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과서가 말하지 않은 임진왜란 이야기
박희봉 지음 / 논형 / 2014년 5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세운지 200년 된 낡은 왕조가 위기에 처했다. 200년 동안 큰 전쟁 한 번 겪지 않았던 평화로운 왕국. 하지만 조선은 안에서부터 천천히 무너지고 있었다.

양반 사대부의 특권은 나날이 단단해졌다. 사화와 당쟁. 누가 특권을 더 많이 가져가느냐를 두고 조정에서는 권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한 줌 밖에 안 되는 특권층의 안락을 위해 백성들 삶은 갈수록 고단해졌다. 원래 만백성이 모두 괴롭지 않게 살아가도록 설계되었던 조선의 시스템은 긴 세월 동안 특권에 봉사하는 모습으로 왜곡되었다.

나라 뼈대가 무너지는데 군대라고 온전할 리 없다. 다들 어떻게든 힘든 군역을 빠지려 아우성이었고 국가는 그것을 통제하지 못했다. 실전 경험은 말할 것도 없고 훈련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러다 큰 전쟁이 터졌다. 군대가 나서서 막아야 하는데 모이는 병사가 없다. 어떻게든 사람을 모아 병력을 만들어보지만 실전 경험 많은 일본의 정예군을 상대하기에 터무니없는 수준이다. 감당 못할 전쟁이었다. 일본군은 국토를 유린하고 왕은 왕도를 버리고 피난했다. 수군의 활약과 의병의 봉기, 명군 참전으로 가까스로 나라가 망하는 것을 막았다. 이 전쟁은 많은 상처를 남겼다. 이 전쟁으로 많은 것들이 변하기 시작했다.

 

나는 보통 임진왜란을 수업시간에 이런 식으로 설명한다. 그런데 이번 책은 좀 다른 시각으로 이 전쟁을 바라본다. 조선은 전쟁 당시 그렇게 무능한 상태가 아니었다고 말한다. 글쓴이는 여러 자료를 조사해서 구체적인 수치를 내놓으며 이야기를 풀어간다. 대단히 흥미롭다.

 

자료에 따르면 조선 땅에 발을 들여놓은 일본군은 절반 넘게 자기 나라로 돌아가지 못하고 증발했다. 그 정도 타격을 입힐 정도면 당시 조선도 군사적으로 그리 무능한 상태였다고 할 수 없다는 것. 명군이 참전하긴 했지만 우리가 보통 알고 있는 것보다 전쟁에서 큰 역할을 하지는 않았다. 일본군을 결정적으로 괴롭힌 건 그들 보급선을 끊어버리고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힌 조선군이었다. 바다에서는 이순신의 수군이 일본 함대를 괴멸시켜 침략자의 진격 속도를 늦추고 의지를 꺾었다. 내륙에서 의병이 일어나 육상 보급로를 끊고 곳곳에서 일본군 부대에 결정적 타격을 입혔다. 김시민 장군이 진주성을 지켜내며 일본군은 전라도 평야 쪽 진출에 실패한다. 진주성을 지킬 수 있었던 건 전쟁 전에 일본군 침략 통로가 될 가능성이 높은 경상도 일대의 방어 시설을 조정에서 이미 상당히 보수해놓았기 때문이다. 조선 정부는 전쟁의 규모를 정확히 예측하지 못했다 뿐이지 전쟁이 일어나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나름대로 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특히 의병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이 나온다. 당시 의병은 사실 관군이나 다를 바 없다. 의병장은 대부분 전현직 관료나 양반 유생이었다. 성리학 이념에 따르면 모든 사대부는 나라가 위기가 닥치면 왕의 부름에 답해야 한다. 실제로 선조는 의병 봉기를 호소하는 명령을 전국에 보내기도 했다. 그에 응해 군대를 일으켜 전공을 세운 의병장에게 정부는 관직과 봉록을 내려주었다. 의병 부대와 관군을 한데 묶어 전투 단위로 편성하는 일도 흔했다. 전쟁 후반부로 갈수록 관군 지휘관과 의병장을 분명하게 나누기 어려워진다.

병사들은? 조선군은 병농일치제. 모든 성인 남성은 평소에는 농사를 짓지만 전쟁 터지면 곧 군인이 된다. 원래 관군에 속했어야 할 병력이 의병장을 따라 무기를 들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 전쟁 당시 조선군의 역량을 따져볼 때 관군뿐만 아니라 의병도 같이 묶어서 파악해야 한다는 게 글쓴이의 주장이다. 그렇게 따지면 조선군은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고 엉성하지는 않았다.

 

글쓴이는 역사학자가 아니다. 행정학 교수다. 행정학자의 눈으로 본 임진왜란의 모습은 느낌이 좀 달랐다. 이런 책이 때때로 무척 반갑다. 특히 전쟁에 대한 여러 가지 구체적 수치를 비교 분석하고 정리한 열정이 훌륭하다. 재미있는 책이다. 역사 전공 서적이나 교과서는 이제 그렇지 않지만 대중적인 소설이나 드라마, 영화에서는 여전히 임진왜란을 낡은 시각으로 묘사하곤 한다. 당장 망해도 이상하지 않을 무능한 왕조와 막강한 침략자. 짠하고 나타나서 초인적인 의지와 전략으로 그들을 무찌르는 전쟁 영웅.

임진왜란은 조선이라는 국가가 나름대로 조직적으로 침략자에 맞서 싸운 전쟁이다. 그리고 우리가 보통 생각하는 것보다 잘 싸웠다. 뛰어난 장수들은 그 가운데 자기 역할을 다했을 따름이다. 이 전쟁을 국가와 국가의 싸움으로 봐야지 단순한 영웅서사로 그려서는 안 된다. 그 점을 놓쳐서는 안 된다는 글쓴이의 지적에 동감한다.

 

다만 몇 가지 걸리는 점이 있다.

글쓴이는 선조 임금의 역할을 재평가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좀 지나친 면이 있다. 글쓴이에 따르면 선조는 자기 안위를 내팽개치고 불철주야 나라를 위해 동분서주한 뛰어난 임금이다.

 

선조 임금은 신립을 삼도순변사에 임명하면서 어도를 하사하고 군통수권을 부여하였으며, 당시 말을 타고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모든 병력을 신립에게 맡겼다. 심지어는 국왕을 수행하던 내시까지 신립과 함께 충주로 보냈다. 이로써 일본군이 한양성에 들이닥칠 때에는 한양성을 방어할 수 있는 병력이 없었고, 선조 임금의 피난 행차에 호위 군사도 없게 되었다. 선조 임금은 자신의 안위보다 국가의 보전과 침략군 퇴치를 우선시한 것이다. p257.

