픽션들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5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송병선 옮김 / 민음사 / 201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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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로즈의 계단, 뫼비우스의 띠처럼 무한히 계속되는 시간, 장소, 공간의 개념을 보르헤스의 우주와 미로에서 엿보게 된다. 보르헤스의 글은 지면에 인쇄된 문자로 대면할 때 그와 동시에 연거푸 펼쳐지는 무대, 휘어지는 소용돌이, 활동사진 같은 이미지로 이중 생성되는 듯하다. 처음 읽었던 보르헤스는 1992년 황병하 번역본이었고 빛바랜 페이지에는 감탄의 흔적만 남아있다. 다섯 권 전집을 한 번에 구입하였으나 <칼잡이들의 이야기>97, <셰익스피어의 기억>98년과 같이 단번에 읽어내지 못했다는 건 의아하다. 라틴 아메리카의 천재를 넘어서 세계문학사의 천재, 인간 백과사전 등 내게는 추앙과 경배의 사이에 위치한 작가였기에 범접불가는 오히려 범접을 미룰 핑계로 작용했다. 후에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강력한 인물인 부르고스 사람 호르헤에 투영되었을 때 그의 이름은 다시 한 번 불멸의 상징처럼 다가왔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호르헤 프란시스코 이시도로 루이스 보르헤스)는 아르헨티나 태생이었으나 영국출신 친할머니의 영향으로 영국계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모국어인 에스파냐어보다 영어를 더 먼저 사용했던 유년기의 이중 언어체험이 훗날 세계시민적 사고방식에 결정적 영향을 주었다.(이현우 재인용) 9세에 오스카 와일드의 동화를 영어로 번역해 신문에 투고했다는 일화도 놀라움을 자아낸다. 가계의 유전적 질환으로 시력이 약화되던 그는 변호사 일을 그만두게 되었고 22세에 첫 시집을 출간한다. 신문과 잡지의 편집자를 거쳐 시립도서관 사서로 근무하였으나 아르헨티나 정치 격변과 함께 실직하고 강연과 집필을 이어갔으며 훗날 시력을 거의 잃은 상태에서 국립도서관장으로 임명된다. 자신이 관리하는 수십만 권의 책을 본인은 읽을 수 없다는 소설같은 작가의 삶은 보르헤스적 아이러니이자 아픔으로 여겨지는데 정작 본인은 이와 같은 명명을 거부하고 축복의 시”(1958)에서 입장을 분명히 한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픽션들(송병선 옮김, 민음사, 1944 ,2011, 264면 분량)은 거침없는 상상으로 인간계의 삶을 간파하고, 일상의 무심한 균열과 그로 인한 충격을 정교하게 글로 번역한다. 한 나라의 언어를 다른 나라의 언어로 치환하는 번역이 정확한 이해를 목표로 한다면 들어보니 있음직한데 보편적인 감각으로는 수용 불가능한 경계와 경계 안팎의 주제는 또 다른 의미의 번역이 요구된다. 독자는 알고 싶다는 열망과 호기심을 띠처럼 두르고 어쩌면 알게 될 가능성을 낙관하며 알게 된 이후의 쓸모에 연연하지 않은 채 잠시 맺은 휴전, 평화의 땅 입성을 감격하게 될 것이다. 작가는 그런 독자를 위해 친절한 번역에 나섰다. 당신이 잠든 사이에 꿈과 잠, 삶과 죽음, 현재와 영원을 혼미라고는 없는 결벽의 정신이 무엇 하나 놓치지 않는 눈으로 그려 보인다.

 

픽션들1941년 발표한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1944년 발표한 '기교들'에 수록된 열일곱 편의 단편 소설을 모은 소설집이다. 작가는 두 갈래로 갈라지는 오솔길들의 정원의 서문에서 유명한 신념을 밝히는데 방대한 분량의 책들을 쓰는 행위, 그러니까 단 몇 분 만에 완벽하게 말로 설명할 수 있는 생각을 장장 오백 여 페이지에 걸쳐 길게 늘리는 짓은 고되면서도 별로 도움이 되지 못하는 정신 나간 짓이다.”(p.10)라고 말한다. 그는 이 수법을 사용한 저자를 열거하며 더 분별력 있고, 더 요령 없고, 더 게으른 나는 가상의 책 위에 주석을 쓰는 편을 택했다.”(p.10)고 주석 격인 두 작품을 가리킨다. 보르헤스가 단편만을 썼다는 건 독자로서는 허들을 약간 낮추리라는 희망을 잠시 품게 한다. 부질없는 희망이지만 잠시가 어디인가.

 

화자는 비오이 카사레스와 일인칭 소설쓰기에 대한 논쟁을 벌이던 중 우크바르의 어느 이교도 지도자가 말한 격언의 출처를 확인하기 위해 백과사전을 추적하나 계속 실패한다. 그는 <틀륀 제1백과사전 11(후략)>을 발견했을 때 황홀함을 느끼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북아메리카와 남아메리카, 유럽의 도서관들을 뒤죽박죽으로 만들어 놓았지만 허사였던 것을 인정한다. 차라리 다 그만두고 그 방대한 책들을 새로 만들어버리자는 자조적 제안은 한 세대의 틀륀주의자들만 있어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p.20)이라며 틀륀의 정체, 틀륀의 우주관을 살피기 시작한다.

