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인간
성석제 지음 / 창비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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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명인간

  성석제 작가가 신간을 냈다. 한 달도 안돼서 사서 봤다. 대학 때 제일 좋아했던 작가가 성석제였는데 반한 작품은 ‘자전거 도둑’이라는 책이었다.

읽기 전에 투명인간은 소외당한 현대인쯤으로 가볍게 여겼다. 프롤로그를 읽고 난 후에는 투명인간이 ‘현실에 지친 가장’ 인가보다 했다. 책에 대한 몰입도를 최상으로 끌어올렸을 때 바통을 받듯 이어지는 서술자의 변화 중에 단 한번도 김만수의 시각이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김만수의 순수가 ‘투명’인가보다 했다. 그러나 모두 읽고 나니 투명인간이 무엇인지 잘 모르겠다. 한 가지 분명한 건 투명인간은 한 곳에 머무르지 않고, 한 사람도 아니며, 모습을 위장하거나 감춰서 이익을 취하는 건 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누가 투명인간인가?

투명인간을 이해하기 앞서 김만수가 왜 투명인간인지를 알아야했다.

자기 말대로 자기는 무식하고 배운게 없어서 소중한 가족들이 성공하는 것을 보기 위해 그 밑거름이 되고자 했던건지 지독하게 자기를 없애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간 사람. 단 한 번도 자기를 위해 살지 못했고, 혈육조차 남기지 못한 사람. 가족들이 모두 짝을 찾은 후에 친구가 버린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야 했던 사람. 그런 아내를 위해서 손이 닳아 없어지게 빌었던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김만수다. 유난히 자격지심이 심한 아버지 밑에서, 외곬수 할아버지 밑에서도 무한 긍정으로 커 온 그의 마지막이 슬프고 눈부시다. 만수가 죽지 않을까 마음 졸이는 독자에게 보란 듯이 투명한 빛으로 사라져버린 사람이 바로 김만수이다. 그의 희생, 그의 사랑, 그의 인내 그리고 아픔. 그것이 투명인간이고 그런 투명인간은 만수네 가족 모두이다.

다름을 인정하면 행복하다

내가 투명인간을 읽으면서 깨달은 한 가지는 ‘다름을 인정하면 행복하다.’는 것이었다.

소설의 초입은 만수의 탄생으로부터 시작한다. 만수를 낳았던 어머니는 오해에서 비롯된 시어머니의 모진소리를 마음에 담고 살아간다. 만수의 어머니는 외아들을 낳은 할머니와는 반대로 아들, 딸을 여섯이나 낳았다. 만수의 어머니는 평생 시어머니를 미워하면서 살았을 것이다. 둘 사이가 틀어지지 않았다면 만수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관계 개선에 도움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고부갈등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는 부자갈등이었다. 지나치게 똑똑한 할아버지와 닮지 않은 만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의 성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비난하기 바빠서 자기 인성을 망친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든다. 만수의 아버지는 자기 아버지가 죽고 나서야 ‘아버지와 나는 평생 물과 기름처럼 겉도는 것을 몰랐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고 했다. 여기서 그가 자기 아버지를 용서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상당히 뒷부분이었지만 그제야 깨달았다. 다름을 인정할 때 우리는 행복해지겠구나. 살면서 마찰은 가족과 생기는 것이 일반이다. 그 때 가족 구성원이 나와 꼭 같아야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다를 수도 있다는 것을 이해하고 존중한다면 가정불화는 생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해보았다.

만수아버지가 처음으로 가슴을 울렸다. 그가 한 말이 인상깊어서 적어본다.

‘이제 없는 나의 아버지, 이제 없는 나의 아들...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 ‘아버지와 나와는 공통점이 있었다. 우리는 모두 맏이였다. 그리고 맏이를 잃었다. 아버지와 나는 같았다.’

결국 그 아버지의 그 아들이 아닌가.

에피소드의 바통터치

소설은 엄청나게 많은 서술자를 통해 김만수라는 인물을 소개한다. 서술자들의 바통터치가 만수를 비판하면서도 칭찬하고 비난하면서도 감싼다. 그들이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만수의 모습에서 50년대 시골이 있고, 60년대 학교가 있고, 70년대 문화가 있고, 80년대 사회가 있다. 90년대 고통이 있고, 현대의 상실과 아픔이 있다. 처음에 서술자를 일일이 적었다. 늘어놓고 일일이 분석하고 설명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중간부분에서 더 이상 서술자를 적지 않았다. 서술자를 적는 시간을 줄이고 뒤를 빨리 읽고 싶었다. 만수의 가족이 금희와 옥희만 빼고 죽거나 사라졌다. 슬펐다. 읽는 내내 슬펐다. 하지만 작가는 그런 슬픔을 독자가 느껴서 눈물샘을 방출하기 전에 얼른 잘라버린다. 바로 다른 서술자가 되어 주의가 환기됨으로 슬픔에 빠질 시간이 없게 만들었다. 그것이 작가의 테크닉이고 그래서 글이 빠르고 대신 엄청나게 많은 사건과 배경과 지식이 홍수처럼 밀려들어왔다. 고도의 집중력을 발휘시키는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실제로 독자는 귀가 터질 것 같은 집중력을 발휘하였다.

