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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들 도키오 ㅣ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89
히가시노 게이고 지음, 문승준 옮김 / 비채 / 2020년 4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을 잇는 또 하나의 히가시노게이고 발(發) 휴먼드라마 [아들 도키오]를 읽었다. 히가시노 게이고하면 살인사건 추리소설만 생각하는 사람들이라면 이 책을 꼭 만나봐야겠다. 아버지를 향한 아들의 끝없는 사랑의 눈빛과 아버지의 실패한 사랑과 오래된 절망으로 인한 후회와 시간의 소중함에 대해서 세밀하게 알아 낼 수 있다.
첫장면은 두 부부가 단장을 끊어내는 슬픔을 드러낸다. 불치의 병으로 죽어가는 아들의 병실 앞에서 부부는 하릴없이 울고 있다. 거의 마지막을 준비하는 와중에 의사의 부름만이 남아있는 상황, 갑자기 남편이 아내에게 말한다. 20년전에 아들이 자기를 찾아왔었노라고. 믿지못하는 아내에게 들려주는 다쿠미의 이야기는 충격적이었다.
다쿠미의 젊은 날은 아주 찌질했다. 여자친구가 간간이 주는 용돈에 의지해서 살아가는 백수로, 어렵게 구한 일자리에서는 화를 참지 못해 박차고 나오기 일쑤다. 이런 찌질한 다쿠미에게 젊은 남자애가 등장, 다쿠미의 신상정보를 줄줄 꿰더니 친척이라고 말한다. 이름은 도키오. 다쿠미가 미래에 낳을 아들이자 오늘 죽어가고 있는 고등학생 남자애.
다쿠미는 어릴 때 부모가 자기를 버렸다는 것을 비관하며 아무렇게나 자신을 방치하고 있었다. 급기야 본인이 입양아임이 밝혀지고 그동안 좋았던 양부모와의 관계도 소원해졌다. 상처는 이해하지만 너무 깊은 시름에 빠져 자신을 돌보지 않는 다쿠미에게 다가와 자꾸 바른소리만 해대는 이상한 녀석 도키오. 그런데도 그가 싫지 않다. 며칠을 데리고 먹고 자고 하는데 돌아가라는 말도 하지 않는 이상한 행보를 보이는 다쿠미.
그러던 어느날 다쿠미의 여자친구가 일방적으로 이별을 통보하고 사라진다. 그 후 조폭같은 남자들이 찾아와 여친의 행방을 묻고 거금을 주면서 여친을 찾는 즉시 연락달라고 한다. 그녀가 위험에 빠진 것 같은 다쿠미는 여자친구를 찾아나서기로 한다. 도키오는 여자친구를 찾으러 오사카에 가는 길에 다쿠미의 생모를 만나러 가자고 조른다. 다쿠미는 다짜고짜 생모타령을 하는 도키오를 이해할 수가 없다. 그 때부터 두 사람의 여행이 시작된다. 쫓고 쫓기는 숨막히는 추격전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 동행, 그리고 서서히 풀려가는 도키오의 정체와 다쿠미의 미래. 정말 과거는 바로잡을 수 있을까?
타임슬립은 추리소설 작가들이 가끔 쓰는 기법이다. 귀욤뮈소는 타임슬립을 너무 즐겨써서 좀 식상했던 적도 있다. 내가 읽은 히가시노 게이고 중에서는 이 책이 유일하게 주인공이 직접 타임슬립을 경험하는 내용을 갖고 있다.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에서도 시간차 공격은 있지만 드라마 <시그널>처럼 우체통이라는 통로를 통해 편지로 연결된다. 말하자면 편지가 시간여행을 다니는 셈.
