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블로 피카소의 작품, 이 작품은 한국전쟁 당시의 민간인 학살을 표현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러한 이유 때문인지, 박정희 시절 피카소를 이름을 크레파스에 넣었다고 처벌받았던 이도 있을 정도다.)

 

한국전쟁 당시 양민학살의 규모는 상상을 초월했다전쟁 초기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발생한 국민 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만 하더라도 2~3달도 안 되는 사이에 남한 땅 전역에서 30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이러한 사실을 통해한국전쟁에서 우익들이 저지른 학살은 매우 광범위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이러한 학살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키고 나서도 지속됐으며, 9.28 서울 수복 후에도 부역자 색출이라는 미명아래 이승만 정부의 또 다른 양민 학살이 광범위하게 발생했다학살은 미군에 의해서 발생하기도 했으며특히나 폭격에 의한 학살이 가장 광범위했다한국전쟁 시기부터 현재까지 북한에서 강하게 주장하는 미군에 의한 학살이 있다그것이 바로 신천양민 학살(Sinchon Massacre)이다.

(현재 북한에서 제시하는 신천양민 학살 민간인 희생자의 수치, 이 숫자는 대략 그 지역 인구 1/4 수준이다.)

 

신천양민 학살은 1950년 10월부터 12월까지 한국군과 미군이 북진하며 전진하는 상황에서 발생한 학살로 대략 3만 5,000명의 무고한 민간인이 학살된 것으로 알려졌다놀랍게도 학살당한 민간인의 숫자는 그 지역 인구의 1/4이다신천양민 학살은 과거 한국에서 신천 10·13 반공 의거라고도 불렸고현재 북한에서는 신천 대학살로 불리고 있다현재 한국 학계에서는 북한에 있던 우익 세력인 반공 청년단들이 한 것으로 판단하거나좌익과 우익 갈등 속에서 희생된 것으로 얘기한다반면 북한에서는 이 학살을 미제국주의자들이 저지른 끔찍한 학살로 얘기한다신천양민 학살은 양측의 입장과 의견이 판이하게 갈린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신천 박물관에 있는 상상화)

 

우선 북한에서 주장하는 미군의 학살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현재 북한에서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하고 있고신천에 만들어진 박물관에도 그렇게 기록하고 있다북한에서는 신천 미점령군사령관인 해리슨과 그 휘하의 미군을 학살의 주체로 지목한다북한의 자료에 따르면미군과 한국군이 들어온 시점부터 후퇴하게 되는 시점까지 신천에서 미군들에 의한 학살이 발생했으며그러한 학살은 매우 야수적이었다고 한다. MBC에서 했던 <이제는 말할 수 있다.>의 신천학살 편을 보면 이들의 증언도 확인이 가능하다한 북측 시민의 증언을 인용하자면 다음과 같다.

 

이때 미군 한 놈이 나타나더니뭐라고 지껄이면서사람들을 직접 쏴 죽이면서말하는 것이었습니다옆에 통역 놈이 말하기를 빨갱이는 모조리 죽여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이 놈이 바로 미국 장교 해리슨이라는 놈이었습니다.”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지목한 것은 비단 북한 뿐만은 아니었다대표적으로 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 활동했던 국제여맹 단원들이 그러하다한국전쟁 당시 북한에서는 국제민주여성연맹(Women's International Democratic Federation)이 미군을 포함한 유엔군과 한국군 그리고 우익들의 학살과 잔혹행위 등을 조사했었다이들은 미군의 무차별 폭격 현장을 직접 목격했고양민학살에서 살아남은 이들이 하는 증언들을 기록했다이들의 기록에 따르면 유엔군 점령 기간 동안 대략 12만 3,000명의 황해도 시민의 학살당했다고 썼다이 수치는 당시 영국 노동당 신분으로 참가했던 모니카 펠턴(Monica Felton)이 제시한 것으로 국제여맹 인사들 중에 가장 우익 성향의 인물이 주장한 것이다펠턴의 주장에 따르면황해도 안악시에서만 1만 9,092명의 주민들이 미군과 영국군 그리고 한국군에 의해 학살되었다이는 아마도 당시 북한 측의 제시한 수치와 자신이 조사한 자료를 통해 나온 것으로 확인된다.

