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는 장제스 총통이 비밀리에 푸른셔츠단이라는 엘리트 조직을 결성했다. 푸른셔츠단의 한 대원은 "처음에는 파시즘을 후진적으로 생각했다"면서 "그러다가 국가를 발전시키는 진보적인 수단으로 여겼다."고 말했다. 파시즘의 일차적인 목표는 국가 보전이었다. 푸른셔츠단의 기관지는 사설에서 "파시즘이란 파멸 직전의 국가를 구원하는 것"이라고 언급했다. "파시즘은 이탈리아와 독일을 구했다. 이탈리아와 독일 파시스트 정신을 모방해 폭력 투쟁의 길로 나서는 것 말고는 대안이 없다."

 

장제스 총통은 파시즘 도입에 열정적이었다. 그는 푸른셔츠단 대원들에게 "파시즘이 중국을 구원할 것인가"라고 물은 뒤 "그렇다. 파시즘이야말로 중국에 가장 필요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장제스는 서구인들을 공개적으로 거부하고 민주주의를 싫어했으며, 히틀러의 지도자 원리를 수용했다. "우리는 지난 수십 년간 민주주의와 사상의 자유를 옹호하느라 세월을 보냈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장제스는 히틀러의 집권 8개월 뒤 당 간부들에게 "파시즘의 핵심은 현명하고 능력 있는 지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라고 말했다. 국가는 지도자를 완전히 신뢰하지 않으면 재건될 수 없다. "그러므로 지도자는 자연히 혁명 정신을 갖춘 위대한 인물로서 모든 당원의 본보기로 일한다. 한편 개별 당원들은 지도자와 집단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해야 하는데 간접적으로는 사회와 국가, 혁명을 위한 일이다. 우리는 혁명집단에 참여한 순간부터 권리와 생명, 행복까지 집단에 위임하고 이들 모두를 지도자에 바쳤다. 그래야만 진정한 파시스트라 불릴 수 있다."

 

히틀러의 첫 임기 4년간의 치적은 생각이 같은 다른 사람들을 고무했다. 파시즘은 불평불만자나 권리를 빼앗긴 사람뿐 아니라 선의를 가진 책임자들을 파고들었다. 젊은이뿐 아니라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신선한 대안으로 받아들인 지식인 계층들도 끌어들였다. 국가마다 개성을 가진 파시즘이 발호했지만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의 추종자는 정신적인 단합만이 문제를 해결할 것이라고 여겼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믿었다.

 

출처: 아들프 히틀러 결정판 1 p.687~6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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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애하는 중국 유격대 동지들,

 

나는 당신들이 골짜기에 살포한 선전문을 읽고 당신들이 공산당 유격대임을 알았습니다. 당신들은 애국주의자인 동시에 국제주의자입니다. 나는 당신들과 만나서 공동의 원수를 치고 싶습니다.

 

그러나 나는 파시스트 야수들에게 포위되어 갈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자살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내가 여기까지 운반해온 10만 발의 탄알을 귀군에게 드립니다. 그것은 북쪽 소나무 숲 속에 있습니다. 바라건대 그 탄알로 파시스트 군대를 사격하십시오.

 

내 몸은 비록 죽지만 혁명정신만은 영원할 것입니다. 신성한 공산주의 위업을 하루빨리 성공하기를 원합니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관동군 간도 치중대 일본 공산당원 이다 스케오

 

1933330

(이다 스케오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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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여행이 자유롭던 COVID-19 이전 인천공항을 제외한 국내의 기타 지역 공항에는 동남아시아행 비행편들이 제법 있었다그 중에는 쿠알라룸푸르도 있었는데제법 한국 사람들이 많이 놀러가는 곳이라 제주도 국제선이나 김포공항 국제선에서도 비행편을 예약할 수 있을 정도였다한국에서 6시간 정도 걸리는 쿠알라룸프르는 바로 말레이시아의 수도다. COVID-19 이전에는 베트남캄보디아태국 등과 더불어 한국인 관광객들이 많이 놀러가는 동남아시아 국가였던 말레이시아는 20세기 저항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다만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이다오늘은 20세기 말레이시아의 현대사 그것도 좌파들의 투쟁사와 반동의 역사에 대해 얘기해보고자 한다.

(말라야 공산당의 지도자 첸핑, 게릴라 전에서 끝까지 살아남아 2013년 89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동인도회사(East Indian Company)를 내세워 인도를 식민지화 했던 소위 대영제국은 18세기 말 비슷한 방식으로 말레이시아를 식민지화 했다천연고무를 비롯하여 야자유·주석·원목·원유 등이 풍부한 말레이시아는 근 현대 시기 지배자 영국에 의해 착취당했다. 20세 당시 영국의 식민지배를 받던 말레이시아에서는 1917년 레닌의 러시아 혁명과 1921년 중국 공산당의 창당 등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1928년 말레이시아 안에서 남양공산당이 결성됐다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창당되던 1930년 영국 지배 하의 말레이시아에서도 남양공산당은 말라야공산당(MCP: Malayan Communist Party)으로 개칭했다.

