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 앞에서 쏜살 문고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전영애 옮김 / 민음사 / 2017년 6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프란츠 카프카(1896~1943)의 『법앞에서(전영애 옮김/민음사)』는 열 네 편의 작품을 담은 단편집으로 “카프카적인”이라는 단어의 의미를 이해하게 한다. 현대 실존주의 문학의 선구자로 일컬어지는 카프카는 질병으로 고통받고 때이른 죽음을 맞기까지 장편과 단편, 일기 등을 합해 총 3400여 쪽에 달하는 많은 작품을 남겼다. 죽기 전 평생의 벗이었던 막스 브로트에게 자신의 미완성 작품을 모두 없애달라고 부탁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브로트가 이를 실행하지 않은 덕분에 현대의 독자가 카프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러운 일이다. 책은 한 손에 쥐어지는 문고본으로 분량도 165쪽으로 가볍다. 들어가는 말, 역자해설, 편집후기 등도 없고 작품에만 최대한 페이지를 할애했다. 하지만 예상대로 결코 가볍게 읽을 수 없는 작품들이 막강하게 행진해온다.

“법(法) 앞에 문지기 한 사람이 서 있다.”(p.7)로 시작하는 표제작 <법 앞에서>는 카프카 자신이 일기에서 “전설”이라 불렀다 한다. 카프카 전기를 쓴 클라우스 바겐바하에 의하면 카프카 스스로 가장 소중하게 여겼던 것이지만 확고한 정설로 인정받을 만한 해석이 없을 만큼 수수께끼로 남아있다.(p.168,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은행나무)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우리 모두이기도 한 “시골 사람 하나”와 삶의 목표이자 유일한 가치, 의미일 수 있는 “법”, 그 사이 통과해야만 하는 단계, 또는 과정인 “문지기”의 단순한 구도로 인생 전체를 조망한다. 시골사람은 카프카, 문지기는 아버지라고 단선적으로 읽히지는 않았다. “법”의 수많은 다른 이름, 꿈이나 목표, 의미에 닿는 진정한 길은 있을까, 있다면 어떨까 하고 생각의 방향을 틀어본다면 다음 단편 <죄와 고통, 희망 그리고 진정한 길에 대한 성찰>중 첫 번째 잠언이 이를 정리해준다. “진정한 길은 드높이 팽팽하게 쳐진 줄이 아니라 땅바닥 위로 바싹 쳐진 줄처럼 나 있다. 진정 디디고 간다기보다는, 오히려 걸려 넘어지게끔 되어 있는 듯이 보인다.”(p.11) 이 통찰과 비유에 놀라울 따름이다. <굴>에 이르면 또 다른 세계다. 법에 닿기 위해 애쓴 압축 여정에 비해 설명과 묘사를 채워 넣음으로 굴과 나, 굴을 파고 예측하고 아끼고 사유하고 갈등하고 손을 놓는 일련의 과정, 어느덧 백발이 지름길로 오는 인생 행로를 그려낸다.

<황제의 전갈>은 불가능이란 무엇인가를 시전한다. 절대 절망과 깊은 무력감, 그럼에도 이어질 반복을 떠올린다. 이 짧은 단편은 다음 이야기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의 부속 장면으로 삽입되는데 영리한 전개다. 작가는 무한히 큰 그림을 그리면서도 가장 작은 씨앗의 미세함이라든지 언뜻 스치는 바람결을 놓치지 않는다.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가 가장 마음을 끄는 작품이었다. “압도적 거대함 앞에 몰아세워지다, 그 사실조차 잊은 채 전락하는 인간”이 이 작품에 대한 한줄 정리 중 한 예다. 본 적도 없고 결코 보지 못할 북방인들을 대비해 축조하는 장성이라니. 이를 위해 감수하는 희생 또한 끝 간데를 모르고 요청받고 지불하는 희생이다. 만리장성 축조는 작가의 미완성 장편 <성>을 떠올린다. 그 외에도 미지의 것에 사로잡혀 무모하게 작동하는 인간의 초상은 또 다른 작품들을 소환한다. 가장 먼저 알바로 무티스의 <마크롤 가비에로의 모험(문학동네)>, 이어서 디노 부차티의 <타타르인의 사막(문학동네)>이다. 카프카가 거듭 변주하는 인물들은 환상적인 배경을 무대로 터무니없이 성실하다. <굶는 광대>는 또 어떤가. 단편 하나 하나 마다 “놀라워라”를 연발하며 읽는 이유는 극도의 환상이 환상에 머물지 않고 지극히 현실적이라는 발견 때문이다. 불통인 채로 이해에 이르지 못하고 맞는 결말들이 가슴을 서늘케 하지만 “지금, 여기, 여전히”는 모든 작품에 들어맞는다. 우아하고 시적인 문장으로 비극적 인간 조건을 말할 때 감정이 실릴 공간은 없다. 건조하고 객관적인 시선은 기록할 뿐이다. 그럼으로 여전히 웅변한다.