 

틀륀의 형이상학자들은 진실, 심지어 그럴듯한 진실조차 추구하지 않고 오직 놀라움만 찾는다거나, 틀뢴의 어느 학파는 시간을 부정하고 다른 학파는 모든 시간은 이미 지나갔고 우리 삶은 기억 또는 반영이라고, 다른 학파는 우주의 역사가 하급 신의 필치라고, 어느 학파는 우주를 암호문에 비유하고 어느 학파는 모든 사람이 사실상 두 사람인 근거를 밝힌다. 백과사전, 문학 영역과 표절, 문학비평, 사물의 복제와 망각과 구원의 가능성을 거론한다. 첫 작품 <틀뢴, 우크바르, 오르비스 테르티우스>에 대한 스케치다. 논리는 정연하고 파격은 예리하며 꼭 들어맞는다. 도입을 막 지나면서 여기까지 어려웠다 싶으면 그 다음부터 더 어려워질 것이다. 거기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실제와 가상, 현실과 창작을 뒤섞는 능란함에, 가끔 발견하는 풍자적 요소에 보르헤스를 읽는 기쁨이 있다.

 

이렇게 열 일곱 편을 되짚는 행위는 쓰는 사람에게만 유익(정신을 잠시라도 가지런히 해본다는 의미에서)이기에 핵심을 정리해야 한다. 그 어려운 걸 해내리라는 보장이 없고 심지어 줄거리 요약도 백번 의심해야 한다. 보르헤스는 도서관의 인간화이고 미로를 그리나 본인이 가장 깊은 미로, 미로를 숨긴 미로, 우주의 모양을 한 미로이기에 이를 주제로 부각하는 작품은 더욱 주목하게 된다. <피에르 메나르, 돈키호테의 저자>는 가상의 소설가 피에르 메나르 사후 그에 대한 기억을 훼손하는 오류들을 수정하고자 필자는 눈에 보이는작품과 다른 작품, 즉 끝없이 위대하며 미완성이기도 한 작품을 언급한다.

 

끝없이 위대한 축에 포함되는 후자는 돈키호테1부의 9장과 38, 그리고 22장의 일부로 이루어져 있다.(p.56그는 또 다른 <돈키호테>를 쓴다는 쉬운 길을 선택하지 않고 <돈키호테> 자체를 쓰기로 한다. 그의 도전은 언어와 신앙, 역사까지 철저하게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되는 첫 번째 시도를 지나치게 쉽다는 이유로 그만두고 대신 피에르 메나르로 계속 존재하면서 피에르 메나르의 경험을 통해 <돈키호테>에 이르”(p.58)기로 한다.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p.64)고 생각한 그는 허무주의적 견해를 전복하여 차라리 헛된 행위에 먼저, 기꺼이 투신한다. <원형의 폐허들>에는 꿈꾸는 사람에게 명령하자 꿈꾸는 사람의 꿈속에서 꿈꾸어진 소년이 잠을 깬다.(p.73) 내가 실체라는 건 쉽고 단순한 진리같다. 시간과 공간이 무한하게 펼쳐지더라도 그 중심은 자신으로부터 시작되고 비루할지라도 의미부여의 주체가 라고 인식하지만 그 또한 깨어진다. <바빌로니아의 복권>은 상상력에 경탄케 하며 일면 카프카를 상기시킨다.

 

상상을 더욱 견고하게, 철두철미하게 쌓아올린 작품이 <바벨의 도서관>이다. 작가의 인장과도 같은 작품이 아닐까. “다른 사람들이 도서관이라고 부르는 우주는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부정수, 아니, 아마도 무한수로 구성되어 있다.”(p.97)라는 첫 문장으로 시작하여 결말에 다가갈 때 도서관을 괄호로 슬쩍 묶어 다시금 정의 내린다. “존재 가능한 언어에서는 n이라는 숫자는 동일한 단어를 사용한다. 몇몇 언어에서는 도서관이란 상징이 육각형 진열실들로 이루어진 영원하고 도처에 존재하는 체계라는 정확한 정의를 수용한다. 하지만 도서관이나 피라미드혹은 그 어떤 것이기도 하다. 그리고 도서관을 정의 내리고 있는 앞의 일곱 단어가 다른 의미를 띠기도 한다. 내 글을 읽고 있는 당신, 당신은 내가 쓰는 언어를 이해한다고 확신하는가?”(p.108)

 

한 작품씩 읽어나갈 때 드물게 확신하는 순간조차 모호한 게 사실이다. 그럼에도 모호성은 풍요로움이라고(p.63) 믿어본다. 최대한 집중해서 부분적으로는 반복해 읽으며 맥락을 파악하려 애쓰나 몇 문장은 맥락과 상관없이 페이지에서 따로 떼어내 이야기 나누어 보고 싶다는 욕구를 일으킨다. 이런 지점은 도처에 지뢰처럼 또는 케이크처럼 놓여있다. 황병하 번역본의 꼼꼼한 각주는 이 책을 읽으면서 참조할 때 안내서를 지참한 듯 독서의 또 다른 즐거움을 허락했다.

