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 -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부터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
김남기 지음 / 어깨걸고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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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이 책의 원고를 쓰기 시작한 것은 2019년 외할머니가 고인이 되실 때쯤이었다. 2018년 군복무를 마친 나는 전역 이후 미국여행을 갔었고, 여행을 하면서 미국의 이면을 보게 됐다. 사실 내가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미국의 역사학자 하워드 진(Howard Zinn)의 저서<만화로 보는 미국사><미국 민중사(A 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를 읽으면서였다. 이 책을 통해 미국의 또 다른 민낯을 보다 자세히 알게 됐고, 이는 내 미국여행에서도 큰 영향을 줬다.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계기는 내가 하고 있는 페이스북 상에서라도 미국의 추악한 역사를 알리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미국을 비난하든 칭찬하든 간에 많은 사람들이 미국의 역사를 잘 아는 경우는 찾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의 추악한 이면을 모르거나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알리기 위해 미제국주의 역사라는 타이틀을 단 글을 페이스북과 블로그에 연재했다. 연재를 하다 보니, 책 한권 정도의 분량이 나왔다. 따라서 이 글을 책 한권으로 내고 싶었다.

 

책을 내기까지 제법 오랜 시간이 걸렸다. 연재는 2019년 여름부터 20203월까지 했던 것으로 기억이 난다. 그러나 출판을 하기 까지는 연재를 시작하고 나서 2년이 걸렸다. 출판은 결국 내가 속해있는 단체에서 하게 됐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종결과 맞추어 출판했다. 물론 그 과정에서 새로 알게 된 미국 역사 관련 내용들과 기존에 추가하고 싶은 내용들을 원고에 추가하는 작업을 거쳤다.

 

책은 하워드 진이 쓴 <미국 민중사>의 구조를 다소 따른 감이 있다. 책의 시작은 콜럼버스의 침략부터 작년에 종결된 미국 아프가니스탄 전쟁까지를 다뤘다. 물론 미국의 침략사 및 개입사를 주로 다뤘지만, 인종차별 문제와 인권 문제도 책에서 같이 다뤘다. 미국이 경제 강국 및 군사강국으로 부상하게 되는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을 제법 깊숙이 다뤘고, 미소냉전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도 책에서 다른 주제들 보다 깊숙이 다룬 측면이 있다. 마지막 챕터인 아프가니스탄 전쟁도 그렇다.

 

이 책은 미국의 역사가 침략과 약탈 그리고 학살과 인권유린으로 얼룩진 역사임을 주장한다. 저자는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미소냉전이 사실은 미국의 신제국주의적 정책에 입각한 것이었다는 사실을 미국의 여러 개입들을 근거로 강조한다. 1950625일 북한이 시작한 한국전쟁도 사실은 대량 민간인 학살의 주체가 미국과 한국이었으며, 그에 반해 인민군과 좌익의 학살은 훨씬 적었음을 저자는 역설한다. 베트남 전쟁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책은 베트남 전쟁이 미국이 추악하고 잔혹한 침략전쟁이며, 호치민과 베트남 민중이 민족해방전쟁이었음을 주장한다. 그리고 그 전쟁에서 미국은 무수히 많은 폭탄과 화학무기를 베트남에 살포하여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전쟁범죄를 저질렀음을 저자는 강조한다.

 

1991년 소련 해체 이후 냉전이 종결되자 미국은 오히려 더 강대국으로써의 위치를 고수했고, 소말리아 내전과 유고슬라비아 내전 등에 개입했으며, 2001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했다. 이 역사적 사건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분명하다. 이것은 결국 미국이 자초한, 비극이었으며, 미국은 아프가니스탄 침략 몇 개월간 9.11 테러로 죽은 미국 민간인 3,000명보다 훨씬 더 많은 2만 명을 죽였다고 말이다.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으로 65만 명의 이라크인이 죽었고, 아프가니스탄은 20년 동안이나 전쟁을 치렀다. 이러한 비극의 결정적인 원인은 미국 제국주의 그 자체에 있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이다.

