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에 살면 유명인사의 강연을 가끔 듣는다.
내가 시간이 없어서 그렇지 들을수록 가슴을 울리는 강연들이 많이 있다.
유명하고 저명한 사람들일수록 사람이 몰리는 것은 당연하지만 반드시 그래서 가슴을 울리는 것은 아니다.
2015.11.9.월, 정호승 시인을 만났다.
단재문화예술재단에서 주최하고 충북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후원하는 맛있는 인문학 두번째 강연이었다.
첫번째 강연인 강신주편도 들어보고 싶었는데 수업때문에 못가고 (ㅠㅠ시험기간)
두번째 강연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리라 마음 먹었는데 마침 급한 녀석들 시험이 딱 끝나주었다.
7시부터 9시 15분까지 쉼없이 진행되었던 강연이었다.
정시인님이 중간에 시노래를 틀어줄 때 목을 축이는 시간 말고는 한 숨도 쉬지 않고 흘러내려간 시간. 그 시간에 나는 시를 읽고 시를 느끼고 시를 안고 시를 썼다.
시라는 것이 얼마나 사람을 들뜨게 하는가. 문학소녀의 시절을 지나 문창과를 나왔지만 시간이 너울너울 흐르는 동안 남의 글을 더 많이 뜯어보느라 내 글은 만나보지 못했던 오래된 나의 감성을 깨운 것은 쪼개고 분석해 가르쳐야 하는 교과서나 문제집 속 시가 아니라 오늘 내가 직접 만난 시였다.
오늘 소개 된 시는 <여행>, <풍경소리>, <내가 사랑하는 사람>, <산산조각>, <수선화에게> 였다. 오랫동안 내 책장에서 잠자던 시집을 꺼내들고 가서 앉았는데 옆 사람도 앞사람도 빳빳한 신간을 사 들고 왔길래 조금은 부끄러워 책을 수첩 밑으로 숨겼는데 시인이 낭송하는 그 시들이 내 책에 두 편이나 실려 있는 것이 아닌가?
(솔직히 옆에 아주머니 내 책 힐끗 보고 자기 책 목차에서 찾다가 한 숨쉬고 덮는 것 보았다. 괜히 흐뭇한 못된 DNA는 무엇인가.)
외려 설레고 좋아서 쫘악 펼쳐서 줄을 좍좍 그었다. 의미없이 자리를 차지하던 시집이 내게 어느 신간보다 설레이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가장 의미있는 몇 권의 책에 자리하게 되었다. 정호승 시인이 친절하게 내 이름을 적어서 싸인을 해 주었기 때문이다. 거기 모인 300명이상의 사람, 50여명의 싸인 득템자에게 모두 의미없는 책일지라도 나에게 지금 당장은 내꺼중에 최고!
그저 있던 책에 갑자기 생명이 불어 넣어진 것처럼 오늘 흔한 30대 여성의 잠자던 감성에게도 그린라이트가 켜지는 순간이었다. 가끔 심리학 책을 읽다가 가족의 의미에 대해 깨닫는 적이 있는데 오늘은 정시인의 강연을 통해서 사랑에 대해 특히 절대적 사랑에 대해 좀 더 깨닫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사랑이라는 것을 진정한 사랑이라는 것을 아무리 깨닫는다 한들 그것은 단기일 뿐이고 절대적 사랑에 미치지 못한다. 오늘 특이했던 것은 절대자가 주는 사랑이 어미가 자식에게 주는 사랑과 흡사하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어머니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사랑을 받았었나? 또 어미가 된 나는 내 자식에게 그렇게 절대적인 사랑을 주고 있는가. 사랑의 본질은 다섯가지가 있다고 말하는데 나는 진정 그런 사랑을 만들어나가고 있는 것인가. 스스로에게 많은 질문을 던지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린 결론은 관계가 어려울 때는 사랑을 선택하라는 그 말에 대한 무조건적인 동의. 그것이 타인으로부터의 배신이요, 심한 모욕이요, 상처난 자존심이요, 회복할 수 없는 아픔이라도 내가 선택해야 하는 것은 사랑이라는 것. 내가 그 사랑을 선택할 수 있다면 내게도 절대적 사랑이 존재하는 것이고 마치 예수님이 나를 사랑해서 십자가에 못박히셨듯 절대적인 사랑이 내게도 존재한다는 것. 그러기에 모든 상황 속에서 나는 사랑을 선택해야 한다는 것. 다시금 나를 다잡아 줄 수 있는 그런 말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살면서 그렇게만 살기는 어렵겠지. 나는 아직 정신세계가 약하고 의지가 어리고, 고난의 빈도가 적었으니까. 성인도 군자도 못되니까. 그렇지만 살면서 때로 관계가 약해질 때 어려울 때 힘이 들때 슬플때 서운할 때 위로받고 싶을때 이해해야 할 때 보듬어야 할 때 양보해야 할 때 나약해질 때 아플 때 서러울 때 외로울 때 기가 막히고 어이가 없고 화가 나고 숨이 탁 멎을 것 같을 때에도 나의 선택은 사랑이기를 바라면서 나는 그렇게 강연장을 빠져나왔다.
청춘의 젊은 날은 화살과도 같고 나의 30대는 벌써 세 해를 훌쩍 넘겨버리고 있지만 벌써가 아니라 아직도 서른 셋의 가을 밖에 되지 않았다는 것. 벌써부터 사랑을 깨달아 실천하고 있다는 것에 좀 더 희망을 품으면서 어둡기만 한 인생이라도 항아리 속 한 줄기 빛을 받아 다른 친구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던 생쥐를 기억하면서 좀 더 활기차게 살아 갈 수 있는 겨자씨가 될 것 같아서 이 농부는 심히 기분이 상쾌하다.
오늘도 잘했다. 이 발걸음. 쓰담쓰담. 그리고 다시 한 번 다른 곳에서 시인 정호승을 만나보고 싶다. 그의 시를 많이 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