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8년 독일에서 만든 영화 바더 마인호프(Baader Meinhof Complex)의 초반부를 보면서독의 학생들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전개하는 장면이 나온다서독의 젊은 학생들은 대규모 시위를 전개했고경찰은 이를 강경진압으로 대응한다그리고 이 과정에서 한 학생이 경찰이 쏜 총탄에 죽는 사건이 벌어졌다이 사건을 시작으로 독일에서는 급진적인 무장투쟁 조직인 바더 마인호프가 창설되기에 이른다당시 서독의 젊은 학생들이 반정부 시위를 한 이유는 바로 이란의 전제군주 팔레비 샤(Pahlavi Shah)가 서독을 방문을 했기 때문이다그렇다면 이란의 샤가 도데체 어떤 인물이기에서독의 좌파 대학생들은 그의 방문을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했던 것일까?

(영화 바더 마인호프에 나오는 1967년 이란 샤의 서독 방문 반대 집회)

 

독소전쟁이 한참이던 1941년 9월 영국과 소련은 레자 샤 팔레비 국왕이 기대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자이란을 침공해 강점한 뒤 레자 샤를 해외로 쫓아내고 당시 22살 밖에 안 된 아들 샤를 이란의 왕으로 앉혔다대다수의 중동 국가들이 그렇듯이이란은 원유가 풍부한 나라였다사실 미국은 1920년대부터 이란의 원유에 눈독을 들여왔고영향력을 확대했었다따라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과 미국 그리고 소련은 이란을 통해 이득을 얻고자 했다당시 사우디아라비아에 있던 미국 회사들이 이란의 원유에 눈을 들였다면소련의 스탈린은 이란 북부지역의 유전을 개발하고자 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과 영국은 이란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팽창을 두려워했다일단 이란의 국경은 소련으로부터 북쪽으로 160km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물론 스탈린은 이란에 영국 및 미국에 허용한 것과 비슷한 수준의 원유 관련 이권을 달라고 압력을 가하는 한편2차 세계대전 당시 들어간 군대를 이란에 주둔시켰다반공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였던 영국의 윈스턴 처칠은 소련과 대결하고 싶어 안달이 났다얼마 지나지 않아 처칠은 1946년 3월 미국 미주리주 풀턴에서 소위 철의장막(Iron Curtain)’ 발언을 하여소련을 자극했다이는 냉전을 알리는 신호탄이기도 했다.

 

당시 영국의 이란 석유회사 브리티시 퍼트롤리엄(British Petroleum)은 수익의 84%를 차지하며이란인들에게는 기껏 16%만을 돌려주었다놀랍게도 관련 세금도 이란이 아닌 영국에 납부했으며실제로 이 화사가 본국에 납부한 세금이 이란의 로열티로 가져간 액수의 2배가 넘었다즉 영국이 이란 원유로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대다수의 이란인들은 빈곤 속에서 허덕이고 있었다당시 유전 노동자들은 일당이 50센트도 안 되었으며다른 혜택이나 유급 휴가 같은 건 하나도 없었다.

(이란의 진보적 지도자 모하메드 모사데크)

 

이란인들의 분노가 폭발한 것은 1950년이었다이란에 진출한 미국 석유회사 아람코가 사우디 원유에서 얻는 수익의 50%를 주는 조건으로 사우디아라비아랑 계약을 맺으면서였다당시 미국은 이란이 중동 원유 생산량의 40%를 차지하기 때문에 긴장을 완화시키는 것이 긴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당시 이란의 총리였던 모하메드 모사데크(Mohammad Mossadegh)는 영국 이란 석유회사의 석유 독점권을 박탈하고자 했다그 외에도 진보적인 정책들을 통해 모사데크는 대다수의 이란 국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심지어 이란 주대 미국 대사는 본국에 모사데크는 이 나라 국민 95~98%의 지지를 받고 있다.”라고 보고를 올렸을 정도였다그가 식민지 지배자들에게 반기를 들었기 때문에 이란 민중은 이에 열광했던 것이다.

 

모사데크가 반기를 들자 역국은 이란에 대한 경제적 제재를 전개하기 시작했다영국은 이란의 원유 수출을 금지하고 이란으로 들어가는 물품을 막았다미국 용인하에 잉글랜드 은행(영국 중앙은행)은 이란에 대한 대출 및 거래를 중단했으며이란의 경제는 점차 어려워졌다. 1951년 10월 윈스턴 처칠과 보수당은 선거를 통해 다시 정권을 잡았다처칠은 이란에 대한 군사개입 압력을 높여갔고이에 대한 대응으로 모사데크는 영국 대사관을 폐쇄하고 직원들을 추방했다이런 과정에서 또 다른 나라가 이란 문제에 보다 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했다바로 미국이었다.

