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와 나의 3천 엔
하라다 히카 지음, 허하나 옮김 / 문학동네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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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추구하는 바가 다 달라서 같은 돈으로 다르게 산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그냥저냥 시간을 죽이며 살아야 할까. 당장의 소소한 행복을 위하여 다 써버리고 장렬하게 전사하자 할까?



요런 다소 무거운 질문에 대담하게 대답한 소설이 있다. 물론 일본 소설이라서 지금 우리 나라의 상황과는 좀 다르지만 디테일을 벗어나면 결국 비슷하다. 모녀3대 네 명(1대 미호, 마호, 2대 도모코,3대 고토코) 의 이야기를 통해서 각자 처한 입장을 전하는데 독자들은 서로 다른 점에서 감탄하거나 씁쓸해 할 것이다. 나도 그랬다. 3천엔은 우리나라 돈 3만원 정도로 보잘 것 없는 돈은 아니지만 쥐기 어려운 돈도 아니다. 하지만 의외로 함부로 날아가 버리는 돈이기도 하다. 3천엔을 사용하는 모습을 보면 그 사람을 알 수 있다는 고토코 할머니의 말에 나를 비춰보기 시작했다.



이 책을 읽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세대마다 다르게 고민하고 있다는 거였다. 할머니는 할머니대로, 엄마는 엄마대로, 기혼인 딸과 미혼인 딸은 각자 다른 고민으로. 이 책은 주로 경제에 대해서 이야기하지만 돈 이야기가 아니라 사랑에 관한 이야기였다. 가족을 사랑한다는 것, 나를 사랑한다는 것, 나의 현재와 미래를 사랑하는 모든 행위와 고민이 이 책 안에 담겨 있다. 경제서인 줄 알았다가 나중엔 철학책을 만난 것 같았다. 나는 이 책을 읽으며 사랑을 배웠다.



"어느 인생에도 절대적 안정은 없어"
p.151

얼마쯤 있으면 행복하겠냐는 질문을 받을 때마다 그 우스운 질문에 짜증이 밀려온다. 얼마가 있어서 행복한 건 아니라고 대답했다가는 먹고 살만 하니까 그렇지라는 말을 들을테고 진짜 숫자로 환산하려니 어차피 그런 돈이 내게 주어질리도 없어서 박탈감에 쩌든다. 그것은 대체로 삶의 불만족에서 기인한 건 아닐까? 돈과 관계 없이 행복하기란 불가능하지만 주어진 능력에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방법은 널리고 깔렸다. 사랑만 바탕이 되면 말이다.



현실적이고 부던히 사회 반영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일본의 시대별 사회 모습에 대해서 엿볼 수 있다. 우리나라 판으로 한다면 어떻게 묘사될까!?) 따뜻한 정서는 있지만 좀 따끔하기도 하다. 나도 찔렸다. 주어진 것에 감사한다는 게 그냥 저냥 살자는 회피는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이 책을 보고 나니 살짝 부끄러워지면서 많은 생각에 잠긴다. 이젠 그럴 나이가 됐기도 했고!!



암튼 재미있다. 모두에게 추천이다. 시기도 딱 좋다. 새롭게 시작하는 봄이니까. 3만원이 주어진다면 뭘 해야 할까? 뭘하고 싶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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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 열린책들 세계문학 37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찐 지음, 석영중 옮김 / 열린책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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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운명처럼 엄격한 석조 인간 <은혜로운 분>은 처형 기계의 주위를 맴돈 뒤 거대한 손을 지렛대에 얹었다. 속삭임도, 숨소리도 안 들렸다. 모든 눈은 그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다. 무기가 된다는 것, 수십만 볼트의 합성격이 된다는 것은엄청나게 열광적이고 매력적인 격동임이 틀림없었다. 얼마나 위대한 숙명인가! - P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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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예쁜 걸 먹어야겠어요 - 박서련 일기
박서련 지음 / 작가정신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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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련 작가의 산문이 나왔다길래 너무 반가워했다. 마침 작가정신에서 서평단을 모집하길래 지원하여 읽게 되었다.

