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곰과 작은 곰이 낚시하러 가요 베스트 세계 걸작 그림책 68
에이미 헤스트 지음, 에린 E. 스테드 그림, 강무홍 옮김 / 주니어RHK(주니어랜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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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큰 곰과 작은 곰이 낚시하러 가요(강무홍 옮김, 주니어RHK, 2025, 48쪽 분량)는 에이미 헤스트()와 에린 E. 스테드(그림)가 함께 펴낸 작품으로 고전 그림책의 정취를 물씬 풍긴다. 앞표지에 두 마리 곰이 서로 마주보며 서 있다. 오른쪽 어깨에 낚싯대를 얹은 자세로 노란 웃옷, 파란 바지, 검은 장화로 복장을 맞췄다. 덩치가 큰 곰은 아빠고 작은 곰은 아들인 거라고 짐작하며 책을 펼친다. 갈색, 그러니까 곰 색 면지에는 마주보는 동일한 실루엣이 하얗게 자국을 남겼다. 그들의 낚시는 어느 날갑자기 결정된다. “지금 낚시하러 가면 딱 좋겠는걸.”하는 큰곰의 말에 , 딱 좋을 것 같아.”라는 작은 곰의 대답이다. 보통은 이렇지 않다. 딱 좋기는, 미리미리 얘기를 해줬어야지. 선약이 있잖아, 할 일도 많아, 라는 답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그림책 속 무해한 곰들은 낚시용 복장을 척척 입는다. 벌써 준비 끝.

 

준비가 다 되었다고 생각했으나 빠뜨린 게 있었다. 가장 중요한 낚싯대부터 블루베리 스콘, 이야기책까지 챙겨 넣는다. 보통은 이렇지 않다. 특히 스콘. 목적이 낚시면 낚시에 집중해야지 따끈따끈 맛있는 블루베리 스콘을 위해 냉동칸에서 꺼내 녹이는 정도가 아니라 블루베리 따기부터 오븐에 굽기까지의 과정을 거친다는 건 동화적이다. 오늘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을 그르치거나, 상당히 지연시키는 행동이 될 수 있다. 그러나 둘은 이견이 없다. 이야기책까지 담고 나서 드르륵드르륵수레를 끌고 간다.

 

물고기를 잡기 위해서, 더 큰 물고기를 잡을 가능성을 위해서 이동시간을 아껴 쌩쌩 달릴 법도 하다. 하지만 어디에도 조급한 기색이 없다. “낚시꾼은 기다릴 줄 알지.”라고 속삭이고는 흐르는 시간을 스콘을 먹으며, 이야기책을 읽으며 물고기가 잡히기를 기다린다. 호수에 비치는 빛을 바라보고, 물결 일으키며 다가온 물고기를, 사라져가는 물고기를 다시 바라본다. 스스로를 낚시꾼이라고 여기는 큰 곰과 작은곰은 제대로 복장을 갖추고, 준비에 정성을 들였으며, 원칙을 지키는 전문가들이다. 기다리기, 조용히 말하기. 최선을 다했기에 집으로 돌아갈 시간이 아쉽지 않다. 오늘 낚시 끝.

 

성과는 없었지만 좋은 하루였다. 성과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을까. 기다리는 시간은 함께 선택한 일들로 채워졌고 기다림 자체는 빛이 일렁이듯 충만했다. 함께 보낸 하루가 큰곰과 작은 곰은 물론 동행했던 벌과 물고기에게까지 완벽해진다. 이 그림책은 시간을 보내는 가장 현명한 방법을 알려준다. ‘빨리빨리지금 이럴 때인가는 계속해서 우리 귓전에서 호루라기 소리를 낸다. 경고하는 알람은 언제부터인가 내면에 이식되어 조급증과 불안 지수를 높인다. 에이미 헤스트의 글은 반복과 리듬으로 일상의 속도를 늦춘다. 에린 E. 스테드의 그림은 물에 흠뻑 적신 붓으로 말간 색을 입힌다. 필선이 드러나고 여백은 넉넉하다. ‘루틴 철저는 때로 우리를 속인다. 그러나 의미로 채워지는 카이로스의 시간은 두고두고 기억될 것이다. 어떤 시간을 살고 싶은지 책은 질문한다. 아이에게, 또 어른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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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리아스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호메로스 지음, 천병희 옮김 / 도서출판 숲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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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 동안 진행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오뒷세이아> 함께 읽기를 마쳤다. <오뒷세이아>를 읽으며 지략이 뛰어난 주인공의 변화를 지켜보는 일은 흥미로웠다. 전쟁 이후 그리스의 영웅 오뒷세우스의 귀환 여정은 모험 자체였고, 영웅은 지구가 아니라 결국 가족을 지켜냈다. 어쩌면 가장 지켜야 할 가치 우선순위는 가정이 차지할 것이다. 우리는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고 <일리아스> 읽기에 돌입했다. 완독을 위한 전략은 유효했다. 오뒷세우스가 등장하는 장면이면 ‘그답구나 역시’ 라며 반가운 마음도 일었다. 24권 1만 5693행에 이르는 서사시 <일리아스>는 수백 년 동안 구전되어 오다 기원전 8세기에 호메로스에 의해 집대성되었다. 고대 그리스 문학의 가장 오래된 서사시이자 유럽 문학의 효시로 문자적으로는 ‘일리온의 노래’를 의미한다. 일리온, 일리오스, 트로이, 트로이아 모두 동일한 호칭으로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고 있는 전쟁터였다. 그리스 지역은 헬라스, 희랍으로도 명명하며 작품의 배경이다. 트로이 전쟁 마지막 10년째의 약 50일 간의 이야기는 아킬레우스의 분노, 파트로크롤스의 죽음과 아킬레우스의 참전, 헥토르의 활약과 죽음,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의 화해 등 굵직한 사건을 중심에 놓고, 신들과 인간, 영웅들과 이름 없는 병사들의 서사까지 촘촘하게 배치함으로 죽음과 삶, 수치와 명예, 필멸과 불멸 등을 성찰하게 한다.


