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크너 자선 단편집 1 포크너 자선 단편집 1
윌리엄 포크너 지음, 조호근 옮김 / 서커스(서커스출판상회)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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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크너 자선 단편집 1의 서평을 잘 써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린 끝에 을 빼기로 타협하고서야 겨우 숨을 고른다. 우선포크너 자선 단편집 이 출간되어서 무엇보다 기쁘다. 읽을 수 있어서 기쁘고, 그럼으로 포크너만의 아우라를 다시 한 번 경험할 수 있어서 기쁘며, 이에 더해 8개월 동안 진행하고 있는 숭학당의 윌리엄 포크너 함께 읽기에 포함할 수 있어서 기쁘다.포크너 자선 단편집100편에 이르는 단편 중에서 작가가 직접 선별한 42편을 묶었으며 1권에는 스무 작품을 담았다. 작품 결정부터 수록 순서와 각 장의 소제목까지 직접 정했던 포크너는 1951년 전미도서상을 수상하였다. 노벨 문학상을 수상(1949)하고 시상식은 다음 해에 가졌는데 수상 연설은 그의 문학적 지향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포크너는 글을 쓸 가치가 있는, 비탄과 노력을 들일 가치가 있는 주제는 오직 인간 내면의 갈등뿐이라고 전했다. 인간 내면의 오래된 진리이자 진실을 남겨야 하는데 사랑과 명예와 동정과 자부심과 연민과 희생 같은 보편적 진리가 깃들지 않은 이야기란 그저 짧게 스러질 운명일 뿐“(p.8)이라고 강조한다.

 

윌리엄 포크너의 대표작은 3대 걸작으로 꼽히는 장편소리와 분노(1929),팔월의 빛 (1932),압살롬, 압살롬!(1936)이 있다. 독특한 서술 기법과 문체로 작가의 개입과 판단을 억제하고 인물이 직접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게 함으로 독자를 끊임없이 긴장시키는 작품들이다. 로쟈 이현우는 초심자를 위한 포크너가 있느냐는 것. 비유컨대 포크너는 경사가 완만한 바다가 아니라 바로 깊어지는 바다다. 그럼에도 문학 독자라면 그의 작품들에 끌리지 않기도 어렵다.’고 하였는데 이 책이 적절한 포크너 입문서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포크너 작품의 배경인 전후 미국 남부를 상징하는 가상의 공간인 요크나파토파는 단편에서도 동일하게 유지된다.

 

전체 6개의 장에서 1권은 <시골>, <마을>, <야생> 세 개의 장, 스무 작품을 담았다. 첫 번째 단편 <불타오르는 헛간>은 남북 전쟁 이후 남부 사회의 계급 갈등을 다룬다. 화자인 막내 아들 커널 사토리스 스놉스의 시선으로 아버지 애브너 스놉스 위주의 일화와 행동을 보여준다. 폭력적인 아버지 애브너는 자신의 잘못으로 배상 판결을 받자 분노하며 헛간에 불을 지른다. 어린 아들에게는 가족이라는 이유로 누설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소년의 갈등과 고통은 결국 그 걸음을 미지의 곳으로 이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헛간을 태우다>가 포크너의 변주고, 이창동 감독의 영화 <버닝>은 하루키의 단편 <헛간을 태우다>가 모티프라고 알려져 있어 유명하다.

 

어린 소년이 화자인 작품을 꽤 만날 수 있다. <주님의 지붕널>도 아들의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아버지에게 초점을 두고 서술해가는 단편이다. 대공황으로 인한 정책을 은근히 비판하며 풍자적 요소들이 웃음 짓게 하고 그런 중에도 신앙의 불멸성과 견고함이 재건 계획을 세우게 한다는 견해도 읽힌다. 스피디한 전개와 온점같은 마지막 요약 문장까지 근사하다. 순수한 아이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어른들의 전쟁, 그 이해할 수 없음을 잘 보여 주는 작품 <두 병사>는 동심을 이토록 온전히 이해하고 섬세하게 표현할 수 있다는 데에 다시 한번 놀랄 따름이다. 링컨의 게티즈버그 연설에서 따온 <스러지지 않으리><두 병사>의 후속편으로 질문이 계속되는 단편이다.


<윌리 삼촌>은 화자인 소년이 주인공의 죽음을 먼저 밝히면서 과거를 회고한다. 마을 사람들은 드럭스토어를 경영하다 약물 중독에 빠진 윌리 삼촌을 치료하려고 애쓰나 그는 도움을 원하지 않고 지옥길일지라도 혼자 갈 수 있기를 원한다. 탈출을 시도하면서 문제를 일으키고 엉뚱하게 죽음을 맞는데, 화자인 나는 윌리 삼촌을 아이들의 순수함으로 사랑하고 죽음을 초월한 관계를 맺었다고 생각한다. 연민 어린 블랙 코미디적 굴곡을 통해 어떤 도움은 선의로 닿지 않고 모멸일 수 있나 질문을 남긴다. 그 중 포크너의 장편 <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의 다알 번드런 예화가 잠시 나와서 반갑다. 로드니 외삼촌과의 에피소드를 조카 의 시선으로 서술하는 <그 또한 괜찮으리라>는 온 가족을 눈물과 고통으로 몰아넣는 문제아 로드니 외삼촌의 끝없는 일탈과 비극적 결말을 긴밀하게 그린다. 아이는 후에 이 사건의 진실을 어떻게 감당하려나 염려가 된다.

