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 원정을 떠났을까? - 데모스테네스 vs 알렉산드로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9
최재호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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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세계를 평정했던 왕 알렉산드로스

처음으로 동방이라는 곳을 내 나라 영토로 만들었던 왕!

당대 최대 정복가로 동서 융합 정책을 폈던 왕

 

데모스테네스는 웅변가.

그는 말더듬이였는데 노력으로 인해 명연설가가 되다.

자살로 비극적인 말로를 겪은 자

 

정복자인 알렉산드로스와 민족주의자였던 데모스테네스의 불꽃 튀기는 법정 싸움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읽었던 책인 [왜 알렉산드로스는 동방원정을 떠났을까?]

 

교과서에는 알렉산드로스를 그리스 문화를 숭상하고 탐험했다라고 표현한다.

그러나 실제 이 책에서 보면 그는 왕이 된 후 마케도니아와 그리스식 궁정 외에 동양식, 페르시아식 궁정도 지었다고 하니 그리스 문화를 숭상했다는 것은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인을 가장 무시했다고 하니 참 아이러니하다.

알렉산드로스의 동방원정으로 인해 생겨난 문화가 [헬레니즘 문화]이다. 헬레니즘의 뜻은 '그리스 풍의' 라고 한다. 헬레니즘 문화는 그리스와 동양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은 결과 철학, 수학, 의학,물리학의 발달을 가져왔고 인도의 간다라 미술도 발전시켰다.

 

그러나 데모스테네스는 알렉산드로스가 아테네의 고유문화를 파괴하고 자신의 왕위의 입지를 굳히기 위해 명분만 그리스를 위한 복수전이란 동방원정을 감행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전쟁에 반대했다. 결국 알렉산드로스가 죽고 난 후 제국은 분열되고 로마제국에 의해 멸망당한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서는 알렉산드로스의 손을 들어준다.

그리스 우월주의에 빠졌던 데모스테네스에게 인종을 초월한 세계에 관점을 두라고 조언한다.

 

위대하기만 한 인물인줄 알았던 알렉산드로스는 아버지를 살해하고 왕위를 가로챘다는 주장도 나왔다는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고 그의 동방원정으로 인해 우리가 생각지 못했던 더 많은 일들이 있었다는 것도 역사의 뒷 이야기로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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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소크라테스는 독배를 마셨을까? - 아니토스 vs 소크라테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7
육혜원 지음 / 자음과모음 / 201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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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소크라테스는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소크라테스를 떠올리면 '너 자신을 알라'와 '악법도 법이다.'라는 말이 기억난다.

소크라테스는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로 서양 철학의 기초를 세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아테네의 정치가 부패하자 소크라테스는 모두가 잘사는 나라를 만들기 위해

민주주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며 그의 사상을 펼쳐나간다.

그의 세력이 커지자 결국 권력자들과 소피스트들은 그를 법정에 고발하고그는 청소년을 타락시키고 신을 모독했다는 죄명으로

독배를 마시고 죽게 된다.

 

이 책에서는 소크라테스의 평가가 과대하게 되었다고 소송을 제기한 원고 아니토스아 피고 소크라테스의 법정이야기를 다룬다.

소크라테스는 지혜를 사랑했고, 언제나 지혜를 갈구했으며 대화법을 통해 그의 사상을 펼친다.

결국 그는 아테네의 민주정을 비판하고 청소년을 선동했다 평가받았지만, 자세한 내용을 살펴보면 그는 민주정치를 실현하는 전문가가 없는 아테네를 비판했고 그는 그에게 내려진 악법을 또한 법이라 말하며 독배를 마시고 목숨을 잃는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손을 들어준다.

아니토스의 진술에 합당한 증거도 부족하고 억지스러운 주장임을 인정한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사형을 선고받은 후 도망갈 수도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그것을 예상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순순히 독배를 마신 이유는 그의 사상을 그렇게라도 후대에게 알리고 싶어했었던 의지가 아니었을까.

 

법정시리즈를 통해 역사 속 위대한 인물들을 재조명해보는 것의 즐거움이 크다.

소크라테스와 그가 살았던 시대적 배경을 알게 되니 더 많은 이해와 통찰력이 생기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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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콜럼버스는 신항로를 개척했을까? - 아나카오나 vs 콜럼버스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28
손세호 지음, 조환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3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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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럼버스에 대해 재조명해보았던 유익한 책 읽기의 시간이었다.