1권부터 많은 이야기가 등장한다. 아가멤논이 아폴론의 사제 크뤼세스의 딸을 돌려주지 않고 모욕하자 사제는 아폴론에게 기도로 호소하고 아카이오이족은 전쟁과 역병에 고통당한다. 열흘째 되는 날 이를 보다 못한 아킬레우스가 회의를 소집하고 크뤼세이스(사제의 딸)를 돌려주라고 하자 아가멤논은 그 대신 아킬레우스가 받은 명예의 선물인 브리세이스를 데려가겠다고 응수한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을 모욕하고 이미 공평한 분배를 마친 자기 몫을 빼앗은 아가멤논에게 분노하여 어머니 테티스에게 제우스를 찾아가 줄 것을 요청한다. 바다의 정령인 테티스는 제우스에게 고전적인 탄원의 자세로 아카이오이족이 아들에게 전보다 더 큰 경의를 표할 때까지 트로이아인들에게 승리를 내려달라는 간청을 한다. 아킬레우스 역시 아가멤논이 후회하게 될 것이라며 회의장과 전장에서 벗어나 자기 처소에서 머문다. 그의 참전은 20권에서야 이루어진다.


인간들의 왕, 반신, 정령, 신들의 제왕이 전면에 등장하여 포문을 여는 1권의 첫 문장은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이다. 이준석 판본은 “노여움을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노여움을!”(1:1)하고 더욱 직관적으로 주제어를 배치한다. 첫 번째 분노가 성립된 데 이어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둘도 없는 벗,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이라는 돌이킬 수 없는 사태 앞에 극에 달하고, 이로써 반신인 영웅은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다. 파트로클로스를 죽음에 이르게 한 트로이아의 헥토르에게 자신의 무구를 빼앗겼기 때문에 아키렐우스는 새 무구를 기다린다. 테티스가 부탁하여 헤파이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가지고 나타날 때까지 그는 목청만으로도 트로이아인들의 사기를 꺾는다.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피할 수 없는 숙명처럼 다가온다.


전체 50일의 이야기 가운데 그리스군과 트로이아군의 전투는 총 4일만 묘사된다. 강대진의 <호메로스의 일리아스 함께 읽기>에 따르면 첫 세 권과 마지막 세 권이 되돌이 구성으로 포개지는데, 시인은 지상과 천상(올림포스)을 연결하고(아킬레우스-테티스-제우스), 사건과 인물 또한 극적으로 대체되어(크뤼세스-크뤼세이스, 프리아모스-헥토르) 균형을 이룬다. 그 사이에 전세는 승기를 잡다가 기울기를 반복한다. 인간계의 전쟁은 신들의 대리전 성격을 띠기에 영웅이지만 내 몸이 내 몸 같지 않은 순간들, 내 마음이 내 맘 같지 않은 순간들을 겪으며 신들의 개입에 기뻐하거나 절망하고 끝내 인간 조건을 수용하고 운명을 받아들인다. 지혜와 어리석음, 절제와 오만은 경계 없이 가까워 전진과 후퇴 사이에 연달아 출현한다. 전조와 복선의 반복은 촘촘한 빌드업을 완성하고 이를 통해 서사시의 주제를 감동적으로 전달하게 될 결말을 향해 치닫는다.


아킬레우스는 두 가지 상반된 죽음의 운명이 놓여있다는 어머니 테티스의 말을 회상한다. 결국 불멸의 명성을 선택하고 죽음을 수용하지만 <일리아스>에서는 암시를 하되 명시적으로 포착하지 않고 불멸의 영웅 이미지를 유지한다. <오뒷세이아>의 “저승” 편에서 그를 다시 볼 수 있는데 그가 사자(死者)들을 다스리느니 지상에서 품이라도 팔고 싶다는 말이 처연하다. 독후 토론을 위한 논제는 자연스럽게 인물 위주로 작성하게 되었다. 헥토르와 아킬레우스는 당연히 중심이다. 그리고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인물이 헬레네다. 그리스군에게 트로이 전쟁의 명분을 제공한 헬레네는 단순히 미의 상징, 아름다움의 절정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복합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여신 아프로디테의 명령에 ‘그대나 신들의 곁을 떠나 그의 곁에 가 앉으’(p.118)라고 하거나, 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위기를 모면하고 온 알렉산드로스에게는 마땅히 내 전남편인 메넬라오스에게 싸움터에서 죽었어야지 돌아왔느냐고 한다. 헥토르의 장례식에서는 안드로마케, 헤카베에 이어 세 번째로 호곡을 선창하며 슬픔을 표현한다. 트로이 멸망 이후에도 그녀의 삶은 계속된다.


개인적으로 정해둔 독서 표식으로 꿈틀대는 지렁이 기호가 있다. 이 표는 ‘어마어마하게 무시무시하다’라는 의미다. 기호는 곳곳에 그려졌다. 지렁이 표는 겹쳐서 꿈틀대기도 하는데 죽어가는 전사들의 적나라한 묘사, 도처에 나타나는 시신 훼손 장면, 목숨을 애원하나 가차 없이 거절당하는 전쟁터는 영상이 지나가듯 생생하다. 그런 중에 따로 떼어내도 한 편의 서정시처럼 완성될 것 같은 장면이 6권이다. 헥토르가 아내 안드로마케와 어린 아들 아스튀아낙스를 만나는 장면에서 헤어지는 부부의 대화가 절절하나 트로이아의 파수꾼 헥토르는 멈출 수 없음을 안다. 온전한 가정을 무참히 깨뜨리기는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바로 뒤 7권 아이아스와의 일대일 결투에서 위험에 처하게 되는 헥토르는 14권에서 두 번째로 위험한 순간을 맞으며 죽음의 은유를 받는다. 수많은 죽음을 담은 <일리아스>의 마지막 죽음은 헥토르의 것으로 죽은 파트로클로스의 무구를 입은 헥토르와 헤파이스토스가 새로 제작한 무구를 장착한 아킬레우스, 즉 아킬레우스 대 아킬레우스의 대결은 서사시의 절정을 보여준다.