 

 

내시까지 전투 병력으로 뽑아 보내는 임금이라니. 눈물겹다. 실제로 선조가 무능하기만 한 왕은 아니었다. 나름대로 합리적 판단을 할 줄 아는 왕이었다. 그러나 글쓴이는 선조에 대한 모든 부정적 평가에 면죄부를 주려고 한다. 좀 극단적인 논리가 아닐까 생각한다.

선조는 분명히 공도 있지만 과오도 있는 임금이다. 전쟁 중에 보여준 여러 용렬한 행동은 물론이고 전쟁 끝나고 치세 말기에 보여준 모습들을 볼 때 글쓴이가 말하는 것처럼 자기를 버리고 나라를 지키고 위하는이상적인 임금과는 거리가 멀다. 어디까지나 자기 권력을 무리 없이 지키려하고 나라 자체보다는 왕조의 안전을 꾀했던 딱 그 정도의 왕이었을 따름이다. 아마도 글 전체 논지를 강화하기 위해 그런 식으로 주장을 한 것 같은데 선조를 너무 무능한 임금으로만 몰아세우는 것은 부당하다는 정도에서 멈췄으면 어땠을까하고 생각해본다.

 

 

일본의 경우 한 지역의 주둔군이 점령군에게 전투에서 패배하거나 항복하는 경우, 해당 지역의 백성들은 점령군의 통치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따라서 일본군은 조선 관군을 상대로 거점 지역에서 승리하면 조선 8도 전 지역을 어려움 없이 통치할 수 있을 것으로 보았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 초기 일본군이 조선 관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 백성들은 모두 일본군의 통치를 받아들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이 혼연일체가 되어 일본군에 대항하였다. p262.

 

 

정말 그랬을까? 모두 하나같이 침략자에 용감히 목숨 걸고 저항하기만 했을까? 아니다. 실제로 일본군이 점령 지역에서 조선 왕조보다 더 나은 처우를 약속하자 그들에게 순응하고 충성하는 쪽을 택한 백성들이 무척 많았다. 일본군을 등에 업고 조정에 적극 반기를 들었던 백성들도 적지 않았다. 이게 어찌된 일일까? 역사 서술에서 모두’, ‘전혀같은 말들을 함부로 써서는 안 된다.

 

조선은 국민국가가 아니다. 국민국가는 국가와 구성원의 이해관계가 일치해야 한다. 아니, 적어도 그게 옳다고 믿고 실현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게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근대 국민국가다. 하지만 조선은 그런 나라가 아니다. 조선은 양반 사대부와 국왕의 나라다. 철저히 그들만의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이는 왕조국가였다. 조선 피지배층의 사정은 조선이라는 국가의 이해관계와 대체로 무관했다. 물론 민본주의’, ‘애민정신이라는 말로 포장한 노력들도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왕조의 이익을 지키기 위한 사회 안정책에 불과했다. 조선은 백성들의 나라가 아니었다. 대다수 피지배층 농민들에게는 눈에 보이지도 않는 왕이나 나라의 일보다는 이번에 어떤 관리가 우리 마을에 와서 세금과 부역 문제를 어떻게 하는지의 문제가 무척 절박했을 것이다.

 

이런 나라에 지금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우리나라라는 강한 일체감이 있었을 리 없다. 전쟁이 터지고 침략자가 다가온다고 해도 그게 예전보다 덜 괴롭히고 덜 뜯어가는 지배자라면 두 손 들고 환영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걸 비난해서는 안 된다. 그게 고단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권리이자 그 시대의 당연한 생리였으니까.

글쓴이의 주장에 따르면 조선에는 무척 이상적인 백성들이 살고 있었던 셈이다. 그 이상적인 백성이라는 건 지배자가 어떤 횡포를 부려왔던 간에 지배자들의 나라가 위기에 처하면 그들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 따위 자발적으로 내던지는 너무 바보 같은 사람들이다. 그런 백성은 없다. 백성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는 지배자들이 있을지는 몰라도.

 

과거를 현재 시점에서 꺾어보면 안 된다. 누군가의 권력과 이익을 위한 논리를 역사에서 갖다 붙이면 그건 역사가 아니라 정말 나쁜 거짓말이 될 수도 있다.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그 시대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그리고 배울 건 배워야 한다.

 

나라는 어때야 하는가. 정부는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 어떻게 해야 공동체가 위기 상황을 잘 헤쳐 나갈 수 있는 건강한 체질을 갖게 되는가. 공동체의 이익을 누군가가 독점하는 것과 모두가 고르게 나눠가질 수 있도록 노력하는 것 가운데 어느 쪽이 더 옳고 나은 방향인가. 좀 오래된 이야기지만 임진왜란에서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우리는 고독할 기회가 적기 때문에 외롭다 - 김규항 아포리즘
김규항 지음, 변정수 엮음 / 알마 / 2017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고독solitude과 외로움loneliness을 구분해야 한다. 고독은 자신과 대화하는 것이고 외로움은 다른 사람들과 차단된 고통이다. 자신과 대화할 줄 모르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제대로 대화할 수 있을까. 고독을 피한다면 늘 사람에 둘러싸여도 외로움을 피할 수 없다. 용맹하게 고독해야 한다. p6.

 

 

글을 어렵게 쓰지 않는다. 알아듣기 힘들게 말하지도 않는다. 우리가 맨날 쓰는 평범한 단어를 똑같이 쓰고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본 것 같은 이야기를 다시 한다. 굳이 또 읽거나 들어야 하나 싶은 말을 또 한다. 하지만 남다르다. 전혀 특별할 게 없는 말인데 가슴을 쿵쿵 울린다. 읽다 보면 무척 짜릿하다. 비결이 뭘까?

 

일상에서 우리가 얻는 배움이나 깨달음도 다 그렇지 않을까? 누구나 다 알 것 같은 그런 말 한 마디가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하게 다가와 마음을 움직인다.

 

마음을 움직이는 말 한 마디. 때때로 그런 말을 해주는 어른이 옆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이만 많이 먹은 무늬만 어른 말고 나이와 상관없이 진짜로 뭔가 배우고 싶은 면모가 있는 그런 어른. ! 이 책의 평범한 글들이 비범하게 마음을 울린 비결이 뭔지 알 것 같다. 그냥, 이 책을 쓴 사람이 진짜 어른이었던 것이다.

 

 

담배를 끊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냥 끊는 것이다. 나머지 방법들은 실은 담배를 끊는 방법이 아니라 담배에 대한 미련을 표현하는 방법들이다. p82.

 

 

김규항은 나이가 꽤 많다. 1962년생이다. 그런데 그의 글을 읽다보면 주변에서 보는 흔한 62년생 아저씨들과는 다른 어떤 새로운 종류의 어른을 만나게 된다. 칼 같이 단호하다. 기면 기고 아니면 아니다. 옳은 건 옳고 틀린 건 틀리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지 뭐’, ‘좋은 게 좋은 거지같은 말이 끼어들 틈이 없다. 화려한 수사법 같은 거 없다. 구차한 변명도 없다.