 

이 책의 출판은 분명 개인적으로나 사회 운동적으로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책 자체는 저자인 내가 보기에도 몇몇 놓친 점이나 오류들도 있다. 책을 다시 훑어보면서 느꼈지만, 철자 오류들이 종종 보였다. 이 점은 저자로써 다소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리고 미국 침략사에서 중요한 먼로 독트린에 대한 내용이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의 이란 내정간섭 등의 내용도 빠져있다. 이러한 문제점들은 나중에 개정판을 내게 된다면 꼭 정정하고 싶다.

 

책 서문에서도 밝혔듯이, 이 책은 전문서적이 아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운동하는 이들을 각성시키기 위한 목적도 분명 있다. 그러나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이 책은 친미주의가 널리 퍼진 한국 사회에서 다른 시각으로 미국을 보고자 한 도전이었다고 말이다. 나중에 많은 자료들과 사회적 경험을 더 쌓으면, 이 책의 개정판을 언젠가는 낼 것이며, 사회운동에 보다 기여를 하고 싶다. 조금이라도 미국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면 사회적으로 매장당하는 한국사회에서 누군가는 이러한 목소리를 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을 출판하는 과정에서 많은 이들의 후원을 받았다. 국내뿐만 아니라 미국이나 캐나다, 호주, 베트남 등 해외에 사는 이들이 나에게 후원금을 보냈었고, 후원을 해준 이들에게 해외 및 국내배송으로 책을 붙였다. 후원해준 분들 덕분에 출판을 할 수 있었다. 여전히 부족한 점이 많지만, 이 책 출판을 위해 후원해주신 수많은 분들에게 깊은 감사함을 느낀다. 요즘 들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이 끝나질 않고 있다. 전쟁 자체는 러시아의 부당한 침략으로 시작됐지만, 미국의 바이든 행정부는 여전히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당연하다는 듯이 감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살인적인 경제제재를 비판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쿠바와 북한 이란, 베네수엘라 등이 겪은 경제제재가 얼마나 반인권적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볼 때라고 본다. 그런 점에서 내가 쓴 책 <반공주의가 외면하는 미국 역사의 진실>은 미국을 보는 또 다른 관점을 제시해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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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우크라이나 반전집회 참가했습니다. 러시아의 침략에 반대하면서 그와 동시에 미제와 나토 그리고 우크라이나 네오나치에 반대합니다. 저는 이것을 다 반대하는 바이며, 이것에 대한 종합적인 비판없는 반전운동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투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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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우끄라이나 기근의 원인들

 

19321933년에 우크라이나에는 기근이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주의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하는, 우끄라이나 극우파가 이끄는 비참한 종말에 이른 투쟁에 의해 주요하게 유발된 것이었다.

 

1930년대 동안 히틀러주의자들과 연계된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인민들을 전멸시키기 위해 고의적으로 야기된 기근이라는 흑색선전의 주제를 이미 십분 활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이러한 흑색선전은 독일과 우끄라이나 나찌가 자행한 야만적인 범죄를 은폐하는 것을 주목적으로 하여 보정되었는데, 이것은 파시즘을 보호하고 공산주의에 맞서 서방 세력의 힘을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실, 1950년대 초 이래로 600만 유대인이 전멸했다는 사실 자체가 전 세계적인 자각을 불러 일으켰다. 세계의 우익 세력은 공산주의 테러에 의해 야기된더 많은 수의 사망자 숫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맥카시즘이 활개친 해인 1953, 20년 전 의 우끄라이나에서의 사망자 숫자가 극적으로 증가하는 일이 발생했다. 유대인들이 과학적, 계획적 그리고 체계적인 방식으로 살해당했기 때문에, 우끄라이나 인민의 몰살또한 냉혹하게 자행된 대학살의 형태를 띠어야 했다. 그리고 유대인 대학살에 대해 격렬하게 부인하는 극우파는 우끄라이나 대학살을 조작했다!

 

무엇보다도, 그것은 농업 집산화에 반대한 꿀락들과 짜리즘을 그리워하던 반동 분자들에 의해 야기된 내전으로 촉발되었다.