(신천양민 학살 희생자의 묘, 이 묘 또한 신천 박물관 근처에 있다.)


(신천양민 학살 당시 양민들이 학살당한 현장)

 

앞에서 제시한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있다즉 한국군과 미군에 의한 학살이 결코 없지 않았고그 규모가 작지 않았다는 사실이다그러나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을 뽑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반론도 결코 만만치 않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는 신천양민 학살을 다룬 편에서월남한 생존자들과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의 진술을 토대로 당시의 사건을 추적해 들어갔다그러나 당시 신천에 주둔했던 미군은 지명만 기억할 뿐 그리 오래 있지도 않았으며 북진하기 바빴고신천에 주둔한 기간이 매우 짧았다고 한다또한 또 다른 미군은 부대가 지나갔음에도 본인 스스로 그 지명조차 기억하지 못했다그리고 무엇보다 북한에서 학살의 배후로 뽑은 윌리엄 해리슨은 자신이 신천에서의 학살 주동자로 지목당한 것에 큰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했으며그가 신천에 있지도 않았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도 있다.

(신천양민 학살을 묘사한 벽화)


(2010년대에 새로 단장한 신천 박물관 일부 모습, 자세히 보면 미군 옆에 하얀색 완장을 낀 우익 치안대도 보인다.)

 

즉 이러한 부분에서 북한의 자료와 미국의 자료가 엇갈리는 점이 있기에 나는 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미군이라 결론짓지 않는다그러나 미군 자체가 아예 무고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우선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 나온 내용에는 좌우익 양측의 학살이라는 점에 주목했지만중공군과 인민군의 남진 이후 미군이 과연 후퇴시기에 신천을 거쳤는지는 얘기하지 않았다. 1950년 7월 노근리에서 미군에 의해 300~400명의 양민이 학살당했던 것을 생각하면미군에 의한 학살 가능성이 후퇴도중 일어났을 가능성도 아주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을 미국이 한 것이라 보는 입장은 이런 점에서 맥락적으로 틀리지 않았다고 볼 수 있다신천양민 학살의 주체로 지목되는 반공 청년단은 사실상 미국이 지원한 세력이기 때문이며설사 미군 자체가 학살의 배후가 아니라 하더라도 이들을 지원하는 주체는 미국이기 때문이다적어도 이들을 방조한 책임도 크다고 지적할 수도 있을 것이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2002년 당시 신천양민 학살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나는 이 학살의 주체가 북한에 숨어 있던 반공 청년단이라 본다사실 반공 청년단의 존재는 맥락적으로 그리 생소하지 않다우선 한국전쟁 시기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친공 포로와 반공포로가 서로 죽고 죽이는 사태가 벌어졌었고양측의 포로 문제는 휴전회담에 큰 장애물이기도 했다또한 북한에서 주장하는 신천양민 학살의 참혹성이나 잔혹성을 따지고 보면제주 4.3 항쟁이나 여순항쟁에서 한국군과 우익 청년단들이 보였던 행위들과 너무나도 일치하는 부분들이 많다거기다 당시 학살에 참여했던 이들 중 월남한 이들은 자신들의 학살 행위에 대해서 제법 많이 증언했다그리고 북한 자체도 이들의 존재를 부정하지 않는다다만 주된 주체를 미군으로 설정해놓은 것 뿐이다.

(신천 박물관을 방문한 김정은 위원장, 신천 박물관은 1960년대 김일성의 지시로 만들어져 김정일 김정은까지 그 규모를 확장했고, 반미주의 학습을 위해 사용되기도 한다.)

