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이후 여운형의 연설하는 모습)

 

몽양 여운형은 조선건국동맹과 조선건국준비위원회 활동 그리고 좌우합작운동까지 해방 정국에서 가장 대중적인 지도자였다또한 그는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이기도 하며좌와 우를 총망라할 수 있던 지도자일 것이다젊은 시절 독립운동에 뛰어든 여운형은 1922년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난 적이 있다그는 레닌과의 회담에서 많은 감동을 받았고레닌과의 만남은 그가 사회주의를 포옹할 수 있는 역량을 길렀다고 할 수 있다오늘은 여운형과 레닌의 만남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시킨 레닌은 적백내전이 진행되는 와중에도 식민지 해방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이른바 제인터내셔널을 창설했다소비에트 러시아는 1921년 11월 미국에서 시작된 워싱턴회의에 맞대응하여,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일까지 모스크바에서 코민테른 집행위원회가 주최하는 극동피압박민족대회(1차 극동피압박인민대회)를 개최했다사실 수많은 독립운동 세력들이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에 실망했던 것처럼, 1921년 미국 워싱턴회의도 적잖은 독립운동가들을 실망하게 만들었다.

(사회주의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가하고 있던 몽양 여운형은 우사 김규식·김상덕·조봉암 등 도합 56명과 함께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가했다극동피압박민족대회는 소비에트 러시아 이르쿠츠크에서 개최하기로 되어 있었지만장소가 이르쿠츠크에서 수도 모스크바로 바뀌었다당시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이 대회에 각국의 대표자는 총 144명이었는데한국이 56중국이 42일본이 16몽골이 14부리아트 3인도 2명이었다압도적으로 한국인이 가장 많았다.

(1922년 극동피압박민족대회 모습, 카를 마르크스 흉상이 있는 것이 인상적이다.)

 

당시 중국 상하이에 있었던 여운형은 김규식 등과 함께 소비에트 러시아의 이르쿠츠크로 향했고주최 측으로부터 연락을 받은 뒤에 모스크바로 갔다당시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까지는 10일이 걸렸지만모스크바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이상적인 도시였다레닌의 볼셰비키 정권이 피압박민족해방과 반식민지 투쟁을 지원한다고 선언했기 때문이었다모스크바에 도착한 여운형은 우렁찬 연설을 듣게 됐다그 연설은 바로 레프 트로츠키의 연설이었다여운형은 대회가 열리기 며칠 전 트로츠키의 연설을 들었는데이후 그는 당시 받았던 감동에 대해 1936년 조선중앙일보에 실은 <나의 회상기>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그렇게 훌륭한 웅변을 처음 들었다대중들은 손벽을 치고 소리를 지르고 발을 구르면서 그야말로 사자처럼 포효하는 이 거인 앞에 미친 듯이 흥분하는 것이었다.”

 

이후 대회에서 조선의 대표자격으로 연단에 오른 여운형은 유창한 영어로 조선독립의 이유와 현재 조선인이 일제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을 소개하면서 조선의 독립을 호소했다대회는 조선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맺으며 끝을 냈다.

(극동 피압박민족대회 사진, 사진 안에는 여운형과 김규식도 있다.)

 

조선혁명은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그 정부를 격려하고 수정함으로써 수행되어야 한다조선은 공산주의에 지식이 없는 농업국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강조해야하며1차적 목표를 농민에게 두어야 한다.”

 

대회에 참석했던 여운형은 회장 안에 들어섰을 때맨 앞줄 단상 밑에 대머리를 한 인물이 머리를 숙인 채 왔다갔다 하는 것을 봤고그가 바로 블라디미르 레닌인 것을 알아봤다이후 여운형은 자신이 본 레닌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때저 쯤 되는 인물이면 회의 시작 직전 만장의 박수갈채를 받으며 맨 나중에 입장하는 것이 보통일 터인데 하는 생각을 해봤다.”

 

회의 기간 2주 동안 몽양 여운형은 레닌과 두 차례 회담했다레닌과의 첫 번째 회담은 일본인 가타야마를 동반했으며레닌은 조선의 독립은 일본의 혁명은 같은 과제로서 서로 배려와 양보 속에서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전 독립기념관장 김삼웅씨가 쓴 몽양 여운형 평전에는 당시의 회담 내용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다.

