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의 중국을 탄생시킨 지도자 마오쩌둥(모택동, Mao Tse Dong, 毛泽东)에 대해선 몇 권의 책을 읽었다. 알렉산더 판초프와 스티븐 레빈이 쓴 <마오쩌둥 평전><폴포트 평전>의 저자 필립 쇼트(Philip Short)가 쓴 <마오쩌둥 1,2(Mao: The Man Who Made China)> 그리고 에드가 스노(Edgar Snow)의 저서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를 읽은 적이 있다. 슬라보예 지젝(Slavoj Zizek)이 엮은 <마오쩌둥(Slavoj Zizek present Mao: On Practice and Contradiction)>도 읽어보았으며, 범우사에서 출간한 마오쩌둥이 쓴 철학서인 <실천론><모순론> 그리고 <신민주주의론>까지 읽어봤다.

 

마오쩌둥에 대해 제법 적잖은 책을 읽어보았지만, 주로 서방의 학자들이 쓴 책들은 긍정의 시각보다는 부정의 시각이 앞서는 것 같다. 판초프가 쓴 책과 필립 쇼트가 쓴 책 두 권을 읽어봤지만, 마오에 대한 훌륭한 연구서임에도 불구하고 서방주의적 시각의 한계도 분명했다. 학술적이고 서술도 자세하지만, 서방 학자들 특유의 서구적 편향성은 피하기가 힘들다. 그런 점에서 나는 군복무 시절 에드가 스노가 쓴 <중국의 붉은 별>을 감명 깊게 읽었었다. <중국의 붉은 별>은 듀이커의 <호치민 평전>과 커밍스의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과 더불어 군복무 시절 내가 가장 감명 깊게 읽은 책 3권 중 하나다.

 

3자의 입장에서 마오쩌둥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에서 쓴 책은 없을까? 최근에 읽은 책 만화 <모택동>은 내가 읽고 싶어했던 그런 책이었다. 리우스는 제3세계 입장에서 서술하는 멕시코의 만화 작가다. 그의 만화는 1980년대 국내에 제법 많이 번역됐다. 이번에 읽은 <모택동>도 그러한 입장에서 집필한 책이다. 많은 사람들이 마오쩌둥을 하면, 학살과 문화재 파괴 등만을 생각하는 경향이 있지만, 나는 마오쩌둥에 대해 그렇게 비판적이어야 하는지 다소 의문이 있다. 물론 그가 저지른 과오가 없다는 것이 아니다. 다만 지나치게 악마화된 측면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에 대해 여러 권의 책을 읽었지만, 리우스가 쓴 <모택동>은 거의 다 아는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재밌었다. 무엇보다 저자가 제3세계 입장을 지지하는 인물이기에, 마오쩌둥의 생애를 다루면서 서구 제국주의에 대한 비판이 들어가는 점이 내 생각과 많이 겹쳤다. 170페이지 밖에 안되는 만화 책이기 때문에 마오쩌둥의 생애에 대한 내용이 제법 부실하게 들어간 점이 좀 걸리긴 한다. 예를 들면, 2차 세계대전 이후 마오쩌둥이 중국을 통일하는 과정은 고작 2페이지만 할애했다. 2차 국공내전의 과정은 마오의 대장정만큼이나 감동적이고 혁명적인 과정인데, 그 점 장제스의 부정부패로 망했다는 서술과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이 있었다는 서술로만 끝낸점은 아쉽다. 또한, 냉전의 과정에서 중국이 소련 대신 미국에 맞서 북한을 지원했던 한국전쟁 참전이 전혀 언급되지 않은 점도 아쉽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한계지만, 마오쩌둥의 생애를 누구든 쉽게 알 수 있다는 점은 만화의 큰 장점일 것이다. 저자 리우스는 대약진 운동과 문혁에 대해 긍정적인 의의를 강조하는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원칙에서 벗어났음을 강조한다. 그러나 그러한 과정이 중국이 새로운 시도를 했다는 점에서 해석하고자 한다. 아마도 중국 공산당과 마오쩌둥을 싫어하는 사람이 이 단락을 본다면, 많이 불편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러한 관점도 하나의 담론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마오쩌둥이 혁명가가 되어 중국 혁명을 진행하는 과정은 여러 모로 대단하다. 군사적으로 10배의 전력을 가진 장제스군에 맞서 포위전을 견뎌내고 대장정을 완수하며, 중일전쟁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투쟁을 통해 공산당을 성장시켰다. 그리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했다. 이러한 혁명사적 과정은 분명 감동적인 부분들이 있다. 하지만 중화인민공화국 탄생 이후 마오의 노선은 몇몇 오류들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1956년 흐루쇼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수정주의 논쟁에서 소련을 비판하는 것은 원칙적으로는 옳았다. 그러나 당시 제3세계 인민의 투쟁을 지원한 세력은 중국이 아니라 소련이었다.

