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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오만과 편견 ㅣ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54
제인 오스틴 지음, 류경희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9월
평점 :
![](https://image.aladin.co.kr/Community/paper/2021/0326/pimg_7540751262889470.jpg)
이 책 너무 재밌다. 여태껏 읽은 제인 오스틴 소설 중에 가장 재밌다. 당시 로맨스 소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 [테스]나 [폭풍의 언덕]과도 필적할만한 내용 전개와 인물 설정들이 손뼉 치고 싶을 만큼 재밌었다. 가독성에 있어서도 반전에 있어서도 모두 나를 사로잡았고, 특히 전형적인 인물상, 입체적인 인물상 모두 하나하나 흥미로웠다. 악한까지는 아니지만 그래도 방해꾼쯤으로 묘사되는 속물적 인간들 -엄마 포함 빙리양, 캐서린 귀부인 등-의 망신 망신 개망신도 고소하고 재밌었다.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대단히 매력적인 여성이다. 엄청난 미모를 자랑한다고 나와 있는데 남에게 예뻐 보이려고 하지 않는다. 우아 떨고 가식 떠는 거랑은 거리가 멀다. 그런 엘리자베스는 당시 뭇 남성들에게는 오만한 여자에 불과했겠지만 그녀에게 한눈에 반한 사내가 있었으니 이름하야 다아시씨!!
그런데 엘리자베스는 오만해 보이는 다아시보다는 그의 친구 위컴에게 더욱 마음이 있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를 질투하는 빙리양들은 경멸의 시선을 가득 담아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엘리자베스의 엄마는 딸들을 어떻게든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전전긍긍, 아버지는 상당히 수동적이고 아내에게 무시당하고 한사상속이라는 법 안에 갇혀 죽을 날만 기다리는 무기력한 존재다.
이 소설이 제일 맘에 들었던 것은 인간의 면면이 다양하고도 흥미롭게 배치돼 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네 자매들, 그 부모, 다아시, 빙리, 남자의 여동생들, 주변 부인들, 귀부인 등 흥미로운 캐릭터가 대거 포진돼 있다. 다양하게 잘 그려져 있어서 내내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장 재밌었던 것은 엘리자베스 자신이 본인의 오만을 깨닫는 부분이었다.
자기가 경멸했던 남자 다아시의 묵묵함과 지고지순함에 결국 마음이 열린 엘리자베스의 뉘우침이 재밌었다. 그녀의 인간적인 면모가 작가와 동일시되면서 그 매력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던 작품이었다.
살다 보면 너무 많은 곳에서 나의 오만을 깨닫는다. 편견으로 인한 것임에는 말할 것 없다. 우리는 자유를 꿈꾸지만 생각에게는 자유를 허락하지 않는다. 멋대로 판단하는 것은 자유로워서가 아니라 오히려 생각이 구습에 얽매여있기 때문이다. 여자는 남자로 인해 행복해져야 하고, 부자에게는 괜찮은 와이프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비단 200년 전 생각이기만 한가. (아닐껄 : )
나는 그동안 어째서 제인 오스틴의 작품이 잘 안 읽혔던가. [이성과 감성]도 비슷한 맥락인데 좀 잘 안 읽혔고, [설득] 도 읽다가 중단한 상태인데 중단의 이유를 지루함에서 찾았다. 그런데 이 소설은 로맨스 소설이라서 그런지 술술 읽혔다. (번역 때문인가 싶기도 하다) 처음부터 끝까지 재밌었다!
엘리자베스처럼 입체적인 인물상도 재밌지만 변함없이 속물적인 엄마 같은 캐릭터도 가독성에 박차를 가하는 매력적인 인물이었다. 이 소설에 지속적인 악한은 없지만 언니 제인을 제외하고는 모두 겉과 속이 약간씩 다른 밀당의 제왕들이다. 그래서 재밌다.
문학적 소양이 적어서 비평가의 눈으로 이 소설을 해부할 수는 없지만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18세기 영국 사회에서 엄격했던 한사상속에 대해서다. 고대 서아시아에서도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남자형제와 다시 결혼을 해야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거에 비하면 좀 더 윤리적이기는 하지만 아들을 낳지 못하면 한순간에 거지가 될 수도 있는, 여성들에게 상당히 불리한 제도가 바로 한사상속이다.