 

프레드릭 슈만(Frederick Shuman)은 기근 동안 여행객으로서 우끄라이나를 여행했다. 그는 윌리엄 대학의 교수가 되자, 1957년에 쏘련에 관한 책을 출판하였다. 그는 기근에 대해서 이렇게 말했다.

 

19321933년의 우끄라이나 기근은 네 가지 원인이 있었다.

 

그들의 반대파(꿀락)는 그들의 소와 말들을 집단소유로 하기보다는 차라리 도살하는 방식을 초기에 취했다. 그 결과 쏘비에뜨 농업은 통탄할 만한 타격을 받았는데, 왜냐하면 대다수의 소와 말들을 꿀락들이 소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28년과 1933년 사이에, 쏘련에서 말의 수가 거의 3,000만 두에서 1,500만 두 이하로, 뿔 달린 소의 숫자는 7,000만 두(젖소 3,100만 두 포함)에서 3,800만 두(젖소 2,000만 두 포함); 양과 염소는 14,700만 두에서 5,000만 두로, 돼지는 2,000만 두에서 1,200만 두로 감소했다. 쏘비에트의 농촌 경제는 1941년 무렵까지 이러한 치명적인 손실에서 회복되지 못했다.’

 

‘... 몇몇은[꿀락들은] 관리를 살해했고, 집단농장의 재산에 불을 질렀으며, 심지어 그들 자신의 수확물과 종자까지 불태웠다. 보다 많은 이들이 파종과 수확을 거부했는데, 이들은 아마도 당국이 양보를 하거나 어차피 그들을 먹여 살릴 것이라는 가정 아래 이런 행동을 하였다.’

그 여파로 1932-1933년에 우끄라이나 기근이 닥쳤다.... 독일에서는 나찌 출판물에 그리고 미국에서는 허스트 출판물에 등장한, 대부분 허구인 무시무시한 서술에는, 1921년 볼가 지방에서 촬영된 것으로 밝혀진 사진이 종종 예시된다. .... 일본에서의 전쟁에 대한 두려움에 의해 명백하게 야기된, 1932년 봄의 특별 징발로 인해 종자와 수확물의 급격한 감소에도 불구하고, “기근은 그 후반기에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결과가 아니었다. 희생자의 대부분은 자신들의 농장에 파종을 거부하거나 자신들의 수확물을 불태운 꿀락들이었다.’39)

 

이러한 목격자의 진술이, 우끄라이나 민족주의 운동의 지도자이자, 1918년 뻬뜨리우라(Petliura) 하에서 수상을 지냈던 이삭 마제파(Issac Mazepa)가 쓴 1934년 기사에서 증명되었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는 우끄라이나에서 우익이 1930-1932년 동안 농업 분야에서 광범위한 파괴행위에 성공했다는 사실을 떠벌렸다.

 

처음에는, 꼴호즈들에 대한 방해공작이 자행되었고 공산당 관리들이나 그들의 대리자들이 살해당했으나, 나중에는 볼셰비끼의 파종과 수확 계획을 조직적으로 좌절시키는 데 목표를 두는 소극적인 저항 방식이 선호되었다.... 1932년의 대재앙은 쏘비에뜨 우끄라이나가 1921-1922년의 기근 이래로 직면해야 했던 가장 혹독한 재난이었다. 가을과 봄의 파종 운동은 모두 실패로 끝났다. 전체 농지에 파종이 안 되었고, 게다가 농작물을 수확할 때, ... 많은 지역에서 특히 남부지방에서 20%, 40%, 심지어 50%가 토지에 그대로 방치되었고, 그리고 전혀 수집이 이루어지지 않거나 탈곡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40)

 