우리가 배우는 역사는 앞면만 보이는 물체의 겉만 배웠던 것 같다.

콜럼버스는 미지의 신대륙을 개척한 자로서 그가 없었다면 지금의 아메리카 대륙이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 평가되는 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단편적인 지식이었다. 미국과 세계 곳곳에 세워진 그의 동상과 기념비의 숫자를 보더라도 세계 속 그의 이미지를 알 수 있다. 진세계에 590개, 미국에만 158개나 된다고 하니 개인의 동상으로 치면 엄청난 숫자이다. 미국에서는 매년 10월 두번째 월요일을 '콜럼버스의 날'이라고 국경일로 정하고 기념한다.

이렇듯 동상이 많으니 위대한 인물이려니 생각했던 그의 뒷면을 보니 단순하게 생각할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발견한 신대륙은 그가 간절히 염원했던 인도땅이 아니었고 그는 죽을 때까지 그 땅이 인도인줄 알았다.

에스파냐인들의 세계 탐험이 한창이었던 그 시절 콜럼버스는 여왕의 후원을 받아 용감하게 인도를 향해 배를 탄다.

그러나, 그는 남들이 가는 방향으로 가지 않고 반대방향으로 가면 더 빨리 인도땅에 도착할거라는 계산을 한다. 그가 제작한 지도에서 보면 그의 계산의 오류를 알 수 있다.

그를 환대했던 신대륙의 원주민들은 앞날은 예상하지 못한 채 그들의 순수한 손님맞이를 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그는 신대륙의 발견자라기 보다는 정복자에 가까운 일들을 저질렀다.

원주민들을 노예로 부리고, 재산을 약탈하고, 전염병으로 90%이상을 죽음으로 몰아간 여러가지 원인을 제공하기도 한다.

이런 과정에서 겪었을 원주민의 고통과 절망을 생각해보니 인류의 발전역사가 가져온 긍정적인 면 뒤에 숨어진 결과에 입이 딱 벌어진다. 너무나 많은 원주민들이 학대당하고 전염병으로 죽고 유럽으로 노예로 팔려가고 남겨진 여자들은 성적 모욕과 수치를 당하며 혼혈민족까지 생겨나니 그들의 입장에서 보면 콜럼버스는 원수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메스티소라는 혼혈민족은 원주민과 백인 사이에서 태어난 이들을 가르키는 말이다. 오늘날 중남미 인구의 60~70%에 해당한다고 하니 그 숫자가 상당함을 알 수 있다.

콜럼버스가 좀 더 인간적으로 원주민들을 대했으면 어떤 결과가 있었을까..

그들을 하나의 인격체로 대하며 화합과 융합을 꾀했다면 어떠했을까...

아쉬움이 많이 남는 역사의 한 대목을 보며 책장을 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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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잉카 제국은 멸망했을까? - 아타우알파 vs 프란시스코 피사로 역사공화국 세계사법정 29
정명섭 지음, 이남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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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이 종종 엄마의 말문이 막힐만한 질문을 하곤 하는데, 그중에 하나가 잉카문명이었다.

어느날 아들은 잉카문명이 어느 나라에서 생겼냐는 질문을 했다.

갑자기 각종 문명이 머릿속에 또아리를 틀더니 결국 어느 나라라고 콕 찝어 말이 나오질 않았다.

벌써부터 이런 모습 보이면 안되는데...하며 집어든 역사곻화국 세계사법정 시리즈

'왜 잉카제국은 멸망했을까?'

잉카 제국은 안데스 산맥을 중심으로 칠레, 페루, 에콰도르와 볼리비아를 아우르는 대제국이었다고 한다.

잉카 제국의 특징은 발달된 도로망, 파발꾼, 체계적인 지방 행정 체계, 계단식 경작지 그리고 인공수로까지 대단한 문명적 특징을 가진다.에스파냐인에 의해 멸망된 그들은 결코 멸망할 것 같지 않은 대제국이었음이 더 미스테리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에스파냐인들에게 정복당했는지 자세히 살펴보자.

태양신의 후예라고 믿었던 잉카인들은 에스파냐인들이 처음 왔을때 비라코차라는 세상을 만든 신이라고 착각했다고 한다.