에세이인 줄 알았더니 일기를 그대로 옮긴 책이었다. 예상과 완전히 빗나가는 형식과 내용에 상당히 당황했다.
그럼에도 서평단의 사명은 읽고 쓰는 것이기에 끝까지 최선을 다해 읽었다.



작가는 아마도 정돈되지 않은 글을 가감없이 보여줌으로써 독자들에게 친숙하거나 솔직하게 다가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출간을 결정했겠지. 하지만 나는 좀 낯설었다. 그렇지만 분명 좋아하는 독자도 있을 것이다.



나는 박서련 작가의 소설을 좋아한다. 인물의 감정을 서술하는 방식이 특히 좋았다. 넘치지는 않으나 어딘가 서러운 심정들이 나를 자극했다. 조금은 특별한 소재들도 좋았다. 완전한 배설이 아니라 절제된 감정 들로 독자 스스로 생각해보게 했다. 내가 믿었던 것이 아닐 때의 허무 혹은 불시에 밀어 닥치는 따뜻함들도 기억에 남게 묻어 났다. 한국 단편들은 오래 지나면 기억이 가물가물 해지고 몇가지가 섞이는데 박서련 작가의 그것은 계속 기억에 났다. 여기저기 와 닿아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이 일기책은 완전히 달랐다. 일기라는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완벽한 배설작업이 이뤄졌다. 글쓰기가 회복이라는 점에서, 일기가 궁극의 솔직과 주관성으로부터 완성된단 점에서 이 일기는 나무랄 점이 없다. 다만 지독하게 개인적이다. 너무 개인적이어서 놀랐을 뿐이다.



세상에는 참 다양한 책이 있다. 또 한번 새로운 형태의 책을 읽고 출판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됐다. 그리고 이번에도 독서로 내 생각은 자랐다. 그렇게 믿기로 했다. 더 솔직함에 도달할 수 없어서 아쉬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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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마다 만우절
윤성희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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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따뜻한 신발을 신고 눈길을 걸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자신감이 생긴다고 했다. 나는 따뜻한 신발을 신고 길을 걷다보면 낯선 곳으로 빨려들어갈 것만 같다고 했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처럼, 내 말을 들은 오빠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절레절레 흔들었다. 따뜻한 신발 덕분에 오빠는 자신감이 넘치는청년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책임감 강한 아버지가 되었다. 따뜻한신발을 신고 동화 속 주인공을 상상하던 나는 뭐가 되었을까? - P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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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게으른 시인의 이야기
최승자 지음 / 난다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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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읽을 때 저자 소개를 먼저 읽고 시작하지 않아서 몰랐는데 읽다보니 본인이 대전과 조치원 사이의 시골에서 자랐다고 말하길래 깜짝 놀랐다. 지금은 그 곳이 세종 특별 자치시가 되었다는 것을 아시는지!

천지개벽한 그 도시가 지금의 모습을 갖추기 훨씬 이전에 태고의 순수를 간직한 목가적인 마을에서 천재 시인이 탄생했었다니 우야둥둥 적을 두고 있는 나로서는 놀랍고 반가울 따름이다.

서평을 쓸 때 책의 소개는 잘 하지 않는 게 좋다지만 이 책은 좀 소개를 해야 할 것 같다. 총 4부로 이루어진 이 에세이는 원래 1989년에 이미 출간된 바가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90년대와 2000년대 기록을 추가해 4부로 편집, 난다 출판사에서 새롭게 출간된 거였다.

본인을 게으르다고 말하지만 부지런히 고독할 줄 알았던 시인 최승자는 고려대 독문과를 나와서 예술가의 길을 걸었다. 할머니 손에 자라 어려운 환경에서도 대학을 갔다. 외로움을 많이 탔다고 했는데 수재였던 모양이다. 의식 있는 엘리트이기도 했다. 문학작품을 번역했다고 하니 문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시인 본연의 감수성에 내장된 단어들 역시 남달랐다. 기본적으로 개인의 우울함이 내포되어 있지만 타인의 고통과 사회의 암울한 모습을 글에 휘감을 줄도 알아서 읽는 동안 비감이 느껴졌다.