 

포크너의 인물은 다른 작품에서 종종 재등장한다. <소리와 분노>의 퀜틴 콤슨이 <압살롬, 압살롬!>에서 이미 전사를 쌓으며 침잠해갔던 게 일례다. <키 큰 남자들>에서는 휘둘리지도 타협하지도, 요행이나 행운을 바라지도 않고 묵묵히 선택하고 살아낸 이들을 본다. 온갖 규칙과 규제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게 우리들의 문제라는 보안관보의 견해는 지금도 유효한 지적이다. 인물간 구도를 눈여겨 볼 작품이며 <팔월의 빛>에서는 지방 검사로 나왔던 개빈 스티븐슨 변호사를 전언으로나마 접할 수 있다. <어느 곰 사냥>에서 중편 <>의 주인공 아이크 매캐슬린(아이작)이 스치고, 주요 인물 드 스페인 소령은 여러 단편에 출현한다. 누군가에게 장난이 다른 사람에게는 회복할 수 없는 아픔으로 남고 잊혀지지 않는 경우도 많다. 기발한 에피소드로 능청스런 비유가 계속될 때면 포크너가 이렇게 유쾌한 면도 있었나 싶다.

 

놀랍게도, 터지는 웃음을 참으며 읽는 작품도 있다. 예를 들어 <황동 켄타우로스>는 영상을 보는 것 마냥 시각적이고 주인공들의 표정까지 그려진다. 다만 웃음을 위한 웃음은 아니다. 희비가 교차하며 아이러니한 상황에서 실소하거나 쓴웃음을 짓는 경우도 상당하다. <죽음의 매달리기>는 어떤가. 서두의 작품 해제(p.22~23)에서 포크너의 공중 곡예에 관한 몇 개 단편들은 작가의 공군과 항공기에 대한 애정과 무관하지 않다고 설명하는데 실재했던 곡예 비행이 중심이다. 곡예를 선보이는 과정이 무척 생생하나 톤은 더할 수 없이 진지하다. 타인의 위험을 흥밋거리로 소비하는 시선, 군중 심리에 대한 비판도 볼 수 있는데 어처구니 없는 상황에 실소가 나니 난감하다. 비극적인 이야기를 웃음을 참으며 읽게 하는 것도 재능이 아닐까.

 

<머리카락>에서는 호크쇼라는 이발사가 등장한다. 평범하지 않은 호크쇼의 행적을 화자가 개빈 스티븐스에게만 털어놓는 구조다. 여자와 남자를 단정하는 시선이 불편할 수 있는데 당시에는 일상이었을 테다. 그는 또 다른 인물을 연상하게 만드는데, ‘호크쇼를 직접 본 남자라면~’(p.201)으로 시작하는 문장은 <팔월의 빛>에서 바이런 번치를 설명하는 서두의 한때 사랑이 있었다 하더라도~’와 흡사하다. 매우 시적이다. 예상을 넘어서는 반전 결말은 단편의 미덕을 배가시킨다. 충격 결말이라면 <에밀리를 위한 장미 한 송이>를 꼽을 수 있다. 포크너가 출간한 첫 번째 단편소설로 비평가 브룩스에 따르면 포우를 능가하려는 시도이며 포크너가 창조한 특별한 세계로 들어가는 항구, “포크너적인 충격이다. 에밀리 그리어슨 양의 저택이 눈엣가시 사이의 눈엣가시가 된 것처럼 아버지 세대의 이상은 옛 것이며 불합리한 면도 두드러진. 에밀리의 일생은 포크너의 여러 인물이 강요된 틀에 갇혀 고통을 감내하는 여정이었듯 놓치고 사라져가는 시간의 축적이었다. 그녀의 선택은 회복할 여지가 없는 시점에 복기함으로 드러난다. 포크너가 즐겨 사용하는 비순행적 서사 진행을 단편에서도 구사한다. 시간을 추적하면서 독자는 잃어버린 시간을 상쇄하고 회복하기 원하는, 나아가 시간과 겨루고자 도전하는 애처로운 인물을 만난다. <매마른 9>의 미니 쿠퍼 양도 비교해서 볼 수 있다.

 

첨예한 흑백 갈등을 비판하는 <매마른 9>에서 남부 신화안에서 살아가는 미니 쿠퍼양은 틀 안에 안주하고 방관함으로 어쩌면 불의한 폭력에 가세한다. 작가는 발표 1년 후인 1932년에 조 크리스마스 주인공의 장편 <8월의 빛>을 출간하는데 집중적으로 이 주제를 다루던 시기다. 선동적 극단주의자 매클렌든은 <8월의 빛>의 퍼시 그림 계열의 인물임을 알 수 있다. 작가는 백인 여성 옹호를 위한 매클렌든의 분노가 새장 같다고 표현한 그의 집에서 아내에게 하는 행동을 스케치함으로 이중성을 드러내고 위선의 산물일 뿐임을 지적한다. <엘리>는 첨예한 흑백 갈등을 따라가다 심리 스릴러같은 섬찟한 결말로 이끈다.