 

마오쩌둥은 흐루쇼프가 드와이트 아이젠 하워나 존 F. 케네디와 같은 미국의 제국주의자들과 평화공존을 추구한다고 비난했지만, 정작 마오는 1972년 미국의 리처드 닉슨과 화해공존의 길을 선택했다. 당시 미국의 닉슨 정부는 중국의 동맹이었던 북베트남에서 야만적인 제국주의 침략전쟁을 자행하고 있었다. 심지어 중국은 칠레의 친미 피노체트 세력과 앙골라의 제국주의 용병 세력을 지원했다. 즉 이러한 점에서 마오의 중국은 흐루쇼프가 했던 실책만큼 어리석은 짓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오쩌둥이 위대한 혁명가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분명 위대한 혁명가였고, 그의 이데올로기 마오이즘은 제국주의에 맞선 저항 이데올로기로서 자리 잡기도 했다. 즉 마오의 영향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다. 마오쩌둥은 몇몇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나는 마오에 대해 제법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저자 리우스의 말대로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위해 헌신한 인물이라는 점을 부정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는 무엇보다, 1842년 아편전쟁 이례로 서구 제국주의자들에게 침탈당하던 중국을 더 이상 그들로부터 침탈당하지 않는 중국으로 탈바꿈시켰으며, 여성해방과 글자 간소화 그리고 신분제 철폐 등의 인민해방을 실천했다. 그러한 점에서 마오쩌둥이 중국 인민을 위해 헌신한 지도자임을 부정할 수는 없다. 리우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필자도 앞으로 중국이 어떤 진로를 택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다른 모든 사람들처럼 확실한 판단을 못내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만은 분명합니다. 모택동이 중국인민을 위해 일했다는 것을 부정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모택동의 삶에 대한 최고의 찬사는 중국인들이 그가 죽었을 때, 마치 자기 아버지가 죽은 것처럼 슬퍼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출처: 모택동 p.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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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혹은 휴양지로 손꼽히는 제주도는 너무나도 참혹하고 끔찍한 현대사를 경험했다일제 강점기에는 일본군들이 제주도를 군사기지화 혹은 요새화했고해방 후에는 미군이 들어와 미군정을 실시했다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참혹한 대학살이 일어났는데그것이 바로 제주 4.3항쟁 혹은 제주도 대학살이다많은 사람들이, 4.3사건을 4.3항쟁이라 부르기도 한다과거 반공주의가 강했던 시절에는 4.3 폭동이라 칭했지만민주화 이후에는 제주 4.3 사건 혹은 제주 4.3항쟁이라 부르게 됐다나 또한 4.3을 제주 4.3항쟁이라 자주 부른다그러나 이 글에서는 제주도에서 자행된 학살에 초점을 두었기에일부러 제목을 제주도 대학살이라 표현했다.

(제주 4.3 70주년 카드뉴스)

 

1945년 일본 제국주의가 패망한 이후한반도 이남에는 미군이 상륙했다해방 이후 다른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제주도에도 여운형이 중심이 되어 건설된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위원회가 자주적으로 설립됐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의 지배 아래서 72개의 화학 및 제조업 공장이 제주도에 세워졌는데일제가 패망한 이후 며칠 만에 72개 기업 모두가 접수되어 인민의 자주적인 관리를 통해 운영됐다그러나 이런 자주적인 활동은 미군이 상륙하면서 제지당했다미군이 제주도에 상륙하기 전인 9월 23일 대중적인 지지를 바탕으로 인민위원회가 구성됐고이 인민위원회는 남한의 다른 지역들과는 달리 사실상 평화롭게 행정과 치안을 이어나갔었다.

 

1945년 11월 9일 미군이 제주도에 들어오고 난 이후에도 제주도 지역은 잘 운영됐고심지어 1947년 10월 미군정 사령관인 존 리드 하지는 제주도는 코민테른의 별다른 영향 없이 인민위원회가 평화적으로 통제하는 진정한 공동체적 지역이라고 말했을 정도였다그러나 이런 평화적인 단체와 지역을 피로 물들이고 억압을 행사한 주체는 바로 미국이었다제주도에 상륙한 미군은 과거 일제에 협력했던 친일 인사들을 기반으로 행정과 경찰력을 증원했다이러한 조치는 당연히 제주도민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1946년 8월 미군정은 제주도를 독자적인 도로 분리했고우익출신 경찰들을 제주도에 파견하여 증원했다.

(제주 4.3 당시 산간지대로 피한 민간인들)

 

1946년 대구 10.1 항쟁이 발발하여 수천 명의 민간인이 미군과 우익 경찰에 의해 죽고 체포 당하는 일이 생겼다제주도에서는 미군정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없었지만, 1947년에 들어서면서긴장이 고조됐다. 1947년 3월 1일 제주도에서도 3.1절 집회가 열렸다최소 5만 명 이상의 군중이 결집했고평화시위가 벌어졌다군중들이 결집하자미군정은 경찰들에게 발포를 명령했다평화적으로 시위를 하던 시위군중은 경찰이 탄 말에 인명피해가 생겼고이에 항의한 시민들이 경찰에게 저항했다그러자 경찰은 총을 사용했다경찰이 발포한 총에 최소 6명이 총에 맞아 사망했고더 많은 수가 부상 당했다이에 항의하기 위한 차원으로 시위 군중은 일주일 후에 경찰에게 항의 시위를 했고경찰의 또 다른 발포로 5명이 사망했다. 3.1절 시위로 최소 16명이 살해됐고, 22명이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고 미군 소식통은 보도하기도 했다.

 

비슷한 시기 미국의 대통령이던 해리 트루먼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nctrine)을 선포하여 그리스와 터키에 대한 반공주의적 지원을 강화했고이러한 미군정의 폭압적인 통치는 제주도민이 미군정에 맞서 저항하도록 만들었다그 결과 1948년 2월 7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발생한 전국적 파업에서 제주도는 가장 저항의 격력한 곳으로 변모했다. 1948년 3월 1일에는 이승만과 미국이 주도하는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하는 청년 2,500명이 경찰에게 체포당했고체포당한 젊은이들이 고문당했다거기다 미군정의 무책임하고 살인적인 정책으로 쌀 세금이 폭등했다적어도 1947년보다 5배 이상 쌀 세금이 폭등했다이런 모순과 불합리성이 겹치면서, 1948년 4월 3일 남로당을 중심으로 좌익 성향의 인사들이 봉기를 일으켰다이렇게 해서 제주 4.3항쟁이 시작된 것이다.

