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별하지 않는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장편소설
한강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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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한국 영화 베스트로 이동진 평론가가 꼽은 1위 작품이 오멸 감독의 지슬이었다. 첨부된 20자평은 어떤 영화는 그 자체로 숙연한 제의가 된다였다. 엊그제처럼 생생하지만 어느덧 십 년이 지났다. 처음 보는 단어는 낯설었고, 진심을 눌러 실은 추천이 영화를 찾아보게 하였다. 떨어진 섬 제주에서 이해되지 않는 일이 있었다는 걸 처음 알게 되는 순간이다. ‘시대의 진실, 영화의 진실이라는 부제를 단 지슬에서 청야까지2016년 출간된 윤중목 평론가의 영화평론집이다. 지슬이라는 낱말을 품고 있는 제목을 지나칠 수 없었다. 글로 다시 영화를, 섬과 사람들을 기억해야 했다.

 

작별하지 않는다(문학동네, 2021, 332면 분량)는 노벨상 위원회와 진행한 인터뷰에서 이제 막 한강을 알게 된 독자가 가장 먼저 읽기를 바라는 작품으로 꼽은 최근작이다.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p.9)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는 생생한 꿈이 작품 전체를 견인하는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2014그 도시의 학살에 대한 책”(소년이 온다)을 낸 이후 악몽은 시작되었다. 작품에서도 소설가로 등장하는 경하는 작가의 분신으로, 자전적인 경험을 기록하며 탈고 이후에도 계속되었던 고통을 쓴다. 직접 <작별>이라는 제목의 소설이 마지막 인사일 수는 없다고,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언은 보이지 않는 힘에 이끌리고 구체화된다.

 

화자인 는 프리랜서 사진가이자 다큐 영화를 찍고, 지금은 목공일을 하고 있는 이십년 지기 친구 인선과 프로젝트를 함께 하기로 했었다. 반복되던 꿈처럼 검은 나무를 심는 프로젝트를 경하는 중지하겠다고 하였지만 인선은 어쨌든 난 계속하고 있을 거야.”(p.54)라고 동의하지 않는다. 그러던 중에 인선의 부름이 도착한다. 사고를 당해 병원에 있는 인선은 당장 제주 집에 가달라고 부탁한다. 지금 당장. “오늘 안에 가면 살릴 가능성이 있어. 하지만 내일은 죽어 반드시.”(p.66) 혼자 남은 작은 새 아마를 살리기 위해 그 길로 떠난다는 게 합리적으로 보이지 않는다. 무리한 요구이기도 하다.

 

하지만 간다. 대설주의보와 강풍경보가 동시에 발효된 섬으로, 중산간 마을이 고립되기 전에 반드시. 여정을 통과하고 집에 도착하고 아마를 보내며 울고 묶고 묻고도 잊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후, 경하는 인선이 살아온 날들로 비로소 들어가게 된다. 인선과 인선의 어머니, 그때 그곳에서 사라지던 사람들의 참혹한 시간으로. 인선의 공방에서 촬영했을 인터뷰들, 이 섬의 동굴 이야기를 듣고 전기가 끊긴 집에서 공방과 안채를 오가고, 찾아온 경하와 대화하며 프로젝트 이름도 전한다. “작별하지 않는다”(p.192)라고.

 

소설은 1<>, 2<>, 3<불꽃>으로 제주 4.3사건의 비극을 기록하고, 기록함으로 작별하지 않는다는 선언을 실행한다. 작고 가벼운 새, 아미의 죽음에도 눈물이 흐르는데 어쩌자고 그 많은 죽음을 의도하고 저질렀는지 절망한다. 그래서 소설은 고통을 낱낱이 기록한다. 독자는 활자로 기록된 통증과 아픔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독한 편두통과 위경련, 잘려나가고 찔리고 얼어붙은 형상, 덤불에 긁혀 흐르는 피와 작고 가냘픈 죽음을 받아든 손, 언 땅 파기, 밀물에 쫓겨 달리기, 옮기기 등 앉은 자리에서 책을 붙든 채 고되고 고되야 한다. 동시에 이 아픈 이야기를 이토록 아름다운 문장으로 쓸 수 있나 놀란다.

