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일에서 개봉했던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를 보면베트남 전쟁 반전운동을 주도했던 아나키스트 루디 두치께가 한 괴한에 의해 총탄에 맞고 부상당하자이에 분노한 이들이 집회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집회는 시위대와 경찰이 충돌하는 상황까지 치달았고어느 한 독일의 반전인사는 불에 타고 있는 시위현장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를 한다.

 

드레스덴!

히로시마!

베트남!”

 

영화에서 한 반전인사가 외친 드레스덴과 히로시마 그리고 베트남은 폭격으로 인한 대량 인명피해를 나타내는 것이다2차 세계대전에 대해 조금 공부해본 이라면, 1945년 2월 13일에서 15일에 있던 드레스덴 폭격을 들어봤을 것이다. 2일간의 공습으로 적잖은 인명피해가 발생했는데일단 나치독일의 선전장관 괴벨스에 따르면 20만 명이 죽었다고 알려졌다이후 연합군 측의 조사에서는 20만 명이 아닌 3만 명 정도가 죽었다고 나오지만미국의 반전 역사학자 하워드 진은 종합적으로 10만 명이 죽었다고 여러 저서에서 주장했다글쓴이의 개인적인 생각을 말하자면, 20만 명은 조금 부풀려졌을 수도 있고, 3만 명은 너무 축소되었을 것이라 생각한다따라서 종합적으로 6만 명에서 10만 명 정도가 직접적인 죽음과 부상으로 인한 죽음을 포함하여 희생되었을 것이라 본다.

(B-17 폭격기)

 

드레스덴 공습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영미 연합군에 의한 공습 희생자가 결코 적지 않았다는 사실이다물론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책임은 당연히 전쟁을 시작하고 유대인 대학살을 저지른 나치 독일에게 있다나치 독일은 유럽 전역에서 인종청소와 대량의 민간인 학살을 무수히 많이 자행했고이러한 나치의 만행은 아우슈비츠 수용소나 트레블링카 그리고 아인자츠 그루펜의 전쟁범죄 등을 통해 입증이 된다2차 세계대전은 자본주의 진영과 사회주의 진영이 파시즘에 맞선 전쟁이었지만그 과정에서 연합군에 의한 전쟁 피해도 분명히 있었다는 것 또한 사실이다따라서 이 글에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 공습에 의한 독일 본토의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은 1939년 폴란드 침공과 서유럽 침략 과정에서 공습을 단행했다. 1940년 프랑스를 점령한 이후에는 영국을 침략하기 위해대대적인 공습에 나섰고, 1940년부터 1941년까지 런던을 포함한 영국의 도시와 군사시설을 공습했다본토 항공전에서 독일군 공습으로 인해서 대략 5만 명 이상의 영국 시민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41년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하게 되면서대다수의 독일군 병력과 물자는 동부전선으로 향했고비록 영국에 대한 독일의 공습은 1944년까지 있었지만, 1942년부터는 연합군이 서부전선에서 완벽히 제공권을 장악하고 있었다사실 본토 항공전에서 영국 공군의 활약으로 독일은 승리하지 못한 상황이었고바로 그렇기 때문에 1941년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참전하자 영국과 미국은 제공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이다.

(공습을 하고 있는 B-17 폭격기 편대)


(영국군의 랭커스터 폭격기)


1942년 3월 영국 공군은 파리 르노의 공장공습에 성공한 데 고무받아 3월 28일부터 29일까지 발트 해의 유서 깊은 한자 동맹 도시 뤼백에 공습을 가했다그리고 4월에는 발트 해의 또 다른 중세도시인 로스톡에 나흘 밤 연속으로 소이탄을 쏟아 붓는 공습에 다시 성공했으며, 5월에는 폭격기 1,000대를 동원하여 쾰른을 공습했다. 6월에는 에센과 브레멘에 공습을 가했으며, 1942년 8월에는 영국에 도착한 미 육군 제8항공군이 루앙에 있는 조차장을 공습해서 첫 공습임무를 수행했다.