 

1939년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1937년 중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1940년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하며 파시즘 대열에 완벽히 합류했다일본 제국주의자들은 더 나아가 1941년에 미 해군 기지가 있던 진주만을 기습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켰으며이에 따라 동남아시아 전체를 점령하려는 제국주의적 야심을 드러냈다. 1941년 12월 일본은 말레이 반도 북부지역에 병력을 상륙시켰다이 일본군대는 말레이시아 점령 절차를 이어나갔다. 1942년 2월 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일본 제25군 사령관인 야마시타 도모유키(Yamashita Tomoyuki로 아시아의 롬멜 혹은 말레이시아의 호랑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는 당시 영국군 사령관이었던 퍼시벌의 항복을 받고 말레이시아 점령을 궁극적으로 완료했다.

(말라야 반일 인민군의 깃발)

 

태평양 전쟁 시기 일본은 타국을 침략하면서 이른바 아시아를 해방시킨다는 대동아공영권을 내세웠지만이는 말 그대로 허상이었다일본 제국주의가 점령지역에서 불러온 것은 억압과 그 나라 국민을 대상으로 한 탄압이었으며학살과 전쟁범죄도 일어났다인도네시아나 버마베트남에서와 같이 말레이시아에서도 일부 민족주의 세력이 영국으로부터 지배를 벗아난다는 명분으로 일본을 해방자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했지만앞에서 언급한 사례처럼 일본은 이들을 궁극적으로 조직을 해체하거나 활동을 통제하려 했다결국 일본은 과거의 지배자 영국을 대체한 새로운 지배세력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말레이시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자말라야공산당은 일본 제국주의에 맞선 독립운동을 전개했다이들이 전개한 독립운동은 무장투쟁이었다비록 영국은 말레이시아를 지배한 지배자였으나반파시즘인민전선 논리에 따라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좋든 싫든 영국의 SOE와 협력관계를 구축하여반일투쟁에 나서기도 했다이들은 영국의 SOE 지도자들 휘하에서 정글에 산재하는 소수 게릴라 부대를 조직하는 것과 훈련하는 것을 돕도록 했으며특히 중국계 말레이시아인들이 이 독립투쟁에 많이 관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일제 패망 이후 도시로 입성한 말라야 인민 해방군)

 

이에 따라 이들에 대한 일본의 탄압도 가속화 됐는데, 1942년 8월 일본 헌병대가 싱가폴에 있는 당 최고 지도자들을 체포하여 처형했으며바투 지역에 있는 은신처를 습격하여 중앙위왼회와 게릴라 지도자들 중 상당수가 제거되기도 했다이런 큰 손실을 입었음에도 좌파 세력들은 저항을 멈추지 않았고당서기장인 레이텍(Lai Teck)과 그의 보좌인 첸핑(Chen Ping)의 지도를 받으며좌익 세력이 반일 독립운동은 지속됐다.

 

이 좌파세력들은 중국계 인사들이 중심이 된 조직이었고이들은 말라야 반일 인민군(MPAJA: Malayan Peoples' Anti-Japanese Army) 조직을 바탕으로 일본군에 맞선 무장투쟁을 벌였으며해를 거듭하면서 세력을 확장해 나갔다초기 일본군은 말레이시아에서 일어나는 좌익들의 투쟁력을 꺾기 위해 기존에 말레이시아에서 있던 민족 혹은 인종 갈등을 이용하여 최소 6,000명에서 많게는 4만 명에 달하는 중국인을 숙청하는 작업을 벌였었다그럼에도 불구하고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일본 통치 막바지 무렵 전국에 산재한 게릴라 부대를 동원해 며칠 안에 말레이시아를 통제할 수 있는 강력한 무장 세력으로 급성장했다일본이 패망하던 1945년 말레이시아에 있던 좌익 게릴라 조직은 7,000명 이상의 정규군대를 보유한 군대 조직으로 성장했고항일무장투쟁 기간 동안 최소 수백 명 이상의 일본군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린 것으로 알려졌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이 연합군에게 무조건 항복하면서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다소병국 교수의 저서 동남아시아사에 따르면일본이 항복한 시점부터 대략 3주 정도는 사실상 무정부 상태였다고 한다이 과정에서 말라야 반일 인민군은 밀림 지대에서 벗어나 말레이시아 전역을 장악하기에 나섰고일본 제국주의에 협력한 말레이인들을 대상으로 테러를 자행하기도 했었다항일 투쟁을 전개한 좌파 세력들 입장에서는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겠지만이것은 말레이시아가 가지고 있던 고유의 인종 갈등 그러니까 중국계와 말레이계의 민족적 혹은 인종적 갈등이 되었다고 소병국 교수는 책에서 주장했다.