그러나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은 이미 인간 대 인간의 대결이 아니다. 헥토르의 서약 제안에 그는 합의에 관해 말하지 말라며 “마치 사자와 사람 사이에 맹약이 있을 수 없”(22:262)다고 할 때 그는 이미 분노와 복수에 사로잡힌 맹수일 뿐이다. 그럼에도 헥토르의 죽음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고 ‘신의 근심, 신의 저울, 신의 속임수’가 필요했다고 강대진의 책은 해석한다. 더 강한 전사에게 맞서지 말라고 아들을 만류하는 프리아모스와 헤카베의 절규는 수천 년을 통과해 현재의 독자에게도 먹먹하게 닿는다. 절정을 지나 서사시의 백미는 노왕 프리아모스와 아킬레우스의 화해 장면이다. 혼자 적진 한가운데로 들어가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고 연민을 불러일으킬 때, 함께 눈물 흘리며 정화될 때 아킬레우스는 관용을 베푼다.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1:1)로 시작한 <일리아스>는 “이렇게 그들은 말을 길들이는 헥토르의 장례를 치렀다.”(24: 804)로 맺는다.


라신의 비극 『안드로마케』는 헥토르가 아내에게 했던 말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절판된 도서 피에르 비달나케의 『호메로스의 세계』는 피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느낌을 누구보다 잘 표현한 사람을 20세기 초의 그리스 시인 콘스탄틴 카바피스라고 전한다. 그의 시는 다음과 같이 노래한다.


우리의 노력이란, 오오 가련한 우리,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성공을 목전에 두고,

조금만 더 애를 쓰면 다시 일어서리라고 기대하면서,

힘과 용기를 되찾기 시작한다.

그러나 늘 무엇인가가 와서 우리를 가로막는다.

아킬레우스가 외호(外濠)로부터 우리 앞으로 느닷없이 튀어나와

그 우렁찬 고함으로 우리에게 겁을 준다.

우리의 노력이란 트로이인들의 노력과 같은 것.

우리는 결연함과 담대함으로

운명의 흐름을 바꿀 수 있으리라 믿고,

밖에 남아 싸움을 계속한다.

그러나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담대함도 결연함도 가뭇없이 사라진다.

우리의 영혼은 동요되고 불안감에 마비된다.

그리하여 우리는 도주에서 구원을 찾으며

성벽 주위를 빙빙 돌아 내달린다.

저기 성벽 위에서는 벌써 통곡이 시작되었다.

저들은 가버린 우리의 날들과 우리의 열정을 슬퍼하며 우는 것이다.

헤카베와 프리아모스가 우리의 죽음을 슬퍼하며 피울음을 우는 것이다.

(p.74~76/호메로스의 세계/피에르 비달나케/솔)


우리의 노력이 트로이인들의 노력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그럼에도’는 인간이 살아남는 한 이어지지 않을까. 부스러기를 헤아리고 모으는 노력, 기억하고 사랑하려는 의지, 지금이라는 불안한 처지를 마다않고 발판 삼겠다는 약속이 말이다. 오만을 경계하고 그 아슬아슬한 선을 넘지 않도록 깨어있겠다는 다짐은 지금도 반복될 테다.


주요 전장이 천상인지 지상인지 뒤섞인다. 관계에서 벌어지는 갈등이나 보편적인 심리를 시인은 놓치지 않고 신과 인간에게 고루 적용한다. 죽음과 고통을 부르는 치열한 전투에서도 그 너머를 투시한다. 인간이 피와 땀을 흘릴 때 신은 나타나거나 사라졌다. 조종 받는 입장임을 알아도 눈앞의 전투에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인물은 가장 작은 병사일지라도 독자에게, 또는 관객에게 소외되지 않는다. 다시 오늘을 생각한다. 맹수 앞에 맞선 채 지는 게임을 하고 있는 누군가도 있다. 도망치고 도망쳐도 꿈속에서처럼 나아갈 수 없는 절망에 갇힌 누군가도 있다. 그러나 뒤돌아서서 기꺼이 맞서기로 어느 순간 결단한다. 최후의 순간이 고통스러울지언정 명료한 의식으로 직시하겠다는 누군가도 있다. 원수의 손에 입을 맞추며 백 번이고 간곡히 청하겠다는 부성도, 필멸의 아들이 아까워 시름하며 자기의 불멸이 기쁘지 않은 정령도, 이 모든 고통을 왜 감당해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소연하는 많은 이들이 있다. <일리아스>는 인생이 겪는 무수한 불합리와 부조리를 늘어놓지만 그 안에서 이루어지는 찰나의 연민을 놓치지 않는다. 기적의 순간에 연대함으로써 비록 잠시일지라도 허락받은 시간 안에 온 마음으로 예를 갖추고 기억하는 이들을 기록한다. 작품은 끝났어도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트로이 성은 불에 탈 것이고 헥토르의 남은 가족에게는 참혹한 시간이 기다린다. 탈출하는 아이네이아스는 또 다른 이야기의 시조가 될 것이고, 귀향하는 오뒷세우스는 새로운 사명에 헌신할 것이다.