(모스크바의 붉은광장)

 

처음에는 일본인 대표 가타야마와 동반했고 두 번째는 중국인 대표 구추백과 함께 만났다이 자리에서 레닌은 먼저 가타야마를 향해 동지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생명을 바쳐 투쟁하겠는가?”라고 묻고여운형을 향해서는 동지는 일본의 혁명을 위해 싸울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다두 사람이 다같이 그렇게 할 수 있다고 대답하자 레닌은 말을 계속하여 다 같은 공산당이면서도 소련 공산당과 핀란드 공산당은 불화가 생겼었다이것은 소련 사람의 우월감 때문이다물론 같은 혁명 동지라 하더라도 사람인 이상 완전히 감정을 초월할 수는 없는 일이어서 서로 이해와 양보가 있어야 할 것이다조선인과 일본인이 서로 악수를 하면 양국의 혁명은 무난할 것이다.”라고 자신의 견해를 말했다다음날 구추백과 같이 가서 다시 레닌을 만났을 때 레닌은 손문의 혁명운동을 지지하고 자기가 손문에게 편지를 보냈는 데 그 사이 받아보았을 것이라고 말하면서 손문을 적극 원조하겠다는 뜻을 말했다.”

 

출처몽양 여운형 평전 p.191~192

 

여운형은 이렇게 모스크바에서 레닌과 트로츠키를 만났으며이후 그의 이러한 경험은 공산당에 대해서 다소 호의적인 감정을 가지게 된 계기였을 것이다여운형이 모스크바에 가서 레닌을 만났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은 별로 없다이후 여운형은 손문과 장제스마오쩌둥호치민 등의 인물하고도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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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되네. 좀 이상하다. 올바른 아이디 비번을 분명 눌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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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차학살에 대한 NL들의 입장

러시아 우크라이나 전쟁이 격해지면서, 러시아군에 의한 학살이 언론에 보도되고 있다. 물론 나는 언론들의 보도를 액면 그대로 믿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이번에 하고 싶은 말은 꼭 해야겠다. 부차 학살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나는 전쟁의 책임을 러시아 보다 미국에게 더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러시아의 일방적 침략이 합리화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NL들을 보면, 일방적으로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다. 난 이부분이 아니꼽다.

러시아가 제국주의라는 주장에 나는 결코 반대하지만, 이번 부차 학살에 대한 NL들의 보도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고 본다. 물론 서방의 악의적인 보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지구 반대편에서 일어나는 일을 우리가 제대로 아는 것도 힘들다.

따라서 부차 학살에 대한 반박 기사는 그 만큼 신중할 필요가 있었다. 워낙 양측 증언이 엇갈리는 상황에 단순히 러시아발 관영 매체만의 보도만을 인용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본다.

나는 부차 학살의 진상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단순히 서방측 보도만 액면 그대로 믿어서는 안되는 것을 잘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러시아의 선전 매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 일부 인사들의 주장은 신중하지 못했다고 보며, 적어도 교차검증이 필요한 부분이었다고 본다.

관련출처: https://m.facebook.com/story.php?story_fbid=10228074071699780&id=13142115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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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 초상화)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한국은 매우 가난한 나라였다. 1945년 해방이 된 이후 미군정 시절의 남조선 경제는 피폐했다. 19469월 부산철도노동자의 파업을 시작으로 이른바 9월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것은 결국 대구 10.1 항쟁으로 확산되었는데, 그 이유는 당시 미군정 하에서의 열악한 경제상황을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이 실시되면서 쌀값이 폭등했고, 물가도 폭등했다. 물가는 1944년에 비해 1946년에는 92배나 증가했고, 임금은 물가상승을 따라가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19455월 물가지수가 233일 때 노동자임금지수가 233이었는데, 19465월 물가지수 77,393일 때 노동자 임금지수는 6,015였다. 19461월 소매로 16kg180원 하던 쌀값이 9월에는 1,200원으로 상승하는 초 인플레이션 현상이 미군정 하의 한반도에서 벌어졌다.