 

흑인 여성은 당시 가장 열악한 위치에 놓였을 것이다. <그 저녁의 태양>은 남부 흑인 여자의 고통스런 삶을 세부 설명 없이 분위기와 심리 묘사 만으로도 독자가 충분히 추측하고 느낄 수 있게 한다. 포크너는 이번에도 어린이를 주요 화자로 등장시켜 고통스러운 현실로부터 거리를 둔다. 아이들 눈에 보여지는 것 넘어, 이해하는 것 이면의 갈등이나 임박한 폭력의 위험성 을 상상하게 한다. 낸시의 슬픈 삶, 그 두려움을 아무도 해소해 줄 수 없다는 사실이 먹먹한 단편이다. 이 작품의 또 하나의 특징은 화자가 어린 퀜틴 콤슨이라는 점이다. <소리와 분노>의 콤슨가 남매 넷 중 막내 벤지를 제외한 셋과 아버지 어머니, 하녀 딜지까지 등장하니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듯하다. 아홉 살 퀜틴, 일곱 살 캐디, 다섯 살 제이슨이 낸시를 보고 그녀의 말을 듣지만 이해하지는 못한다. 포크너는 이 짧은 이야기 속에서도 유년의 콤슨가 아이들과 어머니인 콤슨 부인의 성향까지 완벽하게 그려낸다. 그것만으로도 뜻밖의 보석을 발견한 듯 기쁨을 안긴다. 3야생편은 인디언 소재 작품들인데 <정의 하나>는 열 두 살 퀜틴이 <>의 주요 인물 중 샘 파더스의 과거를 거슬러 전언의 전언을 듣는 식으로 전개된다. <정의 하나>의 전사라 볼 수 있는 <어떤 구애>는 추장 둠의 청년기가 드러나면서 한 인물을 단일하게 해석하는 것을 상쇄한다.

 

단편 소설에서도 여전히 시간순의 친절한 전개와는 거리가 멀다. 꿈 속의 꿈처럼 A가 들려주는 이야기는 B와의 대화에서 들었던 CC'의 행보라는 구조가 독자도 계속 긴장하며 집중하게 만든다. 또한 문자의 표면적 뜻에서 탐색해 들어가 이면의 깊은 의미에 도달할 것을 요구하며 남겨둔 행간을 힘써 헤아릴 것 또한 동시에 요청한다. 읽은 부분을 앞 뒤로 재점검하면서 혹시 오독은 아닐까 고민하는 일은 포크너 독자에게는 기본이다. 그럼에도 철저한 캐릭터 구축, 탁월하고 아름다운 비유와 상징, 정곡을 찌르는 일침, 상황과 심정을 문장으로 적확하게 간추리는 반복을 통해 작가는 희미한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더 나은 시간을 희망한다. <두 병사>에서 열 아홉 살 피트 그리어는 어느 날 진주만에 그 일이 일어나서참전하여 전사하였다. 요크나파토파 카운티의 중심도시 제퍼슨에서 떨어져 있는 가난한 농촌 지역 프렌치맨즈 벤드에 사는 피트의 가족은 똑같이 태평양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드 스페인 소령을 위로하기 위해 법원 건물보다 커 보이는 소령의 저택을 방문한다. 돌아가는 길에 그들은 박물관에 들르는데 작가가 만들어낸 상징과 같은 박물관이다. 관람료를 내지 않고 다르게 생긴 집과 헛간과 경작하는 방식이나 경작하는 작물이 다르더라도 결국에는 같은 인간인 남자와 여자와 아이들을 그린 그림을 바라볼 수 있는공간이다. 그림 속의 사람들은 사명을 요구 받기도 하였으나, 그렇지 않았더라도 스러지지 않는다. 포크너가 창조한 문학적 우주 요크나파토파는 미국 문학의 상상력이 도달할 수 있는 극한 중 하나’(톰 울프)이며, 마르케스에게 마콘도를 가능하게 했던 토대이다.

 

포크너는 그가 개척한 상상의 땅에서 스러져서는 안 될 순간을 포착하고 스러져버린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 글을 쓸 가치가 있는 유일한 대상이라고 하였던 인간 내면의 갈등에 천착함으로 주요 장편 소설에서 뜻 깊은 성취를 해내지만 단편 역시 간과할 수 없다. 포크너 자선 단편집은 그리어의 가족이 들렀던 제퍼슨의 박물관처럼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호명하고 먼지를 털어내는 기념관이다. 포크너에게 남부는 온 마음으로 응시하고 관찰하고 나아가 현미경을 대보고 각도를 바꿔보며 전력을 다했던 대상이었고, 결국 영원히 아로새겨놓았다. 지금 우리의 남부는 어디인가, 어떤 이름인가 혹은 누구일까. 전심으로 남겨야 할 것은 무엇일지 생각한다. 기존 출간된 포크너 단편집은 다섯 작품을 담은 <헛간, 불태우다>(쏜살문고, 민음사, 2021)와 열 두 작품을 실은 <윌리엄 포크너>(현대문학, 2013)가 있다. 이번에 두 권으로 포크너 자선 단편집이 완역되어 감사한 마음이다. 작품 해제와 꼼꼼한 각주, 사투리체 번역까지 역자의 정성이 가득하다. 빼어난 작품들을 짧은 호흡으로 읽는 호사를 누릴 일만 남았다. 압축의 정수인 한 편이 마무리 될 때마다 감탄사가 나올 게 분명한포크너 자선 단편집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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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이하의 것들
조르주 페렉 지음, 김호영 옮김 / 녹색광선 / 202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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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후반 실험문학 모임 울리포(OuLiPo)에는『문체 연습』의 저자 레몽 크노 뿐 아니라 조르주 페렉도 속해 있었다. ‘작업실, 문학, 잠재성’을 뜻하는 세 개의 프랑스어 단어에서 첫 음절을 차용하여 조합한 울리포(OuLiPo)는 ‘잠재 문학 작업실’을 뜻한다. 실험적 시도는 인상적인 결과물을 생산하였고, 참여자가 아닌 독자 입장에서는 실험에서 유희로, 유희에서 장난처럼 약간씩 각도를 비틀어갈 때 위태롭다는 우려와 자유롭다는 희열을 왕래하게 된다.