AI가 글을 쓰고 뛰어남을 뽐내는 21세기에 『일리아스』를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읽다보면 정신이 혼란해서 지금 어느 편이 승기를 잡고 있지? 전투 몇 일째지? 밤인가 낮인가? 지금 맞은 게 급소인가? 재등장은 가능한가? 죽는 건가? 이런 반칙 같은 신들의 술수라니? 우왕좌왕하면서도 읽는 일은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느 순간 독자는 눈을 떼지 못하는 몰입을 경험하게 된다.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개별적으로 밀착해오는 이야기에 빠져든다. 목소리로 읽는 낭독은 얼마나 더 깊은 여운을 남길지 기대된다. 필사를 하면 직유나 은유의 반복, 공식구 등 표현의 생동감이 더 느껴질 것이다. 책을 마치며 터무니없는 상상을 했다. 앞으로 너는 『일리아스』나 『오뒷세이아』 중에 한 작품만 읽을 수 있다. 무엇을 선택하겠나? 나는 곧바로 답할 수 있다. 『일리아스』라고.(다행히 아무도 물어보지 않았다.) 완독의 아쉬움을 위한 선물을 발견했다. 라헬 베스팔로프의 『일리아스에 대하여』이다. 압축의 정수, 버릴 글자 하나 없는 책, 몽땅 외우고 싶은 책의 첫 장은 <헥토르>다. 『일리아스』는 옛 노래, 지나간 노래일까. 일리온의 노래는 여전히 불리고 있다. 귀족이나 영웅이 아닌 자기만의 이야기를 행간에 채워 명랑한 음조로, 때론 애달픈 가락으로 울려 퍼진다.



책 속에서>


노래하소서, 여신이여!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아카이오이족에게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안겨주었으며

숱한 영웅들의 굳센 혼백을 하데스에게 보내고

그들 자신은 개들과 온갖 새들의 먹이가 되게 한 그 잔혹한 분노를!

인간들의 왕인 아트레우스의 아들과

고귀한 아킬레우스가 처음에 서로 다투고 갈라선 그날부터

이렇듯 제우스의 뜻은 이루어졌도다.(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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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 프롬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7
이디스 워튼 지음, 김욱동 옮김 / 민음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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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디스 워튼의 단편집 중 빗장 지른 문(1909)삶에 사슬로 매여 있듯이 주인공 그래니스의 시도가 거듭 좌절되는 아이러니를 속도감 있게 담는다. 이때 이라는 단어가 본래 의미를 충족하고 있는가는 회의적이다. 2년 후 출간된 중편 소설 이선 프롬(김욱동 옮김, 민음사, 2020, 1911, 212쪽 분량)은 충분히 사랑하고 살아볼 수 없었던 사람, 환상과 몽상 속에서만 가능했던 삶조차 곧바로 빼앗겼던 인물을 그린다. 미국 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의미로 최초의 여성 작가라 불리는 이디스 워튼은 마흔 권이 넘는 책을 출간한 다작 작가이면서 <순수의 시대>로 여성으로는 처음 퓰리처상을 받았다. 윌리엄 포크너는 <이선 프롬>서로 갈등하는 인간의 마음문제(p.176)라고 평했고 워튼은 이 작품을 쓰면서 가장 큰 즐거움과 가장 큰 편안함을 느꼈다(p.174)고 전했다. 작가 자신을 투영한 인물 이선 프롬이 겪는 관계에서의 갈등과 그로 인한 고통은 그만큼 온전히 독자에게 닿는다.

 

이선 프롬은 여러 겹의 굴레에 갇혀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마을 스탁필드를 떠나지 못하고, 이웃인 하먼 가우의 표현에 의하면 이곳에서 너무 많은 겨울을 났다. 생명력을 곧바로 무기력으로 대체하는, 추위와 강풍이 여섯 달 동안 지속되는 혹독한 기후를 거듭 견뎌왔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병은 프롬의 농장 노동과 벌이로 감당하기 어려웠고 그들은 결국은 죽음을 맞는다. 간병을 도왔던 사촌 누나 제노비아 피어스(지나)는 프롬 스스로 무슨 말을 하는지도 깨닫지 못한 채한 부탁으로 떠나지 않고 아내가 되었는데, 일곱 살 연상의 그녀 역시 복잡한 질병을 앓기 시작한다. 아내의 친척 매티가 부모를 잃고 지나를 돕기 위해 온다. 일은 능숙하지 못해도 대화의 즐거움을 깨우쳐주는 매티가 프롬의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는 중이다.

 

소설은 액자식 구성으로 화자인 엔지니어가 들려주는 이선 프롬의 젊은 날을 기록한다. 화자는 프롬의 집이 유독 위축되어 보이는 이유가 허물어 사라진 때문이라고 이해한다. 본채보다 더 뉴잉글랜드 농가의 중심이면서 초석인 엘, ‘땅과 연관된 데다 그 자체로 따뜻함과 자양분의 주요 원천을 포함하는 삶’(p.23)을 상징하는 엘의 철거는 황량한 가운데 프롬을 속수무책 홀로 서 있게 한다. 반면 낮은 울타리로 둘러싸인 프롬네 집안의 묘석들은 산 자들의 땅에 자리 잡은 채 시선과 목소리로 말을 건다. 너도 결코 떠나지 못할 걸, 우리처럼, 하는 속삭임으로. 프롬은 냉담한 아내 지나에게 애정을 느끼지 못하고 그럴수록 매트의 젊음과 생기에 마음이 이끌린다. 아내 지나가 매트를 내보내겠다고 결정했을 때, 프롬은 갈등한다. 두려움과 고통에 휩싸인다.

 

프롬은 추위와 상관없는 낙원 같은 곳, 이미 기억에서 흐려진 플로리다에 다시 가보고 싶었을 것이다. 공과 대학 실험실로 돌아가 그의 꿈을 마저 이룰 수 있었다면 어땠을까. 그러나 상기된 추억은 현실의 진공 같은 밀폐를 부각할 뿐이다. 프롬은 매트와 서부로 떠나고 싶었다. 그렇다고 아내를 남겨둘 수도 없었고 선한 이웃을 상심케 할 수도 없었다. 매트를 배웅하던 밤, 그녀의 마음을 확인한 기쁨만이 그의 전부였다. 그리고 망설인 끝에 그녀의 결심에 동조하고 계획은 빗나간다. 지금까지의 비극은 비극도 아니다. 앞으로 상상할 수 없었던 삶을 현실로 받아들이고 살아내야 한다. 소설의 결말은 독자의 예상을 저만큼 뛰어넘고 이전에 제시된 전조와 암시, 복선들을 헤아려보게 만든다.