 

<장미의 이름>에서 진리의 원수를 파괴와 망각으로 정하고 진리를 지키고자 집착했던 수도원의 장서관 사서들은 어떤 접근도 허락하지 않는 미궁의 외관을 취하고 있는 도서관을 지킨다. 누구나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 헌신하고 불가능하다는 한계인식 앞에 좌절한다. 미아처럼 불안한 의식에 구원은 가능할지 작가는 차분히 헤아린다. <기억의 천재 푸네스>를 빠뜨릴 뻔했다. 노력해도 모호하고 성장과 멀어지는 둔각의 정신이라는 게 때론 감사의 이유가 된다. 푸네스와는 또 다른 천재 보르헤스를 권한다. 몇 작품은 신간으로 재구매해서 다시 읽어보고 싶다. 물론 반복해서 읽어도, 읽고 낭독해도, 단편별로 기록해보거나 토론을 해도 거울이 만들어낸 거짓된 깊이가 아닌 함께 찾아들어간 깊이를 만끽하게 될 것이다.

 

 



 책 속에서>


모든 지적 활동은 결국 무용지물이 되고 만다. 하나의 철학 이론은 처음에는 세상을 그럴듯하게 묘사한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 그것은 철학사의 한 장-만일 한 단락이나 하나의 고유 명사로 변하지 않는다면-으로만 남게 된다. 문학에서 이런 소멸 현상, 즉 적절성의 상실은 더욱 잘 알려져 있다. 메나르는 내게 돈키호테가 무엇보다도 재미있는 책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 그것은 애국주의의 축배이며 문법적 오만함이고, 호화롭고 요란한 판본을 낼 기회일 뿐이다. 영광이란 것은 일종의 몰이해이며, 어쩌면 최악의 몰이해일지도 모른다.(p.64)

 

퀘인은 항상 독자란 이미 멸종된 종족이라고 주장하곤 했다. “잠재적이든 실제적이든, 작가가 아닌 유럽 사람은 단 한 명도 없거든.”이라고 그 이유를 설명하곤 했다. 또 그는 문학이 줄 수 있는 많은 행복 중 최고의 것은 상상이라고 말하곤 했다.(p.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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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읽고 마음을 쓰다 - 3분 응시, 15분 기록
즐거운예감 아트코치 16인 지음 / 플로베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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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예감이 예술을 매개로 마법처럼 실현되었다. 예술 감성교육 플랫폼 즐거운 예감에서 배우고 성장한 아트코치들은 3분 응시, 15분 기록의 순간들을 차곡차곡 모아 아름답게 펴냈다. 그림을 읽고 마음을 쓰다(플로베르, 2024, 328쪽 분량)16명의 즐거운 예감 아트코치가 꺼내놓는 마음의 지문같은 기록이다. 웃을 때만 즐거운 건 아니다. 기쁘고 고통스럽고 슬프고 사랑스런, 애끓는 감정들이 미묘한 방식으로 매끄러운 표면을 뚫고 솟구치는 순간은 우리 자신을 놀라게 하는 동시에 정화시키고 결국 안심케 한다. 아트코치 16인의 기록은 그 과정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독자는 한 점 그림과 그 그림으로 쓴 글 한 편에 빠져들고 나오기를 반복하다보면 시간이 흐른 줄 모른 채 마지막 페이지에 이른다.

 

즐거운 예감 대표이자 예술 교육자 임지영은 프롤로그에서 삶에서 소중한 것들이 예술을 통해 그득히 길어 올려진다고 말한다. 그 소중한 것들은 1부에서는 먼저 나를 치유하는 그림 글쓰기2부에서는 우리를 치유하는 그림 글쓰기로 나아가고 각각 다섯 개 소주제 아래 다정하게 놓인다. 첫 번째 그림은 너무도 유명한 뭉크의 <절규>. 저자 김승호는 목소리가 소거된 듯한 이 남자의 외침에 걸음을 멈추고 위로 받는다. 고통의 본질을 이해시키는 그림으로 고통을 성장의 바탕, 희망의 모색이라고(p.23) 재정의 할 때 명화는 더 이상 멀리 존재하지 않는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듯 다양한 도안으로 활용되며 패러디 그림으로 희화화되기도 하는 명작이 오롯이 작품 본연의 깊이로 들어갔을 때 한 사람을 일으키고 독자의 마음까지 곧추 세우니 그림 감상은 휘발되는 무엇이 아니고 삶에 밀착한다.