페렉의『보통 이하의 것들』(김호영 옮김, 녹색광선, 2023, 212쪽 분량)에 담긴 아홉 편의 글은 실험실에서 도출한 듯한 재기발랄한 에세이와 자유로운 사유가 빛나는 아름다운 단편을 고루 보여준다. 첫 번째 <무엇에 다가갈 것인가?>에서 작가는 우리 삶은 무엇으로 구성되고 어떤 식으로 채워지며 날이 바뀌고 인생이 나아가는 동안 무엇을 남기는가 질문한다.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반복되는 일상적이고 하찮은 것들을 간과하지 않아야 하며, 본질 또는 진짜 스캔들, 진짜 사회적인 불편함은 “견디기 힘든 하루 스물네 시간, 일 년 삼백육십오 일”(p.16)이라고 강조한다. 평범한 것들에 언어를 부여하는 일은 곧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p.17)이라고 선언한다. “기이한 것은 언제나 아름답고, 기이한 것은 모두 아름다우며, 사실 기이한 것만이 아름답다.”는 앙드레 브르통의 초현실주의 화두와는 상당히 배치된다.


우리에 대해 말한다는 행위,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은 페렉을 본보기 삼을 수 있다. 그가『공간의 종류들』에서 집요하게 점유해 나갔던 공간은 먼지와 거미줄을 걷어내고 명명하도록 만들었다. 이 책에서 두 번째 실린 <빌랭 거리>는 ‘장소들’ 프로젝트라는 틀 안에서 공간을 재탐색한다. <빌랭 거리>는 양가가 폴란드 이주 유대인이었고, 2차 대전 당시 부모를 잃었던 작가에게는 태어나고 자랐던 유년의 장소다. 그는 도시정비사업으로 사라질 공간을 기록으로 남기기로 한다. 12년 동안 총 24번의 묘사를 계획했으나, 작업은 계획과 달리 중성적인 묘사 여섯 번과 회상을 담은 여섯 번에 그쳤고, 책은 중성적인 묘사 여섯 개를 모아 놓은 것이다.


24쪽 빌랭 거리 지도와 함께 1969년 첫 번째 기록부터 75년까지 총 여섯 번의 기록을 남긴다. 첫 번째 기록은 분량이 가장 많고 좀 더 세밀한 묘사를 보여주고, 뒤로 갈수록 언급되지 않은 번지가 추가되거나 빠지기도 한다. 방문했을 때의 변화를 삽입하고 주변 사람들을 언급하며 덧댄다. 여섯 번째인 마지막 기록은 1975년 새벽 2시경 방문 스케치인데 왜 그 시간에 찾아갔을지 그의 새벽 외출을 짐작한다. 또한 시멘트 펜스라는 단어와 노동은 고문이라는 등식 낙서가 고되고 막막한 심경을 불러일으킨다.


트라우마가 있는 장소를 매년 한 번씩 찾아가 감정을 배제하고 기록한다는 행위는 어떤 의미를 지니는 걸까. 감정을 배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취했을 객관적 기록이라는 형식은 충분하고 필요한 안전장치였을까. 트라우마에도 불구하고 무의식 저편으로 넣어 버릴 수 없고 잃어버리지 못하는 기억에, 어쩌면 무의식 가까이 가라앉아 있어서 꺼낼 방법이 없는 무언가에 닿겠다는 의지의 실현이었을까. 나름의 구조 절차가 아니었을까, 그는 목적을 달성했을까, 질문이 뒤따른다. 나는 어디에 가서 무엇을 기록해야 할까, 기록해야 했을까, 내가 기록하지 않음으로 이미 잃어버린 장소, 곧 풍화되거나 무화될 수 없는 삶의 빈약한 조각은 무엇일까 자문한다.


<생생한 컬러 엽서 이백사십삼 장>은 울리포의 조합 문학 창작 방식을 따라가며 한계를 넘어 언어에 내제된 ‘무한한 표현 가능성’(p.51)을 전한다. 역자 노트가 이 장을 대신하는데 작가의 창작이 인공지능(AI)의 방식으로 작성된 최초의 글쓰기 사례 중 하나이며, 페렉은 이 모든 수고를 직접 수작업으로 해냈다니 놀라움을 안긴다. 그 결과물이 이탈로 칼비노에게 보내는 끝이 없어 보이는 안부 엽서이겠다. 반복되는 패턴의 글 묶음은 엽서라는 한정된 지면에 쓰기에 단문일지라도 마치 끝나지 않을 듯 계속되니 인내력 부족한 필자는 ‘미친다’, ‘화난다’ 등의 단어를 여백에 적어 넣으면서 읽고 있다. 인내력 테스트의 장이다. 이 장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엽서 수신자인 이탈로 칼비노의『보이지 않는 도시들』을 읽었어야 한다. 칼비노를 읽지 않았다는 사실이 더 화를 돋군다.


<런던 산책>은 무척 아름다워서 다시 읽고 싶다. 그 안에 사용된 단어(명사)와 명소, 실존 인물과 책 속 인물, 거리 풍경과 작품 속 배경이 우아하게 교차한다. <지성소>는 글에서 잠시 스친 진통제 영향인지 로이 리히텐슈타인의 <알카 셀처>를 감상하며 읽어도 좋겠고 무엇보다 결말이 신의 한 수다. <천구백칠십사 년 한 해 동안 내가 먹어치운 유동식과 고형 음식들의 목록 작성 시도>는 ‘글을 쓰자’ 고 마음 먹는다고 바로 나올 수 없는 작품이다. 그는 다 계획이 있구나 아니 있었구나, 최소한 일 년 전에는 계획을 세우고 실천에 돌입 했겠구나 알게 된다. 독자는 책을 읽는 동시에 분석하는 자신을 발견한다.