(미국 CIA가 주도한 이란 쿠데타 당시 샤를 지지하는 동원된 군중들)

 

미국의 존 포스터 덜레스는 CIA를 통해 모사데크를 제거할 방안을 논의했다모사데크는 사회의자가 아니었다다만 좌파 조직인 이란 대중당(Tudeh party)와 관계가 좋았다따라서 미국의 아이젠 하워 행정부는 모사데크를 극단주의자로 봤으며막후에서는 CIA가 비밀공작에 들어갔다. CIA는 이른바 에이잭스 작전(Operation Ajax)’을 실행했다놀랍게도 이 작전의 지휘자는 제국주의자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손자인 커밋 루스벨트였다영국 정보부 MI6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이란의 왕 샤도 이에 적극 협조했다미국의 이란 쿠데타 공작이 시작된 것을 안 모사데크는 샤가 쿠데타 음모에 협조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해외로 추방했다.

(이란의 왕 샤와 그의 일가족들)

 

미국 CIA의 공작은 치밀하고도 사악했다. CIA는 이란의 언론인종교인군경 간부국회의원들을 돈으로 매수한 뒤이들을 통해 CIA의 지시에 따라 반정부 여론을 조장했다심지어 CIA는 이슬람 전사들(Warriors of Islam)’의 폭력까지 돈을 주고 동원했다. CIA가 공작한 쿠데타 역사를 정리한 한 연구서에 따르면 이들은 극렬 테러리스트 깡패 집단이었다. 1953년 8울 루스벨트는 수도 테헤란에 폭도를 풀어 혼란 상태를 만들기 시작했으며우선적으로 모사데크가 공산주의자이며 유대계라는 소문을 퍼뜨렸다.

(1953년 이란 쿠데타 관련 포스터)

 

그가 동원한 깡패들은 대중당 당원인 척하면서 이슬람 종교 지도자들을 공격하고 이슬람 사원 한 곳을 파괴했다폭도들 중에는 아야톨라 루홀라 모사비 호메이니도 있었다나중에 이란의 최고 지도자가 되는 그 호메이니다. 8월 19일 이란의 테헤란은 무정부 상태가 극에 달했다루스벨트는 파즈롤라 자헤이 장군을 CIA가 마련한 은신처에서 빼냈으며자헤디는 당시 이탈리아에 가 있던 샤가 자신을 신임 총리로 임명했다고 선언했다총격전 끝에 쿠데타 음모 세력은 모사데크를 포함한 모사데크 지지자 수천 명을 체포했고일부는 처형했다결국 모사데크는 반역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고 투옥됐다이후 샤는 테헤란으로 돌아왔으며커밋 루스벨트와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가 앉아 있는 이 왕좌는 신과 나의 백성나의 군대 덕이오그리고 선생 덕이기도 합니다.”

 

이란의 지배자가 된 샤는 이후 25년간 이란을 통치했다샤의 통치에는 미국의 강력한 지원과 선거 조작이 있었으며, 1957년에는 비밀경찰인 사바크(SAVAK)의 반대파 탄압 책동이 있었다샤가 이란의 통치자가 되자미국은 이 부패한 동맹세력을 위해 돈을 풀었다미국 석유회사들은 이란 원유개발을 위한 컨소시엄 지분의 40%를 차지했다미국은 샤에게 금고도 열어줬다쿠데타 성공 2주 만에 미국은 샤에게 긴급원조 6,800만 달러를 제공했으며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1억 달러 이상을 지원했다이것이 바로 쿠데타를 통한 미국의 친미정부 건설 과정이었다결국 이 친미 정부는 1978년 극단적 이슬람 혁명으로 무너지기 전까지 유지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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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올리버 스톤과 피터 커즈닉의 저서 <아무도 말하지 않는 미국 현대사>의 내용을 바탕으로 쓴 글입니다.)

 

2003321241,500명의 미군과 3만 명의 영국군, 2,000명의 호주군과 200명의 폴란드군이 이라크 영토에 진입했다. 미군을 포함한 연합군은 단기간에 이라크의 정규 군대를 손쉽게 무너뜨렸으며, 개전 3주만인 49일에 이라크의 수도 바그다드를 장악하고 지도자 사담 후세인(Sadam Hussein)을 포로로 붙잡았다. 이것이 바로 이라크 전쟁(Iraq War)이다. 이라크 전쟁은 2003년 미국의 침공으로 일어난 전쟁이다. 그로부터 2년 전 미국은 21세기가 시작됨에 따라 9.11테러로 충격을 받았다. 9.11테러는 미국에게 새로운 전쟁인 테러와의 전쟁을 시작하게 만들었으며, 그 결과 미국은 2001년에는 아프가니스탄을 2003년에는 이라크를 침략했다.