 

결국 노동자 농민이 미군정에 맞서는 시위를 한 것은 너무나도 당연했다. 거기다 미군정은 이 땅에 상륙한 시점부터 친일 인사들을 자신들의 정권 하에 대거 등용했고, 최소 80% 이상이나 되는 경찰과 공무원이 친일인사들이었다. 경찰의 경우 그냥 10명 중 9명 이상은 친일경찰들이었다. 이런 모순점들이 격해지면서, 결국 민중항쟁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항쟁은 미군정이 잔혹하게 진압하면서 비극적으로 끝났다. 제주 4,3 항쟁과 여순항쟁 등 1945년부터 1950년까지 미군정 하에서 최소 10(20만 명이라는 수치도 존재한다.) 이상의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고, 비슷한 규모의 정치범이 국가보안법으로 감옥에 수감됐다. 1950년 북한의 공격으로 한국전쟁이 일어나면서 남북한 모두 국토가 초토화 됐다. 국토 초토화의 원인은 당연하게도 미군의 무차별 폭격 때문이었다.

(전쟁 이후 서울의 모습)

 

1948년 유엔과 미국의 지원을 받아 탄생한 이승만 정부의 경제체제는 한국전쟁 시기부터 미군과 유엔군의 구호물자에 의존하는 체제였다. 물론 이승만 정부는 민생문제에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심지어 자국군인 10만 명이 방산비리로 아사하는 국민방위군 사건과 같은 어처구니 없는 일이 일어나던 사회가 바로 이승만 정부였다. 한국전쟁으로 인한 경제적 타격은 극심했다. 1950년에 대한민국 국민총생산(GNP)15.1%나 감소했고, 1951년에는 6.1%나 감소했다. 물론 1952년과 1953년부터 차츰 회복세를 보여 성장률 25.7%를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른바 자유당 독재가 강화되던 1954년부터는 5.2% 감소 1955년에는 4% 그리고 1956년에는 0.3%가 감소했다.

 

인플레이션은 정말 놀라울 수준의 규모였다. 전쟁시기에는 물가상승률이 213.5%를 찍었는데, 전쟁이 휴전으로 끝난 이후에도 최소 4년 동안 평균 40% 밑으로 떨어진 적이 없었다. 1950년대 한국의 경제는 이른바 원조경제의 시기라고 부를 만큼 미국의 원조에 의존하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 재정에서 미국 및 외국의 경제원조가 차지하는 비중은 195430%, 195544.3%, 195752.9%, 195851.5%에 달했을 정도다. 쉽게 말해 미국 없이는 나라 자체가 유지되는 것이 불가능한 너무나도 가난한 나라였다. 반면 3년간 미군의 무차별 폭격을 받았던 북한은 비록 중국과 소련 그리고 동유럽의 원조를 받았다고 하지만, 사실장 자체적으로 전후복구와 경제성장에 이룩했고, 자신들의 힘으로 1960년에는 세계 49위의 경제규모에 달하는 국가로 발전했다. 이는 당시 한국 사회와 너무나도 비교가 됐다. 즉 이승만 정부의 시장경제는 사회주의 북한 경제하고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열악했다.

 

미국의 원조액은 1958년부터 감소했는데, 이에 따라 대한민국 경제성장률도 하락했다. 19578.7%에서 19595.2%, 19602.3%로 떨어졌으며, 물가지수는 1958143%, 1959년에는 146.7%, 1960162.5%수준까지 상승했다. 실업률은 8.2%였다. 1인당 국민소득은 1956년에 80.5달러, 1957년에는 84.3달러, 1958년에는 85달러였다가 1959년에 84.3달러로 떨어졌다. 한국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승만 독재 정권은 폭정과 무능 그리고 부패만 일삼았다. 이승만과 친일파 민족반역자 세력들의 부정부패는 극에 달했고, 이러한 배경은 결국 1960년 한국의 4.19 혁명의 원인이기도 했다. 1961년 박정희가 5.16 쿠데타를 감행하여 집권하게 될 당시 한국의 경제 규모는 101위였던 반면, 북한은 49위였다.