(1943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독일의 함부르크)

 

미공군과 영국공군은 주간과 야간에 독일 본토에 대한 폭격을 실행했다특히나 미군은 B-17 폭격기를 유럽전선에 많이 투입했으며그로 인한 군사적 효과는 극대화됐다. 1948년 8월 17일 미공군(8항공군)은 독일 한복판에 있는 슈바인푸르트를 폭격했다. B-17 229대 가운데 36대가 격추되어 소모율이 16%였을 정도로 공군의 피해가 컸다주간공습이었던 것과 독일의 촘촘한 대공망이 이러한 피해의 원인이었을지도 모른다. 1943년 7월 영국과 미국은 독일의 항구 도시 함부르크를 폭격했다주간에는 미군이 야간에는 영국군이 몇일간 함부르크를 공습했고그 결과 3만 명에서 5만 명에 달하는 함부르크 시민들이 사망했다시의 몇몇 구에서는 주민의 치명적 사상자 수가 30%를 넘어섰고여성사망자가 남성 사망자보다 40% 더 많았다.

(1945년 공습으로 폐허가 된 드레스덴)

 

전쟁 기간을 통틀어 계산이 이루어지자함부르크의 폭격 희생자가 1939년과 1945년 사이에 함부르크 시에서 징집된 군인의 전사자 비율보다 겨우 13% 낮았다그리고 그 폭격 희생자의 과반수는 1943년 7월의 대공습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이었다이후 미군과 영국국은 뷔르츠부르크에서 7,000다름슈타트에서 6,000하일브론에서 7,000부퍼탈에서 7,000베저에서 9,000마그데부르크에서 12,000명의 민간인을 공습을 가해 사망하게 만들었다나치 독일의 수도 베를린도 1943년부터 미군과 영국군의 공습을 받았다베를린에 대한 공습은 1943년 8월부터 1945년까지 이루어졌던 것으로 확인된다공습 초기 베를린에 대한 공습으로 인해 목숨을 잃은 독일 민간인은 대략 6,000명 정도로 알려졌으며, 1944년 3월 말까지 150만 명이 집을 잃었고도시 2,000에이커가 폐허가 되었다.

 

이후 연합군이 실행한 전략폭격은 독일 민간인의 피해를 더욱 극대화했다전쟁이 끝나는 시점까지 루르 지방의 여러 소도시에서 8만 7,000함부르크에서는 적어도 5만 명베를린에서 5만 명쾰른에서 2만 명상대적으로 작은 도시인 마그데부르크에서 1만 5,000뷔르츠부르크에서 4,000명이 목숨을 잃었다영미 연합군의 공습으로 죽은 독일 민간인은 총 60만 명이고부상자는 80만 명 이상인 것으로 추정된다많게는 100만 명이 사망했다고 보는 학자들도 제법 있다이러한 연합군의 공습으로 민간인 피해가 많았던 것도 사실이지만투입된 연합군의 항공기 손실도 결코 적지 않았다. 1944년 한 해에 미 제8항공군이 잃은 폭격기 숫자만 최소 2,400대이며이런 저런 항공기 손실을 합치면대략 수만 대는 된다아무튼 이러한 공습이 민간인 피해를 늘린 것은 사실이며영국의 경우 과거 독일에게 당한 공습의 피해를 최소 10배 이상으로 복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참고자료

 

존 키건류한수(), 2차세계대전사청어람미디어,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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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5일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에는 대한민국 해병대 73주년 기념 게시물이 포스팅 됐다. 이 포스팅은 “73년 전 오늘! 초대사령관 신현준 중령을 비롯한 380명의 정예병력으로 진해 덕산비행장에서 대한민국 해병대가 창설되었습니다.”라고 쓰여 있으며, 해병대가 한국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고, 북한의 불법공격인 연평도 포격전에서 활약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현재 대한민국 해병대가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내세우는 인물은 신현준은 어떠한 인물일까? 오늘은 대한민국 자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이 누구인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대힌민국 해병대를 창설한 신현준이 정복 사진)

 

대한민국 해병대가 그리도 자랑스럽게 칭송하는 신현준은 일제시대 당시 창설된 간도특설대의 창설 요원이었다. 그는 193812월부터 194012월까지, 19434월부터 19448월까지 두 차례에 걸쳐 34개월간 간도특설대에 복무했다. 간도특설대란 무엇인가? 간도특설대는 1938915일 일본이 세운 만주국 치안부 산하 부대의 하나로 창설이 결정돼 그해 12월에 탄생한 부대로, 19393월에 정식으로 발족된 부대다. 만주군 산하의 특수부대로는 아사노 부대와 이소노 부대, 회교부대, 오로촌 부대 등이 있었는데, 간도특설대도 이 중 하나다.