(딕 체니)

 

9.11 테러를 주도한 인물은 알카에다의 오사마 빈라덴이었다. 오사마 빈라덴을 중심으로 핵심 인물 19명이 있었는데, 놀랍게도 이들 중 16명은 미국의 중동 동맹국인 사우디 아라비아 출신이었다. 놀랍게도 미국은 사우디 아라비아는 하나도 건드리지 않았으며,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에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일으켰다. 당시 미국이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를 침공하면서, 내세운 논리는 바로 중동 여성의 해방과 민주주주의 전파였다. 물론 이는 말 그대로 허구였다. 미국의 진짜 목적은 아프가니스탄에서의 패권 장악을 통한 중국 및 러시아 그리고 이란에 대한 군사적 견제였다. 이라크 침공의 목적은 말 그대로 석유를 장악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전문가들은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확인된 원유 매장량이 2,590억 배럴인 것을 확인했다. 그러나 미국의 적대국인 이라크의 원유 매장량은 1,120억 배럴로 전 세계 원유 매장량의 1/3 수준이었다. 심지어 이라크의 실질 매장량이 4,000역 배럴 이상이라는 주장도 있었을 정도다. 이라크 침공 이후, 이라크 전역을 장악한 미국이 우선적으로 하고자 했던 일이 있다. 그것은 바로 이라크 측 국영기업들을 해체해 석유 부문을 석유 관련 다국적기업들에게 넘겨주는 것이었다. 2004년 딕 체니가 소유주로 있던 핼리버튼은 12억 달러 규모의 이라크 남부 석유시설 재건 계약을 따냈고, 미국은 자신들이 세운 이라크 정부에게 지지부진한 석유화학 관련 법안을 통과시키라고 계속 압력을 가했다.

(딕 체니가 CEO로 있는 기업 핼리버튼)

 

핼리버튼은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쿠웨이트에서 이윤을 긁어모았다. 이라크에만 4만 명의 직원을 두고 있던 핼리버튼은 2008240억 달러 이상을 벌어들였다. 이렇게 만들어진 이윤 대다수는 의문스러운 수의계약을 통해서 나온 것이었다. 핼리버튼은 이라크 침공을 통해 미군 군납업체 순위 19위에서 1위로 등극했다. 미국 상원 의원 패트릭 레이히 상원이 당시 부통령이자 핼리버튼 회사 소유주인 딕 체니(Dick Cheney)에게 핼리버튼 회사의 부당한 폭리 추구에 이의를 제기하자, 딕 체니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좆 까 이 새끼야(Fuck yourself)!”


(딕 체니가 이라크 전쟁을 통해 번 돈)

 

핼리버튼과 자회사 KBR은 여러 차례 발주처에 비용을 부당하게 과다 청구했다. 이들이 이라크 전쟁이라는 혼란을 통해 막대한 자본과 부를 축적하고 있는 동안, 이라크의 상황은 악화됐다. 후세인 정권 몰락 이후 인민들의 삶은 더 나락으로 떨어졌고, 더 극단적인 이슬람주의자들의 폭탄 테러가 빈번히 발생했다. 그뿐만 아니라, 시아파와 수니파 간의 종교적 교리 갈등도 더 심각해졌으며, 베트남 전쟁에서 그랬듯이 이라크에 배치된 미군들은 전쟁의 수렁에 빠져 전사자가 급증했다. 이렇게 해서 2009년까지 최소 4,500명 이상의 미군이 전사하고 3만 명 이상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전쟁으로 인한 민간인의 피해는 급증하여, 이라크인 65만 명에서 100만 명이 사망했다. 이라크의 여성들은 미군에게 강간당했으며, 양민들은 미군의 직접적인 학살과 드론 공습 그리고 무차별 헬기 사격의 공포와 미국 자본주의 체제가 재생산한 빈곤에 고통받았다.

