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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디의 우산 - 황정은 연작소설
황정은 지음 / 창비 / 2019년 1월
평점 :
러시아의 고골처럼 시대를 비출 수 있는 한국 작가는 누가 있을까? 독서모임에서 이야기 한 적 있다. 조금 전으로는 성석제, 김영하, 김훈. 요즘은 장강명, 한강, 황정은 작가가 우리의 물망에 올랐다. 더 있을 테지만, 우리가 아는 것은 적겠지만.황정은 작가의 책을 도장 깨기처럼 읽은 적도 있었다. 그때는 서평이니 리뷰니 관심이 없어놔서 그냥 읽은 것에만 의의를 뒀다. 지금 생각해보니 좀 적어둘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든다. 오래된 다이어리를 꺼내면 있으려나.
실로 오랜만에 황정은 작가의 책을 꺼낸 것은 단지 빨간 책을 읽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얇은 책들도 찾으면 있겠지만 굳이 이 책을 선택한 것은 언젠가 읽어야 할 소설이었기 때문이고, 글 다운 글을 읽고 싶어서이기도 했다. 당연히 읽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의식의 흐름대로 이야기하지만 버지니아 울프보다 훨씬 이해하기 쉬운 것은 내 나라, 내 사회, 내 이웃의 일들이기 때문일까.
표지에 연작소설이라고 적혀 있었는데 제대로 안 보고 장편소설인 줄 알고 읽었다. 그런데 읽다 보니 이야기가 끝나서 응 뭐지? 하고 다시 보니 연작 소설이네. 다른 소설처럼 단편이 여러 편 있는 게 아니고 중장편 두 개가 별다른 연쇄 없이 묶여있다. 겹치는 것은 세운 상가와 촛불시위다. 세운상가는 첫 번째 소설에서 더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촛불시위는 두 번째 소설에서 더 많은 것을 차지한다. 첫 번째 소설인 <d>부터 살펴볼까.
제목이 왜 [디디의 우산] 인고 하니 주인공 d가 등장하기 때문이다. 소설에서 인물의 이름을 짓지 않고 알파벳으로 이름을 표기할 때가 왕왕 있는데 보통은 대문자를 사용한다. 그런데 끝까지 d는 그냥 d다. 왜 d 인지도 궁금하지만 왜 소문자로 명기했는지 궁금했다. 아무튼 d는 우연히 dd를 사랑하게 된다. dd의 우산은 우중(雨中)에 d가 dd를 바래다주고 빌려 쓰고 온 우산이다. 소중한 것을 대여한 느낌이랄까, 안전을 보장받은 느낌이랄까.
그런데 dd가 죽는다. 왜 죽었는지도 모르게 갑자기 죽는다. d는 거의 정신적 패닉 상태에 빠진다. 슬픔을 가눌 길이 없어 집안의 온갖 사물을 부순다. 몇 달을 칩거하며 현대인으로 해야 할 모든 일을 거부한 채 상실의 고통을 마음껏 탐닉한다. 바깥으로 나왔을 때 모두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매몰된 슬픔을 이야기 하는 것은 황정은 작가가 단연 최고인 것 같다. 읽을수록 너무 슬프다)
dd와 살던 집을 처분하고 고시원에 틀어박혀 세운상가에서 택배 일을 한다. d는 dd가 그립지만 예전처럼 폐인이 되지는 않는다.
이 소설의 가장 큰 매력은 사람이다. 황정은 표 인간극장 같은 느낌. d가 만나는 사람의 생애가 전개되는데 우리나라 전후 사회를 비추는 모습이랄까. 집주인 김귀자 할머니의 생애, 세운상가에서 음향기기를 고치는 여순녀의 삶, 길거리 리어카에서 음반을 판매하는 동창 박조배의 삶 같은 나지막한 읊조림이 생각 없이 2020년을 누리던 나를 1960년으로, 1970년으로, 2000년대로 사정없이 패대기친다. 아무렇게나 쏟아놓은 빨랫감을 분류하듯이 점차로 시대별 장면이 분류된다. 전쟁통에 남편과 자식을 잃은 젖먹이 어미의 삶으로, 변화하는 것에 아랑곳 않고 묵묵히 자리를 지키는 삶으로, 그렇지만 곧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삶으로! 모든 젊은이가 부르짖는 것처럼 굴지만 사실은 생계의 문제를 먼저 해결해야 하는 도시 빈자들의 삶으로 나는 점점 시선을 돌려야만 했다.