(일제 패망 이후 수도 쿠알라룸푸르로 입성한 말라야 반일 인민군 부대)

 

그로부터 3주 뒤인 1945년 9월 다시 복귀한 영국은 말레이시아의 재식민지화 하기 위한 노력에 박차를 가했다. 1946년 영국 정부는 친영파 출신의 인사들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 인사들을 규합하여 말라야 연합을 출범시켰다가, 1948년에 가서 말아야 연방 체제를 도입했다영국의 주도로 만들어진 이 나라는 당연하게도 전쟁 전 영국 식민지배하에서 말레이인 사회가 누렸던 전통적인 특권을 고스란히 유지하는 방향이었고새로운 친영정부는 미소냉전 초기의 흐름과 더불어 반공주의적인 정책을 추진했다.

 

일본군 점령 시기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첸핑은 영국과 일부 민족주의 진영의 주도로 친영 꼭두각시 정부가 세워지자이에 대항했다따라서 말레이시아 좌파들은 과거 일본군에 맞서 싸웠듯이이번에는 영국군과 친영정부에 맞서 무장투쟁을 벌이게 됐다첸핑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지휘했던 소규모 게릴라 부대들을 다시 활성화시켰고이러한 무장투쟁은 냉전 초기이던 1947년에서 1948년 사이에 가속화 됐다말레이 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은 모스크바로부터 지령을 받기도 했으며필요에 따라선 테러와 암살은행강도 등의 전술도 사용한 것으로 알려졌다.

(말레이시아 비상사태(좌익 게릴라들의 무장 투쟁을 벌일)당시 민간인을 조사하고 있는 경찰과 영국군)


(말레이 정부군에게 포로로 붙잡힌 좌파 게릴라)

 

사실상 말레이시아를 지배했던 영국은 1948년부터 이 공산주의자들을 탄압하기 위한 조치를 취했고친영정부 또한 이러한 정책에 적극적으로 협력했다따라서 영국과 친영 말레이 정부은 민중들과 좌파들을 대상으로 검열과 대대적인 토벌에 나섰다영국의 지원을 받은 친영 정부는 경찰병력과 군병력을 증강했으며영국 정부군 또한 이 사태에 관여했다세계게릴라전사를 집필한 로버트 에스프레이는 책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이 지나치게 테러에만 의존해서 대중적인 지지를 크게 못 얻었다는 점과 대다수가 중국계로 구성되어 인종적으로 말레이인들과 갈등이 있었다는 점을 게릴라 투쟁이 결국 실패로 끝난 원인으로 분석했다이런 점에서 말레이 좌파 게릴라들은 대대적으로 베트남의 유일한 대중조직이었던 베트민이나 베트콩과는 큰 차이를 보인다그래도 말레이의 좌파 게릴라들은 수십만에서 많게는 100만 이상의 동조자를 획득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1953년 당시 게릴라를 소탕하기 위해 밀림을 수색하는 군인들)

 

말레이 게릴라의 무장투쟁은 1952년도가 되어서 힘을 잃기 시작했고영국 정부가 고안해낸 이른바 전략촌 계획에 실행됨에 따라 게릴라들의 세력은 약화되었다전략촌 계획은 농민과 게릴라를 분산시키는 전략이었고이 전략은 말레이시아에서 성공을 거두었다그만큼 영국과 말레이시아 친영정부가 크게 신경을 썼다는 얘기다좌파들의 게릴라 투쟁은 1952년에서 1954년에 이르는 2년 동안 게릴라들의 2/3가 소탕되었고 테러의 발생건수도 한 달에 500건에서 100건으로 희생자의 수도 300명에서 40명으로 감소했다물론 말레이 친영정부와 영국 정부도 게릴라들을 소탕한다는 명분으로 많은 잔혹행위를 벌였으며이에 따른 희생자들도 분명 적지 않았다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의 공격 단계는 1955년에 가서야 종결됐고, 1957년 말레이시아가 공식적인 독립국가가 된 시점에서도 계속되었지만산발적인 저항은 1960년까지 이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농촌 지역을 수색하고 있는 영국군)


(말레이시아 비상 사태에 관한 관련 서적)

 

이 전쟁에서 총 수천 명의 민간인이 죽고친영 정부군 1,300명과 영국군 500명이 전사했다그리고 공산당 휘하의 좌파 게릴라들은 조직원 6,700명 이상을 잃었다이 전쟁은 적잖은 사상자를 냈다.

