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이 되고 난 이후 미군정 통치를 거치면서, 과거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들은 친미파가 되어 신분세탁을 했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도 이들은 학계와 정치, 군사, 경찰, 행정, 기업 등 대부분의 분야에 자리 잡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이후, 대한민국 내에서 친일파를 청산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 바로 반민특위의 활동이 그러했다. 반민특위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 줄임말로 친일파 청산을 목적으로 활동했던 단체다. 물론 이러한 움직임에 찬물을 끼얹고 궁극적으로 이 조직을 해체시킨 주체는 바로 대통령인 이승만이었다. 19491월 반민특위는 한 사람을 체포했다. 그가 바로 노덕술이다.

 

노덕술은 189961일 울산 장생포에서 태어났다. 1918년 경찰이 되기 위해 경남순사교습소에 지원했으며, 졸업 후 일제 말단 순사로 경찰 생활을 시작했다. 1921년에는 순사부장을 맡았고, 1924년에는 경부보 시험에 합격하여 경남지역에서 근무했다. 그는 경찰에 있으면서 상승 가도를 달렸는데, 당시 일본인도 달기 힘든 경부자리까지 오른 인물이었다. 그가 높은 자리까지 오를 수 있었던 이유는 분명하다. 그것은 바로 그가 일제가 원하는 데로 독립운동가들을 잡아다 죽이고 잔인하게 고문했기 때문이다.

 

노덕술의 악질적인 고문은 192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이어졌다. 1927년 일제의 신간회 탄압이 있자, 노덕술은 신간회 간부인 박일향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신간회 탄압 당시에만 노덕술에게 고문을 받아 죽은 독립운동가는 3명이나 된다. 노덕술의 고문 방식은 아주 다양했으며, 일설에 따르면 그의 고문은 일본인 형사들도 기겁할 정도였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일설에 따르면 일제 경찰이 전국의 고문기술을 총 정리했는데, 그 가운데 70% 가량이 노덕술의 기술이라는 말이 나돌 정도였다. 1928년 반일 학생모임인 혁조회를 적발하여 이들 회장 김규직 등 9명을 잡아들여 무자비하게 고문했다. 그리고 잡아들여 고문한 9명 중에 3명이 고문 후유증으로 사망했다.

 

1929년 광주항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노덕술은 이에 동참한 고등학생들을 2차례에 걸쳐 구속하여 모질게 고문했다. 193251ML(Marx-Lenin)당원인 김재학이 메이데이(May Day) 시위행렬에 참가했다는 이유로 노덕술에게 고문당했다. 노덕술은 그를 직접 검거해 두 손을 뒤로 두 발을 앞으로 결박해 천장에 매달아 구타와 함께 숱한 고문을 했으며, 그가 통영에서 1년 남짓 근무하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잡혔고, 또 고문당했다. MBC 다큐멘터리 <이제는 말할 수 있다.> 노덕술편을 보면 다음과 같은 인터뷰가 나온다.

 

하여간 통영에서 엄청나게 잡혀가지고 제일 많이 고문한 사람들이 허가비 노덕술이 한경부 이런 사람들이야. 솔직히 말하면 그는 들어가면 물고문하고 전기고문하고 반쯤 죽여 버리지요 뭐.”

 

이러한 활동을 바탕으로 노덕술은 1933년에는 경부가 됐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이던 1943년에는 경시자리까지 올랐다. 조선인 가운데 일제 경찰로 경시를 단 사람은 35년 식민 지배를 통틀어 21명뿐이었다는 사실에서, 그가 얼마나 악질적인 친일 경찰이었는지 알 수 있다. 그는 또 부패한 경찰이었다. 1931년 일제의 만주사변 이래로 노덕술은 화물자동차 징발과 군수품 수송에 적극 나섰으며, 일제 공훈 기록으로만 따져도 노덕술은 1937년에서 1938년 사이에는 841938년에서 1940년에는 104회에 달했다. 1949년 반민특위 조사 기록에 따르면 그의 재산은 60만 원이나 되는데, 현재 시세로 하자면 100억 원이 넘는다.