(신현준의 행적을 추적한 오마이뉴스 동영상 스크린샷)

 

간도특설대의 창설 목적은 무엇이었는가? 그것은 바로 항일무장투쟁을 하는 집단을 토벌하기 위함이었다. 따라서 당시 만주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하는 독립군을 토벌하는 것이 간도특설대의 존재 목적이었던 것이다. 간도특설대는 193931기 지원병 훈련이 끝난 후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으며,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는 시점까지 이들은 항일무장세력들을 토벌했다. 당시 만주에는 김일성이 복무했던 동북항일연군 잔존 세력들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 휘하의 팔로군들이 많았다. 당연하게도 팔로군에는 수많은 조선인들이 있었고, 이들은 중일전쟁과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을 도와 활약한 독립군이었다.

(2022년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페이지가 올린 홍보물, 놀랍게도 대한민국 해병대는 친일 매국노를 자신들의 아버지라고 하며 자유민주주의를 수호했다는 어이없는 주장을 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같은 이들이 간도특설대에 복무하여 친일 매국행위를 하고 있을 당시, 조선과 만주에 있던 뜻있는 젊은이들은 중국 공산당 휘하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 신현준은 1915년 경북 김천에서 태어났다. 1928년 하얼빈 보통학교에 편입한 그는 1931년 만주사변이 일어나자 다음해인 19322월 하얼빈 난강에 주둔한 일본군 부대를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르고 입대했다. 17살 때 일본군에 자진입대한 것이다. 신현준은 자신의 회고록인 <노 해병의 회고록>에서 어릴 때부터 중국어를 배워서 자유롭게 말할 수 있었다면서 이를 무기로 일본군에 종군하면 어려운 집안 살림을 도울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라고 밝혔다.

 

“19322, 열일곱 살의 어린 나이였던 나는 학교 공부를 중단하고 일본군에 종군할 것을 결심했다. 당시 하얼빈시 남강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부대에 찾아가 구두시험을 치른 다음 그 자리에서 합격통지를 받았다.”

 

신현준이 복무했던 14사단은 북만주 지역을 전전하며 항일 세력과 전투를 벌였으며, 19341월까지 일본군에서 통역병으로 복무했다. 이후 신현준은 19353월까지 1년간 만주군 5관구 고문부에서 근무했으며, 1936년엔 펑톈 군관학교에 지원해 5기생으로 들어가 193712월 말 소위로 임관했다. 임관 이후 박격포 중대, 교도대 등에서 복무하다가 1938년 간도특설대 창설에 관여했다. 1945년 해방 이후 신현준은 박정희와 더불어 광복군에 잠시 편입되었다가 1946510일 미군 LST 함정을 타고 부산으로 귀국했다. 해방 이후 미군정은 창군 작업을 급속도로 진행했는데, 신현준은 이 과정에서 남조선해안경비대로 들어가 손원일 소령의 도움으로 해군 장교로 변신했고, 이후 해병대 창설 임무에 관여했다.

(미군과 백선엽, 신현준 또한 백선엽과 마찬가지로 미국이라는 존재 덕분에 대한민국 군에서 해병대 사령관까지 될 수 있었다.)

 

1948년 여순항쟁이 일어나자 신현준은 해군함정 4척을 이끌고 여수항 일대를 점령한 뒤 해상에서 작전을 전개해 저항세력을 진압했으며, 신현준은 여순사건을 계기로 상륙작전을 전담하는 부대가 필요하다면서 해병대 창설을 국군에 제안했다. 이에 따라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4955일 대통령령으로 해병대 창설을 정식 공포했으며, 신현준은 대한민국 해병대 초대 사령관으로 임명된 것이다. 신현준은 1949년 제주 4.3항쟁 시기 해병대 전 병력을 제주에 배치해 토벌 작전을 전개했으며, 한국전쟁 후 신현준은 해병대 사령관 자리를 간도특설대 출신 김석범에게 인계했다.