 

행복해지고 싶었던 한 사람을 본다. 행복하게 살고 싶은데, 가슴 뛰게 만드는 세계에 투신하여 배우고 싶고, 먼 하늘을 마음껏 바라보며 편안하게 이야기하고 싶은데 그럴만한 여건이 안 되었던 이선 프롬. 그는 벌써 죽어서 지금 지옥에 있는 사람처럼 보이’(p.10)지만 여전히 우체국에 들러 지나를 위한 의약품 봉투와 구독지 한 부를 찾아간다. 아마도 계속될 그의 일상이다. 소설은 창과 칼로 공격하는 것 같은 혹한의 날씨가 인간을 무력하게 하듯이 환경과 상황, 시선이나 주변의 기대가 의지와 상관없이 개인을 옥죄는 현실을 보여준다. 탈출의 방편을 모색하나 문학에서 길을 발견한 작가와 달리 프롬은 반복되는 하루에 갇힌다.

 

작품은 영상 같은 이미지, 긴장감 넘치는 침묵, 차가운 감각과 초조한 순간들을 쌓으며 섬세하게 독자를 이끈다. 소설의 결말 부분에서 작가는 이웃의 목소리로 매티가 죽었더라면 이선 씨는 살았을 거라고 보탠다. 그러면서 프롬 집안의 묘석들을 다시 불러낸다. 죽음과 별반 다를 것 없는 삶, 어쩌면 죽음보다 더 가혹한 삶은 대를 이어 새기고 쌓인 죽음의 증거들에 일 획을 미리 보태는 듯 암울하다. 젊음의 정점에서 갇힌 삶이 프롬과 매트에게 동일하게 반복된다. 지나의 입지 변화 또한 여운을 남긴다. 어쩌면 보편적인, 그러면서 비극적인 작품이 마치 경종처럼 다가온다.

 



 책 속에서>


이선은 묘석들을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말없는 선조들은 그의 조바심, 변화와 자유를 갈구하는 그의 욕망을 빈정대 왔던 것이다. ‘우리는 이곳을 결코 떠나지 못했다······어떻게 네가 그럴 수 있겠느냐?’라는 구절이 묘석마다 쓰여 있는 듯했다. 문을 드나들 때마다 나는 이곳에서 이렇게 살다가 마침내 저들에게로 가겠지.’ 하며 몸서리치곤 했다. 하지만 지금은 변화를 피하려던 욕망은 다 사라지고 이 조그마한 울타리가 따뜻한 존속감과 안정감을 가져다주었다.(p.50)

 

광기에 사로잡혀 어떠한 행동을 했는지 갑자기 깨닫자 그 광기가 사라지며 자기 앞에 놓인 삶을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가난한 농부였고, 자기가 버리면 고독과 가난 속에 남게 될 병든 여인의 남편이었다. 설령 아내를 버릴 배짱이 있더라도 그를 동정하는 인정 많은 두 사람을 속이지 않고서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그는 발길을 돌려 천천히 농장으로 돌아왔다.(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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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뒷세이아 - 그리스어 원전 번역 원전으로 읽는 순수고전세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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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부터 <오뒷세이아>를 읽겠다, 라는 자발적 의지와 계획으로 시작한 여정이 아니다. 함께 읽기로 폈던 <일리아스>함께였음에도 중도에 멈추었고, 바라만 보아도 부담스러운 벽돌이 책상 한편에 놓인지 3년이 되어갔다. 시립 도서관의 공지문은 그때 올라왔다. 매년 봄이면 한 번씩 강의를 오시는 이권우 교수님의 올해 강좌는 오뒷세이아와 일리아스 깊게 읽기였다. 4차시 8시간 강독에 참여하며 계속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현재, 계속 읽는 중이다. 교수님은 3회독 후에 다른 판본으로 읽기를 권하셨고, 그래서 이준석 교수 번역본을 준비해두었다. 도서 마련이 여전히 할 수 있는 가장 쉬운 일인 듯하다. 읽고 질문하고 쓰는 일련의 후속 행위는 감탄과 고민, 인내력과 너는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무엇을? 이해, 해석, 비판적 읽기, 재해석, 적용, 기록으로 1차 매듭짓기-를 할 수 있다는 자기최면)의 바퀴를 돌리고, 모양새야 어떠하든 결과물 한 편을 요구한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천병희 옮김, 도서출판 숲, 2015, 672쪽 분량)는 트로이아 전쟁 영웅 오뒷세우스의 10년에 걸친 귀향 여정을 노래한다. 12110, 24권으로 이루어진 고대 서사시는 작품 시간 배경을 제외하면 <일리아스>의 후속편이 아니다. 오뒷세이아를 먼저 읽음으로 호메로스 세계로의 진입 장벽은 확실히 낮아졌다. 리듬을 타듯 즐거움도 베어 나왔고 장편 대서사시는 그 옛날 그 대단한, 나와 별 상관은 없는 영웅 후일담에서 때로는 애잔하고 때로는 응원하게 되고 가끔 폭삭 스며들며 이입하게 만드는, 모든 이에게 가능한 여정으로 보편성을 획득해갔다. 주인공은 출렁이는 바다 한 가운데에서 서핑하듯 균형을 잡는다. 고도의 집중이 필요하다. 왼발에 힘을 줄 때, 다시 무게중심을 오른 발로 옮길 때 아슬아슬한 짧은 순간마다 독자는 참여한다.

 

출렁이는 난바다는 괴물이나 역경을, 유혹이나 저주를, 올가미나 술수를 숨긴 채 질책하고 시험하고 행동과 반응을 지켜본다. 판단과 결정을 확인한다.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은 역설적 이름인 아무도 아닌 자(nobody)’를 대고 위기를 탈출하나 곧바로 정체를 밝힌다. 나 오뒷세우스요! 이 사건은 주요 실책이 되어 그의 발목을 잡고 포세이돈의 노여움을 부른다. 이타케의 왕 오뒷세우스로 자기정체성을 회복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10년이다. 대단한 업적이나 성취가 아니라 어긋남을 바로잡는데,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를 되찾는데 걸리는 시간이다. 호기심도 꾀도 많았던, 자랑거리도 충분했던, 의지할만한 지위와 신분도 갖추었던 왕은 무명의 방랑자라는 낯선 입지 위에 자기 역사를 다시 세워야 한다.