아주 세밀한 감정부터 지나가고 싶은 불편한 감정까지 건드리는 글

만수의 어린시절은 웃프다(웃기면서 슬픈). 요즘 학생들이 쓴다는 외계어이지만 이 말이 꼭 와 닿는다. 만수의 어린시절 에피소드는 몇 번씩 툭툭 웃음을 던져주었다. 똥장군 부품을 잘라 형이 만들어준 칼 때문에 아버지한테 흠씬 두들겨 맞는 장면을 보면서 큰 소리로 웃었던 기억이 난다. 너무 착해서 매번 당하는 만수의 어린시절은 가슴이 찡하면서도 우습다. 우스운 장면들은 여러 개 등장하지만 웃고 있으면서도 슬픈 이유는 이미 어릴 때부터 가족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 어린 만수의 모습이 상상이 돼서 일 것이다. 백수가 아버지한테 혼날까봐 동생에게 죄를 뒤집어 씌우는 장면에서 약한 자의 설움을 보았고, 석수가 만수에게 잘못을 뒤집어 씌운 것을 할머니가 나서서 손녀에게 전가시키는 것을 보고 남존여비의 비애를 느꼈다. 그 때 만수의 기분은 또 어땠을까.

결국 작가는 불편한 감정을 건드리고 말았다. 백수가 죽었을 때 울지 않았다. 고엽제를 모기약쯤으로 생각하고 일부러 맞으려고 뛰어다녔던 희고 어린 백수가 생각났을 때도 울지 않았고 명희가 연탄가스를 마시고 산소통이 하나밖에 없어서 못 들어갔을 때 만수가 그 앞에 엎드려 ‘누나 미안합니다.’ 하고 울 때 코 끝은 찡했지만 울지 않았다.(이 글을 쓰는데 상상이 돼서 다시 눈이 뜨겁지만)

그러다가 만수의 엄마가 막내 딸 옥희를 결혼시키려고 가는 장면에서 나는 울고 말았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플 막내딸을 엄한 놈에게 정말로 억울하게 뺏겨야 하는 모습에서, 축하받을 자리지만 혼자 쓸쓸히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 발걸음을 옮기는 그 엄마의 모습에서 깊은 슬픔을 느꼈다. 장모의 슬픔은 안중에도 없이 장모를 들쳐 업고 빙빙 도는 모습에서 만수 어머니는 상처에서 나는 진물처럼 눈물이 흐르고 또 흐른다고 했다. 얼마나 쓰린 눈물일까 짐작도 어렵다.

또, 글도 못 배운 채 평생을 자식 여섯을 키우고 다혈질 남편 수발에 시부모까지 모셨는데 큰 아들은 죽고 막내아들은 없어졌으며 흔적을 모르는 그 아들의 아들을 맏손자로 인정해야하는 60대 여자의 삶이 그렇게도 슬플 수가 없었다. 화장실거울에 붙은 큰 거울을 보며 내가 이렇게 늙었나 생각할 때 화장실이 수세식으로 바뀌지 않았으면 몰랐을 늙음이었다. 작가는 문명의 발전이 주는 감정의 피해까지 다루는 섬세한 필력을 자랑하고 있었다.

그래도 태석이가 죽을 때만큼은 아니다. 안경을 벗고 눈물을 손등으로 훔치고도 모자라 손바닥으로 다시 닦고 누르고도 흐를만큼 울었다. 감정의 과잉이라고 진정하고 책을 들었다가 몇 줄 못 읽고 다시 덮었다. 엉엉은 아니었지만 어깨가 들썩였고, 숨이 날았다. 정말 슬펐다. 학교 폭력에 시달리던 아이가 홀로 선택한 죽음이 생물학적 제 아비를 닮았다. 그래서 슬펐고, 아이가 느꼈을 지독한 외로움이 슬펐고, 짧은 평생 버림받았다는 생각으로 좌절했을 모습에 슬펐고, 죽는 순간에서야 계모의 사랑을 깨달았던 그 마음이 슬펐다. 그 때야 비로소 나는 투명인간이란 ‘죽어서 곁에 머무르는 것인가보다.’ 생각했다. 그것이 감정으로든 육신으로든 살았든 죽었든 사랑하는 사람에게 온전히 합쳐지는 것이 투명의 의미인가 생각했다. 어쨌든 슬픈 사생아 태석의 죽음이 그를 위해 헌신했던 어머니를 살렸다. 독자라면 마땅히 슬퍼야하고 어른이라면 마땅하게 가슴아파야한다고 단언했다. 지금 우리 사회의 청소년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슬픔이 불편했고, 마주해야하는 현실이 아팠다. 독자인 나는 그랬다.