 

어쨌든 신천에서는 천인공노할 학살이 이승만 정부 하에서 발생했다필자는 신천양민 학살을 이승만 정부의 북한 통치 기간에 저질러진 우익들의 양민 학살로 생각한다그런 점에서 소위 이승만의 북진통일은 북한 민중에게는 너무나도 잔혹하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고 본다마지막으로 미군의 잔혹행위에 대해 더 첨언하고 싶다물론 내가 북한이 주장하는 신천에서의 미군에 의한 학살을 다소 부정하는 투로 얘기했지만나는 미군이라면 그러한 짓거리를 저지르고도 남을 주체라 생각한다북한에서 묘사한 신천학살의 참혹성은 실제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군이 남베트남에서 벌이던 전형적인 군사작전의 모습이기 때문이다이들은 민간인의 시체를 베트콩 사살로 처리하고 전과를 과장했다그런 점에서 미제국주의 군대의 잔혹성은 굳이 신천이 아니더라도 충분히 여러 근거를 통해 입증이 가능하다.

 

신천양민 학살을 저지른 반공 청년단들은 말 그대로 서북청년단과 같은 이들이다이들은 북한에서 그런 끔찍한 학살을 저질렀으며이승만 정부의 북한 점령 2달 동안 수십 만명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하고 빨갱이로 몰려 죽었다는 사실을 절대로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신천양민 학살이라는 참혹한 역사를 통해 우리가 알아야할 역사적 사실은 바로 그 점에 있다고 나는 굳게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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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원과 이승만, 본인 스스로 백두산 호랑이라 칭하던 김종원은 이승만과 각별한 사이였다. 이승만이 말하는 애국이란 이런 학살자들과 친일파들을 앞세운 것이라 할 수 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군과 우익들이 저지른 양민 학살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다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이미 1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했고한국전쟁에서만 대략 70만 많게는 10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학살당했다국민 보도연맹 학살만 하더라도 최소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이 이승만과 그 지지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전라도와 경상도 사이에 있는 지리산에서는 1948년 여순항쟁 시점부터 소위 빨치산들이 미군정과 이승만 정부에 맞서 게릴라전을 전개했다여순항쟁 이후 빨치산이 게릴라전을 벌인 이유는 분명했다이승만과 미국이 여수와 순천에서 무고한 양민들을 대량 학살했기 때문이었다.

 

일본군 하사관 출신으로 태평양 전쟁 당시 파푸아뉴기니 전투에 참전했던 김종원은 1948년 여순항쟁 당시진압군을 지휘한 김종원은 여수중앙초등학교 운동장에 민간인들을 뫃아놓고 온갖 잔혹한 학살을 저질렀다그는 직접 나서서일본도로 민간인의 목을 즐겨 벳고베다 지치면 권총이나 소총으로 민간인들을 쏘아 죽였다당시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김종원은 인간으로서는 할 수 없는 짓들을 했었던 것이다.

(최덕신, 광복군 및 중국 국민당군 출신으로 1951년 거창양민 학살을 일으킨 인물이다. 그러나 아이러니 하게도 박정희 시절 독재정권에 반대했으며, 더 나아가 1980년대에 월북했다. 캄보디아의 노로돔 시아누크 같은 인물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대한민국 전역에서는 이른바 국민보도연맹 학살(Bodo League Massacre)로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우익들에 의해 무차별 학살당했다맥아더가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이후 서울을 탈환하고 나서도 소위 부역자 색출이라는 명분하에 이승만 정부는 또 다시 천인공노할 학살을 자행했고, 38선을 돌파하여 점령한 북한 지역에서도 양민 학살을 저질렀다이러한 양민 학살은 한국전쟁 기간 내내 발생했으며특히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지리산 지역에서 미국과 이승만 세력에 의해 자행됐다. 1951년 중공군과 인민군이 서울을 다시 재점령하며한국군과 유엔군에게 반격을 하던 시기또 다른 양민학살이 한국군과 우익들에 자행됐다그것이 바로 거창양민 학살 사건이다.

(거창양민 학살 당시 희생된 무고한 민간인의 시신)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후퇴하지 못한 인민군들은 지리산 일대로 숨었고노령산맥의 줄기를 따라 순창·정읍·남원·장성·구례등 호남일대와 거창·산청·함양·합천 등지에서 활동하기도 했었다한국군의 단독적인 38선 돌파 이후 이승만 정부는 10월 2일 공비토벌을 목적으로 육군 제11사단을 창설했고빨치산 출몰 지역에서 토벌에 나섰다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가 밀리자숨어있던 빨치산들은 신원지서를 습격했었으며 이에 따라 경찰과 군인 몇 명이 사살되기도 했다.