1-3부는 순수한 시절의 에피소드, 갑자기 도시로 이사하게 되면서 겪은 고독감, 시를 만나게 된 과정, 목도한 죽음들과 개인의 고뇌들이 담담한 필체로 다소 솔직하게 적혀있다. 글에서 검열 따윈 없다. 붓가는 대로 쓰는 게 이런 걸지도 몰라. 멋있으면 언니라는데 이 언니 멋있다! (하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분명히 있으니 오해 말라)

4부로 가니 가슴이 아프기 시작했다. 자서전은 아니다보니 아주 상세히 적혀있지는 않지만 정신병원에 입원을 해야할 정도로 피폐해진 어떠한 이유와 생의 고통이 있었던 것 같다. 시간은 겅중 뛰어 있지만 여전히 그 정신분열이 치료되지 않았고, 지속적으로 의학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니 안타깝다. 절필까지는 아니지만 본인의 시가 이제 명을 다했노라 말하기도 하는 최승자 시인. 미안하게도 그의 시는 본 적이 없고, 나는 그저 우연히 이 책을 집어 든 것 뿐이어서 아쉽다. 조만간 그의 시집을 찾아 읽어봐야겠다.

​"잠들지 않고 싸울 것을, 이 한 시대의 배후에서 내리는 비의 폭력에 대항할 것을 결심하고 또 결심한다."p.14

작가 정신은 반드시 있다. 이제야 알게 되었지만 소중한 시인 최승자의 에세이에는 그가 평생 붙잡고 살아간 작가정신이 박제돼 있다. 시보다는 에세이가 좀 더 울림을 준다. 그러나 이제는 시를 보지 않고는 그를 다 안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젊은 시인의 뜨거운 마음이 어디로 흘렀는지는 시선(詩線)으로 확인해 봐야겠다.



출판사에서 의도한 것은 아니겠지만 어쩜 때가 딱 맞는지. 많은 글에서 한해가 지나는 것에 대한 회한을 많이 다루었다. 페이지는 기억이 안나는데 한해가 간다는 것은 또 한해가 온다는 것에 대한 증거로 한해가 간다는 것이다. 말장난 같지만 맞는 말이라서 곱씹으면서 웃었다. 최승자 시인의 문장은 곱씹고 싶은 게 많았다. 그리고 '소소하지만 확실한' 이라는 표현을 1989년에 썼다. 소확행이라는 단어의 어원이 최승자 시인에게 있다는 생각에 또 혼자 웃었다.

최승자 시인은 멋있는 사람이다. 그의 생각 중에 엄지를 치켜 들고 싶은 문장들이 많았다. 시를 왜 쓰냐는 사람들에게 놓아 주는 일침, 도덕에 관하여, 떠나는 것에 대하여, 여자에 대하여, 죽음에 대하여 말하는 모든 것들이 좋았다.



"한 해의 끝에서 녹초가 된 몸, 녹초가 된 정신과 더불어 고요히 떠오를 그러한 질문에 합당한, 만족스러운 대답을 찾기 위하여 우리는 언제나 또 한 해를 새로이 시작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1986)

흠집이 나버린 정신 건강이 빨리 좋아져서 말년이 행복하시길 바라본다. 인생의 고락과 쓰디쓴 고뇌의 산물을 시라는 아름다운 언어로 못 박아 두었으니 이제는 편히 쉬라고 전해 드리고 싶다. 그만 쓰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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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2021-12-25 10: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村上春樹)의 에세이 《랑게르한스 섬의 오후(ランゲルハンス島の午後)》(1986)에서 쓰인 말로, 갓 구운 빵을 손으로 찢어 먹을 때, 서랍 안에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는 속옷을 볼 때 느끼는 행복과 같이 바쁜 일상에서 느끼는 작은 즐거움을 뜻한다.

하루키가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A Small, Good Thing》에서 따와 만든 신조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