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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그리고 저녁
욘 포세 지음, 박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7월
평점 :
시간은 서서히 스며드는 것. 아침과 저녁이 솔기도 구획도 없이 이어지듯 삶과 죽음도 연결된다. 살아온 날을 헤아릴 수 있지만 남아있는 날을 가늠할 수 없다. 헤아릴 수 있다고 온전치 않고 가늠하는 정도라고 없음은 아니다. 기억은 과거를 단단히 붙들었다 싶지만 움켜쥔 손은 어느새 빈손이다. 소설은 주인공 요한네스 인생의 순간을 포착해 단언할 수도 확신할 수도 없는 사태를 인정하고 수용하도록 부드럽게 이끈다.
욘 포세의 『아침 그리고 저녁(박경희 옮김, 문학동네, 2019, 2000, 152쪽 분량)』은 시처럼 노래처럼 삶과 죽음을 성찰하는 소설이다. 욘 포세는 “입센의 재래”, “21세기의 사뮈엘 베케트”라 불리는 노르웨이 작가로 2023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였다. 1983년 장편소설 『레드, 블랙』으로 데뷔한 이래 전 세계 무대에 900회 이상 작품을 올린 극작가로도 명성을 높였다. 희곡과 소설, 시, 산문 등 다채로운 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작가에게 노벨 위원회는 “그의 혁신적인 희곡과 산문은 말할 수 없는 것에 목소리를 부여한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작가의 대표작이기도 한 『아침 그리고 저녁』은 이를 빼어나게 증명한다. 말할 수 없는 것들에, 뻐근하게 옥죄어오는 심정에, 고통이라고 슬픔이라고 단어를 나열하는 대신에 이미지를 활자화하고 분위기를 스케치하여 우리는 낯설고도 익숙한 지점에서 일상의 얼굴을 한 처음이자 마지막 날을 배웅한다.
소설은 태어나고 살고 죽는 인간의 전 생애를 보여준다. 1장에서 올라이는 아들이 태어나는 순간을 함께하며 그에게 아버지의 이름 ‘요한네스’를 물려준다. 아들 요한네스를 맞을 때 아내 마르타를 떠나보내는 암시가 짙다. 2장 첫 문장은 다음과 같이 시작한다. “요한네스는 잠에서 깨어나 뻣뻣하고 찌뿌듯한 몸으로 오래 거실 옆방의 커튼으로 가려놓은 침대에 누워 생각한다.”(p.33) 어서 일어나야지 다잡으며 그대로 누워 있는 그의 아침은 여느 누구와 별반 다를 게 없다. 더 이상 일터로 나가지 않아도 되는 그, 오랜 의무에서 자유로워진 그의 아침은 그런데 젊을 때와는 물론, 어느 때와도 다르다.
더 다른 건 몸이 너무 가볍다는 거다. ‘가뿐하게 일어나 앉는’ 그, 가볍게 일어나고 몸 뿐 아니라 머릿속도 날아갈 듯 가볍다고 여긴다. ‘풋내기 시절’(p.35)로 돌아간 것 같다. 그는 아침 식사를 하며 맞은편 비어있는 아내 에르나의 자리를 본다. 그는 물속으로 가라앉지 않으려던 미끼 생각을 한다. 연금을 받고 나서는 염려도 줄었다. 평안한 나날이다. 이질감을 잠시 내려놓고 하루 동안 할 일을 스스로 채워 넣는다. 이것, 저것 할 일을 만든다. 마음이 맞는 막내딸 싱네에게 갈까, 구두장이 야코프도 기억해보고, 날씨가 괜찮으니 노젓는 배로도 서쪽 멀리까지 갈 수 있겠다. 만으로 내려가는 길에 그는 특별했던 친구 페테르를 만난다. 페테르와 대화 중에 등장하는 노처녀 페테르센 이야기를 요한네스는 저지한다. 그녀가 죽은 건 확실한데, 아닌 듯 화제로 삼는 건 옳지 않다. 그러던 중 에르나를 처음 만나고 있다, 나 요한네스가.