 

작가는 서두르는 일 없이 도처에 일어났던 폭압을 증언하고 엇갈려 배치한다. 꿈과 현실과 영상과 인터뷰와 은유와 직설화법으로 말한다. 폭설과 폭우, 동굴과 구덩이, 삶과 죽음을 연달아 묶는다. 그때 그 눈은 지금 내가 맞는 눈으로 순환하고 그러므로 아픔은 무뎌지는 일 없는 예리함으로 서슬 퍼런 현재 진행형이다. 그래야하고 기꺼이 고통을 끌어안을 때에야 짧게 끊어 쉬는 호흡이 조금이나마 나아질 가능성을 지닌다. 절단 부위를 바늘로 찌르는 행위, 3분마다 거듭 피를 내는 행위가 있어야, 통증을 느껴야만 잘린 신경 위쪽이 죽지 않는다는 것처럼.

 

인생들 위 허공에 모든 과거가 지금 이 순간에 겹쳐서 내려다보는 듯하다. 과거라는 단어를, 역사라는 자못 젠체하는 얼개를 비웃듯이 응시한다. 지금은 어떤가, 나아졌는가, 나아가고 있는가 묻는다. 작가는 이런 일을 하는 거구나. 연하고 연해서 결코 굳은 살 배기지 못하는 정신으로, 무뎌질 수 없는 감각으로 기억의 집을 견고히 하는구나. 차디찬 바다와 얼어붙는 눈을 통과해 일으키는 불꽃은 지극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계속 읽어 보겠다.

 

 

 

책 속에서> 

두 개의 스웨터와 두 개의 코트로도 막을 수 없는 추위가 느껴진다. 바깥이 아니라 가슴 안쪽에서 시작된 것 같은 한기다. 몸이 떨리고, 내 손과 함께 흔들린 불꽃의 음영에 방안의 모든 것이 술렁인 순간 나는 안다. 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 것인지 물었을 때 인선이 즉시 부인한 이유를.

피에 젖은 옷과 살이 함께 썩어가는 냄새, 수십 년 동안 삭은 뼈들의 인광이 지워질 거다. 악몽들이 손가락 사이로 새어나갈 거다. 한계를 초과하는 폭력이 제거될 거다. 사 년 전 내가 썼던 책에서 누락되었던, 대로에 선 비무장 시민들에게 군인들이 쏘았던 화염방사기처럼. 수포들이 끓어오른 얼굴과 몸에 흰 페인트가 끼얹어진 채 응급실로 실려온 사람들처럼.(p.287)



20241120서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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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년이 온다 -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지음 / 창비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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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마득히 먼 과거가 아니다. 원시시대도 미개사회도 아니었고 소통불가 문맹국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런데 일어난 비극. 활자로 그날에 접근하는 일조차 조심스럽기에 독자 역시 탄식하고 숨죽인다. 추스르고 눈물 맺히며 다시 글을 쫓는다. 동시에 앞장서 걸으며 기록하고 있는 작가에게 순간마다 빚진다. 『소년이 온다(창비, 2014, 216면 분량)』는 한강 작가의 여섯 번째 장편소설로 1980년 봄, 5.18 광주 민주화 운동이 배경이다. 배경이라는 낱말은 부적절해 보인다. 소설은 명백한 사건을, 역사의 뒤안길로 편입될 수 없는 고통을 지옥에서 죽음을 맞았거나, 살아서 지옥을 견디는 이들을 응시하기 위해 차례로 호명한다.


총 6장으로 구성된 소설은 장마다 다른 화자가 등장한다. 1장의 화자 동호는 집으로 돌아오라는 작은 형의 말을 뒤로하고 합동 분향소가 있는 상무관으로 향한다. 겁에 질렸던 동호는 쓰러진 친구 정대를 구하지 못한 죄책감에 숨이 쉬어지지 않는다. 찾아온 엄마도 돌려보낸다. “해 지기 전에 와라이. 다 같이 저녁밥 묵게.”(p.43)라는 엄마 말을 들으며 남았다. 2장은 정대의 혼이 죽은 자기 육신 곁에 머문채 “묻고 싶었어. 왜 나를 죽였지. 왜 누나를 죽였지, 어떻게 죽였지.”(p.52)라며 괴로워한다. 죽어서도 쉴 수 없는 그는 동호의 죽음을, 느닷없이 뛰쳐나오게 된 친구의 혼을 알아차린다.