책 속에서>

그러나 내 쪽에서는 모든 것이 도리어 그 당시보다 덜 준비되어 있으니, 커다란 굴은 여기 무방비 상태로 덩그러니 서 있다. 나는 이제 꼬마 수습공이 아니라 노장 건축사이지만 아직 남아 있는 힘을 결단의 시기가 오면 정작 쓰지 못할 터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늙었더라도, 지금보다 한결 더 늙는다면, 정말이지 좋겠다. 이끼 아래의 나의 휴식처로부터 더 이상 몸을 전혀 일으킬 수 없을 정도로 늙었으면. 그러나 실제로 나는 이 곳을 견디지 못해 몸을 일으키고, 이곳에서 포만한 평화와 새로운 근심으로 나를 가득 채우기라도 한 듯이 다시 질주해 내려간다, 집 안으로(p.84, 굴)

그가 사는 건 자신의 개인적 삶 때문이 아니고, 그가 생각하는 건 자기의 개인적 사고 때문이 아니다. 그는 한 가족의 강박에 의해 자기가 살고, 또 생각하고 있다고 느낀다. 그 자체로 생명력과 사고력이 지나치리만큼 풍부하기는 하지만, 그가 모르는 어떤 법칙에 따라 일종의 형식적 필연성을 지니는 가족 말이다. 이 알지 못하는 가족과 이 알지 못하는 법칙들 때문에 그는 풀려날 수가 없다.(p.160, 그-1920년의 기록)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위대한 생각 시리즈 13
프란츠 카프카 지음, 정초일 옮김 / 은행나무 / 2015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정초일 옮김/은행나무』 는 아버지 헤르만 카프카에게 보내는 편지를 묶은 서간체 작품으로 “가장 중요한 자전적 진술”로 평가받는다. 역자는 이 편지가 “고유한 용도를 갖는 사적인 서한인 동시에 자전적 에세이로서 그 자체로 훌륭한 문학성을 지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작품에서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주제와 동기를 숱하게 담고 있다.”(p.151)고 전한다. 일면 보편성이 엿보이면서도 특별하게 다가오는 부자관계다. 이와 같은 편지가 가능했던 이유를 밀레나 예젠스카는 “무척 세심한 양심을 지닌 인간이자 예술가여서 다른 사람, 즉 귀머거리들이 안심하는 경우에도 마음을 놓지 않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겉으로만 아버지를 사랑하는 체하면서 살아가는 쪽을 선택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p.159)라고 해석한다. 카프카는 고독 3부작으로 일컬어지는 『실종자』 『소송』 『성』을 비롯해 단편 소설, 일기와 편지 등을 통해 인간에게 엄습하는 부조리와 불안을 포착한다. ‘은행나무’출판사 번역본은 카프카와 가족들, 친필 원고 및 관련 사진을 곁들여 조금 더 가까이 작가가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 보도록 돕는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제게 물어보신 적이 있지요. 제가 아버지를 무서워하고 있는 것 같다는 말을 하곤 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요.”(p.70) 라는 첫 문장은 글의 목적을 드러낸다. 카프카의 편지는 응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질문에 대한 답으로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전달하기 위해 말이 아닌 글을 선택하고 있다. 카프카는 자기 안에 있으나 차마 꺼내지 못했던 말을 차분히 풀어놓는다. “아무튼 아버지와 저는 아주 달랐고, 이렇게 다르다는 점에서는 서로에게 몹시 위험한 존재였어요.”(p.14)라고 아버지와 아들의 “다름”을 하나의 벽, 나아가 견고한 성에 견주며 구체적인 사례를 열거한다. 말을 건네는 듯한 입말체 문장은 대상이 누구이든, 아버지를 넘어 독자에게 공감의 폭을 넓힌다. 독자는 카프카 부자의 이야기를 자기에게로 대입시켜 상황을 각색하게 된다. 때론 아버지나 아들의 목소리를 독자의 것으로 대체하거나 덧씌우며 그 입장을 발언케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개인적이지 않다. 사적인 편지를 넘어 관계를 질문하고 사유로 초대하는 교본처럼 읽힌다. 글쓰기로 부정적 감정을 해소하는 치유적 글쓰기의 일면도 보인다.

