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레모네이드 할머니
현이랑 지음 / 황금가지 / 2021년 4월
평점 :
한국 할머니라기엔 일반적이지 않은 - 그렇다고 윤여정할머니 같지도 않은- 레모네이드 할머니를 만났다. 가진 건 돈 뿐인 성격 파탄 치매할머니!!
일단은 재밌다. 소설적 가치, 멋진 문장 뭐 이런거 다 모르겠고 그냥 재밌다. 만화처럼!
세세히 들여다보지 말자. 그냥 유쾌하니까. 가끔은 이렇게 그냥 유쾌한 책도 읽어야지.
나는 이 스웨덴스러운 할머니가 좋다. 맘에 든다. 서사에 부족함이야 왜 없겠냐마는 그런 것보다 나는 지금 내 기분, 흥미로움이 철철 흐르고, 궁금증이 폭발하는 여기 도란마을에 서 있다.
서술자는 챕터별로 다르다. 매 챕터마다 한문단 이상을 읽어내야만 이 서술자가 누구일지 짐작할 수 있다. 마치 내가 고용 탐정이 돼서 이 사건을 넘겨받았을 때 관련 인물들을 탐문해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하고, 내가 판사여서 증인들을 한명 한명 만나서 이야기를 듣는 것 같기도 했다. 아님 이 사건의 담당자가 인물들의 인터뷰를 다 따놓고 내게 보여주는 것 같기도 했다. 어떻게서든지 나는 이 일에 참여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현실성은 좀 떨어졌다. 치매할머니가 탐정이라는 설정부터 이 할머니가 어마어마하게 부자라는 것, 마약을 만들어내는 조직이 있다는 것과 마을 전체가 병원이라는 것 (소록도인 줄) 자체도 판타지에 가깝다.
그리고 빈센조에 등장한 비둘기가 여기서도 엄청난 일을 감당하니 이것조차 생각해보면 말이 되는가.
난무하는 욕설이나 비인격적인 말투, 6세소년치고 너무 비범한 것 등도 현실성과 어긋날 수도 있다. 근데 그러면 어떤가. 아이언맨도 눈물 흘리며 서사를 이어나가는데 뭘!
문제는 그렇게 일어났다. 한 직원이 음식물 쓰레기통을 열었다가 영아 시신을 발견하고 소리를 치면서! 사람들은 동요하는 듯 했는데 이상하게 수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한편, 이 병원에는 의사 서이수가 있는데 그녀는 이혼하고 아들과 둘이 산다. 아이를 병원에 데려와도 된다는 조건으로 취직하였기 때문에 아이와 늘 함께다. 어느날 아이가 한 치매할머니와 함께 다니고 싶다고 선포한다. 아무리 애 봐줄 사람이 없다고 해도 그렇지 치매할머니에게 보육을?
그 할머니는 늘 레모네이드를 즐겨먹고, 시크하기 이를데 없으며 사람들에게 냉정하나 돈이 많다고 소문난 할머니다. 경증치매고 늘 혼자다. 그런데 갑자기 꼬맹이가 와서는 함께 있자고 말한다. 영아 시신 유기사건을 파헤치고 싶어진 할머니, 혼자보단 둘이 낫지 싶어 꼬마의 엄마 서이수에게 허락을 맡는다.
이야기는 내 생각과는 아주 다르게 흘러간다. 다소 정신없지만 결국 줄기는 하나여서 재밌게 읽었다. 두 종류의 새를 사건을 해결하는 중요 포인트로 엮어둔 게 제일 마음에 드는 설정이었다. 오리는 오리대로, 비둘기는 비둘기대로!
약간 의문인 것도 있었다. 청소년이나 그 마을을 자주 찾는 자식(?) 들의 말뽄새가 어찌 그리 저속한지. 할머니나 직원들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인간 말종 같은 말하기를 가져서 너무 비현실적이진 않나 싶었다. 청소년들이 대놓고 그렇게 말하지는 않는다. 애들이 그정도까지 바닥은 아닌데...쩝...
그리고 할머니의 눈.
할머니는 한쪽에 의안을 끼웠는데 그것이 6.25때 파편을 맞아서라고. 그런데 굳이 그게 왜 필요했는지 좀 더 개연적으로 설정했으면 어땠을까 약간 아쉬움이 남는다. 내 생각에 작가가 의도적으로 설정한 거라면 한쪽 눈만 가졌어도 두 눈을 가진 자보다 날카롭고 지혜롭게 바라본다고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사건은 빠르게 흘러간다. 순식간에 다 읽었다. 씁쓸한 것은 이 할머니가 부자할머니가 아니었다면 어떻게 됐을지 불보듯 훤하기 때문이었다.
꼭 부자가 아니더라도 이런 복지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기서 지내는 할머니들은 좋아보였다. 학대도 없고, 묶어두는 사람도 없고, 소리지르는 사람도 없는 곳. 그래서 [그레구아르와 서점할아버지] 속에서처럼 환자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생기지 않는 곳. 하여튼 재밌게 읽었다.
노인들의 이야기를 다루는 소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현이랑 작가의 앞으로도 기대되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