3장 “일곱개의 뺨”은 상무관에서 시신을 수습하던 당시 고등학생 은숙의 5년 후 시점이다. 출판사에서 일하는 은숙은 번역자의 행방을 대라며 일곱 대의 뺨을 맞고 하루에 한 대씩 일주일만에 일곱 개의 뺨을 잊겠다고 마음먹는다. 그녀는 허기를 느끼고 먹는다는 일 자체가 치욕스럽고, 출판할 수 없게 된 희곡집이 아프고, 물줄기를 뿜는 광장 앞 분수대를 견딜 수 없다. 그녀는 연극 무대에서 그날 데리고 나오지 못했던 동호를 본다. 환상처럼, 생생하게.


4장 “쇠와 피”는 생존한 대학생이자 시민군 ‘나’의 시점으로 진행된다. 상무관에서 지휘했던 대학생 진수와 수감생활과 석방 이후의 삶을 일정 부분 공유하나 둘은 다시 삶과 죽음으로 갈린다. 김진수의 죽음에 증언을 요청하는 ‘선생’에게 그가 혼자서 겪은 일들을 그 자신에게서 듣지 않는 한, 어떻게 그의 죽음이 부검될 수 있겠느냐고(p.108) 전한다. 쏠 수 없는 총을 나눠 가진 아이들이 겪었던 일은 언어화의 한도를 넘어선다. “그러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잔인한 존재인 것입니까?”(p.134)라는 물음만 그대로다.


5장 “밤의 눈동자”는 43세가 된 선주의 시점이다. 선주는 증언자가 되어달라는 ‘윤’의 요청에 연락처를 알려준 성희 언니를 오히려 용서할 수 없다. 성희 언니를 만나기 위해 병원에 들어선 선주, 동호의 죽음에 책임을 느끼는 선주는 성희 언니에게 할 말이 있다. “죽지 마. 죽지 말아요.”(p.177) 이 말은 <작별하지 않는다>에 다시 소환된다. 6장 “꽃 핀 쪽으로”에서는 동호 엄마의 애끓는 서술이 이어진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열 살이었다.”(p.193)로 시작되는 7장 에필로그는 작가의 목소리다. 소년의 흔적을 찾아 그 도시로 돌아와 쓰기 시작하는 여정의 출발로 매듭짓는다.


“그녀에게 영혼이 있었다면 그때 부서졌다.”(p.89)고 은숙은 생각했다. 진수의 뒷모습을 보았을 때, 아직 어린애 같은 동호를 보았을 때 부서졌다. 유월의 분수대가 물줄기를 뿜을 때 햇빛에 부딪힌 물방울의 파편이 눈동자를 찔렀듯이, 그날을 통과한 이들에게 상이한 각도로 흠집 내며 부서졌고 부서뜨렸다. 소설은 그들의 이름을 차례로 부름으로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도록 경호한다. 기억하도록 새긴다. 시공간을 달리해도 과거와 현재, 동서양을 막론하고 잔인함과 폭력의 역사는 계속되어 왔음을 상기시킨다. “저건 광주잖아. 그러니까 광주는 고립된 것, 힘으로 짓밟힌 것, 훼손된 것, 훼손되지 말았어야 했던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p.207) 특정 명칭은 보편적 상징이 된다.


에필로그는 읽고 다시 읽었다. ‘너무 평범해 누구와도 혼동될 듯한 얼굴’을 가진 소년, 꽃 핀 쪽으로 가자고 엄마 손을 이끌던 소년은 어른들의 낮은 이야기를 통해서 작가에게 오기 시작했다. 우리에게 움직여 닿기 시작했고 저녁에 갇힌 이들을 생각하게 했다. 두려움에 떨며 깨어나게 하던 꿈은 <작별하지 않는다>에서도 이어지고 고통은 가라앉는 일 없다. 소설은 인간은 근본적으로 무엇인지, 무엇이어야 하는지 재차 묻는다. <Human Acts>라는 제목으로 미국에서 번역된 이 소설은 다음 문장으로 순순히 넘어가기 어렵다. 최소한의 말을 허락하는 압축과 부연을 덧대지 않는 여백으로 심정을 지키는 작품이기에 더 느리게 읽으며 행간에 머물러야 할 것이다. 계속 읽어보겠다.




책 속에서>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네가 방수 모포에 싸여 청소차에 실려간 뒤에.

용서할 수 없는 물줄기가 번쩍이며 분수대에서 뿜어져나온 뒤에.