두 번째 기근의 이유는, 1930, 1931, 1932년에 우끄라이나 특정 지방에 닥친 가뭄 때문이었다. 하버드에서 우끄라이나의 우익 노선을 옹호하는 제임스 E. 메이스 교수에게는 그것은 쏘련 정권이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러나 민족주의자들 스스로가 우끄라이나의 선구적인 역사가로서 묘사한 미하일로 흐루셰프스키(Mykhailo Hrushevsky), 그의 책 우크라이나의 역사에서 1932년 상황을 서술하면서, ‘혼란스러운 농업 상황에 또 다시 가뭄까지 겹쳤다.’라고 말했다.41) 하버드의 러시아 연구소에서 강의를 했던 니콜라스 리아스노프스키(Nicholas Riasnovsky) 교수는 1931년과 1932년에 가뭄이 있었다고 썼다. 내전기간 동안 볼셰비끼에 대항해 싸웠던 미카엘 플로린스키(Michael Florinsky) 교수는 이렇게 적었다. ‘19301931년의, 특히 우끄라이나에서 심각한 가뭄은 농업상태를 악화시켰고 기근에 가까운 환경을 만들었다.’42)

 

기근의 세 번째 요인은, 우끄라이나와 북 코카서스를 황폐화시킨 장티푸스 전염병이었다. 세계적 명성의 도시 계획가이자 캐나다 훈장을 받은 한스 블루멘펠드 박사(Dr. Hans Blumenfeld)는 기근 시기에 우끄라이나 마카예프카(Makayevka)에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이렇게 적었다.

 

기근으로 많은 희생자가 생겼다는 것에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나에게는 그들의 숫자를 추정할 방법은 없다.... 아마도 1933년의 대부분의 죽음은 발진티푸스, 장티푸스, 이질 등의 전염병 때문이었다. 마카예프카에서 수인성 질병은 흔한 것이었다: 나는 티푸스 열병에 걸려 간신히 살아남았다.’43)

 

기근 동안 1500만 명의 말도 안 되는 수치 19322,500만 명의 우끄라이나인구 중 60% 를 제시했던 인물인 호슬리 그랜트(Horsley Grant)는 그와 동시에 이렇게 적었다. ‘발진티푸스 전염병의 절정은 기근과 일치했다.... 이 두 가지 중에 어느 것이 죽음을 야기하는 더 큰 원인이 되었는지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44)

 

네 번째 기근의 원인은, 농업의 재편성 과정과, 경제적 및 사회적 관계에서의 근본적인 대격변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무질서였다: 빈곤한 농민들과 일부 관리들의 경험부족, 즉흥적이고 혼란스러운 지시들, 준비부족, 좌익 급진주의.

 

기근으로 인한 100만에서 200만의 사망자 수치는 확실히 중요하다. 이러한 인간의 죽음은 주로, 사회주의 기초 위에서 농업의 재조직과 현대화에 대한, 착취계급의 지독한 저항 때문이다. 그러나 부르주아계급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책임을 스딸린과 사회주의에 지우려고 한다. 100만에서 200만이라는 수치는, 여덟 제국주의 국가들의 군사적 간섭과, 그들이 반동 무장 단체에 제공한 지원 때문에 본질적으로 초래된, 19211922년 기근에서 발생한 900만의 죽음과 또한 비교해 보아야 한다.

 

기근은 1933년 수확 이전 시기를 넘어서까지 지속되지는 않았다. 그 해 수확의 성공을 보장하기 위해서 쏘비에뜨 정부는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봄에 3,500백만 푸드(pood 러시아 무게 단위)의 종자, 식량 그리고 사료가 우끄라이나로 운송되었다. 꼴호즈의 조직화와 경영은 향상되었고 수 천 대의 추가적 트랙터, 복식수확기, 트럭이 수송되었다.

한스 블루멘펠드(Hans Blumenfeld), 그의 자서전에 우끄라이나 기근 동안의 그의 경험을 요약해서 적었다:

 