그가 매일 식탁에 남아서 또는 잠들기 전에 꾸깃한 메모지에 오늘 먹은 음식을 적어 넣는 모습이 그려진다. 자다가 벌떡 일어났을 수도 있고, 귀찮아서 애초에 이런 시도를 결심한 자신을 탐탁치 않아하며 일어났을 수도 있다. 그는 기록했을 테고, 분류하고 합산하였을 텐데 합산은 월별로 묶어서 한 후에 계절별로 더하거나 최종 일 년을 모았을 테다. 육 해 공 음식 재료 중에 어떤 재료로 만든 음식을 앞에 배치할 지를 궁리했을 수도 있다. 조리법 별로 구분할 수도 있겠다. 생선류, 소고기류, 송아지고기류, 돼지류, 양, 닭, 토끼로 이어지는 단백질 공급원들을 지나 치즈, 과일, 파이, 아이스크림, 주류 쪽으로 이동하면 이편이 좀 더 기호에 맞다고 눈독을 들이며, 시키지도 않았는데 이미 사라진 음식들을 2026년의 한 독자는 품평하고 있다. 아니 왜 커피는 없어? 나라면, 나라면, 하고 군침을 흘리며 나의 목록 작성 계획을 저울질 하고 있다.


<스틸 라이프/스타일 리프>도 매력이 넘친다. 보르헤스의 미로 또는 뫼비우스 띠가 생각나는 글 앞에서 독자는 눈에 힘을 준다. 아이고 눈이 팽팽 도네, 달라진 단어는 무엇인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활자에 기울기를 준 역자에게 감사를 표하고 싶다. 이어지는 <나는 좋아한다, 좋아하지 않는다>에서도 여러 가지 참견을 하였지만 “알베르 카뮈를 왜 싫어해? 말도 안 된다” 하나만 꼽겠다. 해설도 아껴 읽어야 한다. 상실과 애도로써의 페렉의 글쓰기는 먹먹함을 남긴다. 어머니의 미용실 흔적이 남아 있던 24번지 건물이 지도에서 완전히 사라진 게 페렉 사망 다음날이라는 마지막 문장은 독자를 떠나지 못하게 붙든다.


개인적인 욕심으로 2월 숭학당 논제 세미나 도서로 선택하였다. 토론이 잘 되고 안 되고를 떠나서, 읽는 도중에 읽기란 무엇인가 내가 읽는 행위가 유의미한가를 미심쩍어 할 만한 지점을 만날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내게는 따뜻하게 안착한 작품이다. 적는 자가 살아남는다는 적자생존을 모토로 삼고 있는 사람으로서, 쓰는 행위가 중압감과 때론 좌절, 열패감까지 고루 선사하고 강타하지만 그럼에도 쓰는 게 옳다는 걸 증명해주는 작품이다. 그가 살아낸 치열한 삶에 감동하며, 그럼에도 밝은 에너지 가득한 흑백 사진에 고마워하며, 오늘도 담백 하고는 거리가 먼, 감정으로 가득한 평을 쓴다. 페렉의 작품을 다시 읽기로 한다. 그의 태도와 스스로 멈추지 않은 결기를 기억하며 페렉 읽기를 권한다.




책 속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우리가 경험하는 것, 나머지인 것, 모든 나머지인 것, 그것들은 어디에 있을까? 매일 일어나고 날마다 되돌아오는 것, 흔한 것, 일상적인 것, 뻔한 것, 평범한 것, 보통의 것, 보통-이하의 것, 잡음 같은 것, 익숙한 것. 어떻게 그것들을 설명하고, 어떻게 그것들에 대해 질문하며, 어떻게 그것들을 묘사할 수 있을까?(p.16~17)


어떻게 ‘평범한 것들‘에 대해 말하고, 어떻게 그것들을 더 잘 추적하고 수풀에서 끌어낼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들을 끈끈하게 감싸고 있는 외피에서 떼어내고, 그것들에 하나의 의미, 하나의 언어를 부여할 수 있을까. 마침내 그 평범한 것들이 자신이 무엇인지, 우리가 무엇인지 말할 수 있도록 말이다. 어쩌면 그것은 우리 자신의 인류학을 구축하는 일일 것이다. 우리에 대해 말하고, 우리가 아주 오랫동안 다른 이들에게서 훔쳐 온 것을 우리 안에서 찾아낼 수 있는 인류학 말이다. 더 이상 이국적인 것이 아닌, 내국적인 것들의 인류학.(p.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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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창
구병모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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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병모의 소설을 읽는 건 분명 호사다. 읽기 전부터 이미 기대로 충만하고 설렘으로 뿌듯하다. 날 선 그의 문장은 매끄럽게 달리다 방심할 틈 없이 늪처럼 빨아들일 것이 분명하다. 작가의 신간절창(문학동네, 2025, 352쪽 분량)은 문자적으로 베인 상처를 의미하며, 해독 가능한 매개의 역할을 부여받았다. 사람의 속마음은 은둔지이자 굳게 닫아건 저장고로 기능하지만, 봉인을 해제하고 진실에 접근하려는 편에서는 목적에 충실하게 상처에 접촉하려 애쓴다. 나아가 서슴없이 상처를 만들어 내어 낭비를 피하고 적확을 기한다. 소설은 상처를 읽는 아가씨와 해독 결과를 활용하려는 대표 문오언, 성채와 같은 그들의 공간에 아가씨의 독서 교사로 입주하게 된 독서 담당 선생님을 중심으로 각자의 소망과 목적이 부딪히고 어긋나는 과정을 그려낸다.