어디서나 사원의 불빛이 타고 있었다.

봄에 피는 꽃들 속에, 눈송이들 속에. 날마다 찾아오는 저녁들 속에.

다 쓴 음료수 병에 네가 꽂은 양초 불꽃들이.(p.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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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극장 피카 그림책 17
아라이 료지 지음, 황진희 옮김 / FIKAJUNIOR(피카주니어)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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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워지기 시작하면 올해의 겨울 그림책을 기대하고 기다린다. 언제부터인가 나를 위한 선물은 습관으로 자리 잡았다. 올해의 크리스마스 그림책을 혼자서 아끼고 모으기도 한다. <마법처럼 문이 열리고>, <101마리 달마시안>, <나홀로 집에>를 그렇게 읽었고 프랭크 바움의 <산타클로스 이야기>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내게로 온 첫 번째 겨울 그림책은 아라이 료지의 눈 극장(황진희 옮김, 피카주니어, 2024, 2022, 40면 분량)이다. 예술대 졸업 후 광고와 무대 미술 분야에서 활약하고 재치 넘치는 이야기와 환상적 화풍으로 사랑받아온 작가는 21세기 일본 그림책의 거장으로 평가받는다. 눈 극장은 대가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임이 분명하다.

 

집이라는 공간은 안전하게 보호받을 수 있는 일상의 장소이지만 갈등과 불안이 잠재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친구와 함께 따뜻한 방에서 책을 볼 때, 그 책이 화사하고 아름다운 색으로 가득찬 나비 도감이라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 나비 도감은 아빠가 무척이나 아끼는, “소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책인데 아뿔싸, 이 책이 찢어졌다. 아이는 도감을 빌려주지 않았고 아빠를 생각하며 걱정한다. “아빠가 화를 내실까.” 아이는 더 이상 평온하지 못하다. 집을 나선 아이는 온통 눈으로 덮인 마을을 바람 날개 같은 스키를 타고 쌩쌩 미끄러진다. 나비를, 아빠를, 친구를 생각하다 아이는 그만 구덩이에 빠진다. 그 곳에서 아이는 불이 켜진 작은 극장”, “눈 극장을 발견한다. 현실 세계에서 판타지 세계로 이동한 아이가 눈을 감았다 뜨자 환상 세계는 다시 한 번 확대된다.

 

눈 극장에서 펼쳐지는 공연이라는 환상 자체가 이미 아이의 마음을 위로한다. 관객으로 머물지 않고 오늘의 무대에 초대되어 직접 공연에 참여함으로 내적인 힘을 강화하고 마음은 정화된다. 조용하게 시작된 노래는 점점 커지고 거대한 눈 팽이 형상을 갖춘다. 눈의 여왕도 노래를 듣고 있다고 할 때 화면 전체를 활용한 눈 팽이 위에 작지만 선명한 눈의 여왕이 지팡이를 짚은 채 내려다보고 있다. 텍스트와 이미지의 자연스럽고도 치밀한 연결이 독자의 상상을 기쁘게 채운다. 손톱만한 눈의 아이들을 허투루 지나칠 수 없다. 더 이상 이름 없는 눈송이, 생명 없는 결정체가 아니기 때문이다. 쏟아지는 눈 속에서 나비와 친구를 다시 떠올릴 때 아빠의 커다란 손으로 상징하는 도움은 외부에서 오지만 내밀한 체험은 빼앗기지 않을 기억으로 동심에 박힌다. 책은 절정을 지나 안전한 귀가를 준비하고 마지막 장면은 더없이 안온하다.

 

서사는 단순하다. 현실에서 판타지로, 다시 현실로 복귀하는 이야기. 세상 근심은 꿈으로 위로받기도 하고, 꿈은 희망과 가능성으로 가득 찬다. 시기적절한 도움과 너그러운 허용은 좋은 기억의 창고를 넓힌다. 앞면지와 뒷면지는 단색 배경에 스키를 타는 소년만 등장한다. 집을 나서는 소년과 집으로 돌아오는 소년을 의미하겠지만 소년은 한 뼘 자랐을 것이다. 타이틀 표지부터 이야기가 시작될 때 창으로 들여다보이는 두 아이가 궁금해진다. 이 그림책은 화려한 색의 향연이 압도적이다. 색색의 나비가 잔상으로 남아 하얀 일색의 눈 공연이 아닌 강렬한 원색의 폭죽을 터뜨린다. 누구나 한 번쯤 스노우 볼 안의 세상을 동경했을 것이다. 두꺼운 유리로 벽을 치고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 공간에 초청받는 행복을 잠시 만끽한다.