 

 

현명한 사람 중에, 단단하게 살아가는 사람 중에 매사에 남 탓만 하는 사람이 하나라도 있는가? p120.

 

 

뻥으로 센 척 나오는 말들이 아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담금질해온 사람이 자기도 모르게 내뿜는 뜨거운 기운 같은 것이라고 해야 할까? 평생 힘껏 자기 일 열심히 해온 어느 노동자의 단단한 뒷모습을 보는듯한 느낌이다. 어쩌다보니 나도 말로 뭔가를 가르치며 살아야 하는 노동을 하고 있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이상한 헛소리나 지껄이는 추한 아저씨가 되지 않을까?

 

 

아저씨는 나에 대해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에 대해 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르기 때문에 남에 대해서도생각하거나 말할 줄 모른다. 나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남의 껍데기에 대해서만 생각하고 말한다. 아저씨는 더 이상 중년 남성이라는 생물학적 경계 안에서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회란 유기적이며 아저씨이 존재하는 사회에서 누구든 조금씩은 아저씨다. p124.

 

 

김규항이 왜 여느 아저씨처럼 느껴지지 않는지 조금은 알 것 같다. 그는 아저씨가 아니었으니까. ‘아저씨란 나이와 상관없이 참 애처로운 존재다. 껍데기나 훑으며 지나가는 삶이라니. 껍데기 말고 알맹이를 만나려면 그냥 살아지는 대로 살면 안 된다. 물건 소비하듯 삶을 지나치면 안 된다. 대충 시간을 흘려보내면 안 된다. 인생의 파도 속에서 나를 잃으면 안 된다.

 

나는 상품이 아니라 인간이라는 생각만으로도 우리는 좀 더 훌륭하게 살 수 있다. p22.

 

자기를 성찰한다는 건 자기만 생각하지 않는 것, 남 생각도 하는 것이다. 세상을 변화시킨다는 건 결국 나와 남이라는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p109.

 

사람이 양식 있게 산다는 건 양식 있는 어휘를 사용하는 게 아니라, 크든 작든 자신의 직접적인 이해가 걸린 일에 양식 있게 판단하는 것이다. 실은 그게 가장 어려운 일이고 그걸 지키는 사람들은 매우 적다. 유식하다 무식하다는 제도교육 학력과는 상관이 없다. 사회의 한 성원으로서 알아야 할 최소한의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 그래서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볼 줄 모르는 사람, 그런 사람이 바로 무식한 사람이다. p39.

 

 

생각을 하고 살아야 한다. 양식을 갖추고 살아야 한다. 그 생각, 양식이라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게 아니다. 자기가 누리는 깃털 같이 가벼운 안락한 일상의 허상에서 내려와 현실을 있는 그대로 마주 보려고 한다면. 나 자신만 편하고 부유하게 잘 살면 된다는 편협한 인식을 깰 수 있다면. 결국 김규항이 말하는 건 다른 게 아니다. 최소한의 상식이다.

 

 

남보다 호사를 누리는 게 자랑이 아니라 머리를 긁적이게 하는, 대개의 사람이 그 정도의 양식을 갖춘다면, 천국에 다가간 게 아닐까. p67.

 

남 겪는 걸 겪지 않고 남과 더불어 살 줄 아는 사람이 되긴 어렵다. p48.

 

오늘 20대는 모두 88만원 세대인가? 그렇진 않다. 그중엔 소수의 88억 세대가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한다. 대다수의 20대가 88만원 세대가 되어야 하는 이유 또한 소수의 88억 세대가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으로 존재하기 때문(혹은, 존재하게하기 위해서)이다. 인텔리들이 계급이라는 말을 폐기하려는 경향과는 아랑곳없이 계급적 격차는 더욱 더 벌어지고 있다. p87.

 

 

아직까지 계급을 빼놓고 인간세상을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이론을 보지 못했다. 역사에서 계급 갈등을 뺀다면 역사책에 실린 수많은 글자들은 신화 속 옛날이야기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대체 왜 계급이라는 말을 잘 쓰지 않는 걸까? 구닥다리 같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그러다보니 세대 간 갈등이니 세대 전쟁이니 같은 헛발질을 계속 한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지 못하는 틀은 현실의 부조리를 유지하려는 기득권 세력의 힘을 더 키워주게 된다.

 

글을 읽다가 정신을 번쩍 차리게 된다. 나만의 착각 속에서 안주하지 않으려면 세상을 제대로 보지 않으면 안 된다. 세상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내 옆에서 울고 있는 사람들도 보지 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 눈물이 아픈 건 모르고 내 눈물 짠 것만 생각하며 살다간 악취 나는 삶을 면하지 못하게 된다.

 

 

이 책은 김규항의 신작은 아닌 것 같다. B급 좌파에서 읽었던 구절들도 보여 반가웠다. 아마도 글쓴이가 지금까지 써왔던 칼럼들을 엮은이가 잘 발췌해서 내놓은 모양이다. 김규항의 책들을 꾸준히 읽어온 사람이라면 이 책은 그다지 새롭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나처럼 예전 책 한 두 권 읽어봤거나 처음 접해보는 사람은 무척 흥미 있게 읽을 수 있다. 그리고 꾸준히 읽어왔던 사람이더라도 분명히 얻어갈 만한 게 있는 책이다.

 

칼럼의 구체적 장면들은 지워졌다. 그래서인지 모르겠지만 오히려 좀 더 내 관점에서 읽기가 가능했다. “! 세상 다 끝난 거 아니야! 너는 충분히 가치 있고 멋있어! 그러니까 힘내라고 말해주는 책만 힘을 주는 게 아니다. 때때로 어떻게 살아야 부끄럽지 않게 살 수 있는지를 따져보면서 따끔하게 등짝 때려주는 말도 필요하다. 대충 살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핑계 대지 말고 제대로 살아봐야겠다고 다짐하게 된다. 이 책은 그런 의미에서 힘을 주는 책이다.

 

 

인간의 모습에서 겸손보다 더 품위 있는 건 없다. p13.

 

사람은 다른 사람과의 우애나 연대 없이 행복할 수 없다. 행복은 소비나 물질적 축적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과 조화를 이루는 순간, 바로 그 순간들이다.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주는 유일한 경로는 사랑이다. 나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있음을 확인할 때 우린 어지간히 고단한 삶속에서도 행복하다. p23.

 

우리가 못 한다 아쉬워하는 많은 것들도 실을 안 해도 그만인 것들. p24.

 

남이 보기에 내가 어떤가에 병적으로 집착하게 만드는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영혼 없는 좀비가 되지 않는 비결은 내가 보기에 나는 어떤가를 늘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려면 두 가지가 필요하다. 혼자일 수 있는 시간과 그 시간을 즐길 수 있는 힘. p6.