(1950년대 판자촌의 모습)

 

이러한 사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이승만 정부의 무능한 자유주의 시장 경제는 모든 면에서 실패한 나라였다. 사실상 주한미군이 존재하지 않았다면 망해도 이상하지 않았을 법한 나라다. 당시 국민들은 미군들이 먹다남은 음식인 이른바 꿀꿀이 죽을 먹었고, 소위 보릿고개를 경험했다. 현재 우리가 먹는 부대찌개는 사실상 이 시대때 만들어진 대한민국 가난의 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있는 음식이다. 당시 한국의 거리에는 굶은 아이들과 노숙자가 넘쳐났고, 잘먹고 잘사는 이들은 대다수 미국과 이승만 정부에 빌붙어 먹던 이들과 친일파들이었다. 이승만의 2인자인 이기붕 일가가 집단자살(혹은 타살)로 생을 마감하자, 민중들은 그들이 살던 집에 쳐들어갔고, 분노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그 귀하던 설탕이 집안 곳곳에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이승만 시대의 경제는 말 그대로 처참한 수준이었다.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부나 필리핀의 마르코스 정부 수준이었으며, 잘해봐야 1973년 신자유주의를 극대화 시킨 피노체트 정부 보다도 훨씬 더 못한 수준이었다고 봐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한국 사회가 경제 성장의 동력을 받은건 사실상 불법적인 쿠데타를 통해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이른바 자본주의식 국가주도 경제성장 정책을 하게 되면서였다. 따라서 현재 뉴라이트들이 침마르게 칭찬하는 이승만식 자유주의 경제는 최빈국 수준의 것이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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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권이 한참이던 2015년 국내에 있는 오월의 봄 출판사에서는 좌파계열 미국 역사학자인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책 <한국의 민중봉기>를 번역했다. 조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894년 동학농민전쟁부터 이명박 정부 초기까지의 한국 근현대사의 민중봉기를 재조명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연구로 저명한 역사학자인 브루스 커밍스의 자료와 분석을 적절히 비판 및 분석하면서 이를 받아들인다. 책을 읽어본 이는 알겠지만,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1950625일에 일어난 한국전쟁을 민족해방전쟁(War of National Liberation)이라는 입장에서 바라본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한국전쟁을 북한과 김일성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인정하는 역사관은 단순히 조지 카치아피카스만의 관점은 아닐 것이다. <한국전쟁의 기원(Origin of the Korean War)>를 쓴 미국의 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 또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가지고 있음을 인정했으며, 이러한 관점은 이후 박명림 교수를 중심으로한 학자들에 의해 공격받기도 했지만, 커밍스는 한국전쟁의 민족해방전쟁적 성격을 부정한 적이 없다. 나 또한 과거 커밍스가 쓴 저서를 읽으면서, “한국전쟁이라는 한 사건이 민족해방전쟁이라는 선상에서 해석될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됐지만, 최근에 보게 된 조지 카치아피카스의 저서 <한국의 민중봉기>는 커밍스보다 훨씬 더 과감한 관점에서 한국전쟁을 바라본다. 아니 오히려 브루스 커밍스 교수의 관점을 좌파적 입장에서 여러 근거를 밝혀가며 비판한다.

 