 

함께 보고 싶은 책이 생각이 난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존 로코의 <폭설>도 겨울이면 다시 꺼내보는 그림책이다. 말 그대로 폭설에서 살아남기를 사랑스러운 그림과 감동적인 이야기로 기록한다. 유리 슐레비츠의 <겨울 저녁>은 겨울 저녁의 빛이 얼마나 특별할 수 있는가 점진적인 변화를 놓치지 않는다. 겨울이 좋은 분명한 이유 하나는 그림책들 때문이다. 나를 꺼내세요, 다시 펼치세요. 서가에서 기지개 켠 책들이 겨울을 알린다. 올 겨울은 특별히 더 춥겠다는 반갑지 않은 예보가 들린다. <눈 극장>의 마지막 페이지처럼 뜨거운 코코아 한 잔과 빨간 스웨터, 그리고 겨울 그림책이면 슬기로운 한파 대비로 그만일 듯하다.

 


(신간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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맡겨진 소녀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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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허진 옮김, 다산책방, 2023, 2010, 104면 분량)는 한 소녀가 겪는 특별한 날들을 최대치의 밀도로 보여주는 짧은 소설이다. 하나의 문장과 다음 문장은 정밀하게 재단된 듯 꼭 들어맞게 맞물리고, 이야기의 경로에는 태양과 구름이 음영을 드리운다. 조짐과 전조가 가지런히 놓일 때도 있다. 좋은 예감이 지속되기도, 피하고 싶은 소식이 도착하기도 한다. 안도하며 잠을 깨기도 하지만 이상한 일은 일어나기 마련임을 받아들여야 하는 시기도 온다. 독자는 소녀의 시선을 통과하여 닿게 되는 삶의 눈부심과 아이러니가 이토록 생생했던가 감각하게 된다.

 

클레어 키건은 아일랜드 태생의 소설가로 첫 단편집인 남극(Antarctica)(1999)으로 루니 아일랜드 문학상과 윌리엄 트레버상을 수상하며 데뷔하였다. 25년간 활동하면서 5권의 책을 출간한 작가는 고국인 아일랜드를 넘어 세계적으로 기대를 받는 작가가 되어 호평의 한가운데에 있다. 국내에서는 <맡겨진 소녀>를 시작으로 <이처럼 사소한 것들(2023)>과 올해 <푸른 들판을 걷다(2024)>가 출간되었다.

 

소설 <맡겨진 소녀>는 영화화되어(콤 베이리드 감독) 베를린국제영화제 2관왕 등을 수상하였고, 국내에서는 <말없는 소녀>라는 제목으로 2023년에 개봉하였다. 소설과 영화의 일치율이 꽤 높고 대사도 똑같이 진행된다고 하여 영화를 보며 소설이 더욱 궁금해졌다. 그리고 아낄 필요가 있을까 싶음에도 책은 구입하고도 차마 곧바로 펴서 읽지 못한 채 시간을 지체했다. 활자는 필시 더욱 깊이 각인될 것이기 때문이다.

 

<맡겨진 소녀>라는 제목에는 이중의 무력감이 배어있다. 맡겨졌다는 피동성과 더 성장해야 할 독립 이전의 소녀라는 정체성은 위태로움과 불안을 야기한다. 독자는 소녀의 안위를 바라며 그녀의 여정에 동행한다. 소설의 구조는 단순하다. 주인공 소녀가 덥고 환한 어느 일요일 아침, 먼 친척인 킨셀라 부부의 집으로 가서 여름 한 철을 보내고 어느 일요일 저녁,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이야기다. 소녀의 시점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는 상상하고 경계하고, 바라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배우고, 경험하고 깨달아 알게 되기까지 반복되는 날들을 차곡차곡 쌓는다.