(영화 바이스)

 

따라서 미국의 부통령 딕 체니는 이렇게 끔찍하고 무책임한 이라크 전쟁을 일으켜 놓고서, 엄청난 돈을 벌었다. 남에게 총을 쏘고도 사과하지 않는 인성을 가진 딕 체니는 당연하게도 이라크 전쟁에 대해 단 한 번도 국민에게 사과한 적이 없다. 아니 오히려 더 뻔뻔하게 자신이 일으킨 명분 없는 전쟁을 옹호했다. 그리고 현재까지 아주 뻔뻔스럽게 잘먹고 잘살고 있다. 딕 체니는 자신의 자본가 동료인 럼스펠드와 콜린 파월을 따라 이승탈출하길 기원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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칭기즈칸이 세계를 제패하던 13세기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격퇴했던 나라가 동남아시아에 있다그 나라가 바로 베트남이다당시 베트남은 리 왕조의 뒤를 이어 쩐 왕조가 수립됐고그 왕조는 대략 200년간 장기 집권했다이 정권이 베트남에서 장기집권을 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베트남의 명장이자 영웅인 쩐흥다오(Trần Hưng Đạo) 왕의 존재 때문은 아닐까오늘은 베트남의 명장이자 쩐 왕조의 왕이었던 쩐흥다오가 어떻게 몽골의 제1차 침략을 막아냈는지 얘기해보고자 한다.

(현재 호치민시에 있는 쩐흥다오 동상, 몽고군의 침략을 3번이나 막아낸 그는 현재 베트남에서 이순신이나 을지문덕 혹은 강감찬 장군 정도의 위상을 가지고 있다.)

 

칭기즈칸 사후 폴란드와 오스트리아 지역까지 영토를 팽창했던 몽골 제국은 북중국을 정복한 후 서방으로 팽창하는데 주력했었다이 과정에서 쿠빌라이칸은 현재 중국의 운남 성의 대리국으로 진격하여 국경을 현재 베트남과 맞대게 되었다당시 쿠빌라이칸은 베트남에 사절을 보내남쪽에서 송을 공격할 수 있도록 길을 빌려 달라고 요청했으나쩐 왕조는 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오히려 사신을 투옥시키고 몽고군의 침략에 대비하여 육군과 수군에 대한 지휘를 쩐 리에우의 아들 쩐 꾸옥 뚜언(Trần Quốc Tuấn) 쩐흥다오에게 맡겨 국경지대의 방비를 강화했다.

 

사실 몽고군은 남하했을 시기베트남의 일부분을 점령했었다그 이유는 베트남의 군민을 대송전쟁에 동원하기 위해서였다당시 몽고군을 지휘했던 인물은 우량하타이였다우량하타이의 군대는 베트남 국경을 넘어 파죽지세로 밀고 내려왔다몽고군은 홍강과 로강을 따라 두 길로 나뉘어 남하했는데수도인 탕롱(현재 하노이서북쪽 약 50km 지점까지 접근했다. 1258년 1월 몽고군과 쩐흥다오가 이끄는 베트남 주력군은 홍강과 로강다강이 하나로 합쳐지는 비엣찌에서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쳤다.

(1차 침공 당시 몽고군의 진격도, 몽고군의 진격은 매서웠고 초기 베트남군 또한 후퇴에 후퇴를 거듭했다.)

 

초기 몽고군은 주저 없이 강을 건너 베트남군에게 큰 타격을 입혔고퇴각하는 베트남군을 따라 진격했다베트남군은 급히 병력을 수습해 탕록 북쪽 푸로(phù lỗ)에서 2차 방어선을 편성했다물론 이 방어선도 몽고군에게 허무하게 무너졌으며베트남군은 탕롱을 버리고 후퇴했다탕롱에 입성한 몽고군은 무자비한 살육과 약탈을 자행했다몽고군에게 패전을 거듭하자 태종의 동생 등 일부 인사들은 송나라로 피신하자고 주장하기도 했다그러나 쩐흥다오는 흔들리지 않았다.

(전쟁 시기 베트남군이 사용했던 전투 코끼리, 열대지방에 위치해 있는 베트남 또한 코끼리를 전투용으로 사용했다. 참고로 베트남 이웃나라인 라오스는 한때 코끼리 왕국으로 불렸었다.)

 

당시 쩐흥다오가 이끄는 몽고군은 후퇴하며 건물과 다리 그리고 도로를 파괴했고몽고군의 식량이 될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태웠다이는 1812년 조국전쟁 당시 나폴레옹의 침공에 맞서 러시아의 알렉산드르 1세가 사용했던 전술이나, 1941년 독소전쟁 초기 히틀러의 침공에 맞서 이오시프 스탈린의 소련군이 사용했던 전술과 유사하다쩐흥다오의 병력이 후퇴한 이후 몽고군들은 텅 빈 도시에서 식량을 구하지 못해 굶주림에 시달렸고낯선 풍토병으로 고전하기 시작했다결국 베트남을 침공한 몽고군의 사령관 우량하타이는 베트남에게 화의를 제의했지만 단번에 거절당했다.