<한국의 민중봉기> 저자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1968년 당시 이른바 68혁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적으로 조직했다가 미국 FBI에게 블랙리스트에 오르기도 했던 인물이다. 또한 1980년 전두환 군사독재 정권이 저지른 광주학살의 진실을 밝히기 위한 여러 사회운동과 역사학적인 연구를 한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한때 전남대학교에서 교수직을 보내기도 했었다. 브루스 커밍스가 미국의 제국주의적 정책에 비판적인 자유주의적 성향의 훌륭한 학자라면, 조지 카치아피카스는 신좌파적 성향을 가진 좌파 학자라고 할 수 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누가 먼저 일으켰는가에 대한 질문이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는 한국전쟁이 625일에 일어나고 난 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의 첫 라디오 연설은 바로 한국과 미국이 포기한 지역에서 즉각 인민위원회를 재건할 것을 호소하는 것이었다고 주장한다. 이에 따라 627일부터 민중들은 연백에서 15인 인민위원회를 세웠고, 한달 안에 수백 개 마을에서 비슷한 선거가 이루어졌으며, 선출된 대의원들은 읍·, ·, 도 단위 정부 당국의 대표자들을 뽑았다고 한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일본에 주둔한 미군 항공병력의 출격이 없었다면, 조선 인민군이 해방자들을 환영하는 대중적지지 속에서 전체를 장악했을 것이라고, 책에서 주장한다. 한국전쟁 초기 미군의 공군 개입이 즉각적이었다는 것을 생각해보자면, 이러한 카치아피카스 교수의 생각은 틀리다고만 할 수 없을 것이다. 거기다 초기에 개입한 미군 공군 병력은 북한의 원산과 평양 등에 전략폭격을 감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인민군은 915일 인천상륙작전이 있기 전까지 남한 땅 90%를 접수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남한의 보수 논객들은 대부분 전쟁이 공산주의의 침략으로 일어났다고 묘사하지만, “어떻게 한국인들이 그들 자신을 침략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고 강력히 주장한다. 한국전쟁이 1950625일에 일어났다는 주장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그 날 누가 누구를 공격했는지에 대해서는 상당한 의문이 남는다고 한다. 우선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은 항상 한반도 전체의 통제를 약속했고, 그 밑의 장군들은 계속해서 38선 너머로 북한군에 대한 습격을 명령했다. 1949년 한 해에만 북한군 병사 수백 명이 살해된 2,617건의 공격이 있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이미 전쟁이 1950625일 이전에 시작되었다고 본다. 이러한 관점은 커밍스가 가진 관점과 유사한 점이 있다. 1945년 한반도가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 미군정 하에서 5년간 무려 10만 명 이상의 민간인이 이른바 작은전쟁을 통해 학살당했다. 심지어 홀거 하이데라는 인물은 이것보다 두 배 이상의 수치인 20만 명이 미군정 하에서 학살당한 것으로 해석했다.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 초기 미군이 육해공에서 체계적으로 민간인을 공격한 것과는 달리, 북한군 병사들은 대부분 규율이 잡혀 있었고 잔인한 공격을 자제했다고 한다. 커밍스의 주장대로 조선인민군 장교의 80% 이상이 중국에서 활동했고, 10만 명 이상의 병사들이 전투 경험을 했다고 추정했다. 거기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시작된 국공내전에서 10만 이상의 조선인 병사들이 중국 혁명에 동참한 이후 북한에 파견되어 조선인민군이 되었음을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강조한다. 더 나아가 카치아피카스 교수는 한국전쟁을 내전으로 한정하는 커밍스 교수의 주장에 반대한다. 마지막으로 그의 주장을 길게 인용하겠다.

 

전쟁의 기원에 집착하는 것만으로는 전쟁을 제대로 평가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김동춘이 그의 주목할만한 저작에서 지적하듯이, “근본적인 패러다임 전환을 실행하기 위해서 전통적 학파와 수정주의 학파 모두가 여전히 갇혀 있는 전쟁의 시작에 대한 집착을 깨뜨려야 할 때가 됐다.” 그의 견해로는 전쟁의 종식이후 반세기 이상 동북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 영향을 끝낼 방법을 찾기 위해 전쟁의 성격을 평가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미국은 그 이후로 오랫동안 베트남이나 북한의 동맹인 중국과 평화를 유지했지만, 평양과는 전쟁 상태를 유지하고 있다. 이 계속되는 전쟁의 뿌리를 밝히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질문은 전쟁의 성격과 관련된 것이다. 이 전쟁은 내전인가, 아니면 제국주의 개입에 맞선 민족해방 전쟁인가?