여러가지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서 (기근은 일어났다). 먼저, 내가 북 비야트카(Vyatka)에서 이전에 경험한 적이 있던, 덥고 건조한 1932년의 여름으로 인해 남쪽에 있는 반()건조 기후지역에서 수확이 실패했다. 둘째로, 집산화를 향한 투쟁이 농업을 혼란케 했다. 집산화는 관료의 지배를 따르는 질서정연한 과정이 아니었다. 그것은 빈농의 활동으로 이루지고 당에 의해 고무되었다. 빈농들은 꿀락들재산의 몰수는 열망했으나, 협동적인 경제조직을 구성하는 데에는 열의가 덜 했다. 1930년 무렵에 당은 이미 과도함을 저지하고 교정하기 위해 당 간부들을 파견했다.... 1930년 한 번 저항을 경험한 후 당은 1932년에 다시 돌진을 시작했다. 그 결과로서, 그 해에 쿨락 경제는 생산을 멈췄지만, 새로운 집단 경제는 아직 완전한 생산에는 도달하지 못했다. 불충분한 생산품은 가장 먼저 도시 공업과 군대로 보내졌다; 왜냐하면 농민들을 포함해서 연방 전체의 미래가 그들에게 달려 있었기 때문이다. 다른 방법은 거의 불가능했다....’

 

‘1933년에는 강수량이 적절했다. 당은 가장 우수한 간부들을 파견하여 협동농장의 조직화 업무를 도왔다. 그들은 성공했다; 1933년의 수확 이후, 상황은 철저하게, 그리고 놀라운 속도로 호전되었다. 나는 성공할지 여부가 불확실한, 무거운 수레를 언덕 위로 밀어 올리고 있는 심정이었다; 하지만 1933년 가을에, 우리는 정상에 올랐고 그때부터 우리는 가속을 붙여 전진할 수 있었다.’45)

 

한스 블루멘펠드는 기근이 또한 러시아의 볼가 하류지역과 북 코카서스 지방에 피해를 줬다고 강조하였다.

 

이것은 반우끄라이나 대학살이 히틀러의 반유대주의 대학살과 같은 종류라는 사실의 그릇됨을 증명한다. 그 당시 쏘련의 절망적인 인적자원 부족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은 누구든지, 쏘련의 지도부가 의도적으로 그러한 부족한 자원을 감소시키려 했다는 개념은, 불합리하다고 생각할 것이다....’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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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이 외국에 무기를 쏟아붓고 있는 것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서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심각한 군사적 충돌이 아이들이 보는 만화책에서처럼 착한 놈들과 나쁜 놈들이 싸우는 것으로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전쟁이 히틀러와 같은 사악한 괴물과, 뛰어난 용맹과 지혜를 갖고 있는 매력적이고 선한 코미디언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지금까지 모든 전쟁에 대해 거짓말을 해왔던 바로 그 서구 언론 기관들이 이제 이 전쟁에 대해 진실을 말하고 있다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유례없는 검열들이 유럽 연합, 실리콘 밸리의 대기업 및 TV 업체가 모든 사람을 ˝가짜뉴스˝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는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이 좋아하지 않는 정부가 다른 이유 없이, 그 지도자가 사악하고 자유를 싫어하기 때문에 공격적으로 행동한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크라이나가 지구상에서 가장 큰 권력 구조(강대국)의 지시로부터 완전히 독립적으로 행동하는, 엉망진창인 작은 약자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국을 중심으로 하는 세계적인 권력 구조가 전쟁을 주도한 핵심 주체가 아니고 단지 바라보고만 있는 목격자일 뿐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미 제국이 꾸미고 있는 대로 미 제국을 무고한 작은 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우크라이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해 대중에게 거짓말을 할 모든 동기를 갖고 있는 정부들이 단순히 거짓말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자국민들이 빈곤과 질병으로 죽어가는데도 무관심하고 냉담했던 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 국민의 곤경에 깊은 관심을 갖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살인적인 정부가 우크라이나인을 보호하기 위해 오랫동안 파괴의 목표로 삼아왔던 나라의 경제 붕괴를 획책하고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외국에 무기를 퍼붓고 3차 세계대전을 촉발할 수 있는 냉전과 벼랑끝전술을 지지하면서 군비축소, 외교, 긴장완화를 규탄하는 것이 ‘반전‘(反戰)의 입장이라고 믿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 전쟁에 대해 TV가 말하는 것과 일치하지 않으면 무엇이든 그것은 ˝러시아 선전˝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 전쟁에 대해 TV가 말하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들은 누구나 푸틴을 옹호하거나 푸틴이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라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자신과 의견이 다른 사람들을 외국 정부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라고 비난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역사상 가장 강력한 제국이 전쟁을 일으키는 역할을 한다고 비판하는 사람을 이상하고 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기아(飢餓) 제재가 의도적으로 민간인을 해치기 위해 고안된 전쟁 행위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이야기의 한쪽 면만 알아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극도로 강한 권력자들이 세상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조작하는 데 기득권이 있고 지속적으로 다양한 정도의 성공을 거두고 있다는 것을 모르고 있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서방 세계의 가장 강력한 정부와 언론 기관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밀어붙이는 설(說, narrative)들을 깊이 의심하지 않고 보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여전히 자국 정부가 진실하고 공정한 정의의 편에 있다고 믿는 것은 문제다.