카프카에게 글쓰기의 주제는 아버지였다. 아버지 때문에 고통 받았던 작가였기에 작품에 등장하는 아버지 또는 부정적 주인공들이 대부분 자신의 아버지의 은유하거나 표상한다. 그렇기에 그가 아버지를 고발할 때 예상할 수 있는 톤이 있음에도 편지의 어조는 조금씩 어긋난다. 실랄한 지적이 눈에 띄는 지점도 많지만 연민과 안타까움으로, 화해 또는 아끼는 마음으로 변조해간다. 민감하게 벼린 영혼 카프카에게는 눈감고 넘겨지는 아버지의 허물이 없었을 것이고 그 하나하나는 상처로 흔적을 남겼다. 감각과 반응이 모두 특출하기에 기억에 새겨진 다음 비유와 묘사로 크고 작은 기념비를 세우는 일도 자동반사 같다. “왜냐하면 제가 저에게만 잘못이 있다는 어린 시절의 죄책감에서 부분적으로 벗어나, 이제 우리 두 사람 다 도움이 필요하건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는 상태라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p.37) 카프카의 통찰은 다름, 부당함, 상처를 회피하지 않고 직면함으로 가능했을 것이다. 마무리는 서두에서 했던 아버지의 질문에 “지금까지 제가 아버지 앞에서 두려움을 갖는 이유에 대해 말씀드렸습니다.”(p.129)라는 말로 갈무리한다. 이에 더해 아버지 입장을 가정한 “가상 반론과 해명”(p.161)으로 끝을 맺는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에는 민감한 영혼의 고통이 잘 드러난다. 그에게는 “비뚤어지고 말테다”하며 자신을 던져버리는 자멸이 아닌 “글쓰기”라는 보물이 있었기에 스스로를 구원할 수 있었고, 훗날 관계에서 상처받는 영혼들, 미래의 독자들에게 위로와 휴식의 자리를 허락한다. 책은 또 한 가지, 아이의 심리를 들여다보고 경청케 하는 기능도 갖는다. 정신 들게 하는 문장으로 “자, 봐라!” 하고 경고하는듯하다.(p.145) 한때 자신도 연약한 어린아이였던 어른들은 그 사실을 빨리 잊는다. 자기 속에 있는 내면아이도 잊고 태연히 목소리를 내지르고 만다. 카프카의 날선 고발은 애정에 기반 하기에 실랄한 비유들이 통괘함과 때론 위트를 보인다. 곳곳에서 빼어난 비유를 통해 부모와 자식의 관계 역동을 쉽게 분석해서 풀어 쓴 가족 심리서를 연상시킨다. 꼼꼼한 역자해설은 “카프카 자신이 일기에서 ‘전설’이라고 불렀던 <법 앞에서>”(p.168)에 대한 관심을 높인다. 책을 덮으며 카프카 일가의 비극이 마음 아프게 다가온다. 자신처럼 아꼈던 세 여동생, 특히 셋째 오틀라의 죽음을 비롯해 아들의 죽음을 보고 아들보다 오래 산 아버지도 참혹한 시대의 희생양이다. 카프카 묘비에 적힌 글 중 “존경하는 헨노흐(헤르만) 카프카의 아들”이라는 문구가 시선을 끈다. 삶과 문학의 시작이자 끝점에 함께 착지하는 것만 같다.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는 카프카의 주요 저작들과 함께 반드시 빠트리지 말아야 할 작품이다.