(1258년 뀌화 전투 당시 게릴라전으로 기습 공격을 했던 베트남군과 우왕좌왕하는 몽고군, 1차 침공 당시 쩐흥다오가 사용한 게릴라 전술은 이후 레러이의 대명항쟁과 응우옌 후에의 대청항쟁 그리고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당시 베트민의 게릴라 전술과 베트남 전쟁 시기 베트콩의 게릴라 전술까지 이어진다.)

 

전열을 가다듬은 쩐흥다오의 베트남군은 반격을 시작했다퇴각했던 베트남군은 몰래 홍강을 넘어 탕롱 건너편에 있는 동보더우(Đông Bộ Đầu)의 몽고군 주둔지를 공격해 점령했다이는 개전 후 처음으로 베트남군이 거둔 승리였다이후 베트남군은 강을 건너 아군 진지에 검은 연기가 피어오르고 승리의 기쁨에 겨워 미친 듯이 강둑을 내달리는 베트남군 기병들을 탕롱 성벽 위에서 바라본 몽골 병사들은 충격을 받았다결국 우량하타이는 군대를 북쪽으로 돌려 철수했다철수하는 길드 순탄치 않았다몽고군은 탕롱에서 국경 사이 중간쯤 되는 옌바이 성 뀌화(Quy Hóa)에서 소수민족인 무엉족 군민의 기습공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1258년 뀌화 전투 재현 모형, 위에 있는 사진과 같다. 게릴라전을 통해 몽고군을 몰아냈던 베트남을 보면, 베트남이 20세기 당시 일본과 프랑스 그리고 미국과 중국의 침략을 무찌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퇴각하는 몽고군은 허겁지겁 이동하느라 주변을 약탈할 여유도 없이 지나가 베트남 북부에서는 몽고군이 진짜 불적(부처 같은 적)이었다라는 조롱 섞인 우스갯소리가 유행하기도 했다결국 몽고군은 베트남에서 철수했고베트남은 몽골에 사신을 보내 강화를 맺은 뒤 3년에 한 번씩 조공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이는 또 다른 침략을 막으려는 베트남측이 벌인 노력의 일환이었다.

 

1차 대몽항쟁의 승리는 베트남 측의 극심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베트남에게 여러 가지 소중한 자산을 안겨주었다. 1차 대몽항쟁에서의 승리를 통해 몽고군도 무적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으며최선을 다해 싸우면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얻었다몽고군의 가장 큰 무기인 공포심에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배웠고그들이 청야전술과 유격전에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서도 전술적인 지식을 갖추게 되었다무엇보다 아무리 강한 외적이 쳐들어오더라도 왕부터 백성까지 하나로 뭉쳐 막아내겠다는 강력한 투쟁 의지를 갖는 전기가 되었다.

 

참고문헌

 

유인선새로 쓴 베트남의 역사이산, 2002

 

오정환천년전쟁종문화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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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대 시절 약산 김원봉)


2015년에 개봉했던 영화 암살은 박근혜의 국정 교과서 사태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큰 인기를 얻었다. 관객 1,270만 명을 동원한 영화 암살에서는 배우 조승우가 연기한 카리스마 넘치는 독립운동가가 나온다. 그가 바로 의열단 단장인 약산 김원봉이다. 1898년에 태어나 1958년에 생을 마감한 약산 김원봉은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독립운동가다. 그는 1919년에 창설된 의열단의 단장이었으며, 민족혁명당 총서기였고, 조선의용군을 창설했으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국무위원 및 군무부장이었다. 그는 명실상부 독립운동가였고, 수많은 독립투쟁을 이끌었던 인물이다.

 

19191110일에 창설된 의열단은 약산 김원봉을 단장으로 하였고, 1920년대와 1930년대 일본 제국주의를 대상으로 한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영화 암살도 엄밀히 따지고 보자면, 김원봉의 의열투쟁을 모티브로 한 것이다. 많은 한국인들이 누군가를 암살하거나 어떤 기관을 파괴하는 독립운동을 생각한다면 백범 김구가 했던, 이봉창 의거나 윤봉길 의거를 생각할 것이다. 물론 김구의 노력으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국민당의 장제스로부터 독립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한국광복군 창설로 이어졌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러나 김구가 추진했던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는 의열투쟁 중 극히 일부일 뿐이다. 왜냐하면, 1920년대와 1930년대 약산 김원봉과 의열단이 했던 투쟁들은 김구가 한 것에 비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전 독립기념관장인 김삼웅이 쓴 약산 김원봉 평전에는 1920년대 당시 의열단 주요활동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19203~6월 곽재기, 이성우 등이 국내활동에 사용할 폭탄을 밀양으로 반입하려한 의거

 

19209월 밀양 폭탄 반입사건에 대한 응징으로 박재혁이 부산 경찰서장을 폭사시킨 의거

 

192011월 최수봉이 밀양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19월 김익상이 종로 경찰서를 폭파한 의거

 

19223월 김익상, 이종암, 오성륜이 상해 황포탄 부두에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를 저격한 의거.