남편이 죽으면 아들에게 재산이 상속되지만 아들이 없는 경우에는 다른 남자형제나 조카가 그 재산을 가져가게 된다. 집안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서라지만 남은 여성들은 빈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나마 재산을 상속받은 남자 친척이 긍휼을 베풀어야만 겨우 연명할 수 있다. 그러니 엘리자베스의 엄마가 그렇게 돈 많은 사위에 연연한 것도 이해가 된다. 이 점을 악용하기 위해서 마치 자기가 엄청난 은혜를 베푸는 것처럼 거들먹거리면서 '결혼해 줄게, 고맙지?'로 일관하는 남자, 콜린스가 찾아오는 것도 역시 재밌는 포인트다. 엄마는 결혼을 종용하고 엘리자베스는 펄쩍 뛰지만 친구 루카스 양은 가볍게 그 남자의 재력을 보고 결혼을 추진한다. 루카스 양이 콜린스와 결혼하면 엘리자베스 아버지 베넷 씨의 사망과 동시에 친구네 집 재산도 다 루카스 양- 콜린스 씨-의 것이 된다. 콜린스의 그 거들먹거리는 모습이라니. 증말 귀싸대기를 때리고 싶은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흠흠 참자)
조건 보고 결혼하는 사람이 아예 없다고 말할 수 있나? 소도 누울 자리를 보고 발 뻗는다고 아무리 사랑해도 진짜로 아무런 조건도 보지 않고 결혼을 결심하기란 쉬운 게 아닐 테다. (그렇다고 팔려가는 건 아니지 않은가.) 남의 결혼에 함부로 이야기 할 수 없고, 내 결혼을 남이 함부로 좌지우지 해서도 안되고. 나는 루카스 양을 대단히 옹호하고 내가 그 입장이었어도 얼마든지 그런 선택을 했을 것이다. (물론 콜린스는 너무도 매력이 없지만)
아무튼 결혼도 안한 제인 오스틴의 결혼에 대한 통찰이 놀라울 뿐이다. 지금 읽어도 200년 전 작품이라는 게 하나도 생각 안날 정도로 공감이 팍팍 되니까.
결국 우리가 위컴과 결혼한 막내 리디아의 인생을 걱정하는 것도 사랑이 없으면 재산이라도, 재산이 없으면 사랑이라도 있어야 그나마 일신이 편안하다는 속물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것이다. 근데 그게 뭐. 사실이잖아?!
그래도 있다고 그렇게 무시하는 태도는 지양하자. 그런 면에서 캐서린 귀부인의 실패는 너무 통쾌하다. 자기 조카 다아시와 엘리자베스가 심상치 않자 여자를 포기시키기 위해서 - 아침 드라마와 맥을 같이하는- 혼자 그녀를 찾아와 정원이 작니 어쩌니 하면서 모욕을 주고 급기야 끌고 나가서 막말을 퍼부었지만 고모님 죄송해요, 저는 다아시를 사랑해요, 한 번만 봐주세요 비굴하게 대거리하지 않는다. 당신 말 무슨 말인 줄 알겠어요, 근데 내 맘대로 할 거예요. 다아시가 나 좋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거죠.라고 말하는 아주 당찬 태도가 너무 멋있었다. 팬심 폭발!! 당시의 여성들에겐 어땠겠는가!!! ㅎㅎ 어쩌면 최초의 팬덤 형성일지도 몰라. (아니면 말고)
[오만과 편견]은 제인 오스틴의 대표작으로 200년 전 영국 사회의 결혼문화를 아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수작임에 틀림없다. 굉장히 다양한 번역본이 존재하고 여전히 출판되는 중이다. 페미니즘 시각에서 보아도 무방한 가치 있는 작품이다. 버지니아 울프가 더 후대의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결혼관보다 제인 오스틴의 결혼관이 더 현시대와 비슷하지 않나 감히 이야기해본다. 나는 이 작품에 완전히 매료되었다!
내게는 다른 번역본이 하나 더 있다. 그것 역시 읽어보고 비교해 볼 것이다. 그리고 멈춰있는 제인 오스틴 읽기에도 기름을 부어봐야겠다. 삐거덕 거릴망정 다시 굴러가도록^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