 

말레이시아에서 영국이 추진했던 이른바 전략촌 계획은 이후 남베트남의 응오딘지엠 정권에서 디엠의 동생 응오딘누와 그들을 지원하는 로버트 맥나마라에 의해 추진됐다그러나 말레이시아의 상황과는 달리베트남 전쟁에서는 전혀 성공적이지도 못했고오히려 전략촌에 있던 농민들이 정부에 협력하기 보단 베트콩의 무장투쟁에 동조하는 역효과가 만들어졌다참고로 말레이시아에서 사용된 이 전략촌 계획은 그 이전에 미국이 개입한 그리스 내전과 이승만 단독정부 수립에 대항해서 발생한 제주4.3항쟁에서도 사용된 방식이었다.

 

참고문헌

 

동남아시아사소병국책과함께, 2020

 

세계게릴라전사 2,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세계게릴라전서 3, R.B 에스프레이편집부일윌서각,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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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적인 측면에서 19세기의 역사는 현재 미국이 죽을힘을 다해 끝까지 유지하고 또 세계적으로 지키려고 하고 있는 체제 자본주의(Capitalism)가 성장의 가동을 밟기 시작한 시점이다. 19세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대량의 공장생산 체제에 돌입하면서 과거하고는 비교가 안 될 생산력을 보일 수 있었다물론 이러한 이면에는 노동자 계급에게 비인간적인 노동을 강요하고 아동착취여성의 중노동과 그로인한 유아사망을 급증시키기는 어두운 면이 아주 극명하게 존재했었다이러한 현실을 알게 된 철학자 카를 마르크스(Karl Marx)는 산업혁명을 통해 탄생한 자본주의 체제를 아예 타도해버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생산력이 확장되자 자본주의 체제는 값싼 시장 확보와 궁극적으로 무절제한 이윤을 창출해내기 위해또 다른 것을 시도하는데 그것이 바로 식민지 확장이었다자본주의와 제국주의는 일란성 쌍둥이로써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현재까지도 자본주의를 유지하고 있는 미국이 신제국주의라는 형태로서2차 세계대전 이후 무수히 많은 나라들을 침략했고반인륜적인 전쟁범죄와 학살극을 벌였고 벌이고 있는 것처럼제국주의적 야욕을 유지하게 만드는 자본주의는 19세기 서구 제국주의 열강에게 그러한 욕심을 추구하게 만들었다.


1991년 미소냉전이 소비에트 연방 해체로 종결이 되면서 한국 운동권들은 대단히 충격에 휩싸였다이런 과정속에서 사회주의에서 극단적 극우주의로 사상을 전향하는 사례가 있었는데현재 반일 종족주의와 더불어 일본군 위안부 할머니들에 대한 망언을 일삼고 있는 이영훈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이영훈은 2000년 저서 하나를 출간했는데바로 한국 시장 경제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특질이라는 책이다이영훈은 그 책에서 이른바 ‘19세기 위기론이라는 것을 주장했는데주장을 짧게 요약하자면 “19세기 위기론은 내부적 동력에 의한 근대 이행의 가능성이 전혀 없었고외세의 작용이 없었더라도 조선왕조는 자멸해 나가는 위기 상황에 봉착해 있었다.”라고 설명했다.


이영훈에 따르면 19세기 위기론에 따라서 우리 역사는 필연적으로 일제 식민지 지배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는 논리로 귀결된다즉 19세기 조선이 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아 자본주의로 성장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이런 식으로 일본의 식민지배를 합리화하고 미화하기 위한 수단 내지는 목적으로 이용된 논리가 바로 19세기 위기론이다이영훈 교수는 19세기 위기론을 합리화하기 위해 드는 근거가 있다그것은 바로 19세기 논농사 생산성의 감소산림 황폐화가뭄과 흉년을 포함한 잦은 자연재해 그리고 18세기부터 따른 인구감소 등이 있다.


그러나 여기에는 가장 큰 치명적인 실수가 있다이러한 일련의 논리적 구조가 결과적으로 일본 제국주의와 그리고 제국주의의 일란성 쌍둥이인 자본주의에 대한 맹신적인 옹호로 간다는 점이다이영훈이 제시한 구체적인 자료와 통계 그리고 근거 등은 차명수 교수가 반박 연구를 발표하면서 그 진실이 드러났다심지어 같은 자본주의적 시각에서 말이다우선 이영훈 18~19세기 조선의 조선왕조의 쇠퇴와 혼란했던 시기로 인해 인구 파악 능력이 약화되었을 것을 간과했다또한 18~19세기 조선의 인구가 연평균 0.62%의 속도로 증가하고, 19세기에 0.83%로 증가했던 사실도 무시했다생산성 하락의 문제도 총 생산량이 아닌 두락당 지대 수취량을 취사선택 한 것이었다즉 이영훈 교수의 연구는 이러한 일련의 문제점이 드러난 것이다.