 

1945년 해방을 맞은 시점에서 노덕술은 평양경찰서장으로 있다가, 소련군이 진주하자 친일 인사로 지목되 구금당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구금에서 벗어나 남한으로 내려왔으며, 미군정 하에서 수도경찰청장이던 장택상과 경무부장이던 조병옥이 친일 경찰을 재등용하는 정책을 실행하게 되면서, 노덕술은 해방 후에도 승승장구의 길을 걸었다. 장택상은 노덕술에게 날개를 피게 해줬다. 194646일 우익 거물인사인 송진우 암살범들을 검거한 공로로 노덕술은 경찰 수뇌부에 인정받았으며, 그해 5월에 있던 정판사 사건에서 조선 공산당 재정부장이던 이관술을 잔인하게 고문했다. 놀랍게도 이관술은 노덕술에게 일제시대때 총 3번이나 고문을 당했다. 그 외에도 노덕술은 해방 후 건국준비위원회와 좌우합작운동으로 유명한 독립운동가이자 통일운동가인 여운형 암살 배후에 있던 것으로도 추정하기도 한다.

 

심지어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인 약산 김원봉을 고문한 것으로도 유명하다. 약산 김원봉은 19472월 자택에서 볼일을 보던 중 노덕술에게 체포돼 갖은 고문을 당하고 뺨을 맞는 수모를 겪었다. 노덕술이 김원봉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한 명분은 바로 미군정 포고령 위반이었다. 해방 된 땅에서 악질 친일 경찰이 전설적인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고 탄압한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노덕술은 위기를 맞았다. 그해 10월 반민특위가 출범하자, 노덕술은 우익 테러리스트인 백민태를 찾아, 반민특위와 연관된 이들을 사전에 죽이려 했다. 노덕술이 사전에 죽이려 했던 인물들 중에는 김병로나 신익희 그리고 김상덕과 같은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던 반면, 유진산이나 이철승 그리고 김두한과 같은 극우 반공주의자들도 있었다. 놀랍게도 백민태라는 인물이 반민특위에 자수하면서, 노덕술은 체포당했다. 노덕술은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지만, 그를 지원해준 또 다른 사람이 있었다. 그가 바로 대통령 이승만이다. 결국 이승만의 도움으로 그는 풀려났고, 반민특위도 이승만에 의해 해체됐다. 이승만은 노덕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대 같은 애국자가 있어 내가 발 뻗고 잔다.”

 

한국전쟁이 있던 1950년 노덕술은 군으로 자리를 옮겨 중령이 됐고, 육군 제1사단 헌병대장을 지냈다. 그는 이승만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았고, 심지어 주한 미대사 무초가 이승만에게 전달한 서한에는 그를 높게 평가하는 구절이 등장할 정도다. 그랬던 노덕술이지만 1955년 돌연 재판에 회부되기도 했다. 재판에 회부된 이유는 그가 밀수와 관련이 있다. 이후 노덕술은 고향인 울산으로 내려왔으며, 19604.19 혁명 이후 치러진 제5대 국회 민의원 선거에 출마하기 까지 했다.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그는 호의호식 하다가 19684169세의 나이로 편하게 생을 마감했다.

 

노덕술이 이렇게 잘먹고 잘살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친일파를 앞세워 나라를 만든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노덕술이라는 존재가 만들어낸 대한민국의 모순은 박정희 전두환 시대를 거쳐 박처원과 이근안으로 이어졌다. 독립운동을 탄압하던 친일파들은 해방 후 친미파가 되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고, 이후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정권에서는 민주화 운동가들을 빨갱이로 몰아 탄압했다. 이런 악질 친일파를 애국자로 둔갑시킨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이라 부르는 이들이 한심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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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국내 언론은 러시아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올리고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의 침공으로 민간인 352명이 사망했다는 자극적인 보도도 이어가고 있다.