 

낯선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지내는 분리된 일상은 먹고 마시고, 자고 일어나고, 일하고 쉬는 보통의 날들로 이루어져 있지만 마치 두 번째 세상이기라도 하듯 다른 방식으로 채워진다. 작가는 이 다름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무엇이 다르고 그렇게 느낄 수밖에 없는지, 왜 다른지를. 이 차이는 처음과 마지막만큼이나 멀고, 점점 벌어지는 간격, 넓어지는 틈은 슬프고 아릿한 맛을 지닌 채 마지막 장면에서 폭발하는 정점에 이른다. 목숨을 담보로 권리를 요구하던 아일랜드 단식 투쟁 소식이 뉴스로 보도되던 시기를 배경으로, 어린이의 인권은 세상에 드러나지 않는 영역에서 어떻게 지켜질 수 있을지, 소설은 우리 모두의 유년을 조명한다.

 

소녀는 네 남매 중 한 아이였고, 다섯째 아이의 출산에 임박한 부모의 결정에 따라 먼 친척 부부에게 보내어졌다. 새로운 곳으로 향할 때도, 익숙한 집으로 돌아올 때도 소녀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소녀는 본능처럼 방어기제를 장착하였고 작동시킨다. 상처받느니 애초에 선물이 주어지지 않기를 바란다. 더 안 좋은 쪽을 기꺼이 감내하겠다는 태도는 좋아본 적이 없다는 현실 인식에 기인한다. 잠시 머물 킨셀라 부부의 집과 아이의 입장에서는 헤아리기 어려울 만큼 긴, 어쩌면 영원에 맞먹어 보이는 시간을 보낼 자기 집의 차이는 소설 곳곳에 배치되는데 다 비교할 수가 없을 정도다. 두 집의 주인이, 그들의 성정이, 말을 거는 의도와 질문이 내포하고 있는 압력, 또는 온기가 아직 어린 소녀에게 무차별적으로 감지된다.

 

 

한 소녀의 성장소설이라는 정리는 너무 편협한 요약이다. 성장하는 아이와 자라지 않는 어른, 희망을 가져도 될까요, 라고 묻는 아이에게 감히 답하지 못하는 어른을 본다. 혈연이고 가족이므로 당연시하는 무례함. 무례의 권리와 폭력, 신체적으로 가해지지 않더라도 이미 전방위적으로 은연중에 이루어지는 강압 아래서 살아남기는 개인별 미션이 된다. 살아남아서 좋은 어른이 되는 건 관심 영역에서 아직 멀다. 좋은 어른이라는 추상의 이름은 차치하고, 하지 않아야 할 말을 안 할 줄 아는 한 가지 미덕을 체화한 어른 되기는 가능할지에 대해 소설은 환기한다.

 

일관되게 짚어나가는 의 변주가 책에서 가장 주목하게 되는 지점이다. 아이의 부모와 킨셀라 부부가 사용하는 언어는 다르다. 소녀가 도착한 첫날, 처음으로 지적받았던 것도 바르게 대답하는 법이었다. 킨셀라 아주머니는 “‘가 아니야. ‘라고 해야지.”(p.27)라는 언급 후에 잘 이해했는지 확인한다. 들어보기 어려웠던 칭찬이 후렴구처럼 반복되는데 일상의 언어다. 착하지, 착하기도 하지, 정말 대단한 목청이었어. 격려하고 지지하는 언어는 진심에서 나오기에 자연스럽다. 널 잡는 남자는 아주 빠를 거다. 넌 다리가 기니까.(p.41) 기록이 어제보다 못할 것을 소녀는 알고 있지만 비교의 기준을 달리기했던 첫날로 옮겨 19초가 빨라졌다고, 꼭 바람 같다고 말한다. 칭찬할 기회를 빼앗기지 않는다.

 

이에 반해 소녀를 맡기고 가던 아버지의 인사는 불구덩이에 떨어지지 않게 조심해라, .”(p.21)였고, 대신 제대로 된 작별인사는 없었다는 생각에 아이는 의아하다. 아빠의 언어 습관에는 거짓말도 있다. 밀드러드 아주머니의 언어 또한 민망할 정도로 가차 없지만 칼과 같은 말을 던지는 이들을 우리 역시 현실에서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소녀는 첫날 알아차렸다. “여기는 새로운 곳이라서 새로운 말이 필요하다.”(p.25)는 걸. 새로운 말은 서서히 스며들었다. “저기서는 네가 날 업고 왔나 보다.”(p.74)처럼 아저씨가 건네는 말은 농담조차 유머가 있고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바닷가 밤 산책을 나갔던 날, 두 사람은 멀리 두 개밖에 없던 불빛이 세 개가 되어 깜박이는 걸 함께 본다.

