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한번 써봅시다 - 예비작가를 위한 책 쓰기의 모든 것
장강명 지음, 이내 그림 / 한겨레출판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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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한번 써봅시다>가 제목이니 당연히 책을 한번 써 보라는 이야기겠거니 했지만, 이 책은 읽으면 읽을수록 쓰기보다 우선 읽으라는 일침으로 들린다. 물론 이 책은 작법책의 흔한 순서대로 소재 찾기, 장르별 글쓰기, 퇴고하기, 투고하기의 순서로 책이 탄생하는 절차 방법을 충실하게 기술하고 있어 글쓰기 가이드로서 부족함이 없다. 그럼에도 정말 내가 책을 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냉정하게 쉽지 않을 것을 암시하는 것 같다. 작가는 '책 한번 써'보자는 꿈같은 얘기를 환상적으로 포장하기보다 우리가 책을 내기 힘든 진짜 이유를 냉정하게 분석한다.

우리나라에서 내 책 하나를 갖는 가장 빠른 방법은 아마도 유튜브 채널을 개설해 열심히 구독자를 모아 유명해진 뒤 컨텐츠를 활자화하는 것일테다. 어떤 글을 어떤 방식으로 써내느냐는 다음 문제다. 이렇게 책을 내면 홍보도 저절로 된다. 읽어줄 최소한의 독자도 확보된다. 그러나 유튜브 인플루언서들이 낸 책으로만 가득 찬 베스트셀러 목록을 상상하면, 아무리 독서 문화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무심하게 웃어 넘기기는 힘들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책들이 계속 세상에 나오고 심지어는 베스트셀러 목록에 꾸준히 오르는 이유는 우리 독서 공동체의 빈약함 때문이라고 이 책은 지적한다.

책도 상품이라는 자본주의의 논리에 의하면 이는 당연한 현상이다. 책이라고 뭐 다르겠는가. 부당하다고 부르짖을 일도 아니고 한심하다고 개탄할 일도 아니다. 그럼에도 책은 다르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여전히 책이 가진 대체불가능한 효능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책은 활자를 독해하고, 텍스트의 의미를 해석하고, 그것을 사회 문화적 맥락에서 내면화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이 모든 것이 한 개인의 독자적인 사고과정 안에서 이루어진다. 누구도 대신해줄 수 없는 지적 욕구를 충족시켜 줄 유일한 매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역할을 해 왔던 책이 단순한 영상의 활자화 혹은 SNS 포스트의 영구 소장용 매체로 전락하고 있는 것은 마땅히 개탄해야할 일이다. 전통적인 의미의 '책'과 요즘 떠오르는 '활자화' 사이에는 어떤 공통점도 없다. 두 가지는 이미 장르가 다르고 수용 방식과 효과가 다른 별개의 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책(혹은 책의 모양을 한 어떤 것)이 넘쳐나는 시대에는 양질의 책을 감식할 수 있는 안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문제는 그 기능을 하는 우리의 독서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일반 독자들이 믿고 책을 고를 수 있는 판단 기준은 전무하며, 우리의 서평 문화도 빈약하다. 책 서평을 위한 공간에 책 표지의 세련됨과 종이질의 견고함을 칭찬하는 '상품리뷰'가 장악하는 웃지 못할 광경도 심심치 않게 보인다. 우스운 이야기지만 읽을 만한 서평이 사라져가고 있는 이유마저 그것을 읽어줄 뷰어가 줄어들고 있는 탓이다. 서평이 인터넷상에서 인기콘텐츠가 되는 일은 아주 드물다.

사정이 이렇다보니 책 쓰기에 대한 도전은 절망적이다. (유명인이 아닌 이상)못 쓴 책은 세상에 빛을 보기 어려울 것이며, 잘 쓴 책도 그 진가를 알아보는 독자를 만나기가 쉽지 않다. 이대로라면 예비 작가의 가장 큰 걸림돌로 간주되는 우리나라의 공모 및 등단제도가 오히려 책을 낼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예비 작가는 보수적인 제도의 벽 앞에서 한 번 좌절하고, 급작스럽게 떠오른 트렌디한 출판 문화에 또 한번 좌절하게 된다. 이 거대한 아이러니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독서 공동체가 제대로 작동해야 할 것이다. 책 하나 내겠다고 일단 유명해질 수는 없는 일이다.