 

현재에 대한 비판이 없다면 대안도 없다. 현재에 대한 비판은 대안의 첫 걸음이다. ‘대안 없는 비판이라는 비판은 실은 어느 누구도 대안의 첫걸음도 떼지 못하게 하기 위해 살포되는 체제의 주문呪文이다. p78.

 

자본주의 사회에서 삶을 회복하는 건 벽돌에서 인간이 되는 것, 개별성을 회복하는 것이다. 내 취향과 내 문화와 내 교육관과 내 인생관과 내 세계관과 내 연애의 기준을 가진 비로소 한 개인이 되는 것이다. p123.

 

 

 

덧붙여서.

이 구절은 무슨 말일까? 나는 아직 잘 모르겠다. 나도 결혼을 하고 나중에 딸을 낳아서 키워보면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 수 있을까?

 

 

딸은 단지 딸, 아들 하는 자식 중의 하나가 아니다. 딸은 한 남자가 어떤 삶을 살고 있는지 가장 정교하게 알아낼 수 있는(폭로하는), ‘삶의 시험지이다. 한 남자가 딸에게서 존경받는 인간이 되려고 애쓴다면 그의 삶은 좀 더 근사해질 것이다. p150.


댓글(6) 먼댓글(0) 좋아요(1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데미안 2017-07-05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화책 중에 ‘짜장, 짬뽕, 탕수육‘이란 책이 있어요.어떤 아이가 그걸 읽고 독서감상문이라면서 서너줄 써왔는데 요는 그거더군요. 자기가 짜장을 좋아한다고 해서 짬뽕을 좋아하는 친구의 취향을 지적하지 말아야 한다는. 취향에 대한 존중과 취향에 대한 예의만 잘 지켜도 꼰대로서의 답답함은 벗어던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했습니다.그리고 또 하나!! 사랑하는 딸에 대한 좋은 부모에 대한 접근과 어떻게 죽을 것인가에 대한 모색이 결국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강구로 전환되는 찰나...저는 독서라는 돌파구를 찾게 되었습니다.물론 어려운 책보다는 아직은 소설이 더 좋네요^^

돌아온탕아 2017-07-05 17:32   좋아요 0 | URL
서로가 불편해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해야하는지를 모두가 깊이 고민한다면 지금보다는 세상이 훨씬 아름다워지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나저나 무척 멋진 돌파구를 찾으셨네요! 응원합니다.

cyrus 2017-07-05 14: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 자신이 누군지 모르면 남이 어떻게 살아가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궁금해 합니다. 라캉의 말대로 타인의 욕망을 욕망하게 됩니다.

돌아온탕아 2017-07-05 17:33   좋아요 0 | URL
라캉 철학을 읽어보고 싶어지는 댓글..이네요 :) 주변에도 꼭 남이 뭐하고 다니는지 캐고 다니고 남의 말 전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요. 대개 자기를 그다지 궁금해하지도 않고 사랑하지 않는 분 같더라고요.

데미안 2017-07-05 17: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비슷한 어조의 책이 있어요. 황현산 선생남의 밤은 선생이다!!

돌아온탕아 2017-07-05 17:37   좋아요 0 | URL
황현산... 고종석의 문장이라는 책을 읽다가 접한 이름이네요. 궁금해지네요!
 
자신 있게 결정하라 - 불확실함에 맞서는 생각의 프로세스
칩 히스, 댄 히스 지음, 안진환 옮김 / 웅진지식하우스 / 2013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처음에는 이 책이 우유부단한 사람에게 힘을 주는 책인가 싶었다. 마침 요즘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에 빠져있던 터라 뭔가 도움이 되는 내용이 있을까 싶어 펼쳐보았다. ‘자신 있게 결정하라니까.

 

읽어보니 자신 있게 결정할 수 있는 법을 일러주는 책은 맞다. 그런데 결정을 쉽게 내리지 못하는 사람보다는 섣불리 판단해서 일을 그르치는 사람이 보면 좋은 책인 것 같다. 잘 판단하는 방법, 슬기롭게 살펴서 스스로 자랑스러울 만큼 훌륭한 결정을 내리는 프로세스를 다루는 책이다. 물론 나처럼 뭔가 쉽게 선택하지 못하는 사람도 힌트를 얻어갈 수 있다. 결정을 잘 내리는 방법을 습관처럼 익히면 자신 있게 뭔가를 정하는 데 도움이 될 테니까.

 

프로세스 그 자체는 우리에게 크나큰 감정적 선물, 바로 자신감을 안겨준다. 한쪽에 치우친 정보를 모으고 미래의 불확실성을 무시하는 데서 오는 오만한 과신이 아니라 자신이 최고의 결정을 했을을 아는데서 오는 자신감 말이다. p347.

 

 

뭔가 판단하고 방향 정하는 일을 지혜롭게 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격언과 속담이 이미 많다. ‘나무를 보지 말고 숲을 봐라’, ‘급할수록 돌아가라’,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건너라같은 말들에는 인류의 오랜 지혜가 들어 있다. 중요한 일일수록 급하게 보지 말고 두루 살펴서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천천히 이것저것 잘 재보고 정하라는. 하지만 너무 흔하고 뻔해서일까. 그런 충고를 많이들 그냥 흘려듣는다. 그리고는 마음이 이끄는 대로’, ‘느낌이 오는 대로덜컥 뭔가 정했다가 나중에 가서 후회하곤 한다.

 

자신 있게 결정하라는 어떻게 보면 별 내용 없는 책처럼 보인다. 격언이 숱하게 다루고 속담이 골백번 이야기하던 바로 그 무언가를 또 다루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데도 에이 뭐야 하며 덮어버리지 않고 쭉 읽게 된다. 격언과 속담 속 지혜들을 조리 있게 잘 정리해서 그럴듯하게 있어보이게 잘 포장해놓았다고 해야 할까. 심리학 연구, 의사결정 연구 사례를 꽤 많이 인용했다. 적어도 글쓴이 혼자만의 개똥철학을 무책임하게 써놓은 건 아닌 것 같아서 믿음이 간다.

 

무엇보다도 사람이 결정 내리는 과정을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 각 단계마다 저지르기 쉬운 실수와 그것을 극복하는 방법을 차근차근 마음에 와 닿게 설명해주는 게 이 책의 장점이다. 결정을 잘 내리는 체계적 방법을 알려주는 책이라고 해야 할까.

 

사람이 뭔가를 정할 때는 크게 네 단계 과정을 거치게 된다. 선택에 직면하고, 선택지를 따져보고, 선택하고, 선택한 것을 밀고 나가고. 그런데 사람이라면 누구나 좁은 시야와 들쭉날쭉한 감정이라는 타고난 약점이 있어서 잘못된 결정을 내리곤 한다.