(학살을 나타낸 박물관에 있는 모형)

 

이에 따라 한국군은 거창과 함양·산청 등 지리산 남부지역에서 이른바 공비소탕작전을 펴기로 했고, 2월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들어갔다. 1950년 2월 9일부터 11일까지 한국군은 경남 거창군 신원면에 빨치산을 소탕한다며 진입했고인근 지역 주민들을 신원초등학교에 집결시켰다여기서 빨갱이로 몰린 사람들은 모두 박산골로 끌고 가 무차별 사격을 가했으며죽은 시체 위에는 솔가지를 덮고 휘발류를 뿌린 다음 불을 질렀다동시에 마을 집들도 모두 불태웠다놀랍게도 이러한 전략은 만주에서 일본군이 했던 전략이고그리스에서 미군사고문단과 왕당파들이 했던 전략이며제주 4.3 항쟁 당시 한국군이 했던 전략이다또한 이후 베트남 전쟁에서 미군이 했던 전략이기도 하다.

 

거창에서만 719명이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은 전부다 죄없는 민간인들이었으며 아이노인여성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심지어 1~2살짜리 갓난아기들도 학살당했다학살당한 이들의 인적구성을 보면 여성이 51.3%였고어린이와 청소년 45.3%, 60세 이상 노인 5%였다이외에도 산청·함양에서도 705명이 학살당했으며총 1,424명이 학살당했다학살을 자행한 한국군은 이 학살 사건을 은폐하려고 피해 현지와 외부의 왕래를 차단하고 생존주민에게 실상을 발설하는 자는 공비로 간주총살하겠다고 위협했다이 학살을 주도한 인물은 바로 최덕신이었다그는 이후 박정희 정부에 반대하는 행동을 하다가천도교 교령으로 활동하다가, 1986년에 월북했다역사의 아이러니다.

(현재 경남 거창에 있는 희생자들 묘비)

 

그러나 한 달 후인 1951년 3월 학살 소식을 들은 신중목은 국회 본회의에서 빨갱이 잡으라고 보낸 토벌대가 죄 없는 양민 500명을 살육했다.”고 폭로했으며조사단이 4월 6일 현지에 파견됐다당시 국방장관이었던 신성모는 이 사건을 덮으려고 했지만결코 덮지 못했다여순항쟁 당시 양민 학살에 앞장섰던 김종원도 이 사건을 은폐하려고 했다그는 자신의 병력을 빨치산으로 위장하여조사단에게 따발총(PPSH-41 소련제 기관단총)으로 위협사격을 가해 철수하게 만들기도 했다.

 

진상조사 초기 이승만은 이 사건을 은폐하고 조작하려 했지만결국 진상조사를 실시했고오익경한동석 그리고 김종원에게 징역을 선고했다그러나 총 책임자인 최덕신은 처벌받지 않았으며김종원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석방됐으며징역을 선고받은 이들 모두 1년 내로 석방됐다이 사건이 다시 조명 받은 것은 1960년 4.19 혁명 이후 유족회가 결성되면서 부터였다그러나 이들의 활동도 5.16 쿠데타로 박정희가 정권을 잡으면서 다시 한 번 침묵의 시간을 가지게 되었으며민주화 이후에 다시 조명됐다.

 

참고문헌

 

김삼웅한국현대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임기상숨어 있는 한국 현대사 2인문서원, 2015

 

임종금대한민국 악인열전피플파워, 2016

 

손호철'작전명령 5'로 시작된 어린이·여성·노인 무차별 학살프레시안, 2021.03.24.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2021032318150663165#0DK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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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Nick Turse의 저서 <Kill Anything That Moves>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후에 전투 당시 투입된 미군 탱크)


As U.S, and South Vietnamese forces launched a counterattack to take back the city, another bloodbath commenced. Reporing on the marines as they fought street to street, the CBS television correspondent John Laurence asked Lieutenant Colonel Ernie Cheatham what would happan to innocents trapped between them and the guerrillas. “I'm pretty sure they are civilians that we would consider bad guys right now,” Cheatham replied.