유명한 해외 서적들 중에서는 한 출판사 편집자의 뛰어난 감식안 덕분에 세상에 빛을 본 전 세계적 베스트셀러도 있고, 유명 스타의 북클럽에서 발굴되어 널리 읽힌 책도 심심치않게 보인다. 우리에게도 책의 효능에 대한 신념, 좋은 책을 가려내는 감식안, 그 감식안의 폭 넓은 공유가 가능한 독서 공동체가 마련된다면 더 많은 사람들이 더 좋은 책을 많이 읽는 세상이 올 것이다. 그런 세상이 오면 그 때는 진심으로 책 한번 써 보라고 권하는 일도 흔한 풍경이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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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일즈맨의 죽음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218
아서 밀러 지음, 강유나 옮김 / 민음사 / 200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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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은 그 제목처럼, 혹은 주인공 윌리 로먼(Willy Lowman)의 이름처럼 한 소시민의 몰락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희곡이다. 이 개인적 비극의 원인에 접근하기 위해 힘들게 미국 현대사 장면들을 뒤적일 필요가 없다. 미국 사회의 특수성과 한 개인의 성격적 결함이 가져온 비극이라 하기에는 너무 낯익은 풍경들이 씬(scene)마다 펼쳐지는터라 시공을 초월한 연민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한 집안의 가장이자 퇴락한 세일즈맨 윌리의 생애 마지막 24시간 정도가 이 희곡이 묘사하는 시간의 층위다. 그러나 현재의 인식속에 과거의 기억들이 무작위로 끼어 들면서 극은 윌리 인생의 전체을 아우른다. 극 초반 무작위로 섞여 있던 과거와 현재가 그 의미를 획득하는 것은 극의 중후반을 지나서지만 윌리의 인식이 정상적이지 않다는 것은 처음부터 눈치챌 수 있다. 그는 꿈과 현실의 부조화를 회피하기 위해 과거의 망령에 사로잡힌 모습이다. 그러나 극이 진행되면서 그 영광스런 과거의 장면조차 그의 소망이 윤색해 놓은 허상임이 드러난다. 현실이 각박해짐에따라 과거의 일들이 그의 꿈과 결합하여 왜곡된 양상으로 나타난다. 또 그 왜곡된 과거는 현실에 완벽하게 영향을 주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허상인지 구별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는 것이다.

 

 

그래서 비프가 자신의 초라한 과거를 직시하는 순간은 가장 비극적인 순간이면서 동시에 가장 통쾌한 순간이기도 하다. 마침내 자신을 둘러싼 왜곡된 신화가 벗겨지면서 온전히 그 자신으로서 살아갈 가능성을 마주하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들의 각성은 윌리의 현실도피를 더욱 부추기는 결과를 가져온다. 이로 인해 부자간의 갈등은 더욱 심화되고, 마침내 돌이킬 수 없는 파국을 불러 일으킨다. 그렇다면 비프가 현실을 외면하려는 아버지의 태도에 맞장구를 쳐주었다면 결과는 달라졌을까? 어떤식으로든 윌리에게 닥친 비극은 결국은 일어났을 것이다. 왜냐하면 윌리의 비극은 윌리 개인만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 구조적 차원의 비극이기 때문이다.

 

 