황정은 소설의 매력이다. 오랜만에 마주치고 나니 또 나는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았구나, 나는 왜 읽기만 하는가 하며 자책하기 시작했다. 그만큼 잘 쓴다. 글쓰기 책도 아닌데 심장이 벌렁거린다. 소설은 이렇게 쓰는 거지 진짜. 독자의 마음을 마구 흔들려고 쓰는 거지. 보지 못하는 것을 보게 하려고 쓰는 거지. 소설이 시대를 비추는 거울이라고 몇 번 말해야 해?
두 번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좀 더 사회 반영적이다. <디디의 우산>의 d는 개인으로부터 출발했는데 두 번째 소설의 '나'는 좀 더 사회적 동물로부터 출발하는 느낌이랄까.
1996년에 연세대에서 그런 시위가 있었는지 처음 알았다. 중학생이어서 그렇기도 했지만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화로 만들어져야 관심 좀 가질까. 지나간 것들에 그다지 관심이 없다. 그나마 시험에 나와야 좀 외우지. 1996년대 나온 가요는 알아도 민주 정부가 출범한 이후에도 그런 전근대적인 학대와 폭력이 자행됐었다니 너무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째서 우린 이렇게 편하게 살아오며, 지나간 모든 희생을 이렇게도 쉽게 잊을까? 83년에 맡던 최루탄 냄새를 96년에도 맡고 있었다. 말해 무엇하랴 2014년에는 학생들을 실은 배가 뒤집혔고, 모두 구조했다고 거짓말했고, 어른들은 가만히 있으라 하고 도망 나왔는데. 농성하는 노인에게 물 대포를 쐈는데, 불과 몇 년 전에도!
그런데도 안락과 즐거움만 찾아서 그저 머무르기만 했던 내가 너무 미안했다. 책을 읽으면 내내 그렇다. 그럼에도 왜 이렇게 열심히 읽을까. 불편한데도.
나는 왜 이런 책을 좋아하고 읽을까 생각해봤다. 그건 미안해서다. 미안하니까 알고 싶어서. 알리고 싶어서. 더 많은 사람이 읽고 이야기 나눴으면 좋겠기에. '너 알았니? 우리나라에 이런 엄청난 일이 있었는데. 너 알았니? 나는 몰랐어. 그래서 미안해. 내가 어른이라고 말하면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서 이제는 알려고. 알게 되었으니 좀 더 움직이는 사람이 되려고 말이야.'
두 번째 소설 <아무것도 말할 필요가 없다>는 무기력에 관한 이야기다. 어차피 무언가 말하려고 할수록 사회가 변하지 않는 한 아무것도 변하지 않기 때문에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게 낫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안 하지 말자.'라고 반대로 말하는 것일 수도 있다. d는 움직이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나'는 움직였던 사람이고, 움직이려는 사람이고, 움직이는 사람이다. 그게 정의라고 믿는 사람이다. 그래서 d와 '나'는 아무 연관이 없는 것 같지만 그래도 이 시대를 비추는 각각의 인물상이다. 소설을 끝맺을 수 없는 '나'. 읽고 싶은 책이 많지만 점점 눈이 멀어가는 '나'. 사회가 말하는 디폴트가 되지 못해서 아예 입을 닫아버리는 '나'의 모습을 보면서 그 기준은 누가 정했느냐고 소리치고 싶지만 나 역시 이미 정해진 기준대로 40년 가까이 살아와서 그런지 그게 편하다. 미안해. 나도 아직은 어쩔 수가 없나 봐.
두 번째 소설은 '나'와 김소리와 서수경의 이야기만 걷어내면 거대한 서평집 같은 느낌이다. 중간중간에 섞어놓은 책 이야기가 놀랍다. 작가가 책을 엄청 읽는 사람이구나, 서재 이야기는 자기 서재 이야기겠구나 싶었다. 인용하는 책을 많이 읽어두어서 이해도 쉽고 좋았다. 못 읽어본 책은 반드시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냥 빨간색 책인 줄 알았더니 엄청 다채로운 색의 소설이다. 다만 좀 더 조도를 낮추고 채도를 내렸다. 좀 더 어둡고 습하다. 그렇지만 많은 이야기가 숨어있다. 찾을수록 너무 안온하게만 살아온 나를 반성하게 되는 회초리 같은 소설이다. 읽지 않은 사람들은 꼭 한 번 읽어보면 좋겠다. 아이를 기르는 사람이라면 더욱더.
어떻게 살 것인가를 고민하게 하는 소설. 또 한 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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