(계엄령을 선포한 이승만)

 

제주 4.3항쟁이 시작되자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은 신속했고매우 잔인했다미군 부대가 부산에서 증파됐고경찰 1,700명이 추가로 파견됐다남로당측 봉기군과 이를 진압하려는 우익들 간의 전투가 격화됐다초기 전투에서 진압군 측 김익렬과 게릴라 지도자 김달삼은 평화협정을 마련했지만우익 측에서 빨치산을 학살하여 협정은 무효화 돼버리고 유혈은 더 격해졌다. 1948년 5.10 선거에서 제주도의 투표 참여율은 당연히 저조했다양측의 교전은 멈추질 않았고학살도 발생했다학살의 절대다수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자대통령 이승만은 제주도를 진압하기 위한 전투에 박차를 가했다이승만은 제주도에 계엄령을 선포하고저주도 전역을 적성지역으로 설정한 뒤병력을 보내 진압했다계엄령은 1948년 11월 21일에 선포됐다진압 과정에서 여수와 순천에 있던 국군 병력이 역으로 봉기하기도 했으며이것이 바로 여순항쟁의 맥락이었다여순항쟁에서도 살인적인 유혈극이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제주도에서 진압작전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이른바 극우 단체인 서북 청년단도 제주도에 파견됐다.

(이후 발견된 학살자의 유해)

 

광란의 학살극이 자행됐다특히 1948년에서 1949년 사이에 대규모의 학살이 발생했으며희생된 민간인 대다수는 여성과 아이 노인 심지어 갓난아기였다진압측에선 임산부의 배를 가르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며적대지역으로 선포된 마을을 불태웠다그리고 이런 잔혹한 진압을 최종적으로 뒤에서 지휘했던 주체는 바로 이승만과 미군정이었다미군정의 브라운 대령과 대통령 이승만 그리고 경찰총장의 지휘에 있으며 강경진압을 자행했던 조병옥과 국방부 장관 신성모 등은 제주도민 전부를 빨갱이로 규정해놓고일부를 제외한 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해놓고 학살을 자행했다특히나 서북청년단이 자행한 학살은 정말 끔찍하고추악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보면당시 서북청년단이 어떤 짓을 벌였는지 아주 잘 나와있다.

(제주 4.3 학살에서 희생된 희생자 분포 지도)

 

이승만과 미군의 후원 아래 제주 사태의 최일선에 서게 된 서북청년회는 군경 모두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다중산간마을인 애월면 광령리 주민이던 고치돈은 하귀리 개수동으로 소개했다가 그곳에서의 무차별 총살에 놀라 다시 제주읍 외도리로 소개했다고치돈은 외도리 민보단장이 처가 쪽 친척이라 그의 배경으로 양민증도 비교적 빨리 얻었고특공대에 편입돼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했다고치돈은 특공대 시절 목격했던 서북청년회 출신 경찰들의 잔혹했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증언했다내가 외도지서 특공대 생활을 할 때 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이윤도(李允道)의 학살극은 도저히 잊을 수 없습니다그 날 지서에서는 소위 도피자가족을 지서로 끌고 가 모진 고문을 했습니다그들이 총살터로 끌려갈 적엔 이미 기진맥진해서 제대로 걷지도 못할 지경이 됐지요이윤도는 특공대원에게 그들을 찌르라고 강요하다가 스스로 칼을 꺼내더니 한 명씩 등을 찔렀습니다그들은 눈이 튀어나오며 꼬꾸라져 죽었습니다그때 약 80명이 희생됐는데 여자가 더 많았지요여자들 중에는 젖먹이 아기를 안고 있는 사람도 있었습니다이윤도는 젖먹이가 죽은 엄마 앞에서 바둥거리자 칼로 아기를 찔러 위로 치켜들며 위세를 보였습니다도평리 아기들이 그때 죽었지요그는 인간이 아니었습니다그 꼴을 보니 며칠간 밥도 못 먹었습니다.”

 

출처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 p.271

 

제주도 대학살에서 벌어진 학살은 무수히 많지만또 다른 대표적인 학살을 마지막으로 언급하고자 한다. 1949년 1월 17일 제주도 북촌리 근처에서 진압군 2명이 봉기군에게 습격을 받아 살해당하는 일이 있었다군인 2명이 사망하자진압군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마을에 난입하여 집들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근처 밭에서 학살했다이 학살로 최소 400명의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러한 크고 작은 학살들은 당시 제주도에서 일상적으로 일어났다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킬링필드(Killing Field)로 변모했고제주도에 있는 가옥 중 70%가 파괴됐다총 39,285가구가 파손되고 400개 마을 중 170개만 남았다고 한다무수히 많은 여성들이 진압군에 의해 강간당했고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부상 당했다또한 최소 4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당시 학살을 피해 일본으로 피난가기도 했다.