그러므로 처음엔 싸움조차 할 생각이 없었고, 그 이후 천연두의 확산으로 왕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죽어서 에스파냐의 침략에 힘없이 쓰러지고 말았다.아타우알파는 황금을 주면 자신을 풀어준다는 말에 나라 전체에서 황금을 모아 주었지만 결국 계략에 말려들고 만다.

그렇다면 역사공호국 세계사법정에서는 누구의 손을 들어주었을까?

개인적으로는 잉카제국의 손을 들어주고 싶었다. 그러나 세계사법정에서는 양측의 주장이 모두 타당성이 있다는 결말은 내린다.

 

에스파냐인들의 잉카 원주민 학대는 잘못된 행위라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다른 부족과의 교류가 없었던 잉카인들에게 에스파냐인들의 출현은 어떠했을까..

 

어릴적 보았던 문명이야기를 다룬 다큐가 떠오른다. 늘 정복자보다는 정복을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역사를 조망해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결과가 어떻게 진행되었던지간에 인간에 대한 학대나 멸시 행위는 시대를 초월한 보편타당한 가치에 위배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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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광해군은 억울해했을까? - 광해군 vs 이귀 역사공화국 한국사법정 34
김태희 지음, 박상철 그림 / 자음과모음 / 201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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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 아이와 함께 읽은 책은 광해군에 대한 내용을 다룬 [왜 광해군은 억울했을까?]이다.

역사에 관심이 많은 샐리와 쟈니가 어느날 나에게 질문을 했다.

"왜 광해군은 군이라고 호칭을 불러요? 왕인데."

"............"

사실 그 부분에 대해 자신있고 조리있게 답변하기 애매할 정도의 지식만 가진지라

책을 읽으며 그런 궁금증들을 해소해나가게 되었다.

사람들은 광해군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적어도 영화가 나오기전까지는.

광해군도 연산군처럼 그렇고 그런 일들을 해서 왕이 가지는 호칭조차 불리지 못했을 거라는 막연한 추측을 했을 것이다.

광해군은 조선시대 15대왕으로 임진왜란때 세자가 되어 선조의 뒤를 이어 왕이 되었다.

세자일때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민심을 수습하는데 앞장섰다는 사실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조선시대 어느 세자도 광해군처럼 전쟁터에서 고생스런 일들을 행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광해군이 자신의 명예를 회복시켜 달라는 내용으로 광해군의 치적을 알아보고 그가 저지른 과오도 되돌아본다.

광해군이 세자가 되고 왕이 되는 일들은 순탄하지 않았다. 그는 후궁의 자식이었고, 첫째 아들도 아닌 둘째 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왕이 되었던 때는 임진왜란이라는 거대한 전쟁 아래 폐허가 된 조선땅이 있었고 굶주린 서민들이 고통받는 시기였다.

광해군은 황폐해진 나라를 일으키기 위해 대동법을 시행하고 동의보감을 편찬하게 한다. 또한 사대주의에 얽매이지 않고 국제정세에 과감하고 현명하게 실리외교를 펼친다. 그런 이유로 그는 신하들의 원성을 사고 결국 붕당정치로 분열이 되고 마는 것이다.

그렇다면 아이들이 물어본 '군'이라는 호칭은 어떻게 붙여진 것일까? 임금은 원래 -조나 -종으로 끝나는 임금 이름을 받는데 광해군은 억울하게도 묘호를 받지 못하고 세자때의 이름을 그래도 사용한다. 이렇게 불려진 분들은 세 분이 있는데 노산군, 연산군, 광해군이 있다. 노산군은 나중에 단종이라는 묘호를 받게 되어 명예를 회복했고 연산군은 폭군이라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광해군은 많은 업적을 남겼는데 받지 못한 것은 정말 억울한 일이라 생각된다.

광해군이 폭정을 했다고 여겨 인조반정이 일어나고 신하들이 등을 돌리는 안타까운 사건은 인간 광해군의 굴곡진 삶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롭게 알게 된 광해군의 사실에 많이 감동했다.

그 누구보다도 힘들게 세자가 되고 왕이 되었던 그, 아버지인 선조의 왕다운 책임감 있는 모습을 보지 못하고 자랐음에도 백성을 위해 애썼던 그가 자랑스러웠다. 우리가 그의 호칭을 광해군이라 부르는 것이 미안하다.

참 미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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