이런 기발한 생각 속에 막연히 판타지라고 차치하기 보다는 왜 이런 글이 인기가 있고, 쓰여지는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일단 재밌다, 그리고 특별하다. 우리는 가보지 못한 세계. 과거로는 절대 갈 수 없다. 그런데 간다. 작가가 과거로 가는 길목에 우리를 보란듯이 떨어뜨려놓고 쏟아낸 이야기를 가슴으로 담게 한다. 그리고 감동으로 마무리 한다. 책 표지에 '웃음과 눈물, 스릴과 미스터리, 추리 등 히가시노 게이고 월드의 집대성' 이라고 돼 있는데 그 말이 맞다.
그리움은 손에 잡을 수 없다. 그리움은 자주 후회를 동반하는데, 과거의 누군가에게 후회가 남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리움이 된다. 그리고 때로는 아픔이 된다. 미야모토 다쿠미처럼 말이다.
다쿠미가 끝내 생모를 용서하지 못하고 살았다면 그의 인생은 매번 낙심과 절망과 불만 속에 비참하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를 누르는 가장 큰 고통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다쿠미는 미래의 아들인 도키오를 만나면서 인생이 변한다. 도키오로 인해 상처를 마주하고 붕대로 싸매고 기다리는 법을 알게 된다. 그래서 진정으로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 가정을 이루고 엄청난 인생의 시련을 만났을 때 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앞으로 나갈 용기를 갖는다. 어렵게 구한 알바자리에서 자기맘에 들지 않는다고 욕하고 때려치우는 자세보다는, 누군가 폭력으로 시비를 걸었을 때 실컷 맞아주고 끝내버리는 비겁함 보다는 훨씬 나은 인생이다.
우리가 몰라서 그렇지 우리도 모르게 인생의 경로가 어떤 누군가에 의해서 바뀐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도 도키오가 나타나 더 나빠질 뻔한 상황을 좋은 상황으로 바꿔줬을지도 모른다. 그게 미래의 누구라고 할 수는 없지만 (없으리란 보장도 없고) 인생의 조력자는 희한한 포인트에서 등장하기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 혼자 세상을 사는 것이 아니요, 지금의 성공이 있는 것도 아닐테다. 그러니 히가시노의 글은 막연한 판타지가 아니라 지금 우리의 인생이다. 다만, 그럴지도 모르는 기이한 누군가의 조력을 깨닫지 못한 채로 '그럴일은 절대 없어'. '내 일은 무조건 내가 결정해.' 라고 생각하기 보단 어떠한 미지의 선행이 지금 나를 도와주고 있는 것은 아닌지, 나도 그런 선한 영향력을 끼칠 수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봐야 한다.
벼랑 끝에서 만난 또 하나의 손길을 잡을 수 있는 것도 용기다. 상처로 꽁꽁 뭉쳐서 자격지심으로 포장해 허세로 리본을 달은 다쿠미가 끝내 도키오의 말을 듣지 않았더라면 끝내 이룬 감동은 없을 것이다. 설령 도키오의 엄마를 우연히 만났다더라도 어려움 앞에 실망하고 포기하고 말았을 것이다. 때로는 내 상처를 들키지 않으려 과대로 포장을 하더라도 정말로 견디기 힘들 때는 타인의 손을 잡는 것도 인생을 현명하게 일구는 용기가 아닐까 생각해봤다.
두께가 꽤 된다. 그렇지만 단숨에 읽었다. 도쿄에서 오사카로 가는 신칸센처럼 빠르게 달려나가기도 했고, 골목골목 만나는 극한 상황에서 다혈질 끝판왕 같은 다쿠미를 슬슬 진정 시키는 도키오의 참된 사랑에서 흔히 부모의 자식사랑이 아니라 다 큰 자식이 어린 부모를 선도하는 희한하지만 아름다운 소설이었다. 그래서 단숨에 읽을 수 밖에 없었다.
정말 재밌게 잘 읽었다! 히가시노는 가가형사는 그만 쓰고 이렇게 따뜻한 글만 써주면 좋겠다 (그동안 많이 썼잖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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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모토 다쿠미씨, 당신 아들이야. 미래에서 왔어. - P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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