 

소설은 말이 먼저일까 삶이 먼저일까, 그렇게 살기에 그런 언어가 체화되는지, 무심하게 상처를 주는 파괴적인 언어습성이 삶을 소리 없이 부수는지 성찰하게 한다. 또한 할 일이 산더미라 여유가 없다는 게 카드 속 노란 꽃밭에 있는 고양이처럼 무서운 표정으로 대해도 된다는 면죄부를 주지 않는다. 긍정이나 부정의 언어를 넘어 침묵의 지혜를 강조하기도 한다. “입 다물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아.”(p.73) 라는 아저씨의 말을 소녀는 체득하고 간직한다. 작가는 사람을 세우기도 하고 무너뜨리기도 하는 말의 문제, 삶을 대하는 태도의 문제를 반복하여 제시하고 소녀의 시선으로 흔들림 없이 새긴다.

 

작년 하반기에 참여했던 시립도서관의 글쓰기 수업에서 이 소설이 특히 인상 깊었다. 영화 감상 후에 이어진 교수님의 찬사는 꽤 직접적이었다. 정통 소설의 표준이며 현대 소설의 정점이다, 중편 소설의 최고 수준을 성취해 낸 빼어난 모범 텍스트다, 최소한 이십 년은 가꾼 문장력이며 작가의 엄밀한 자기 수련의 결과라고 평했다. 이 문장은 우리도 쓸 수 있다, 다음 문장도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그다음은 어렵다는 말씀에 작가를 향한 선망과 자신을 향한 좌절이 동시에 엄습하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아껴둔 끝에 편 작품에서 만나는 낱말들, 낱말이 품은 이미지, 치장하지 않고 본질만을 건져 배치하는 진행과 장면 전환, 대화의 순간들이 몰입케 할 뿐 아니라, 작은 분량 안에서도 놓치지 않는 풍경의 묘사는 인물의 심정을 고스란히 반영하는 이중의 역할을 해낸다. 촘촘함과 여백의 균형 또한 리드미컬하다.

 

헤어지는 아저씨의 마지막 당부는 책을 계속 열심히 읽으라는 것이었다. 곁에서 말해줄 수 없는 대신 책에서 들을 수 있기를 바란다. 작가는 소녀가 가져가는 세 권의 책으로 미래를 비춘다. 하이디처럼, 행복한 재회는 이루어질까. <눈의 여왕> 마지막에 카이와 게르다가 돌아온 집은 변한 것이 전혀 없지만, 그대로인 집은 모험을 겪고 성장하여 귀가한 아이들에게 더는 그대로가 아니다. 게르다의 따뜻한 동심은 카이를 구할 만큼 강했고 그들 앞에는 다른 시간이 시작될 것처럼 소녀에게도 다른 시간이 시작되고 있다. 킨셀라 부부에게 받은 사랑의 여운이, 특히 축복처럼 닿았던 말의 기억이 소녀를 지킬 것이다. 비록 이 순간 온 힘을 다해 이별의 아픔을 참을지라도 말이다. ‘함께한 나날’(p.83)눈앞의 날’(p.82)부터 다가오는 모든 날을 헤쳐 나가게 할 것이다. 뜨겁고 맑고 투명한 눈물 빛 작품을 추천한다. 독자 역시 자신의 유년을 비추는 작은 태양을 마음에 띄우게 될지도 모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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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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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문학동네, 2018, 196면 분량)은 흰 것들의 목록으로 시작한다. 작가가 흰 것에 대해 쓰겠다고 결심하고 처음 한 일은 목록작성이었다. 목록은 강보부터 수의까지 열다섯 가지이고 이들은 열병식을 치르듯 종으로 정렬한다. 태어나 몸에 감싸는 강보와 죽은 몸으로 입는 마지막 옷 수의 사이에 놓인 흰 것들은 고유한 묵직함으로 간격을 두고 선다. 둘 사이에 놓여 마땅한 즐거움과 괴로움, 보잘것없음과 벅참을 강보가 곧 관이었던 아기는 아무런 잘못 없이 누리지 못했다. 아무런 잘못 없는 느닷없는 죽음들은 이 도시와 저 도시에, 그때와 지금, 빛의 속도로 변하는 세상에서 한 치의 변화 없이 반복되고 있다. 목록을 보면 독자는 물들듯 나만의 흰 것을 헤아리게 된다. 투명에 가까운 흰과 재색에 가까운 흰도 있을 테고, 만져지는, 향기가 나는, 온기 또는 차가움을 전하는 흰 등, 각각 꼽은 흰이 그 사람만의 세계를 축조할 것이다.