아버지께선 팔걸이 안락의자에 앉아 세상을 통치하셨죠. 아버지의 생각은 타당했고, 다른 사람들의 생각은 미쳤거나 엉뚱하거나 돌았거나 비정상적이었어요. 그럴 때 아버지의 자기 신뢰는 무척이나 굳건해서 굳이 일관된 입장을 유지할 필요가 전혀 없었고 일관성이 없어도 정당성을 잃지 않으실 정도였지요.(p.24)

이 점에 대해선 이렇게 비유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은 각 단의 높이가 낮은 다섯 단의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다른 한 사람은 겨우 한 단에 불과하지만, 적어도 자기에게는 앞서의 다섯 계단을 다 합한 것만큼 높은 계단을 올라가야 합니다. 전자는 그 다섯 계단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수백 수천 계단을 능히 오를 것입니다. 그는 무척 힘겹지만 위대한 삶을 영위하다가 마감하겠죠. 하지만 그가 오른 계단의 그 어떤 한 단도 후자에게 최초의 높은 한 단이 갖는 의미를 지닐 수는 없습니다. 온 힘을 다해도 부족해서 디디고 올라서지 못한 한 계단, 그 계단을 넘어야 다다를 수 있는 곳에는 물론 가까이 가보지도 못한 사람의 첫 계단, 그 계단의 의미는 지닐 수 없다는 말입니다.(p.10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연애 소설 읽는 노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23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정창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연애 소설 읽는 노인(1989/정창 옮김/열린책들/2001』은 루이스 세풀베다(1949~2020)의 첫 작품으로 베스트셀러가 됨과 동시에 ‘티그레 후안상’을 수상했다. 그는 작가 최고의 환경소설로 일컬어지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 권두에 열대우림을 지키고 브라질 소작농과 토착민의 인권보호를 위해 활동하다가 암살당한 환경운동가 치코 멘데스를 기린다. 태어난 곳 칠레로부터 망명 이후 작가는 여러 나라와 직업을 거치는데 “지칠 줄 모르는 여행가”이자 “행동하는 지성”(p.172)으로 역할한다. 역자는 그의 문학이 “기존의 라틴 아메리카 소설 문학이 추구해 온, 적어도 그들이 보여 주었던 모습에서 탈피하거나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다.”(p.173)고 전한다. 루이스 세풀베다는 특히 유럽에서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 중 가르시아 마르케스 이후 가장 많이 읽힌다(p.173)고 하는데, 그를 읽고 난 독자는 아마도 쉽게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동화부터 소설까지 뛰어난 가독성은 그의 문학에 편안히 다가서게 한다. 또한 깊은 울림으로 잊혀 지지 않는 여운을 남긴다는 점에서 다시 찾게 만드는 힘을 간직한다.

“하늘에는 당나귀 배처럼 불룩한 먹장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있고, 밀림을 휩싸고 도는 끈끈하고 칙칙한 공기가 금방이라도 들이닥칠 폭풍우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미 우기에 접어든 날씨였다.”(p.11) 소설의 첫문장은 앞으로 있을 불안한 여정을 암시한다. 마을 부락민들은 엘 이딜리오를 찾는 외지인이 거의 없음에도 1년에 두 번씩 들르는 치과의사를 기다린다. 안토니오 호세 볼리바르 프로아뇨 노인은 생리적 이유보다는 정신적으로 그의 방문이 더 각별하다. 육개월마다 한 번씩 노인의 독서취향에 맞는 두 권의 연애소설을 전달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들은 나중에 노인이 난가리트사 강 앞에 있는 그의 오두막에서 고독을 달래며 읽고 또 읽게 될 텍스트였다.”(p.41) 하지만 노인의 소망은 잔혹하게 훼손된 시신이 카누에 실려 떠내려 오며 저지당한다. 누가 왜 이런 일을 벌였을까, 공격당한 자와 공격한 자의 실체를 밝히게 되면 처참한 번복을 막을 수 있을까, 엘 이딜리오의 유일한 공무원인 뚱보 읍장은 암살쾡이 추적단을 꾸리고 노인은 실질적인 리더가 되어 미지의 밀림을 향한다.