 

구조는 우리를 안심시킨다. 서사시의 구조 역시 독자를 집중시킨다. '오뒷세우스의 노래를 의미하는 <오뒷세이아>는 첫 네 권에서 텔레마코스의 성장을 다루며 텔레마키아라고도 명명한다. 5~12권까지는 먼 바다에서 일어나는 오뒷세우스의 모험을 담고 있는데 9권부터는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서술하며 시간을 압축한다. 13권부터 24권까지 귀향한 오뒷세우스가 구혼자들에게 복수를 감행하고 집안의 조력자들을 찾아내 징벌을 가한다. 흩어진 가족이 다시 한 자리에 모여 가정이 회복되는 서사는 현실과 환상을 넘나들고, 목적지를 바로 눈앞에 두고 원점으로 회귀하는 등 고통스런 과정을 잇댄다. 작품의 시작과 끝은 신들의 개입이 눈에 띈다. 올림포스 신들의 회의에서 아테나 여신은 오뒷세우스의 귀향을 촉구하고, 신들은 제안을 받아들여 귀향을 확고한 결정으로 합의한다. 오뒷세우스는 물론, 텔레마코스와 페넬로페의 행동과 결단에는 모습을 달리한 신들의 의도가 작용한다. 오뒷세우스의 이타케 귀향과 복수 후, 다시 시작하려는 또 다른 복수극은 제우스와 아테나의 적극적 개입으로 중지된다. 신들의 지분은 여전히 많고 중대하나 그것만으로 이루어진 서사는 아니다. 호기심도 자신감도 충만했던 오뒷세우스는 인내하는 자, 신중한 자의 면모를 축적해간다. ‘지략이 뛰어난이라는 수식이 끊임없이 반복될 때 이에 걸맞는 자로 성장해간다. 자기 의지와 자의식을 세공하듯 단련해간다.

 

<일리아스>의 원전 첫 단어가 분노’, 즉 아킬레우스의 분노인데 반해 <오뒷세이아>한 사람이다. 고대 그리스 서사시에서 중요한 첫 단어는 주제를 간직한다. 한 사람의 10년에 걸친 정체성 회복의 여정은 3천 년이 지난 지금 책을 펴는 새로운 독자에게도 빛바래지 않은 질문을 건넨다. <일리아스>의 인물들은 불멸의 명성을 남기기 위해 분투하지만 <오뒷세이아>에서는 살아남는 게 중요하다. 그렇다고 영원한 삶을 구하는 건 아니다. 요정 칼륍소에 의해 오귀기에 섬에 7년간 붙들려 있던 오뒷세우스는 바로 이곳에 나와 함께 머무르며’, ‘불사의 몸이 되고 싶어질 거’(p.140)라고 그의 체류를 희망한다. 고향 땅에 닿기 전에 얼마나 많은 고난을 겪어야 할지를 그가 안다면다른 선택은 어리석고 불가하리라는 예상이다. 그러나 오뒷세우스는 이미 많은 고난과 고생을 한 바에 이번 고난이 추가됨에 게의치 않는다고 답한다. 필멸의 삶을 선택하고 불멸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는 오뒷세우스는 그가 맞서고 애쓰고 전력을 다하는 생의 과정 자체를 숭고하게 여긴다. 유한한 삶과 그 안에서의 성장이 얼마나 소중한지 역설한다.

 

고대 그리스의 환대문화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돼지치기 에우마이오스는 정체를 숨기고 거지 모습으로 찾아온 오뒷세우스에게 모든 나그네와 걸인은 제우스에게서 온다’(p.357)며 반긴다. 텔레마코스는 아테나의 조언대로 귀향을 준비할 때,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는 예언자 테오클뤼메노스가 다가와 도망자로서 탄원한다고 승선을 청하자 허락한다. ‘이타케에서 우리는 그대를 최대한 환대할 것’(p.370)이라는 말도 보탠다. 강대진의 <오뒷세이아 읽기>에 따르면 이 행동은 역시 고향을 떠난 자기 어버지도 무사히 배에 실려 고향에 돌아갈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반영한다. “비슷한 것끼리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는다는 것이 고대의 믿음이다.”(p.439/<오뒷세이아 읽기>,강대진)라는 걸 알 수 있다. 텔레마코스의 여행 목적에서 이런 고대의 믿음은 주술적 행동으로 읽히기도 하고, 그럼에도 환대의 차원은 상당하다. 신화로부터 온 에피소드를 관련 예술작품들과 비교하며 읽는 일도 즐거움을 준다. 오뒷세우스가 알키노오스의 딸 나우시카아와 만날 때, 공주가 던진 공이 소용돌이로 굴러가는 장면은 그림형제가 수집해 펴낸 <개구리 왕자>의 원형이라고 한다. 장 베베르의 오뒷세우스와 나우시카는 이 순간을 아름답게 형상화한다. 고난도 신이 주셨으니 참고 견디라는 말이나 불운한 탄원자가 받을 도움 등 나우시카아가 건네는 말도 인상적이다. 또 다른 가능성이나 유혹을 마다하고 귀환이라는 목표를 향해 한결같이 나아간 주인공은 자기 분량의 성장을 이뤄낸 가족과 마주한다.