 

첫째, 선택에 직면했을 때 지나치게 좁은 선택지 안에 갇혀서 어쩔 줄을 몰라 한다. 사람 시야가 생각보다 좁아서 여러 가능성을 두루 살피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것 아니면 저것또는 할까 말까이상을 넘어가지 못한다. 더 많은 선택지들이 있음을 보지 못하고 좁디좁은 시야 안에 갇힌다. ‘범위 한정 성향이다. 그럴 때는 다른 것들을 볼 수 있게, 더 넓게 볼 수 있게 일부러라도 이것저것 노력해야 한다. 여러 가지 내용 가운데 나는 다음 두 가지 방법이 가장 좋았다.

 

기회비용을 생각한다면 훨씬 더 현명한 결정을 내릴 수 있지 않을까? 결정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 직면했을 때 이걸 선택하면 대신 무엇을 포기해야 하는가?” “똑같은 시간과 비용으로 다른 무엇을 할 수 있는가?”같은 간단한 질문을 먼저 던져보는 것이 좋지 않을까? p75.

 

일명 선택안 없애기 테스트도 범위한정성향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된다. 특정한 선택안을 전혀선택할 수가 없다고 상상하면 심리적 스포트라이트를 다른 곳으로 옮길 수밖에 없다. 그전까지는 스포트라이트의 방향을 바꿀 생각을 하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p75-77.

 

 

둘째, 선택지를 따져 볼 때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다가 잘못 판단한다. ‘확증 편향이다. 뭐가 가장 좋은지 찾아본 다음에 선택하는 게 아니다. 먼저 마음속으로 어느 한 쪽을 정해놓고는 그게 좋은 이유를 이리저리 끼워 맞춰서 찾는다. 이렇게 내린 선택과 결정은 엉터리일 확률이 높다. 자기 생각이 맞는지 검증해야 한다. 검증은 안에서 하는 게 힘들다. 자기 생각이 틀렸다고 스스로 말하기 어렵다. 바깥으로 나와야 한다. 자기 생각의 반대편이 되어보고, 자기 느낌에 기대지 말고 객관적 수치에 주목한다. 내 생각을 바깥세상과 만나게 해주어야 한다.

 

어떻게 해야 머릿속 가정에 대해 검증을 실시할 수 있을까? 그 첫 단계는 자신의 처음 생각과 반대되는 방향을 고려하는 습관을 기르는 것이다. p140.

 

어떤 결정을 내릴 때 내부적 관점은 우리의 스포트라이트 안에 들어온 정보에 의존한다. 즉 해당 상황에 대한 자신의 느낌과 평가에 의존한다. 반면 외부적 관점은 나름의 특별한 측면들을 무시하는 대신 보다 큰 그림을 분석한다. 외부적 관점이 더 정확하다. 특정 개인의 느낌이 아니라 다수의 직접적인 경험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p167-168.

 

외부적 관점은 평균치에 눈을 돌린다. 통계학 용어를 쓰자면 해당 상황에 대한 기저율(base rates)’, 즉 유사 상황을 경험한 다른 사람들의 성과율을 나타내는 데이터에 주목하는 것이다. p168.

 

전문가에게 충고를 듣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전문가라고 만능이 아니다. 그들을 최대한 잘 써먹기 위해서는 질문을 잘 해야 한다.

 

하지만 이 점은 명심해라. 전문가에게 어떤 질문을 던질지를 신중하게 판단하라는 것 말이다. 전문가들은 예측에 서툴 때가 많다. 그 대신 기저율을 평가하는 데는 뛰어나다. p171.

 

돌다리를 건너기 전에 두들겨보는 것도 큰 도움이 된다.

 

우칭(Ooching)은 가설을 검증하기 위해 몇 차례 작은 실험을 실시해보는 것을 뜻한다. p193.

 

우칭을 실행한다는 것은 이렇게 묻는 것과 같다. ‘시험해볼 수 있는데 왜 예측하지? 확실히 알 수있는데 왜 짐작하는 거지? p214.

 

 

셋째, 중요한 선택의 순간에 감정 때문에 일을 그르친다. 감정에 휘둘려 정말 중요한 무언가를 읽지 못하고 놓친다. 특히 단기감정이 발목을 잡는다. 사람은 누구나 익숙한 것을 좋아하고 지금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한다. 눈앞의 무언가를 상실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멀리 내다보지 못하고 결정을 망치곤 한다. 현명하게 결정하려면 자기감정과 여러 가지 방법으로 어느 정도 심리적 거리를 두어야 한다. 나는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같은 상황이라면 나는 뭐라고 해줄까를 생각해보라는 팁이 무척 좋았다.

 

10-10-10 기법이란 우리의 결정을 세 가지 시간적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다. 나는 10분 후에 이 선택에 대해 어떤 감정을 느낄까? 지금으로부터 10개월 후에는? 10년 후에는? 이 세 가지 시간적 관점은 결정을 할 때 거리감을 확보해준다. p225.

 

쉽사리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생각이 막혔을 때는 아래 질문만큼 효과적인 것이 없다. 만일 나와 가장 가까운 친구가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나는 뭐라고 조언할까? p241.

 

 

넷째, 선택을 했으면 어떤 결과가 나올지 잘 지켜봐야 한다. 그런데 여기서도 자주 실수한다. 사람은 자기 예측과 판단을 지나치게 믿는다. 보통 비관하기보다 낙관한다. 그러다 방향을 틀어야 할 필요가 있는데도 중요한 기회를 놓치는 일이 생긴다. 잘 될 때와 잘 안 될 때를 모두 생각해봐야 한다. 마치 책을 똑바로 잘 세우려고 양쪽에 북엔드를 받쳐놓는 것처럼 미래 예측에도 양쪽 받침대가 필요하다.

 

최상의 시나리오와 최악의 시나리오를 고려하면 가능한 결과의 예상 범위를 확장하여 현실을 보다 정확하게 인식할 수 있다. 우리 같은 보통 사람들에게 미래란 투자 종목이 아닌 인생 그 자체다. 따라서 양쪽 북엔드 사이의 그 어떤 상황에도 대비할 준비를 갖춰야 한다. 미래에 북엔드를 세워두면 최악의 상황과 최고의 상황 모두를 내다보고 계획을 세울 수 있다. p278.

 

자기 과신에 관한 연구는 앞날을 제대로 예측했다고 자신할 때도 우리가 틀릴 확률이 생각보다 높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미래는 하나의 점이 아니라 넓은 범위이기 때문이다. p278-279.

 

혹시 모를 불상사를 예방하는 매우 간단한 또 다른 방법도 있다. 자신이 과대 확신하고 있다고 가정한 뒤에 넉넉한 오차범위를 설정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많은 엔지니어들은 프로젝트를 수행할 때 안전계수를 설정한다. 안전계수는 혹시 있을지 모를 기계 결함에 대한 바람직한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p288-289.