 

김현수는 클림트의 대표작 <키스>를 꼽지 않았다. 그녀는 머리와 마음이 복잡하면 <아티제 호수>를 보며 복잡한 심경들을 그 오묘한 물결에 흘려보낸다고 전한다. 갑자기 청량해지면서 지금 내 마음에 알게 모르게 들어찬 짐이 가벼워지는 느낌을 받는다. 덕분에 발견한 그림이 마치 나의 성취인양 뿌듯해진다. 에곤 실레의 <이중 자화상>은 예술교육 리더과정의 상징과도 같은 선물이다. 이 그림으로 쓴 학생들의 글도 보았고 참여자로서도 써 보았지만 저자 이혜령은 또 다른 이야기를 전한다. “인정받는 수준에 도달하기 위해 나의 얕음이 경박함으로 비치지 않도록 노력했다."(p.41)는 부분을 읽으면서 말도 안됩니다, 라는 추임새를 넣었지만 나는 여전히 여기저기 얕게 파고 있다. 그러다 새로운 나를 대면하는 순간이 기쁘다.“(p.43)는 맺음에 뭉클해진다. 나의 두려움이 조금은 잦아든다. 어차피 얕게 파게 될 텐데 칸트를, 키에르케고르를 지금 시작해도 되겠어? 너 이러려고 시작하니 무책임하게, 라는 내면의 목소리에게 답한다. 얕게 파도 된대!

 

최영미의 <또 하나의 세계>는 저자 박은미에게 완벽한 또 하나의 세계가 어떻게 시작되었는지 멋진 증거를 간직한다. 최병일 저자는 김경민의 <돼지엄마>에서 고단했던 시절 기꺼이 희생했던 이 땅의 누이들을 기억하고 여전히 헌신의 아이콘인 어머니를 떠올린다. 어머니라는 불멸의 이름을 저자 윤석윤은 정보경의 <어미, 분홍비>에서 뜨겁게 맞는다. ”어머니의 웃는 모습이 좋아서 집에 가면 과식을 했다.“(p.265)는 말에 목이 메이지 않는 이는 없을 것이다. 저자 이화숙이 구채연의 <선물>에서 끌어낸 크리스마스 이야기는 어머니가 받게 되실 첫 번째 크리스마스 카드를 상상케 한다.

 

이렇게 쓰는 서평은 반칙이다. 끝이 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림을 읽고 마음을 쓰다그렇게 하나만 더, 한번만 더 말하고 싶게 하는 책이다. 책은 한 점의 그림을 응시하고 써낸 결과물이 그토록 많은 시간, 그토록 짙은 이야기를 품을 수 있는가에 경탄케 한다. 우리 안에 있는 익숙한 장면, 모호한 경계, 바로잡거나 화해하거나 보태거나 덜어내어야 할 지점들, 미지의 가능성까지 한 점의 그림과 보고 쓰기로 한 진심 앞에서 단정한 온점을 허락한다. 그 온점은 아무리 작아도 단단한 디딤돌이 된다. 책을 읽고 나면 귓전에 미세한 울림이 남는다. 그래도 괜찮아, 이제 괜찮아, 라는 말이다. 여러 번 여러 목소리로 반복된 듯 하고 이 말은 독자 역시 공감케 만든다. 투명한 마음으로 써낸 글을 모아 독자에게 닿게 해주어 감사하다. 예술과 삶이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몸소 보여준 책으로 마지막 페이지를 덮고 나면 독자는 내가 선택한 그림과 이야기로 계속 이어지는 상상을 할지 모른다. 친근하게 말을 거는 그림 앞에서 잠시 멈춰 서게 될 모두에게, 마음으로 꼭 끌어안고 이야기를 시작할 모두에게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바로 그 순간에 예술이 필요하다. 미술관에 가서 느리게 걸으며 삶의 속도를 줄인다. 그리고 내 마음에 들어오는 그림 앞에 머문다. 그렇게 응시하며 그림 앞에 멈춘 나를 기록한다. 그 기록에는 지금 나의 마음, 현재 나의 상태, 잊었던 소중한 것이 다 들어 있다.(p.18, 임지영)

 

작가도 그녀의 어머니도 나도 모두 자신만의 점을 찍고 있다. 조금 느려도 남들과 달라도 괜찮다. 오늘 용기 내어 찍은 점 하나가 우리의 삶을 멋진 예술로 만들 테니까.(p.65, 김예원)

 

지금까지 세상과 잘 지내려고 노력했다. 앞으로도 예술을 통해 이성과 감성의 균형을 유지하면서 건강하고 행복하게 미래를 가꿔나갈 것이다. 그것이 미래의 나를 대접하는 방법이다.(p.155, 이영서)

 