 

시간 순행적 구성이 아닌 회고가 반복되는 교차서술은 관객 또는 독자를 더욱 몰입과 상상의 장으로 이끈다. 어떤 회고는 환상계를 신전처럼 묘사하고 11권은 저승이라는 제하에 키르케의 명대로 테이레시아스의 예언을 듣기위해 떠나는 오뒷세우스 일행을 볼 수 있다. 한 눈에 오뒷세우스를 알아본 테이레시아스는 그가 꿀처럼 달콤한 귀향’(p.267)을 바라겠지만 어떤 신, 포세이돈이 힘든 귀향길을 정해두었다고 전한다. 태양신 헬리오스의 소떼를 해치지 않는다면 고생은 해도 이타케에 닿을 것이나 만일 해코지한다면 파멸을 예언할 수밖에 없다고. 그대는 벗어나도 다른 무엇이 있을 것이라고 구체적인 금기를 헤아린다. 금기를 지키겠다는 인간 의지와 이성은 인내와 절제하는 마음에 힘입어 시도하지만 상황은 급하게 변하고 합리화의 회로를 돌린다. 문명을 지탱하는 힘이 욕망의 충족이 아닌 금기를 지켜내는데 있다고 할 때 지금 우리 목전에 놓인 금기는 무엇인지 헤아리게 된다.

 

프랑스 소설가 레몽 크노는 모든 위대한 문학작품은 일리아스거나 오디세이아라고 했다. 두 서사시는 고전 중의 고전으로 기원전 8세기경 창작된 이후 계속 공연, 전승되고 확대, 변용, 재생산되며 서양문화의 보고로 각 세대의 삶을 조명한다. 비현실적인 사건에서도 전조와 복선은 경고하듯 깔린다. 과도하게 치닫는 욕망은 화를 부르고 돌이킬 시점과 기회를 박탈한다. 오뒷세우스 가족의 성장 서사는 각자의 경로를 모험하며 시너지를 낸다. 장성한 텔레마코스의 수식구는 슬기로운으로 바뀌고 페넬로페의 베짜기는 오뒷세우스의 트로이 목마와 동일선상에 위치한다. 어린 텔레마코스와 구혼자들이 1:108로 맞붙는 대결은 불가능에 가까웠으나 판세는 서서히 바뀌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결정적 순간을 맞고 복수의 장은 처참하고 징벌은 엄혹하다. 이토록 광활한 공간 여행, 다층적인 에피소드의 중첩, 생동감 넘치는 캐릭터의 조우가 촘촘하게 쌓여있는 이 서사시는 독자의 감정을 건드리고 성찰케 만든다.

 

<오뒷세이아>는 성장소설의 원형이며 동시에 모험담의 시조다. 고대 서사시로부터 파생한 작품도 무수하고 논점도 첨예하다. 귀환길에 오뒷세우스가 행한 일종의 약탈 행위나 귀환 후 시녀들 처형도 또 다른 문학 작품의 주제가 되었다. 영향력은 시간을 단숨에 뛰어넘어 의식과 무의식에 경종을 울리고 여전히 구술한다. 강대진, 이준석 교수 등의 해설서나 데이비드 댐로쉬의 <세계문학 읽기>도 함께 읽을 책으로 추천한다. 이탈로 칼비노의 <왜 고전을 읽는가>나 아도르노 공저작 <계몽의 변증법><오뒷세이아>를 다룬다. 찾아 읽을 저작은 무궁무진한 셈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그리스가 로마에게, 로마가 그리스에게전시가 20273월까지 열린다. 가장 인상적인 작품은 하데스로 가는 문이었는데 작품에서 내내 활약하는 아테나 여신의 조각상도 볼 수 있다. 호메로스를 읽으며 다녀와도 좋을듯하다.

 

무엇보다 내년 개봉 예정인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차기작 <오디세이아>는 기다리는 시간까지 선물과 다름없게 만든다. 탐 홀랜드의 텔레마코스, 맷 데이먼의 오디세우스라니 놀라운 놀란 감독이다. 이 영화의 백미는 무엇이 될까, 페넬로페가 제안한 활쏘기 장면일수도.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그 화살을 줌통 위에 얹더니 시위와 오늬를 당기며 똑바로 겨누고 쏘아 도끼 자루 구멍들을 하나도 놓치지 않았으니, 청동이 달려 묵직한 화살이 그것들을 모두 꿰뚫고 지나간 것이다.”(419-423/21, ) 화살로 열두 개의 도끼를 모두 꿰뚫는 이 장면일까. 훌륭한 장면이야 워낙 많을 테니까 기대치는 계속 올라간다. 시인은 여전히 <오뒷세이아>를 통해 목소리를 전한다. 후세에게 쉬지 않고. 필멸의 조건을 수용하는 누군가에게, 영생의 편에 서있는 누군가에게 고루 혜안을 제공하는 작품이다. 작품 자체가 지략이 뛰어나다고 할 수 밖에. 다시 읽기 위하여 우선 1회독을 권한다.

 

1권 신들의 회의 후 아테네가 텔레마코스를 격려하다

 

들려주소서, 무사 여신이여! 트로이아의 신성한 도시를 파괴한 뒤

많이도 떠돌아다녔던 임기응변에 능한 그 사람의 이야기를.