(신현준 추모제, 아직도 대한민국 사회는 그를 추모하는 이들이 꽤나 있는 듯 하다.)

 

이처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로 불리는 신현준은 일제시절 간도특설대에서 친일매국행위를 한 인물이며, 해방 이후에는 제주와 여순에서 미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가들의 투쟁을 빨갱이 소탕이라는 명목아래 진압했고, 한국전쟁 시기에는 독립운동가 이현상 사령관이 이끄는 빨치산을 토벌했다. 2022415일 대한민국 해병대는 이러한 인물을 자신들의 아버지라며 칭송한 셈이다. 참으로 비극적인 한반도 이남의 역사와 현실이다. 과거 적극적으로 친일을 하며 무수히 많은 독립군을 토벌한 이를 대한민국 해병대의 아버지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러한 현실을 통해, 한국전쟁의 제국주의적 모순성은 너무나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며, 신현준의 존재는 백선엽과 더불어 이를 입증한다.

 

참고자료

 

김효순, 간도특설대, 서해문집, 2014

 

김종훈, <'광복군'으로 신분 바꿔 박정희와 함께 돌아온 만주군 장교>, 오마이뉴스, 2020.04.06

http://www.ohmynews.com/NWS_Web/Series/series_premium_pg.aspx?CNTN_CD=A0002621448

 

대한민국 해병대, <페이스북 글>, 2022.04.15.

https://www.facebook.com/rokmc.mil/posts/pfbid02KYFe9tErArh42b2KFHkS2wHcMKd6roUyZmPgrqqZyQPxZw2rsPsdQkkC2aB5dd2p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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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돌프 히틀러 한길로로로 18
하랄트 슈테판 / 한길사 / 1997년 7월
평점 :
품절


히틀러와 나치즘

예전에 알라딘에서 산 <아돌프 히틀러>를 읽었다. 1990년대 한길사에서 인물 시리즈 중 하나로, 원서는 독일인이 쓴 책이며, 1983년에 나온 책이다. 히틀러는 전 세계적으로 비판받는 인물이다. 1939년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으로 수많은 인명피해와 재산피해가 발생했고, 홀로코스트라는 아주 끔찍한 인종학살까지 벌어졌다. 히틀러가 많은 이들에게 비판받는 이유는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책은 그 당시까지 이어져온 히틀러에 대한 연구 흐름을 간략하게 소개하며, 히틀러의 이데올로기와 정치선전 부분에 보다 많은 집중을 기울였다. 따라서 책은 히틀러가 극단적 민족주의에 빠진 이유를 찾기 위해, 히틀러의 초기 생애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즘 이데올로기의 형성 과정 및 나치와 히틀러의 활동에 보다 초점을 맞추었다.

히틀러를 다루는 책 치고 결코 두꺼운 분량의 책은 아니지만, 제법 학술적인 부분도 보인다. 그러나 히틀러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에 대해선 정말 수박 겉핥기식으로 넘어가는 수준이다. 인물 히틀러를 알기 위해선 그가 일으킨 제2차 세계대전과 홀로코스트에 대해 보다 깊이 다뤄야 하지만, 나치즘 이데올로기에 대한 비판적 고찰만 하다보니 가장 중요한 부분을 짧게 다룬 느낌이다. 1942년 반제회의에서 유대인 절멸정책이 결정되어 실행되었다는 구절이 책 분량에 비해 짧게 들어가 있다.

또한 책은 나치즘의 본질적인 문제를 놓치고 있다. 600만 명의 유대인을 조직적으로 학살한 히틀러의 편협한 이데올로기는 과연 어디로부터 비롯된 것일까? 나치즘의 영통팽창적 망상은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이들은 왜 인종 이데올로기적 사회를 추구한 것일까? 여기에 대해 내가 짧게 할 수 있는 명쾌한 대답은 바로 ˝서구 제국주의에서 비롯됐다.˝라는 대답이다.