여기서 식민사학에 대한 대응으로서 나온 자본주의 맹아론이 옳은가?”라는 질문을 할 수 있다나의 대답은 물론 아니다자본주의 맹아론은 이른바 식민사학에 대한 반대급부의 이론 그 자체로는 의미가 있을지언정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영훈 교수가 맹신하는 그 자본주의의 논리로써조선 사회를 해석하고자본주의 그 자체를 옹호하는 논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그리고 여기에는 조선이 서구에 비해 후진적이었음을 인정하는 함정즉 서구중심적이고 근대중심적인 한계도 존재한다.


다시 이영훈의 ‘19세기 위기론으로 주제를 돌리겠다무엇보다 이영훈 교수의 ‘19세기 위기론의 문제점은 바로 그가 천박한 자본주의 논리와 제국주의 논리를 합리화 한다는 사실에 있다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이영훈이 맹신적으로 추종하는 이런 자본주의와 식민주의는 결과적으로 19세기 유럽의 제국주의적 논리와 그 궤를 같이 하고 있다이러한 관점들은 결국 19세기 서구 제국주의가 타국을 식민지배하기 위해 내세웠던 논리 구조를 그대로 따르고 있는 것이다실제로 영국과 프랑스 같은 나라들이 타국을 식민 지배할 때 내세운 논리와 아주 같다예를 들면 영국의 경우 서남아시아의 강국이었던 인도를 식민지배할 때이러한 논리를 내세웠고프랑스가 인도차이나를 포함한 여러 식민지들의 지배를 합리화 할 때 내세웠던 논리가 이러했다.


이러한 지배논리에 대한 비판을 이영훈의 ‘19세기 위기론에선 단 하나도 찾을 수 없다결과적으로 이러한 문제점은 이영훈 교수의 친제국주의적 그리고 자본주의적 관점에 있고크게 보면 친서방 그리고 친미 친일적인 제국주의 관에 있다고 할 수 있다따라서 ‘19세기 위기론이라는 것은 이러한 기만과 위선 속에서 만들어진 제국주의적 논리다이영훈 교수의 친제국주의적인 ‘19세기 위기설과 이런 식민사학에 맞대응하기 위해 나온 자본주의 맹아론 둘 다 비판적으로 해석해야 한다이에 따라 역사를 유물론적이고 과학적으로 해석하는 마르크스주의적 역사관이 필요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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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주의자에 대해 비하하는 분들은 대한민국에 넘칩니다. 그러나 비하하기 전에 그들이 어떠한 인생을 살았고, 어떠한 변화를 거쳤는지도 알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저는 사회주의자를 자처하는 이들 중에 얼마나 많이 투쟁현장에 있는지 알 필요가 있다 생각합니다. 적어도 사회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이론토대를 실천하기 위해 자신들이 할 수 있는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걸 알기에 지난 겨울과 봄 LG트윈타워 연대투쟁에 거의 매주 나갔던 것이고요. 아래의 글은 제가 어떻게 해서 사회주의자가 되었는지를 설명한 글입니다.)


내가 한국의 정치상황에 처음 관심을 가지게 된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인 2012년이었다당시 일반적인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현재는 탄핵 된 대통령인 박근혜 후보가 점차 국민들에게 대대적인 인기를 끌게 되는 걸 보았다시대가 이명박 정권 시대였기에 나 또한 그 정권의 영향을 받았던 것 같다중학교 3학년인 2010년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은 나에게 있어 대대적인 반북의식을 고취시키는 사건이었다거기다 KBS에서 한국전쟁 60주년 기념으로 방영했던 드라마 전우는 북한을 더더욱 싫어하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물론 부모님이 친민주당 성향에 가까워서 당시 노무현 대통령이나 김대중 대통령에 대한 극우적인 견해는 없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박근혜가 인기를 끌게 되자 할아버지(외할아버지다)는 박근혜를 찍어야 한다고 얘기했다또한 친북주의자들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였고나에게 박정희 대통령은 단군이래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해주신 분이라고 얘기했다물론 나 또한 부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그 말에 공감은 하면서도 박정희가 독재를 한 것에 대해선 비판적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지만 말이다.