나는 이게 너무 편향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침공 그 자체를 옹호하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이런 보도들은 미국 중심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 때도 탈레반 진격으로 인한 난민들과 민간인 피해 상황은 대대적으로 보도했지만, 정작 탈레반 진격과정에서 미군의 화력 지원을 하여 생긴 사망자들에 대해선 침묵했다.

과거 미국이 이라크를 침공하고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했을 때 미군 화력에 학살당한 민간인들에 대해선 외면하던 언론이 지금은 러시아를 까기 바쁘다. 여기서 나오는 이중성과 위선은 언제까지 반복되야 하는 걸까?

지난 아프가니스탄 전쟁때도 그랬지만, 이런 사실들을 생각하면 답답할 따름이다. 그리고 미국이 살인적인 경제제재 때리는 거에 대해선 외면하고 침묵하는 사실에 화가 치밀어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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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유행열반인 2022-02-28 15: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쯤 되면 진짜 병이다 병…러시아가 주권국가 우크라이나 무력 침공해서 사망자 다수 발생했다. 여기서 팩트 아닌 게 있나? 여기에 어떤 자극적인 보도와 미국 중심 편향이 있는가? 님의 스탈린 사랑과 러시아 사랑은 알겠지만 적당히 좀 합시다.
 

1789714일 무장한 시민 군중이 프랑스 파리에 있던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했다. 바스티유 감옥을 습격하고 며칠이지나 왕은 파리를 방문했고, 혁명 측의 요구를 수용했다. 왕 스스로가 왕권의 실추를 행동으로 보여줬다. 파리의 소식은 프랑스 전역으로 퍼졌고, 지방 도시에서는 주로 부르주아로 구성된 시정 상설 위원회와 국민 방위대가 조직되어 행정과 치안을 맡았으며, 그해 8월에는 이른바 인권선언문을 채택되어 봉건제도를 폐기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이다.

 

1791년에 이르러 왕권의 권력은 완전히 붕괴했고, 이는 유럽 전역에 공포를 안겨줬다. 영국의 에드먼드 버크는 프랑스 혁명은 미친 짓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경멸을 드러냈고, 이는 다른 유럽 국가들도 마찬가지였다. 1792년 혁명의 불길이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한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치르게 됐고, 영국이나 러시아 제국 그리고 포르투갈 왕국과 네덜란드가 프로이센을 지원했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 혁명전쟁이다. 유럽이 프랑스를 두려워 한 것은 왕권의 힘이 약해지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며, 특히나 루이 16세의 단두대 처형은 그들에게 충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는 혁명을 수호하기 위한 전쟁을 치렀다. 전쟁 초기 프로이센군의 전진은 거셌지만, 프랑스군은 발미 전투에서 정신적 그리고 정치적 승리를 거두었다. 전투에서 프로이센군 200명이 전사하고 프랑스군이 300명 전사했는데, 프로이센군의 진격을 1차적으로 막아냈다. 이를 통해 프랑스군은 혁명 열기를 이끌어 낼 수 있었고, 프랑스 시민과 군대는 보다 더 단결했다. 더 나아가 국내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포함한 강경파들이 정치적으로 권력을 잡게 됐는데, 이들은 혁명 프랑스를 수호하기 위해 1793823일 징집령을 선포했다. 이에 따라 혁명군의 규모는 1794년에 대략 100만 명으로 증가했다.