이기적이고 무분별한 인간은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환경파괴를 자행한다. 밀림의 주인인 동물도 원주민도 더 깊은 곳으로 끝없이 쫓기고 ‘양키’로 상징되는 권력은 폭력의 흔적을 남기고 돌이키기 어려운 상처를 입힌다. 노인이 밀림 생활을 배워가던 시절에도 지식과 경험이 쌓여갈지언정 “수아르족은 될 수 없었다”(p.60)고 고백한다. 수아르족의 특별한 의식들을 포함해서 밀림의 생태는 생생하면서도 놀라워서 작가가 어떻게 자료수집을 했을까 궁금할 정도다. 열린 감각, 깨어있는 의식으로 다가갔던 작가의 모든 여행과 정착의 흔적은 온전히 문학으로 구체화되었다. 암살쾡이로 인한 숨은 위협과 쫓는 과정은 읽는 내내 긴장을 늦추지 못하게 만든다. 해결해야 할 위협적인 존재, 적과의 결투가 필수적이라는 사실을 수긍하면서도 본연의 아름다움을 간직한 생명이 죽어가는 장면은 독자의 마음을 아프게 할 것이다.

소설의 특별한 매력은 제목이기도 한 “연애 소설 읽는 노인”에게 있다. 유창하지 않기에 노인의 “읽기”는 더 정성과 애정이 깃든다. 노인이 책을 매개로 의사와, 신부와, 여선생과 만나게 되는 장면, 책을 구하기 위해 궁리하고 원숭이 포획이라든지 댓가를 지불하는 방식도 간절함의 크기를 짐작케 한다. 작년 이맘때였다. 2020년 4월 세풀베다의 사망소식을 기사로 접하고 처음에는 믿어지지 않았다. 꾸준히 신간소식을 들을 수 있었던 귀한 동시대 작가와의 돌연한 이별이 코로나 때문이라는 사실이 더 아이러니했다. 환경과 자연을 지키고 돌이키지 않으면 공멸할 수 있다는 사실을 작가는 마지막까지 웅변한 것 같다. 하나의 작품으로 다채로운 질문과 즐거움, 경각심을 일깨우는 『연애 소설 읽는 노인』을 청소년과 성인 모두에게 권하고 싶다.

책 속에서>

노인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책을 읽었다. 그의 독서 방식은 간단치 않았다. 먼저 그는 한 음절 한 음절을 음식 맛보듯 음미한 뒤에 그것들을 모아서 자연스러운 목소리로 읽었다. 그리고 그런 식으로 단어가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었고, 역시 그런 식으로 문장이 만들어지면 그것을 반복해서 읽고 또 읽었다. 이렇듯 그는 반복과 반복을 통해서 그 글에 형상화된 생각과 감정을 자기 것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음절과 단어와 문장을 차례대로 반복하는 노인의 책읽기 방식은 특히 자신의 마음에 드는 구절이나 장면이 나올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도대체 인간의 언어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는가를 깨달을때까지 마침내 그 구절의 필요성이 스스로 존중될 때까지 읽고 또 읽었다. 그러기에 그에게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돋보기나 틀니 다음으로 아끼는 물건이 되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p.45)

그는 인디오들과 함께 생활하는 동안 자신이 가톨릭을 믿는 농부라는 사실을 훌훌 떨쳐 버렸다. 새로 이주해 온 개간자들이 정신 나간 사람으로 쳐다보았지만 원주민인 인디오들처럼 거의 벌거벗은 몸으로 돌아다녔다. 자유라는 말은 한번도 생각한 적이 없었지만 밀림에서 자신의 자유를 마음껏 누렸다. 그사이 차츰 밀림의 세계에 눈을 뜬 그는 주인 없는 푸른 세계에 매료되어 마음속에 간직해 오던 증오심을 잊었다.(p.53)

다시 생각이 거기까지 이르자 노인의 뇌리에는 어떤 결론이 스쳐가고 있었다. 맞아, 그 짐승은 스스로 죽음을 찾아 나섰던 거야. 그랬다. 짐승이 원하는 것은 죽음이었다. 그러나 그 죽음은 인간이 베푸는 선물이나 적선에 의한 죽음이 아닌, 인간과의 물러설 수 없는 한판 싸움을 벌인 뒤에 스스로 선택하는 그런 죽음이었다.