그는 수많은 사람들의 도시들을 보았고 그들의 마음을 알았으며

바다에서는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전우들을 귀향시키려다

마음속으로 숱한 고통을 당했습니다. 그토록 애를 썼건만 그는

전우들을 구하지 못했으니, 그들은 자신들의 못된 짓으로 말미암마

파멸하고 말았습니다. 그 바보들이 헬리오스 휘페리온의

소떼를 잡아먹은 탓에 헬리오스 신이 그들에게서 귀향의 날을

빼앗아버린 것입니다. 이 일들에 관해 아무 대목이든,

여신이여, 제우스의 따님이여, 우리에게도 들려주소서!(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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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 암실문고
마리아 투마킨 지음, 서제인 옮김 / 을유문화사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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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서제인 옮김, 암실문고, 2023, 432쪽 분량)은 마리아 투마킨의 비문학 저서로 고통의 얼굴을 한 생생한 사례를 열거하고 누적한다. 르포르타주의 옷을 입고 때로 문학적인 사유와 은유로 나아가고, 때로 믿지 못할 초현실적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독자는 어느 순간 주된 분위기와 지향에 속하여 페이지를 넘긴다는 안정감에서 벗어난다. 예민하게 중심을 잡아야 하는 줄타기와 같은 읽기는 이 줄이 최소한 튼튼하기를 기대하지만 이 기대 또한 충족될지는 의심스럽다. 흔들고 휘청거려 독자를 떨구려는 줄이다. 어쩌면 자아를 가진 줄이 아닐까, 느닷없이 한 가운데를 절단해버리는 줄이 아닐까, 고민에 빠뜨린다. 저자 마리아 투마킨은 문화사를 전공하고 다양한 사회 문제와 인간 내면의 수수께끼 같은 측면을 탐구하며 그 과정을 기록해 왔다. “고통을 말하지 않는 법”으로 번역된 책의 원제는 『Axiomatic』이다. ‘자명한’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이중적으로, 다시 역설적으로 다가온다. 현실의 사건들은 예측이나 기존의 틀, 굴레를 깨기에 자명함을 오히려 경계한다. 고통을 말해야 한다는 적극적 권유인지, 고통에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접근하라는 경고인지, 감히 해석하려는 당신을 열 외시키겠다는 날카로움인지, 쉽게 길을 내어주지 않는 연대의 방법론인지 아마도 이들 모두를 품고 있을테다.


책은 목차가 있다. 다섯 개의 장은 각각 주요 테마로 또 다른 사례를 접목하거나 확장한다. 저자는 고통스러운 이들에게 다가가 그의 곁에 머물면서 보고, 경청하고, 전한다. 청소년 자살 생존자나 마약 중독자들, 나치 수용소의 생존자나 아스팔트 위에서 반복적으로 트럭(저자가 비유한)에 치이는 자들, 가정 폭력 피해자 등의 기록이 쌓인다. 1장에서는 브로드스키의 시를 가져온다. “슬픔을 비롯한 모든 것에는 한계가 있다. 아니, 슬픔은 아니다. 슬픔에는 한계가 없다.” 이 시의 후반은 “그런데 공간이란 무엇일까, 그게 만약 주어진 모든 지점에서 부재하는 육체를 뜻하지 않는다면?”(p.90) 누군가의 부재로 꽉 찬 공간이라. 이어 삶이 계속된다면 조만간 고통의 반경이 줄어들기 시작하고 시간이 사람들의 상처에 내려앉는 것일까, 라고 묻는다. 답할 수 없는 질문은 틈새에 연거푸 얼굴을 내민다. 유일하게 윤리적인 태도란 “시간의 생물학적인 차원에서 과거의 소멸에 저항하는 것”(p.92)이라고 아우슈비츠 생존자의 정의도 마찬가지로 묻는다. 시간과 공간은 다시 한 번 규정된다. 또 다른 아우슈비츠 생존자였던 여자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이주하여 아들이 남긴 유일한 손자를 위해 싸운다. 심리학적 식견을 늘어놓는 이들은 어디든 있으나 정작 그녀가 말할 만한 사람이 아무도 없다. 이 만남에서 저자는 ‘오도와 오판, 그리고 오심’(p.122), 학대당하고 방치되는 아이들의 세계에서 흔한 일들은 어떻게 계속되는지, 행정 구조적 문제와 관료주의적 문제와 과부하 걸린 청소년 구호 체계 자체의 문제로 치부되는지, 그러면서 다른 지점을 덧붙인다.


다양한 작품에서 가져온 인용문은 시선을 깊게 하거나 넓혀줄 징검다리가 될 수 있겠다. 찾아 읽는다면 말이다. 거침없고 직관적인 문장, 속도감 있는 이동, 일종의 맹렬함이 활자 사이에 바람을 일으키는 듯하다. 이 책은 조금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최소한 A, B, C를 합시다, 라고 정리해주지 않는다. 충분치 않을지라도 힘 닿는데까지 해봅시다, 라고 요약하지 않는다. 그럼으로써 독자는 안도와 멀어지고 긴장을 풀지 못한다. 제목이나 표지 그림, 서술 기법과 전개 방식, 구조가 그렇다. 사례별 종결도, 책 전체의 매듭도 늪과 같은 끈끈함과 질척이는 감각이 남는다. 그런 점에서 문제의 열거와 암울한 반복을 이 책의 아쉬운 면이라고 할 수 있겠다. 특별히 더 황망한 부분, 특별히 마음 아프거나 애달픈 지점을 꼽을 수 있는데 이와 같은 반응 역시 감각이고 반사 일까봐, 이 순간이 지나면 흐려지고 흩어질까 봐 걱정을 남긴다. 감정적으로 이입하고 몰입하여 읽었으나 발생하는 질문들이 책을 덮으면서 읽기 전으로 회귀하는 건 아닐까라는 염려와 유사하다. 그럼에도 이 책을 읽어서 다행이었다. 두 번째 장에서 화가인 여자는 말한다. “저는 심연에 던져져도 거기서 인간의 표정과 경험들을 찾아내 그릴 거예요.”(p.113)라고. 이 말은 저자의 집필 작업과도 닿아 있다. 무방비로 노출된 연약한 모습 그대로를 기록하고 기억하는 작업, 개념정리와 요약과 절차로 매끄럽게 다듬어진, 합의되고 요구에 부응하는 편린을 있는 그대로의 것으로 재발견하려는 의지다. 본질에 밀착하겠다는 시도다. 바람직하지 못한 편독가로서 자발적으로 선택하여 읽지 않았을 책을 약속한 과제 덕분에 읽었다. 오히려 뜻깊은 독서가 되었고 이야기 나누고 싶은 부분들이 빼곡한 저서로, 기억하고 싶은 책으로 필자 역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어머니가 죽는 걸 보고도/ 당신은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오 당신, 안다는 자여/ 당신은

알았는가, 하루가 1년보다 길고/ 1분이

평생보다 길다는 것을/······당신은

이것을 알았는가/ 당신, 안다는 자는.


(사를로트 델보 <오 당신, 안다는 자여> p.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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