 

작가가 구축한 세계는 3개 장으로 이루어진다. 1장인 에서 목록부터 시작하였으나 단어가 문장이 되는 일의 의미는 확신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날카로운 시간의 모서리에서 우리는 앞으로 나아간다’(p.11)고 선언한다. 달리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어머니로부터 태어나 두 시간 만에 죽었던 언니의 이야기를 듣고 자란 작가는 <배내옷>에서 이야기를 영원의 자리로 옮긴다. 글로 생명을 덧입은 아기언니는 2'그녀에서 작가의 감각을 빌려 육화한다. 도시와 인간의 세상을 경험하는 언니는 낯설고 온통 일회성인, 그러나 잊거나 빼앗기지 않을 삶을 산다. 소설에서 가장 많은 분량과 목록을 차지하는 2장에서 그만큼 마음은 기울고 흘러 고인다.

 

3모든 흰은 가장 짧은 열한 개 목록으로 구성한다. 의지를 세우고 다시 책 밖 삶으로 걸어나서는 뒷모습 같다. 3장에서 독립된 목록 제목으로 언니를 처음 호명한다. “언니가 있었다면, 생각하던 어린 시절이 있었다.”(p.122) 하며 문을 여는 한 편은 불가능한 자매의 일상을 꿈처럼 살아본다. 마지막 두 편은 작별모든 흰이다. 최선의 작별의 말은 죽지 말아요. 살아가요.”(p.133)라고, 말을 모르던 언니에게, 당신에게, 스러지던 무명의 모두에게 눌러쓰고, 책의 마지막 문장을 그 흰, 모든 흰 것들 속에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내쉰 숨을 들이마실 것이다.”(p.135)라고 맺는다. 나에게서 그녀에게로 다시 모든 이, 지금도 스러지고 있는 그들에게 하는 결연한 약속이다. 개인의 아픔에서 멈추지 않고 기꺼이 연대한다는 의지로 읽힌다.

 

책은 흰색 간지와 여백을 넉넉하게 품고 흑백 이미지를 가끔씩 보태며 책이라는 물성까지 하나의 주제를 위해 힘쓴다. 텍스트와 이미지와 구성이 목적을 향해 오롯이 복무하는 듯하다. 각각의 목록 아래 한 면부터 길게는 네 면 분량의 글을 담고 있는데, 한 편씩 떼어내도 그 자체로 시 같고, 지나온 페이지를 불러내 깊이를 한 뼘씩 더해가기도 한다. 독립적이면서도 밀착하고 있는 서사는 종이라는 평면에 기록되었으나 입체로 돋아난다. 과거와 현재, 이곳과 저곳(한국과 폴란드), 이미 죽은 이들과 살아남은 자들, 살아있으나 죽어가는 이들, 영혼과 실존이 혼재하고 서로를 응시한다. 떨어진 장소에서 유사한 아픔을 목도하면서 파괴된 두 도시, 두 곳에서 얼마나 다른 방식의 애도가 이루어졌나, 아니 그 자체가 없었던가 병치하는 <>(p.108~109)은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다.

 

개정판에서 작가는 모국어에서 흰색을 말할 때, ‘하얀이라는 두 형용사가 있다. 솜사탕처럼 깨끗하기만 한 하얀과 달리 에는 삶과 죽음이 소슬하게 함께 배어 있다. 내가 쓰고 싶은 것은 책이었다.”(p.186)라는 말을 추가했다. 책 전체가 작가의 말이라고 했던 초판 발행 당시와는 달리 귀중한 힌트가 보태졌다. 인간은 보편적으로 화사하고 돋보이는 하얀에 대해 말하고 싶을 것이다. 아마 더 수월할지 모른다. 그럼에도 기억하고 기념하겠다는 의지를 벼려서 흰을 호명하는 일은 아프지만 아름답게 느껴졌다.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의 편에 서겠다는 작가의 의지가 숭고하다. 내밀한 목소리가 알알이 박힌, 고요하지만 추동하는, 차분하지만 여운 깊은 소설 <>을 추천한다. 계속 읽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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