나치즘의 우생학적 이데올로기와 인종차별 그리고 팽창정책 등은 엄밀히 말해서 19세기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과 같은 서구 제국주의 열강들이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나치즘 이데올로기에서 빠질 수 없는 반공주의 또한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이 필수적으로 가지고 있던 이데올로기다. 따라서 나치즘과 서구 제국주의는 이러한 점에서 공통점을 보인다.

그러나 책은 이런 본질적인 문제를 외면하고 있다. 서구적 시각과 소위 자유주의적 시각의 치명적인 한계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히틀러에 대해 알고 싶은 이들에게 제법 추천해줄만한 책이다. 존 톨랜드의 책은 글이 어렵지는 않지만, 일반인들이 읽기에 너무 두껍다는 단점이 존재한다. 따라서 두꺼운 책을 읽기 두려워하는 이들에게 추천할만 하다. 이 책은 제법 학술적이면서 분량도 적절한 편이고, 사진도 많이 들어가 있다.

히틀러에 대한 자료는 아주 많다. 조금 과장해서 표현하자면, 밤하늘의 별만큼 자료가 넘쳐난다. 신비한 티비 서프라이즈의 소재로 나치와 히틀러가 자주 사용되는 데에는 이러한 이유가 있다. 그러나 서구의 학계는 자신들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가 600만의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즘과의 공통성에는 항상 외면한다. 앞으로의 히틀러와 나치즘의 연구는 이것을 바탕으로 확산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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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프랑스 식민주의를 지지함으로써 영국의 낡은 동 수에즈 정책을 지지하는 자신의 지도자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명확하게 드러냈다.”

 

출처일본제국 패망사 p.1321

 

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과 미국은 유엔을 통해 팔레스타인(Palestine)을 아랍인과 유대인 거주 구역으로 분리하기로 결정했다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에게 탄압을 받았던 유대인들은 전쟁이 끝나자과거의 땅을 되찾겠다는 이유를 들어 팔레스타인 영토에 자신들의 나라인 이스라엘(Israel)을 세웠다팔레스타인에 대한 미국과 영국의 결정은 당연하게도 아랍 민중에겐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1948년 이스라엘이 탄생하자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대인 수는 급격히 증가했다. 1914연만해도 그 나라의 유대인 인구는 6만 명이었지만, 1948년에는 70만 명이 됐다당시 유대인들이 벌인 활동은 이른바 시오니즘(Zionism) 운동이었고당연히 영국과 미국은 이를 지지했다.

(가말 압델 나세르)

 

1948년 5월 15일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을 선포하자분노한 중동 국가들은 이스라엘에게 선전포고했다이집트시리아레바논이라크요르단 등이 이 전쟁에 참전했다당시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독립하지 얼마 되지 않은 상태였다물론 당시 이집트의 참전은 파루크 왕의 독단적인 결정이었으며파루크의 목적은 전쟁에서 승리한 후 자신의 정치적 최대 라이벌인 요르단 왕국의 압둘라가 팔레스타인을 점유하는 것을 막기 위함이었다1차 중동전쟁은 1949년 3월 이스라엘의 승리로 끝이 났다당시 제1차 중동전쟁에는 이집트의 장교로 참전한 이가 있었다그가 바로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나세르와 소련의 흐루쇼프 서기장)

 