내가 몰랐던 사회, 문화, 역사 그리고 사람

1980년대에 태어나 90년대에 학교를 다닌 나에게 소설에 나오는 온갖 시대적 배경들은 그저 역사일 뿐이다. 교과서에서 배웠고, 소설에서 배웠다. 아픈 역사라는 것은 알지만 그것이 가슴 아프다고 느낀 것은 오래되지 않았다. 청소하려고 하는데 누가 청소하라고 하면 하기 싫듯이 슬픈 거 아는데 누가 슬프다고 말하면 슬프지 않다. 하지만 소설은 슬프지도 않게 담담하게 써버리고 슬플 겨를 없이 다른 곳으로 쉬익 가버려서 오히려 더 슬펐다.

전쟁, 농촌문제, 고엽제 피해, 군사 정권, 이촌향도, 실향민, 연탄가스 중독, 사회 운동, 민주주의, 노동 투쟁, 노사문제, 청소년 문제, 재혼 가정 문제, 자살까지 일·강 이후 대한민국사를 총망라 한 소설이다. 그 속에서 새어 나오는 엄청난 양의 고통이 무심하지만 철렁하게 독자에게 다가가도록 장치한 영리한 소설이다.

특히, 나는 고엽제라는 것을 잘 몰랐다. 예전에 신문에서 ‘고엽제 피해자 보상 방안’ 에 대한 기사를 본 적 있다. 나는 고엽제가 베트남 전쟁 당시 사용된 독극물이라는 것과 그것에 대한 피해자가 많다는 사실은 들었지만 어떤 질병인지 그게 뭐 어떻다는 건지 잘 몰랐다. 특히 그것이 미국의 잔인성을 시사하는 것이며 일본이 태평양전쟁 때 우리 민족을 총알받이로 내세운 것과 뭐가 다른지 고민하다가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고 말았다. 미국이 밉지만 조국이 더 미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우스운 것은 백수가 아주 해맑게 미국을 칭송하고 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비난하고 있는데 말이다. 또 고엽제 피해자 가족 준비모임의 대표인 것으로 보이는 사람이 서술하는 부분은 정말 인상적이다. 만수랑 전혀 상관없는 서술자가 바로 이 사람이다. 백수는 죽고 없으니까 그가 어떻게 죽게 되었는지를 자세하게 나타내주는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객관적인 사실을 알기 쉽게 설명하되 전체의 구성에서 벗어나지 않게 하려고 서술자를 따로 배치했다.

사실 작가가 고문까지 다룰 줄은 몰랐다. 악랄했던 석수가 벌을 받고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석수의 잔인함이 아들 태석까지 죽게 했다. 독자는 계속 석수를 힐난했을 것이다. 그런데 석수는 부활한다. 나는 프롤로그의 자전거 탄 남자가 석수라고 생각한다. 석수는 스무살이 넘어서야 만수를 형이라고 부르는데 마지막에 형을 불렀기 때문이다. 만수는 왜 마지막에 거기 있었을까 만수는 정말 죽었을까 아무런 해결을 주지 않았는데 처음과 끝에 나오는 ‘듣는 자’는 석수 일 것 같아서 그 흔적을 찾으려고 앞과 뒤를 계속 보았다. 결정적인 증거는 ‘형, 만수 형’ 밖에 없지만 사라진 석수, 자기 자신을 위해서만 살겠다던 석수가 만수를 만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니 하겠다. 그러고 싶다. 이제 석수가 투명인간이니까. 남은 가족 누나들, 그리고 엄마에게 집안에 마지막 남은 남자로써 끝까지 지켜주는 투명인간이면 좋겠다고 말이다. 생각해보니 만수네 집에 대 이을 아들이 없다. 투명하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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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베르나르 베르베르 지음, 이세욱 옮김, 뫼비우스 그림 / 열린책들 / 200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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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워낙 유명한 작가인데 그래서인지 자주 접하지 않았던 베르베르다. 우연히 지인이 선물한 <나무> 라는 책을 몇 년이 지난 이제서야 빼들었다. 한마디로 이야기하자면 완전히 반해버렸다. 미래 지향적이면서 예언자적인 그의 말투는 현실 주의자의 면모를 갖춘 나에게 아연실색을 가져와야 맞는데 이상하게 빨려들었다. 그것이 예측을 통한 말하기가 아니라 마치 지금 당장 일어나는 일을 옮겨 적은 듯 뻔뻔하게 적어놨기 때문일까. 우리도 모르게 가지고 있는 문제 의식들을 비교적 꼼꼼한 장치로 끄집어 냈기 때문일까. 근 십년전에 적은 그의 글들은 마치 십년 후에 우리 생활에 진짜 일어날 것처럼 불안한 마음을 동반한다. 과학의 지나친 발달. 인간 생명의 문제까지도 개입하는 전능함들이 두렵기까지 하다. 그런면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작품은 <내겐 너무 좋은 세상> 과 <투명피부> 였다.