(현재 제주 4.3 평화공원 및 박물관에 있는 희생자들의 묘비)


(제주 4.3 사건 관련한 만화책)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의 85~90%는 우익들에 의한 것이었다좌익들에 의학 보복 살해는 대부분의 경우 우익 경찰과 진압군과 그 일가족에 한해서 벌어졌다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참혹한 무차별 학살은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휘를 받는 우익들에 의해 자행됐다보통의 경우 최소 3만 명 이상의 제주도 시민이 학살당한 것으로 본다당시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희생된 이들은 많게는 6만 명까지도 본다그러나 한국전쟁을 연구한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2016년 당시 제6회 제주 4.3 평화포럼에서 보다 최근의 연구자료에는 제주 4.3으로 8만 명 정도가 사망했다는 주장도 있다.”고 했다최소 3만 명에서 6만 명 많게는 8만 명 이상의 제주도민이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들에 의해 학살당한 것이다.

(제주 4.3 사건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미국인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대략 5년이라는 기간 동안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은 소위 작은전쟁을 통해 10만 명의 민간인을 학살했다그리고 그와 비슷한 숫자의 인명이 국가 보안법으로 구속되어 감옥에 있었다이런 천인공노할 제주도 대학살을 벌인 이승만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이른바 보도연맹 학살을 자행하여 적잖은 제주도민을 예비 검속한 뒤에 빨갱이로 몰아 학살했다이처럼 제주도에서 벌어진 학살로 무수히 많은 민간인이 학살당했다이런 학살극의 중심에는 미국과 이승만이 있었다이들이 벌인 천인공노할 학살은 역사의 심판대에 세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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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콘퀘스트가 이용한 파시스트 자료

 

비탄의 수확에서 결정적인 부분인 12장의 제목은 기근이 창궐하다이다. 이 부분에는 인상적인 237개의 목록을 이루는 참고자료를 포함한다.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러한 참고자료의 반 이상이 극우 우끄라이나 망명자들에게서 나온 것이다. 우끄라이나 파시스트 도서인 끄레믈린의 음흉한 행위들은 쉰다섯 번이나 인용되었다! 콘퀘스트가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과 미국 비밀 정보국에서 제공한 역사서를 이용한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

 

같은 장에서 콘퀘스트는, 스테판 반데라의 파시스트 조직의 청년운동에 의해 1953년 출판된, 올랙사 우로페이(Olexa Woropay)가 쓴 아홉 번째 원(The Ninth Circle)의 내용을 열여덟 번이나 인용한다. 저자는 1930년대 동안의 자신의 구체적인 일대기를 보여주나, 그가 나찌 점령 기간 동안 뭘 했는지는 언급하지 않는다! 그가 나찌에 참여한 과거가 가까스로 덮였다. 1948년에, 그는 많은 우끄라이나인 파시스트가 도피처로 삼은 뮌스터(Muenster)에서 다시 자신의 전기를 썼다. 그가 1932년에서 1933년의 기근대학살에 대해 우크라이나인들과 대담했던 곳이 바로 그곳이다. 어떠한 목격자(그 실체가 역자) 확인되지 않았기에, 과학적인 관점에서 그 책은 가치가 없다. 그가 전쟁 동안 무엇을 했는지 말하지 않은 것에 비추어 보아, ‘스딸린에 대한 진실을 폭로한이들은 아마도 도망간 우끄라이나인 나찌 협력자들이었을 것이다.37)

 

허스트의 1930년대 친나찌 출판물을 위해 글을 썼고, 후에 반아메리카 활동에 대한 냉전 맥카시주의 의회 위원회에 협력했던 빌(Beal)은 다섯 번 인용되었다.

 

반공주의 망명자인 크라브첸코(Kravchenko)는 출처 제공자로 열 번 나왔다. 또 다른 러시아 망명자인 레프 코펠레프(Lev Kopelev)는 다섯 번 나왔다.

 

포함된 과학적참고자료 중에는 바실리 그로스맨(Vasily Grossman)의 소설이 포함되어 있는데, 콘퀘스트는 그것을 열다섯 번이나 참고문헌으로 이용했다!

 

그 다음에, 콘퀘스트는 하버드의 망명자 대담 사업(Refugee Interview Project)에 있는 회견 내용을 인용했는데, 그 사업은 CIA가 재정 지원을 하였다. 그는 이왈드 아멘데가 쓴 1935년의 나찌 서적뿐만 아니라 맥카시 시대의 공산주의 침략에 대한 국회 위원회의 보고서를 인용했다. 콘퀘스트는 또한 유진 라이온과 윌리엄 챔벌린의 주장도 다섯 번 언급했데, 이 두 사람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 CIA의 중앙 유럽 라디오 네트워크 조직인, 자유 라디오 이사회의 임원들이었다.

 

244쪽에서 콘퀘스트는 이렇게 썼다. ‘키예프에서 남쪽으로 20마일 떨어진 마을에서 한 미국인이 뭔가를 발견했다.... 그들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너절한 무엇인가를 요리하고 있었다.’ 참고문헌은 1933228일자 New York Evening Journal이 라고 되어 있다. 사실 그것은, 1935년에 발행된 허스트 신문에 발표한, 토마스 워커의 기사였다! 콘퀘스트는 이 기사를 1933년의 기근과 맞물리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신문의 날짜를 앞당겼다. 콘퀘스트는 미국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았다. 그는 어떤 누군가가, 토마스 워커가 한번도 우끄라이나에 들어간 적 없는 사기꾼이었다는 점을, 다시 생각해 낼까봐 염려했다. 콘퀘스트는 위조자였다.