자식에 대한 지나친 기대가 그들의 객관적인 자질을 왜곡시키는 모습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낯선 풍경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허황된 꿈으로 인한 왜곡이 온전히 개인의 탓이 아니라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부분이다. 윌리가 만들어낸 허상은 온전히 사회가 개인에게 요구하는 이상(理想) 이다. 그 이상은 세일즈맨이라는 윌리의 직업을 통해 은유적으로 드러난다. 기계를 조립하고 곡식을 생산하는 일과 달리 세일즈맨은 자신의 이미지를 파는 직업이다. 다시 말해 실체가 없는 허상을 가지고 타인을 속이는 일이다. 평생을 왜곡된 이미지만 팔아왔던 세일즈맨 윌리는 시대에 밀려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지는 순간을 맞이하게 된 것인데, 그는 팔지 못할 거짓 이미지를 끊임없이 만들어 냄으로써 현실을 부정하는 식으로 변화하는 사회에 적응하고자 한다. 그렇게 구축해왔던 허상의 세계마저 무너져내리자 더 이상 팔 것이 없어진 이 세일즈맨은 자신의 생명을 파는 것으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남김없이 소진해버린다. 몇 차례 도약을 꿈꾸었음에도 결국 정해진 수순을 따라 완전하게 몰락해버리는 소시민의 삶이 지금 현실과도 너무 맞닿아있어 더 큰 울림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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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맞은 편지 문지 스펙트럼
에드가 앨런 포 지음, 김진경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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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포는 대체로 선정적이고 자극적이라는 이유로 고상하지 못한, 소위 말하는 B급 장르로 치부되는 경향이 있다. 그러거나 말거나 상업자본과 타협한 공포물은 그 선정성과 자극성을 십분 활용하여 대중의 일회성 구미를 만족시키는데 주저함이 없다. 문제는 이렇게 유발된 공포가 소모적일 뿐 아니라 피상적이라는 것이다. 공포를 유발하는 것에는 다양한 요소들이 있을 것인데, 이것들을 감각적인 측면에만 집중한다면 분명 책을 덮거나 영화관을 나올 때 즈음이면 한껏 고조되었던 감정들이 어떠한 잔상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릴 것이다. 그러나 어떤 공포물은 세월이 지나도 끊임없이 회자되고 소비된다. 그렇게 오늘날까지도 살아남은 대부분의 공포물은 그것이 오컬트이든 크리쳐든, 잔혹한 범죄이든 간에 인간에 대한 통찰이 기본적으로 깔려있다. 에드거 앨런 포의 소설들이 공포물로 분류되면서도 오늘날까지도 널리 읽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문지 스펙트럼 시리즈로 나온 포의 소설집 <도둑맞은 편지>안에는 동명의 단편 외에 '아몬티아도 술통', '어셔가의 몰락', '고자질하는 심장', '황금 풍뎅이'가 실려있다. 이 다섯 편의 소설은 각각 포의 여러 경향들을 대표하는 작품들로 알려져 있다. '도둑맞은 편지', '황금 풍뎅이' 등은 추리소설 계열이고, '아몬티아도 술통', '고자질하는 심장'은 일종의 범죄 소설, '어셔가의 몰락'은 고딕호러 소설의 성격을 갖는다. 고작 다섯 편의 단편이지만 오늘날 이와 같은 장르들에 꽤 많은 모티프를 가져다 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세련된 트릭이나 반전의 장치는 현대 소설에 비해 빈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분위기와 속도감이 자아내는 긴장감은 현대 소설의 감각에 결코 뒤쳐지지 않는다. 서스펜스를 다루는 솜씨는 독보적이다. 각각의 단편 분량이 매우 짧음에도 처음부터 끝까지 긴장의 끊을 놓을 수 없게 한다. 이는 그가 공포의 대상보다 그 주체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그의 소설은 공포의 대상보다 인간의 의식과 심리를 더 강조한다.

이야기의 속도감도 또한 작품의 서스펜스를 높여준다. 그의 소설은 하나의 범죄나 사건의 내적 인과성에 집착하기 보다 그 사건 자체에 곧장 시선을 돌린다. 범죄를 둘러싼 배경에 긴 설명을 할애하기보다 이미 일어난 하나의 사건을 통해 상황을 설정하고 서둘러 문제 자체를 파고든다. 이후에는 인물들이 사건의 해결이든 범죄의 완성이든 하나의 목표를 향해 질주한다.