 

상처에 손을 대면 텍스트처럼 읽어낼 수 있는 아가씨의 능력을 독점하기 위하여 대표는 그녀를 세상으로부터 분리하고 보호한다. 이 자를 읽으라는 차가운 명령에서 나만 읽어 달라는 간곡함 사이에 경계하고 의심하고 적대하고 허용하는 감정의 변화가 촘촘하게 쌓인다. 둘 사이의 읽기와 읽지 않기가 신경을 팽팽하게 긴장시키는 중에, 읽고 생각하고 질문하고 반문하고 나누는 보편적 읽기 세계에 긴 시간 침잠해 온 선생님은 독법과 의미, 읽기와 살기를 유연하게 왕래한다. 독자는 우연처럼 시작되어 지금에 이른 아가씨의 현재 삶이 희망이나 구원으로 선회하기를 조심스럽게 기대한다. 미심쩍고 우려 깊은 잔상도 참회하고 또 응분의 죗값을 치름으로 새로운 가능성을 기약하기를 바란다.

 

그러나 독자의 기대를 넘어서는 빼어난 소설들이 그렇듯, 마치 영화처럼 선생님은 무기를 겨눈다. 가짜 책은 총도 숨기는구나. 진짜는 그 자체로 가치를 확보하는데, 물성만으로도 고귀한 아우라를 품는데 다른 무엇보다 책이라면 더욱 진리에 근접해야 마땅함에도 페이크북이라는 반칙과 조롱은 의도한 자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코를 납작하게 하는 정도가 아니라 그것즉 죽음이라는 최상위 즉결심판을 내려버리고 말았다. 희망이나 구원, 가능성은 다 어디로 갔나. 내가 허탈해하다니, 부지불식 드는 허탈함을 인지하자 그게 더 허탈함을 부른다. 누가 악당인가 묻는다. 제대로 읽어낸 것 맞나 묻는다.

 

책은 화자인 선생님 의 시점에서 시종일관 서술하고 있다. 인간의 삶이자 비극이 무엇인지, 비극을 견디는 게 인생의 거의 전부라는 비관적 견해는 이에 대한 응전으로서의 소설의 의미를 짚는다.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p.303)를 보고는 곧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인터뷰가 떠오른다. “우리 모두는 우리가 꿈꾸는 완벽함에 필적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불가능한 일에 얼마나 멋지게 실패하는가를 기초로 우리들을 평가합니다.”(p.437, 파리 리뷰 인터뷰_작가란 무엇인가)로 시작하는 포크너의 답변은 이 문장에서 자연스럽게 연결되었다.

 

한자어를 곁들인 화려한 만연체 문장을 읽는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단정적이고 직설적이며 재기 발랄한 견해를 읽는 즐거움도 누릴 수 있다. 읽기란 무엇인가에 대한 점층적이고 본격적인 제안에 공감하고 한 번 더 각인하는 효용도 누린다. 비판적 읽기의 핵심도 추려볼 수 있다. 고전 명작 속 인물에게 던지는 의구심과 질문은 오래 전 아껴 읽었던 작가의 전작빨간 구두당을 다시 꺼내보게 하였다. 셰익스피어를 읽고 몇 편의 서평을 쓰기도 하였으나 여전히 여러 명의 리처드와 수많은 헨리를 만나지 못했다는 자책에 올해의 독서 목록을 조정해야 할 것인가 잠시 고민한다. 고전 속 문장이 소설에서 되살아나고 일상어처럼 대화에 스미는 장면들에 멋지다는 기호를 그려 넣는다. 아무리 넘쳐도 해로울 것 없는 배움의 과잉(p.166)에 밑줄을 그으며 오늘도 조금만 더 읽어 보자꾸나 마음먹는다. 사유의 비밀 공간으로 초대하는 가독성 좋은 소설을 추천한다. 구병모 소설은 언제나 옳다.

 




 책 속에서>


보통은 책을 읽고 난 뒤 별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는 것, 그게 가장 일어나기 쉬운 일입니다. 무용하면 무용한 대로 다만 이어가는 것, 그것이 읽기 아닐까요. 읽기의 자리에 살기를 넣으면 어떻습니까.(p.205)

 

그러니 너의 눈앞에 있는 한 권의 소설은 그 무의미의 운명에 어떻게든 의미 비슷한 걸 부여해보고 죽으려던 예술가들의 오랜 싸움과 필연적인 패배의 흔적이야.(p.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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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강화 (리커버 특별판. 양장)
이태준 지음, 임형택 해제 / 창비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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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과 상관없이 살 수 있을까. 쓰지 않고 살 수 있을까. 있을 것도 같다. 그러나 쓰기로 한 이상 제대로 써야 한다. 때로 ‘막’ 쓰는 일도 필요하다. 모든 초고는 쓰레기다 라는 입장에서 그대의 막 쓰기를 허하노라, 하는 자유를 보장 받을 때 쓰기는 춤추는 일, 아니 막춤 추는 일과 엇비슷해진다. 언제까지 막춤만 출 것인가 하는 자각이 찾아오기 전까지는 평화롭다. 다만 그때부터 ‘막’은 ‘잘’ 또는 ‘제대로’에 자리를 내어주어야 한다. 제대로 쓰고 싶다, 잘 쓰고 싶다, 내 안에 숨어 있는 본연의 나를 끄집어 낼 만큼 솔직하고 필요한 글을 쓰면서도 타인에게 적확하게 닿고 싶다는 바램은 때로 병이 된다. 병을 치료해줄 선생님은 분명 있을 것이라는 믿음에, 개론서, 이론서, 작법서를 찾아 읽기를 계속해온 이들이 나만은 아닐 것이다. 강좌와 프로그램을 찾아 듣고 후속 강의를 신청하며 때론 피철철 첨삭에 좌절하고 때론 기세가 좋다는 격려에 감동받으며 나이 들어가는 중이다. 그럼에도 백지 앞에서 꺼내드는 질문은 동일하다. ‘어떻게 쓰지?’