 

그러나 이 전쟁은 유럽 전역으로 확산됐고, 프랑스는 대략 10년 동안 이 혁명전쟁을 치러야 했다. 플랑드르 전역과 스페인 전역 그리고 네덜란드 점령 및 제1차 이탈리아 원정으로 이어졌으며, 그 이후 이집트와 시리아 원정에 나섰다. 또한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치렀으며, 이 전쟁은 1801년까지 전개됐다. 17983월 프랑스는 영국을 굴복시키기 위해 350척의 함선과 54,000명의 병사를 싣고 이집트 원정에 나섰다. 여기서 큰 활약을 떨쳤던 인물이 있었는데, 그가 바로 그 유명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이집트 원정에서 터키 제국과 러시아에게도 큰 자극을 주었고, 영국과 더불어 이들을 상대했다. 당시 프랑스 혁명 전쟁은 네덜란드 방면과 독일의 라인강 방면 그리고 이탈리아의 나폴리 방면이었는데, 동맹국의 총공격 앞에 크게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네덜란드에 상륙하려는 영국군 3만 명을 격퇴시켰으며, 179910월 러시아의 반불 동맹 탈퇴 후에 연합세력의 공격을 국경에서 막아냈다. 이집트 원정에서 본국 귀환을 선택한 나폴레옹은 이른바 쿠데타를 일으켰고, 이것이 바로 브뤼메르 18일이다.

 

브뤼메르 18일을 통해 권력을 잡은 나폴레옹은 1800년에 제2차 이탈리아 전쟁을 지휘하기 위해 출정했고, 알프스를 넘어 밀라노에 입성했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찌르고, 12월에는 독일 라인 방면에서 오스트리아군을 무찔렀다. 마렝고 전투에서 오스트리아측은 9,000명의 사상자를 낸 반면, 나폴레옹은 7,000명의 사상자를 냈다. 1801년 결국 오스트리아는 뤼네빌 조약에 응했고, 이에 따라서 프랑스와의 전쟁을 지속하는 국가는 영국만 남게 됐다. 영국은 오스만 제국과 협력하여 이집트에 있던 프랑스 원정군을 항복시켰지만, 결과적으로 프랑스에게 고립 당했다. 이후 나폴레옹은 1802년 종신 통령을 선포했고, 1804년에는 황제가 되었다. 이것은 결국 나폴레옹의 정복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실 프랑스의 정복 전쟁은 어떤 면에선 1796년 제1차 이탈리아 원정을 통해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전쟁은 엄밀히 따져서 프랑스 혁명 전쟁의 일부였고, 나폴레옹 개인의 정복욕 때문은 아니었다. 그리고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을 선포하며 황제의 길을 걸었던 것은 1802년으로 그 전까지는 엄밀히 따지고 보면 혁명을 방어하기 위한 성향이 강했다. 나폴레옹이 정복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던 것은 자신이 황제로 등극한 이후였다. 특히 그가 황제를 자칭하면서, 영토 팽창을 가속화했는데 이런 점에서 프랑스의 전쟁은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개인이 추구한 정복전쟁로 성질이 바뀌었다. 따라서 나는 프랑스의 혁명전쟁은 나폴레옹이 종신 통령 선포와 황제 등극 이전까지를 혁명전쟁으로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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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만주는 토벌과 반토벌의 격전지였다. 1931 9 18일 일본은 만주사변을 일으켜 침략의 마수를 드러냈고중국인과 조선인은 공산당을 중심으로 저항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이 만주를 침략한 이례로중국 공산당 휘하의 중국인과 조선인들은 일본군에 맞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이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일제는 대대적인 대토벌 작전을 전개했었다. 1933 11월 일제의 동만 지역 2차 대토벌에만 보병기병포병을 포함한 6,000명의 병력과 전투기가 동원됐으며, 3차 대토벌은 1935년까지 전개됐다만주지역 일본의 관동군 숫자는 1941년 독소전쟁이 일어나는 시점에서 대략 70만 명으로 증가했고, 600대의 전투기도 주둔했다.