 

당시 내가 다니던 학원에는 정치적인 얘기를 하는 것을 아주 좋아하는 국어 선생님이 있었다. 2학기 때였다당시 국어 선생님은 안철수와 문재인이 힘을 합쳐 박근혜를 이겨야 한다 주장했다또한 박정희가 친일파이며 남로당이었고폭압적인 통치를 한 독재자라는 사실을 누누이 강조했다나 또한 그 선생님의 주장에 점차 공감하게 됐고문재인이 당선되길 원했다여기서 나의 인식에 있어 제1차적인 인식의 변환이 있었던 것 같다알다시피 2012년 대선은 박근혜가 이겼다나 또한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2013년 박근혜 정권 시기는 초기부터 시끄러웠다당시 고3인생을 시작하던 나는 북한의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에 따른 한반도의 긴장 상태를 보게 되었고그 외에도 박근혜 정권에 대한 안 좋은 목소리가 많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다또한 그 시기 국정원에 대한 안 좋은 소문과 이석기 사건 등이 있었다일베들의 사악한 5.18 광주민주화운동에 대한 비하행위들을 보면서 박근혜에 대한 안 좋은 인식이 쌓였던 것 같다당연하게도 이것은 학원의 국어 선생님 영향을 정말 많이 받은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재수하지 않고 2014년에 4년제 대학에 입학했다새내기가 된 나는 대학에서 친구들을 사귀게 되었고그럭저럭 학창생활을 해나갔던 것 같다새내기 초기인 2014년 4월 세월호 사건이 터졌다세월호 사건이 터졌지만당시의 나는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았다새내기 생활이 바빴던 것도 있고그해 여름에 1달 간 유럽 여행을 갔다 온 이후론 머릿속에 해외여행 생각밖에 없었던 것도 있었다그래도 고등학교 2~3학년과 대학교 새내기 생활을 하면서 확실히 대한민국의 체제와 사회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의식 자체는 있었다따라서 북유럽의 복지 모델이 좋아 보이긴 했다.

 

그렇게 해서 2015년을 맞았다. 2015년을 맞은 나는 아는 사람의 추천으로 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됐다드라마 서울 1945를 정주행하게 된 나는 한국 근현대사의 중요한 지점들을 그 드라마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여기서 제2차적인 인식의 변화가 있었다나는 해방 이후 남북 통일정부수립을 위해 헌신을 다했던 몽양 여운형을 좋아하게 되었다무엇보다 김구의 남북협상 이전에 분단을 막기 위해 좌우합작운동을 추진했던 여운형이 너무나도 존경스러웠다이렇게 해서 2015년 대학교 2학년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

 

대학교 2학년 시절이던 2015년 나에게 있어서 정말 중요한 사건 하나가 터졌다그게 바로 박근혜 정권의 국정 교과서 사건이었다국정 교과서 사건은 나에게 있어 정말 중요한 사건이었다박근혜 정권이 우리 역사를 자신들 입맛대로 바꾸기 위해 온갖 패악질을 저지르는 걸 본 역사학계는 이에 반기를 들었다많은 대학교 사학과가 이에 동참했다인서울 4년제 대학에 다니고 있던 나 또한 이에 동참해야 한다 생각했다그러나 안타깝게도 그 당시 국정교과서 사태에 누구나 다 할 수 있는 연대서명을 우리학교에서 총 4명밖에 하지 않았다이에 대해 학과 단톡방에 항의하기도 했다그 이후 서명하는 이들이 늘었다.

 

또한 국정 교과서 사태 때 난생 처음으로 집회라는 것을 참가해보게 됐다이것이 나에게 있어서 제3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난생 처음 집회에 나갔을 때우연히 거리행진을 하는 우리를 보고 북한으로 가라라고 확성기를 통해 소음공해를 일으키는 어버이연합 트럭이 지나가는 걸 보았다나는 이런 사람들이 실제로 있다는 것을 국정 교과서 반대 집회를 통해 알게 되었다국정 교과서 사태는 제3차적인 변화를 주었다고 할 수 있다왜냐하면 내가 사회운동에 발을 들여놓게 된 것이 2015년 국정 교과서 사태이기 때문이다이후 나는 우연히 한 다큐멘터리를 보았다그 다큐멘터리는 고려인 이주 150주년 기념해서 만들어진 다큐였고거기에는 1917년 러시아 혁명을 성공 시킨 혁명가 블라디미르 레닌이 조선의 독립을 지원해주었다는 내용이 있었다이리하여 난 레닌에 대해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가지게 되었다.

 

2학년 2학기를 마친 이후 2016년이 되었다. 2016년 초 나는 학교 친구를 통해 한 단체에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하게 되었다그 이후 나는 민중총궐기와 3.1절 집회 등을 포함하여 이쪽 계열 사람들과 같이 활동했고여러 집회에 참여했다그러나 한 가지 문제점이 있었다이 단체는 민중당(현재는 진보당성향을 많이 띈 단체였다한국 사람이라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가지게 되는 반북의식 때문에 나 또한 이쪽 사람들이 북한에 대해 비판의식이 약하다는 생각이 들었고거기에 반감을 가지게 되었다그래서 나는 이쪽 계열과 거리를 두게 되었다그 과정에서 당적을 가지게 되었는데처음 입당한 당이 심상정의 정의당이었다내가 정의당에 입당한 이유는 분명했다반북의식과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이상적인 환상 때문이었다.