 

Navy ships lobbed 7,679 shells into Hue, and Marine Corps aircraft flew dozens of sorties, dropping napalm and five hundred pound bombs on residential neighborhoods. In all, U.S. forces unleashed an astonishing six hundred tons of bomb, plus barrages from artillery and tank cannons, dismantling the city in a chorus of explosions while ground troops fought street street. “We used everything but nuclear weapons on this town,” said one marine. Another admitted, “A great many civilians must have died in the fighting. If you saw or heard-or thought you saw or heard- movement in the house next door, you didn't stop to knock; you just tossed in a grenade.”

 

At least 3,800 of Hue's citizens were killed or reported missing as a result of the bombardment and battle, and 116,000 people were made homeless. More than three quarters of the city's homes were destroyed or seriously damaged. “Nothing I saw during the Korean War in the Vietnam so far has been as terrible, in terms of destruction and despair, as what I saw in Hue,” wrote the correspndent Robert Shaplen. Cheatham, the commmander of the 2nd Battalion, 5th Marines, put it more simply; “We pretty much destoryed the place, I guess.”

 

Source: Kill Anything That Moves p.103

 

미군과 남베트남군이 도시를 재탈환하기 위해 반격을 게시하자, 또 다른 유혈극이 일어났다. 미 해병대가 시가전을 벌이는 것을 보도함에 따라, CBS 텔레비전 특파원인 존 로렌스는 어니스트 치트햄 중령에게 미 해병대와 게릴라 사이에 갖힌 민간인들에게 무슨일이 일어날지 질문했는데, “나는 현재 나쁜 놈들로 여겨지는 그 무고한 이들이 민간인들이라 생각한다.”라고 치트햄은 대답했다.

 

미해군 군함은 7,679개의 포탄을 후에에 투하했고, 미 해병대의 전투기는 수십차례나 출격했으며 네이팜 폭탄과 500파운드나 되는 폭탄을 인구 거주 지역에 투하했다. 미군은 모두 합쳐600톤의 폭탄과 대포와 탱크 대포로 포격을 퍼부었으며, 지상병력이 시가전을 벌이는 동안 엄청난 폭발로 도시를 파괴했다. “우리는 핵폭탄을 빼고는 이 도시에 모든 것을 퍼부었다고 한 미군 해병은 말했다. 다른 해병은 무수히 많은 민간인들이 이 전투로 죽었을 것이다. 만약 당신이 다른 집으로 이동하는 것을 보거나 들었다면(혹은 보거나 들은 것을 생각한다면), 당신은 그곳을 공격하는 것을 막지 못했을 것이다. 당신은 그저 수류탄을 던졌을 것이다.”라고 인정했다.

 

최소 3,800명 이상의 후에 시민이 미군의 폭격이나 전투로 죽거나 실종되었고, 116,000명 이상의 민간인이 노숙자가 되었다. 도시의 3/4 이상이 파괴되거나 극심하게 손실됐다.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 동안 내가 본 그 어떤 것도 절망과 파괴 면에서는 후에 도시에서 본 것 만큼 끔찍하지 않았다.”라고 로버트 셰플린 특파원은 기록한다. 미 해병대 제2대대 5연대 지휘관인 치트햄은 좀 더 간단하게 표현했다. “내 생각에는 우리가 그곳을 거의 다 파괴했는걸.”

 

출처: 움직이는 것은 뭐든 죽여라 p.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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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노정협 사무실을 들렸다가 우연히 흥미로운 책 한권을 발견했다. 멕시코 만화작가 리우스가 쓴 <산디니스타 니카라과>. 1980년대 극단적 친미 반공주의자 로널드 레이건은 소위 이란-콘트라 스캔들(IranContra affair)’을 야기하여, 국제적으로 비난을 받은 적이 있다. 레이건 정부는 이란과 무기를 거래하고 받은 돈으로 니카라과에 있는 콘트라 반군을 지원했다. 당시 콘트라 반군은 1979년 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니카라과의 산디니스타 정부를 전복시키려던 세력이었다.