#2022년_그대가_어른인데도
보이는 것이 실제와 다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는 것은 문제다.

🌺

위 글은 캐이틀린 존스톤(Caitlin Johnstone)의
˝어른이 우크라이나를 이런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문제다˝
(It‘s Not Okay For Grown Adults To Think This Way About Ukraine)의 전재입니다.

캐이틀린 존스톤은 호주의 저널리스트입니다. 두 아이의 어머니이기도 한 존스톤은 미디어에서 전하는 사항들이 진실과 다른 경우가 너무나 많다는 것을 깨닫고, 금기 사항 없이 자유롭게 말하기 위해 클라우드 펀딩만으로 저널리스트 일을 하고 있습니다.

존스톤은 ˝내러티브(說)를 통제하는 사람이 세상을 지배한다˝면서 ˝대중에게 효과적으로 선전할 수 있는 능력이 없으면 그들은 통치할 수 없다. 따라서 나는 그 선전 메카니즘을 공격하고 대중이 대중 매체에 대해 갖고 있는 부당한 신뢰를 약화시키는 데 내 모든 에너지를 집중한다˝고 밝혔습니다.

원출처 : https://caitlinjohnstone.substack.com/p/its-not-okay-for-grown-adults-to?s=r

페이스북 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4894727837231544&id=1000008312839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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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공산당이 벌인 집회)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미국과 소련이 경쟁하는 이른바 냉전(Cold War)이 시작됐다. 미국과 소련은 자신들의 영향력을 전 세계에 전파하고자 했고, 이들은 45년이라는 세월 동안 정치, 경제, 군사, 과학기술 및 사회문화에 있어서 경쟁했다. 미국이나 한국의 역사 교과서는 냉전의 책임을 일반적으로 동유럽에 세력을 확장했던 이오시프 스탈린(Joseph Stalin)에게 전가한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냉전 초기의 양상을 살펴보면, 가장 많은 무력과 폭력 그리고 내정간섭을 일삼았던 것은 소련의 스탈린이 아닌,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었다. 그렇다면 미국의 해리 트루먼이 소련의 스탈린보다 훨씬 더 내정간섭을 했고, 군사적 무력을 사용했다는 그 증거는 무엇일까? 물론 증거야 20세기 세계 혁명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차고 넘치지만, 이 글에선 냉전 초기 미국의 대표적인 개입 사례인 그리스 내전에 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46년 3월 미국 풀턴 미주리주에서 영국의 총리 윈스턴 처칠(Winston Churchill)이 이른바 철의장막(Iron Curtain) 연설이 퍼지면서, 미국과 영국은 소련에 대한 적대심을 드러냈다. 처칠이 이러한 주장을 한 이유에는 소련에 대한 반공주의 강화라는 측면이 있었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프랑스나 이탈리아 그리고 핀란드 등 각국의 총선에서 공산당이 최소 20% 이상의 득표율을 기록했던 배경도 작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이탈리아에서 공산당이 선거로 집권할 조짐이 보이자, 무솔리니 시절의 파시스트들을 이용하여 노조를 파괴하고 물자지원을 끊었으며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었다. 오늘 얘기해보고자 하는 그리스의 사례도 마찬가지였다. 1947년 3월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포하면서, 그리스 내전에 더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놀랍게도 당시 미국이 해방 정국에서 이승만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게 되는 시점과 맞물린다. 그리스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941년 초 히틀러의 나치 독일은 그리스를 침공하여 점령했다. 당시 그리스인들은 나치 독일에 맞서 저항했고, 무장투쟁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주체는 그리스 공산당 휘하의 군대인 그리스 인민해방군(ELAS)이였다. ELAS는 유고슬라비아의 티토, 알바니아의 호자 그리고 나치 독일 점령하의 소련 영토에 있던 빨치산 세력들처럼 게릴라전을 전개하여 침략자 나치에 맞서 싸웠다.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전개되던 1944년 나치 독일은 그리스에서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나치 독일이 그리스에서 물러나자, 영국군이 그리스에 상륙했다. 영국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이들을 처벌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이들을 이용했다. 당시 영국이 지원했던 세력이 바로 그리스 왕당파 세력이었다. 당시 그리스에서는 대중들에게 인기있는 좌파민족해방전선(그리스 공산당이 주도함)을 전복시켰고, 우파 독재정권을 세웠다.