 

만약 내전이라면, 리와 그랜트, 스톤월 잭슨과 윌리엄 테쿰세 셔먼(각각 미국 남북전쟁 때 남군과 북군의 장군)에 해당되는 인물은 누구인가? 남한이나 미국의 역사, 영화, 공공 기념물에서 답을 찾더라도 우리는 불가피하게 한국이 아니라 미국 장군들, 맥아더, 리지웨이, 월튼 해리스 워커(그의 이름을 딴 쉐라톤 워커힐 호텔과 카지노가 서울에 남아 있다) 등과 마주치게 된다. 한국의 내전에서 미국 장군들이 두각을 드러내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이승만이 1950년 대전협정을 통해 한국군에 대한 완전한 작전통제권을 미국에 넘겨줬기 때문이다.(오늘날까지 참모본부가 유지되고 있다.) 그런데도 과연 독립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승만이 전쟁에 도움이 되도록 맥아더를 한국에 데려온 것이 아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을 개인용 미군기에 태워 한국으로 데려왔다. ‘북한의 기습 공격이후 3개월도 안 돼 맥아더는 디데이 노르망디 침략군보다 더 많은 함대를 모아서 915일 인천에 상륙했다. 그리고 그는 북한 군대가 여전히 남한에서 토지개혁을 시행하느라 바쁜 와중에 서울을 손쉽게 재탈환했다. 그런 다음 이승만을 두 번째 서울로 데려와 그에게 통치권을 줬고 이승만은 기뻐 눈물을 흘렸다.

 

저명한 미국 학자들은 한국전쟁을 그리스의 펠로포네소스 전쟁에 비유하는데, 남북한을 이해하기 위해 자치 도시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를 끌어들여 비유한 것이다. 만약 고대 그리스 역사에서 전례를 찾으려면, 크기만 고려해보더라도 미국을 페르시아에 비교하는 것이 더 현실적인 것 같다. 지금처럼 그 당시에도 제국적 외세의 이해는 일부 토착 투사들을 침략자 편으로 끌어당겼다. 크세르크세스가 침략한 동안 일부 그리스인들은 페르시아 편에서 싸웠다(한 세대 후에 알렉산더가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켰을 때 그랬던 것처럼). 만약 내전으로 성격을 규정하는 논리를 따른다고 할 때,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했다면 현존 역사는 테르모필레를 장악한 군사주의적 스파르타인들에게 맞서 궐기할 평화 애호적 그리스인들을 페르시아가 지원한 것으로 규정할 것이다. 아니면 만약 영국인들이 1789(미국 헌법이 승인된 해) 이후 미국의 절반을 통제했다고 가정해보자. 오늘날 역사가들은 최초의 미국 내전177674(미국의 첫 독립기념일)에 시작됐다고 언급하지 않겠는가?

 

조선을 휩쓴 재앙을 내전으로 이해할 것인가, 아니면 민족 독립전쟁으로 이해할 것인가의 문제 역시, 반세기 넘게 미국이 왜 북한에 대한 경제적 금수조치를 지속했는가를 조사하면 답할 수 있다. 만약 그 충돌이 정말로 내전이었다면 미국은 이미 오래전에 개입을 중단했어야 한다. 그렇다면 수십 년간 미국의 북한 포위와 고립, 반세기 이상 한국에 남아 있는 수만 명의 미군 부대, 한국군에 대한 미국의 지속적인 작전 통제를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1953년 정전 이후 몇 년 동안 EC-121 첩보기를 포함한 최소한 10대의 미군기가 북한 측에 의해 격추되었다. 1976년에서 1993년까지 지속된 미국의 팀스피리트 작전(대개 1년에 1회씩 실시한 한국과 미국의 합동 군사훈련)은 침략과 핵전쟁의 위협을 가했다. 북한에 따르면 수십 년간 날마다 핵무기를 투하할 수 있는 미군 폭격기가 38도선에 접근했다가 마지막 순간에 선회했고, 따라서 미국의 핵 공격 가능성을 매일의 현실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1968년 미국 군함 푸에블로호의 억류 이후 미국 협상가들은 북한 영해 침법에 대해 사과했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서면으로 약속했지만, 북한은 그 이후에도 미 해군의 영해 침범 사례를 수백 건이나 보고했다. 1980년대와 1990년대 북한은 해마다 7,900건 이사의 도발 행위를 집계했고, 미국은 날마다 이루어진 북한에 대한 고도 감시 비행을 인정했다.”

 

출처: 한국의 민중봉기 p.204~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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