프로디테의 명령에 ‘그대나 신들의 곁을 떠나 그의 곁에 가 앉으’(p.118)라고 하거나, 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온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마땅히 내 전남편인 메넬라오스에게 싸움터에서 죽었어야지 돌아왔느냐고 한다. 헥토르의 장례식에서는 안드로마케, 헤카베에 이어 세 번째로 호곡을 선창하며 슬픔을 표현한다. 트로이 멸망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정해둔 독서 표식으로 꿈틀대는 지렁이 기호가 있다. 이 표는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하다’라는 의미다. 기호는 곳곳에 그려졌다. 지렁이 표는 겹쳐서 꿈틀대기도 하는데 죽어가는 전사들의 적나라한 묘사, 도처에 나타나는 시신 훼손 장면, 목숨을 애원하나 가차 없이 거절당하는 전쟁터는 영상이 지나가듯 생생하다. 그런 중에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서정시처럼 완성될 것 같은 장면이 6권이다. 헥토르가 아내 안드로마케와 어린 아들 아스튀아낙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헤어지는 부부의 대화가 절절하나 트로이아의 파수꾼 헥토르는 멈출 수 없음을 안다. 온전한 가정을 무참히 깨뜨리기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뒤 7권 아이아스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는 헥토르는 14권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순간을 맞으며 죽음의 은유를 받는다. 수많은 죽음을 담은 <일리아스>의 마지막 죽음은 헥토르의 것으로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구를 입은 헥토르와 헤파이스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장착한 아킬레우스, 즉 아킬레우스 대 아킬레우스의 대결은 서사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이미 인간 대 인간의 대결이 아니다. 헥토르의 서약 제안에 그는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말라며 “마치 사자와 사람 사이에 맹약이 있을 수 없”(22:262)다고 할 때 그는 이미 분노와 복수에 사로잡힌 맹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헥토르의 죽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신의 근심, 신의 저울, 신의 속임수’가 필요했다고 강대진의 책은 해석한다. 더 강한 전사에게 맞서지 말라고 아들을 만류하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절규는 수천 년을 통과해 현재의 독자에게도 먹먹하게 닿는다. 절정을 지나 서사시의 백미는 노왕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화해 장면이다. 혼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고 연민을 불러일으킬 때, 함께 눈물 흘리며 정화될 때 아킬레우스는 관용을 베푼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 804)로 맺는다.
라신의 비극 『안드로마케』는 헥토르가 아내에게 했던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절판된 도서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느낌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사람을 20세기 초의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라고 전한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의 노력이란, 오오 가련한 우리,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다시 일어서리라고 기대하면서,
힘과 용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늘 무엇인가가 와서 우리를 가로막는다.
아킬레우스가 외호(外濠)로부터 우리 앞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와
그 우렁찬 고함으로 우리에게 겁을 준다.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결연함과 담대함으로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고,
밖에 남아 싸움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담대함도 결연함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혼은 동요되고 불안감에 마비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주에서 구원을 찾으며
성벽 주위를 빙빙 돌아 내달린다.
저기 성벽 위에서는 벌써 통곡이 시작되었다.
저들은 가버린 우리의 날들과 우리의 열정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
헤카베와 프리아모스가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울음을 우는 것이다.
(p.74~76/호메로스의 세계/피에르 비달나케/솔)
우리의 노력이 트로이인들의 노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럼에도’는 인간이 살아남는 한 이어지지 않을까. 부스러기를 헤아리고 모으는 노력, 기억하고 사랑하려는 의지, 지금이라는 불안한 처지를 마다않고 발판 삼겠다는 약속이 말이다. 오만을 경계하고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도록 깨어있겠다는 다짐은 지금도 반복될 테다.
주요 전장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뒤섞인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보편적인 심리를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신과 인간에게 고루 적용한다. 죽음과 고통을 부르는 치열한 전투에서도 그 너머를 투시한다. 인간이 피와 땀을 흘릴 때 신은 나타나거나 사라졌다. 조종 받는 입장임을 알아도 눈앞의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물은 가장 작은 병사일지라도 독자에게, 또는 관객에게 소외되지 않는다. 다시 오늘을 생각한다. 맹수 앞에 맞선 채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누군가도 있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꿈속에서처럼 나아갈 수 없는 절망에 갇힌 누군가도 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기꺼이 맞서기로 어느 순간 결단한다. 최후의 순간이 고통스러울지언정 명료한 의식으로 직시하겠다는 누군가도 있다.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며 백 번이고 간곡히 청하겠다는 부성도, 필멸의 아들이 아까워 시름하며 자기의 불멸이 기쁘지 않은 정령도, 이 모든 고통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소연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일리아스>는 인생이 겪는 무수한 불합리와 부조리를 늘어놓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의 연민을 놓치지 않는다. 기적의 순간에 연대함으로써 비록 잠시일지라도 허락받은 시간 안에 온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기억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작품은 끝났어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트로이 성은 불에 탈 것이고 헥토르의 남은 가족에게는 참혹한 시간이 기다린다.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조가 될 것이고, 귀향하는 오뒷세우스는 새로운 사명에 헌신할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뛰어남을 뽐내는 21세기에 『일리아스』를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읽다보면 정신이 혼란해서 지금 어느 편이 승기를 잡고 있지? 전투 몇 일째지? 밤인가 낮인가? 지금 맞은 게 급소인가? 재등장은 가능한가? 죽는 건가? 이런 반칙 같은 신들의 술수라니? 우왕좌왕하면서도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 순간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하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개별적으로 밀착해오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목소리로 읽는 낭독은 얼마나 더 깊은 여운을 남길지 기대된다. 필사를 하면 직유나 은유의 반복, 공식구 등 표현의 생동감이 더 느껴질 것이다. 책을 마치며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앞으로 너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중에 한 작품만 읽을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겠나? 나는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일리아스』라고.(다행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완독의 아쉬움을 위한 선물을 발견했다. 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다. 압축의 정수,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책, 몽땅 외우고 싶은 책의 첫 장은 <헥토르>다. 『일리아스』는 옛 노래, 지나간 노래일까. 일리온의 노래는 여전히 불리고 있다. 귀족이나 영웅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행간에 채워 명랑한 음조로, 때론 애달픈 가락으로 울려 퍼진다.


책 속에서>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