  <내겐 너무 좋은 세상> 에서는 집안에 있는 모든 가전들이 주인인 사람을 위해 헌신한다. 그런데 그들의 헌신은 플러그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시스템에서부터 오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감정을 드러내고 인간의 감정을 인지하며, 말은 기본이고 대화를 유도하기도 한다. 사실 처음에는 정말 이런 세상이 있다면 좋겠다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미 이런 세상에 굉장히 근접해 있다. 집 밖에서도 목소리로 집안의 전기를 차단하고, 방범을 가동하고, 애완동물의 밥을 주는 최첨단 IOT 세상에 살고 있다. 그런데 주인공은 이런 환경에 질릴대로 질렸다. 조용히 일어나 아침을 먹고 싶은데 알람시계부터 토스터기까지 계속해서 말을 시키고 각종 가전들은 자기네들끼리 들리도록 대화를 한다. 조용하게 먹고 싶은 주인공의 기분을 스스로 헤아린답시고 음악을 멋대로 바꾸고 티비를 켜기도 한다.

 침묵을 원했던 주인공은 너무 화가 났다. 그러다가 강도가 든다. 아주 아름다운 여자 강도는 물건을 훔치는 것으로 모자라 주인공을 희롱한다. 하지만 주인공은 그녀가 가지고 나간 가전들 때문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진다. 그리고 얼마 후 그녀를 만나게 되는데 그녀와의 키스가 떠올라 경찰에 신고하기보다는 데이트를 꿈꾼다. 그러나 그녀는 아주 차갑게 남자를 벽에 밀치고 그의 가슴을 연 후 인공 심장을 꺼냈다가 도로 넣는다. 그리고 말한다. 이미 너도 기계이지 않느냐고.

  이런 충격적인 줄거리를 접하고도 흥미를 느꼈던 것은 인간이 기계로 변하고 있다는 것에 암묵적인 동의를 하면서 어떻게 이런 창의적 생각이 가능할까 하는 작가에 대한 존경심이었다. 스스로의 마음에 스스로 흥미를 느끼는 꼴이다. 실제로 사람은 이제 의학이라는 이름 아래 기계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살아가기 어렵다. 지금이야 신체 건강한 30대지만 시간이 지나면 나도 기계의 힘을 빌어 삶을 연명할 지도 모를 일이다. 실제로 인공 심장을 달거나 인공적 호흡기로 생명을 연명하는 환자는 종합병원만 가도 만날 수 있다. 베르베르는 인간이 기계화가 되는 것을 병원으로만 국한하지 않았고, 의료로만 속박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창의적이고 글에 힘이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첫 글부터 이렇게 반했으니 다소 두께감 있는 이 책이 쉽게 넘어간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만약 이 책의 단편 소설들을 영상화 한다면 가장 어렵고도 충격적인 영상은 바로 <투명피부> 일 것이다. 한 과학자가 벼룩부터 시작해서 쥐, 닭, 개 등 동물의 피부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을 연구한다. 급기야 자기 몸에 실험을 하였고 온 몸의 장기와 핏줄이 투명하게 드러나는 피부를 갖고 연구실에서 도망치듯이 나와 서커스단원이 되는 매우 황당무계한 소설이다. 이미 복제의 문제가 인간 윤리와 과학의 발달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는 시대이다. 베르베르는 이미 10년전에 이 소설을 만들었다. 어쩌면 베르베르가 예측한 잔혹한 과학의 발달은 우리가 생존하고 있을 이 세대 속에 일어날지도 모른다. 신비롭다기보단 공포스러운 세상이다. 이런 과학의 부작용들을 재치있고 풍자스럽게 적어 놓은 글들이 단편 소설집 <나무>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나무’ 라는 단편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나무’ 라는 제목을 통해 무엇을 말하고자 했던 것일까. 무엇보다 분명한 건 계속해서 발달만 하다가는 결국 우리가 만나고 싶지 않은 잔혹한 세계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인간은 조금 천천히 걸어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 놀랍고도 진지한 공상소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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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 조홍섭의 생명·환경·공존에 대한 생각
조홍섭 지음 / 김영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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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는 금(禁), 이해는 금(金)