 

콘트라 반군에게는 정당성이 전혀 없었다. 이들은 카터 정부와 레이건 정부로부터 대대적인 지원을 받아가면서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는 행동에 착수했다. 또한 니카라과 인민들을 대량 학살했다. 미국은 니카라과 정부에게 대대적인 경제제재를 가했고, 혁명 정부는 소련의 지원에 의존해야 했다. 당시 미국이 지원한 세력은 반민중적이고, 무자비한 학살을 자행한 세력이었다. 이들은 니카라과인의 소수를 이루는 자본가 계급을 대변했으며, 당연히 민중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 없는 이들이었다. 반면 1979년 혁명을 통해 탄생한 산디니스타 정부는 억압받고 착취 받던 계급의 이익과 입장을 대변했다.

 

1979년 산디니스타 혁명 이전에도 니카라과의 상황은 비슷했다. 19세기 중후반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에 진출하여, 그 나라 자원과 국부를 수탈했다. 대표적으로 연합과일회사(United Fruit Company)를 포함하여, 미국의 기업들은 니카라과를 사실상 식민 지배했다.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는 직접적인 식민 지배를 했고, 1930년대 이후에는 간접적인 식민지배를 했다. 미국이 지원하는 세력은 반민중적이었다. 친미세력들은 미국의 지원을 받았고, 때로는 양민을 학살했다.

 

1912년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점령이 시작된 이래로, 니카라과인들은 미제국주의에 저항했다. 아우구스토 산디노라 불리는 혁명가는 게릴라전을 통해, 점령군 미해병대에 맞서 싸웠다. 미국은 산디노의 게릴라 세력들을 뿌리 뽑기 위해, 대규모 전투기 편대를 조직하여 마을에 무차별 폭격했으며, 기총소사를 퍼부어 죄없는 농민과 부녀자 그리고 어린이 300명을 학살했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들은 미국의 캘빈 쿨리지 대통령에 의해 영웅적인 군사행동으로 찬양받았으며, 민간인을 무차별 학살한 전투기 조종사들은 백악관에서 대통령이 주는 훈장을 받았다. 소름끼치게도 이러한 비극은 이후 그리스 내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반복됐다.

 

미국 언론들은 산디노의 게릴라 부대에 대한 온갖 흑색선전을 했다. 미국의 언론들은 산디노 부대를 약탈자, 살인자, 악마적 투기꾼들, 강간자들, 침략자들과 같은 수식어로 흑색선전을 했다. 한국전쟁 당시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빨치산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했던 것과 일치한다. 마찬가지로 베트남 전쟁 시기 미국과 남베트남 언론이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던 베트콩들에 대해 온갖 악의적인 왜곡 보도와 흑색선전을 하며 테러리스트라 매도했던 것과 똑같다. 그리고 현재 친미주의자들은 100년 전부터 미국이 했던 이러한 왜곡된 흑색선전을 아무런 검증 없이 믿는다.

 

1930년대 등장한 소모사 정권은 40년에 걸쳐 이른바 3대 세습 독재를 했다. 많은 이들이 북한이 3대 세습 독재를 비난하지만, 정작 미국이 3대 세습을 지원했다는 점에 대해선 무비판적이며 무지하다. 아니 사우디아라비아와 같은 전 근대주의적 국가에 대해선 아무런 말도 없다. 미국이 주장하는 소위 인권 타령의 진면목일 것이다. 1960년대에서 1970년대 기준으로 소모사 일가의 전 재사는 미화로 9억 달러였고, 미국 기업의 외자 투자액도 상상을 초월했다. 그러나 당시 니카라과 민중은 세계 최대의 빈곤국중 하나였다. 니카라과의 실업률은 36%였고, 민중의 문맹률은 74%였으며, 유아사망률은 최소 20%를 넘겼다. 주택 불청결도 70%에 민중의 60%가 영양실조였다. 또한 니카라과의 어린이 80% 이상이 미취학 아동이었다. 쉽게 말해, 니카라과 부자들과 미국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대다수의 민중은 가난에 허덕였다.