(중략)다시 말해서 뚱보의 떳떳지 못한 제안에 대해서 노인이 결론처럼 내린 대답은 단 한 가지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읍장 같은 인간들이 선택할 수 없는 싸움이자 죽음이었다.

“좋소.” 이윽고 노인이 입을 열었다. "하지만 담배와 성냥과 실탄은 남겨 두고 가시오.“(p.14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발칵 뒤집힌 현대 미술 - 세상을 뒤흔든 가장 혁신적인 예술 작품들
수지 호지 지음, 이지원 옮김 / 마로니에북스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수지 호지(Susie Hodge)의 『발칵 뒤집힌 현대 미술(이지원옮김/마로니에북스)』은 표지부터 강렬하다. 이제 비로소 현대미술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기대는 정답지를 주소서 내심 요청케한다. 서론에서 저자는 여러 이유로 “적잖은 당황과 좌절, 짜증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작품들 앞에서 “미술은 언제, 그리고 왜 변했을까? 변해도 된다고 결정한 사람들은 누구이고, 어떤 일들이 그런 변화를 촉발했을까?”라고 독자를 대신해 질문한다. 책은 이 문제들을 탐구하기위해 “미술계를 강타하고 미술사의 경로를 바꾼 1850년대 이후 생산된 혁신적인 작품들”(p.6)을 자세히 살핀다. 중요한 여정의 안내자 수지 호지는 100여권의 예술 및 역사 관련서를 출간했고 강연과 워크숍, 방송 등을 통해 예술과 예술 감상의 문턱을 낮추는 데 힘쓰고 있는 영국 미술사학자다. 서론의 끝에서 저자는 작품이 좋은지 아닌지 “누가 결정하나?”묻는다. 이전에는 왕립 아카데미였지만 오늘날에는 ‘미술계’라고 답한다. 또한 ‘미술계’의 괄호 내 부연 설명에는 ‘관람객’이 포함되어있다. 일반 대중이 왕립 아카데미 역할에 일정 부분, 어쩌면 비중있게 기여하게 된 것이다.

책은 50점의 놀라운 현대미술 작품을 1850년부터 현재까지 다섯 개 구간으로 묶어 선보인다. 구간별 소제목은 전통의 타파(1850~1909), 전쟁의 참상(1910~1926), 갈등과 퇴조(1927~1955), 상업주의와 저항(1956~1989), 프레임 너머로(1990~현재)이다. 소제목마다 특징과 의의를 알려주고 예술 분야는 물론 세계사 주요 이슈를 연대기순으로 기록함으로 시공간적 배경을 연결할수 있다. 예술이 그 시점에 어떤 얼굴을 드러내거나 변화하는지, 작가들이 무엇을 전달하고자 하는지 숨은 의미를 숙고하게 된다. 1910년부터인 “전쟁의 참상” 서두의 글은 새로운 시작을 알린다. “사실주의, 인상주의, 후기인상주의, 신인상주의 등 19세기 중후반과 20세기 초에 발달한 새로운 미술 운동은 처음에는 평론가와 대중을 충격에 빠뜨렸다.

그러한 예기치 못한 미술 양식은 전통적으로 인정된 방식과 접근법에서 이탈한 것이었고 불경해 보였다. 하지만 그것들은 장차 올 것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p.50) 이와 같은 분위기에서 제법 친근한 에곤 실레나 칸딘스키의 이름이 보이지만 “미술을 재정의하다”는 제목에 꼭 들어맞는 마르셀 뒤샹도 발견할 수 있다. <샘>이 제기한 질문인 “무엇이 미술가를 만드는가? 그에게는 어떤 자질이 필요한가? 미술이란 무엇인가?”(p.66)는 관객과 평단의 반응이 어느정도였는지 드러낸다. “작가는 물리적으로 작품을 제작할 필요가 없고 단지 아이디어만 생산하면 된다”는 뒤샹의 주장이 100여년이 지난 지금은 흡족히 수용되었을지도 모른다. 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예술의 수도는 역사상 처음으로 파리에서 뉴욕으로 옮겨간다.