 

앞에서 얘기한 바와 같이 2016년 당시 나는 레닌에 대해 긍정적인 마인드를 가지고 있었다이 영향으로 난 아르바이트해서 어렵게 모은 돈으로 군복무를 하기 전 러시아 여행을 갔다 올 수 있었다러시아 여행을 가기 전 나는 러시아 역사책과 더불어 레닌과 사회주의에 관한 책도 읽었다그때 처음 읽은 것이 책갈피에서 출판한 <러시아 혁명과 레닌의 사상>, <공산당 선언>, <국가와 혁명그리고 토니 클리프가 쓴 <레닌 평전 시리즈>였다이런 책들은 내가 레닌을 긍정적으로 보게 되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물론 책갈피에서 쓴 책들의 의도와는 달리 나는 소련에 대해서 긍정적인 마인드도 조금은 생겼다물론 스탈린을 싫어했었다아무튼 2016년 10월 모스크바를 방문했을 때레닌 묘를 들어가 보게 된 나는 레닌에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들겠다는 다짐을 했다.

 

내가 러시아에 갔다 온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에서는 앞으로 역사에서 절대로 잊혀지지 않을 사건이 터졌다바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였다그리고 나는 이런 역사적인 사건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인 10월 말에 소방서에서 공익 근무를 하게 되었다박근혜에 대해 증오와 혐오가 쌓여있던 나는 촛불집회의 첫 시작부터 매주 토요일 마다 참가했다집회는 평화로웠다전국적으로 천만 이상이 참여하는 이 집회 속에서 나 또한 촛불집회 사람들과 한 마음이 되었다비록 3월 10일 현장에는 없었지만그 이전의 매주 토요일 집회는 2~3번을 제외하고는 빠지지 않고 민중들과 함께했다.

 

이런 과정 속에 있던 2017년 1월 우연히 노동자 연대에서 파는 소책자를 사게 되었고서명을 한 덕분에 노동자 연대 쪽에서 하는 세미나에도 참가해 볼 수 있게 되었다당시 노동자 연대의 입장은 기존에 내가 가지고 있던 생각과는 다르다는 걸 알았지만토니 클리프의 국가 자본주의론을 처음 접했을 때는 상당히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이것이 바로 제4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이 영향에 따라 나 또한 스탈린에게 암살당한 것으로 알려진 레온 트로츠키를 좋아하게 되었고노동자 연대쪽의 입장이 설득력 있게 다가왔다무엇보다 마르크스라는 타이틀을 단 것이 참으로 심장으로 와 닿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나 자신이 민주당류의 기류를 완벽히 버린 것도 아니었다아직도 사회주의가 실패했다는 도그마와 북한에 대한 반북의식 그리고 스탈린과 그 외의 현실사회주의에 대한 편견은 아직도 남아있었다그리고 사회민주주의를 여전히 매우 긍정적으로 바라보았다즉 인식이 제대로 잡혀 있지 않았다심지어 나 자신이 페이스 북에다 나는 사회주의자면서 사회민주주의자 그리고 민족주의자라는 이상한 말을 진심으로 선언한 적이 여러 번 있었다그리고 촛불집회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했을 정도로 문재인에 대해 긍정적으로 보았기에 2017년 5월 대선에서 나는 문재인을 찍었다.

 

2016년 10월 말부터 시작한 소방서 공익 근무 시절 나는 구급 출동하지 않는 시간에 독서를 할 수 있는 시간이 넘쳐났다당시 와이파이가 없고 똥컴이 놓여있는 소방서에서 사무실에서 잘 안가는 시간을 소비하는 방법은 독서를 하는 것이었다그 시기 나는 정말 많은 책들을 읽었다. 24개월이라는 공익 근무 기간 동안 거의 100권 가까이 사회과학 서적들을 완독했다그리고 소방서 공익 근무는 나에게 있어 또 다른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왜냐하면 구급 출동을 하면서 가난한 사람들을 포함하여 정말 힘든 사람들을 많이 보았기 때문이다이런 현실에 직면했기에 사무실에서 읽던 사회주의자들의 전기나 사회주의 관련 서적들이 더 와 닿았다이렇게 해서 2018년 중반에 나는 스스로 사회주의자라고 선포했다이것이 제5차적인 인식의 변화였다.

 

2018년은 평창올림픽과 남북공동선언 북미회담 등이 있으면서 시기적으로도 화해모드가 진행되었다거기에 힘입어 공익 근무 말기 나는 북한에 대해서도 좀 다르게 보게 되었다북을 보다 객관적인 시각에서 본 책들을 읽는 것과 동시에사회주의 원전 및 혁명사 등도 읽었다이와 더불어 미국의 저항적 역사학자 하워드 진의 책도 읽었다이렇게 되면서 사회주의자적인 면모가 보다 내 자신에게 의식적으로 생긴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또한 이 경험에서 내가 가지고 있던 웬만한 반북주의적 인식도 많이 희석되었다.