 

1948년 한반도 이남에서 미국과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맞서 빨치산들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고, 1960년 남베트남에서 미국과 응오딘지엠 정권에 맞서 남베트남민족해방전선(베트콩)이 창설되어 게릴라전을 벌였듯이, 1962년 니카라과에서도 를로스 폰세카 아마도르(Carlos Fonseca Amador) 등 소모사 왕조의 독재와 미국 독점자본의 지배에 반대하는 소규모 무장조직 지도자들이 모여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을 결성했다. 이들은 18년간의 게릴라 항쟁을 통해, 1979년에 니카라과 전역을 장악했다. 수많은 전투에서 미제국주의 앞잡이 소모사 일단의 반동적 군대를 격파했고, 궁극적으로 이들을 몰아냈다.

 

이들은 120만 에이커에 달하는 토지를 몰수하여 국유화하고자 했으며, 미취학 아동과 치료받지 못한 민중들에게 무상으로 치료해주고자 했다. 이들은 하늘처럼 치솟은 문맹률을 감소시키 위해 학교를 건설하고, 무상교육을 실행하고자 했다. 소모사 친미정권 시기 치솟은 유아사망률을 감소시키기 위해, 무상의료 체제를 건설하고자 했다. 정권 초기 무려 10만 명 이상의 젊은이들이 문맹 퇴치 캠페인에 참여했고, 10개월 만에 문맹률이 많이 감소했으며, 글을 배운 이들이 다시 도시와 농촌의 어린이들을 교육시켰다. 책에 나오는 내용 일부를 발췌하겠다.

 

대서양 연안지방의 사람들은 조금 다른 데가 있는 민족이었다. 그들은 고유의 방언과 그들만이 갖고 있는 풍습과 종교가 있었다. 나카라구아의 중심도시에서 수천명에 달하는 교사, 사회운동가, 의사, 그리고 문맹퇴치 운동원들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에야 비로서 이 지방이 니카라구아의 한 부분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출처: 산디니스타, 니카라구아 p.134

 

책을 읽으며 니카라과 인민들과 혁명가들의 감동적이고, 역동적인 역사를 감동적으로 알 수 있었다. 쿠바와 칠레, 엘살바도르, 베네수엘라 등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는 이들은 항상 전체적으로 너무나도 옳은 가치를 추구한다는 생각이 든다. 반면에 자본으로 모든 것을 지배하려는 미국은 너무나도 추악하고 탐욕스럽다. 1950년대 프랑스에 맞서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있던 베트남의 지도자 호치민이 했던 연설처럼, 미국은 너무나도 탐욕스럽고 추악한 존재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절대적으로 정의가 될 수 없는 것이다. 최소한 미국이 제국주의적 행보를 포기하지 않는 한 말이다.

 

산디니스타민족해방전선의 시초인 아우구스토 산디노가 했던 연설이 기억에 남는다. 1912년부터 1933년까지 21년간 니카라과를 군대로 통치하고 점령한 미국은 잔악무도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필리핀에서 대량 학살을 했듯이, 그리고 니카라과 이후에는 그리스와 한반도 그리고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온갖 천인공노할 대학살을 벌였듯이 말이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그 미국 지지자들이 자행한 온갖 범죄와 만행들이 미해병대의 니카라과 통치 기간에 일어났다.

 

미군 전투기가 니카라과 마을을 무차별 폭격했을 당시, 혁명군 지도자 아우구스토 산디노는 저항을 추구했다. 그리고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에서 궁극적으로 승리했다. 그의 연설은 참으로 감동적이고 혁명적이다. 그의 연설을 인용하며 마치겠다.

 

우리는 고립됐다. 조국 니카라과의 대의는 잊혀져가기 시작했다. 이제부터 산디노의 상대는 디아즈 정권이 아닌 역사상 가장 강력한 미제국주의자들이다. 우리는 그들과 다시 싸울 것이다. 그리고 우리 중의 일부는 그들의 폭격으로 무참히 학살당하고, 제국주의 군대의 총검에 난자당하며 최신식 기관총 앞에 쓰러져 나갈 것이다. 그러나 니카라과는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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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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