『발칵 뒤집힌 현대 미술』은 혁신적인 작품들을 소개하면서 작가의 의도와 함께 주요 어록도 전한다. 덕분에 난해하고 불편했던 작품은 조금씩 그 취지를 알릴 수 있게 된다. 관심 범주에 포함되건 아니건 귀기울일 때 발견하는 사실들은 경이롭다. 달리의 <기억의 지속>이 보여주는 상징들, ‘카망베르 같은 시공간’, “단단하건 무르건 무슨 차이가 있겠나! 시간만 정확히 알려준다면.“(p.91)과 같은 말을 전해듣는 일 말이다. 놀라운 여정의 마지막은 기념비적 라이브 퍼포먼스로 명장면을 만든 뱅크시로 마무리된다.

예술작품을 보고 작가의 의도를 파악해야 하는 건 정답이 있다는 말이다. 가장 불안한 것 중 하나는 “혹시 오독을 한다면”하는 우려였는데 이는 예술 향유를 막고 스트레스 지수를 올린다. 내게 정답만을 달라 원했을때의 긴장을 임지영 선생님의 예술교육리더 클래스를 통해 천천히 해소하고 있다. 지금 이 책은 허용의 폭을 넓히는 또 하나의 디딤돌로 작용한다. 예술가들의 그 많은 시도, 쉽지 않았을 도전은 가능함의 범주로 다양한 낯설음을 끌어들인다. 예술을 재단하거나 판단하지 않고 다가설 수 있는 만큼 가까이 간다면 이 또한 즐겁지 아니한가. 사랑할 때 이해하게 되는지 이해할 때 사랑하게 되는지 선후를 명확히 하기는 어렵다. 작품과 관객이 맺는 일대일 관계에서 개인이 선택하는 감정은 힘이 있으며 예술은 무한히 새로 태어난다. “궁금한가? 해석본을 주마”에 근접한 책으로 난해를 이해로 전환시킬 단초가 될 것이다.

공격성이 부족한 작품은 결코 걸작이 되지 못한다./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p.86)

그들은 늘 시간이 상황을 바꿔준다고 말하지만, 실은 우리 스스로 그것을 바꿔야 한다./앤디 워홀(p.119)

나는 여전히 과학은 답을, 예술은 질문을 찾는다고 생각한다./마크 퀸(p.163)



<서평단/ 출판사 도서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인생미술관 - 그림에 삶을 묻다
김건우 지음 / 어바웃어북 / 2022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김건우의 『인생미술관(어바웃어북), 2022』은 서양미술사에 위대한 족적을 남긴 화가들 스물 두명의 삶을 그들이 남긴 작품으로 따라가 보고 대화의 장을 마련한다. 저자는 작품 위주로 그림을 즐길 때 “파편화된 지식”으로 방향을 잃을 가능성이 있는데 비해, 화가의 삶을 중심축으로 두고 그림과 만날 때 총체적인 시각에서 작품을 바라볼 수 있다고 전한다. 달과 6펜스 사이에서 고뇌했던 화가의 실패와 성공에 온전히 다가갈 때 관객 또는 감상자는 “일방적인 감상의 차원을 넘어 그림과 대화할 수 있게 된다.”(p.6)고 저자는 말한다. 『인생미술관』의 특별함은 죽음을 알리는 글, ‘부고’로부터 삶을 회상해나간다는데 있다. 그들에게 주어진 시간이 이미 거두어졌다는 사실 앞에서 삶과 예술을 복기하는 일은 기념이자 애도인 동시에 독자의 시간으로 시선을 돌리게끔 만든다.