 

 

‘~() 책으로 배우나라는 말이 있다. 맞는 말이다. 사람 인생을 책만 읽어서 알기는 어렵다. 연애도 책으로 배울 수 없고 대인관계도 책만 읽어서는 뾰족한 수를 찾기 힘들다. 직접 이리저리 부딪쳐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인생의 모든 해답이 여기 있소하는 식의 자기계발서는 믿기 힘들다. 하지만 모든 일을 매번 직접 겪어가며 배울 수는 없다. 그럴 때 적당한 매뉴얼이 참 절실하다. 책으로 모든 걸 알 수는 없어도 어디로 가면 똥을 피할 수 있는지 정도는 배울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릴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선택하기 전에 제대로 따져보는 과정이 중요하다. 이 책은 그 과정을 야무지게 밟아나가면서 참고할 매뉴얼로 잘 써먹을 수 있을 수 있을 것 같다. 맨 뒤에 친절하게 요약도 달아놓았다. 여러 선택 장애 사례와 극복 방법을 볼 수 있는 클리닉부분도 좋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내 마음을 부탁해 - 온전한 자존감과 감정을 위한 일상의 심리학
박진영 지음 / 시공사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 책의 첫인상은 좀 별로였다. 책의 절반이 말랑말랑한 그림이다. 글자 크기도 크고 줄 간격도 넓고.

 

괜찮은 책이라는 소문을 듣고 찾았다. 그런데 막상 펴보니 책장사들이 대충 찍어내서 파는 책 같아서 놀랐다. 표지하고 페이지를 예쁘장하게 만들어놓고 누구나 할 수 있는 이야기들을 모아 알맹이 없는 내용을 끼워 넣은, 신간코너에 잠깐 올라왔다가 사라지는 그런 책인가 싶었다. 일단은 글쓴이를 믿고 샀다. 그가 쓴 다른 책을 참 재미있게 읽어본 적이 있으니까. 그냥 가볍게 읽어보자 생각하고 책장을 빠르게 넘겼다. 그런데 읽다보니 마냥 책장을 빠르게만 넘길 수는 없었다. 읽을수록 단단한 알맹이가 느껴지는 책.

 

이번 책에서는 글쓴이가 그동안 쓴 심리학책들의 요점을 추려 모아 놓은 듯하다. 실험 사례나 일화들을 많이 뺐다. 소개는 하더라도 내용이나 과정을 자세히 넣지는 않았다. 대신 글쓴이의 통찰과 조언을 많이 넣었다. 빤한 말도 있지만 귀담아들을만한 이야기도 많다.

 

이 책은 무척 가볍게 펼 수 있다. 어려운 말이 나오지 않고 어디선가 한번쯤 들어봤던 이야기가 많다. 생각해보니 그게 이 책의 미덕이다. 뻔하고 많이 들어봤던 말이라도 그걸 누가 어떤 방식으로 풀어내느냐에 따라 색다르게 다가오기도 한다. 어쩌면 어떤 조언이 내게 도움이 되는가 안 되는가는 조언의 내용보다 조언의 전달 방법에 달려있는지도 모르겠다. 글쓴이의 말들이 무척 설득력 있어서 여러 내용이 마음에 묵직하게 와 닿는다. 예전에 흘려들었던 말들을 이번에는 귀담아 듣게 된다. 빠르게 훑어볼 수도 있지만 한 글자 한 글자 꼼꼼하게 읽어보면 더 좋은 책이다. 게다가 일반적 통념을 깨는 내용들도 꽤 있다. 하나하나 찾아보는 재미가 있다.

 

독감 예방주사 몇 번 맞는다고 평생 독감을 앓지 않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때에 맞춰 맞아 놓으면 독감에 걸리지 않거나 걸리더라도 심하게 앓지 않고 슬기롭게 지나갈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리학책 몇 권 읽는다고 곧바로 잘 사는 사람이 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우울하거나 지쳐서 마음의 위기가 닥쳐올 때마다 꺼내서 위로와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책이 있다면 참 좋을 것이다. 하물며 그 위로와 통찰이 알맹이 없는 헛소리가 아니라 많은 연구와 실험으로 검증된 것이라면 더 말할 필요가 있을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마음의 예방주사 같은 책이다. 많이 꺼내볼수록 약효가 잘 듣는.

 

 

우리는 우리를 해치는 나쁜 환경을 과감하게 거부하며 살아야 한다. 내가 걷는 길에서는 다른 사람의 시선이나 의지를 신경 쓰기보다 나를 최우선으로 해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자. 삶의 모든 순간은 온전히 내가 할 경험들이다. 따라서 모든 결정은 온전히 나를 위해서 내려야 한다. p194.

 

 

이 책은 내가 내 마음을 잘 추스르면서 건강한 마음으로 살려면 어떤 것들을 잊지 말고 챙겨야 하나를 이야기한다. 가장 중요한 줄기는 자존감이다. 내가 나를 미워하지 않고 좋아하는 감정.

 

마크 리어리 등의 학자들은 자존감은 어떤 것의 원인이라기보다 이미 그럭저럭 잘 살고 있음을 드러내는 삶의 결과물이라고 했다. 스스로 어떤 사람인지 잘 알고 있고 그 가치관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삶을 살면 그 결과로서 건강한 자존감이 따라온다는 것이다. 누가 뭐라고 하든, 남이 나보다 더 행복해보이든, 나보다 더 잘 나가든 말든 흔들리지 않는 자존감 말이다. 따라서 건강한 자존감은 급조하기 어렵다. ‘나는 내가 좋다는 주문을 천 번을 외우더라도 진심으로 지금의 삶이, 내 모습이 만족스럽고 자랑스럽지 않으면 가지기 어려운 것이다. p90-91.

 

 

원론적이지만 무척 옳은 말이다. 내가 내 마음을 단단하게 하는 데 얕은 꼼수는 통하지 않는다. 튼튼한 자존감은 갑자기 억지로 만들어낼 수 없다. 내 삶이 내 마음에 들어야 정말 나를 사랑할 수 있다. 싫은 일은 되도록 피하고 사소한 일이라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조금씩 해나가는 경험이 중요하다고 글쓴이는 말한다. 작은 벽돌을 쌓아올리다 보면 큰 집을 지을 수 있다. 글쓴이는 무척 소박하면서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것들을 알려준다.

 

매 순간 진실로 살아 있는 삶을 살자. 이렇게 살기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하기 싫은 일, 자신의 꿈이나 가치관에 위배되는 일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가 생각하는 나와 맞는 길을 걷는 경험은 매우 소중하다. 하루하루 조금씩이라도 . 행복하다하고 느낄 수 있는 일을 경험하는 것도 중요하다. 작더라도 스스로 뿌듯하다거나 자랑스럽게 느낄 수 있는 일들을 하는 것도 중요하다. p92-93.