오스카 와일드는 우리는 모두 시궁창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은 별빛을 바라볼 줄 안다고 말했다. 별빛이 있는 줄도 몰랐던 나는 고개를 들어 별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되었다. 그림 앞에 서성이다 소녀에게 조용히 속삭였다. “조금만 기다리렴. 너는 별빛을 볼 줄 아는 사람이 될 테니···.”(p.199, 우신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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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노는 중입니다
김미경 지음 / 바이북스 / 202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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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렘과 설레발은 한 글자 차이지만 의미는 꽤나 간극이 크다. 무척 서두르면서 부산하게 구는 행동은 설레발의 사전적 정의다. 많은 경우 타인의 시선을 염두에 둔다. 설렘은 마음이 가라앉지 않고 들떠서 두근거리거나 그런 느낌을 뜻하는데 기꺼이 설렘을 감당하기 위해 일정분량의 내공은 필요하다. 물론 초점은 자신의 내면을 향하고 그곳에서 작동한다. 김미경의 엄마는 오늘도 열심히 노는 중입니다(바이북스, 2024, 254면 분량)는 설렘주의 에세이라는 단서를 달고 그 방법론을 독자에게 제안한다. 무감한 날들이 일상이라는 이름으로 습관이 되었다면 들떠서 두근거려본 기억은 한참 뒷걸음쳐야만 상기하게 될 텐데, 설렘의 정점, 정점의 연속이 특별한 일 없는 매일을 대체할 수 있다면 그 힌트가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백세 시대에 공평하게 다가오는 인생 2막을 앞두었을 때 더욱 귀가 솔깃해진다.

 

어려서부터 책이 좋았다로 시작하는 책날개의 저자 소개는 이 책을 선명하게 요약한다. 공무원이 된 문학소녀는 아내도 되고 엄마도 되었지만 잠시 멈춤의 경계에서 나의 진면목 재발견하기라는 자아 찾기를 시작한다. 시작한다고 썼지만 알아차리는 순간에 이미 미션은 진행되고 있었고 좋아했지만 미루거나 잊었던 일들, 조각조각이 모여서 온전한 나로 맞춰지는 퍼즐은 시간과 경주하듯 일사불란하게 이루어진다. 때를 아껴 읽고 나누고 쓰는 일은 책을 좋아하는 독자라면 아마도 진한 동지의식을 발동시킬 것이다. 저자가 엄마를 어떻게 기억할 것 같느냐고 물었을 때 아이는 열심히 사는 엄마라고 답했는데 열심히 논다’(p.24)는 말을 더 원했는지 모른다고 전한다. 열심히 놀았던 흔적은 1, ‘인생 2막을 시작하는 당신에게보내는 격려에서 시작하여 5부의 멋진 마무리를 준비하는 당신에게화답하는 응원까지 꼼꼼하게 담겨있다.

 

소중한 보물로 꼽은 컴퓨터 카페와 5년 다이어리가 특히 인상 깊다. 독서 모임과 함께 시작하여 꾸준히 발췌와 단상을 모았다니 보물창고가 따로 없다. 초독과 재독의 차이에 기뻐하고 기록하고자 하는 의지를 다져온 시간은 이미 완성형 행복회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적극적으로 반응하고 신뢰하는 루틴은 모퉁이를 돌았을 때 나타날 장면을 꿈꾸게 하고 이루게 만든다. 책과 영화, 그림과 악기를 비롯한 예술을 어떻게 향유하고 나의 삶에 안착시켜 왔는가의 발로 뛴 기록이 힘 있고 울림이 있는 이유다. 독자는 어떤 책의 제목에, 어떤 그림에, 책과 글로 맺어진 벗들과의 시간에 함께 빠져든다. 자연스레 아직 만나지 못한 책과 영화 목록은 또 한 번 늘어가고 기억 속에 오래된 작품은 다시 꺼내어 보겠다고 의지를 다지게 한다.

 

관계 맺기는 시간에 비례해서 쉬워지는 일이 아니고 가까운 사이라고 강권할 수 없는데 추모의 방법을 제안하거나 기억에 잠든 이름들을 불러낼 때에도 책과 시간은 오히려 지팡이가 되어준다. 소주제 마다 부담 없는 분량으로 생생하게 포착하는 글은 저자의 진심이 생기로 닿는다. 우정은 어디서나 엔진이 되는 법, 민대희 작가의 다정한 작품 두 점도 책에 온기를 더한다. 에필로그와 부록은 저자의 어머니를 초청한다. 엄마와 딸의 글이 닮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매듭을 단단하게 묶은 저자에게 축하의 말을 전한다. 무엇이 우리를 특별하게 만드는지 평범하지만 아름다운 지혜를 공유하는 책으로 일독을 권한다.