『인생미술관』을 구성하는 네 개의 챕터는 “삶을 짓누르는 중력에 맞서”, “내 캔버스의 뮤즈는 ‘나’”, “어둠이 빛을 정의한다”, “달의 뒷모습”이다. 고흐부터 루벤스까지 스물 두 명의 화가는 네 개의 챕터에 나누어 배치되었는데 읽기 전에 독자가 먼저 연결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Gallery of Life 01", <삶의 여백을 채우는 법, 저항하며 앞으로 나아간다!>라는 각각 스물 두 개의 페이지가 인생 전시실로 입장하는 느낌을 준다. 화가의 생몰년을 확인하고 Obituary(사망기사)로 일대기 요약본을 본 후 삶과 작품을 잇는 일련의 과정을 반복하면서 새롭게 알게 된 사실에 애석해하거나 감탄하거나 결국 예술의 바다에 빠지게 된다. 두 번째 챕터를 보고 나면 ‘자화상’이 이전과 다르게 다가올 것이다. 미술사에서 자화상을 최초로 그린 화가 뒤러를 “자화상 개념도 없던 시기에 자화상을 그린 문제적 열세 살”이라는 위트 있는 소제목으로 소개한다. 그는 ‘브랜드’라는 개념도 최초로 미술에 도입한 화가로 자기 작품에 서명을 남겼다 한다. 시대를 앞서간 천재의 면모는 화공이길 거부하고 예술가의 아우라를 뽐낸다.

모나리자가 다빈치의 또 다른 자화상이라는 영국 컴퓨터 그래픽 전문가 슈바르츠의 실험은 놀라움을 자아낸다. 모나리자가 다빈치? 모나리자라는 이름의 의미를 추적하기도 하나 방대한 분량을 남긴 천재의 노트에 정작 자신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으니 미스테리로 남을 수밖에. “웃음으로 저항하고, 웃음으로 세상을 바꾸다”의 오노레 도미에는 새로운 발견이었다. “미술사가 도미에를 평범한 삽화가가 아닌 완성된 화가로 인정하는 것은 현실을 날카롭게 투영해내는 특유의 시선 때문이다.”(p.246) 웃음, 유머, 소시민의 삶을 연결하는 화가의 긍정이 웅변적이다. 한스 홀바인이 포함되어 있어서 기뻤다. 도스토옙스키의 <백치>에서 미시킨 공작과 로고진이 함께 보던 ”무덤 속의 예수“가 하단에만 있지만 양면을 할애해서 담겼다. 철학하는 화가로 불린 푸생도 깊이 각인된다. “푸생은 그림을 ‘본다’는 기존의 감상법에서 한발 더 나아가 문학이나 논문처럼 ‘읽어야 한다’는 지론을 펼쳤다.”(p.365) 미술사를 통틀어 어떤 화가보다도 사색적이었다는 푸생의 그림은 낯익지만 화가에 대해서는 정작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림도 읽어야 한다는 말에 읽기 강박자인 필자는 귀가 솔깃해진다. 마지막에는 작품 찾아보기와 인명 찾아보기까지 있어 곁에 두고 볼 때마다 도움 받을 수 있겠다.

미술관련서를 읽고 사고 모으고자하는 욕구가 누르면 튀어 오르고를 내내 반복해왔다. 가서 머물고 싶은 공간이라면 책이 있는 도서관을 제외하면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다. 혼자가고 남편과 가고 유모차 밀고 가고 아이 손 끌고 갔고, 지금은 과제 덕분에 시간은 부족하고 할수 없이 전시실을 경보로 스쳤다. 숭례문학당의 예술교육리더과정 수업을 듣고 있는데 예교리가 ‘지금’을 통과하는 나에게는 비타민이고 에너지고 엔돌핀이다. 예술 향유자로서의 삶이 불가능하지 않다는 확인은 설렘을 주고도 남는다. 『인생미술관』은 그런 때에 읽었기에 더 정성껏 감정이입하며 머무르게 된 면도 있다. 읽을 때는 좋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지금의 감동이 옅어질까 약간은 두렵다. 그 또한 죽음을 향해 가는 삶처럼 자연스러운 것이니 그러면 또 다시 펴고 읽어보자. 누구든 『인생미술관』을 방문해 자신에게만 주어지는 선물을 찾아내게 될 것이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