무엇보다도 작품 속 배경이 조성하는 분위기야말로 포의 소설들이 갖는 가장 큰 장점일 것이다. 배경 자체가 자아내는 그로테스크함과 파괴적이고 분열적인 인간성이 빚어내는 부조리는 공포를 감각적 차원에서 심연의 어떤 것으로 격상시킨다. 이는 딱 맞아 떨어지는 논리와 기막힌 반전, 혹은 시각적 자극으로 무장한 세련된 현대 공포물보다 더 오싹하다. 이는 어떤 기술보다 공포를 일으키는 정서에 대한 본질적인 이해에서 비롯된다. 구스 반 산트 감독이 리메이크한 영화 <싸이코>가 히치콕의 오리지널을 따라올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다. 포의 소설의 장점은 드러나는 기교나 감각이 아니라 심리와 정서를 파고드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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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린의 전쟁 같은 휴가
벤 파운틴 지음, 민승남 옮김 / 문학동네 / 201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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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을 소재로 한 이야기들 중 구조담이야말로 희생과 구원을 아우르는 인간 정신의 가장 고결한 지점이며 따라서 태생적으로 가장 숭고할 수밖에 없는 이야기다. <포레스트 검프>, <라이언 일병 구하기>를 거쳐 최근의 <핵소 고지>에 이르기 까지 '전쟁'과 '구조'는 미국적 휴머니즘을 선전하는 가장 강력한 소재였다. 벤 파운틴의 <빌리 린의 전쟁같은 하루>도 그런 구조담에서 시작한다. 그러나 작가는 이런 정치적 선전 도구로서의 의도가 다분한 어설픈 휴머니티에 칼을 들이댄다. 전쟁의 직간접적 피해자나 미국의 패권주의에 냉소적인 외부인들의 시선이 아닌 내부자의 시선으로 바라본 전쟁의 부조리를 소설이라는 형식을 빌어 조롱한다. 흥미로운 점은 전쟁 자체를 향한 일방향적 야유가 아니라 전쟁이라는 이야깃거리를 둘러싼 사회 각계의 행동 양상을 통해 미국 사회를 다양한 측면에서 풍자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설은 이라크 전쟁에 파병된 '브라보 분대'가 승전 기념으로 짧은 휴가를 얻게 되어 미국 전역을 여행하는 이야기다. 분대원들은 영웅으로 칭송되어 가는 곳마다 환대를 받는데 그 시끌벅적한 환대 속에서 사회 각층의 인물들은 전쟁을 향한 개인적 신념에서 모순과 허구를 드러내게 된다. 요란한 일련의 사건들보다 더 소란스러운 것은 주인공 빌리의 내면이다. 승전 여행 내내 영웅으로 떠받들어지며 대중을 감화시킬 어떤 제스처나 연설을 종용받지만, 정작 그의 내면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문제에 대한 대한 고민보다 삶과 죽음이라는 실존의 문제에 더 닿아있다. 이처럼 외부에서 벌어지는 이른바 시끌벅적한 사건들과 빌리의 내면의 불일치, 이러한 충돌이 소설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소설에서 전쟁은 소설적 배경이기보다 미국 사회를 투영하는 메타포 내지는 객관적 상관물이라 하는 편이 더 맞겠다. 인류의 비극,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투쟁하는 인간들의 실존적 내면 따위의 본질에는 무심한 채, 이해 득실만을 따져 '전쟁 영웅'이라는 좋은 소재를 이용하려는 다양한 인물 군상들이 풍자의 핵심이다. 이 인물 군상들은 미국 전체를 대변한다. 이들은 하나같이 전쟁이라는 행위에 용맹과 승리, 영광 따위의 허울 좋은 말들을 얹어 인류의 참상을 화려하게 포장하기에 급급하다. 브라보 분대의 행로는 어느 모로 보나 전쟁의 선전용임에 분명하다.

헐리우드로 상징되는 미국의 자본주의도 한 몫 거든다. 흥행성을 담보로 자본이 움직이고, 분대원들의 죽음과 생사를 가르는 전선은 자본 주의의 논리로 값이 매겨진다. 전쟁의 본질은 일찌감치 멀리 재껴버리고 자본의 논리로만 판단하는 헐리우드의 생태와 홀린 듯이 그 논리에 동조해가는 대원들의 모습이 씁쓸한 뒷맛을 남긴다.