 

19233월 김시현, 남정각, 유석현 등이 경기도 경찰부 황옥 경부를 동원해 무기와 폭탄을 국내로 반입하려 한 의거

 

19241월 관동 대지진 때 한인 학살에 대한 응징으로 구여순, 오세덕 등이 국내폭동을 시도한 의거

 

19253월 이인홍과 이기환이 북경에서 일제밀정 김달하를 처단한 의거

 

192511월 이종암, 배중세, 고인덕 등이 국외로부터 무기를 반입해 거사를 준비했던 경북 의열단 사건

 

192612월 나석주가 동양척식주식회사와 조선식산은행을 습격한 의거

 

출처: 약산 김원봉 평전 p.75

 

그 외에도 여러 활동들을 김원봉은 전개했다. 무엇보다 내가 김원봉이라는 인물을 좋아하는 이유는 바로 1930~1940년대 당시의 무장투쟁에 있다. 193810월 약산 김원봉은 조선 의용대를 창설했다. 조선의용대는 엄밀히 따지자면 전투부대가 아니었지만, 이들이 일차적으로 맡은 임무는 대적선전공작이었다. 이것은 일본군 병사들에게 반전과 염전의 정서를 주입하고 사기를 저하시켜 투항을 유도하는 작전이었으며, 일본군에 강제로 끌려온 조선청년들을 독립군 쪽으로 끌어오는 역할이었다.

 

이들은 주로 일본군 주둔지역 주민들에게 국제정세와 일본군의 만행에 대한 강연을 하고 창가를 가르쳐 반일분위기를 고취시키기도 했고, 일본어와 중국어로 된 소책자와 전단·삐라 등을 수십만 장씩 만들어 살포하고 일본군이 투항할 때 쓸 신변보호용 통행증을 만들어 배포하기도 했다. 물론 이들이 선전활동만 했던 것은 아니다. 이들 또한 중국군과 합동하여 일본군에 대한 기습 공격을 감행하기도 했다. 대표적으로 1940323일에는 매복전에서 일본군 탱크 2대와 차량 8대를 파괴하고 적군 30명 이상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었다. 즉 이러한 유격전을 통해 일본군에게 군사적인 타격을 가했었다.

 

조선의용대은 19416월 조선청년전위동맹쪽 조선의용대원 80여 명 정도가 북상하여 팔로군 지역인 화북으로 가게 되면서 사실상 해체되었다. 그 이후 조선의용군에 있던 대원들은 대대적으로 북상하게 되면서 19427월에는 조선독립동맹으로 창립됐다. 이 조선독립동맹은 창립선언에서 당파를 망라하여 항일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며, 중국 특히 중국공산당과 공동전선을 결성하여 항일전에 참가하고, 무장부대를 확충하며, 대중을 조직하고, 동방 피압박 민족해방운동 및 일본의 반전운동과 연계하겠다고 밝혔다. 이들이 모여 생긴 군대가 바로 조선의용군이다.

 

조선의용군은 주로 화북지역에 근거지를 둔 무장 선전 부대임과 동시에 전투 부대였다. 이들은 주로 태항산 일대에서 전투를 치렀다. 이들은 조선의용대에 있을 당시 194112월에는 호가장 전투와 형태 전투 그리고 19425월에는 편성 전투 등을 치렀다. 조선의용군은 화북 지방의 각지에 흩어져서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는데, 전지공작과 병사모집, 선전활동, 첩보활동 등이 있었다. 19436월에는 중국 팔로군과 함께 태항선 곳곳에서 이른바 일본군 반소탕전을 전개했다. 이와 동시에 조직의 규모도 확장해 나갔으며, 1945년 해방 시점에서 최소 1,000명 이상의 군대로 성장했다. 이들 중 대다수는 마오쩌둥 휘하에 있던 중국 공산당 측의 조선인 부대와 합류하여, 냉전 초기에 벌어진 제2차 국공내전에서 장제스의 국민당군에 맞서 활약을 펼쳤으며, 중국 통일 이후 북한으로 귀국하여 조선 인민군에 편입됐다.