『문장강화』(임형택 해제, 창비, 2016, 376쪽 분량)는 어떻게 쓸 것인지 묻는 이들에게 전하는 조선의 모파상 이태준의 답지이다. ‘시에는 지용, 문장에는 태준’이라고 일컬어졌던 당대 제일의 문장가가 1939년 2월 그가 주관하던 잡지「문장」창간호부터 연재했던 글이 한 권으로 묶였다. 초판 머리말에서 임형택은 문장이란 소홀해도 괜찮을 일이 아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이냐와 연관해서 고통해아 하고 그 공부에 정련까지 요망“(p.8)된다고 전한다. 삶과 삶을 표현하는 글은 분리될 수 없는 게 사실이다. 1940년 단행본으로 간행되면서 책으로 존재하게 된『문장강화』는 신판에서 개정판, 특별판까지 시간과 함께 독자의 곁에 머물러왔다. 전체 9강으로 구성되어 1강 ‘문장작법의 새 의의’부터 ‘문장의 고전과 현대’까지 세심하게 개념을 정리, 설명하고 예문을 들어 독자의 이해를 돕는다. 예문은 하나같이 고전과 문장가들의 명문이라 전문에 대한 기대를 더하게 만들고, 당시 학생들의 글도 볼 수 있어 생기도 품는다.


책에서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어 새기고 싶은 부분은 상당하다. 어떤 지적은 불특정 다수에 해당하는 독자 일반이 아니라 나에게만 개인적으로 전하는 과거의 비밀 지침처럼 도달한다. ‘담화와 문장’은 항상 고민이었던 대화와 서술의 균형과 선택을 다시 한 번 숙고하게 한다. 대화를 문장에 녹여 서술할 때에도 확신이 없는 상태에서 타협하는 경우가 많은데, 계획적으로 담화의 분량이나 위치를 설계한다는 것(p.49), 담화가 지문과 그다지 대립감이 나지 않으니 의식적으로 섞어 쓴다는 대목은 글 쓰는 게 결코 쉽지 않음을 상기시킨다. ‘유일어를 찾을 것’에서 저자는 “한 가지 생각을 표현하는 데는 오직 한 가지 말밖에는 없다” 는 플로베르의 말과 “우리가 말하려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표현하는 데는 한 말밖에 없다. 그것을 살리기 위해선 한 동사밖에 없고 그것을 드러내기 위해선 한 형용사밖에 없다.”는 모파상의 경구를 전달한다. “그러니까 그 한 말, 그 한 동사, 그 한 형용사를 찾아내야 한다. 그 찾는 곤란을 피하고 아무런 말이나 갖다 대용함으로 만족하거나 비슷한 말로 맞추어버린다든지, 그런 말의 요술을 부려서는 안 된다.”(p.87)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글쓰기가 얼마나 타협할 수 없는 행위이며 치열한 담금질이어야 하는지 알 수 있다.


책에서 가장 인상 깊었고 거듭 읽었던 부분은 ‘퇴고의 이론과 실제’다. 퇴고의 중요성과 기준, 여섯 가지 실제 항목은 퇴고 완결판과 다름없다. “우연을 바랄 것이 아니라 이필, 삼필에도 안 되면 백천필에 이르더라도 심중엣 것과 가장 가깝게 나타나도록 고쳐 쓰는 것이 문장법의 원칙일 것이다.”(p.222)라는 대원칙을 새겨야 한다. 동시에 실제의 다섯 번째 요소인 ‘처음의 것이 있나 없나’도 놓쳐서는 안 될 부분이다. 퇴고를 귀찮게 생각하지 말고 가열차게 날릴 것을 날려야 한다. 글과 책 사이의 간격도 상당하다. 6강의 제재, 글머리, 끝맺음 또한 무엇 하나 자신이 없다. 늘 미진하고 불편하고 마음에 안 들면서 화도 좀 나고 ‘니가 썼지?’ 싶은 뭔가 인장 같은 투가 두드러진다. 아니요, 다른 사람이 썼소, 라고 할 만한 성장과 변화를 이루면 좋겠고 아니기도 하다. 내가 써봤는데(과장) 많이 바뀌기는 어려웠다. 누군가의 멋진 글, 누군가의 정선된 글처럼, 누군가의 좋은 표현, 신박하고 단정한 수사가 참으로 훌륭하다고 부러워하곤 하는데, 언제나 기본에 충실하도록 우선 중심을 잡아야한다. 그래서『문장강화』함께 읽기가 탁월한 과제라는 생각이 든다.


세상에는 수많은 글쓰기 책이 있고 지금도 계속해서 나올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나온 지 팔십여 년이 되어가 조금은 오래 되었다고 여겨지는『문장강화』는 그럼에도 기본과 핵심이 가득하다. 정선한 예문은 책 속의 책 여행, 시간 여행의 즐거움을 제공하였고, 소박하고 정갈한 운치를 보여주었다. 한 번 읽었다고 내 글의 변화가 전격적일 수는 없겠지만, ‘이렇게 마치면 안 되는데’라는 맑은 경종 하나를 소지하게 된 건 맞다. 살기도 쓰기도 마냥 평탄하지 않은 현재, 챗 지피티가 나를 얼마나 안다고 ‘이리 써보시게, 꽤 쉽고 보기에 좋소’라는 메일을 유혹적으로 보내곤 하는 요즘, 나의 대적이 사방에 출몰하는 근래에 ‘쓰는 게 남는 거다, 살아남는 거다, 적자생존 하리라’는 깃발 하나와『문장강화』품고 계속해보아야겠다. 펜을 놓지 못하고 오늘도 쓰기로 한 모든 이에게 강력하고 우아한 이태준의 저서를 추천한다.