책 속에서>

나에게 논다는 것은 살아 있음을 느끼는 행위다. 끊임없이 보고, 배우면서 정체되지 않는 나를 보며 내가 살아있음을 느낀다. 사소한 것에서 행복을 느끼는 건 내 삶의 질과 행복지수를 높인다. 열심히 읽고 쓰며 뭔가를 배우는 내 모습에서 단단해진 자존감을 본다. 남과의 비교에서 많이 멀어지고 나의 만족에 최선을 다한다. 이런 가지만족은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기도 한다. 누가 무엇을 하든 그건 그 사람 몫이고 나는 내 몫의 삶을 산다는 당당한 자부심은, 내가 놀기 시작하면서 생긴 부수적이지만 아주 중요한 부분이다.(p.163)



(서평단-출판사 도서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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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다리 아저씨 푸른숲 주니어 클래식 4
진 웹스터 지음, 김선영 옮김 / 푸른숲주니어 / 202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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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책은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처음 읽던 순간의 즐거움을 그대로 간직한다. 할머니 댁 책꽂이에서 발견했던 첫 번째 키다리 아저씨는 전집 중 한 권이었고, 묵직한 느낌의 꽤 튼튼한 내지가 기억나고, 글에 한 번 그림에 한번, 두 번씩 감탄하느라 몰두해 읽었다. 그 후로 <어린왕자><빨간 머리 앤>을 모으듯이 몇 권의 키다리 아저씨를 수집한 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진 웹스터의 키다리 아저씨(김선영 옮김, 푸른숲주니어, 2024, 1912, 256쪽 분량)는 고아 소녀 제루샤 에벗이 후원자인 키다리 아저씨에게 보내는 편지모음으로 서간체 문학이면서 일인칭 성장 소설이다. 마크 트웨인의 조카손녀인 진 웹스터는 학창시절부터 글쓰기에 열정을 보였으며 재학 시절에 창작한 단편 모음집 패티가 대학에 갔을 때가 성공하자 키다리 아저씨를 발표 후 속 키다리 아저씨도 출간하였다. 인권에 대한 작가의 관심은 작품에도 드러나는데 독자는 키다리 아저씨 외에 또 다른 수신자가 되어 제루샤의 대학생활 4년과 1900년대 초기의 사회상을 보게 된다.

 

제루샤 에벗은 후원자인 가칭 존 스미스 씨 앞으로 한 달에 한 번 감사 편지를 쓴다는 의무를 수행한다. “키다리 아저씨께로 시작하는 편지는 폐쇄적인 단체 생활에서 처음으로 벗어난 자유로움과 놀라움, 설렘과 기대, 염려와 다짐을 솔직하게 담고 있다. 자신에게 주디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다른 친구들과의 간극을 줄이기 위해 규칙을 정하고 실천한다. 주디의 열정은 전염성이 있어서 언급하는 책의 제목에 한 번 더 주목하게 만들고, 학습과 수행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당면한 일은 비록 마뜩찮을 경우에도 성의를 다할 때 주디의 입장을 상상케 한다. 주디를 빛나게 하는 가장 큰 요인은 아마도 성의 있는 태도와 낙관주의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엄청난 기쁨이 아니라 소소한 것들에서 얻는 즐거움이지요. 저는 행복의 진정한 비밀을 발견했어요. 바로 현재를 사는 거예요. 과거를 영원히 후회하지도 말고, 미래만 바라보지도 말고, 바로 이 순간에서 얻을 수 있는 것들을 최대한 많이 가지는 걸 말해요.”(p.177)라는 말에서 보듯이. 일상의 편지글인 만큼 크고 작은 에피소드가 이어지는데 개성있는 두 친구이자 룸메이트이기도 한 샐리와 줄리아는 물론, 샐리의 오빠 지미와 줄리아의 삼촌인 저비스 팬들턴과의 관계 맺기는 자연스러우면서도 필요한 긴장을 제공한다.

 

독자는 주디를 보면서 최선을 다하는 일이 그 자체로 아름답다는 점, 선한 영향력은 애쓰지 않아도 퍼져나간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현상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는 대신 원인을 질문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일도 마찬가지다. 소설은 일정 부분 작가 자신을 투영하고 있는 주디의 목소리를 빌려 여성 참정권이나 아동 복지, 다양한 차별의 문제를 지적한다. 가독성 높은 제루샤 에보트의 성장담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이라면 읽고 쓰는 묘사들이다. 특히 글쓰기에 매진하는 모습이 꾸준히 그려졌으며, 선명한 목표를 가지면서도 목표에만 매몰되지 않는 주디는 은근한 도약을 이루어낸다. 주디의 성장이 마치 나의 성장처럼 이입되면서 뿌듯함이 차오를지도 모른다. 물론 키다리 아저씨의 정체를 알게 되는 마지막 하이라이트도 고전적 명장면이다. 키다리 아저씨는 백 년이 지났지만 연극과 뮤지컬, 영화와 애니메이션까지 만날 수 있는 선택의 폭이 넓다. 그래도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작가의 삽화를 곁들여 읽는 이 최고이지 않을까. 꼼꼼한 각주와 유익한 해설로 깊이를 더한 푸른숲 주니어 판본은 애독자라면 한 번 더 찾아볼만 할 것이다.