 

김원봉을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이 있자, 일각에서는 그를 한국전쟁을 일으킨 주범이라고 한다. 즉 그가 1948년에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맡았고, 그것은 결국 한국전쟁을 일으킨 책임을 물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냥 반공주의 콤플렉스일 뿐이다. 단순히 북한에서 고위직을 맡았다는 이유로 독립운동가로써 재조명 받지 말아야 한다는 입장과 주장 그리고 사상은 지극히 편향적이고 친일중심적인 사고관이다. 그렇다면, 악질 친일경찰이자 고문왕이던 노덕술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가 되는 것은 말이 되는지 진지하게 생각해보았으면 한다.

 

지금까지는 반공주의 콤플렉스에 도취되어 노덕술이나 김창룡 그리고 하판락같은 악질 친일파들이 이 대한민국 사회에서 애국자로 대우받았다. 그러나 이제는 바뀌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김원봉에 대해서 그런 구차한 변명을 하는 것은 편향과 역사조작 그 자체일 뿐이다. 설사 그가 한국전쟁을 일으켰다고 하더라도, 그의 독립운동 업적이 폄하당하는 일은 있어서는 안될 일이다. 사실 따지고 보면,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사회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독립운동가는 김구나 이승만 일부를 빼면 거의 없다. 아무튼 독립운동사에서 그런 유치한 이데올로기 트집을 잡는 것은 반공주의자들의 특징일 것이다.

 

나는 약산 김원봉을 존경한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김원봉은 독립운동 시기 의열투쟁을 전개했고, 무엇보다 1930년대와 1940년대에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했다. 북한의 지도자 김일성이 만주와 소련에서 독립운동을 했다면, 김원봉은 중국 연안과 화북에서 했다. 조선의용군의 존재는 김원봉이 독립운동사에서 높게 평가받아야할 이유를 알려준다. 따라서 김원봉을 재조명하는 움직임은 좋은 것이며, 비록 우익적 색체에서 진행되는 것이라 하더라도 반대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앞으로 약산 김원봉의 업적은 독립운동사에서 더 높게 재조명 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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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당시 가족을 잃은 한 여성을 뒤에서 쳐다보는 미군)

 

2015년 당시 박근혜 정권 하에서 이른바 국정 교과서 사태를 주도했던 뉴라이트 세력들은 기존 역사교과서에 있는 한국 근현대사에 대한 내용을 전면적으로 수정하고자 했다이들의 주장을 요약하면 해방 후 미군정 하에서의 이승만의 정치투쟁은 건국투쟁이고소련 치하의 공산독재로부터 민주주의를 지켰으며이에 따라 민주주의적인 국가가 만들어졌다.”가 된다즉 한국 근현대사는 미군정 휘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건국했고북한은 시작부터 폭압적이고 억압적인 체제였다는 것이다이들은 소위 신의주 사건과 같은 예시를 들며소련군이 폭압적이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에는 크나큰 오류가 존재한다왜냐하면 그들이 찬양하는 미군정은 매우 폭압적이고 비민주적이었으며억압적인 사회 시스템을 유지했기 때문이다우리 사회는 미국하면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는 이상한 공식에 빠져 있다그러나 이는 미국이 다른 나라를 점령하고 경제를 독점하는 과정을 보면허구일 뿐이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미군정 또한 그러했다미군정은 한반도에 상륙하는 시점부터 환영하러 마중나온 시민에게 총격을 가해 몇 명의 사상자를 만들었다그리고 포고령을 발포하여자신들이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했다.

(1945년 9월 점령군으로 서울에 입성한 미군)

 

미군정의 통치는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저항을 불러오기도 했다이것은 미군정의 급진적인 자본주의 정책으로 야기된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었다즉 미군정의 불평등한 정책으로 일반 노동자 농민은 쌀을 구하기 힘든 구조가 되었으며땅과 자본을 소유한 지주와 자본가들의 이익만 증가하는 구조였던 것이다그것은 결국 노동자 농민의 대대적인 봉기 및 저항으로 이어졌으며역사학자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이에 대해 추수봉기(Harvest Uprising)’이라고 표현했다.

 

추수봉기는 1946년 9월 23일 부산의 철도 노동자 8,000명이 파업을 일으키며 시작됐다철도 노동자들의 파업으로 며칠 사이에 파업은 인쇄공전기기사전신 및 체신 노동자를 비롯한 각종 산업에 파급되어 총파업으로 이르게 되었고많은 학생들이 이 파업에 가담했다서울에서만 295개의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으며노동자 3만 명과 학생 1만 6,000명이 가담했다한반도 이남 지역을 통틀어총 25만 1,000명의 이 파업에 동참했다한마디로 미군정에 맞선 생존권 투쟁 및 자주권 투쟁이었던 것이다.