책 속에서>

일필에 되는 것은 차라리 우연이다. 우연을 바랄 것이 아니라 이필, 삼필에도 안 되면 백천필에 이르더라도 심중엣 것과 가장 가깝게 나타나도록 고쳐 쓰는 것이 문장법의 원칙일 것이다. 이렇게 가장 효과적인 표현을 위해 문장을 고쳐 나가는 것을 ‘퇴고’라 한다.(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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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 - 제172회 아쿠타가와상 수상작
스즈키 유이 지음, 이지수 옮김 / 리프 / 202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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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평은 출판사로부터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인 견해에 의해 작성하였습니다.) 좋아하는 일만 할 수 있다면 축복일 테다. 좋아하는 일이 읽고 쓰는 일일 경우, 업적과 성취가 차곡차곡 쌓여 간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나아가 호흡하듯 자연스럽게 일상에 스미고 관계를 지탱하는 데 버팀목이 된다면, 책으로 집을 짓고 고전의 대가들과 현실 대화하듯 소통한다면 꿈만 같겠다. 스즈키 유이의『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다』(이지수 옮김, 리프, 2025, 248쪽 분량)는 독문학자이자 괴테 전문가 히로바 도이치의 날들에 동행하는 경험을 제공한다. 기라성 같은 대가들의 문장이 곳곳에 찾아오니 일상은 특별해진다. 아껴서 그었던 책의 밑줄들이 소설의 페이지 사이, 문장 사이에 스며있을 때 반갑고 문장이 아니어도 만나고 싶었던 이름들, 저작들이 빼곡하게 인사 건네니 두근두근하다.


히로바 도이치는 결혼 25주년 기념 식사 후 마시던 홍차 티백 꼬리표를 보고 놀란다. 아내와 딸이 읽은 글과는 달리 자신에게는 더없이 의미 있는 괴테의 문장이 적혀 있어 자부심마저 느낀다. 하지만 자부심도 잠시고 괴테의 명언이라는 “Love does not confuse everything, but mixes.”(사랑은 모든 것을 혼란스럽게 만들지 않고 한데 섞는다.(p.193)) 의 출처는 정확히 어디일가 새로운 과제를 안게 된다. 그는 독일 유학 시절 친구 요한과의 대화를 떠올린다. 독일 사람들은 명언을 인용할 때 그게 누구의 말인지 모르거나 본인이 생각해 낸 말일 때에도 일단은 ‘괴테가 말하기를’을 덧붙여두는데 ‘왜냐하면 괴테는 모든 것을 말했’(p.23)기 때문이라고 했다. 하지만 이렇게 대충 넘어갈 수는 없다. 그는 명언의 출처를 찾는 일에 돌입한다.


“모든 것은 이미 생각되었고, 말해졌다. 우리는 기껏해야 그것을 다른 형식이나 표현으로 반복할 수 있을 뿐이다.-괴테”(p.196)라는 말 또한 기시감이 든다. 전도서에서 솔로몬은 쓰고 있다. ‘해 아래에는 새 것이 없나니’ (전1:9) 모든 것은 이미 존재했고, 이미 행해졌으며 말해졌다는 요절이다. 그래서 으레 최상의 날렵하고 검증된 문장인 명언을 기꺼이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권위에 편승하는 나태와 무감각을 부르고 지적 받은 일 또한 허다하다. 인용 범벅을 지양하라는 강조도 많다. 시간과 품이 들더라도, 투박하고 적확하지 못하더라도 자신의 문장으로 매만지고 다듬는 정성은 귀하다. 도이치의 딸 노리카는 “모든 건 이미 말해졌어도 자기가 말하지 않으면 재미없지.”(p.222)라고 지적한다. 나의 언어로 다시 말하는 일은 그러므로 빛바래지 않는다.


책을 읽다 보면 따로 또 같이 즐기는 도이치 가족의 다정한 시간이 따뜻하게 전해진다. 에필로그에서 도이치와 노리카, 쓰즈키와 아키코 네 명이 거실에 모여 각각 다른 언어로 된 <파우스트>를 읽으며 시간을 보내는 장면은 특히 인상 깊다. 작년에 <파우스트>를 재독했다. 스물 남짓에 읽어 기억이 흐릿한 작품이라 초독과 매한가지로 읽고 썼다. 읽고 나의 언어로 재정리한다고 애썼으나 역시 인용도 많았고 꿰뚫었다는 후련함도 미진하다.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 거실 장면을 보면서 다시 파우스트를 읽고, 괴테의 또 다른 저작들을 읽어나갈 수 있기를 바래본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읽어낸 작품은 슬플 만치 미미하다. 그럼에도 이런 천재적인 작가의 색다른 권유에 기뻐하며 읽고 만날 새로운 세계를 꿈꾼다.



책 속에서>

도이치는 자신의 말을 결코 끝까지 믿지 못하는 남자가 하는 말을 들으며, 그 말을 믿어줄 수 있었다. 그 말은 진짜였기 때문이다. 설령 좋은 말은 모두 연기라 해도 그 안에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여러 차례 연습하며 입에 붙이는 과정에서 자연스러움을 획득하면 마침내 그 의미가 드러날 것이다. 그렇게 믿는다면, 말은 전부 미래로 던져진 기도다.(p.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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