1차 중동전쟁에서 이집트 왕정이 패배하자이들은 불신의 대상이 됐다따라서 이집트 내에서는 왕정을 타도해야 한다는 생각이 확산됐다전쟁에 참전했던 나세르는 자유장교단을 중심으로 이 왕정을 타도하기로 결심했고이들은 1952년 7월 23일 거사를 단행했다쿠데타를 감행한 이들은 이날 아비딘 궁전에서 왕을 체포하는 데 성공하고국가의 모든 주요기관을 장악하거나 접수했다이미 국민들 간에 기존 정치세력에 대한 실망과 증오가 팽배해 있었기 때문에 쿠데타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쉽게 성공할 수 있었다나세르는 1953년 6월 왕정제 자체를 폐지해버렸으며새로운 내각을 만들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는 영국으로부터 형식적인 독립을 얻었지만여전히 영국군은 자신들의 경제적으로 필요한 수에즈 운하를 독점하고 있었다결국 1954년 영국군 철수협상을 진행했고, 1956년 영국군 철수를 합의했다나세르는 1955년 최초로 비동맹 개념을 채택한 반둥(Bandung) 회담에서 아랍 세계를 이끄는 강력한 지도자로 부상했고유고슬라비아의 티토인도네시아의 수카르노와 더불어 제3세계 진영에 가담했다. 1956년 7월 나세르는 영국군 철수한달 후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고 거기서 생기는 수입으로 댐 공사를 하겠다고 선언했다수에즈 운하의 국유화는 즉각 시행되었다이집트 군대가 수에즈 운하를 장악했으며여기서 나온 수입으로 아스완 댐을 건설하고자 했다영국 프랑스는 나세르의 이집트에게 선전포고했다이렇게 되면서 제2차 중동전쟁 즉 수에즈 위기가 발발했다.

(수에즈 운하 지도)

 

이러자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에 대한 약속을 저버렸으며미국의 덜레스 장관은 나세르가 소련과 무기 거래를 했다는 이유를 들며영국 프랑스를 지원했다당시 나세르는 프랑스의 식민지이던 알제리에서 독립운동 세력인 민족해방전선을 지원했었다이 점에서 프랑스는 이집트를 응징하려고 했다영국과 프랑스는 자신들의 제국주의 우방인 이스라엘을 끌어들였다. 3국은 비밀 회담을 갖고 이집트를 침공하는 전반적 전쟁계획을 세웠으며,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계획대로 시나이 반도를 침공하여 5일 만에 가자 · 라파 · 알 아리쉬 등 주요 도시와 티란 섬을 점령했다.

(수에즈 위기 당시 전쟁을 표현한 사진)

 

10월 30일 영국과 프랑스는 시나리오대로 이집트와 이스라엘 양쪽에 선전포고를 하고 운하 양쪽 20마일 선으로 물러설 것을 요구했다이스라엘은 그 조건을 곧 받아들였지만이집트는 자국 땅 일부를 포기하라는 그 조건을 결코 수용할 리 없었다영국과 프랑스는 이집트 비행장들에 대한 공습을 가한 다음 11월 5일부터는 공수부대와 해상 수송부대가 상륙하고 운하를 향하여 진격했다그동안에 이스라엘군은 전 시나이 반도를 수중에 넣었다그러나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상대로 전쟁을 치르자국제여론은 이들에게 외교적 압력을 가했다이들은 결국 전황이 고착화되기 전에 휴전을 선언했으며영국과 프랑스는 철수했다이스라엘도 1957년 3월까지 철수했다.

(이집트인들에게 환영받는 나세르)

 

수에즈 위기 당시 미국은 서독을 통해 이스라엘에게 무기를 지원했던 반면소련은 이들에 맞서 이집트와 같은 아랍 국가에게 무기를 제공했다수에즈 위기에서 나세르의 이집트 군대는 군사적인 면에선 패배했지만정치와 외교적인 부분에선 승리를 거두었다이를 통해 나세르의 이집트는 19세기 영국 제국주의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만든 수에즈 운하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었다이로써 이집트는 식민지 지배의 잔재를 완전히 지워버릴 수 있었다나세르는 이집트에서 영웅으로 부상했고아랍 주권의 회복이라는 상징적 의미와 더불어 아랍인들에게 아랍 민족주의의 실현과 통일 아랍의 꿈을 심어주는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급부상하기에 이른다.

 

참고문헌

 

존 드상시김한경(), 인물로 읽는 세계사 30, 나세르대현출판사, 1999

 

손주영이집트 역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09

 

정토웅세계전쟁사 다이제스트 100가람기획,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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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가 포격했다

2. 다리가 폭격당하고, 지하로 도망쳤다

3. 우크라이나 병사 앞에서 우크라이나가 포격했다고 얘기하면 안된다

4. 러시아 지지한다고 하면 총맞는다

5. 러시아는 잘 해줬다고 한다

참고자료

https://m.youtube.com/watch?v=lg59FPbLENk&feature=youtu.b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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