(대구 10.1 항쟁 과정에서 미군과 경찰에게 살해된 민간인의 시신)

 

파업한 노동자들의 요구는 대체로 개혁적인 것들이었다. “쌀 배급의 증가보다 높은 봉급실업자 및 귀국자들을 위한 주거와 식량공장에서의 작업 조건의 개선과 노동자의 결사의 자유 등과 같은 것들이었다또한 민주적인 노동법 제정과 정치범 석방 그리고 반동적 테러의 중지 등의 요구도 나왔었다당시 전평(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의장이던 허성택이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John Reed Hodge)에게 보낸 서신에도 앞에서 언급한 요구 조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9월 총파업은 10월 1일 대구 10.1 항쟁으로 이어졌다. 1946년 10월 1일 여성들과 어린이를 중심으로 하는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은 대구시청으로 몰려가 우리에게 쌀을 달라라고 요구하며 시위를 벌었고, 500명의 노동자들이 대구역 앞에서 동맹파업하면서 경찰과 충돌했다이것이 바로 대구 10.1 항쟁의 시작이었다대구에서 시위가 격해지자 미군정과 이승만의 지원을 받는 경찰과 우익 청년단들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대구로 출동했고항쟁이 일어난 다음날 오후 6시에는 계엄령이 선포됐다미군정은 이를 진압하기 위해 탱크 4대를 포함한 미군을 출동시켰고강경진압에 나섰다대구에서의 시위는 미군정과 우익세력들의 진압으로 마무리 됐지만미군정과 우익에 저항하는 이 시위는 경상도와 전라도 그리고 강원도까지 확산됐다.

(제주 4.3 사건 당시, 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이 학살한 제주도 양민 시신의 숫자를 보여주는 지도)

 

9월 총파업과 대구 10.1 항쟁을 통해 미군정에 대한 저항은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그러나 이에 대한 미군정의 대응은 바로 강경진압과 폭력동원이었다대구 10.1 항쟁과 같은 시위는 최소 3개월 동안 1,000명 이상이 사망했고, 3만 명 이상이 경찰에게 체포됐다북한 개성 지역에서만 3,000명이 체포되고서울은 용산 철도 차고에서만 불과 하루사이에 2,000명이 체포당했다또한 전라남도에서만 4천 명이 체포됐다진압 당시 미군정은 주로 국립경찰에 의존하여 농민봉기를 진압했지만필요의 정도에 따라선 서울측 경찰이나 미군 전술부대를 파견했다그리고 대구 10.1 항쟁에서는 미군 탱크가 출동했다.

 

1946년 10월 7일 경상남도 마산에서는 미군과 우익경찰이 군중 6,000명에게 실탄을 사격했다이 과정에서 15명 이상이 죽고 또 다른 수십 명이 부상당했으며, 150명이 체포됐다같은 날 경남 창원에서도 경찰의 발포로 시민 2명이 사망했다. 10월 11일 경남 진해 근처의 웅천에서는 미군과 경찰의 발포로 5명이 죽었다부산의 경우 10월 9일에만 양측의 충돌로 경찰과 군중 24명이 피살되었고미군정은 전술부대를 투입하여 군중을 진압했다그 외에도 전국적으로 비슷한 규모의 사상자가 총파업 및 반미군정 투쟁 과정에서 발생했다당연히 미군정의 강경진압으로 생긴 사망자들이었다.

(존 리드 하지와 이승만)

 

이처럼 미군정의 통치 방식은 매우 폭력적이었다미군정과 이승만 세력의 이런 폭력은 1948년 제주도에서 정점을 찍었다이들은 제주도에서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는 저항이 일어나자제주도 전역을 적대지역으로 선포하고이른바 빨갱이 사냥에 나섰다미군정이 동원한 군대와 경찰 그리고 서북청년단 대원들은 독소전쟁 시기 학살부대 아인자츠그루펜을 연상시키는 학살극을 벌였다학살은 1948년 중반부터 1949년 말까지 주로 발생했다총 30,000명에서 60,000명의 제주도민이 그렇게 학살당했다제주도민 10명 중 1명 혹은 6명 중 1명을 빨갱이로 몰아 학살한 것이다.

 

이승만을 건국 대통령으로 추켜세우며미군정 자체를 민주주의로 포장하려는 뉴라이트들을 보면 이들이 우리의 역사를 얼마나 왜곡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미군정은 일부 소수 기득권층을 위한 정권이었지파업을 전개하던 대다수 시민을 위한 정권이 절대로 아니었다미군정이 내세운 이승만도 그러하며이들은 끔찍한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따라서 미군정은 절대로 민주주의를 전파한 세력이 아닌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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