(마오쩌둥과 홍군, 대장정 이외에도 중국 공산당 병력들은 만주사변 이후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만주에 주둔한 일본군 병력 규모에서 알 수 있듯이일제는 만주 지역에 대규모 병력을 투입했다. 1941년 일제가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음에도만주 지역 관동군은 1945년까지 대부분 주둔하고 있었다일본이 만주사변을 일으킨 이례로 중국 공산당은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무장투쟁을 전개했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많이 있었으며이후 북한의 초대 지도자가 되는 김일성도 그 중 한 사람이다김일성만 하더라도 1935년 중국 공산당 병력과 연합한 2,000명의 병력으로 일본군 부대를 습격해 6일 동안 전투를 벌이기도 했다심지어 1937년에는 소위 국내 보천보에 잠입하여 소규모의 교전을 치르고 난 뒤무사히 후퇴하기까지 했다동북항일연군 잔존 병력을 이끌던 허형식은 1942년 8월 일본군과 교전을 치르다 전사했다.

(동북항일연군 대원들)

 

중국인과 조선인의 항일무장투쟁이 격렬했기 때문에 일본군은 무자비한 토벌을 감행했다중일전쟁 발발 1년이 되던 1938년 일제는 그 악명 높은 간도 특설대를 창설하여중국 공산당 휘하의 부대 및 독립군들을 토벌하는 일에 착수했다일제는 만주에서 일어나는 항일투쟁의 뿌리를 뽑고자이른바 모든 것을 태우고죽이고약탈하는” 삼광작전을 감행하여 무자비한 양민 학살과 토벌을 자행했다삼광작전의 일환으로 일제는 이른바 집단부락이라는 것을 세웠다집단부락은 항일 유격대의 근거지를 철저하게 토벌하고 불태워 버린 뒤 그 주변에 흩어진 농가의 백성들을 강제로 집결시켜 하나의 부락에 수용하는 정책이다이후 비슷한 정책이 제주 4.3 사건 당시 한국 군경과 미군에 의해 사용됐고베트남 전쟁 당시에도 전략촌이라는 이름하에 자행됐다.

(동북항일연군의 깃발)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기 며칠 전 동북항일연군 휘하 병력 600명은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쟁취했다그 전투가 바로 다샤허 전투다당시 전투에 참가한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웨이정민과 천한장이 지휘했으며전투에 참가한 대다수 인사들은 조선인이었다. 1939년 8월 23일 동북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포위해 공격했고집단 부락 안으로 밀고 글어가 치열한 전투를 치렀다동북항일연군은 이 과정에서 만주국 경찰 및 자위단 병력 다수를 사살했고대략 100여 명의 일본군을 사살했다이 소식을 들은 일본군은 수백명의 병력을 그곳으로 보냈다.

(다샤허 전투에서 전사한 허성숙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그림)

 

다음 날에도 전투가 벌어졌다집단 부락에 도착한 일본군 수비대는 항일연군의 기습공격을 받았다이 전투에서는 당시 창설된 지 얼마 안 된 간도 특설대도 참여했다고 한다동북항일연군은 일본군 수비대가 집단부락의 일본인 주검을 수습해 돌아가는 것을 노렸으며, 7대의 트럭에 분승한 토벌대 차량 대열의 선두차가 대낮에 류슈 촌 부근에 미리 파놓은 물웅덩이에 빠져 정착하자 기습 공격을 가했다고 한다기습 공격을 받은 일본군 부대는 간도 특설대 대원 4명을 제외하고는 거의 전멸했다다샤허 전투에 관한 내용은 <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에 보면 다음과 같이 나왔다.

 

대사하 전투에서 제3방면군 부지휘관 후국충은 한 개 연대 40명을 인솔하여 양목조자에 매복하고 있다가 안도현성에서 증원병력으로 오는 100여 명의 일본군과 만주국 경찰에게 불의의 사격을 가하여 적을 무리로 쓸어 눕혔다살아남은 적들은 살구멍을 찾아 황급히 흩어졌다그런데 이 요격전에서 부지휘관 후국충이 적의 흉탄에 맞아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1호군 제3방면군은 가장 어려운 시기에 우수한 군사 지휘관을 잃었다.”