 

  100조마리의 미생물을 온 몸에 얹고 다니느라 무려 2kg이 더 나가서 억울하면서도 (p106) 동료 인간이 식량부족으로 죽어 가는 데도 수많은 돈을 들여 만들어지고 있다던 애완사료(p105) 구매자였던 저는 이 책을 우연히, 정말 우연히 읽게 되었습니다. 

  오래전 아주 갑자기 생태인문학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생존을 위한 ‘진화’에 관한 것이었는데 꽤 흥미있었어요. 찰스 다윈의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은 아니지만 생태계 자체가 변화하고 있다는 것은 인정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고 일선을 버리고 생태학에 뛰어들 순 없는 노릇이고 하여 틈나는대로 생태에 관련된 책을 읽었죠. 그 곳에서 문학적 아이디어를 찾아내고 논술적 감각을 익히고 싶었어요. 생태는 여러 가지 가설을 내세우지만 일단 증명할만한 것이 확보되면 대단히 논술적이거든요.

인간은 끊임없이 동식물을 연구합니다. 때로는 식량 때문이기도 하고 의학의 발전 때문이기도 지질학 때문이기도 합니다. 게다가 동식물은 지구의 역사입니다. 수많은 멸종 생물과 현존생물들은 연구를 거듭한 결과 인간에게 유용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것이 인류에게는 과거의 반성이거나 미래에 대한 대비도 됩니다. 그렇지만 다큐는 지루하고 길고 정적입니다. 그래서 잘 안봐요. 그런데 이 책은 간결하면서도 흥미롭고 지루하지 않고 잘난 척하지 않습니다. 있는 그대로 던지고 핵심만 뽑아줘요. 기자 출신답게 필자의 생각도 잊지 않고요. 나름 동물애호가(몇 년 안됐지만)지만 곁에 있는 동물 외엔 살펴볼 일이 드문데요 이 책에서는 신비하기도 하고 신기한 동물들의 이야기를 들려주니 재미도 있어요.

새는 멍청하다. 고양이는 개와 원수다. 늑대는 사납다. 양서류는 곤충을 먹는다. 굉장히 기본적이어서 지식이라고 할 순 없지만 그렇다고 의심한 적도 없는 설(說)까지 확 뒤집어 놔요. 그러니 반전매력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저 주장이나 생각에 미치지 않고 구체적 자료를 제시해주니 신뢰도가 높았고 정확한 수치와 환산이 독자의 이해를 돕더군요.

  개인적으로 저는 유아적 발상을 해보았습니다. 저의 비만 세균을 말라깽이 누군가에게 옮겨주고 싶었고요.(p108), 여름에 캠핑 갈 땐 딸내미의 얼굴에 검은 얼룩무늬를 그려 모기를 피하도록 해주고 싶었답니다.(p90) 아들과 아들보다 눈이 더 큰 비슷한 체구의 친구를 뛰게 해서 누가 더 잘 뛰나 실험해보고도 싶었고요 (p93) 돌고래 자연치유비법 개발이 의학적으로 성공한다면(p72) 말썽꾸러기 셋째라도 낳을 자신이 있습니다만!!!

그리고 한 여름에 천연 에어컨을 달고 다니는 쇠똥구리(p41)를 보러 시골마을도 찾아가 봐야 하고 수족관에 가면 전망 좋은 방에 앉아 유희를 즐기고 있을 대왕문어(p152)에게 인사하고 그의 놀라운 두뇌에 대해 브리핑 해 줄 생각입니다. 좋은 엄마가 되기에도 이 책은 괜찮은 책이네요.

책을 읽으면서 깨달았던 점은 많지만 기억에 남는 말을 끝으로 마무리할게요. 그것은 ‘하등과 고등은 인간의 잣대일 뿐이다.’ 라는 말과 ‘ 동물원에서 가장 인기 있는 코끼리의 눈망울에는 무리와 헤어진 슬픔이 있다.’ 는 말이었습니다. 인간의 시각은 우주에서 제일 좁고요. 우리들에게는 사랑이고 보호고 관심인 것이 받는 동물에게는 불편이고 구속이고 학대일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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