작가는 이십 페이지 내외의 1장과 백여 페이지의 2장으로 작품을 완결했다. 1장은 요한네스 가 머물던 어머니라는 세상과 이별하고 세상 빛을 보는 첫 순간을 아버지 올라이 입장에서 그렸다. 2장은 일생을 살아내고 맞는 요한네스의 특별한 첫 날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서술한다.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으로 요한네스에게 의미있는 인물들을 불러내고 그들의 목소리와 시각을 고루 담아낸다. 태어나고 살고 죽는 과정에서 ‘살고’는 회상의 형식으로 결정적 장면만을 추린다. 소설은 1장을 아침으로 2장을 저녁으로 대비할 수도 있겠다. 서사는 간결하지만 의미는 함축적이고 상당한 메시지를 행간에, 여백에, 서술하지 않음에 숨기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글이 실험적이기를 의도한 바가 없다”(p.140)고 밝혔다지만 다분히 혁신적인 문체는 의식의 흐름을 매듭 없이, 온점으로 맺는 일 없이 이어나간다. 온점을 발견하면 눈을 비비고 다시 확인하며 낯설고도 놀란 기분이다. 열 번 남짓 마침표는 쓰였고 필자는 동그라미를 해 두었는데 옮긴이의 말에서는 친절하게 기록하고 있다.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p.16) 소설은 위 문장의 담담한 증언이다. 분량은 작지만 가볍게 완독할 수 있는 작품은 아니다. 어떤 문장은 명징하게 인간의 오래된 물음을 새겨 넣는다. “그리고 이제 에르나는 가고 없는데 빨래통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런 것이다,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 그리고 저 위 창고 다락에는, 오랜 세월 모인 많은 물건이 있다,”(p.43) 사람은 가고 사물은 남는다는 성찰은 얼마나 많이 되풀이 되었을까. 사물 앞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을까. 아주 특별한 장을 담그시고 아주 특별한 음식을 식탁에 올리시던 시할머니가 95세로 돌아가신 후에 남겨진 자그마한 쇠국자와 비취색 간장 종지를 보고 한동안을 먹먹했다. 할머니는 더 이상 못 보는데 허름한 국자와 종지가 그 자리를 지킨다니 국자에겐 죄가 없는데, 왠지 분하고 억울했다.
요한네스는 하루 동안 생의 중요한 순간을 회고한다. “에르나가 살아 있다면 더없이 좋을 텐데, 에르나가 가고 없는 것이 슬프다,”(p.101), “에르나가 아직 살아 있다면, 그렇다면 신이 나서 집으로 갈 텐데, 이제, 이제는 그럴 일이 없군,”(p.103) 책은 남은자의 슬픔을 고스란히 전한다. 묵묵한 어조가 더 맺힌다. 이미 그도 더 이상은 남은 자가 아닌데, 다시 한 번 회상의 기회를 얻는다. 죽음에 배웅 나온 페테르는 요한네스의 질문에 답한다. 목적지가 없나? 위험한가? 아픈가? 영혼은? 좋은가? 그리고 묻는다, 에르나는 거기 있나? 질문 그리고 사라질 것들.
소설은 절정이나 변곡점 없이 인간의 조건을 관조한다. 삶을 성찰하게 한다. 독자도 조금 더 멀리 떨어져 살아온 나날을 헤아리게 된다. 어떤 장면에서는 마치 영상처럼 서로가 서로를 통과하며 안타까움을 더하고, 글로 이미지를 겪으며 상상한다. 산문시처럼 계속 이어질 듯한 작품이 온점도 쉼표도 없이 끝날 때, 독자 역시 아쉽고 아프고 아끼는 마음으로 누군가를 부르게 될 것이다. 누구를 부르건 또는 불리우건 최선을 다해 오늘을 살아내야 한다는 건 자명하다. 그런 하루가 빼앗기지 않을 의미를 만들 것이다. 2024년 마지막으로 읽은 책은 『아침 그리고 저녁』이었고, 서평은 의도치 않게 2년에 걸쳐 쓰게 되었다. 31일과 2일까지. 완독이라고 체크할 수 있을까. 어떤 작품은 완독되지 않은 채 여정에 머물며 무심하게 흔들린다. 물결이 고정되지 않는 것처럼 말이다. 이와 같은 사후, 문학적이고 아름답다. 동의는 차치하고. 하나의 가능성이자 열린 질문을 품은 작품이 새로운 해에 권하는 첫 책이 되었다.
책 속에서>
이제 아이는 추운 세상으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곳에서 그는 혼자가 된다, 마르타와 분리되어, 다른 모든 사람과 분리되어 혼자가 될 것이며, 언제나 혼자일 것이다, 그러고 나서, 모든 것이 지나가, 그의 때가 되면, 스러져 다시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 왔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다, 무에서 무로, 그것이 살아가는 과정이다, 사람이나, 동물이나, 새, 물고기, 집, 그릇, 존재하는 모든 것이,(p.16)
오늘은 뭘 해야 하나? 온종일 틀어박혀 있을 수도 없고, 에르나가 죽은 후로는 마치 모든 온기가 그녀와 더불어 떠나버린 듯 집안이 너무도 썰렁해졌다, 그래 물론 난로에 불을 피울 수도 있다 그리고 전기히터를 틀 수도 있다, 그리고 히터 온도는 항상 제일 높게 맞추었다, 그는 아무것도 아끼지 않았고, 더 이상 그럴 필요도 없었다, 나이가 들어 다른 사람들처럼, 연금을 받으면서부터는, 하지만 어떻게 해도 집은 온전히 따뜻해지지 않았다, 그리고 전등을 아무리 켜도, 더 이상 온전히 환해지지 않았다,(p.3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