 

출처연변인민 항일투쟁사 p.350~351

 

2일간의 전투는 동북항일연군의 승리로 마무리 됐다다샤허 전투에서 대략 2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경기관총 7정을 포함하여 모두 200여 자루의 총기를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하지만 인용문에 나와 있듯이3방면군의 희생도 컸다부지휘관인 후국충이 전사했고그를 포함하여 14단 정치위원 양형후, 13단 1연의 여자 기관총 사수 허성숙 등이 전사했다이후에도 항일연군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집단부락을 타격 대상으로 삼으며 급습했고성과를 거두기도 했다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는 1939년 9월부터 12월 사이에 다샤허 전투를 승리로 이끈 동북항일연군 제3방면군은 집단부락을 습격하여 일본군 무장자위단원 100명을 포로로 붙잡고식량과 군용물자를 노획했었다최현이 있던 부대는 화전현 한총구에서 집중훈련을 받고 있던 만주군을 습격하여 그 대부분을 포로로 붙잡고 경기관총 7소총 600자루권총 10자루와 기타 군수물자를 노획하기도 했었다.

(동북항일연군 지도부의 얼굴)

 

1940년 1월부터 6월까지 간도성의 옌지허룽왕칭안투 네 현에서만 모두 46회의 집단부락 공격이 존재했다다샤허 전투 이후 만주국 정부는 숨진 특설부대원 16명의 장례식을 밍위에거우에서 성대하게 치르고이들이 숨진 장소에 16용사 전적비를 세워 순국열사로 기렸다이 전적비는 1945년 일제가 패망하고 난 뒤 철거됐다이처럼 만주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티열한 항일무장투쟁이 전개됐다그리고 만주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웠던 이들 중에는 조선인들이 다수를 차지했다이들의 투쟁은 분명히 독립운동이었지만대한민국 교과서에는 언급되지 않고 있다참으로 안타까운 현실이다.

 

참고문헌

 

최성춘연변인민 항일투쟁사연변대학, 1999

 

김효순간도특설대서해문집,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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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11 테러 당시 미국 소방관의 모습을 암시하는 포스터)


이것저것 하다보니 제법 바쁜 몸이지만, 시간을 내서 넷플릭스 다큐멘터리인 터닝 포인트 3화를 감상했다. 3화에서도 2화에서와 마찬가지로 9.11 테러로 희생된 이들의 안타까움과 유가족들의 슬픔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서 9.11 테러를 일으킨 알카에다 측이 어떻게 준비를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놀랍게도 이들은 영어 실력이 안좋은 이들이 꽤나 많았다는 점이 제법 흥미롭게 다가왔다. 하지만 9.11 테러를 주도한 이들 19명 중 16명이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인 점은 그다지 강조되지 않으며, 사우디 아라비아가 하나도 처벌받지 않은 점은 언급되지도 않는다. 


다큐멘터리에서 이점이 언급되지 않는 건 치명적인 문제라 할 수 있으며, 다소 의도적인 것 같다고 생각한다.


다큐멘터리는 아프가니스탄 전쟁 초기 포로로 잡혀 쿠바 인근에 있는 관타나모 수용소에서 저질러진 학대와 폭행에 대해 다룬다. 이 점을 확실히 언급하고 자세히 소개한 것은 제법 괜찮다.  미국 정부가 소위 테러리스트로 지정한 이들을 어떻게 인권유린 했는지를 잘 보여준다.


다큐멘터리가 이 점을 확실히 집고간 점은 분명 눈여겨 볼만 하다. 다큐멘터리는 9.11 테러 이후 3,000명의 민간인이 테러리스트에 의해 희생된 점을 강조하며,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빠지게 되는 점을 예시해준다.


3화는 1화나 2화에 비해서, 제법 미국의 실책을 알리는 쪽이었던 것 같다. 빠른 시일 내에 4화를 보고 리뷰를 남겨야 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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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22-02-23 20: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넷플에 이런 게 뜨군요. 조만간 찾아서 봐야겠습니다.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