미국적인 코드들의 현란한 연쇄와 비속어의 남발, 불쑥 끼어드는 불규칙적인 의식의 흐름은 소설의 생동감을 더한다. 무엇보다 잘 써진 소설이라는 느낌이 드는 것은 전쟁 구조담이라는 뻔한 클리셰를 교묘하게 비틀어 미국 사회 전반의 허위 의식을 폭로하는 도구로 활용했다는 점이다. 헐리우드의 국제적 흥행 덕분에 미국 우월주의에 서서히 세뇌 되어버린 사람들에게 통쾌한 한방을 날리는 소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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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이드 그린 토마토 민음사 모던 클래식 39
패니 플래그 지음, 김후자 옮김 / 민음사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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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시 베이츠가 출연한 동명의 영화로 더 유명한 패니 플래그의 소설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문학이 줄 수 있는 위로가 거창한 데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스릴과 긴장 같은 페이지 터너의 요소 없이도 페이지가 술술 넘어간다는 것은, 우리의 인생이 큰 상승과 하강의 반복이기보다 소소한 일상의 연쇄로 이루어져 있음을 알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해서 이 소설이 단조로운 일상에서 어떤 가치를 발견해 내는 슬로 라이프 소설(혹은 영화)의 플롯을 따르고 있다는 말은 아니다. 소설에는 한 사람이 겪을 수 있는 가장 큰 상실과 환희, 기쁨과 분노가 모두 들어있다. 그럼에도 독자의 시선을 끌어 당기는 것은 극적인 사건들보다 사소한 시골 마을의 마법같은 일상들이다. 마치 '프라이드 그린 토마토'라는 요리처럼 가장 소박한 재료와 조리법으로 최고의 맛을 내는 소설이다.

이 소설은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펼쳐지는 소소한 드라마의 모양새를 한 것 치고는 꽤 다양한 목소리를 담고 있다. 평화로운 일상에 돌연 찾아오는 어떤 사건들은 이 소설이 인간 개인사의 참혹한 비극의 플롯으로 읽히게도 한다. 나아가 영웅서사와 범죄 사건을 미스테리한 방식으로 드러내며 소설적 재미를 더한다. 담론을 조금 더 확장시키면 인종과 성, 장애를 바라보는 세상의 모든 편견에 항의하는 사회 비판 소설로 보아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소설을 기억하는 방식에 무엇보다 적합한 것은 것은 '휘슬스톱'이라는 시골마을 카페를 둘러싼 다양한 사람들의 연대의식이다.  

사실 이를 단순히 시골 마을의 넉넉한 인심과 공동체 의식의 향수처럼 낭만적으로만 보기에 소설의 배경은 단순하지 않다. 인종 문제가 심각하던 1920~30년대의 미국 남부의 시골 마을이 소설의 배경임을 상기한다면, 사람들의 평화로운 일상 뒤에 감추어진 위선의 추한 얼굴을  떠올리기란 어렵지 않다. KKK단이라는 섬뜩한 단체가 활동하고 거주할 집, 이용할 수 있는 열차의 칸 같은 것들이 피부색으로 결정되는 곳에서 모욕을 저항 없이 받아들어야만 했던 흑인들의 모습이 작품 곳곳에는 그려진다. 그럼에도 소설 속의 흑인들은 그들의 삶과 존재를 사랑하고 긍정한다. 사람들은 증오보다는 사랑을 위해 살아간다. 그들은 인간은 악한 것이 아니라 단지 약한 존재임을 안다.

부조리한 사회에서는 대개 전통적인 도덕관념이 파괴되고 새로운 형태의 모럴이 긍정된다. 소설 속에서는 활빈당의 홍길동을 연상시키는 절도도, 살인과 은폐, 방조까지도 통쾌한 모험으로 여겨진다. 현대를 살아가는 에벌린의  삶과는 달라도 너무 다르다. 1980년대의 에벌린에게는 어떠한 사고도 범죄 사건도 일어나지 않지만 그녀를 둘러싼 절망의 그림자는 오히려 더 짙게 드러난다. '혐오'라는 말을 참 쉽게 입에 담는 시대다. 차별과 편견이 핏속 깊이 흐르던 20년대 미국 남부의 마을 사람들보다 더 쉽게 남을 혐오하고 그들이 살아온 삶을 함부로 부정한다. 마치 그럴 권리가 있다는 듯이. 에벌린이 느끼는 환멸은 반 세기 전 휘슬스톱 카페의 소소한 이야기들로 인해 녹아 내린다. 사람에게는 캔디나 케이크의 달콤함보다 인정과 따스한 연대가 필요한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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