 


 

책 속에서> 

 

저는 하루 종일 해가 지기를 기다려요. 해가 지면 우선 방문에 방해하지 마세요.’라고 쓴 종이를 붙인답니다. 그러고는 포근한 빨간색 가운으로 갈아입고 폭신한 슬리퍼를 신은 다음, 쿠션을 잔뜩 쌓은 소파에 기대어 앉은 채 침대 옆 탁자의 등을 밝혀요. 그다음에는 책을 읽고 읽고 또 읽어요. 한 권씩으로는 모자라서, 한 번에 네 권을 쌓아 두고 동시에 읽는답니다. 지금은 테니슨의 시집과 <허영의 시장>, 키플링의 <산중야화>······.그리고 웃으시면 안 돼요. <작은 아씨들>을 읽고 있어요. 알고 보니 이 학교에서 저만 <작은 아씨들>을 안 읽었더라고요.(p.46)

 

정말 그래요. 세상에는 행복한 일이 참 많아요. 갈 수 있는 곳도 많고요. 자기 앞에 주어지는 것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마음만 있다면요. 여기서 비밀은, 바로 유연한 태도예요.(p.153)

 

아름다운 풍경과 넉넉한 음식, 아늑한 침대, 원고지 뭉치, 그리고 잉크 한 병······. 세상에 뭘 더 바랄까요?(p.225)

 

 (출판사 도서제공-서평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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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섯째 아이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7
도리스 레싱 지음, 정덕애 옮김 / 민음사 / 199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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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의 다섯째 아이(정덕애 옮김, 민음사, 1999, 1988, 191쪽 분량)는 꿈의 실현이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있고 붕괴는 얼마나 손쓸 틈 없이 진행되는지를 보여준다. 사랑이 결혼으로, 안락한 집과 자녀로 이어지는 선순환은 타협하지 않고 추구할 만한 가치라 여겼다. 그러나 다섯째 아이는 가까운 미래, 먼 미래에 대한 계획과 꿈, 예측 가능한 삶, 그 안에서 누릴 소소하지만 빛나는 행복이라는 궤도를 끊고 이탈하게 만든다. 확신은 의심으로, 질문으로 대체된다. 내가 해리엇의 입장이었다면 어떠했을까, 데이비드의 행동은 최선인가, 벤은 위험한 인물인가, 그것은 누구의 잘못인가, 도울 방법은, 다른 선택지는 무엇일까 멈추지 않는다.

 

도리스 레싱은 88세로 최고령 노벨 문학상을 수상(2007)한 영국의 작가이다. 레싱은 계급, 인종, 성별의 격차로 빚어진 인습과 폭력, 억압에 평생 저항했으며 공산당에 가입하는가 하면 아파르트헤이트 저항 운동, 반핵 운동 등 현실 정치에도 목소리를 높인 지식인이었다. 작가는 다섯째 아이를 두 가지 글, 유전자와 관련된 인류학자의 글과 한 어머니의 수기에서 착안하여 집필했음을 밝혔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은 천생연분’(p.12)이었다. 성장 배경과 영국의 계급제도라는 막강한 잣대’(p.26)를 놓고 볼 때 차이가 현격할지언정 둘은 이야기가 통했다.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았던 해리엇과 자신이 어떤 여성을 필요로 하는지 잘 알았던 데이비드의 결혼은 이상적으로 보였다. 불평등과 차이는 소통과 공감 앞에서 문제 되지 않았다. 60년대였음에도 젊은 부부는 대부분의 청춘과는 다른 가치를 추구한다. 빅토리아풍 대저택에서 다복한 가족과 함께 선물같은 일상, 고전적인 옛날식 행복’(p.30)을 누리는 일에는 성탄절이나 부활절 같은 중요한 날들을 일가친척과 함께 기념하는 일도 포함된다. 부부는 행복 그 자체를 소유하기 원했고, 마땅히 소유해야 했는데 사랑스러운 아이들은 이 행복의 본질이자 주인공이고 축복의 대상이다.

 

물질적 기반이 충분하지 않을 때 우리는 마치 심판받는 것 같다.”(p.18)고 생각하지만 부부는 부모님의 도움에 의지하고 일에 더 매진하며 계속해 나간다. 데이비드와 해리엇의 소망과 계획에 부모들은 우려의 목소리를 보태었다. 그들의 무모함과 판단착오를 직시하기 바라는 충고는 성과 없이 가라앉는다. 다락방까지 갖춘 거대한 집에는 커다란 식탁이 있고 이 식탁을 중심으로 아이들은 늘어가고 초대받은 사람들이 기뻐하는 행복의 초상을 거의 완성한다. 다섯째 아이가 태어나기 전까지.

 

다섯째 아이는 태어나기 전부터 지금까지의 네 아이와 달랐다. 도움을 주었던 친정엄마 도로시는 두 딸의 하인으로 남은 일생을 마칠 수 없다고 단언한다. 크리스마스 휴가에 모인 가족들은 지금까지와는 다른 목소리를 내는데 놀림으로 시작하여 더 이상 존경심이 아닌 그 뒷면을 보이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태내에서부터 자신을 괴롭히는 아이를 해리엇은 원수”(p.56)라 생각하며 재움으로써 고통에서 놓여나고자 진정제를 복용한다. 의사 앞에서는 반감을 살까 싶어 괴물이라는 말을 속으로 삭인다.