 

2018년 10월에 전역한 나는 1달간 미국 여행을 했다미국여행을 하는 과정에서 하워드 진의 묘도 찾아가 보았고미국 자본주의의 민낯도 보게 되었다이미 사회주의자를 선언했던 터라 미국을 제국주의 국가로서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그리고 2018년 시기부터 스탈린에 대해서 나름 긍정적인 면모도 다시 돌아보게 되었다당시 내가 내리던 스탈린의 평가는 공과 6정도였을 것이다그래도 나는 피델 카스트로나 호치민레닌마르크스엥겔스체게바라 등의 인물들을 좋아했다.

 

아무튼 미국 여행도 마쳤고그 다음해인 2019년 나는 다시 학교에 복학했다. 3년만에 한 복학이었다복학한 나는 사상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나는 스탈린에 대해 긍정적인 면모보다 부정적인 면모를 더 많이 봤다그래도 스탈린의 긍정적인 면모에 대해 객관적으로 알고 싶었다그러나 스탈린을 객관적으로 알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다특히나 한국사회에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던 2019년 1학기 말에 데이비드 글랜츠가 쓴 <독소전쟁사>라는 책을 완독했다이 책은 비록 미국 군사학자가 쓴 책이지만독소전쟁 시기 소련군의 업적을 나름 객관적으로 조명한 책이었다이 책을 완독한 나는 흥분했다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노사과연에서 번역한 마리오 소사의 책 <진실이 밝혀지다>도 읽었다이 책을 읽은 뒤에 나는 평소에 우리가 알고 있던 우크라이나 대기근이나 굴라그 수용소가 매우 과장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이것을 시작으로 나는 스탈린에 대해 보다 긍정적으로 평가하게 되었고그를 존경하게 되었다이것이 바로 지금까지는 나에게 있어 마지막 변화인 제6차적 인식의 변화다.

 

내가 사회주의자를 스스로 선언한 것은 2018년이었다공익 근무 말기 나는 우연히 같은 근무지에서 쌍용차 투쟁을 하다가 공익으로 들어온 분을 만나게 되었는데사상 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라 이쪽의 영향도 받았고여러 가지 좋은 조언들도 많이 받았다무엇보다 이 분 덕분에 사회주의에 대한 어느 정도의 확신을 가질 수 있었다내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는 여러 과정도 있었지만가장 중요한 것은 소방서 공익 시절의 경험이었다그 시기 내가 구급출동을 하면서 보게 된 현실은 사회주의자가 되기에 충분했다또한 그 시기 읽은 책들은 내가 사회주의자가 되는 데여러 가지 인식의 전환을 주었다.

 

나는 아직도 사회주의를 추구하기 위해선 더 많은 학습과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그러기 위해선 앞으로도 이론과 더불어 실천을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아무튼 나 또한 여러 과정속에서 리영희 선생이 <전환시대의 논리>에서 주장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여러번 있었던 것 같다이런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나로 하여금 단순히 학습 뿐만 아니라 실질적 투쟁에 나서게 하는 원동력이었다민중총궐기노동절 집회퀴어 축제반미시위국가 보안법 철폐 시위이석기 동지 석방 시위등이 바로 이러한 인식적 전환의 영향을 받았기에 나 자신이 참여했던 것이라 생각한다코로나 바이러스가 끝나지 않은 채 2021년을 맞이했다. 2012년부터 지금까지의 내모습을 보면 좌경화의 역사인가? 뭐 아무튼 내가 사회주의자인 것이 자랑스럽다앞으로도 난 내 신념을 실천하기 위해 살아가고 싶다.

 

사회주의는 불멸할 것이다!

사회주의는 앞으로도 인류가 성취해야할 과제이다!

마르크스-레닌주의 만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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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10-01 07:5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한 개인의 인식 변화가 우리 사회 굵직한 사건들과 연계되어 일어났네요~ 자신에 대해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니 대단해 보입니다~ ‘사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는 상태는 무엇인지 궁금하기도 하네요~ 앞으로의 길을 응원합니다!!

NamGiKim 2021-10-01 20:12   좋아요 1 | URL
기본적인 이론을 가지고, 그 이론을 실천에 옮기고자 하는 것이 결정적이라 봅니다.ㅎ

필리아 2021-10-01 19:5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모든 사람이 누구도 소외,배제됨 없이 사람다운 삶을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 우리네 소망이지요. 이데올로기에 천착할 필요는 없다고 봐요. 다만 NamGiKim님의 진솔한 자기 성찰에 입각한 신념의 실천을 향한 노력에는 마음껏 응원하고 싶습니다.

NamGiKim 2021-10-01 20:12   좋아요 1 | URL
좋은 댓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