 

거짓 풍문을 기록한 망명자들이 쓴 서적의 사용을 정당화하기 위해 콘퀘스트는 그래서 진실은 오직 소문에서 걸러질 수 있다.’ 그리고 비록 절대 옳은 것은 아니지만, 가장 좋은 출처는 기본적으로 풍문이다.’라고 주장하였다.38) 이 진술은 파시스트 비방, 잘못된 정보와 거짓에 학문적인 신뢰성을 부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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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 - 제국주의와 신자유주의의 굴레를 벗고 자주의 새 역사를 여는 베네수엘라
베네수엘라 혁명 연구모임 지음 / 시대의창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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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전쟁이 격화되고 있는 요즘 재밌는 책 한권을 읽었다. 그 책은 바로 <원숭이도 이해하는 자본론>의 저자로 유명한 임승수씨가 공동집필한 저서 <차베스 미국과 맞짱뜨다>라는 책이다. 사회주의자가 되고 난 이후 베네수엘라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베네수엘라에 대해서 깊게 공부해본 적은 거의 없었던 것 같다. 그저 베네수엘라가 미국의 경제제재를 받고 있고,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고자 했었던 것 정도만 단편적으로 알았다. , 베네수엘라의 역사와 이들의 정치 상황을 자세히는 몰랐다고 할 수 있다.

 

책의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책에서 주인공이 되는 인물은 바로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인 우고 차베스(Hugo Chavez). 우고 차베스는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고자 했다. 실제로 차베스는 집권 초기 여러 성과들을 만들어 냈고, 성과들은 고무적이었다.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그는 과거 빈부격차가 극심하던 베네수엘라를 억압받고 착취 받던 이들에게 보다 더 많은 권력을 부여하고자 했고, 빈민들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병원을 세웠으며, 문맹 퇴치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

 

차베스는 과거 굶주리던 빈민들을 위해 무상으로 급식을 제공했고, 집이 없는 이들을 위해 주택을 건설했으며, 또 건설한 주택들을 가난한 인민들에게 분배했다. 차베스의 정책은 분명 진보적인 정책이었고, 자본주의적 양식이 많이 남아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민주주의적 성격을 띈 것도 아니었다. 무엇보다 차베스는 빈민 계급이 권력을 가지기를 원했다. 그리고 기업의 이익이 아닌 공적인 이익을 추구했으며, 생산자가 일하고 노력한 만큼 받을 수 있는 평등한 생산관계를 유지한 사회를 추구했다. 그는 소위 21세기 사회주의라는 구호 아래 민주주의를 추구했지만, 소위 미국에서 주장하는 위선이 가득 찬 민주주의는 절대로 아니었다. 오히려 제국주의로 포장한 미국식 민주주의에 맞서 저항했다.

 

1998년 선거를 통해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된 차베스는 집권 시점부터 미국이라는 거대한 제국주의 세력의 사악하고 위협적인 공격을 받았다. 미국에게 있어서 차베스라는 존재는 자신들의 사적 이익을 방해하는 존재였고, 따라서 축출되어야만 하는 존재였다. 따라서 미국은 베네수엘라 내에 있는 우익 부르주아지 세력들을 지원하여, 차베스 정부를 내부에서 흔들고자 했다. 이런 수법은 과거나 현재나 미국이 항상 이용하는 방법이다. 과테말라의 아르벤스, 브라질의 골라르트, 칠레의 아옌데 등이 그렇게 레짐 체인지(Regime Change)를 당했다. 2002년에만 해도 차베스를 축출하려는 두 번의 쿠데타가 있었고, 실제로 차베스 또한 목숨을 잃을 뻔했다. 그러나 미제국주의자들의 염원과는 달리, 베네수엘라 민중은 차베스편이었다. 그래서 미국과 우익 세력들이 온갖 흑색선전과 여론조작을 해도 쿠데타는 실패로 끝났다.

 

민중들이 차베스를 지키고 수호한 이유는 자명했다. 그것은 차베스가 가난한 인민들을 위해 진심으로 헌신했기 때문이다. 차베스 집권 이전에는 베네수엘라 빈민들과 인종차별을 받던 원주민들을 위해, 헌신하고 그들을 위한 진보적인 정책을 추진한 지도자는 없었다. 차베스가 집권한 이후 베네수엘라 사회에서 차별받던 원주민들도 권리라는 것이 생겼고, 공장과 사회에는 인민들의 의사가 직접적으로 반영되는 시스템이 도입됐다. 탐욕과 이윤밖에 모르는 자본주의 사회가 아닌, 집단과 공동 그리고 대다수 민중을 위한 진보적인 사회가 자리 잡았다. 과거 아주 극소수만 소유하던 집을 빈민들이 소유하게 됐고, 치료비가 없어서 못 가던 병원을 공짜로 치료받을 수 있게 됐다. 이런 혁명적인 변화들은 차베스가 대다수 인민들에게 지지를 받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책을 읽으면서, 우고 차베스에 대한 존경심이 더 생겼다. 사회주의를 향한 그의 원대한 꿈과 정의는 너무나도 아름답고 순수하다. 1959년 혁명으로 사회주의를 건설한 쿠바의 피델 카스트로와 더불어,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의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발걸음은 그 자체로 숭고하다. 이들의 혁명과 진보가 아름다운 건, 인간적이고 당연한 가치이기 때문이다. 단순히 기업과 자본가 계급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자본주의의 가치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이런 가치를 부정하고, 범죄와 학살 그리고 폭력을 동반하는 주체가 바로 미국이다. 이런 미국에 대한 환상을 가진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을 보고만 있으면 그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일각에서는 베네수엘라 경제가 실패했다고 말한다. 물론 베네수엘라는 가난하다. 무엇보다 미국의 경제제재는 지금도 해제되지 않았다. 미국은 차베스가 집권한 시점부터 현재까지 무려 20년간 베네수엘라에게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가하고 있다. 베네수엘라 석유 문제도 그 원인을 따지고 보면, 자본과 부, 권력, 달러를 독점한 기업들이 우익들을 동원해 베네수엘라의 자주적인 시스템에 사보타주를 가해서 생긴 일이지, 차베스와 베네수엘라 민중이 의도적으로 망치기 위해서 그런 것이 아니다. 미국의 경제제재와 사보타주 및 테러를 당하는 베네수엘라의 상황은 보지 않고, 그저 서방이 주장하는 말말 앵무새처럼 반복하는 왜곡된 신념이 진실의 눈을 가린 것이다.