 

마침내 이 긴 맹목적 투쟁 끝에 실제로 서로 눈을 마주칠 때 그녀는 무엇을 보게 될 것인가?”(p.66) 해리엇은 다른 사람들이 보고 싶어 하지 않는 실제, 아무도 알지 못하는 실체를 두려움과 괴로움 속에서 가늠한다. 다섯째 아이, 벤이 태어나자 해리엇은 동정심과 죄책감, 두려움과 분노에 무방비로 노출되어 홀로 싸움을 이어가는데 이는 거의 투쟁에 가깝다. 선택의 기로에 서고 책임을 추궁당하고 아이들의 천진한 소리가 사라지면서 한 명씩 떠나간 후, 돌이키기 어려운 이별을 앞두고 혼자 넓은 식탁에 앉는다.

 

소설을 빨리 감기 해본다면 즐거운 나의 집이 나무 식탁을 중심으로 피어났다가 사위어간 여정으로 단축할 수 있겠다. 일가족 역사의 증인 역할을 한 식탁에 초점을 맞추는 말미의 사유는 책의 가장 함축적인 장면으로 세피아빛 초상의 침대에 맞먹는 상징성과 비중을 차지한다. 활자는 파노라마처럼 시간을 돌린다. 책은 이상과 현실, 꿈과 욕망, 책임과 의무에 대해서, 가정 내 성 역할 갈등, 부모 세대를 향한 불만과 다음 세대에 대한 기대와 불안, 서운함 등 세대 간의 갈등까지 다양한 주제를 보여준다. 간결한 문체는 바로 다음 장면에 무시무시한 사건이 일어날 것 같은 압박감을 높이면서 동시에 인물이 겪는 어려움을 속사포로 내뱉는 듯하다. 리듬감 있는 도치문의 반복은 효과적으로 긴장을 배가시킨다.

 

작가는 해리엇의 목소리로 보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짚는다. “벤이 태어난 이후 권위를 가진 모든 사람들이 벤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p.177) 벤은 자기 자신을 어떻게 보는지, 사람들은 그를 제대로 보는 일, 그의 본질을 인식하는 일을 거부할 것인지 묻는다. 프랑켄슈타인에서 빅토르는 자신의 창조물에 대해 악마, 괴물이라고 칭하다가 사유하는 크리처를 그 존재라고 바꾸어 부른다. 하지만 끝내 이름은 지어주지 않는다.

 

벤은 무심하게, 어쩌면 원치 않는 숙제 하나를 끝내듯이 어머니로부터 이름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그 이름은 끝까지 낯설고 위협적인 존재이자 가해자 역할을 떨치지 못했다. 가족에 온전히 소속되지 못하고 식탁에서 따뜻한 빵을 나누지 못했던 다섯째 아이는 편견과 소외의 대상으로 불안하게 집을 나선다. 감정과 심리묘사에 저절로 빨려드는 여운 깊은 작품은 우리 곁에 남아있는 여전히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와 다양한 벤과 그들이 속한 사회를 숙고하게 한다. 후속작 세상 속의 벤이 궁금하다. 마냥 즐거운 독서는 아니었지만 질문하는 작품이기에 레싱의 입문작으로 추천할만하다.

 



책 속에서>


몸을 뒤로 기울여 희미한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자 그녀는 이 식탁이 한때는 축제와 즐거움을 위해 또한 가족의 생활을 위해 어떻게 꾸며졌던가를 상상했다. 그녀는 20, 15, 12, 10년 전의 장면들, 로바트 식탁의 단계들을 재창조했다. 먼저 데이비드와 자신을, 그의 부모들과 도로시와 자신의 언니들과 함께 있는 용맹한 젊은이로서의 모습을······ 그리고 아기들이 태어나고 어린아이들이 되고······ 새 아기들······ 스무 명의 사람들, 서른 명이 이 빛나는 표면 주위에 몰려 앉고 그 표면에 반사되었고 그들은 양쪽 끝에 다른 책상을 덧대고 가대 위에 널판을 대어 넓히고······. 그녀는 식탁이 길어지고 넓어지고 얼굴들의 무리가 그 주위에 몰려 있는 것을 보았다. 항상 웃는 얼굴들. 이 꿈은 비판이나 불화를 수용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아기들······ 어린애들······ 그녀는 어린 아이들의 웃음소리와 그들의 목소리를 들었다. 그러고 나서는 식탁의 넓은 광택이 어두워지는 듯이 보였고 거기에는 이방인이자 파괴자인 벤이 있었다. 그녀는 그가 갖고 있다고 확신하는 감각들을 그 안에서 일깨우기를 두려워하며 조심스레 머리를 돌렸고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보았다.(p.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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