이렇게 되자, 1946년 그리스 좌파 세력들은 왕당파에 맞서 다시 무장투쟁을 전개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 내전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재정적으로 힘들던 영국의 처칠 정부는 미국에게 그리스 반군을 진압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리스 내전은 1947년에 접어들면서 격렬해졌다. 1947년 3월 미국은 이른바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했고, 그리스 내전에 개입했다. 트루먼 행정부는 대포와 폭격기, 네이팜 폭탄 등 74,000톤의 군사 장비를 지원했고, 제임스 밴 플리트(James Van Fleet)가 이끄는 250명의 군사고문단을 투입했다. 소련의 스탈린은 제2차 세계대전 과정에서 영국과 맺은 협정에 따라 그리스 공산군에 대한 지원은 다소 소극적이었다. 소련의 물자가 불가리아 국경을 통해서 들어가기는 했으나, 적극적인 지원이었다고 하기는 다소 힘들었다. 어쨌든 트루먼 독트린이 선포되자, 소련은 분노했다. 소련의 <프라우다>지는 “미국이 자선을 빙자해 제국주의적 팽창을 추구하고 있으며, 먼로 독트린을 유럽으로 확장하고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미군사고문단은 1947년 6월에 그리스 교전 지역에 배치됐다. 밴플리트가 이끄는 고문단은 과거 나치에 협력했던 왕당파 세력을 도우며 그리스를 전술 시험 장소로 활용했다. 당연하게도 노조파괴, 고문, 민간인 마을에 대한 네이팜 폭탄 투하, 주민 대량 소개 후 재판 또는 기소 없이 강제수용소에 구금, 위험인물의 아내와 자녀에 대한 대량 투옥, 군사재판에 의한 대량 처형, 언론 검열 같은 전술들을 활용했다. 이는 1948년 제주 4.3 사건과 한국전쟁 그리고 베트남 전쟁에서 미국이 활용했던 전술이기도 하다. 그런 미국의 지원을 받은 그리스 왕당파 세력은 1948년에 이르러 작전지역을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아티카까지 확대했으며, 1949년 내전에서 승리했다. 이에 따라 그리스는 군주정지지 세력과 부유한 실업가들 수중에 들어갔으며, 당연하게도 이들 대다수는 나치 협력자들이었다. 반면, 이들에게 학살당한 희생자는 주로 나치와 서구 제국주의 침략에 맞서 싸웠던 노동자와 농민이었다. 따라서 이점만 보더라도 미국은 철저히 반민중적인 인사들 편이었다.

3년간 전개된 그리스 내전으로 최소 10만 이상의 그리스인이 사망했고, 수십만 명이 난민이 되었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의 개입으로 제국주의 세력의 승리로 끝났기에, 25년 동안 우익 독재정부가 그리스에서 활동했다. 결국 1974년 민주화를 이룩할 때까지, 그리스는 암울한 친미 독재정권 시기에 놓이게 됐다. 그리스 내전은 미국이 타국의 주권을 군사적으로 개입하여 침범한 대표적이 예시이며, 소련보다 미국이 더 개입주의적임을 입증하는 사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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