 

차베스는 2013년에 사망했다. 그러나 그는 죽기 전까지 미제국주의에 맞선 투쟁과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투쟁을 포기하지 않았다. 비록 사회주의 국가는 아니지만, 베네수엘라는 사회주의로 가기 위한 그 과도기적 단계에 있다. 현재는 그의 후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가 지도자로 있다. 우고 차베스와 피델 카스트로 그리고 에보 모랄레스로 이어지는 사회주의 승리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투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전 인류가 COVID-19를 겪으며, 자본주의 하에서 고통을 받고 있다.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말대로 사회주의를 선택하지 않은 자본주의 국가는 우크라이나 전쟁이라는 어리석은 선택을 했다. 물론 자본주의 러시아 보다 자본주의 미국의 책임이 훨씬 더 크긴 하지만, 자본주의라는 야만주의가 불러온 결과다.

 

20세기가 끝나는 시점에서 21세기에 사회주의를 시도한 베네수엘라의 붉은 별 우고 차베스, 그는 비록 세상을 떠났지만 사회주의를 향한 라틴 아메리카의 전진은 COVID-19라는 위기 속에서 지속되고 있다. 자본주의가 야만주의라는 사실은 미국을 통해서 숱하게 봐왔다. 20세기에는 베트남 21세기에는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까지 미국이 일으킨 침략전쟁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표현대로 제국주의 세력이 보여준 야만주의 그 자체다. 그 침략전쟁으로 돈을 벌고 이윤을 축적하는 것도 미제 그 자체다. 현재 우크라이나 사태에서도 경제적 이득을 보는 건 결과적으로 미국일 것이다. 2013년 유로마이단 색깔 혁명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탈산업화가 가속화되며, 미국과 서방의 기업들만 이득을 보았다.

 

이처럼 자본주의는 야만주의고, 제국주의의며 신식민주의를 추구한다. 따라서 인류가 선택해야할 길은 사회주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라고 하지만, 19세기 마르크스가 분석한 모순은 본질적으로 그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사회주의를 향한 투쟁은 계속돼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고 차베스의 베네수엘라는 적잖은 영감을 주는 사례라고 나는 생각한다. 미제에 맞서 사회주의를 이룩하고자 했던 우고 차베스의 말을 인용하겠다.

나는 매일 더욱 확신하게 되며 내 마음 속에는 한 점의 의심도 없습니다. 이전부터 수많은 지식인들이 말해왔듯이, 우리는 자본주의를 넘어서야 합니다. 하지만 자본주의 안에서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는 없습니다. 사회주의를 통해서만이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일은 민주주의를 통해서 가능합니다. 하지만 미국이 강요하는 방식의 민주주의는 아닙니다. - P2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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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비탄의 추수: 콘퀘스트 그리고 우끄라이나 나찌 협력자들의 복귀

 

19781월에 데이비드 리(David Leigh)는 런던 가디언(Guardian)지에 기사를 냈는데, 거기서 로버트 콘퀘스트가 공식적으로 정보연구부(IRD, information Research Department)라고 불린, 영국 비밀정보부(British secret service)의 부서에서, 그동안 의도적으로 허위 정보를 퍼뜨리는 일을 했다고 폭로했다. 영국 대사관에서 IRD의 대표는 변조된정보를 기자와 유명인사들에게 알리는 일을 맡았다. 가장 중요한 두 개의 목표물은 제3세계와 쏘련이었다. (David Leigh)는 이렇게 주장했다.

 

로버트 콘퀘스트 .. 쏘련에 대해 종종 비판적이던 그는 IRD의 일원이었다. 그는 1956년까지 외무부(FO, Foreign Office)에서 일했다.’23)

 

IRD의 제안으로, 콘퀘스트는 쏘련에 관한 책을 썼다. 출판물의 1/3을 프래저(Praeger)출판사가 매입했는데, 프레저는 CIA의 요구에 따라 주기적으로 책을 출판하고 배포했다.

 

1986, 콘퀘스트는, 적군(Red Army)이 미국을 점령할 가능성에 대해 일반 미국 시민을 대상으로, 레이건이 펼친 선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 만칩 화이트(Manchip White)와 공동 집필한 콘퀘스트의 책은 러시아가 침공하면 취해야 할 행동: 생존 안내서(What To Do When the Russians Come: A Survivalist's Handbook)라는 제목이었다.

 

거대한 테러(The Great Terror)(1968, 1973년 개정)이라는 그의 책에서 콘퀘스트는 1932년과 1933년 사이 집산화 기간에, 500만에서 600만 명이 죽었는데, 우끄라이나에서 그 절반 정도가 죽었다고 추정했다. 레이건의 집권기 동안에 반공주의 광란은, 나찌에 의해 몰살된 600만 명의 유대인의 수보다 많은 수치가 필요하였다. 1983년에 콘퀘스트는 기근의 상황을 1937년까지 연장하고, 사망자 예상수치1400만으로 수정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했다.