 

나 자신이 가장 크게 자존감을 걸고 있는 부분은 무엇인지 생각해보자. 만약 자존감 지지대가 스쳐가는 바람에 쉽게 흔들리거나 극단적으로 어느 하나에 집중되어 있다면 그건 좀 위험하다. 자존감을 (평가에 취약한) 외적인 무엇보다 나의 내적 가치에 더 많이 걸어두는 것이 좋다. 당신의 중요한 가치, 또는 당신이 좋아하는 당신만의 특징에 자존감을 걸어두라는 얘기다. ‘책을 좋아하는 내가 좋아’, ‘사과를 잘 깎는 내가 좋아’, ‘혼자서도 잘 노는 내가 좋아’, ‘미식가인 내가 좋아등등, 누가 뭐라고 하든 나 스스로 좋다고 할 수 있는 그런 특성들을 자잘하게 개발해두는 것이다. p76-79.

 

 

마음이 건강하지 않은 사람은 사람들과 관계를 건강하게 맺기 힘들다. 마음은 생각날 때마다 자기감정을 잘 추스르고 챙기는 과정 속에 건강해진다. 감정이 끓어오를 때 그 감정에서 한 발짝 떨어져서 살펴보고, 마음을 쉴 수 있게 즐거운 일을 찾고, 내게 안 좋은 영향을 주는 일들은 굳이 부딪치지 말고 피하면서.

 

감정이 발생하기 전에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 사람들(감정과 관련된 사건을 재평가해 본 사람들), 즉 성급히 부정적 감정으로 빠져들기 전에 잠깐하고 외쳐본 사람들은 그렇지 않은 사람들에 비해 훨씬 수월하게 감정을 잘 조절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세상 모든 것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불평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생각해보자. 그리고 그런 생각이 들 때 잠깐!’하고 외쳐보면서 감정을 조금씩 조절해보자. p142-143.

 

한두 시간 짬을 내어 정말 확실하게 재충전을 해주는 게 좋다.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며 쉬는 것도 좋지만 잠깐 동안 적극적으로 즐거움을 느껴주는 것도 좋다. 특히 힘들 때 즐거움을 느껴주면 육체적으로 푹 쉬는 것 못지않게 큰 치료 효과가 나타난다. 스트레스의 부정적인 효과가 사라지고 떨어졌던 수행이 다시 회복되기도 한다. 바버라 프레드릭슨 등의 학자들은 스트레스 지우개라고 명명하기도 했다. p152-153.

 

스트레스 지우개. 멋진 말이다. 읽다가 나의 스트레스 지우개는 뭔지 생각해봤다. 그리고는 조이스틱을 하나 질렀다. 앞으로는 하루를 힘들게 보내고 집에서 쉴 때 스트리트파이터라도 한 판씩 하려고 한다. 쓸데없어 보이지만 뭐 어때? 당장은 시간낭비 같아도 잠깐 이렇게 쉬어갈수록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다는데.

 

 

일상적인 스트레스는 별 일 아닌 듯 무시해도 될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오히려 큰 스트레스보다 이런 자잘한 것들이 사람들의 행복과 건강을 크게 해칠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거기에서 의미나 성장의 기회를 발견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이런 일을 겪지 않는 게 좋다. 편하게 살고 싶다고 하면 게으르다고 보는 시선들도 있지만 가급적이면 편하게 살자. 이런 작은 스트레스들의 해로움을 알고 나면 실은 편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우리의 몸과 마음에 가장 직접적으로 할 수 있는 관리이자 투자 중 하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p184-185.

 

이 책에서 가장 마음에 드는 구절이다. 보통 삶의 조언 같은 걸 건넨다는 책에는 꼭 꼰대 같은 말이 섞여 있게 마련이다. 아파야 청춘이라느니, 어려움을 이겨내면서 성장한다느니 같은. 그게 다 누구를 위한 말인가? 적어도 정말 아파하고 힘들어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아닌 것 같다. 아픔을 위로해주는 말인가, 아니면 더 많이 부려먹을 수 있는 사람으로 만들려고 하는 말인가?

 

그런데 이 얼마나 반짝반짝 빛나는 말인가. 고통을 찾아서 겪을 필요가 없다니. 가급적이면 편하게 살자니. 그게 내게 가장 좋은 투자라니. 저 구절을 읽고서 이 책 사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글쓴이부터 흔해빠진 꼰대와 다른, 무척 괜찮은 사람이 아니었던가.

 

사람 마음을 가장 힘들게 하는 건 인간관계다. 사람은 사람 눈치를 안 볼 수가 없고 사람에게 거절당하는 것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중요한 건 관계 자체보다 그걸 받아들이는 내 마음, 내 태도라고 한다. 상황은 내가 보는 것처럼 나쁘지 않을 수도 있다. 반대로 말하면 내가 비관적으로 상황을 보고 있기 때문에 관계가 실제로 더 틀어질 수도 있다는 것.

 

거절당하는 것에 대한 지나친두려움이 오히려 소외를 불러올 수 있다. 사회적 상황에서 불안을 느끼는 것은 아주 미묘해도 표시가 나게 마련이고(불안해하는 눈빛, 굳어 있는 표정, 움츠러든 몸 등) 금세 주변 사람들에게도 잘은 모르겠지만 저 사람이 나를 불편해하는군같은 메시지를 준다. 두렵고 미숙할 뿐이지만 상대방의 머릿속에서는 나를 불편해하거나 탐탁지 않아한다같은 오해를 불러일으키기 쉽다. p215-217.

 

어떻게 보면 무척 당연한 말이다. 하지만 잘 까먹는 말이기도 하다. 이를 극복하는 방법도 참 뻔하다. 사람을 좀 더 편하게 대하라는 것. 그러나 무척 지키기 어려운 일이기도 하다. 그래서 자꾸 떠올려보고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그럼 어떻게 생각해보면 좋을까? 글쓴이는 반대로 내가 다른 사람을 좋아하는 이유를 떠올려보면 쉽게 답이 나온다고 말한다.

 

완벽하고 뛰어난 아이라서 내가 내 친구를 좋아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함께 이야기하는 것이 좋고 취향이 비슷하며 엉뚱해서 등등, 사소하고 다양한 이유 때문에 그 친구를 좋아하는 것이다. 다른 사람들 또한 나를 다양한 이유 때문에 좋아할 수 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좀 더 편안하게 사람을 대하면 거절에 대한 두려움은 사그라질 것이다. p220-221.

 

 

글쓴이는 전에 냈던 책에서 사회심리학 내용을 알기 쉽게 소개했다. 이번 책은 그보다는 내 마음을 잘 챙길 수 있는 방법을 심리학으로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이 책 하나 읽었다고 바로 예전보다 더 슬기롭게 살아갈 수 있으리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하지만 꾸준히 실천해보면 도움이 되는 것들을 여럿 알아갈 수 있었다. 처음에는 뭐 하나 제대로 되는 게 없을 것 같기도 하다.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으니까. 그럴 때마다 이 구절도 떠올려봐야겠다.