 

1986년 그가 출판한 비탄의 추수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인사와 냉전주의자들이 제시한 것과 같은, 거짓 학술 역사서이다.

 

콘퀘스트는 우크라이나의 극우 인사들이 반독일 반쏘비에트투쟁을 이끌었다고 주장하면서, 이러한 범죄 집단(극우 인사 역자)이 패배한 이후 미국으로의 이주를 꾀했을 때 그들이 지어낸 거짓말을 되풀이했다.

 

우끄라이나 역사를 다루면서, 콘퀘스트는 나찌 점령기간을 두 번의 적색 테러의 물결 사이의 시대로서, 한 문장으로 언급한다!24) 그는 나찌 점령기간 동안 우끄라이나 파시스트들이 자행했던 야만적인 테러를 그의 역사서에서 완전히 지워버렸는데, 왜냐하면 그것들은 기근대학살의 최고의 출처이기 때문이다.

 

로만 슈케비치(Roman Shukhevych)는 독일 군복을 입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로 구성된 나이팅게일 대대의 지휘관이었다. 이 대대는 1941630일 리보프(Lvov)를 점령했고, 이 지역에 거주하는 유대인에 대한 3일간의 대학살에 참여했다. 1943년 슈케비치는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Ukrainian Insurgent Army, the Banderivtsy, or UPA) 지휘관으로 임명되었다. 이 부대는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rganization of Ukrainian Nationalists, OUN)의 파시트스 지도자 스테판 반데라(Stepan Bandera)의 심복인 무장조직이었다. 이후에 스테판 반데라는 자신이 독일과 쏘련에 맞서 싸웠다고 전후에 사람들을 속였다.25)

 

그들이 독일에 대항하여 싸웠다는 모든 이야기는 거짓으로 판명되었다. 그들은 독일 나찌 돌격대(SA)의 대장인 빅토르 루체(Victor Lutze)를 사형시켰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사실, 그는 베를린 근처에서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26) 그들은 1943년 여름에 볼니아(Volnia)와 폴리사(polyssa)에서 1만 명의 독일 군인과 전투를 했다고 주장했다. 역사가인 루벤 아인츠텐(Reuben Ainsztein), 이 전투 과정에서 5000명의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1만 명의 독일군 편에서, 유명한 볼셰비끼 알렉세이 표도로프(Bolshevik Alexei Fyodorov)가 이끄는 빨치산 부대를 포위해서 전멸시키려는 대규모 전투에 참여했음을 증명하였다!27)

 

아인츠텐은 이렇게 적었다:

 

반데리브치(Banderivtsy)로 알려지게 된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무리는, 오늘날 따라스 추쁘린카(Taras Chuprynka)로 알려진 슈케비치의 지휘 아래 있었는데, 이들은 생존한 유대인들, 폴란드 농민들과 거주민들, 그리고 모든 반독일 빨치산들에게 가장 위험하고 잔인한 적들이었다.’28)

 

우끄라이나의 무장 나찌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14th Waffen SS Galizien Division)[또한 할리치나 사단(Halychyna Division)으로도 알려짐] 19435월에 창설되었다. 우끄라이나인들에게 이 사단으로 입대를 권유하면서, 나찌가 권한을 부여한 우끄라이나 중앙위원회의 수장인 쿠비조비치(Kubijovych)는 이렇게 선언했다.

 

고대하던 순간이 왔다. 우끄라이나 인민들은 총을 들고 뛰쳐나와 극악무도한 모스끄바인유대인 볼셰비즘(MuscoviteJewish Bolshevism)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다시 얻었다. 위대한 독일 제국의 총통이, 우끄라이나 지원자들로 구성된 독립된 부대를 만드는 것을 승인했다.’29)

 

이전에는 나찌가 우끄라이나에 직접적으로 그들의 권한을 강요했고, 그들의 우끄라이나인 협력자들에게 자율성을 인정하지 않았었다. 나중에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독일에 대한 대항이라는 신화를 만들어 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일과 우끄라이나 파시스트들 간에 있었던 이러한 대립관계 때문이었다.

 

적군에 밀려서 나찌는 1943년에 전술을 바꾸어 우끄라이나 살인자들에게 더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다. 무장 나찌 친위대(SS)우끄라이나인사단의 창설은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의 승리로 여겨진다.

 

1944516, 친위대의 수장인 히믈러(Himmler)는 갈리치아 사단의 독일 장교들에게 우끄라이나에서 모든 유대인을 없애는 데 성공한 것을 축하했다.

 

무장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의 노병인 바실 베리하(Wasyl Veryha)1968년에 이렇게 썼다:

 

무장 친위대 갈라치아 14사단에서 훈련받은 병사들은 이제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군대의 중추세력이 되었다....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 지휘관은 또한 원대 병사들이 제대로 된 훈련을 받도록 무장 친위대에 보냈다.... 이것은 나찌가 물러간 후에 모국에 남은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를 강화시켰고, 특히 지휘관과 교관을 강화시켰다.’30)

 

비록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에서 멜닉(Melnyk)과 반데라31)의 경향이 서로 경쟁하고 심지어 서로 싸우기도 했지만, 우리는 여기서 어떻게 그들이 독일 나찌의 지도 하에 공산주의에 맞서 협력했는지 알 수 있다.