 

실패는 유리가 힘을 받아 깨지는 과정과 비슷한 것일까, 아니면 철이 두드림으로 단련되는 것과 비슷한 것일까? p265.

 

 

오늘은 그럼 뭐부터 해볼까? ! 일단 조이스틱부터 .


댓글(4)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cyrus 2017-05-29 06: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스트레스 지우개‘는 책입니다. 가끔 마음이 울적해지면 중고책 서점에 가서 책을 많이 고릅니다. ^^

돌아온탕아 2017-05-29 20:57   좋아요 0 | URL
정말 부러운 지우개입니다. 그게 최고지요! 저도 책으로 지우개를 삼아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cyrus 2017-05-29 21:21   좋아요 0 | URL
부럽긴요. 지갑 안에 있는 돈도 순식간에 지워져요. 절제가 제일 중요해요. ㅎㅎㅎ

돌아온탕아 2017-05-29 22:07   좋아요 0 | URL
지름중에 제일 무서운게 책 지름이지요 ㅎㅎ
 
주기율표로 세상을 읽다 - 우주, 지구, 인체를 이해하는 또 하나의 방법
요시다 다카요시 지음, 박현미 옮김 / 해나무 / 2017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잠시 눈을 감아본다. 뼈와 근육, 피와 살덩어리로만 봤던 몸을 다르게 상상해본다. 좀 더 작은 세계로 들어가 본다. 나는 닫혀있지 않다. 내 몸은 안으로도 열려있고 바깥으로도 열려있다. 눈으로 볼 수 없는 많은 물질이 안팎으로 쉼 없이 드나든다. 내가 먹고 싸고 들이마시고 내뱉는 모든 과정은 사실 화학 반응이다. 내게 필요한 원소를 받아들이고 내게서 필요 없어진 원소를 내보내는 과정이다. 원소들이 내 안에서 춤춘다. 셀 수 없이 많은 존재들이 태어나고 사라진다. 또한 나는 수없이 많은 존재들이 나타났다 사라지는 우주의 일부이고, 세계와 하나로 이어진다.

 

조금 복잡한 수식만 보면 울렁거리는 문과 쟁이인 내가 이런 상상을 해볼 수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참 좋은 책을 만나 좋은 시간을 보낸 것 같아 뿌듯하다. 이 책으로 화학을 아주 가볍게 슬쩍 들여다볼 수 있었다. 처음 들어보는 개념들이 많이 나온다. 하지만 꽤 쉽게 알아듣게끔 애썼다. 구어체에 존댓말을 쓰니 수업 시간에 선생님이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것 같다.

 

-----

 

학교 과학 시간에 주기율표와 이렇게 만났다. 그래서일까? 그다지 친해지지는 않았다. 주기율표로 세상을 읽다에서는 주기율표를 다르게 바라보라고 한다. 원소번호 순서대로 보지 말고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있는 그물망으로 보라고 한다. 세로줄은 ’, 가로줄은 주기. 세로줄 또는 가로줄은 비슷한 성질을 갖는 원소들의 모임이다.

 

세로줄로 닮은 원소들의 특징 가운데 재미있는 게 있다. 어떤 원소가 몸에 좋다면 같은 세로줄에 몸에 해로운 원소도 함께 있다는 것. 그런데 몸은 같은 줄에 있는 원소를 아예 같은 원소로 착각한다. 그래서 때때로 무척 해로운 원소를 몸에 좋은 원소와 구별하지 못하고 그냥 받아들인다는 것.

 

칼륨과 같은 줄의 세슘, 칼슘과 같은 줄의 스트론튬은 원전사고 때 나오는 방사능 물질로 유명하다. 몸은 세슘을 칼슘으로, 스트론튬을 칼슘으로 착각해서 적극적으로 흡수한다. 방사능 피폭은 이렇게 이루어진다. 피폭을 조금이라도 줄이려면 칼륨과 칼슘을 많이 먹어두라는 이야기가 있다. 몸에 그것들이 충분하면 반대로 세슘과 스트론튬 흡수를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사람 몸에는 수소, 산소, 탄소, 질소가 많다. 그 밖에도 주기율표 아래쪽의 무거운 원소는 거의 없고 주기율표 위쪽 가벼운 원소가 많다. 무거운 원소보다 가벼운 원소가 우주에 많기 때문이다. 사람 몸은 우주를 정확히 닮았다. 우주에 많은 것은 몸에도 많다. 그러다보니 가벼운 원소는 사람 몸에 필요할 확률이 높고, 무거운 원소는 사람 몸에 해로울 확률이 높다고 한다. 주기율표는 이런 식으로 우주 질서와 사람 몸의 신비를 알기 쉽게 보여주는 친절한 그림지도였다. 무턱대도 순서대로 외우려고만 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보면 인체는 수소, 산소, 탄소, 질소로 이루어진 정밀장치인 셈입니다. p85.

 

 

나와 우주가 하나이고 이어져있다는 식의 세계관을 좋아한다. 동양철학에서 많이 봤다. 자연에는 기운이 흐르고, 나는 혼자 존재하지 않고 기운을 타고서 외부 세계와 소통한다는. 좋은 말이긴 하지만 왠지 막연하고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데 사람 몸을 화학 반응이 일어나는 용광로로 바라보니 눈앞을 가리던 안개가 걷히는 듯하다. 나는 원소들의 집합이고 화학 반응으로 에너지를 내는 공장이기도 하다. 역시 좋은 말은 어디로든 다 통하게 되어있다.

 

 

승려로부터 만다라란 조화를 이룬 우주의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설명을 들었습니다. 만다라에서는 불상의 배치가 가로와 세로 양 방향으로 깔끔하게 균형이 잡혀있습니다. 그 세계관이 주기율표와 절묘하게 겹쳐진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어쩌면 우주의 진리를 탐구해 나가다보면 최종적으로는 이런 모습이 되는 것이 필연일지도 모르겠습니다. p209.

 

 

근본 원리까지 배울 수 있는 책은 아니다. 어려워질 수 있는 내용은 원리를 언급하지 않고 현상과 사례만 말하고 넘어가기도 한다. 수식을 빼고 복잡한 내용도 걸러내다 보니 어쩔 수 없었나보다. 하지만 잘 외워서 시험 성적 잘 받을 목적이 아니라면, 과학으로 뭔가를 느껴보고 싶은 마음이라면 충분한 책이다. 나처럼 과학에 관심이 있었지만 왠지 무서워서 담쌓았던 과거를 아쉬워하는 어른이나 딱딱한 교과서에 지친 학생들에게도 잘 어울린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