 

나찌 장교인 숄츠(Scholtze)는 뉘른베르크(Nuremberg) 법정에서, 독일 정보기관의 수장인 카나리스(Kanaris)[2차 세계 대전 중의 독일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의 외국 첩보국 역자] 아프베르(Abwehr)에게, 우끄라이나에서 쏘비에뜨 권력에 대항하는 투쟁이 지속되도록 지하 조직을 구성하라고 직접 명령한 사실을 폭로했다. 특히 민족주의 운동을 지도하기 위해 유능한 요원들을 남겨두었다.’32) 만델의 뜨로츠키파 무리가 1944년에서 1952년 사이에 우끄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의 파시스트 암살단들이 자행했던 반스딸린주의무장 투쟁을 항상 지지했다는 점에 주목하라.

 

전후에, 존 로프투스(John Loftus)는 미국 법무부 대리인으로서 특별 조사단에서, 미국에 입국하려는 나찌를 추적하는 직무를 맡았다. 그의 책 벨라루스의 비밀(The Belarus Secret)에서 자신은 우끄라이나인 나찌의 입국을 막는 업무를 했음을 확언했다. 그러나 미국 정책조정 행정실(the U.S. administration's Office of Policy Coordination) 업무를 맡았던 프랭크 위즈너(Frank Wisner)는 당시에 아주 중요한 비밀 업무를 수행했는데, 전직 우끄라이나, 크로아티아, 헝가리 출신의 나찌의 입국이 허락되도록 조직적으로 일을 했다. 나중에 CIA의 수뇌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 위즈너는 이렇게 주장했다: ‘OUN(우끄라이나 민족 조직)1942년 이 조직이 창설한 빨치산 부대(원문대로), UPA(우끄라이나 반란 부대)는 독일과 쏘련 양쪽 모두와 격렬하게 싸웠다.’33)

 

우리는 여기서, 전쟁 직후에 미국 정보기관이 쏘련에 맞선 은밀한 전투에서 반공주의자들을 이용하기 위해서, 어떻게 우끄라이나에서의 나찌 활동 역사를 이어받았는지 알 수 있다. 로프투스(Loftus)는 이렇게 논평했다:

 

이것은 완벽한 허구이다. CIC(미국의 방첩부대, U.S Counter-Intelligence Corps)에는 OUN반데라에 관한 11권의 내부 비밀 자료를 찍은 정보요원이 있었다. 이 자료들은 위의 조직원들 대부분이 독일 비밀경찰(Gestapo)이나 나찌 친위대를 위해 경찰, 암살자, 빨치산 사냥꾼 그리고 시의 공무원으로서 어떻게 활동했는지 명백히 보여준다.’34)

 

미국에서, 전직 우끄라이나 나찌 협력자들은 제2차 세계대전의 역사에 관한 그들의 개정판을 퍼뜨리는 연구소를 창립했다. 로프투스는 이렇게 적었다:

 

전직 나찌 정보요원들을 위한 전방에 위치한 조직(front groups)과 마찬가지인, 이러한 연구소의 기금은 오늘날 자유 라디오로 알려진, 볼셰비즘으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아메리칸 위원회에서 나왔다. 이 위원회는 사실상 OPC의 최전열(a front)이었다’35)

 

히틀러와 스딸린에 대항해서’: 전직 히틀러주의자와 CIA가 그들의 힘을 합치는 것은 바로 이러한 구호 주위에서이다. 잘 모르는 이들에게는 파시즘에 대항하고 공산주의에 대항하는 표현이 3의 길로 보일 수도 있으나, 이것은 분명히 사실이 아니다. 나찌가 패배한 이후 붕괴하는 대독일의 이전의 지지자들과, 세계 패권을 갈망하고 있던 그들의 후계자인 미국을 통합시킨 것은 바로 이 관용어구이다. 이제 히틀러는 단지 과거의 일부가 되었기 때문에, 독일, 우끄라이나, 크로아티아 등의 극우는 미국의 극우와 결합했다. 그들은, 반파시즘 전쟁의 주력을 담당했던 사회주의와 쏘련에 맞서기 위해 힘을 합쳤다. 부르주아 세력을 다시 모으기 위해, 그들은 사회주의가 나찌주의보다 더 나쁘다는 거짓을 퍼뜨렸다. ‘히틀러에 맞서고 스딸린에 맞서서라는 표현은 스딸린의 범죄대학살을 조작하는데, 또한 더 유용하게는 히틀러의 소름끼치는 범죄와 대학살을 덮어버리고 심지어 부정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986년에, 우끄라이나 반란 부대(UPA)의 베테랑이며, ‘히틀러와 스딸린에 맞서서싸우는 척했던 바로 그 군인이, 왜 이 대학살이 다른 학살과 비교해 큰 의미를 지니는가?라는 제목의 책을 한 권 출판했는데, 바로 UPA의 군인이었던 유리 추마트스키(Yurij Chumatshkyj)가 저자였다. ‘유대인을 말살하려는 계획은 없었고, 대규모의 독가스 살해도 없었으며, 2차 세계대전에서 모든 이유로 인해 죽은 유대인이 100만 명이 안 된다고 주장하는 수정주의 역사가들이 박해당하고 있다.’고 유감을 표하면서, 추마트스키는 계속 말했다:

 

시온주의자들의 진술에 의하면, 히틀러는 600만의 유대인을 죽였지만, 유대 국가기관의 지원을 받은 스딸린은 히틀러보다 10배는 많은 수의 기독교인을 죽일 수 있었다.’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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